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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김수우 시인

부흐고비 2021. 10. 29. 08:33

이승잠 / 김수우
미음 몇 술 뜨고 진통제를 삼킨 엄마/ 금세 잠에 떨어진다/ 어둠을 밝은 데로 끌어내려는 듯/ 입을 벌린 채 잠이 들었다// 벌어진 목구멍으로 매화가 피어났다 아, 아,/ 바람 한 점 없는 암병동 침상에서 홀로 한 꽃 떨어지고 한 꽃 터진다// 가슴팍 두 개의 낡은 창고엔/ 여든 여섯 갈피의 봄이, 여든 여섯 굽이의 매화숲이 살고 있었는가/ 덜겅대는 문짝 찐득찐득한 그리움을 밀고/ 돌아오는 매화, 돌아가는 매화/ 사랫길 아득하다// 조심조심 허물어지는 저 노동의 담장/ 먼지의 고집을 닮은 엄마의 창고는 전부가 사랑이었다/ 첫사랑을 오래 연습해온 모양/ 산그늘에 풀거미에 새벽달에게 혼자 젖물리던 날들/ 창고 속 그렁그렁한 눈물로 서성인다// 헝겊주머니가 된 창고, 이승잠 속에서/ 하루하루 고요하다/ 환해라,/ 일곱 남매 악착같이 빨아댄 젖망울을/ 투정 많은 세상에 아직 물리고 싶은 걸까 창가에 매화 날린다// 발톱 서너 개 시꺼멓게 죽어버린 발/ 빨간 꽃무늬 양말이 뜨겁다//

뿔에 대한 우울 / 김수우
연필 깎아 필통 속에 나란히 세우고/ 닳은 지우개 하나 넣는다/ 내일 모레 글피를 그렇게 준비하던 아홉 살/ 쓸 것도 지울 것도 많으리란 걸 알았을까/ 연필 끝에서 돋아나던 내 이름/ 몸속에 불 하나 가지고 싶었는지 몰라/ 연필촉 뾰족하게 갈던 정갈한 숨결/ 하루에도 몇 번씩 부러지는 연필심/ 하루에도 몇 번씩 촉을 세우던/ 오롯한 자만은 한 자루 미루나무로 자랐지/ 다 어디로 흘러갔을까/ 미루나무에 파도치던 꿈의 등비늘/ 쓰레기통 뒤지는 도심의 들고양이처럼/ 살아내라 살아내라 살아내라/ 손톱만 길어나고, 발톱만 길어나고// 툭, 무릎 위로 떨어지는 뿔 하나/ 몽당연필 같은 이름 하나//

내 속의 아프리카 / 김수우
언제부턴가 내 옆에는 커다란 코끼리가 살고 있다/ 햇빛 좋은 날에는 사막능선으로 따라다니고 안개 깊은/ 날은 보일 듯 말 듯 오아시스로 머물곤 했다 사하라의/ 새벽이라고 이름하다가 그냥 내버려두었다// 해가 석류알로 뚝 떨어지던 등짝에는 풀씨들이 날아/ 왔다 연한 손가락 내밀다가 하릴없이 바람을 따라갔다/ 속사랑이 주름 많은 두 귀로 자라는 동안 회색 살갗으로/ 두꺼워지는 견고한 절망, 살갗을 뚫고 긴 이빨로 뻗어나는/ 열망은 차라리 모래산을 끌고 사막을 넘는 바람이었다// 시시로 가슴팍에 우물 같은 발자국을 내었다/ 두개골/ 속에도 들어오고 쓸개 속에도 들어오더니 가끔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당황해서 둘러보면 어김없이 반대쪽에서/ 천천히 걸어왔다// 착하고 슬프고 엄한, 코끼리의 눈!//

붉은 사하라 / 김수우
3억8천만년전 곤충화석의 꽃가루, 공룡의 등에 비늘지던 빗방울, 천둥과 고요, 동굴벽에 그려진 암사슴과 빗살무늬토기, 숲을 나서던 원시인의 눈썹, 유목민의 별똥별까지 모두 비밀이다 몸을 헐어 사막이 된 것들 소멸은 날카로운 고독의 씨앗을 낳았다// 푸른 바다가 붉은 사하라가 될 때까지/ 사막은 얼마나 이빨 시린, 슬픔의 유전인자를 숨기고 있는 걸까// 바람부는 대로 이동하는 구릉을 넘어, 영원한 환영을 품은 가시나무를 따라, 먼 폐허를 살아낸 것들, 오랜 여행에 발톱이 곯은 것들, 마음을 헐어 사막이 되었다 설화를 찾던 옛 탐험가도 그들의 낮달도 모래씨앗으로 걸어갔음이여 초침으로 타오르는 뼈들이여//

聖발바닥 / 김수우
사하라의 노을을 넘다가/ 신발을 벗고 동쪽을 향해/ 무릎 꿇는다/ 모래비탈에 입맞추며 기도하는/ 흰옷 입은 모슬렘 사내/ 왜 엎드린 사람의 키가 더 클까/ 위대한 건 신이 아니라/ 모래로 빚어진 나그네다/ 흙먼지에 수만금 갈라진 聖발바닥/ 옷자락 날리며 핏빛 산맥을 다시 걸어가는/ 모래만 내짚는 모랫덩이의/ 맨꿈, 맨뒤꿈치/ 그 삼 억만년 퇴적된.//

전사(戰士) / 김수우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에서 걸어오는 사내와/ 딱 마주치고 싶다/ 무어인 전사임이 틀림없을 붉은 눈빛과/ 칼끝처럼 부딪치고 싶다/ 주름투성이 족장이 이마에 손을 얹었을 때/ 제 안에 살고 있을 적을 예감했을까/ 고독과 고독의 잔해를 디디며/ 사막을 넓히게 될 제 걸음나비를 알아챘을까/ 말라붙은 강줄기를 더 깊게 건너며/ 꿈의 활줄이 팽팽해진 그를/ 우연인 듯 무심히 비켜가리라/ 모래소용돌이를 메추리처럼 품고/ 장엄한 영혼의 춤을 추었을 발등을 슬쩍 훔쳐보며/ 기도를 읊조렸을 입술도 곁눈질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치리라/ 얼마쯤 가선 바람 때문인 듯 길이 낯선 듯/ 자꾸, 자꾸 돌아보리라/ 애초 사하라에 나선 건/ 수천 년 암벽화 속에서 걸어나온/ 원시의, 그 붉은 팔뚝이 그리워서였던 것을//

저, 모래씨앗 / 김수우
3억 8천만년 전 곤충화석에서 나온 꽃가루, 공룡의/ 등에 비늘지던 빗방울, 숲을 나서던 원시인의 맨발,/ 천둥과 고요, 동굴벽에 그려진 암사슴과 빗살무늬토기,/ 유목민의 별똥별까지 이제 모두 비밀이다 몸을 헐어/ 사막이 된 것들 소멸은 무수한 고독의 씨앗을 낳았다/ 푸른 초원이 붉은 사하라가 될 때까지/ 사막은 얼마나 눈시린, 슬픔의 유전인자를 숨기고/ 있는 걸까/ 바람부는 대로 이동하는 구릉을 넘어, 영원한 환영을/ 품은 가시나무를 따라, 오랜 여행을 살아남은 것들/ 마음을 헐어 사막이 되었다 설화를 찾던 옛 탐험가의/ 낮달까지 모래비가 되어 초침으로 타오르고 있음이여,/ 먼 내일도 날카로운 고독의 씨앗만 낳을 것이다//

사하라 편지 / 김수우
1/ 매일 종아리가 빨갛게 부풀어도/ 모래 걷는 법을 모르겠거든/ 모슬렘 우편배달부 일 년을 마주치고도/ 사하라가 낯설거든/ 아이들 검은 발로 뛰노는 시장통에 가라/ 한 마리 늙은 노새로 서 있는 사막을 보러 가라/ 흰 무명으로 얼굴을 가린 여자가/ 대추야자로 말린 사막을 팔고 있으리니/ 우기야* 백동전이 있는 대로 주고 한 됫박 사라/ 모래 묻은 대추야자 입안에 오물거리다/ 저절로 사랑하게 되는,/ 어머니 사막이니// 2/ 해가 모래 속에서 뜰 때도/ 모래 속으로 질 때도/ 사하라 아이들은 세상이 껄끄럽지 않다/ 빈속으로 긷는 맨 우물에도/ 꿈의 도르래가 다시 내려가고 다시 올라오는 것/ 저절로 배운다/ 모래능선으로 길을 읽어내듯/ 덤블 몸짓으로 봄을 찾아내듯/ 흙먼지 버석이는 대추야자를 씹으며/ 별 전체가 모래집임을 저절로 알아/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가 만든 팔랑개비를 돌린다//
* 우기야: 모리타니의 화폐 단위

낙타 화분 / 김수우
죽은 화분에 물을 준다/ 혹여 촉 돋을까/ 혹여 촉이 돋을까/ 여름 지고 다시 겨울이 지나는 베란다// 죽음을 키우고 있는 뿌리를 본다/ 충분히 기다릴만한 神聖/ 죽음만한 질긴 꽃받침이 어디 있으랴// 플라스틱 화분 속에서 걸어오는 모랫산/ 말린 낙타고기를 싣고 홀로 가풀막을 오르며/ 사막의 딸이 노래를 한다// 낙타의 고비에서는 하늘에 바로 닿을 수 있네/ 암컷 낙타의 눈처럼 고비의 물은 따뜻하고/ 아름다운 신기루의 고비에서는/ 따뜻한 마을이 떠나지 못하네*// 거멓게 타버린 잎줄기가 따라 부른다/ 나직한 음조에 물을 준다/ 걸어라 걸어라 걸어라/ 그래, 죽음만한 양식이 어디 있으랴// 움푹움푹 몽당발들/ 폭풍이 되는 법 알고 있으니//
* 낙타를 타면 해가 가까워진다는 고비사막의 노래

천막 / 김수우
둥그렇게 바닥을 펴면 세상의 중심이 생긴다/ 네 개의 나무기둥을 세우면 지상의 축이 팽팽해진다/ 지붕을 펼쳐 얹으면 천막은 아침 신전이 된다/ 어미에게서 상속받은 이 건축은/ 새로 도달한 곳 어디든 인간을 낳고 신을 낳는다/ 이 천막 안에서 아홉 번 태를 쏟았고/ 수많은 낮과 밤을 지어 마음을 갈아 입혔으며/ 그보다 더 많은 절망과 희망을 안아 차례차례 키웠으며/ 그들은 각각 낙타를 길들이는 법/ 고삐를 움키고 안전하게 사구를 넘는 법/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몇 시간 행진하는 법을 익혔다/ 매일 태어난 오래된 신화들이/ 신성한 상징으로 늙는 동안/ 날마다 식탁으로 돌아와 앉는 사하라는 무량하다/ 배냇냄새 속 저승꽃 돋는 천막 한복판/ 경계를 지우고 지운, 거인의 손바닥으로/ 오늘도 그녀는 검은 젖을 꺼낸다/ 이 우주를 물려받을 딸을 키운다//

소리의 비늘 / 김수우
멀리서 듣는 이방인의 음성/ 아득한 원시 북소리로 울린다/ 괜스레 눈물 괸다/ 그가 살아있고 나도 살아있구나// 살아있는 것들은 아주 먼데서 도착한 안부들이다/ 모든 길은 기도(祈禱)가 만들어냈으니/ 모든 액체도 고체도 원래 기도였으니/ 파랑새가 만든 구불텅한 하늘을 걷고 걸어/ 마침내 귀에 닿는,/ 나를 이 지상의 모퉁이에 살아있도록 완성하는/ 저 숟가락 같은 목청들// 산동네 몇 이랑 텃밭이 된다/ 메마른 분수대를 지키는 마디풀이 된다/ 햇살에 놓인 두살박이 운동화가 되고/ 낯선 허공을 켜는 노인의 늙은 연주가 된다/ 두근거린다/ 보이지 않는 소리의 비늘이 서로의 빛깔을 만들고 있으니// 당신도 나도 원래/ 아즈텍에서 태양신을 낳던 여신이었다// 어디선가 누군가 또 출발했으리라/ 멀리서 듣는 이방인의 음성에/ 까닭없이 감동한다/ 그 안부로 살아갈 것이기에, 다시 걸어갈 것이기에//

팔뚝을 잡다 / 김수우
멕시코 옛 프레스코 벽화에서 나온 새가 아닐까/ 사내의 팔뚝에 쪽빛 앵무새가 앉아 있었다/ 유성장날 시내버스에 오른 사내와 새/ 먼 고원지대에서 함께 늙은 토착인처럼/ 함께 꿈벅이는 눈, 그 깊은 원시 연못에서/ 서로의 영혼을 모시고 다니는 법을 듣는다/ 팔뚝을 아프게 움킨, 가슴깃털 아래로 뻗은/ 새의 뜨거운 갈쿠리발톱을 오래 지켜보다/ 내 영혼은 손잡이에 걸린 듯/ 가볍게 출렁이는 손잡이의 허공을 바라본다/ 영혼이 얼마나 먼데서 오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지금, 함께 꿈꿀 영혼이 그립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버스가 흔들릴 때마다/ 사내의 팔을 세게 움키는 앵무새의 발톱에서/ 이 시대에 움켜잡아야 할 것은 사람의 팔뚝이라/ 기적이 일어날 곳도 저 상처 많은 팔뚝이라, 믿어지는데/ 장날 때문인지 버스가 자꾸 급브레이크를 밟는다/ 하늘이 한쪽으로 쏟아질 때마다/ 창밖 은행나무도 급정거하면서 왈칵 가슴에 넘어지고/ 난 나도 모르게 그 팔뚝을 움켜잡는 것이었다//

천장(天葬) / 김수우
가끔 잡아먹은 산양에게 미안해서/ 평생 뜯어먹은 풀들한테도 빚이 많아/ 죽어선 고기가 된다/ 살점 쭉쭉 찢기며 한 입 양식이 되는/ 늘 조심스럽던 가슴 벽// 뼈와 살 한 점 땅에 구르지 않기를/ 기도하던 아들/ 천장사(天葬師)가 건네는 무릎 뼈 한 조각 품고 돌아서면/ 땅바닥에 풀어놓은 마음을 들고/ 하늘 가득 날아오르는 어머니/ 살면서 서툴렀던 사랑,/ 죽어 새들에게 다 먹히고 나서야/ 완성되는 목숨이라는 집/ 땅으로 흐르는 하늘은 팔이 길고/ 하늘로 흐르는 땅은 날개가 크다//
* 천장(天葬): 티벳의 고유한 장례(葬禮) 의식.

흔들의자 / 김수우
돌아가자마자 흔들의자부터 사야지// 언제든 앉으면 저절로 몸이 흔들리는 의자/ 달개비 같이 서러워도 한순간 심연처럼 깊어지는 의자/ 거미줄처럼 복잡해도 단박에 고요해지는 거야// 쿠바는 흔들의자였다/ 집집마다 계단 같은 흔들의자가 있다/ 열 개씩 가진 자, 그 뒷길/ 칠 벗겨진 가난한 문가에도 두개씩은 놓였다/ 튼튼한 것도 있고 삐걱이는 것도 있지만/ 모든 틈들이 거기 앉아 흔들거렸다/ 부러웠다/ 의자에서 춤과 노래 흔들흔들 자랐구나/ 의자 가득 하느님들이 술렁이는구나/ 하느님은 춤을 추는 자, 흔들의자는 야릇한 신을 기르는 구나// 한 번도 제대로 흔들리지 못했다/ 바다를 입은 파도처럼 산그늘 입은 후박나무처럼/ 흔들, 흔들거리자/ 죽음도 삶도 모두 춤이어야 하니// 죽은 자도 산 자도 출렁이는 바람이어야 하니// 십년을 돌고 돌면서/ 아직도 사지 못했다// 낡은 제단에서 태어난/ 하느님들 아직도 나를 기다라고 있을까//

알타미라의 소 / 김수우
1/ 고대이집트에서 나는 창조신 누트였고 길고 짧은 신화를 수없이 건넜으며 인도에선 지금도 성자이다 이중섭에겐 큰 눈을 가/ 진 식구였으며 알타미라 동굴에서 매일 지축 울리고 오늘도 허공 넘는 尋牛인데// 2/ 냉이꽃 듬성한 다리 밑/ 액체질소통 -196°C로 동결된 수소 정액이 거래된다 전기자극으로 뽑아낸 정액을 분양받은 인공수정사들, 바람든 암소를 안/ 는다 수태시킨다 산도 바다도 애비 없는 단백질덩이로 태어난다 채권과 채무로 절룩거리는 流轉, 일상은 신상품과 재고로만/ 유통된다 下水에 무심히 젖는 봄// 신은 이제 번식 관리되는 중이니/ 신화도 식구도 허공 키우는 날빛도 배합사료일 뿐이니// 3/ 뼈와 살을 뜯어 먹이는 일 가죽구두를 신기는 일 그저 하염없었거늘 향기로운 제사였거늘 내 눈이 수평선이었거늘 수평선/ 너머 네 아침이었거늘/ 너희가 냉이꽃보다 쓸쓸한 이유를 안다/ 까닭없이 제 살 물어뜯는 이유를 안다// 이 영악한 슬픔들아, 영원한 허깨비들아//

설형문자 새벽 / 김수우
찐득하다 베개맡에 묻어나는 새벽/ 코울타르 같은 정적이 마을버스 시동을 거는 소리/ 또 한 자루의 신화가 출발하는가// 새벽은 언제나 소리로 온다/ 기억이 녹슨 손잡이를 돌리는, 깨우기 전 꿈을 깬 늙은 아이가 판도라 상자를 부스럭/ 부스럭 들추는,/ 멍든 손톱의 소리 소리/ 희미한 것이 희미한 것을 얼르는, 덜걱거리는 것이 덜걱거리는 것을 당기는, 궁색한/ 것이 궁색한 것을 부르는,/ 오르막의 엔진 소리 소리들// 역사에 복역한,/ 꺼끌한 수염으로 돋는 저 칼소리 꽃소리/ 원래 수메르의 점토 속에 있던 설형문자였다/ 신화를 기록하려는 쐐기의 몸짓들/ 고요한 소음을 기록해온/ 부산한 정적을 써내려갈// 이젠 고흐의 푸른 터치를 닮은/ 귀뚜리 울음, 찐득한 이슬을 낳는다//

문어 / 김수우
문어는 하나의 추상이다/ 발이 많은 한 방울 눈물이다/ 깜깜한 바다에 떨어진 신의 발바닥이 숙성한 듯/ 부드러운, 단호한// 신은 애초 가난이었는지 모른다 배고플 땐 자기 살을 뜯으며 제 피부로 변장술을 읽히며 빨판으로 미로를 통과하며 단백질 유전자를 확보하며 잘린 뒷발로 세계를 키우며 푸른 피로 심장을 세 개나 만들며 심연을 길었을 것이다 여덟 개 맨발은 출구를 향해 자꾸 길어졌을 것이다// 길을 더듬던 뜨거운 빨판으로 청동문짝 같은 바다를 끌었을 것이다 빨판은누군가 판각한 외딴집 한 채, 한때 고생대 곤충이었던 한때 난해한 방언이었던 꿈이 들어앉았으니, 한번도 치명적이 되지 못한 억년 몽유병이 멸종을 견디고 있었구나, 억울해라 억울한 사랑이구나// 눈물은 영원의 살집/ 자갈치 붉은 대야에 엎드러진 커다란 문어 앞에서/ 가난이 진화하는 방식을 본다/ 삼엽충을 닮은 험준한 적막들, 모든 틈을 비비며/ 아직 팽팽하다// 하루하루 희미한 지옥을 걸어/ 톱날처럼 깊은 하루를 걸어// 살아남은 심장마다 문어가 진화하고 있음을 안다//

입춘 바깥 / 김수우
촛불 세 개를 켜둔 채 그 방을 나옵니다// 책과 화병과 창문을 위해/ 낡은 액자와 오래된 시계, 목각인형을 위해// 잠시면 촛불은 사그라들테지요/ 세 개 촛불이 밝히던 동무/ 고요와 기다림은 따뜻하게 가라앉겠군요// 내 죽음도 그렇게/ 촛불을 켜두고 방을 비우는 일// 빈 자리에/ 따뜻한 빛이 나보다 조금 더 남아있기를/ 그 방이 당신이며 곧 나이기를// 하여 방은 사람을 닮아갑니다/ 하여 방은 키가 자랍니다// 안도 바깥도 한 그루 산수유로 환합니다//

굴절의 전통 / 김수우
입석으로 타서 간이의자를 하나 잡았다 다행이다// 매화가 번진다 그리운 이가 먼데 있다고 한다 다행이다// 지난 겨울 철탑으로 올라간 사람들은 어찌 되었을까// 다행과 다행 사이 다행스럽지 못한 것들이 꽃대처럼 칼금처럼/ 불면처럼 직립한다/ 밥그릇 안에서 굴절되는 영혼처럼 눈물은 봄비로 굴절되었다// 성냥갑만한 메아리도 없이 봄비는 다시 철탑으로 굴절된다// 내가 가려는 바다는 통로 천장에서 거물거물 떨고 있다// 팬티까지 벗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다가 양말 벗을 때의 수치를// 정직이라 부르는// 네 칼날도 꽃으로 굴절될 것인가 분노란 그따위 궁리이다// 오늘도 손해를 본 토마토수레는 굴절되지 않는다 다행이다 아니다// 젖을 빨던 질문들은 철탑으로 굴절되었다 다행이다 아니다// 햇빛을 탕진하는 붉은 동백, 아슬아슬하다// 신호등 앞에 늙은 외투처럼 서 있는 하늘, 뒤뚱거린다// 간이의자를 접는다//

몰락을 읽다 / 김수우
구름이던 큰 나무에 구름이던 작은 새들이 앉아 있다/ 이 책 저 책을 뒤적인다 아무 할 일이 없다 씹었다가 뱉고 뱉었다 씹는 하느님// 담벼락에 걸터앉은 젊은 햇빛이 말을 건다/ 난 여섯 살 소꿉동무였어 얼굴 잊은, 탱자 울타리에서 불러대던 옥희라는 이름이 간질간질 돋아난다// 나무는 무수한 몰락으로 자란다 고대 신화가 몰락의 힘으로 살아가듯// 풀꽃과 어깨동무하고 한참 절룩이는데 뒤통수 닮은 진실들이 옆에서 걷고 있다// 뚜벅뚜벅 걸어온 나무그늘이 어깨를 겯는다/ 어깨에 작은 새들이 논다 나도 어깨가 있음을 비로소 안다// 몇 번 몰락에 발가벗은 것들은 기원(起源)을 향해 자란다// 큰 나무는 자라서 작은 나무가 되고 작은 나무는 자라서 구름이 되고 구름은 자라서 새가 되는 마을// 질긴 하느님, 씹었다가 뱉고 뱉었다 씹는 페이지, 유리창이 맑다/ 한참 가난해지고 나서야, 맑은 옥희 까르륵 웃고 있다//

뒤 / 김수우
앞서간 사람이 떨구고 간 담뱃불빛/ 그는 모를 것이다 담뱃불이 자신을 오래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그 최후가 아름답고 아프다는 사실을/ 진실은 앞이 아니라 뒤에 있다/ 한 발짝 뒤에서 오고 있는 은사시 낙엽들/ 두 발짝 뒤에서 보고 있는 유리창들/ 세 발짝 뒤에서 듣고 있는 빈 물병들/ 상여 떠난 상가에서 버걱거리는 설거지 소리를 망연히 듣는다/ 사랑하는 사람은 뒤에서 걷는다/ 물끄러미, 오래,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는 눈동자, 내게도 있을까/ 신호등 건너다 고개 돌리면/ 눈물 글썽이는, 허공이라는 눈//

환멸문還滅門 / 김수우
부산역 앞 화단에 산수국처럼 피어있기로 합니다/ 우표도 없이 도착한 삼류시집처럼 오래된 기침을 삼킵니다/ 돌아온 모세처럼 계명을 선포하지만 쓰레기를 치울 길이 없습니다/ 어디로 흘러야할지 모르는 프라스틱 바다, 아기고래가 꾸는 꿈 속/ 태초의 언약을 기억하는 것처럼 고개를 갸웃댑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가슴에만 뿌리내리기로 결정하는 만행/ 다시 프라스틱 의자 위에 천존대왕처럼 앉아있기로 합니다/ 보험을 믿지 않고 낡은 묘비를 믿기로 작정합니다/ 지옥은 한 잎 찔레꽃, 끝까지 눈물을 사유합니다//

단풍씨앗 / 김수우
오랜 비밀이었다/ 날개가 달린 집을 갖고 싶었다// 자갈치 바닥에 쏟아진 비늘들/ 하루하루 대책 없는 광장과 골방에서 날린 깃털들/ 종일 일하고도 배고픈 작은 낮달들/ 방울 소리를 낸다// 순간의 갈퀴처럼 공중에 길을 내고 싶었다/ 돌아오라 돌아오라 부탁하는 메아리처럼/ 한 해 내내 날아오던 부고들처럼/ 광막한 고원을 가로지르는 한 줄기 전선처럼// 배낭 가득 구름을 모았다/ 내 편이라 믿었던 허공 뒤꼍에서 물들며 흔들리며/ 오래 날개를 길렀다/ 잎새마다 잔뜩 매달린 삼천 대천// 도착할 수 없는 적멸을 매일 찾아가던/ 그 토끼잠들, 그림자도 없이 우주사다리를 오른다/ 다친 맨발로 바람을 탈 수 있을까/ 짜부라든 길눈으로 춤을 출 수 있을까/ 가벼워라 가벼워라// 날아간다, 사억 년을 넘는 프로펠러, 힘차다/ 모든 날개는 기도주머니이다//

하늘씨앗 / 김수우
재크의 콩나무가 닿던,/ 두레박 타고 오르내리던, 천도복숭 익어가던// 하늘, 이젠/ 인공위성으로 촘촘한, 길을 감시하는 전파로/ 빽빽한, 손바닥으로 가리기에 급급한// 그러니/ 개별꽃아 네가 하늘이 되는 수밖에 없다/ 민달팽아 네가 하늘이 되는 수밖에 없다/ 깨진 창문아 부러진 의자야/ 우리가 하늘이 되는 수밖에 없다// 앞에서 밀면 뒤로, 뒤에서 밀면 앞으로/ 넘어져 땅이 되고, 오른쪽에서 밀면 왼쪽으로,/ 왼쪽에서 밀면 오른쪽으로 넘어져 땅이 되고// 땅이 되고 땅이 되고 땅이 되면/ 삼천대천 부처님 가득한 하늘이구나// 패배자의 사랑을 기억하고 있는/ 매일 자빠져도 매일 하늘이 되는,/ 수북수북 공명共鳴하는/ 괭이밥아 풀거미야// 부탁한다/ 이 한밝의 깊이를, 슬픔을, 침묵을//

종점 다방 / 김수우
한 모퉁이에서 화초가 말라 가고/ 또 한쪽에는 프라스틱 꽃나무 무성하다/ 날마다 틀어놓은 때묻은 노래로/ 비어 가는 생의 앞뜰/ 천식환자로 늙어 버린 시계가 가르릉가르릉/ 흠집 많은 하루를 밀고 가는데/ 문득, 창 밖은 목련이다/ 불시에 달려온 듯, 숨찬 그리움, 한순간/ 바람 안고 뚝뚝 떨어진다/ 놀라워라 땅에 내려앉는 법/ 치열해라 미련을 버리는 힘/ 그 옆에서 나는/ 앞발가락을 편 채 나자빠졌던/ 시장통 구석의 생쥐 죽음과 난 상관없음을,/ 아무 관계도 아님을 중얼거린다/ 노래에 열중한다 심심하다/ 지친 비너스 석고상 뒤로 목련이 지는/ 변두리다방 여기저기 긁힌 탁자 위에서/ 내 모든, 모든 추억은 고요하다//

사랑을 기억한다 / 김수우
얼마나 오래 기억하는가/ 내 몸속 백혈구들은/ 고등어 한 토막에 일으켰던 네살적 알레르기를/ 꽃밥 짓다 사금파리에 긁힌 손끝비린내를/ 마흔 네 개의 봄을 먹고 마흔 네 개의 겨울을 낳은/ 숲, 그 잎새그늘을 침입한 비린내에/ 돌짝 가슴 온통 가렵구나// 살아있는가, 견딜 만한가 내 사랑, 다시/ 누군가,라는 혁명을 꿈꾸라// 제 그림자 다 크도록 흔들리기만 한 눈빛들/ 놓쳐버리거나 놓아버린 이름들/ 내 몸속 덧살창이 되었으니/ 표시 없이 기억나는 멍울들/ 기억 없이 표시나는 흠집들/ 마흔 네 그루 포플러를 낳았으니, 그 바람소리에/ 온 하늘이 지독히 가렵구나// 그래, 많이 여위지는 않았는가 내 사랑, 다시/ 어딘가,라는 혁명을 꿈꾸라//

파도의 방 / 김수우
머리맡에 선고처럼 붙어 있는 사진/ 엄마와 동생들, 내가 유채꽃밭에서 웃고 있었다// 그 웃음 속에서 아버진 삶을 집행했다/ 깊이 내리고 오래 끌고 높이 추어올리던 그물과 그물들, 종이배를 잘 접던 일곱 살 눈에도 따개비지붕 단칸방보다 벼랑지던 방// 평생이었다 고깃길 따라 삐걱대던, 비린내와 기름내 질척한 유한의 방에서 아버진 무한의 방이 되었다/ 여섯 식구 하루에 수십 번씩 열고 닫는// 기관실 복도 끝에 있던 그 바다의 방을 육지에 닿은 십 년내 지고 왔는지 스무 명 대가족사진 속/ 소복소복 핀 미소에서 어둑한 방 하나 흔들린다// 칠순 아버지의 굽고 녹슨 방, 쓸고 닦고 꽃병을 놓아도 아직 비리다 아무리 행복한 사진을 걸어도/ 생이 얼마나 비리고 기름내 나는 방인지 겨우 눈치챈다// 방이 되어버린 아버지를 연다/ 집행된 파도들이 환하다//

하늘우체국 / 김수우
시립묘지 납골당 입구 하늘우체국은 열두 달, 가을이다 오늘도 헐렁한 쉐터를 입은 가을이 소인을 찍는 중, 우표 없는 편지들이 시시로 단풍든다 몰래 지나는 바람에도 말의 잎새더미에서 풍기는 젖은 지푸락 냄새, 말의 송아리, 슴벅이며 돌아본다// 하늘우체국에서 가장 많은 잎새말은 '사랑해요'이다 '미안해요'도 가랑잎 져 걸음마다 밟힌다 '보고 싶어요' '또 올께요'도 넘쳐흘러 하늘이 자꾸 넓어진다 산자에게나 망자에게나 전할 안부는 언제나, 같다, 언제나, 물기가 돈다// 떠난 후에야 말은 보석이 되는가 살아 생전 마음껏 쓰지 못한 말들, 살아 퍼주지 못한 말들, 이제야 물들며 사람들 몸 속으로 번진다 가슴 흔들릴 때마다 영롱해진다 바람우표 햇살우표를 달고 허공 속으로 떠내려 가는 잎새말 하나, '내 맘 알지요', 반짝인다//

장터의 봄 / 김수우
도살장에 팔려갈 늙은 소의 코끝에 붙은/ 살구꽃잎 한 장/ 소와 꽃잎이 들여다보는/ 길끝, 광주리 하나 걸어온다// 살 수 있을 것 같다// 자전거 시장꾸러미에 높다랗게 얹혀 실려가는/ 붓꽃 몇 송이/ 나를 본다, 모든 꽃은/ 오랜 약속에 붙이는 느낌표이다// 얼마든지 살 수 있을 것 같다//

여기는 숲이었네 / 김수우
이곳은 나무가 있던 자리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대와 만난 곳도 나무가 있던 자리였습니다// 불꺼진 쇼윈도 마네킹이 한밤내 바라보는 곳/ 햇살에 타버린 지렁이가 구두끈처럼 밟히는 곳/ 불구 걸인이 겨울 하늘 붙들고 앉아있던 곳/ 모두, 나무가 있던 자리입니다.// 서로 발걸음 돌리지 못해 머뭇거린 것도/ 뿌리내리다 걸린 귀앓이/ 속눈물로 씻으며, 하늘로 하늘로 번져가던/ 울울한 고요가 살던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나도 그대도 한 그루 나무였음이, 그 모두/ 한잎 한잎 다가서던 숲이었음이 틀림없습니다//

엉겅퀴꽃 아버지 / 김수우
밤새워 소주를 마셔도 당신은 젖지 않는다 이미 세상의 빗물에 취해 버린 이마와 가슴, 봉창을 닮았다 아니 밤새 헤아려 놓은 희망으로 얼룩진 새벽 봉창이다// 문지방엔 당신이 밟아 넘어뜨린 근심이 더께졌다 삼킨 울음은 뭉그러진 못대가리로 박혀 빛난다 벗은 영혼은 못쓰는 타자기처럼 뻑뻑하지만 글쇠 몇 개 언제나 굳건히 일어선다// 그런 당신의 옹이에 나는 옷을 건다 무거운 코트를 제일 먼저 건다// 진통제처럼 떠있는 새벽달을 먹고 당신은 기침을 쏟는다 기침마다 헐은 아침이 묻어나온다 헌 구두짝에 담긴 하루를 신고 당신이 걷는 길은 손등에서 쇠빛 혈관으로 툭툭 불거지는데// 당신의 방 앞에서 매일 꽃피는 붉은 엉겅퀴//

흰 꽃 / 김수우
해운대 샛골목 쪽문 국수집/ 퇴색한 신발장에 우묵우묵 구름들 모여 있다/ 빙하기에서 도착한 길이 낮은 문지방을 넘는 소리/ 안데스로 떠나는 길이 깨진 탁자를 미는 소리/ 그 옹글진 파문을 디디고/ 신발장 위 늙은 난에서 꽃이 피었다/ 죽은 자들이 우리를 위하여 올리는 향불처럼 희디흰,/ 맨발들/ 사박사박, 다시 국수 같은 주술을 낳으시는지/ 짝사랑, 안녕하다//

봄꽃 천 원 / 김수우
주먹만한 봄화분 안에/ 시장통 골목이 흔들리고 있네/ 신발들 하늘 딛고 휘청이네/ 봄꽃 천 원, 쪽지를 달고/ 살랑살랑 살가운 얼굴 속에/ 팔락이는 여섯 살 내 치맛자락/ 홀로 팽팽하던 꼬리 연 아직 눈부시고/ 아버지의 짐자전거 저만치 달려오네/ 노오랗게 묻어나는 사람들/ 천 원어치 꽃가루를 따라/ 황사하늘 어디든 갈 수 있으리/ 목덜미에 돋는 떡잎 한 장//

목련, 여미다 / 김수우
목련 망울에 봄눈 내린다/ 한 잎 눈발/ 산속 눈밭에 놓인 늙은 오소리의 죽음을 실어왔다 오소리를 한 번 본 적도 없으면서/ 목련, 옷깃 여민다// 피고 싶어 피는 게 아니다/ 닫혀버린 한 칸 눈매에 여미는 가슴이다/ 여미고 싶어 여미는 게 아니다/ 떨어지는 다락 한 채 받치려는 손길이다/ 한 여자가 퇴근길 지하철에 몸을 날렸다는 소식, 서슬 퍼런 고독 때문에라도/ 저 부유하는 비닐봉지들 때문에라도/ 목련 벙글어야겠다 이 악물어야겠다/ 여미고 여미고/ 알 수 없는 이치들을 그냥 끄덕일 때까지/ 치밀 방법 밖에 도리 없어/ 목련, 오소리 맨발처럼 불퉁해진다// 한 잎 눈발/ 실어간다 목련이 여민 오솔한 하늘, 울툭불툭 휘어지는 본풀이, 어디선가 사랑이 시작되고 누군가 사랑을 팔고 있으니//

수련 지는 법 / 김수우
단골찻집 주인이 바뀌었더군 꽃핀다고 들러도 싱거운 눈웃음, 꽃진다고 들러도 맹물 손인사, 잊힐 뻔 잊힐 뻔한 안부마다 한 톨 답례 고맙더니 그 씨앗 받아 여기저기 나누었더니 어느 결에 헤어지고 만 게야, 마음 비운 사이// 수련 지는 법을 들었네 몇날 철없이 꽃비 뿌리거나 제 열정에 겨워 몸던지는 게 꽃지는 방식이거늘 수련은 잠잠히 물 속으로 돌아가지 소금쟁이가 딛은 고요를 돌아보는 어느 결에 송이째 물에 잠긴다네, 마음 비운 사이// 고운 사람 내게 수련처럼 졌으니 나도 그에게 한 꽃자리일까 고운 사람 누구에겐가 수련으로 피어날 테니 물속 줄기, 먼 산 하나 풀어내리라 물그림자 흔들리는 그, 어느 결에 내 옷자락도 젖을 테지, 그, 마음 비운 사이//

幻환을 위하여 / 김수우
부쩍 환각이 깊어졌다 얼굴들이다/ 도대체 뉘신가 둘러보다 모두 내가 분만한 연인들임을 안다/ 마른 젖이 핑 도는 까닭에// 모든 환각은 생활 뒤에 있어야 하건만/ 그러나 나비가 되든 꽃잎이 되든 몰래 날아오르건만/ 일상을 떠밀고 전면에 나선 저것들/ 오랜 수면부족 탓이라 노화현상이라 단언하지만// 소붓소붓 싸락눈처럼 내리는 졸음 사이/ 밥 먹다 숟가락 놓치는 거친 졸음 사이/ 온힘으로 나를 저울질한다/ 저 딴에 먼 시간을 거슬러 왔을, 눈금 총총한 저 순간들/ 앉힐 만한 자리가 없다/ 녹슨 주전자처럼 내 세간에 어울리지 못하고/ 한켠에 비집고 앉아/ 내 입을 그저 지껄이는 주둥이로 만들어버린다// 절망도 분노도 손님으로 대접해왔듯/ 내 책임은 그를 접대하는 일/ 환각은 또 하나의 내 영혼이 틀림없기에/ 생활에 뛰어든 푸른 물결이겠기에/ 꿈의 형식을 풀듯 환각의 방정식을 배우기로 한다// 돌아온 옛 연인들이여 고단했던 네 청춘들이여/ 이름 얻지 못한 사생아처럼 춥지 말라 굶지 말라/ 당부하고 당부한다/ 대책 없이, 일상의 저울대 평평해진다//

깊은 눈 / 김수우
내 눈동자 속에서/ 자기 날개의 물빛 흔들림을 보았을까/ 배밑이로 생을 배워/ 날개를 얻은 배추흰나비// 나비 날개 줄무늬에서/ 굳은살이 늘어가는 발바닥을 본다/ 배밑이로 생을 배워/ 두 무릎을 얻은 나// 마주 본다는 것/ 이전 생의 내 날개를, 그의 무릎을/ 알아내고 고개 끄덕이며/ 한 송이 솔개 그늘에 다가앉는 일//

등 / 김수우
아이 업은 사람이/ 등 뒤에 두 손을 포개 잡듯이/ 등 뒤에 두 날개를 포개 얹고/ 죽은 새// 머리와 꽁지는 벌써 돌아갔는지/ 검은 등만 오롯하다// 왜 등만 나중까지 남았을까,/ 묻지 못한다// 안 보이는 부리를 오물거 리며/ 흙 속의 누군가에게/ 무언가 먹이고 있는 듯한/ 그때마다 작은 등이 움찟거리는 듯한// 죽은 새의 등에/ 업혀 있는 것 아직 많다//

누군가 집을 짓는다 / 김수우
창 밖은 집 짓는 소리로 가득하다/ 먼지가 뚝딱거린 먼지들/ 내 귀에 달려와 소리가 된다/ 티끌 안에서 깨는 티끌의 꿈에/ 기계삽 소리 메밀꽃으로 일어난다/ 바퀴 소리, 개 짖는 소리/ 매일 지붕을 울린다/ 물소리, 휘바람 소리, 밥집문 여는 소리/ 종일 기둥을 세우고 벽돌을 쌓는다/ 네 음성이 나에게 집이 되듯/ 너에게 집이 되기 위하여/ 종달새가 울었군아/ 담벼락 따라 지천으로 피어난 풀 싹도/ 꾹꾹 눌러 담은 쓰레기더미도/ 누군가가 지은 집이었구나/ 세로에게 풍경이 되기 위하여/ 눈동자 같은 창문을 달아 내는니// 내 뱃속에도 망치 소리 가득하다//

빨래집게 / 김수우
겨울 잔디 시린 발목/ 아랫목 이불 속으로 밀어넣듯/ 땅 밑으로 밑으로 오그리는데/ 바지랑대 치워버린 빨랫줄/ 빈 집게만이 쪼로록/ 참새 새끼같이 떨고 있다/ 양말이며 청바지며/ 바람이 훔쳐 가겠다고 넘어올 때마다/ ' 빼앗길 수 없어’/ 끝까지 악물던 입술/ 이젠 잿빛 산그림자만 물었구나/ 걷어진 빨래들과 그 욕심들은/ 서랍장 속에 개켜지고/ 흔들리는 건 가슴속 풀냄새/ 바람도 낯설은 듯 등 돌리는데/ 진종일 싸락눈에 시달린/ 그 입술이 시려워/ 자꾸 내 입술이 깨물어진다/ 옷장 밑에 숨겨 두었던 옛날들을/ 다시 널어야 할 것 같다.//

비명 / 김수우
냄새였다 자갈치가 끝나는 모퉁이/ 선창에 도착하자마자/ 거미손으로 뭍을 꾸려가야 하는 파도는/ 쩔대로 쩐 어둑한 계단으로 삐걱거렸다// 그물필마다 더께진 그 쩐내는/ 신발 밑창에 쩍쩍 달라붙어/ 중력보다 더 큰 실존을 정확히 찍어낸다/ 빈 생선짝/ 더 비린/ 외마디 냄새,/ 칠순 넘도록 입었던 아버지 옷이었다// 냄새를 지나 냄새에 닿는 내 냄새는/ 물때썰때 없이 물컹한 바다를 또 껴입는데// 먼바다들이 끌려와/ 선원모집, 선원모집이란 붉은 글씨들 속에서 늙고 있었다/ 삐뚤이로 주저앉은 〈초원다방〉 간판 사이/ 막 켜진 전등 하나가 마지막 창문처럼 열리고// 한 번도 일인칭으로 살지 못했던/ 눈빛들 비늘처럼 여기저기 박힌/ 캄캄절벽/ 빈 밧줄에 걸리는/ 비명,// 소리가 아니라 냄새였다//

상자를 고치는 노인 / 김수우
상자들이 바다에서 담아온 건 태고의 제사였다/ 어창에서 실려나와 새벽비늘을 쏟아낸/ 빈 생선짝마다 던져진 기도들이 함부로 엎어져있다// 소금버캐 두꺼운 허공 이쪽저쪽/ 비린 장갑을 끼고 비린 못을 박는 그는 먼바다들이 끌려와/ 선원모집, 선원모집이란 붉은 글씨들 속에서 늙고 있었다/ 삐뚤이로 주저앉은 〈초원다방〉 간판 사이/ 막 켜진 전등 하나가 마지막 창문처럼 열리고// 한 번도 일인칭으로 살지 못했던/ 눈빛들 비늘처럼 여기저기 박힌/ 캄캄절벽/ 빈 밧줄에 걸리는/ 비명,// 소리가// 해종일 기도를 고치며 기도를 올리는 중// 꿰맨 나무짝들 층층 발끝을 세운다/ 단단한 높이로 단단한 깊이를 만들며 다시 바다를 기다린다// 생이란 배우지 않아도 손끝에 익숙한 비밀/ 누구나 저마다의 바다는 깊고 깊은 제사이니// 제 삶에 비린 못 하나 박지 못한/ 튼튼한 눈물을 가진 그는/ 물의 온도를 기억하는 한 마리 지극한, 쇠고래였다// 그 눈빛,/ 비린 못,/ 몰래 날카로운,//

약력 / 김수우
소스라쳤다 비늘이다 자갈치 버스정류장 발치에 반짝이는 비늘 몇 닢, 밤 새 날아온고흐의 별들처럼 깊다 마야 문자처럼 단다나다 강인한 생명이 퍼덕인 자리, 하늘 창문이 환하다 수억 년 바다의 약력이 성실하다// 동심원, 비늘마다 수천수만의 결로 빛난다 몇 달째 이력서만 쓰고 있는 젊의 아비의 보잘 것 없는 나이테가 맵다 푸르다 짜다 아득하다 빗방울 촘촘, 햇빛 촘촘, 비늘 하나에 어림잡은 것들이 소용돌이를 드러낸다 버려졌지만 스스로 빛날 수밖에 없는, 꾸다 만 꿈들이 아직 푸득푸득 살아 있는// 비늘은 심해의 안부,/ 몇 줄 성긴 이력서가 우주의 안부인 것처럼//

시인/ 김수우
A4용지 두어 권 책상 밑에 쌓아놓고/ 겨울숲을 관장하는 사람처럼 우쭐거린다/ 유일한 사치는 진한 커피냄새,/ 커피잔 들고 낡은 화분에서 깨알만한 잎눈 하나 마주치면/ 고대 식물학자나 된듯 형편없이 교만하다// 손목에 달라붙던 도깨비바늘도 잊고/ 세 끼 달아 먹은 라면도, 밤새우고도 완성 못한 시도 잊고/ 주눅만 주는 서울도 문단도 다 잊고// 몸속 실핏줄 다 풀어놓은 한 마리 거미가 된다/ 자갈이 된 쥐들의 이빨과/ 가끔 떨어진 새들의 영혼을 받아든다/ 지루하면 유목민의 딸답게 먼지의 발꿈치를 따라 다닌다/ 마을버스를 타고 가시덤불 떠도는 사막을 찾아간다// 다시 지루하면 제 속에 밥을 먹여주는 망상들/ 저가 믿거나 저를 믿는 귀신들과 쪼그려 시시덕거리다/ 두부김치 한 접시에/ 이 삐딱한 세상을 한참 용서하고 만다// 목에 박인 불화의 생선가시도/ 만만하게 견뎌낸다/ 편형동물의 진화된 눈처럼 겨우 빛과 어둠 구분하는 주제에// 매일매일 자라는 초식동물의 뿔, 큰 뿔/ 저 대책없는 오만//

시인의 말 / 김수우
내 언어들이 제사일 수 있을까./ 하다못해 지극한 맨발일 수 있을까./ 제의를 잃어버린 시대,/ 모든 귀신들이 그립기만 하다.// 헛제삿밥 같은/ 빈 화분만 매일 늘어간다./ 그래도, 그래도, 그래도,/ 자꾸 중얼거리면/ 혹 그대를 만날 수 있을까.// 불행한 사치에 지불하는 절대적 비용,/ 그대.// 2011. 칠월. 백년어서원에서/ 김수우 합장//

바탕 / 김수우
남포동 골목, 노루가 지나갔다 눈썹 밑 허공과 마주친 순간 엎어졌다/ 발목을 삐고 손에 생채기가 났다 고무줄 퉁긴 듯 돋는 구름의 보풀들// 잊었던 달개비꽃밥이 떠올랐다 돌멩이로 찧던 다섯 살의 소꿉밥, 문득/ 숨었던 이름들 파다닥 날개 턴다 눈밭에 찔레열매 가득 붉었다, 와락/ 천둥처럼 달려드는 진흙 냄새, 갈색털 덮인 슬픔이 물끄러미 돌아본다/ 추억은 초식동물로 살아 있다/ 그런데 저 앞을 지나간 건 정말 노루였을까//

유월 당신 / 김수우
나의 제사는 태양을 향한 것도 영원을 향한 것도 아닙니다/ 어둠길 함부로 잊혀진 달개비를 찾아 구부린 꿈입니다/ 문득 깨어 물그릇처럼 앉아있는 밤/ 산그늘 닮은 당신, 검불 많은 당신의 제사를 봅니다/ 당신의 기적은 유월 낮달을 기르고 버려진 것들을 불러 앉힙니다/ 나의 기적은 모퉁이 창가에서 그런 당신과 마주 절하는 것/ 아프리카의 봄이 불현듯 툰드라에 흰 꽃 피우듯/ 나의 제사, 당신의 제사 마주 앉으면 지상 가득 개구리밥 피어납니다/ 푸른 제삿밥, 소붓합니다//

제왕판* / 김수우
연필 하나 공책 하나, 젯밥으로 올리니/ 한 종지 햇빛이 슬몃 앉더라는 낡은 소반 이야기/ 안부처럼 듣는다// 탯줄 끊고 세 이레 머리맡에 놓았다는/ 미역국 겨우 받은/ 어미의 착한 제사가 내 시의 起源이었던 것// 제왕판을 받았을까, 바그다드, 전쟁이 놀이가 되어버린 압둘라 핫산 무함마드 엘리야 나제르라 불리는 아이들, 말굽소리 나는 이름들, 탯줄들, 어미의 순결한 떨림이 남은 입술들, 화약내 묻은 예언들// 폭탄과 제왕판 사이,/ 제사가 되지 못한 내 시는 희바래져// 한 종이 햇빛과 바그다드 아이들 사이,/ 벼랑길 아찔하다/ 기도마다 뚝살 깊은데// 올리브숲 송송이 푸른 배꼽들, 흙먼지 엉긴/ 이슬받이 기적들//
* 제왕판: 민간신앙. 쌀과 미역, 실 등을 놓고 삼신할미에게 젖의 풍요와 아기의 무병장수를 빌어 아기 머리맡에 놓던 床.

광인의 여름외투 / 김수우
내 굿판을 잃어버린 게 몇 해인가/ 골목어귀 빈병처럼 웅크려/ 기다린 게 얼마며, 기다리지 않은 게 얼마인가/ 더러운 담요가 위엄이 되어버린 지금까지// 아무도 안아보지 못해도/ 여름을 눈사람인듯, 겨울을 돛배인듯 넘는/ 내 하루는/ 서툰 배반을 향해, 변명을 향해 열린 네 비천한 외투/ 나는 바랜 환각으로 존재하니// 생수를 구걸하면서/ 늙은 묵언이 구름 썩은 하수구로 잠겨들어도/ 나는 고대 이집트의 여사제이다/ 짚으로 닦던 놋숟가락 다 닳은지 옛적이지만// 내 신성을 버린 적 없으니/ 비루하고 또 비루해도/ 네 편리한 문명을 나는 선택한 적 없으니/ 함부로 나를 거래하지 않았으니// 동광동 뒷골목/ 내 예배는 여전하다/ 네게 세운 눈독도 손톱도 아직 유효한 상징/ 내 사전을 사서 읽으라//

앉은뱅이저울 / 김수우
무심코 지나던 고물상에서/ 무심한 앉은뱅이저울을 샀다// 헌 장갑 한 짝 얹어본다 굴러다니던 놋재떨이를 얹어보고 서랍 속 목도장을 얹어본다 국어사전, 관리비청구서, 막 배달된 시집을 얹어본다 내친 김에 새로 시작한 헐거운 연애도 올려본다// 눈금이 흘러간다 선사시대 벽화 속까지 달린다/ 문자보다 무게를 먼저 익힌 고대인의 추가 서쪽으로 기울어진다/ 생각난 듯 돌연 0,으로 튕기는 바늘/ 최초의 바다가 저울대에서 엎어진다// 생선집에서 쓰던 것인지 말라붙은 비늘 두엇, 상형문자 뚜렷한데 생의 중력에 녹슨 바늘 빙그르르 돈다 뜨거운 젖이 돈다 순간 0, 빗방울로 돌아가는 단호한 푸득거림이// 비리다, 내려놓는다/ 심심해서 深深한 낮꿈 한 짐//

타조의 눈알 / 김수우
숲으로 들어서지 못했다/ 밤의 숲은 중음천으로 가는 대문처럼 열려 있다/ 입구에 흰 손수건처럼 핀 수국이/ 어둠을 더 새까맣게 한다// 완벽한 어둠은 눈알들로 빽빽했다/ 사막을 지나온, 희화(戱畵)를 보는, 타조떼의 눈알들/ 낮에 지나온 숲이었지만/ 별이 총총했지만/ 숲에 들지 못하고/ 어둠의 긴 손톱 앞에서 내 죄를 기억해낸다// 막 육신을 벗은 영혼처럼 춥다/ 삶은 죽음의 외투, 죽음은 삶의 속옷이라고/ 구구단만큼 외웠지만/ 나는 단지 영악한 꼬맹이였던 걸까/ 햇빛 틈으로 자라나던 어둠의 이삭들은/ 한번도 식량(食糧)이 되지 못한 걸까// 그래, 푸른 별은 다 너희가 가져라 등 뒤에 던진 지 오래/ 숲을 기다린다/ 평안, 토막끈이 된 마른 지렁이들/ 타협, 함부로 배치된 슬픔들/ 어둠을 응시한다/ 아니, 응시당한다, 저 빽빽한 동공동공동공// 내 등은 순수한 어둠일까 턱밑에 별이 뜰까/ 숲을 기웃거리는 몸속에/ 타조 한 마리/ 뒤뚱거린다 뚜룩뚜룩 마주 본다//

고등어 / 김수우
온몸이 컴컴한 골목들로 빽빽합니다 지치지 않는 길과 창문과 얼굴이 서로 마주해 자작나무처럼 자란 저, 무늬들// 샛길 하늘을 얽어놓은 전깃줄도 보입니다 알전구가 흔들리면 선반에 일년내 피어있던 프라스틱 패랭이꽃도 슬쩍 흔들립니다// 팽팽하던 길, 구불구불 몸속으로 기어들 때 비로소 한 마리 고등어로 돌아 올 수 있음을 알았으니// 애초 등푸른 생선으로 팔린 내가 다시 푸른 등짝으로 도착합니다 두고온 길들, 내버린 길들, 몸속에 가둔 벼랑이 뒤척이는데, 이천 원에 팔리는 한 마리 슬픔, 눈이 붉어옵니다 왁자한 파도들 익숙하고 낯설어// 낮게 낮게 시장통 좌판에 물끄러미 누울 수 있을 때까지 내가 걸어야 할 바다, 매일 토막을 냅니다//

훈장 / 김수우
이번 생은 수천 생을 바쳐 받아낸 훈장입니다/ 아무렇게나 달아도 달각달각/ 떨리며 풍경風磬 소리를 냅니다/ 진창을 건너온 수천 얼굴이 맴을 돕니다// 내가 녹색 바다를 마시던 삼엽충이었음을 압니다/ 고생대 적막을 떠돌던 홀씨 시절을 기억합니다/ 어두운 동굴에 닿던 구석기 초생달이 선명합니다/ 호루스의 눈과 자주 마주치던 이집트 노예였습니다/ 화산이 가라앉고 바다가 산이 되어도/ 모든 날에 내 주소는 지금, 여기,/ 당신이었습니다// 쉽게 칠한 에나멜처럼 반짝이지 않습니다/ 시간의 꽃가루를 털어내면/ 구리빛 노을이 드러나는 훈장/ 이제 경전이 되었습니다 한 장 넘길 때마다/ 일렁이는 당신 그림자/ 녹처럼 묻어나는 무시무시한 내 심장, 거미줄 총총합니다// 긴, 긴, 대책 없는 무지와 가난과 슬픔으로 꿰어낸/ 안데스 소금기가 배인 이 훈장/ 한때 내 어머니였던, 언젠가 나의 어머니가 될/ 당신, 그 쓸쓸함에게 달아주고 싶습니다//

선물 / 김수우
살아남으려 하지 않아도 살아남는다/ 죽으려 하지 않아도 죽게 되어 있는 것처럼/ 온갖 비루를 걸쳐 입고 걷거나 악수한다 한 번씩 벗었다가도/ 때 묻은 비루를 숭고하게 껴입는다/ (광장이 밥그릇처럼 놓여 있다)// 며칠 전 바람에 찢어진 나무 큰 가지/ 맨살을 드러내놓고 뺄셈 중이다/ 뺄셈은 고도의 수학/ 수평선이고 징검다리이며 우두커니 돌아보는 갈색말이다/ (아니, 광장이 재떨이처럼 놓여 있다)// 아무 계산 하지 않아도/ 어린 송어들이 물그림자 파고들 듯/ 내 텅 빈 손바닥에 살아남은 것들이 모여들 것이다/ 그것이 선물이다/ 아무리 그래도 죽어서 사는 법이 있으니// 어떤 긍정이나 어떤 오해도/ 그늘을 기른다/ 햇볕이 종일 번지는 까닭이다/ 햇볕 속을 고양이는 새처럼 걸어간다 새는 고양이처럼 앉는다/ (아니, 광장이 이쑤시개처럼 놓여 있다)// 살아남았으니, 살아남은 것들의 메아리가 된다/ 쫑긋거리며 벌름거리며//

희망 / 김수우
희망이 팔을 쭈욱 내밀고 있어./ 희망의 눈초리는 낙타처럼 길군./ 희망의 입술은 꽃살처럼 부드러워/ 희망의 어깨는 분홍색이군.// 그럼 이제 희망의 손을 붙잡게/ 그럼 이제 주머니 깊숙이 희망을 넣게// 아,/ 달큼쌉살한 희망의 혀//

동행 / 김수우
시린 무픞이 끌고온 자갈길/ 값도 채 치르지 못한 희망 한 소쿠리/ 갈수록 무거워/ 그늘 속 앉을 데를 찾았다/ 바윗등에서 파르르 일어서는 잠자리/ 그 비워낸 자리에 몸을 놓았다/ 미안했다/ 잠자리는 옆 억새 대궁에 앉았다/ 함께, 오래, 한곳을/ 바라보았다 햇살 엉긴 곳마다/ 삶의 보푸라기들이 일어 나짝였다/ 고마웠다/ 눈동자 속에서 흔들리는/ 뜨거운 현생現生,/ 혓바늘 돋는 이 아름다움//

주인 / 김수우
무청시래기, 햇살을 꼬며 빈 암자를 지킨다/ 주둥이 풀린 양파자루, 금간 대야, 홀로 핀 수선화를 지킨다/ 옹색한 부처를 이해하는 보살보다 기적을 기대하지 않는 주지보다/ 퍼질러 앉아 당당한 것들, 산사의 고요를 알처럼 품었다/ 흘러오던 물소리, 흘러가며 봇도랑을 지킨다/ 며칠 째 바람을 물고 당기던 산벚나무, 종일 고무슬리퍼를 지키고 있다/ 번갯불 가지고 다닌다는 금강역사가 따로 없다//

봉쇄수도원 / 김수우
찔레꽃, 흰 지느러미로 조용조용 마당을 짓습니다.// 닫힌 채 떠 있는 저 창문, 지상에 맨처음 떠오른 산소처럼 원시미생물의 촉수처럼 캄캄합니다.// 감춰둔 기도 방들 애초 먼별처럼 각을 키웁니다 오래 전에 죽은 신들이 매일 죽는 자리,날카로운 공포로 흔들리지만// 비루하거나 찬란하거나/ 제 슬픔이 전깃줄 엉킨 묵시인 것 같아 역사인 것 같아// 우는 어머니를 버린 우는 어머니들, 그립습니다, 위태합니다 몸을 굳게 잠그고 그림자 속으로 고스란히 살진 절망, 그 절망으로 지구는 오늘 안전한가요// 흰옷자락, 자꾸 심해를 저어갑니다 멀고 멉니다.//

화석 / 김수우
견딘 것들, 견딘 것들은 흔적이 남는 법이다/ 저 파충류는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혼자, 흐린 뼈마디로/ 수억 년의 저녁 하늘을 넘고 있는 걸까 모두 숲그늘로/ 스러질 때 함께 썩을 것이지 티끌로 돌아가 '다시'/ 장수풍뎅이로 태어날 것이지 어떤 절망으로 썩기를/ 거부했을까 무엇을 보여주고 싶을까 그 도도한 침묵을/ 자유라고 이름한다 이내 쓸쓸한 고집이라 고쳐 짓는다/ 견딘 것들은 화석이 되는 법이라고, '다음'을 포기해/ 버린, 지독한 미련이 만든 마음의 무늬라고, 그것이/ ​원시의 날에 내가 배반했던 사랑에 대한 슬픈 예의라고/ 덧붙인다//

아침 / 김수우
깨진 플라스틱 화분에서 겨울을 버틴 어린 동백을/ 아침이라 부르자/ '천궁도인' '작두장군' '용궁동자' 점바치 골목 간판/ 들을 아침이라 부르자/ 누군가의 가난, 누군가의 혁명이 네 거름이었다면/ 깊고 깊은, 아무리 걸어도 바닥 닿지 않는 어둠/ 그래, 거기를 아침이라고 부르자// 아미동 비석마을 담벼락에 놓인 허기진 박스들도/ 빈 가게를 지키는 낡은 간판도/ 돼지국밥집에 노동자들 몰고 들어서는 저녁바람도/ 아침처럼 대답할 것이라// 슬프면 돌아오고 있는 사람을 생각하고/ 더 슬프면 오래전 책상에 놓였던 선물상자를 기억하고/ 아프면 자유를 사랑하던 선구자를 불러보자/ 더 아프면 납작한 산비탈 무덤을 찾아가자/ 힘들면, 순간이, 그 압축이 보이니/ 더 힘들면, 영원이, 그 팽창이 보이니// 막다른 골목에 무료배송된 붉은 단풍잎도/ 가난한 시인이 제 별빛 쌓고 쌓다가 비끄러지는 탈골도/ 다 아침이라고 부르자 아침이라는 호명으로// 우리가 아침이 될 수 있다면// 긴 죽음에서 돌아온 듯 문득 깨니/ 창틀에 고여 있는 아침들, 저 단검 같은//

 



김수우 시인, 사진작가
1959년 부산 영도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김경복. 늦깎이로 경희대학교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5년 <시와시학> 신인상으로 등단, 문학을 시작했다. 서부아프리카의 사하라, 스페인 카나리아섬에서 십여 년 머물렀고, 쿠바를 네 번 다녀오면서, 문학의 소명을 일깨워준 19세기의 시인 호세 마르티를 사랑하게 되었다. 대전에서 십 년 가까이 지내면서 백년지기들을 사귀었다. 틈틈히 여행길에 오르는 떠돌이별로 사진을 좋아한다. 이십여 년 만에 귀향, 부산 원도심에 글쓰기공동체 <백년어 서원>을 열어 운영 중이다.
저서로는 시집으로 『길의 길』과 『당신의 옹이에 옷을 건다』, 『붉은 사하라』, 『젯밥과 화분』, 『몰락경전』 등과 사진 에세이집 『하늘이 보이는 쪽창』, 『지붕 밑 푸른 바다』, 『아름다운 자연 가족』, 『당신은 나의 기적입니다』 그리고 산문집 『씨앗을 지키는 새』, 『백년어』, 『유쾌한 달팽이』, 『참죽나무 서랍』, 『쿠바, 춤추는 악어』, 『白年魚』가 있다. 부산작가상, 최계락 문학상 수상했다. 2013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국제교류작가로 선정(해외창작거점예술가파견(쿠바)). 한국작가회의, 부산작가회의 회원. 시전문계간지《신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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