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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인간에게 원숭이를 죽일 수 있는 권리를 주었나 / 박제영
그러니까 대학 1학년 때였는데요 일반물리학 중간고사 시간이었는데요 문제가 다음과 같았는데요// y축으로 y높이의 전봇대가 서 있고, x축으로 x거리 떨어진 곳에 포수가 서 있다. 전봇대 위에 원숭이 한 마리가 앉아 있다가 실수로 떨어졌다. 떨어지는 원숭이를 맞출려면 포수는 몇 도 각도로 총을 쏘아야 하는가?// 정답이 아크탄젠트 y분의 x든, x분의 y든 중요하지 않았는데요 그래서 이렇게 써야만 했는데요 원숭이를 숲에서 쫓아낼 권리를 누가 주었나요 원숭이를 죽일 수 있는 권리를 누가 주었나요 떨어진 원숭이를 치료해서 다시 숲으로 돌려 보내야 하지 않나요// 0점을 받고 F학점을 맞았는데요 결국 공학도가 되는 것을 포기했는데요 20년이 지난 지금 아크탄젠트를 정확히 푼 친구들은 대학 교수도 되고 대기업 차장도 되고 잘 살고 있는데요 나란 놈은 마누라랑 새끼들 끼니 해결하는 것도 쉽지 않은 알량한 시인 나부랭이가 되었는데요 그래도 여전히 정말로 궁금한데요 누가, 인간에게 원숭이를 죽일 수 있는 권리를 주었나요//
전봇대 / 박제영
벽과 벽, 골목과 골목, 허공과 허공, 막다른 사이에는 언제나 그가 서있다/ 그는 빛과 예언이며 또한 어둠과 상처였으니, 모든 기도는 그를 통해 전송되었지만 그로 인해 혼선도 빚어졌다 일용할 양식과 일자리를 구해주기도 하였지만 장기매매와 성매매를 주선하기도 했다 길 잃은 아이를 찾아주었지만 아이의 가출을 부추기기도 했다/ 취한 자나 떠돌이 개가 오줌을 갈길 수도 있겠지만, 그는 여전히 막다른 곳에서 막다른 자들에게 신처럼 우뚝 서 있는 것이다//
우연 / 박제영
문상이란 죽은 자의 명복을 빌기보다는 남은 자와의 관계를 지불하는 의식, 부조금이란 사자가 지상의 마지막 톨게이트를 지날 때 지불해야 할 통행료를 대납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남은 자들의 슬픔은 그러나 결국 죽은 자에게 닿지는 못할 것이라는 것,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고 가속이 붙는다 시속 140킬로미터 어둠 속을 질주하는 것은 이 순간 무엇이지, 무엇, 퍽, 무인카메라의 후레시가 터지고 일순, 어둠 속에서 제 몸을 드러낸 과속의 덩어리// 갓길에 차를 세우고 담배 한대를 문다 꽃은 어디 가고 대궁만 남은 민들레를 보다가 낮게 엎드린 대궁을 흔들다가 문득 궁금해진다 풀 아래 뿌리쯤에서 이 순간 벌어지고 있을 우주운행에 관한 비밀들 - 벌을 잡아먹다 말고 도망치고 있는 스라소니거미와 제 몸을 말고있는 쥐며느리의 긴장에 대해서, 다음달 과태료를 내면 그 뿐일 이 우연한 사건에 대해서//
밥이나 드세요 / 박제영
시 시詩가 아니라 똥 시屎라야 맞다. 똥이란 남은 것이다. 잉여다 하지만 똥이 거름이 된다 거름이 기름진 밥을 만든다 그러니 똥과 밥과 시는 한 통속이다 모든 시는 똥시다 라고 쓰다가 밥 짓던 아내에게 함 봐라, 슬며시 건네주니// 뜸이 좀 덜 들었네요// 배시시 웃는 당신/ 식기 전에 어여 밥이나 먹으란다//
식구 / 박제영
사납다 사납다 이런 개 처음 본다는 유기견도/ 엄마가 데려다가 사흘 밥을 주면 순하디순한 양이 되었다// 시들시들 죽었다 싶어 내다버린 화초도/ 아버지가 가져다가 사흘 물을 주면 활짝 꽃이 피었다// 아무래도 남모르는 비결이 있을 줄 알았는데/ 비결은 무슨, 짐승이고 식물이고 끼니 잘 챙겨 먹이면 돼 그러면 다 식구가 되는 겨//
아내 / 박제영
다림질 하던 아내가 이야기 하나 해주겠단다// 부부가 있었어. 아내가 사고로 눈이 멀었는데, 남편이 그러더래. 언제까지 당신을 돌봐줄 수는 없으니까 이제 당신 혼자 사는 법을 배우라고. 아내는 섭섭했지만 혼자 시장도 가고 버스도 타고 제법 불편함 없이 지낼 수 있게 되었대. 그렇게 1년이 지난 어느 날 버스에서 마침 청취자 사연을 읽어주는 라디오 방송이 나온 거야. 남편의 지극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아내가 혼잣말로 그랬대. 저 여자 참 부럽다. 그 말을 들은 버스 기사가 그러는 거야. 아줌마도 참 뭐가 부러워요. 아줌마 남편이 더 대단하지. 하루도 안 거르고 아줌마 뒤만 졸졸 따라다니는구만. 아내의 뒷자리에 글쎄 남편이 앉아 있었던 거야.// 기운 내 여보,// 실업자 남편의 어깨를 빳빳이 다려주는 아내가 있다/ 영하의 겨울 아침이 따뜻하다//
전체관람가 / 박제영
- 아내는 고수가// 이번 시집 <식구>에 쓸 만큼 썼으니 이젠 자기 얘기는 쓰지 말란다/ 그랴 그랴 대답은 그리 했지만 글쎄다// 엊그제 일만 해도 그랬다/ 휴일이고 마침 두 딸도 놀러가고 해서 느긋하게 공포영화/ 한 편을 보고 있는데 어깨 너머로 아내가 한 마디 하는 거다/ - 그런 영화는 되도록 안 봤으면 좋겠는데…/ 내가 어린애도 아닌데 어떠냐 했더니/ - 당신 안에도 어린아이가 살고 있어요 그 아이의 마음이/ 다칠 수도 있어요// 이러니 어찌 아내 얘기를 하지 않으랴/ 아무렴//
거룩한 계보 / 박제영
식구들 먹다 남은 밥이며 반찬이 아내의 끼니다/ 제발 그러지 말라고 타박도 해보지만 별무소용이다// 버리고 하나 사라 얼마 된다고 빤스까지 꿰매 입나/ 핀잔을 줘도 배시시 웃는데야 더 뭐라 할 수도 없다// 지지리 궁상이다 어쩌랴/ 엄마의 지지리 궁상이 아버지 박봉을 불리고 자식 셋을 키워낸 것이니/ 어쩌랴 아내의 지지리 궁상이 내 박봉을 불리고 자식들을 키울 것이니// 그래서다 고백컨대/ 우리 집 가계家系는 대를 이은 저 지지리 궁상이 지켜낸 것이다//
사는 게 참 꽃 같아야 / 박제영
며느리도 봤응게 욕 좀 그만 해야/ 정히 거시기해불면 거시기 대신에 꽃을 써야/ 그 까짓 거 뭐 어렵다고, 그랴그랴/ 아침 묵다 말고 마누라랑 약속을 했잖여// 이런 꽃 같은!/ 이런 꽃나!/ 꽃까!/ 꽃 꽃 꽃/ 반나절도 안 돼서 뭔 꽃들이 그리도 피는지// 봐야/ 사는 게 참 꽃 같아야//
어머니는 참 무식하시다 / 박제영
어머니는 참 무식하시다.// 초등학교도 다 채우지 못했으니 한글 쓰는 일조차 어눌하시다. 아들이 시 쓴답시고 어쩌다 시를 보여드리면 당최 이게 몬 말인지 모르겠네 하신다. 당연하다.// 어머니는 참 억척이시다.// 17살, 쌀 두 가마에 민며느리로 팔려와서, 말이 며느리지 종살이 3년 하고서야 겨우 종년 신세는 면하셨지만, 시집도 가난하기는 매한가지요, 시어미 청상과부라 시집살이는 또 얼마나 매웠을까, 그래저래 직업군인인 남편 따라 서울 와서 남의 집살이 시다살이 파출부살이 수십년 이골 붙여 자식 셋 대학 보내고 시집 장가 보냈으니, 환갑 넘어서도 저리 억척이시다. 이번에 내 시집 나왔구만 하면, 이눔아 시가 밥인겨 돈인겨 니 처자식 제대로 먹여 살리고는 있는겨 하신다. 당연하다.// 무식하고 억척스런 어머니가 내 모국이다. 그 무식한 말들, 억척스런 말들이 내 시의 모국어다. 당연하다.// 지금까지 써 온 수백편 시들을 전부 모아 밤새 체를 쳤다. 바람같은 말들, 모래같은 말들, 다 빠져나가고 오롯이 어, 머, 니,만 남았다. 당연하다.//
엄마 / 박제영
묵은지가 그냥 되능 줄 아나/ 배추가 다섯 번 죽고나야 되능겨/ 뼈는 와 묵다말고 버리노/ 심줄까정 파먹어야 제 맛잉겨// 묵은지보다 더 늙은 우리 엄마/ 여자를 몇 번이나 죽여서 엄마가 되었을랑가/ 뼈라는 뼈 죄다 비어버린 우리 엄마/ 얼마나 더 파먹어야 나의 허기가 채워질랑가// 저, 저, 말 받는 뽄새 좀 보소/ 우리 아들 언제나 철이 들꼬// 뼛속 심줄까지 파먹어도 허기가 채워지지 않는,/ 마침내 다 먹어치워도 그 맛과 향을 잊지 못하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음식을 우리는 엄마라고 부르지// 맘마 먹자/ 아가/ 엄마 먹자//
어머니의 만성중이염 / 박제영
피고름 파낸 저 귀,// 거죽 뿐인,/ 뼈란 뼈 전부 녹고 삭은,// 안팎의 모진 욕이란 욕/ 수 십 년 묵혀 마침내 다 품은,// 터엉텅/ 빈// 북이다. 네 시간의 수술이 끝나고, 마취에서 막 깨어났는데, "바쁠텐데 왜 왔니" 하신다. 자식 셋 데리고 모질고 독한 사막의 건기를 그보다 모질게 그보다 독하게 건너온 저 늙은 북이 내 어미다.//
명옥씨 / 박제영
파꽃 같은 명옥씨, 냉이꽃 같은 명옥씨, 모진 세월 긴긴 세월 시들다 어느 봄이 꽃피는 계절이었던가 기억조차 시든 명옥씨, 더 지기 전에 이 봄날 가기 전에 봄꽃 같은 시/ 하나 써주고 싶었는데, 개나리꽃, 진달레꽃, 유채꽃, 함박꽃, 천지사방 꽃, 꽃, 꽃 꽃이 폈어요 애꿎은 꽃만 부르다 엄마의 봄날은 갔다 미안하다 명옥씨// 명옥씨, 꽃처럼 웃더라/ 우리 엄마, 꽃처럼 울더라//
新오동추야 / 박제영
그만 좀 뀌어대유 이불 바깥으로다 뀌든가 굳이 마누라 허벅지에다 뀌어대는 건 무슨 심보래유 빤스에 구멍은 안났나 물러 그러다 싸겠네 싸겠어/ 그깟 방구 좀 뀌었다고 시방 타박을 놓는겨? 내가 일부러 뀐 것도 아니고 나도 모르게 새는 방구를 어쩌라고 하루이틀도 아니고 오늘 따라 왜 그래 쌌나 모르것네/ 방구가 괜히 나올까 설마 나랏님 옆에서도 그리 뿡뿡 뀌어댈까 평소에 마누라를 방구만침도 못하게 생각하니 마누라 허벅지에 대고 붕붕 뀌어대는 거지/ 이 좁은 방구석에서 어따 대고 뀌든 그게 그거지 자다 말고 바깥에 뛰어나가서 방구를 뀌어야 되는겨/ 한 번도 아니고 무슨 따발총 갈기듯 붕붕거리니까 그러는규/ 아이구 남편 방구가 그렇게 드러운데 지금까지 어찌 살었나 모르것네/ 방구가 아니라 마누라를 업시보는 심보가 문제라는 거유 그 심보가/ 지청구 좀 그만혀 누구 심보가 더 못됐는지 모르겠구먼/ 오둥추야 달이 밝은데/ 에라 만득아, 에라 구신아/ 가리봉동 산2번지 두 칸짜리 반지하방은 오늘도 바람 잘 날 없네/ 사네 못 사네/ 오동동 오동동 방구타령이네//
여보 우리 / 박제영
사랑이라는 말/ 한 사람에게 한 사람의 일생을 거는 일, 그것이 사랑이란 걸/ 영원이라는 말/ 어느 누구도 어느 누구를 영원히 사랑할 수는 없다는 걸/ 이제야 알겠네// 그러니 여보, 우리/ 살아 있는 동안만 사랑하자/ 사랑하는 동안만 살아 있자/ 그렇게만 살다 가자// 사랑 없이 사는 일은 얼마나 궁색한 일이냐고/ 죽은 뒤의 사랑은 또 얼마나 쓸쓸한 일이냐고/ 되뇌다가 되묻다가 되새기느니// 여보, 우리/ 사랑이란, 그러므로 얼마나 절박한 일이냐//
아내의 서랍 / 박제영
1/ 아내에게는 서랍이 없다// 서랍은 잃어버린 세계의 비밀이 숨겨져 있거나 기억을 키우는 곳/ 가령 당신의 서랍 속 구석에 유년의 상처와 공증받은 유서 한 장 숨겨져 있고/ 딸의 서랍 속에, 버린 줄 알았던 낡은 인형 몰래 키우고 있듯이// 당신과 딸이 아내의 비밀인 줄은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2/ 아내의 서랍은 없다// 서랍은 목책 너머 은밀히 키우는 화원/ 가령 당신과 딸의 서랍 속에는 이끼가 자라고 있을 것이다/ 언제고 꽃 필 때를 기다리면서// 당신과 딸이 아내의 서랍인 줄은 나중에야 알게 되겠지만//
수작酬酌/ / 박제영
당신 왜 나랑 결혼했어?/ 싱겁기는, 당신 수작에 넘어간 거지 머// 아내랑 농을 주고받다 생각하니// 수작이란 그 말/ 잔을 섞어 수작이요/ 말을 섞어 수작이요/ 마침내 몸을 섞으니 수작이라/ 수작이라는 그 말, 듣고보니/ 얼마나 설레는 말이냐/ 수작 한 번으로 아내를 갖고/ 수작 두 번으로 아이 둘을 가졌으니/ 수작이라는 그 말/ 얼마나 신통방통한 말이냐// 그래, 당신 말이 맞다!/ 수작에 넘어갔다는 그 말도 맞고/ 딴 데서 수작 걸지 말라는 그 말도 맞다!//
그 여자, 문을 열지 않는다 / 박제영
돌아갈까/ 기다려야 하나// 당신의 마흔은/ 이제/ 그 경계에서/ 흔들리는데// 여전히/ 그 여자, 문을 열지 않는다// 처음부터/ 빈 집이었을지도 모르는/ 모르는 그 여자, 밖에/ 모르는 당신// 관양동 1376번지 백합타운 202호/ 그곳에 마흔의 아내가 산다//
도희 / 박제영
1/ 딸이 운다 물수제비 뜨다 말고 딸이 운다// 가라앉아요 돌이 자꾸만 가라앉아요/ 달처럼 이쁜 도희가 운다// 돌아앉은 작은 등에 파르륵 파문이 인다// 2/ 이리 온 아가, 아비 등에 업히렴// 조금 멀리 가고 조금 오래 뜰 뿐이야/ 지금이야 너를 업고 물수제비처럼 얕은 내를 건너고 있지만/ 수심은 깊어질 것이고 아비도 끝내는 가라앉을 것이야/ 강은 잠시 길을 내어줄 뿐, 돌멩이가 강을 건널 수는 없단다//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돌처럼 둥글게 도희가 잔다/ 아비 등 위에 새근새근 파문을 새긴다// 3/ 내가 뜬 물수제비가 나를 흔든다, 오래전 내가/ 가라앉은 아버지를 흔든 것처럼//
소독차 혹은 부전여전에 관한 이야기 / 박제영
술 먹자는 거 뿌리치고 모처럼 일찍 귀가했더니 아내와 도은이 닭똥같은 눈물 흘리고 있는데, 도은이는 소독차 따라갔다가 그만 길을 잃어버린 줄 알았다고, 아내는 그만 딸내미를 잃어버린 줄 알았다고, 엄마는 엄마대로 딸은 딸대로 나를 보더니 크게 우는 것인데// 일곱 살 소년은 그것을 구름차라고 믿었다 신작로를 따라 동구 밖까지 뭉게뭉게 흰 구름을 좇아다녔다 하루는 길고 붉게 물든 서산 노을을 따라 마침내 구름이 희미해질 때까지 따라가다 그만 저녁때를 놓쳤는데 엄마는 무에 그리 화가 났는지 회초리를 쳤다 소년도 엄마도 닭똥 같은 눈물 뚝뚝 흘리다 마실가신 아버지 돌아와서야 한바탕 소란이 끝났던 것인데//
남탕에 가보면 안다 / 박제영
세상의 모든, 아비들이 실은/ 꼭꼭 숨겼던, 자지들이 죄다/ 저리도 속절없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뻣뻣하게 거드름 피운 것도 생각해보면/ 가늘고 무른 속이, 흔들리는 제 뿌리가/ 드러날까 두려웠던 것// 세상의 딸들아/ 세상의 아비들은 다만/ 살기 위해 딱딱해져야 했던/ 무골(無骨)의 가계(家系)를 숨기고 싶은 것이다//
화투和鬪 / 박제영
점에 백 원짜리 밤새 쳐봐야 따도 일이만 원이요 잃어도 일이만 원이지만 화투판이란 게 본디 걸린 판돈이 십 원이든 백 원이든 감정조절이 그리 녹록한 게 아니어서 별의별 일이 다 벌어지기 마련이라 어젯밤도 그랬다 “아빠 빨리 죽어”, 그러니까 여동생이 자기 패가 좋으니까 아빠는 광이나 팔고 한 판 쉬시라고 한 것인데, 아버지 갑자기 화투판을 엎으며 “죽으라니, 그게 어디 애비한테 할 소리냐, 못된 년 같으니라고”, 두어 시간 내내 선 한 번 못 잡고 잃기만 했으니 속이 상하셨던 탓일텐데, 마흔 살 넘은 딸도 울고 일흔 살 넘은 아버지도 울고 그렇게 판이 깨졌던 것인데, 오늘 아침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아버지 어머니 나 그리고 여동생 다시 판을 깔고 앉았더니 “어제 그리 난리치고도 또 화투냐” 형이 한 마디 던지는 것인데, 아침상 준비하던 두 며느리 그만 웃음보 터뜨리니 둥근 웃음이 방안 가득 번지더라//
모란 / 박제영
쓰잘데기 없이 또 김지미가 와부렸어 형님 가지셩/ 육목단 열끝을 삼촌은 늘 김지미 궁뎅이라 불렀지라/ 어느 날 궁금해서 물었더니/ 예쁘면 뭐 하냐 그림의 떡인데 써먹을 데가 없는 걸/ 당대 최고의 여배우가 화투판에서 육목단 열끝이 된 사연이지라// 나이가 들면서 나도 제법 고스톱을 치게 되었는데/ 육목단 열끝이 들어올 때마다 당대의 여배우 이름을 부르곤 했지라/ 유지인이 와부렸네 장미희가 와부렸어/ 정윤희, 이미숙, 강수연, 최진실, 심혜진, 전도연/ 당대의 여배우들이 육목단으로 많이도 피고 졌지라// 모란을 따라 삼촌의 봄날은 갔지라/ 그게 무에 대수간/ 갈 테면 가라지라// 미자가 왔네 옜다 니 해라/ 어제는 순자가 피었다 지고/ 오늘은 영자가 피었다 지고/ 동네 술집 마담들이 화투판에서 육목단 열끝으로 피고 지면// 모란을 따라 나의 봄날도 가겠지라/ 무에 대수간/ 갈 테면 가라지라//
작약 / 박제영
구례 촌놈이 서울놈들 변호를 하고 있으니/ 이만 하면 출세한 건데/ 가슴팍은 왜 맨날 지랄맞은지 모르겠다/ 꽃이나 심어야지/ 산수유 핀 고향으로 돌아가야지/ 술만 걸치면 그놈의 꽃을 입에 달고 살던 덕구형/ 그해 유월이었나/ 아내와 딸을 꺾어버린 뺑소니범을 찾겠다며/ 덕구형이 사무실을 닫고 훌쩍 자취를 감췄던 게// 오년 만에 편지가 왔다/ 봉투 속엔 달랑 사진 한 장뿐이다/ - 유월에 구례 한번 내려와라 작약 보러 와라/ 색시도 새로 구하고 덤으로 예쁜 딸도 하나 얻었다/ 작약 밭에서 덕구형이 웃고 있다/ 작약 같은 몽고 여자와 산수유 같은 이국의 소녀가/ 함박 함박 웃고 있다//
해바라기 / 박제영
일년 중 가장 뜨거운 날, 하루 중 가장 뜨거운 시각, 언제나 그 순간이었어// 빛은 산란을 일으키고 신기루인양 당신을 보았지 사랑을 찾아 우, 우, 숲과 초원을 헤매고 있더군 동굴 속 마녀가 비밀을 말해주는 것도 보았어 "기린아, 네 사랑은 숲 너머에 있구나" 숲의 덩굴이 너무 높았던 당신은 모가지를 늘이고 늘였지 우, 우, 울음은 끝내 삭정이가 되고 불이 되고 불꽃이 타올라 활 활// 오, 해바라기/ 당신의 가늘고 긴 목을 사랑해/ 덩굴너머 노랗게 타오르는 그, 가늘고 긴//
능소화 / 박제영
요선동 속초식당 가는 골목길 고택 담장 위로 핀 꽃들, 능소화란다 절세의 미인 소화가 돌아오지 않는 왕을 기다리다가 그예 꽃이 되었단다 천년을 기다리는 것이니 그 속에 독을 품었으니 함부로 건드리지 말란다 혹여 몰라볼까 꽃핀 그대로 떨어지는 것이니 참으로 독한 꽃이란다 담장 아래 꽃 미라들, 천년 전 장안에 은밀히 돌았던 어떤 염문이려니, 꽃핀 채로 투신하는 저 붉은 몸들, 사랑이란 저리도 치명적인 것인가// 내 사랑은 아직 이르지 못했다 順伊도 錦紅이도 순하고 명랑한 남자 만나서 아들 딸 낳고 잘 살고 있다 아내는 내 먼저 가도 따라 죽진 않을 거란다 끝까지 잘 살 거란다 다행이다 이르지 못한 사랑이라서 참 다행이다//
냉이를 엄니꽃이라 부르는 이유 / 박제영
나이 오십에/ 냉이가 나생이로 불린 까닭을 처음 알았네// 이 작고 하얀 꽃을/ 밥풀꽃이라 불러주어도 됐을 것을/ 난쟁이꽃이라 불러도 좋았을 것을/ 사람들은 그냥 나물이라고 불렀다네/ 꽃이 아니라 나생이라고 불렀다네// 나이 오십에/ 울 엄니도 여자였다는 것을 처음 알았네// 꽃시절, 꽃 피는 시절, 꽃을 버려야 했던/ 늙은 나생이 같은 울 엄니/ 울 엄니가 명옥이었다는 것을/ 곱고 예쁜 꽃이었다는 것을/ 나이 오십이 되어서야 알았네//
엉겅퀴 / 박제영
텅 빈 숲 기슭에/ 엉겅퀴 홀로 지고 있다// 지난 계절,/ 가시를 세우고 독을 품은 것도/ 제 설움을 가리고 싶었을 뿐이라며// 보라,/ 보랏빛 한 설움이 지고 있다// 한 생을 꼬박 앓고도/ 꽃으로 스미지 못 한 당신,/ 그리고 나// 보라,/ 엉겅퀴 하얗게 지고 있다//
동백숲 / 박제영
오동도 사월 동백 붉은 숲 오르다 보면/ 신 벗고 걷는 길을 만난다/ 촘촘히 박힌 형형의 돌 색색의 자갈 위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기우뚱거리는/ 손에 들린 신들도 덩달아 흔들리는/ 맨발의 풍경을 만난다// 지난 밤에 친구놈이 오동도로 떠났다/ 신을 벗고 사월 붉은 동백 숲으로 들어갔다/ 영안실 412호/ 새벽 거나하게 취한 우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기우뚱거렸다/ 더러는 서로의 신이 바뀐 줄도 모른 채/ 붉은 동백 숲을 빠져 나왔다//
나(무)論 / 박제영
지금/ 꽃 핀 나(무)는 생식중이다/ 몇 백 년 바람이 불면, 바람 끝 그 곳, 황무지에도 숲이 들어설 것이다// 마침내/ 꽃 진 나(무)는 허공이다/ 몇 백 년 바람이 불고, 울울 창창한 숲도 황무지로 돌아갈 것이다//
그런 저녁 / 박제영
바람이 지나간 후에도 시누대가 저리 흔들립니다/ 새가 날아간 후에도 댓잎이 저리 흐느낍니다/ 내 생애 전부를 흔든 사람/ 내 생애 전부를 울린 사람/ 대숲 사이로 옛사랑이, 옛 문장이 스미어/ 붉은 노을로 번지는 그런 저녁이 있습니다// 모처럼의 산책이라 시 한 수 읊은 것인데/ 그 사람이 누구냐고 도대체 옛사랑이 누구냐고/ 그 사람이 자기인 줄도 모르고/ 옛사랑이 자기인 줄도 모르고/ 노을 사이로 당신의 얼굴이 노을처럼 붉어지는/ 붉어도 좋은 그런 저녁이 있습니다//
이중모음 / 박제영
이중모음을 발음하지 못하는 그의 세계는 중학교 국어시간에 자기가 대포로 발포하겠다고 했을 때부터 늘 세개였지만 세계는 여전히 하나였다 어른이 되었지만 그의 겨울은 늘 거울 속에서 하얀 눈이 내렸고 그의 여름은 어름 속에서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는 언제나 여자를 좋아했지만 만나는 여자마다 그의 어자를 싫어했다 그는 마침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세개가 싫어 거울이 싫고 어름이 싫고 어자가 싫어//
비내리는 오후 세 시 / 박제영
그리움이란/ 마음 한 켠이 새고 있다는 것이니/ 빗속에 누군가 그립다면/ 마음 한 둑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니// 비가 내린다, 그대 부디, 조심하기를/ 심하게 젖으면, 젖어들면, 허물어지는 법이니// 비 내리는 오후 세 시/ 마침내 무너진 당신, 견인되고 있는 당신// 한때는 ‘나’이기도 했던 당신/ 떠나보낸 줄 알았는데// 비가 내리는 오후 세 시/ 나를 견인하고 있는 당신//
춘천 / 박제영
바깥의 누군가는 산과 호수와 나무와 새와 바람과 사람이 저마다 안개를 키운다고 생각하겠지만, 또 누군가는 안개가 산과 호수와 나무와 새와 바람과 사람 모두를 키운다고 생각하겠지만, 춘천에 산다는 것은 마침내 안개가 되는 것이다 산이 산을 지우고 호수가 호수를 지우고 나무와 새와 바람이 나무와 새와 바람을 지우고 사람이 마침내 사람을 지우고 안개가 되는 것이다 춘천은 가장 안쪽의 풍경이다//
겨울, 춘천 / 박제영
소양강의 서리꽃을 따라가면 닿을 수 있을까/ 의암호의 안개눈을 따라가면 닿을 수 있을까/ 춘천의 겨울, 그것은 휘발된 내 청춘의 마지막 패였다/ 그곳이라면 실패한 모든 문장들을 지울 수 있으리라/ 막다른 골목에서 겨울 경춘선에 무작정 올라탔던 스무 살/ 간절의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고 오십의 초입에 들어섰지만/ 나는 아직도 춘천의 겨울에 닿지 못했다/ 의암호에 내리는 안개눈은 춘천의 겨울이 아니다/ 소양강에 피어난 상고대는 춘천의 겨울이 아니다/ 낡고 통속한 문장 앞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한 채/ 나의 詩는 아직도 춘천의 겨울에 닿지 못했다//
춘천, 오 봄내여 / 박제영
고요하던 춘천의 산과 호수와 하늘이 들썩거린다/ 보라/ 춘천의 하늘/ 춘천의 땅/ 춘천의 호수에서/ ADVERTISEMENT/ ADVERTISEMENT/ 세계의 젊은이들이 젊은이의 세계를 펼치기 위해/ 힘과 열정, 끼와 패기의 자웅을 겨루기 위해/ 지구촌의 젊은이들이 오고 있다/ 보라/ 지구촌 영웅호걸들의 용쟁호투를 보기 위해/ 춘천으로 춘천으로/ 세계시민들이 오고 있다/ 춘천, 오 봄내여!/ 고요하던 춘천의 산과 호수가 들썩거린다/ 오매불망 기다리던 축제, 청춘의 향연이 시작되었다/ 세계시민이 함께 노래를 부르고/ 지구촌 영웅호걸들이 덩실덩실 함께 춤을 추면/ 춘천 춘천 춘천 젊음이 솟구쳐 흐르리라/ 바야흐로 춘천은 축제의 계절이니/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 춘천에 가면 비로소 알게 되리라/ 나이도 성별도 피부도 국적도 다르지만/ 함께 꾸는 꿈과 사랑/ 함께 뛰는 열정과 용기/ 춘천에서 비로소 하나가 되리라/ 그대여, 오라/ 세계인들이여, 오라/ 젊음의 오아시스, 춘천으로//
* ‘봄내’는 춘천(春川)을 한글로 풀어 쓴 것.
진부 / 박제영
미시령 터널이 생기고부터 진부령은 진부해졌다/ 셈이 빠른 도시인들은 구태여/ 굽이굽이 진부를 돌아 넘지 않는다// 초고속 인터넷이 생기고부터 느린 단어들은 진부해졌다/ 약삭빠른 젊은 시인들은/ 꽃과 구름, 어미와 누이를 돌아 넘지 않는다// 귀농 삼 년, 귀향 삼 년의 농부 둘과 시인 하나/ 동갑내기 초짜 셋이서 의기투합 진부를 넘는다/ 고갯마루 길섶 넝쿨 위로 구불구불 칡꽃 향기 가득하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그만, 다/ 취했다//
만주 / 박제영
만주 땅이 얼매나 먼지 아나/ 열여덞에 그니를 따라나설 적엔/ 가심이 얼매나 뛰던지/ 북망산도 가자면 갔으라나/ 천릿길이 오릿기도 안 됐니라/ 만주 땅이 얼매나 먼지 아나/ 만주서 배따시게 해주겠다던 말/ 다 거짓부렁이었니라/ 얼어죽을 나랏일! 무슨 혁명을 하겠다고/ 어린 색시와 세 살배기 딸만 남겨놓고/ 북망산으로 즈그 혼자 훌쩍 가버렸니라/ 만주 땅이 얼매나 먼지 아나/ 세 살배기 업고 넘는 거먹뵈는 얼매나 높던지/ 세 살배기 업고 건너는 압록강은 얼매나 깊던지/ 세 살배기 느그 어매 아니었으면/ 첩첩 뫼를 우에 넘었을깐/ 굽이굽이 시커먼 강을 우예 건넜을깐/ 만주 땅이 얼매나 먼지 아나/ 니도 사내라고 혁명한다 할끼가/ 큰일 하겠다고 처자슥 버리믄/ 사내는커녕 지랭이보다 못한기라/ 할미 말 맹심 또 맹심해야 한데이//
안녕, 오타 벵가 / 박제영
1906년 뉴욕의 브롱크스 동물원 사장은 모처럼 붐비는 사람들로 희희낙락 콧노래를 불렀어. 특별히 거금을 들여 데려온 동물이 시쳇말로 대박을 터뜨린 것이지.// 원숭이 우리 앞 팻말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어./ <나이 24세, 키 150㎝, 몸무게 45㎏, 인간과 매우 흡사함>// 난생 처음 본 동물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던 아이들은 이내 빵 부스러기 과자 부스러기를 던져주며 좋아했어. 물론 몇몇 어른들은 기대했던 눈요깃거리에 못 미친다며 야유와 욕설을 내뱉기도 했지만 말이야.// 1904년 벨기에군이 콩고를 침략했을 때, 콩고 원주민의 시체가 산을 이루었을 때, 스물네 살의 피그미족 청년 오타 벵가도 비극을 피할 수는 없었어. 일가족이 학살당하는 생지옥에서 간신히 살아남았지만 결국 붙잡혔고 노예 상인에게 팔렸지. 이후 미국 세인트루이스의 만국박람회와 뉴욕의 자연사박물관에 전시되었다가 뉴욕 브롱크스 동물원으로 팔려와 원숭이 우리에 전시된 것이었어.// 1910년 인권운동가들의 항의로 풀려나기는 했지만, 1916년 벵가는 권총 자살로 서른네 해라는 짧은 생을 마감했지.// 믿을 수 없다고? 거짓말 같다고?// 그렇다면 봐,/ 저기 오타 벵가가 지나가잖아./ 오타 벵가가 웃고 있잖아.// 안녕, 오타 벵가!//
폐경기의 여자 / 박제영
바다의 격랑과 사막의 고난을 제 피로 건너온 여자/ 이윽고 지상의 모든 경經을 폐廢한 여자/ 스스로 경전이 된 저 여자/ 어머니의 어머니인/ 아내의 아내인/ 딸의 딸인/ 여 자/ 딸의 딸인/ 아내의 아내인/ 어머니의 어머니인/ 스스로 경전이 된 저 여자/ 이윽고 지상의 모든 경經을 폐廢한 여자/ 바다의 격랑과 사막의 고난을 제 피로 건너온 여자//
백여시 간나 / 박제영
옵빠 옵빠야~/ 그놈의 옵빠 소리 때문이었니라// 매창이도 울고 가고/ 황진이도 쌈 싸먹을 백여시 간나/ 옵빠 옵빠~ 그럼시롱/ 아흔아홉 개 꼬랭이 흔드는디/ 배길 재간 있간/ 그 간나 옵빠 소리에 그니가/ 니 할배가 홀리도 엥간히 홀린기라// 니도 단디해야 하니라/ 애편네라고 히피보믄 쫌팽인기라/ 조강지처 홀대하면 짐생인기라// 옵빠는 풍각쟁이야~/ 옵빠는 심술쟁이야~// 하긴 니 할배 뭐라키도 어렵지/ 여자인 내가 들어도/ 얼매나 간드러졌는지 모르니라// 그 간나 백여시/ 입때껏 살아 있기는 하나 모르겠다//
가리봉동 61년 소띠 마귀순 씨 / 박제영
아줌마, 8번에 갈비 2인분 추가요!/ 아줌마, 뭐해 9번에 냉면 네 그릇이요!/ 아줌마, 빨리 좀 닦아요 퇴근 안 할 거예요?// 그놈의 아줌마 소리,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 되어서야/ 야간 식당 일을 겨우 끝낸 귀순 씨/ 현관문을 열기가 무섭게/ 배고파 밥 줘/ 남편은 오늘도 밥타령이다// 여편네가 귀꾸녕이 막혔나/ 밥 좀 달라니까// 에라 화상아/ 에라 만득아/ 차라리 귀신이나 되어서/ 저 만득일 잡아묵을까 싶다가도/ 불쌍한 저 만득이 내 없으면 또 어찌 살까 싶은 것이니// 여자가 공부하면 팔자가 드센 법이다 귀순이 니는 대학 같은 건 꿈도 꾸지 말고 그저 남동생들 뒷바라지만 잘하면 된다 쫄딱 망해먹은 아버지, 망할 놈의 유언, 그래도 아버지는 아버지요 유언은 유언이라, 일찌감치 대학 포기하고 여상을 졸업한 마귀순 씨 은행에 취업해서 가장 노릇 하며 남동생들 대학까지 보냈는데, 싫다 해도 너 없인 못 산다며 일 년을 쫓아다닌 그 뚝심에, 탄탄한 중견 기업의 대리에, 이만하면 되었다 싶어 가만덕 씨랑 결혼해서 아들딸 낳고, 삼십여년 아무 탈 없이 잘 살았다는데,// 가리봉동 소갈빗집에서 불판을 닦고 있는 61년 소띠 마귀순 씨는 어쩌다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걸까// 아줌마, 아줌마, 그놈의 아줌마/ 언놈이 꿈속에서도 귀순 씨를 부르나/ 아줌마 없다//
내 젖이 참젖이여 / 박제영
횡계사거리 국밥집 두 아지매/ 부산에서 어찌어찌 흘러서 이곳 횡계까지 왔는데/ 고향붙이라고 언니동생으로 산 게 이십 년이라/ 어찌나 서로 살가운지/ 친자매도 그런 친자매 없고/ 부부도 그런 부부 없는 기라/ 과부 아지매들 입심은 또 얼매나 찰진지/ 국밥보다 두 아지매 이바구 들으러 갈 때도 있어야/ 어제 낮에도 그랴/ 국밥 하나 말아갖고 와서는/ 아고 동상, 궁상맞게 혼자 먹어서야 쓰나/ 두 아지매 떡 하니 밥상머리에 앉더라구/ 아예 내 국밥을 안주 삼아 주거니 받거니/ 소주 세 병을 게 눈 감추듯 해치우더니/ 불콰해진 두 아지매 그러는 거 아니겠어/ 동상, 오늘 함 주까?/ 동상, 그라믄 내도 주께/ 저년 젖은 물젖이니까 보도 말어 쪼매해도 내 젖이 참젖이다 안카나/ 백주대낮에 두 아지매 젖을 훌러덩 까보이는데/ 환장하겠더라고/ 암만? 정히 못 믿겠거든 횡계사거리 국밥집 가보더라고//
애월, 독한년 / 박제영
아비 없이 태어난 명자는 열여덟 살 꽃 같은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간장을 먹고 절벽을 구르고 약도 먹고 별의별짓을 다했는데 죽지도 않더라 독한년, 독한년, 술에 취한 날이면 어미는 독한년을 입에 달고 살았지만 식구들 모두 빨갱이로 몰려 죽고 혼자 남은 어미가 어찌 살았는지 아니까 어미도 스스로 징한년이 되어 살아남은 것을 너무 잘 아니까 원망은 없다 했습니다// 먼 남쪽 바다, 涯月의 석양이 왜 핏빛이 되었는지 알려주었던, 박용래와 이용악과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사랑했던, 애월의 모래밭에서 조르바와 춤을 추길 좋아했던, 마침내 애월에 몸을 던져버린 독한년, 열여덟 살 명자는 이제 가고 없습니다// 먼 훗날 어느 가을 호젓한 오솔길을 홀로 걸을 때 혹여 코스모스 피었거든, 그 붉은 잎에 박용래의 코스모스 한 구절 적어 바람에 날려 보내주면 그것으로 좋겠다던, 독한년 명자, 삼십 년 전 명자가 문득 붉어지는 가을이 있습니다//
남녀체질백서 / 박제영
수컷 잠자리의 비행속도는 시속 58km이다 그러나 비공식 자료에 따르면 등에가 제일 빠르다 등에 수컷이 암컷을 좇아갈 때의 비행속도는 무려 시속 1백45km이다// 사람으로 말하자면 남자는 속력에서 여자는 지구력에서 상대적 우위를 갖고 있다 그러니까 남자의 속력은 종의 기원에 속하고, 여자의 지구력은 연애의 기원에 속한다// 아버지의 늙은 속력은 속절없이 무디었으나 어머니의 어린 지구력은 뜻밖에 끈질겼으니 내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종의 기원을 뛰어넘은 일생일대의 사건이다//
환장 / 박제영
니 아나 자식 죽으면 얻다 묻는 줄 아나/ 느그 아제를 이 할매가 얻다 묻은 줄 아나/ 어미 뱃속에 묻는 기다 할매 뱃고에 묻었네라/ 자식 앞세우믄 그래서 환장허는 거네라/ 뱃속에서 자석이 썩어가는데 창자가 남아나겠노/ 자석이 뒤집어논 오장육부가 우찌 말짱하겠노/ 느그 아제 그 잡것이 여즉도 지랄하니 환장허니라/ 할매는 환장헌 년이네라 뱃속에 난장이 섰네라//
사는 게 지랄 맞을 때면 풍물시장에 간다 / 박제영
풍물시장에 가면/ 이놈은 녹슨 쇠 같고 저년은 낡은 징 같고/ 이놈은 해진 북 같고 저년은 흰 장구 같고/ 하여튼 고물 같은 연놈들이/ 초저녁부터 거나해서는/ 쇠 치고 징 치고 얼씨구 절씨구/ 북 치고 장구 치고 지화자 좋을씨구/ 신명 나게 풍물을 치는 거라/ 박 형도 한 잔 받어/ 사는 게 뭐 있남/ 쇠 치고 한 잔 징 치고 한 잔/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면/ 왕년에는 말이야 왕년에는 말이야/ 왕이었던 시절 안주로 씹다 보면/ 쇠가 되었다가 징이 되었다가/ 암깽 수깽 얽고 섥고/ 북이 되었다가 장구가 되었다가/ 묶고 풀고 으르고 달래고/ 왕이나 거지나 밥 먹고 똥 싸고/ 얼씨구 절씨구 지화자 좋을씨고/ 그랴 사는 게 뭐 있남/ 사는 게 참 지랄 맞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풍물시장에 간다//
가을에는 / 박제영
가을에는 잠시 여행을 떠날 일이다/ 그리 수선스러운 준비는 하지 말고/ 그리 가깝지도 그리 멀지도 않은 아무데라도// 가을은 스스로 높고 푸른 하늘/ 가을은 비움으로 써 그윽한 산/ 가을은 침묵하여 깊은 바다처럼/ 우리 모두의 마음도 그러하길// 가을은 혼자서 여행을 떠날 일이다/ 그리하여 찬찬히/ 가을을 들여다 볼 일이다//
진화論 / 박제영
정작/ 견딜 수 없는 것은/ 마땅히 견딜 수 없어야하는 것들에 대해/ 가령/ 저, 매연에 대해서/ 저, 광기의 요설에 대해서/ 저, 폭력에 대해서/ 저, 저, 저, 모든, 毒을 품은 것들에 대해서/ 그것을 견딜 만큼, 충분히, 몸의 진화가 이루어졌다는 것// 퇴화된 날개의 비둘기들이 쥐새끼,처럼/ 쓰레기를 뒤지고 있듯이 그리하여/ 살아남았듯이 그렇게 살아남았듯이//
저승길이 환해질 때 / 박제영
덤불 우거지고 잡풀 웃자라/ 이 골이 저 골 같고 저 골이 이 골 같아서/ 도무지 찾을 길 없는 길을/ 아버지는 어찌 알고 저리 수이 오르시는가// 덤불 우거지고 잡풀 웃자라/ 표식도 없고 비석도 없어/ 도무지 경계 없는 무덤을/ 아버지는 어찌 알고 저리 수이 찾으시는가// - 아버진 어찌 그리, 길도 무덤도 잘 찾으요?/ - 늙으면 저승길이 환해지는 법이다// 우거진 덤불과 웃자란 잡풀들/ 아버지, 낫으로 베어낼 때마다/ 조금씩 환해지는/ 알몸의 길이여/ 알몸의 무덤이여//
시인의 말 / 박제영
비굴[卑屈]/ 자기 검열의 벽에 막혀서,한 줄의 시도 쓰지 못하고 있는, 어떤/ 치열한 시인을 생각하면서, 가가스로 비굴을 견디는 중이다.// 비참[悲慘]/ 천 길 벼랑에서 뛰어내리고 있는, 막다른 철벽을 맨몸으로 부수고/ 있는, 어떤 처연한 삶을 생각하면서, 가까스로 비참을 견디는 중이다.// 사기[詐欺]/ 마침내 붕괴될 집을 또 한 채 지어놓고, 튼튼하다며 세상에 없던/ 집이라며 당신에게 교묘한 분양 선전 찌라시를 보내는 중이다.//
시답잖은 시론 / 박제영
시는 詩다. 말로 절을 짓는 거다 잘못 지으면 땡중 된다 이 말이였다// 시는 侍다 사람이 절이고 사람이 부처다 그러니 모셔라 이 말이였다// 시는 市다 구중궁궐이 아니라 책상머리가 아니라 시는 저잣거리에 있다 이 말이렸다// 시는 視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걸 보라는 거다 탄광의 카나리아처럼 잠수함의 토끼처럼 세상이 무너지고 가라앉고 있는 것을 먼저 보고 짖어라 이 말이렸다// 시는 矢다 짖어도 안 되면 아예 쏴라 세상 무너뜨리고 망가뜨리는 놈들 가슴팍에 화살을 팍팍 꽂아라 이 말이렸다// 이상의 것을 무시하면 어떻게 된다고?// 시가 屎 된다 된똥도 아닌 묽은똥 된다 이 말이렸다/ 아예 尸가 되는 수도 있다 시쳇말로 죽은 시가 된다 이 말이렸다//
詩창작 강의 / 박제영
제1강// 너무, 빠르거나, 너무, 느린, 너무, 높거나, 너무, 낮은, 너무, 맑거나, 너무, 흐린, 너무, 뜨겁거나, 너무, 차가운, 너무, 쓰거나, 너무, 단, 너무, 밝거나, 너무, 어두운, 한계적 부사 너무 앞에 서면 너무 쉽게 한계를 드러내고 마는, 몸의, 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 엄연한 존재를 가로막고 있는, 감각의 한계, 말과 글, 모음과 자음, 물과 불, 대지와 공기, 빛과 어둠, 사람과 짐승, 사람과 신, 사이의, 원래의 주인인, 그림자를, 뉘앙스를, 가로막고 있는, 벽을 부숴버리는 일, 빙산의 뿌리를 볼 수 있을 때까지, 알량한 감각의 비계를 파내버리는 일.// 우리는 모두 발가벗고 서로의 눈과 귀와 혀의 구석구석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한번도 닿지 못했던 감각의 뿌리가 조금씩 젖어들었다.//
제2강// 식어버린 네 안의 도가니에 다시 불을 지피는 일이니, 상상의 거푸집에 뜨거운 쇳물을 붓는 일이니, 응시하라. 사물과 사태에 내재한 질료성, 말하자면 씨앗이 품고 있는 숲의 미래, 혹은 쇠가 품고 있는 흙의 기억, 그 모든 가능태가 스스로를 드러낼 때까지. 더 응시하라. 딱딱하고 단단했던 그것들이 풀어져 물렁물렁해질 때까지. 부글부글 끓을 때까지. 상상하라. 중력을 이긴 물이 나무의 정점을 오르듯, 뜨거운 쇳물이 상상의 절정으로 치오를 때까지. 더 상상하라. 그리하여 그것들이 스스로 육화(肉化)할 때까지.// 우리는 미친 것처럼 홀린 것처럼 춤을 추었다. 우리는 모두 물과 불과 흙과 공기가 되어 마침내 텅 빈 우주를 떠다녔다.//
제3강// 명사 20~24개, 동사 24~30개, 부사 10~12개, 형용사는 가급적 넣지 않는 게 좋지만 경우에 따라 3~6개, 그리고 숙성 발효시킨 생각 24그램과 그늘에서 2주 이상 건조시킨 감정 12그램을 준비할 것.// 명사, 동사, 부사를 숙성 발효시킨 생각 12그램과 함께 섞어 볼에 넣고 중탕으로 열을 가하며 휘핑한다. 거품이 생기는 것을 확인하면서, 온도가 36.5℃가 될 때까지 계속 휘핑한다. 36.5℃가 되면 숙성 발효시킨 생각 나머지 12그램을 넣고, 중탕에서 내려 열이 식을 때까지 휘핑을 계속한다. 그 다음에 온도가 5℃ 아래로 떨어지면 그늘에서 건조시킨 감정 12그램을 넣고 거품이 단단해질 때까지 휘핑을 계속한다. 손가락으로 눌러도 견딜 수 있을 만큼 거품이 단단해졌으면 드디어 완성이다. 취향에 따라 상황에 따라 장식용으로 형용사 몇 개 올려놓아도 된다.// 이 요리의 맛은 재료의 혼합비와 온도에 따라 달라지므로 그에 대한 감각을 키우는 것이 좋다. 생각은 충분히 숙성 발효시킨 것을 써야 한다는 것과 그늘에서 말린 감정을 써야 한다는 것도 잊지 말도록!/ 우리는 마침내 '시'를 배웠다.//
詩창작 강의 -제3교시 / 박제영
1. 재료/ 명사 20~24개, 동사 24~30개, 부사 10~12개,/ 형용사는 가급적 넣지 않는 게 좋지만 경우에 따라 3~6개,/ 그리고 숙성 발효시킨 생각 24그램과/ 그늘에서 2주 이상 건조시킨 감정 12그램을 준비할 것//
2. 만드는 법/ 명사, 동사, 부사를 숙성 발효시킨 생각 12그램과 함께 섞어 볼에 넣고 중탕으로 열을 가하며 휘핑한다. 거품이 생기는 것을 확인하면서, 온도가 36.5℃가 될 때까지 계속 휘핑한다. 36.5℃가 되면 숙성 발효시킨 생각 나머지 12그램을 넣고, 중탕에서 내려 열이 식을 때까지 휘핑을 계속한다. 그 다음에 온도가 5℃ 아래로 떨어지면 그늘에서 건조시킨 감정 12그램을 넣고 거품이 단단해질 때까지 휘핑을 계속한다. 손가락으로 눌러도 견딜 수 있을 만큼 거품이 단단해졌으면 드디어 완성이다. 취향에 따라 상황에 따라 장식용으로 형용사 몇 개 올려 놓아도 된다.//
3. 주의/ 이 요리의 맛은 재료의 혼합비와 온도에 따라 달라지므로/ 그에 대한 감각을 키우는 것이 좋다.// 생각은 충분히 숙성 발효시킨 것을 써야 한다는 것과/ 그늘에서 말린 감정을 써야 한다는 것도/ 잊지 말도록!//
가령과 설령 / 박제영
가령/ 이것이 시다, 라고 쓴 대부분의 것은 시가 아니다// 설령/ 이것이 시가 되지 않더라도, 라고 쓰여진 것은 대부분 시다// 가령(佳嶺)은 도처에 있다 가령 화사하고 화려한 것 가령 사랑이란 단어, 가령 그리움이란 단어. 봄날 꽃놀이 관광버스가 가 닿는 곳, 그곳이 가령이다// 설령(雪嶺)은 보이지 않는 자리에 스며 있다 어둡고 춥고 배고픈, 눈과 귀와 혀의 뿌리 설령 어시장 좌판이라도, 설령 공중화장실이라도, 설령 무덤이라도, 설령 보이지 않더라도 그곳에 있다// 등반자여 혹은 동반자여/ 가령은 도처에 있고 설령은 도무지 없다 도대체 어디를 오를 것인가//
시 좀 봐달랬더니 / 박제영
여섯 번째 시집을 준비하면서/ 교정 좀 봐달라고 했더니/ 며칠 후 반으로 접은 쪽지를 쥐여주는 거다/ 나중에 혼자 있을 때 보란다// 당신 시 읽는 게 무척 힘이 드네/ 그 사이 많이 시들고, 궁상도 많이 늘었네/ 이렇게 힘들게 살고 있는 줄 왜 몰랐을까/ 교정보다 위로가 필요한 내 남편/ 당신 덕분에 우리 식구/ 지금까지 잘 살아왔으니까/ 자책하지 말고 힘내요// 시 좀 봐달랬더니/ 엉뚱한 것만 보고 있는/ 참말로/ 얄궂은 당신/ 당신 때문에 시도 못 쓰겠다//
마음이 부르는 노래 / 박제영
뜬금없이 도은이가 묻습니다// 아빠 근데 시가 뭐야?// 사람이 삶을 어떻게 극복하고 살아가는가를 가르치는 거라고 포크너의 말을 인용하면 그럴듯할까? 문학적 직관력이나 통찰력을 통해 주변의 사소한 일상으로부터 인생의 의미나 우주의 신비를 끄집어내는 에피파니를 설명해줄까? 아니야 아이한텐/ 너무 어려워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머뭇거리는 사이 아내가 말해주는 겁니다// 마음의 노래란다/ 네 마음이 부르는 아름다운 노래란다//
詩집 밖의 詩人들은 얼마나 詩답잖은지 / 박제영
詩인 김연숙이 전화로 시방 詩인 문혜진이 옆에 있다고 인사동 무슨무슨 술집으로 오라고 해서 물어물어 갔는데 마침 詩인 박정대가 소월詩문학상을 받은 날이라 뒤풀이를 하고 있던 모양인데 워낙에 詩(집)밖에서 詩人들 만나는 일을 꺼렸던 터라 갑작스레 모詩인모모詩인 詩人떼를 맞닥치고보니 당황스럽기 그지 없었지만 저쪽 구석에서 그래도 친한 詩인 김연숙이 손을 들어주고 그 옆에 보고싶던 詩인 문혜진하고 고영민도 앉았길래 그 옆 한자리 슬그머니 끼어 잠시 조용히 있다 갈려고 한 것인데 詩인 김연숙이 생뚱맞게 상받고 뒤풀이하는 자린데 주인공한테 가서 술 한 잔 권하는 게 좋지 않겠냐 떠미는 바람에 기왕지사 언죽번죽 "나 박제영인데 축하합니다 술 한 잔 받으소" 했던 건데 詩인 박정대 앞에 앉았던 詩인 김상미가 "당신이 박제영인가, 푸른... 뭐라던가 썼던" 하고 거드는 탓에 건넸던 술잔만 머쓱해지고 한 술 더떠 그 옆의 詩인 박완호가 "그 친구 정대형 학교 후배요 고대" 하고 거드는데 詩인 박정대는 뜬금없이 "난 고대가 아니고 정대야" 하는 통에 이거야 원 멀뚱멀뚱 난감하고 계면쩍어 다시 슬며시 詩인 고영민 옆 자리에 앉았다가 지며리 생각해봐도 詩집 밖의 詩人들은 얼마나 詩답잖은지.//
시인 김충규 / 박제영
살아서 그는 곡비(哭婢)였네// 내 울음에 기댄 누가 있어/ 마르고 가문 영혼의 황무지에/ 겨자씨 같은 눈물 하나 맺힐 수만 있다면/ 마침내 검푸른 저수지가 될 때까지/ 당신들을 대신해서 내가 운다던/ 세상의 곡비였던// 그가/ 마침내/ 세상의 저수지가 되었네//
시가 돈이 되어선 안 되는 이유 / 박제영
사람들은 아무래도 궁금한 게 돈인 모양이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지만 대개 끝에 가서는 꼭 묻는다/ 근데 시를 써서 돈 좀 됩니까?/ 그럼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거다/ 시가 돈이 되는 거라면 자본이 가만 있겠냐고/ 대기업이 그냥 있겠냐고/ 돈이 안 되니까 우리 같은 가내수공업자들이 명맥을 유지하는 거 아니겠냐고/ 대기업이 뛰어들어 대량으로 찍어대고 대량으로 팔기 시작하면/ 그 땐 우리 가내수공업자들 다 망하는 거 아니겠냐고/ 그러면 또 묻는 거다/ 아니 시가 무슨 물건입니까?/ 그걸 어떻게 대량으로 생산합니까?/ 그럼 되묻는 거다/ 돈으로 안 되는 거 봤어요?/ 그러니 시가 돈이 되어선 안 되는 거다//
사소한 가난 / 박제영
내 시집 살 돈이 있으면 남의 시집을 산다/ 딱 그만큼의 가난// 택시를 타면 회사 지각이야 면하겠지만 버스를 탄다/ 딱 그만큼의 가난// 선배가 모처럼 소고기 먹자는데, 형 나 소고기 싫어해, 굳이 뭉텅찌개에 소주를 마신다/ 딱 그만큼의 가난// 아이들이 바다 가자고 조를 때마다, 미안 아빠가 시간이 없네 대신 일요일에 공지천 가자/ 딱 그만큼의 가난// 아니다 이것은/ 누군가에게는 죽어도 이루기 힘든 버킷 리스트(bucket list)이겠다// 사소한 가난이라니!/ 염병할! 내 삶도 내 시도 죄다/ 엄살이다 꾀병이다//
매쉬멜로우 -시를 위한 발성연습 / 박제영
그는 특정 단어를 색깔로 구분한다 특정 단어는 냄새로 구분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그는 공감각자다 가령 사랑한다는 말이 그에게는 보라색으로 보이며 매쉬멜로우 향이 난다 미움이라는 단어는 붉은색이며 말똥 냄새를 풍긴다 보라색 옷을 입은 여자를 보면 그는 매쉬멜로우 향이 난다며 금세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어느 날 여자가 붉은 옷을 입기라도 하면 말똥 냄새가 난다며 여자를 다시 미워한다 그에게 행복은 노란색이고 아카시아 향이다 슬픔은 파란색이고 민트 향이다 하루 종일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끼고 있는 그를 만나더라도 놀라거나 오해하지 마시라 그는 미친 것이 아니라 그냥 공감각자일 뿐이다//
시인은 본적이 없지라 / 박제영
본적을 만들겠다고 신춘이니 창비니 문지니 하는 거대 문파에 입적하겠다고 굴신거리던 때가 있었지라/ 수십 년 강호를 떠돌면서 구파일방의 제자들과 숱하게 일합을 겨뤄봤는데 거 별거 아닙디다/ 강호의 고수는, 진짜배기는 따로 있지라/ 무당이니 소림이니 구파일방의 본적을 내밀면 필경 가짜지라/ 본 적이 없다고 오래 전에 본적을 버렸으니 본적을 묻지 말라면 그기 방외거사, 진짜지라//
여시아감如是我感 / 박제영
시인들이 시를 쓸 때는 대개 어떤 대상(사물 혹은 사태)에 눈이 맞았을 때입니다. 소위 접안接眼을 통해 시심詩心이 작동하는 순간이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대상에 잠재되어 있던 시詩가 시인의 손을 빌리긴 합니다만 스스로 제 형태를 빚게 됩니다. 그래서 시는 창작이라기보다는 발견에 가깝다고 말하기도 하는 것이겠지요. 대개의 경우 시를 읽는 것도 그와 비슷합니다. 억지로 읽는다고 읽히지 않지요. 한 단어 혹은 한 구절이라도 눈이 맞아야 합니다. 그게 접안입니다. 그러면 시가 저절로 읽힙니다. 내 안에 들어와서는 스스로 제 상을 빚고 형태를 드러냅니다. 그래서 시 읽기는 해석이라기보다는 감응感應이고 감동感動에 가깝습니다. 눈이 느끼면(感應) 마음이 움직이는 것(動)이지요. 그렇게 (어떤) 시는 저절로 읽힙니다. 불가佛家에 여시아문如是我聞이라는 말이 있지요. 나는 이렇게 들었노라. 슬쩍 바꿉니다. 나는 이렇게 감 잡았노라. 여시아감如是我感. 그래요, 시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눈 맞은 시들에 대해 감感 잡은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詩詩콜콜한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우야던동 해볼까 합니다.//
나와 나타샤와 현식이 형 / 박제영
쓸쓸히 소주를 마시는데/ 눈은 푹푹 내리고/ 그래서 불쑥/ - 형, 백석이 사랑한 나타샤가 누굴까요/ 나도 모르게 그만 한 마디 던진 것인데/ 그것도 모르냐고/ 그러고도 시인이냐고/ - 러시아 작부랑 하룻밤 응응한 얘기잖아 그때 러시아 작부들이 많았는데 그냥 다 나타샤로 불렀어 다 나타샤였다니까! 당나귀도 흰 당나귀라잖아 그게 뭐야 백마잖아!// 현식이 형에게 시집 『그런 저녁』 발문을 굳이 부탁한 까닭이다/ 어처구니 없다고?/ 엄염한 사실이다!//
연애시 / 박제영
오늘만큼은 예쁜 연애시 하나 쓰겠노라 펜을 든 것인데// 노라조 노라조, 아빠는 놀아줄 수가 없단다 밥 벌러 나가야 한단다 아이는 혼자 논다 노라조 노라조 노래를 부른다, 오늘도 늦어요 또 늦어요? 내일도 늦을 거다 여보 모레도 늦을 거다 아내는 오늘도 혼자 잔다 마른 잠을 알약처럼 삼킨다, 아픈 데는 없니 어디 아픈 데는 없니? 없어요 엄마 위궤양이 어디 병인가요 역류성 식도염은 병도 아니잖아요 30년 전 아버지가 건넌 강이잖아요 울음의 강을 아버지도 무사히 건너셨잖아요,// 라고 썼다, 밤새 지우고// 아버지 자꾸만 오줌이 마려워요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자꾸만 오줌이 마려워요,// 노루오줌 같은 문장 하나 겨우 지리고 마는 것이다//
먼 길, 빈 길 / 박제영
화천비목콩쿨대회에서 아빠 시가 1등 먹었다고/ 껑충껑충 뛰던 딸애의 낯빛이 어둡습니다// 아빠 여기 가사가 틀렸어요/ 빈 길을 먼 길이라고 했어요// 주최 측에서 악보를 보내왔는데/ <홀로 빈 길을 떠나야 하리>가/ <홀로 먼 길을 떠나야 하리>로 바뀐 겁니다/ 한 글자 바뀐들 무에 대수랴 싶었는데요// 먼 길은 몸의 길이고, 빈 길은 마음의 길이잖아요/ 아빠 시를 다 망쳤어요// 열다섯 살 아이의 말이라니요!/ 화끈, 부끄러웠습니다//
세상에 없는 문장 / 박제영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데/ 지는 달빛의 배후가 새삼 서러워지는/ 마흔아홉의 쓸쓸한 저녁이 나그네처럼 찾아올 것이니/ 불청객이 전하는 전언을 당신도 듣게 되리// 아버지는 세상에 없는 문장이다// 아내가 쌀을 안치고/ 아내 곁에서 두 딸이 종달새처럼 재재거리는데/ 공연히 쓸쓸한 저녁이 있다/ 그런 날에는 아버지에게 안부를 묻는다// "아버지, 저예요,,,,,그냥,,,,,전 잘 지내요,,,,,아버지는요?"// 아버지를 더듬는 어색한 안부/ 마흔아홉의 당신, 그리고 내가 지을 수 있는 최선의 문장이다//
시가 무엇이냐 / 박제영
꼬치꼬치 여쭈니 이십 년 전 선생께서 이르시길, 갈喝! 탈! 이렸다 칼! 이렸다 말씀이 탈을 쓰고 칼을 들고 한바탕 춤추는 것이렸다 칼에 베일까 두려워하지 말고 이러쿵 저러쿵 따지지도 말고 그저 춤가락에 몸을 맡기렸다 덩더쿵 덩더쿵 어깨춤이나 추렸다 어여 신명나게 놀아 보거라 오지게 흔들어 보거라// 모시낭송 행사 뒤풀이에 참석했는데 모선생 밑에서 시를 배웠다는, 모문예지로 등단했다는 모시인이 시시콜콜 자꾸만 시를 캐묻기에 에라, 술! 이지요 그 양반, 뭐 이딴 상놈이 있나 싶은 표정이었지만 무에 대수겠습니까 밤새 취해서 시와 함께 한바탕 오지게 흔들었으니//
그런 시 / 박제영
고산준령은 욕심내지 말그래이/ 그런 험한 산을 넘으려면 사람들이 얼매나 힘들겠노/ 가볍게 산책하듯 넘을 수 있는/ 야트막한 뒷동산 정도면 좋지 않겠나/ 완만하니 걷기에도 적당해서/ 엄마랑 아이랑 손잡고 깔깔거리다 보면/ 벌써 정상이네 하는 그런 산/ 산 같지도 않은, 그런 산 말이다// 그런 시를 쓰그래이//
내 몸은 나가 더 잘 안디* -정우영 시인에게 / 박제영
저, 어머니의 말/ 저 몸이 형을 낳고, 저 말이 형을 키웠을 게지요.// 어머니, 저 몸. 어머니, 저 말// 참 아픈 몸입니다./ 참 아픈 말입니다.//
* 정우영 시인의 시, '밭' 중에서
직유와 은유 혹은 사랑에 관한 농담 / 박제영
취한 여자가 묻는다.// 말해봐/ 직유와 은유가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당신이 시인이라면// 취한 남자가 답한다.// - 개 같은 새끼!/ 문을 열고 나간 그 여자는 내 아내지/ 그게 직유야 그게 그 여자의 사랑이지// - 당신은 늑대야 발정난 짐승!/ 나를 핥고 있는 당신은 나를 사랑하고 있을까?/ 그게 은유야 그게 당신의 사랑이지//
야반도주 / 박제영
시인들 틈에 끼어 팽목까지는 어찌어찌 갔던 건데/ 막상 시를 읽으라는 데는 도무지 불편하다/ 나 혼자 잘 살겠다고, 남의 사정 몰라라/ 내 식구 먹여 살리겠다고, 남의 식구 몰라라/ 그냥 살던 대로 살면 되지 뭐하러 왔을까/ 뭔 낯짝으로 시인입네 앉았을까/ 차마 면구스러워서 그나마 염치는 있어서/ 슬그머니 도망쳐 왔다/ “팽목이 맹목으로 쓰일 때 시는 가짜다 어쩌구 저쩌구”/ 시 같지 않은 시도 슬그머니 쓰레기통에 버리고 왔다//
순례와 후기 / 박제영
함순례, 박후기, 두 시인의 이름만으로도 시가 되겠다, 그런 생각, 했더랬습니다 시를 쓰는 일이 순례라고, 순례의 후기를 적는 일이겠다고, 그런 생각, 했더랬습니다 시인이란 버려진 어린 짐승들을 등에 지고 뻘밭 진창을 맨발로 걷다가 걷다가 제 몸의 유전자에 순례의 후기를 비문으로 새기고 마는 참 미련한 족속들이라고, 그런 생각, 했더랬습니다 뜨거운 발과 나무의 유전자를 가진 두 시인의 시집을 읽던, 함박꽃 함박 피었던 어느 해 봄날 늦은 밤의 일입니다// 그날 이후 몇 개의 계절이 지났습니다 버려진 것들은 버려진 줄도 모르게 버려졌으나 세상은 여전했으니, 그 사이 몇 몇의 시인들이 어린 짐승들을 업고 뻘밭 진창을 걸으며 후기를 적기도 했으나 어느 누구도 그따위 비문을 읽지는 않았으니, 순례와 후기, 마침내 두 시인의 이름만으로는 시가 되지 않겠다, 요즘은 그런 생각, 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원고청탁을 끝내 거절한 곡절이니, 부디 혜량하여 주시옵기를//
취매역 / 박제영
비 온다 경춘선 타러 가자// 한 주전자에 지나간 추억을 소환하고/ 두 주전자에 오지 않을 미래를 불러내고/ 추문과 영웅담을 뒤섞으며/ 추억역과 미래역을 오가는 거다// 부어라 마셔라/ 오늘도 경춘선은 달린다// 가버린 역과 오지 않을 역 사이를 오가며/ 취기가 머리꼭지까지 차오르면/ 모습을 드러내는 취매역// 당나귀 귀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래// 취매역에 내렸다는 건/ 마침내 주화입마에 들었다는 것/ 보라,/ 쌓이고 막혔던 속엣것을 다 토해내는 저이들을// 주모,/ 여기 경춘선 한 주전자 추가요// 치매가 아니라 취매醉呆다/ 취매입마에 든 거다/ 취매역이 두렵거든/ 경춘선 함부로 타지 마시라/ 승차 거부를 당할 수도 있으니 아예 표도 끊지 마시라// 당신의 취매역은 어디인가/ 딸꾹,//
조를 아시나요? 조! / 박제영
평창군 대화면 산골 출신 아니랄까봐/ 입맛도 마냥 촌스러운 우리 사장님/ 얼큰한 장칼국수가 드시고 싶다고/ 모처럼 진부 시내 명동칼국수집 가던 길인데/ 밭두렁에 길쭉하니 올라온 풀을 보고,/ -사장님 저게 뭐래유?/ 무심코 물었던 건데/ 혀를 차며 하시는 말씀,/ -넌 조도 모르냐! 명색이 시인이라며 조도 모르냐!/ 그날 이후 나는 조도 모르는 놈이 된 것인데요// 그놈의 조!/ 를 아시나요?//
뻘짓 / 박제영
나가 시방 일흔인디 그기 다 헛으로 묵은 기라 돈 법네 시 씁네 바꺁으로만 사십 년을 나댕겨부렀잖여 마누레고 자석이고 평생을 생과부로 생고아로 살았응께 타박을 받아도 싼 기라 그라도 남편이라꼬 애비라꼬 쪼까내지 안능 것만도 고맙제// 취한 노시인의 말이 비수처럼 꽂혔는데 어찌나 얼얼하던지요 집에 와서 잠든 아내와 딸을 와락 깨워, 이리 쪽 저리 쪼옥, 뽀뽀를 한참 해대고 나서야 얼얼한 게 조금 풀리더라구요//
옥타비오 빠스냐 옥탑 위의 빤스냐 그것이 문제로다 / 박제영
가짜 시인은 거의 언제나 타자의 이름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한다./ 진짜 시인은 자기 자신한테 말할 때도 타자와 이야기 한다./ 라고 옥타비오 파스가 말씀하셨다/ 라고 정현종 시인을 비롯한 진짜 시인들이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나는 진짜인가 가짜인가를 고민해야 하는데/ 정작 나는/ 옥타비오 파스의 책 어디에 그런 말이 있었나/ 활과 리라에 그런 말이 있었나/ 이런 쓸 데 없는 고민을 하고 있다// 박정대 시인은 옥타비오 빠스를 읽다가/ 옥탑 위의 빤스, 서럽게 펄럭이는/ 이런 진짜 문장을 만들기도 했는데/ 나는 옥타비오 빠스냐 옥탑 위의 빤쓰냐 그것이 문제로다/ 이딴 가짜 문장에 매달리고 있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은 진짜 문제고/ 옥타비오 빠스냐 옥탑 위의 빤쓰냐 그것은 가짜 문제다/ 진짜 시인은 언제나 진짜 문제에 대해 말하고/ 가짜 시인은 언제나 가짜 문제에 대해 말한다//
당신들 / 박제영
내 시를 빙산에 비유하자면/ 빙산을 움직이는 것은/ 수면 위, 빙산의 일각인 내가 아니라/ 수면 아래, 빙산의 구십구각인 당신들이라는 것// 빙산을 움직이는 것은/ 수면 위, 바람 같은 내 가볍고 약삭빠른 쓰기의 감각이 아니라/ 수면 아래, 해류와 같은 당신의 무겁고 느린 읽기의 힘이라는 것// 그러므로 당신들이 내 시의 주인임을/ 나는 오직 당신들의 대리인이었음을/ 고백한다//
시·4 / 박제영
1// 미안하다 당신께/ 이 연작시를 읽고 있는 당신께/ 참 미안하다/ 4를 처음 읽고 있는 당신께 미안하고/ 3부터 읽은 당신께 더 미안하고/ 2부터 읽은 당신께 더 더 미안하고/ 1부터 읽은 당신께는 더 더 더욱 미안하다// 미안하다 당신들/ 지금 내 똥 밟으셨다// 2// 미안하다/ 참 미안하다/ 살아 있으므로, 나는 계속 똥을 누어야 하므로/ 어쩌면 그 똥, 계속 밟으실지도 모를// 당신께/ 참, 참, 차암 미안하다// 제발이지 그러므로 제발이지/ 내 똥만은 피해가기를/ 걸음걸음 저 똥밭들, 내 똥만이라도 피해가기를/
시인은 저수지를 떠났고 사람들은 영혼의 몽리면적을 잃었다 / 박제영
시베리아로 떠난 물새의 그림자와 시인의 말을 찾기 위해 저수지를 수색하던 경찰에 의해 모모(44)씨의 사체가 발견됐다. 평소 우울증*을 앓던 모모씨가 지난 1일 “죽겠다”며 집을 나간 후 소식이 없다는 유족의 말에 따라 경찰은 신병을 비관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시인의 말과 물새의 그림자는 수색 나흘째인 현재까지 찾지 못하고 있다. 마을 주민들과 경찰 합동으로 크레인 1대와 모터보트 2대를 동원해 저수지 바닥 구석구석을 뒤져 자동차 타이어, 그물, 녹슨 드럼통, 버려진 자동차, 유리병 등 5톤 트럭 2대 분량의 각종 쓰레기를 수거했지만 끝내 시인의 말과 물새의 그림자는 발견하지 못했다. 저수지에는 시인의 말도 물새의 그림자도 없는 것으로, 풍문인 것으로 최종 확인됐다는 발표와 함께 경찰은 수사를 종결했다.//
* 한 때 의사이기도 했던 시인 송재학은 2001년 발표한 현대인의 우울에 관한 보고서이기도 한 시집 <기억들>에서 '우울증은 영혼이 몽리면적을 잃었을 때 나타나는 증상들 중 하나'라고 말했다.
늙은 거미 / 박제영
늙은 거미를 본 적이 있나 당신, 늙은 거문개똥거미가 마른 항문으로 거미줄을 뽑아내는 것을 본 적이 있나 당신, 늙은 암컷 거문개똥거미가 제 마지막 거미줄 위에 맺힌 이슬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나 당신, 죽은 할머니가 그러셨지. 아가, 거미는 제 뱃속의 내장을 뽑아서 거미줄을 만드는 거란다. 그 거미줄로 새끼들 집도 짓고 새끼들 먹이도 잡는 거란다. 그렇게 새끼들 다 키우면 내장이란 내장은 다 빠져나가고 거죽만 남는 것이지. 새끼들 다 떠나보낸 늙은 거미가 마지막 남은 한 올 내장을 꺼내 거미줄을 치고 있다면 아가, 그건 늙은 거미가 제 수의를 짓고 있는 거란다. 그건 늙은 거미가 제 자신을 위해 만드는 처음이자 마지막 거미줄이란다. 거미는 그렇게 살다 가는 거야. 할머니가 검은 똥을 쌌던 그해 여름, 할머니는 늙은 거미처럼 제 거미줄을 치고 있었지. 늙은 거미를 본 적이 있나 당신.//
거미가 작아졌어요 / 박제영
애들 방에 손바닥만한 거미가 들어왔어요 급한 김에 대야로 덮어놨는데 당신/ 올 때까지 애들하고 안방에서 자야할 것 같아요// 아빠 타란툴라 같아요 엄청 커요/ 아빠 왕독거미예요 빨리 와서 치워주세요// 전화기 너머로 두 딸의 목소리도 들린다// 금요일 저녁 현관에 들어서기 무섭게/ 딸이 등 뒤에 숨어서 강아지처럼 숨을 헐떡거린다//아빠 아빠 무지 커요 대왕거미예요/ 그래 그래 아빠가 치워주마// 조심스레 대야를 들어 올리니/ 세상에나!// 새끼 거미잖아 새끼 거미/ 이상하네요 분명히 왕거미였는데……/ 아빠가 오니까 거미가 작아졌어요/ 맞아요 진짜로 작아졌어요// 동짓날 기나 긴 엄동의 밤/ 우리 네 식구 거미줄 같은 이불을 덮고/ 작아진 거미 얘기로 밤새 이야기꽃을 피웠네//
빨래, 빨래스타인 / 박제영
네이버 백과사전은 빨래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의류나 침구용품·식탁용품·가구류 등의 피륙 따위에 묻은 때를 적절한 세제와 기계적인 힘을 가함으로써 물리적ㆍ화학적 작용을 촉진시켜 제거하는 일.” 네이버 뉴스는 지금 이스라엘이 빨래중이라고 전한다. “8일 레바논 남부 가지예의 한 병원 시체안치소에 이스라엘군의 공습으로 숨진 3살짜리 소년 마날 알-후세인의 사체가 안치돼 있다.”// 그러니까 세 살짜리 마날 알-후세인은 때다./ 무슬림이란 적절한 세제와 기계적인 힘을 가해 제거해야 하는 묵은 때다.// 빨래를 하다가 손을 베인 적이 있다./ 흰 빨래는 자꾸만 빨갛게 물들었다./ 빨갛게 물들고 있는 빨래스타인, 그 곳에 가짜 지구가 있다./ 가짜 지구에 미사일이 세제처럼 내린다.// 빨아도, 빨아도, 지울 수 없는, 상처는, 피는, 때가 아니다./ 빨간, 새빨간, 거짓말이었으면, 좋겠다 진짜로, 가짜 지구가 가짜였으면 좋겠다.//
장미여관 김씨는 모른다 / 박제영
벌건 대낮에 장미여관 앞 큰 길에서 개 두마리가 흘레 붙었다/ 이런 쌍넘의 개새끼들, 여관집 김씨가 뜨거운 물을 붓는다/ 두어차례 물세례를 더 받고서야 붉은 몸이 붉은 몸을 빠져나온다// 투숙객의 자동차 번호판에 덮개를 씌우고 있는/ 장미여관 김씨는 모른다/ 대낮의 투명함을 견디는 것은 오직/ 저 개들 뿐이란 것을// 여관을 빠져나오는데 백미러 속에서 개가 짖는다/ 김씨가 다시 물을 붓고 있다/ 두 몸이, 붉어져 하나가 된 몸이, 컹컹 운다//
죽음은 늘 과속이다 / 박제영
지상의 마지막 톨게이트를 건너는 친구에게 지전으로 하얀 봉투를 찔러 준다. 남은 자의 슬픔은 결코 죽은 자의 속도를 따라 잡지는 못한다. 과속의 차선을 단 한번도 이탈하지 못했던 녀석. 죽어서야 비로소 멈춰 선 녀석의 얼굴. 녀석은 알고 있었을까. 제 몸 안의 속도를 털어내려고 어둠 속을 질주했지만 그 어둠의 배후 또한 과속이었다는 것을. 시속 140킬로미터의 속도로 화투패를 내려친다. 무인카메라의 후레시가 터진다. 한 컷 한 컷 필름은 돌고, 마침내 인화되는 사진 한 장 - 상복 입은 아내와 아이들의 마른 울음소리. 불타는 차 안에서 녀석의 피 묻은 손가락들이 과속으로 움켜쥐고 있던 그 사진 한 장.//
뜨거운 무덤 / 박제영
날개 꺾인 비둘기 한 마리/ 공원 시멘트 길 위를/ 낮게 기어가고 있다/ 기어 온 이력만큼/ 보도블록에 새겨지는/ 지루했던 비행의 상처들// 어디서 왔을까/ 피 냄새를 맡고/ 킁킁거리는 검은 개 한 마리/ 삶과 죽음을 저울질하며/ 으르렁거리는// 침 흘리는 저 개의 아가리가/ 새의 하늘이다/ 새의 날개와 비행의 모든 내력들을/ 한 입에 가뿐하게 삼켜 버리는/ 붉은 저 하늘/ 새의 뜨거운 무덤이다// 제 무덤을 지고 가는 저 외눈박이 개//
모퉁이 / 박제영
떠나는 것들은 모두 모퉁이를 돌아서 갔다/ 첫(사랑)도 가출한 (아내)도 죽은 (할머니)도/ 저 모퉁이를 돌아 떠나갔다// 그러나 어쩌랴/ 떠난 것들이 돌아 오는 것도 저 모퉁이인 것을/ 술 취한 (아버지)가 비틀거리면서도 매일 저 모퉁이를 돌아 왔듯이/ 월남에서 죽었다던 (삼촌)도 저 모퉁이를 돌아 왔듯이// 사는 일이 사막을 견디는 일이라면/ 모퉁이는 사막 위에 세워진 간이역/ (슬픔)도 (기쁨)도 (희망)도 (절망)도/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덤덤히/ 모퉁이를 돌아 가고 오는 것// (나)는 오늘도 모퉁이를 돌고 있다/ 떠나고 있는 것인지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그게 무슨 상관이랴// (누군가) 모퉁이에 서 있다/ 배웅나온 것인지 마중나온 것인지/ 그게 무슨 상관이랴// ( )안을 무엇으로 채운들 또한 무슨 상관이랴//
늙은 비파의 독백 / 박제영
형광등이 켜졌다 사내가 졸린 눈으로 다가온다/ 이제 느긋하게 떨어지는 먹이를 기다리면 된다/ 사내는 잠시 수조 안을 두리번거릴 것이다/ 오늘도 그의 눈은 나를 찾고 있지만/ 며칠 전부터 나는 그를 보는 게 귀찮아졌다/ "여보, 비파가 안보이네, 죽은 건 아닐까?"/ 늘 저런 식이다 쉽게 단정하고 쉽게 포기하고/ 언제나 두 번째 돌 앞에서 시선을 거두어버리는 저 사내,/ 나는 다만 세 번째 돌 뒤에 숨어 있으면 되는 거다/ 유리 바깥의 세계가 궁금한 것은 순전히,/ 그래도 살아 있는 저 사내 때문이다/ 아, 아마, 아마존이라면, 아니 솔직해지자/ 지금 난 저 사내가 귀찮아진 것이 아니다/ 그의 눈을 피하기 시작한 것은/ 어느 날인가 저 사내와 내가 서로 닮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아마존의 우기를 더 이상 기억해내지 못하던 날부터/ 나는 단순해졌고 게을러졌던 것이다/ 여자가 다가온다/ 이윽고 나를 찾아내고야 마는 여자의 눈은 언제나 집요하다/ "당신도 참 저 돌 뒤에 있잖아, 그나저나 볼 때마다 웃기단 말이야"/ 돌이켜보면 정말 웃기게 늙어온 셈이다//
안개 / 박제영
툭하면 안개가 낀다 안양에서 특별시로 이어진 외각순환도로에는 그러면 으레 사소한 사건이 벌어진다 빵, 빵, 빠아아아아아아아야이야이얏앙 크랙션이 울리자 앞 차에서 덩치가 내리고, 뭐야 이 색꺄 당신이 갑자기 끼어들었잖아 사고날 뻔 한 거 몰라 사고 안났잖아 쌕꺄 당신 몇 살인데 욕이야 이거 말려 말리지마 구경났다고 안개 속에서도 구경났다고 난장이 선다 저러다 말겠지만 혹시라도 저 작은 사내가 몇 대 맞고 피를 흘린다 해도,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 특별시로 가기 위해서는 어차피 이 길을 지나야 한다 더 자욱한 안개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그러나 아무도 모르는 것 같다 여전히 안개만을 투덜거리는 사람들을 보면// 이 순간의 안개야 지나면 그만이지만 저 사소한 사건이야 지나치면 그만이지만 그만이지만//
* 기형도의 <안개> 중에서
빗 속에 누군가 그립다면 / 박제영
그것은 마음 한 구석이 새고 있다는 것일 게다/ 빗 속에 누군가 그립다면/ 그것은 마음 한 켠이 무너져내렸다는 것일 게다/ 빗 속에 누군가 그립다면// 빗 길에 운전 조심하라는 말은/ 그리움의 과잉을 조심하라는 것일 게다/ 심하게 젖으면, 젖은 것들은 종내 무너지는 법이니// 비가 내리는 오후 세시/ 한 쪽이 무너진 자동차, 견인차에 끌려가고 있다//
새는 / 박제영
죽어서도 날개를 하늘에 묻어야 하는 것/ 날개 꺾인 비둘기/ 아스팔트 위를 기고 있다/ 기어 온 이력만큼 낭자한 상처들/ 피 냄새를 맡은/ 검은 개들은 지금/ 사내가 사라지기만을 기다리는 중이다// 침 흘리는 저 개들의 아가리가 새의 무덤이었던 것//
거시기 / 박제영
거시기한 맛이 읍서야/ 긍께 머랄까 맥업시 맴이 짠~해지는, 거시기 말이여/ 느그 시는 그기 읍당께로/ 이 고들빼기 맹키로 싸한 구석이나 있으믄 쪼매 봐줄라나/ 그것도 읍잔여/ 한마디로 맹탕이랑께// 워따 가스내 맹키로 삐지기는/ 다 농잉께 얼굴 피고 술이나 마시뿌자/ 내 야그가 그로코롬 거시기 하면 서안나가 쓴 동백아가씨란 시가 있어야/ 낸중에 함 보라고 겁나게 거시기 할텡께/ "장사이기가 오늘은 내 서방이여"/ 이 대목에선 워매, 가심이 칵!/ 환장해분당께// 아지매, 무다요 술이 읍서야/ 지금 거시기해부렸응께 싸게 갖구 와야//
곰치국 / 박제영
옆 테이블의 젊은 연인들도 곰치국을 시켰나 봅니다/ - 정말로 흉하다 진짜 물고기 맞아?/ - 이런 몰골로 어찌 살았을까 그치 자기야?// 묵은지 사이로 흐물흐물 풀어진 흰 살덩이를 뜨다 말고 재붕이형이 숟가락을 내려놉니다/ -왜 입맛이 없나?/ -마누라 몸이 그렇게까지 다 풀어진 줄 내 꿈에도 몰랐다// 병실에 누워 있는 마누라가 목에 걸려서 차마 못 먹겠다고, 나도 덩달아 곰치국엔 손도 못 대고, 둘이서 애먼 깍두기와 막걸리 한 주전자만 동내고 말았습니다//
섬 / 박제영
격렬돈지 비열돈지는 모르것고 섬이 원래 격렬하고 비열한 것잉께 죽었다/ 깨도 모를 것이다 뱃놈서방 뱃놈아부지 바다가 다 잡아묵꼬 독한년 징한년/ 소리 이십 년은 이골이 나믄 그나마도 쪼메 알 것잉께 섬은 무신? 염빙하고/ 자빠짔네// 어찌까이 슴 이야그는 와 혔당께로 저 작것이 슴 이야그만 나오면 요라고/ 그마 환장허분당께 오늘 장시 파했응께 언능 가랑께로// 삭힌 홍어와 탁주 맛있게 먹었다고, 잘 먹고 간다고, 하면 되었을 것을, 하여/ 튼 입이 방정이다 춘천 풍물시장 완도탁배기 집에 가시거든 완도 여자 금정/ 氏와 그 어미를 만나시거든 격렬비열도 같은 섬 이야기는 꺼내지 마시라 홍/ 어맹키로 삭힌 여자들이니 환장할 섬을 몸 속에 삭힌 여자들이니//
바보 노무현* / 박제영
“꺽지는 수컷이 알을 지키는디, 알 근처로 얼씬거리믄 쏘가리든 메기든 죽기살기로 덤벼드는 겨, 즈그 새끼 건들까봐 공갈인 줄 알면서도 미끼를 무는 거재, 뭇 하요! 낚싯대 휘어지잖여” 공갈 미끼를 물고 늘어지다 마침내 낚여 올라오는,// 꺽지 그러니까 당신,// 적들의 칼과 펜으로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서도 “오늘 한 잔 꺾지” 술 한 잔으로 삭이고 넘겼던 당신, 오래된 동지들을 미끼로 마침내 당신을 낚았지만, 그래 당신을 꺾지 못해 안달 난 족속들이 기어이 당신을 낚았지만, 그 족속들마저 원망하지 말라는, 나는 알지! 당신은 낚을 수는 있어도 꺾지는 못하는 어느 심해의 어족,// 바보 그러니까 당신//
* 2009년 5월 23일 바보 노무현은 심해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쳇바퀴 / 박제영
그는 모일간지 기자다. 나는 모모기업 홍보팀장이다. 그러니까 그와 나는 '그렇고 그런' 사이다. '그렇고'라 함은 그가 기자와 월급쟁이 사이에 끼였다는 말이고, '그런'이라 함은 내가 홍보팀장과 월급쟁이 사이에 끼였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그렇고 그런'이라 함은 그의 사주가 광고수주 못했다고 그를 닦달하면 그는 우리 회사를 조지는 기사를 쓰고, 나의 사장은 악성기사를 못막았다고 나를 닦달하고, 나는 애꿎은 술만 조지고, 다람쥐 쳇바퀴 돌듯 그는 앞에서 나는 뒤에서 서로의 꼬리를 물고 돌고 또 돌고 있다는 거다. 그나 나나 '그렇고 그런'이라는 쳇바퀴에 끼여 벌써 십 수 년째 옴짝달싹 못하고 있는데, 문제는 그렇고 그런 사이에 빠져나갈 틈이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는 거다.//
오필녀 강경 갔다 / 박제영
첫사랑에 실패한 것도 결혼을 두 번이나 실패한 것도 이름에 박힌 도화살 때문이라던, 오필녀나 오필리아나 참 박복한 이름이라며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까페 이름도 오필리아로 정했다던, 술이 얼큰해지면 박용래의 「울타리 밖」을 읊조리던, 이번에 진짜 강경 사내를 만났다고 술집 접고 고향 가서 오필리아 옷 가게를 차릴 거라던, 축하 난은 필요 없으니 자기를 주인공으로 울타리 밖 같은 시 하나 꼭 써달라던, 박용래의 「머리가 마늘쪽같이 생긴 고향의 소녀」를 닮았던, 강경 여자 오필녀가 갔다// 사내가 사랑을 속이고 직업을 속이고 가겟돈마저 꿀꺽 삼킨 것도 자기 이름 탓이려니 원망은 없으나 이제 이름을 지우고 싶다고, 吳弼女 대신 Ophelia로 묘비명을 새겨달라고, 복사꽃 흐드러진 봄 밤, 꽃잎 같은 유서 하나 남긴 채,// 울타리 밖으로/ 별이 되어/ 오필녀 강경 갔다//
연비聯臂 / 박제영
이것은 돌에 대한 기록이 아니다/ 이것은 가장 아늑한 것이 가장 아득해질 때,/ 이것은 가장 환한 것이 먹빛으로 가마득해질 때,/ 당신의 마음에 번지게 되는 어느 캄캄한 노을에 대한 기록이다// 찔레꽃 하얗게 흐드러진 봄날,/ 아우라지 돌밭에서 일생일석을 만났던 적이 있다/ 만 년을 흘러서 흙과 모래가 덧댄 색깔을 지우고/ 만 년을 굴러서 물과 바람이 덧댄 모양을 지우고/ 오롯이 물매만 남은/ 그믐달을 닮은 먹돌이었다/ 갖고 싶었다 정말로 갖고 싶었다/ 노을 같은 파문이 커질수록/ 돌도 마음도 노을 만큼 무거워졌다/ 마침내 발길을 되돌렸다/ 원래 자리로 돌려놓았다/ 영혼으로 탁본을 뜰 수는 있어도/ 차마 옮길 수 없는 그런 돌이 있다// 이것은 돌에 대한 기록이 아니다/ 노을이 질 때면 살아나는 살아서 아픈/ 당신의 심장에 새겨진 어느 파문에 대한 기록이다//
* 연비聯臂: ①서로 이리저리 알게 됨. ②다른 사람을 통하여 간접으로 소개 함.
영식이의 첫 / 박제영
김혜순 시인이 이미 밝힌 바이지만/ 첫은 첫이라고 부르는 순간 사라지는/ 그래서 영원히 닿을 수 없는 것/ 첫에게는 그래서 늘 서툴고/ 첫에게는 그래서 늘 미안하다// 내 친구 영식이에게 지수가 그렇다/ 술에 취한 날이면/ 세상의 모든 아비들을 대신해서/ 내 친구 영식이는 첫딸 지수에게 미안해 한다/ 죽을 때까지 그럴 것이다//
봄날은 간다 5절 / 박제영
손가락 걸고서 맺은 약속 부질없더라/ 날마다 조금씩 변해가며/ 어느새 남남처럼 멀어진 길에/ 너는 내게 뭐였던가/ 나는 네게 뭐였던가/ 다시는 오지 마라 봄날은 간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 박제영
방심한 얼룩말이 무리에서 벗어난 그 잠깐의 틈, 사자는 집요하게 그 틈을 물고 늘어졌다. 발버둥을 칠수록 사자의 이빨은 얼룩말의 목덜미를 파고 들었다. 지친 사자가 죽은 얼룩말을 내려놓고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하이에나 무리가 집요하게 그 사이를 물고 늘어졌다. 사자는 크고 육중한 이빨을 드러내보지만 이미 틈을 파고 든 하이에나 무리를 감당할 수는 없었다. 배를 불린 하이에나 무리가 떠나자 대머리독수리 떼가 뼈에 붙은 살점을 뜯기 시작했다. 까악 까악 늙은 바오밥 나무 위로 까마귀들이 새까맣게 몰려들었다.// 그렇게 천 년을 건기와 우기가 반복되었을 것이다. 늙은 바오밥 나무는 그렇게 천 년을 살았을 것이다. 얼룩말과 사자와 하이에나 그리고 대머리독수리와 까마귀들의 생애를 던진 소란 속에서도 늙은 바오밥 나무가 고요한 까닭일 것이다.//
* 아프리카 어딘가에 오천년을 살았다는 늙은 바오밥 나무가 아직도 청청하게 살고 있다는 풍문이 있다.
뇨의尿意 / 박제영
가시내랑 머스마랑 오줌이 닿으면 얼라를 배는 기라. 어른들은 단지 아이들이 아무데나 고추 내놓고 오줌 누지 말라고 그리했던 것인데. 일곱 살이 그 속 뜻 어찌 알까. 담벼락 끼고 가시내는 이쪽에서 머스마는 저쪽에서 오줌을 누었던 것인데. 오줌줄기 흘러 한 데서 만난 것인데. 담벼락 끼고 넘겨보다 두 눈 마주쳐 부끄러워 도망쳤던 것인데. 머스마는 머스마대로 가시내는 가시내대로 얼라를 밴 줄 알고 난 이제 니 끼다, 넌 이제 내 끼다, 한 건데.// “엄마, 아기는 어떻게 생기는 거야?” “그건 엄마랑 아빠랑 사랑해서 아빠 아기씨랑 엄마 아기씨가 만나면 생기는 거야. 엄마 뱃 속에 아기집이 있는데 거기서 열 달 동안 자라면 세상에 나오는 거지.” 일곱 살 딸내미와 아내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는데, 자꾸만 오줌이 마렵다. 문득 그 가시내가 궁금해지는 저녁이다.//
금슬琴瑟 / 박제영
세밑이라 떼어낸 헌 달력, 한 달 한 달 뒤로 넘기던 아내가 눈을 흘기며/ 뒷산의 딱따구리는 없는 구멍도 잘도 파는구먼/ 딸랑 세 개가 뭣꼬!// 박봉의 구급 면서기가 가진 것 전부였던 노총각한테 시집온 것도 모자라서, 호강은 고사하고 꽃잎 다 지도록 쎄빠지게 고생만 시킨 것이 미안해서, 생각할수록 미안해서, 이태 전 큰 딸 시집보내던 날, 꽃대마저 시든 마누라, 재물이 안 되믄 육보시라도 해줘야 않겠나, 더 헐기 전에 몸이라도 호강시켜줄 끼라고, 그때부터 응응한 날을 빨간 하트로 달력에 표시해 온 것인데// 설마~ 줘봐라/ 이월에 한 개, 오월에 한 개, 구월에 한 개/ 앞으로 세고 뒤로 세고 눈 씻고 다시 세어 봐도/ 틀림없이 딸랑 세 개!// 헌 달력 같은 재붕씨, 새 달력을 쿵쿵 걸면서/ 두고 봐라 새해에는 열 개!/ 아니, 열두 개!/ 내 단디 채울 텐께로//
스파르타쿠스 / 박제영
서울 변두리에 짐을 푼 그해, 한강은 자주 범람했고 김신조가 박정희의 목을 따겠다고 북악산을 넘어왔지만 정작 우리 집을 덮친 건 검은 양복의 세리들과 무장한 건달들과 붉은 차압 딱지들이었다고// 아랍과 이스라엘의 지루한 전쟁, 중동의 사막을 건너온 석유파동의 한파는 매섭고 길었다고// 전쟁에 패한 아버지는 식량과 땔감을 구해오겠다며 깊숙하고 캄캄한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고// 해가 지고 여동생의 기침이 잦아들면 흐린 백열등에 기대어 밤새 봉제인형에 까만 눈을 달던 어머니, 박쥐처럼 어머니의 눈은 캄캄해졌다고// 이제 아버지를 안개 속에서 찾아와야겠다고, 이제 어머니를 어둠 속에서 꺼내주어야겠다고, 그러니 원한다면 누구의 목이라도 따주겠다고, 어떤 전쟁이라도 기꺼이 이겨주겠다고// 그렇게 그는 황금제국의 용병이 되었다//
원식이 아재 -"아트 캠페이지 2014-아직도 슬픈 열대 展"에 부쳐 / 박제영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상사, 김추자를 입에 달고 다니던/ 한 쪽 다리와 맞바꾼 것이라며 무공 훈장을 가슴에 달고 살았던/ 아랫샘밭 원식이 아재는 베트남 참전 용사였습니다/ 어쩌다 술판이 벌어지기라도 하면/ 아재들은 저마다 무용담을 늘어놓곤 했는데요/ 검은 비가 쏟아지는 월남의 밀림을 종횡무진 누비던/ 원식이 아재의 무용담을 감히 누구도 당해내진 못했습니다/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박상사, 원식이 아재의 무용담이 끝난 건/ 길고 긴 무용담이 끝난 건/ 원식이가 대학에 입학했던 1988년의 일입니다/ 서울올림픽의 뜨거운 열기가 잠실을 달구었던/ 티비며 신문이며 올림픽 뉴스를 전하느라 난리법석을 떨었던/ 그해 여름, 열아홉 살 원식이가 피를 토하고 죽었습니다/ 원식이 아재 핏속에 흐르는 고엽제가 원인이었습니다/ 고엽제가 대물림될 줄 몰랐다며/ 내가 자식을 죽였다며/ 사흘낮밤을 통곡하던 원식이 아재는 농약을 마셨고/ 원식이 아재의 무용담은 마침내 그렇게 끝났습니다/ 부검을 했는데 원식이 아재의 뱃속에서 무공훈장이 나왔다는 얘기를 끝으로/ 우리집 아재들의 오래 된 무용담도 그렇게 끝이 났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나는 왜 26년 전 죽은 원식이 아재를 불러낸 것일까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2014 아트 캠페이지-아직도 슬픈 열대 展에/ 원식이 아재를 전시하기로 한 것일까요?// 도대체 누가 원식이를, 원식이 아재를 죽인 걸까요?//
달 궁뎅이 / 박제영
살다보면 이런 일도 있는 거다// 술반물반 오줌 누는데/ -아저씨 똥꼬 닦아줘// 돌아보면 서너 살쯤 되는 계집애, 달덩이 까들고 있는 거다/ -엄만 어디 가셨니/ -몰라 빨리 닦아줘//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고 똥꼬를 닦아주는데, 아이 엄마 뛰어오는 거다/ -지금 뭐하는 거예욧!/ -뭐 하다니 보면 모르는가, 당신 아이 똥 닦아주고 있잖은가/ 이 여자 나를 아래 위로 훑으며 별 일 다 있다는 표정이다// 포장마차로 돌아와 혼자 웃고 마는데/ 술을 따라주던 친구 녀석 실없이 왜 웃냔다/ -술잔에 달 궁뎅이가 빠졌잖아/ 천막 틈으로 달이 출렁거리는 거다//
부적절한 관계 / 박제영
의사가 문을 닫더니 조심스레 묻는 거다 혹시 최근에 그러니까 뭐랄까 부적절한 관계는 없었나요 의사 양반 지금 적절한 관계도 되질 않아서 찾아온 것인데 부적절한 관계는 무슨! 당최 심이 서지 않는 이유나 속 시원히 밝혀주슈 두어 시간 검사 끝에 의사 처방이란 게 스트레스 때문이란다 화가 뿌리 끝에 고인 탓이란다// 돌아오는 길에 곰곰 생각하니 의사 말이 맞다 부적절한 관계가 맞다 내 누구하고 적절한 관계를 유지했던 적 있었나 적절한 아들이었던 적이 있었나 적절한 남편이었던 적이 있었나 한번이라도 한사람에게라도 적절한 관계를 가졌던 적이 있었나 모두에게 나는 부적절한 관계였던 것 그 화가 뿌리 끝에 고였던 것//
남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 박제영
K와 L과 S는 당분간 내 밥줄이므로. 당분간 저들이 내 목을 쥐고 흔들면 흔드는 대로 흔들려야 하므로. 오전 골프를 마치고 예약한 사슴목장을 찾았다. "박형, 내가 전국 다 가봤는데 이 집 엘크가 최고여. 저 시커먼 불알을 봐. 엄청나잖아. 오늘은 저 놈으로 하자구." 마취된 숫사슴의 뿔 밑둥에 고무줄을 단단히 감고 능숙한 솜씨로 톱질을 하는 목부. 순식간에 뿔이 잘리고 고무줄을 풀자 솟구치는 붉은 피. "워메 진국이구만. 한 잔씩 돌리지." "뜨끈뜨끈한 게 아랫도리에서 벌써 신호가 오는데." "박형 뭐해. 빨리 마시라구. 사내란 말이여 모름지기 좆심으로 사는 거 아니겠어. 우린 말이여 좆심 없는 놈한텐 십 원도 안 빌려줘." 까짓 거 눈 딱 감고 들이켰다.// 화장실은 사육장 바로 옆에 있었는데, 마취 풀린 녀석이 비틀거리고 있었는데, 암컷들 무리 속으로 들어가다 말고 잠시 눈을 마주쳤는데, 그날 밤 아내와 그짓을 하는데 도무지 심이 서질 않는 거였다.//
푸르른 소멸 1 -사막 / 박제영
누군가는 사막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다 하는데/ 시간을 건너온 것은 모두 사막이다// 소슬히 뒹구는 낙엽이 사막의 무늬를 지녔듯이/ 늙으신 아버지 저 주름 또한 사막의 징후이듯이// 시간이 걷히면 사막이 된다//
푸르른 소멸 2 -낙엽 / 박제영
숲의 입구(출구일지도 모르는)/ - 언제나 이곳에서 가을이 시작되곤 했지/ 어느새 희고 푸른 연어떼처럼 몰려든/ 낙엽들// 바다의 생애,를 기억하지 못하는 연어의 은빛비늘들, 단풍처럼 물든/ 물 마른 계곡에서/ 아직 지상에 내리지 못한, 푸른 정맥이 훤히 비추는 저 낙엽의/ 가장 높았던 생애,를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하지, 기억, 기어이/ 완전한 문장,을 기억하지 못하는 말더듬이 시인이여// 이슬 젖은 볕이 아직 마르기도 전에/ 지상을 떠나는 자들, 낙엽들/ 태초에 코라가 있었다 카오스가 있었다 있다 말의 혼돈 말의 哭// 그러면 저기, 저 가을숲을 덮어버린/ 푸르른 생애의 소멸들//
푸르른 소멸 3 -덫 / 박제영
기억이 닿지 않는 아주 먼 옛날 혹은 먼 훗날의 이야기들이/ 발길이 닿지 않는, 天涯高度 빙하의 계곡에 묻힌 이야기들이/ 자꾸만 꿈에 보여 꿈에 보여/ 이유도 모른 채 그저 막연히 오한과 신열에 들뜨던 날/ 아주 오랜 그 옛날 이전부터 결정된 운명이 드러나던 날/ 그곳에서 나는 보았다/ 덫에 걸린 향유고래를/ 바다를 향한 그러나 체념한 검은 눈을, 보았다/ 한때는 바다의 제왕이었던 그러나 이제 얼음 속에 갇히어/ 화석이 된 고래의 운명을, 보았다// 바다 속에서 바라본 하늘은 황홀하도록 눈이 부셨을 것이다/ 태양은 그 어느 때보다 이글거렸을테고/ 그리고 그는 보았을 것이다 푸른 초원과 그곳의 제왕이었던 자신을/ 거역할 수 없는 욕구, 바다 위를 솟구쳐 오른 고래는/ 하늘로 향한 길, 그러나 덫일 수 밖에 없는 길을 떠났을 것이다// 히말라야에서 발견된 고래의 화석을 두고 학자들은 의견이 분분하지만/ 아는가/ 오늘 이 도시에 닻을 내린 당신들의 자화상인 것을/ 그러면 결국/ 덫에 걸린 당신의 야생이 다시 천년 뒤 어느 바다 속에서/ 화석으로 발견될테지//
푸르른 소멸 4 -여전히 부재한 / 박제영
PC의 CPU에 저장된 당신의 기억들이/ - 알고보면 0과 1의 조합이 만들어낸 단순함들이겠지만/ 어느 일순 사라진다. 재생불능의 상태는 일상적 경험이 되었지 않은가// 부재의 가능성을 내재한 아니 이미 혹은 여전히 부재한 존재들// 0과 1 사이에 흐르는/ 소름끼치는 당신과 나의 영혼을 뒤흔드는/ 전율, 電律// 피씨를 꺼라 씨피유 대신 당신의 심장을 켜라//
푸르른 소멸 5 -목련 / 박제영
바람이 불었을 뿐인데/ 피처럼, 목련꽃, 저리 흩어졌구나/ 봄바람, 어디에, 칼날 있었던가/ 단단했던 목숨이 저리 수이 떨어졌는고// 나무 끝(존재와 부재의 중간쯤이겠지 아마도)/ 아스라이 매달린 채(존재하면서 부재한)/ 아침 이슬에 한 없이 젖어드는 살아남은 꽃잎들이여/ 안도하기엔 아직 이른 남은 생애의 아득함/ 그래도 얼마나 좋으냐고 얼마나 다행이더냐고 가슴 쓸기에는// 한 생애 중량을 못이겨 추락한 목련꽃/ 이 슬픈가/ 바라보는 자여/ 오늘 밤 찾아들 바람이 두려운가/ 두려워 말라 중량이 없어 구천을 헤매는 귀신이 되기보다야/ 썩어 거름이 될 저 명징한 죽음이 좋지 않은가/ 흙으로 돌아가 뿌리로 가지로 잎으로 그 영혼 다시 깃들테니// 바라보는 자여 다만 슬픈 것은/ 바라보는 당신의(혹은 나의) 그/ 어디에도 깃들지 못하는 부유물로서의 생애가 아니더냐/ 무중량한, 그 폐허와 같은,//
푸르른 소멸 6 -허공의 집 몰래 들어와 / 박제영
이곳은 여자들의 집이다. 과거엔 존재하지 않았던(여전히 부재일지도 모를) 말(言)들의 집, 살류쥬*! 살려달라고, 상처입은 살들이 일어나 드디어 뼛 속의 멍을 드러내는 집이다.// 도둑처럼 몰래 들어와 비밀의 빗장을 연다. 방마다 가득한 아직도 마르지 않은 흔적들, 이미지들, 말들의 얼룩들, 벽에 걸려 있거나 허공에 매달려 있는 저, 아슬아슬한 멍자국들. 내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들이, 그 아들의 아들의 아들들이 만들어낸 저…// 이곳은 하늘에 세운 지하세계이거나 지하에 세운 천국일지도 몰라. 존재와 부재가 겹치는 곳. 물과 불이 하나되는 곳. 생명이 시작된 곳. 어머니 대지, 어머니 나라//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말았어. 불구의 家系를 알고 만거야. 거울을 들여다보니 몸을 뚫을 듯 하얗게 일어나고 있는 저 불순한 피. 오, 어깨에서 가슴으로 온몸으로 번지는 푸르른 멍들// 그들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돼. 그들이 올 때까지. 그들이. 나를 다시 자궁에 품어줄//
* 살류쥬: 지역과 여성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여성주의 문학도들이 서울중심, 남성중심, 제도권중심의 문학지형도를 바꾸려는 목적으로 만든 문화동인.
푸르른 소멸 7 -적색등에 멈추고 바라본 풍경이 낯설어 / 박제영
저 멀리 황색등, 투비 오어 낫투비/ 생을 유혹하는 타나토스의 눈 빛, 그리하여 죽음을 예감하는/ 언제고 붉은 시체로 그에게 다가가리라/ 적색등에 멈추고 바라본 풍경들이 낯설다 저기 저// 불순물들 저 길 위 덮어버린 소음들 매연들 매음들/ 너희 목숨은 내가 관장하리니 이 순간 아니 모든 것이 상관없어/ 너희는 죽음의 쾌락을 즐기라 이 속도와 속도의 열락을!!/ 타나토스를 향해 질주하는 한 없이 열린 폭주족들 희열에 들뜬 굉음들// 횡/단/보/도/ 생을 담보한 흰색 줄을 따라/ 불안에 떠는 아이들의 손들, 높이 쳐들린*, 살려달라고,/ 길 잃은 어린 양을 구해줄 천주는 교회당 벽 속에 갇히고/ 갈래갈래 찢어진 길 위로 쏟아지는 한 줌 햇살이 눈이 부신/ 하오/ 반대편 차선의 삼중추돌, 실려가는 주검들// 정오의 희망곡이 희망에 찬 노래들을/ 무심히 내보내는데/ 뒷 차의 날카로운 크랙션이 자꾸만 자꾸만 불쾌하다/ 심장부터 차오르는 살의, 殺意/ 룸미러 속 타나토스의 푸른 눈 빛//
* 높이 쳐들린 : 노혜경님의 시 '높이 쳐들린'에서 가져왔습니다. 그 느낌까지도.
푸르른 소멸 8 -푸르른 소멸의 이미지로서의 김정란 시인 / 박제영
일생을 담아내는 어느 한 순간의 에너지/ 빛이거나 파장이거나 그도 아니면 말이거나/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어부가 그 찰나의 물고기를 잡아내는 것은 몸의 순발력이 아니다/ 心眼의 순발력이다// 어부여 심안의 순발력을 지닌 시인이여/ 일생을 담은 단 한 컷의 이미지가 시의 생명력임을 직감한 시인이여// 당신의 시를 읽는다/ 찰칵, 단 한번의 열림만을 허용한 채/ 어느새 달아나는 당신의 말들/ 어느새 건너편에서 반짝거리는 송사리떼// 재생할 수도, 복제할 수도 없는 이미지/ 에/ 대해 생각해본다/ 생명을 복제하는 순간/ 남는 것은/ 그림자일 뿐이라는//
푸르른 소멸 9 -잘라낸 머리: 노혜경 시인의 <잘려진 머리>를 변주함 / 박제영
잘라낸, 내가 잘라낸 저 머리 선반 위의 저/ 아직도 웅얼대는 소리 새어나오는 입술/ 침묵하라 했건만/ 목 잘린 채 나를 노려보는 저 눈/ 빛// 두려운 나는 긴 머리채를 쥐고 흔들다 팽개친다/ 피범벅 속에서 웅얼거리는 소리 노려보는 눈/ 무쇠 뻰찌로 이빨을 뽑아버려야 해/ 저 분노의 얼굴을 완전히 해체해야 해 복종하도록/ 침묵하도록 영원히/ 문신을 새겨야하는 거야 침묵의 입이라고/ 나를 태어나게 한 저 입을, 기억을 막아야 해// 막아버린 입 너머 열리는 저 구멍은 무어지/ 광야를 달려오는 말발굽소리와 같은 저 동굴의 소리는 무어지/ 심장을 찢어낼 것 같은 저 땅의 울림은 무엇이지// 유성처럼 내리는 빛나는 돌들 피할 수 없는/ 아, 아,/ 우, 우,/ 나는 잘못한 게 없는데...//
푸르른 소멸 10 -구체적으로 살아있다는 것은 / 박제영
아내의 입덧으로 냉장고엔 몇 달째 소금에 절인 간고등어가 그대로 보관되어 있다/ 문을 열 때마다 영혼의 후각을 자극하는 비릿내/ 창백한 주검의 살에서 풀어지는 푸른 바다의 삶에 대한 기억, 냉장고로도 냉동시키지 못한// 저 고등어는/ 어쩌면 삶도 죽음도 아닌 경계에 갇혀버린 유령일지도 모르겠다/ 썩어 양분이 되는 명징한 죽음도, 그물에 걸리던 그 순간까지 살아내기 위해 투쟁했던 바다의 삶도 아닌/ 그림자와 같은// 냉장고를 열면 그곳엔 어김없이/ 절여진 주검의 차가운 눈빛과 그 눈을 통과한 바다의 비릿내가 현기증처럼 몰려든다// 구체적으로 살아있다는 것은 얼마나 설레는 일이냐/ 구체적으로 죽었다는 것은 또한 얼마나 설레는 일이냐/ 절여진, 냉동된 저 그림자와 같은 단지 한덩어리의 유령에 비하면// 문을 열고 나를 들여다보는 당신과/ 당신을 들여다보는 등 뒤의 시선이/ 중첩되면서 서서히 냉장고의 문이 닫힌다./ 어둠, 막이 내리고 어디선가 들리는 어부의 그물소리/ 푸르르 떨리는 바다의 지느러미들//
푸르른 소멸 27 -歸路 / 박제영
비가 오면, 깻묵을 개어바른 어항을 묻고 돌무덤으로 샛길을 터주면 그만이었다 밤새 물이 불고 수압이 높아지면 제 터를 떠날 수밖에 없는, 샛길을 통과할 수밖에 없는 약시의 고기들이 있었다// 비가 그치고, 기억을 더듬어 어항을 꺼내면, 참붕어와 은어 몇 마리 아직도 믿기지 않는듯 지느러미를 펄떡거렸다// 비가 내린다, 새벽 두시, 범람한 길 위로 제 터를 잃은 것들이 쏟아져 나온다, 회귀어回歸漁처럼 꼬리에 꼬리를 문 채, 춥고 흐린 강을 건넌다, 건널 수 없는 길인 줄 알면서도, 다다른 그곳이 제 뼈를 드러내야 하는 곳인 줄 알면서도, 여기까지 왔다// 갑자기 좁아지는 길, 앞의 무리를 따라 핸들을 꺾는다, 돌아나올 수 없는 외길인 것을 알지만, 약시의 눈으로 혼자 가기에는 이 어둠이 너무 깊다//
푸르른 소멸 40 -즐거운 놀이 / 박제영
딸아, 가을 숲에 가자꾸나/ 마침내 충분히 살았다 이윽고 지고 있는 것들 보여주마 물이었으니 물로 돌아가고, 흙이었으니 흙으로 돌아가고 있음을// 모르겠어요// 딸아, 가을 숲에 가자꾸나/ 후툭 후투툭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빗소리, 바람소리, 낙엽소리, 벌레소리, 새소리, 짐승의 울음소리/ 들려주마 마침내 모든 소리/ 허이 헤이허 오호호호 오 오행, 만가(輓歌)로 화음됨을// 모르겠어요 무서워요// 가엾은 것 두려워하지 말거라 이것은 숲이 겨울을 준비하고 봄을 맞이하는 즐거운 놀이란다 언제고 아빠도 가을 숲이 될 것이야 그러니 딸아, 그때가 되면 슬퍼할 일이 아니라 오늘 이 놀이를 기억해야 할 것이야 즐거운 놀이를// 모르겠어요 자꾸 눈물이 나와요 이젠 집에 가고 싶어요//
푸르른 소멸 41 -까치밥 / 박제영
첫눈이 내린 지 오래도록, 가지만 저리 흉흉하도록, 붉은 감 하나 까치밥으로 매달려 있어, 참으로 미련한 집착이구나, 오늘 그예 사라지고 보니 그것이 아니었어, 잎이 다 진 나무들 한 모양으로 잔 가지 흔들리는데, 어느 것이 감나무고 어느 것이 단풍나무인지 모르겠는 것이야, 문득 내 안의 마지막 까치밥 하나는 무엇이게 하는, 붉은 혼과 같은 까치밥 하나가 있기는 있는 것일까, 모를 일이다//
푸르른 소멸 42 -통화중 / 박제영
남편은 부재중이야 아니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고 해야겠지 정확히 말하면 남편은 퍼즐 그림이었어 처음에는 모든 조각이 맞춰져 있었고 가끔씩 흩어지더라도 다시 맞추면 되었지 그건 아주 쉬운 일이었어 그런데 어느 날부터 퍼즐 조각이 더 작아지고 많아진 거야 점점 더 맞추기가 어려워진 것이지 물론 어렵게 어렵게 맞출 수는 있었어 문제는 말이야 아예 조각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야 간신히 맞추고 보면 군데군데 빈 곳이 생기고 그 조각 그림이 어떤 모양이었는지 생각도 나질 않아 이제는 몇 조각 남은 것으로 다만 상상을 하곤 하지 원래의 그림을 말이야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그가 읽던 책들 속에서 아무렇게 쓰여진 낙서나 밑줄 그어진 문장으로 남편의 조각을 맞추어 보기도 하지만 조만간 결국에는 상상만으로 그림을 맞추게 되겠지 그거 알아? 가끔 잠든 남편의 얼굴을 만져보는 것이야 그러면 아직 몸의 부피와 체온이 느껴지지 아직은 말이야 그런데 그런 날은 언제나 악몽을 꾸곤 해 이윽고 투명해진 그가 나를 부르는데 나는 도무지 그를 찾을 수가 없는 거야// 지금 당신의 아내는 통화중인가 그렇다면 거울을 들여다보시길 서서히 투명해지고 있는 당신을//
푸르른 소멸 43 -삶이란, 그 반대편이라 믿고 있는 죽음이란, 가령 이런 것이다 / 박제영
#1. 망각의 레이스// 일상은 망각이라는 레이스를 짜고 당신의 밥상을 덮고, 레이스는 삶을 덮고 죽음마저 덮어버린다, 세 살 된 조카 해맑은 웃음 속에서, 이제 누가 기억할 것인가, 백일이 채 되지 않아 모세기관지염으로 중환자실에 입원해야 했던, 생멸의 예각 위에서 날카롭게 흔들렸던, 제 어미 밤낮으로 살려달라고 눈물 흘렸던, 그 지난했던 일들을, 그러므로 죽음의 그림자는 더 이상 어디에고 없는 듯 보였다// #2. 우주를 삼킨 씨앗 하나// 한 사내 응급실 앞에서 울고 있다, 여자가 사내의 옷을 잡아 흔든다 실성한 것처럼, 사연인즉, 첫돌 막 지난 자식 눈을 들여다보면서 네가 곧 우주로구나 감격하다가 마침 잘 익은 포도송이 한 알 주었는데 그것이 기도에 걸린 것이다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은 일, 장례식장 뒷마당 검은 포도나무 한 그루 심어져 있다면 그렇다면 우주를 삼킨 씨앗 하나 자란 것이다, 생각해보면 모두 제 역할에 충실했을 뿐, 누구에게 죄를 물을 것인가// #3. 산란탑// 케이비에스 특집 다큐멘타리를 본다, 동강의 어름치가 산란을 하면서 돌탑을 쌓는다, 일층, 이층, 삼층, 이윽고 오층탑이 세워진다, 층마다 마련된 알들의 보금자리, 어름치는 알고 있다, 또한 제 무덤인 것을, 사흘의 탑돌이가 끝나고 어름치 다른 물고기들의 먹이가 될 때, 알에서 깨어난 치어들 돌 사이에서 보았으리라 어미의 죽음을, 그렇다면 말해 보라 당신은 지금 삶을 다큐멘트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죽음을 다큐멘트하고 있는 것인가//
푸르른 소멸 45 -플라스틱 플라워 / 박제영
마을 입구, 에덴화원에서는 생화 대신 플라스틱 플라워를 판다, 그 집에 들어서면 꽃보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현판이다, 도나 에이스 아에테르남 레퀴엠, 뜻을 아는 사람도 없지만 물어보는 사람도 없다, 흠칫 궁금한 표정을 들키면 검은 외투에 붉은 스카프를 두른 주인 남자는 어김없이 중얼거린다, 그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리니 네 피는 이제 휘발하지 않을 것이며 뼈와 살은 더 이상 부식하지 않으리라, 도나 에이스 레퀴엠, 그럴 때면 입술 사이로 흰 송곳니가 드러난다// 몇 년 후// 마을에는 집집마다 플라스틱 플라워가 피어 있다 창백한 달 빛 아래 검은 개 한 마리 골목길을 빠져나가고 있다// (음악) 미완성 레퀴엠 d단조 K.626이 흐른다// 다시 몇 년 후// 공동묘지 앞 정류장, 낡은 시외버스가 먼지를 날리면서 멈추어 선다, 창 밖을 내다보던 아이가 무엇인가를 가리키며 묻는다, 엄마 저기 저 도나 에이스 레퀴엠이 뭐야, 방금 올라 탄 사내의 알 듯 모를 듯한 미소// 2003년 1월 8일// 라엘리언 무브먼트* 한국 지부 대변인 신디氏(44)는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영생이며 그 수단은 인간 복제"라고 단호히 말했다//
푸르른 소멸 49 -죽음은 삶의 일부가 아니라는 비트겐쉬타인氏의 주장은 틀렸다 / 박제영
배추벌레 속에 알을 낳고 알은 배추벌레를 먹고/ 열매가 씨앗을 품듯이 죽음이 삶을 품는 것이니/ 무덤을 뚫고 나와 이윽고 나나니벌 날아오른다// 세상의 모든 경전과 법전이/ 죽은 자가 산 자를 위해 남긴 기록이라면/ 죽음이 삶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상처喪妻한 장자莊子가 곡哭은 않고 왜/ 대야를 두드리고 노래를 불렀겠는가// 알고 보면 우리 모두/ 거대한 무덤을 딛고 피는 패랭이꽃이 아니겠는가//
푸르른 소멸 56 -닭집 여자 / 박제영
낡은 회벽으로 빨래처럼 널린 붉은 닭들/ 그 너머의 속풍경을 들여다본 적이 있다// 닭집 여자는 숙련된 솜씨로 닭을 잡았다/ 털을 뽑고 내장을 발라내고 피를 헹구고// 뜨끈한 내장들을 닭장 속에 던져 넣으면/ 닭들은 서로 먹겠다 한바탕 소란을 피고/ 닭집 여자는 그 모습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제/ 그 여자/ 내 거울 속에 있다//
푸르른 소멸 57 -낮달 / 박제영
청청한 하늘 저/ 돌,/ 그림자 같은// 수만 년/ 새들이 알을 낳고 날개를 묻은 곳/ 이제는 투명해진/ 무덤처럼 엎드려 있는 저/ 여자,/ 달 같은 여자//
푸르른 소멸 59 -모월모일 / 박제영
모월모일 날씨 우울 시베리아를 건너온 북서풍이 골목을 휘돌아 나가고 있음, 이렇게 시작하자, 몇 건의 계약이 취소되고 직원 월급을 위해 은행 대출계에 다녀온 이야기는 빼버리자, 다음 달이면 회사 문을 닫을 수 있다는 말도 진부하다, 오늘도 어제처럼 퇴근했고 몇 개의 골목길을 지나 집에 돌아왔다고, 저 풍경들, 가령 말들이 매립된 헌책방, 시간들이 파업중인 시계방, 구두가게의 저, 길 위에서 닳지 못하고 세월 속에서 낡아진 구두들, 그리하여 좌판 너머 풍화되고 있는 표정들만 지나면, 그래 저 골목길만 지나면 거기 나의 집이 있다는 단순한 사실만을 기록하자, 生이 휘발되었다는 불길한 이야기는 쓰지 말자// 모월모일 영구차 한 대가 시장 골목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푸르른 소멸 60 -음모 / 박제영
1/ 카이로스의 시선으로 본 세기의 순간들,이란 부제가 붙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집은, 침묵으로만 말할 수 있는 이 모든 것,이라는 루이-르네 데 포레의 문장으로 시작되고,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테의 수기는, 사람들은 살기 위해 파리로 와서는 죽어가고 있다,는 말로 시작된다// 2/ 오늘 우체부가 건네준 속도위반 범칙금 고지서에 선명히 찍힌 시속 80km에 낀 검은 양복의 사내,가 당신이라는 증거는 없다, 당신은 시속 10만 7천2백80km로 공전하고 있는 이 별의 속도를 기억하고 있는가, 폴 고갱은 왜,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누구이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그림을 그려야 했는가// 3/ 당신은 단지 집적회로에 기억된 데이터에 불과하다, 아니라면 내 말이 틀렸음을 증명해봐라//
푸르른 소멸 63 -등이 아프다 / 박제영
崔가 내 등을 툭 쳤다 그 뒤로/ 金이 내 등을 툭 치고 갔다 그 뒤로/ 또 다른 金이 내 등을 후려 치고 갔다 그 뒤로/ 張이 내 등을 냅다 치고 도망쳤다// 등 뒤에는 손 닿지 않는 곳이 있다/ 어쩌면 불가항력인/ 그 곳에 시퍼런 멍이 들었다// C가 내 등을 쳤다 그 뒤로/ K가 내 등을 후려쳤다 그 뒤로/ J가 내 등을 쳐먹었다// 등 뒤에는 손 닿지 못하는 곳이 있다/ 그 곳에 시퍼런 못이 출렁거린다// 사업을 시작하고부터/ 등 뒤에 시퍼런 못 박힌 사람들 자주 보게 된다 그들도 나처럼/ 등이 아프다//
푸르른 소멸 66 -단풍들다 / 박제영
빛이/ 오래 삭힌 제 뼈를 이윽고 드러내는 일, 붉은/ 산이 환하다// 아버지 황혼 속으로/ 들어가신다// 단풍빛이, 환하다//
푸르른 소멸 69 -물수제비가 나를 흔든다 / 박제영
1/ 딸이 운다 물수제비뜨다 말고 딸이 운다// 가라앉아 돌이 가라앉아/ 달처럼 이쁜 딸이 운다// 돌아앉은 작은 등에 파르륵 파문이 인다// 2/ 이리 온 아가, 아비 등에 업히렴// 조금 멀리 가고 조금 오래 뜰 뿐이야/ 지금이야 너를 업고 물수제비처럼 얕은 내를 건너고 있지만/ 수심은 깊어질 것이고 아비도 끝내는 가라앉을 것이야// 강은 잠시 길을 내어줄 뿐, 돌멩이가 강을 건널 수는 없단다// 들었는지 못들었는지/ 돌처럼 둥글게 딸이 잔다/ 아비 등 위에 새근새근 파문을 새긴다// 3/ 내가 뜬 물수제비가 나를 흔든다, 오래 전 내가/ 가라앉은 아버지를 흔든 것처럼//
푸르른 소멸 70 -유성우流星雨 / 박제영
1// 1929년 스물 아홉의 이장희가 죽었다./ 1935년 서른 둘의 김소월이 죽었다./ 1937년 스물 일곱의 이상이 죽었다./ 1938년 서른 넷의 박용철이 죽었다./ 1945년 스물 여덟의 윤동주가 죽었다./ 1945년 스물 아홉의 김종한이 죽었다./ 1956년 서른의 박인환이 죽었다./ 1968년 마흔 일곱의 김수영이 죽었다./ 1969년 서른 아홉의 신동엽이 죽었다./ 1988년 마흔 둘의 박정만이 죽었다./ 1989년 스물 아홉의 기형도가 죽었다./ 1991년 마흔 셋의 고정희가 죽었다./ 1992년 서른 아홉의 이연주가 죽었다./ 1993년 서른 넷의 진이정이 죽었다./ 1994년 마흔 여덟의 김남주가 죽었다.// 모두 요절했다.// 2// 아니다, 영원히/ 살아있다 저 광활한 우주 속에서, 별이 되고 유성이 되고// 3// 시인이란, 수억 년 죽어서도 빛나는 별이니/ 지상에 잠시 유배되었던 별이었으니/ 서른 아홉의 내가 죽는들 어떠하리 마흔의 내가 죽는들 어떠하리// 당신 먹먹한 가슴에 서른 아홉개의 유성우로 내릴 수만 있다면/ 마침내 소멸이라도 좋으리//
* 박정만의 시, <종시(終詩)> 인용
푸르른 소멸 71 -빈집털이 하느님 / 박제영
곰곰 생각해보면/ 빈집털이 하느님이시다/ 오직 빈 집만을 터는 도둑님이시니// 마침내 빈 집,/ 털면 먼지 뿐인 빈 집,/ 어김없이 털어내신다 먼지마저 남김없이// 머잖아 내 집에도 오실 것이니,/ 혹여 그냥 가시면 아니 될 일이니,/ 그때까진 죄 비워야 하지 않겠나// 죄다 비웠으니 즐겁게 털어가시라고//
박제영(朴濟瑩) 시인
1966년 강원도 춘천에서 출생, 1990년 고대문화상 시 부문에서 수상하고 1992년 '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그런 저녁’ ‘식구’ ‘뜻밖에’ ‘푸르른 소멸-플라스틱 플라워’ ‘소통을 위한 나와 당신의’ ‘안녕,오타뱅가’ 등이 있으며 산문집 ‘소통의 월요 시편지’ ‘대화’ ‘사는 게 참 꽃 같아야’ ‘우리 동네 현식이 형’ 등과 번역서 ’어떤 왕자‘를 냈다. 시낭독회문학상을 수상했다. 달아실출판사 편집장이며 한국작가회의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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