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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박수현 시인

부흐고비 2021. 11. 2. 08:27

비인칭인 봄 / 박수현
비인칭(非人稱)의 봄이 걸어간다/ 팬지꽃 심는 아주머니의 엉덩이를 지나/ 지하도의 계단을 밟고 내려간다/ 황사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지하로 밀려가는 카디건과 스니커즈들/ 이어폰을 꽂은 뒤통수가 한결같다/ 파미에 파크, 메가박스, 엔터 식스, 센트럴시티/ 반품된 시간과 리필된 계절들이/ 날마다 리모델링되는 곳/ 입술 없는 얼굴들이, 문수 지워진 발들이/ 풍선 인형처럼 건들건들 환승 통로를 건너간다/ 해석되지 않는 애인과의 거리는/ 내일의 쇼핑 목록에 유보해 둔다/ 불법 포획된 밍크고래가 대형 스크린을 비행하고/ 총선 후보들이 유언비어처럼 깜박이다 페이드아웃된다/ 무빙워크 위에서 어깨를 부딪치다/ 동시다발 삭제되는 비인칭(非人稱) 봄들// 재생 버튼을 누른다/ 지하의 어디쯤 묻힐 발아되지 못할 씨앗처럼/ 신상 웹을 다운로드 받는 거북목들이/ 손가락 하트나 날리는 손목들이/ 다시 삭제된다//

어린 봄을 업다 / 박수현
몇십 년 만에 아이를 업었다/ 앞으로 안는 신식 띠에 익은 아이는/ 자꾸 허리께로 흘러내렸다/ 토닥토닥 엉덩짝을 두드리자/ 얼굴을 묻고 나비잠에 빠졌다/ 슬그머니 내 등을 내려와 제 길 간 어미처럼/ 아이도 날리는 벚꽃잎 밟으며/ 자박자박 걸음을 뗀다/ 어릴 적, 어른들 따라 밤마실 갔다 올 때면/ 넓은 등에 얼굴 묻는 것이 좋아/ 나는 마실이 파할 즈음 잠든 척하곤 했다/ 업혀서 돌아올 땐 부엉이 우는 밤길도 무섭지 않았다/ 가끔 백팩이나 메는 내 어두운 등짝으로/ 어린 것의 온기가 전해진다/ 내가 걸어온 한 생이/ 고작 두어 뼘 등판 위에서 뒤집혔다는 생각/ 겁 많고 무른 가슴팍 대신 갖은 상처를 받아내느라/ 딱딱해진 등이 혹 슬픔의 정면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문득, 누가 이 말간 봄빛 한나절을/ 내 빈 등에 올려 놓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아이가 얕은 숨을 쉬며 옹알거렸다/ 멀리서 온 그 말씀, 하르르 날아가 버릴 것 같아/ 조심스레 포대기를 추슬렀다 출렁,/ 한 뼘 팔이 더 길어졌다//

봄요일曜日, 차빛귀룽나무 / 박수현
그 물가에는 차빛귀룽나무 한 그루 서 있었네/ 햇귀를 끌어당겨 푸른 머리핀처럼 꽂고/ 심심해지면 고요 밖에서/ 한눈팔듯이 제 몸을 비쳐보기도 한다네/ 그러고 나면 어찌 눈치 채고 빈 데마다/ 쓸데없는 구름그늘끼리 몇 평씩 떠 흐르네/ 낮결 내내 부젓가락처럼 아궁이를 뒤지던/ 부레옥잠도 어리연도 마냥 엎질러져/ 복사뼈째 찧으며 물살을 나르네// 한나절 봄빛을 덖어낸 차빛귀룽나무/ 조붓하고 어린 나비잠을 스치며/ 희디흰 산그늘 한 마리/ 드문드문 허기져서 느린 봄날을 건너네//

초승달, 봄 / 박수현
봄볕에 마른 노랑을 한 번 더 말린다/ 복수초가 밀어올린 귀때기 시린 노랑/ 생강나무 가지에서 눈 부비는 새끼 노랑/ 개나리 울타리에서 여기저기 떼창하는 노랑// 노랑 원복 입은 아이들이 병아리 떼를 데리고 와/ 종알종알 노랗게 나들이 간다/ 봄 햇살을 빨아대는 어린 노랑들을 뒤집으니/ 민들레, 씀바귀, 애기똥풀 꽃이 노랑 노랑 풀밭에 쏟아진다/ 바람이 들판에다 노랑 바리케이드를 둘러친다/ 젊은 연인들이 두고 간 새뜻한 노랑 속에/ 언 발을 옹송거렸던 노랑턱멧새 한 마리/ 팽팽히 하늘 한 자락을 들어 올린다// 누가 저 출렁이는 노랑들을 한 다발 묶어/ 별무늬 꽃병에다 꽂아 두었나/ 초승달 샛노랗게/ 돋아난, 삼월의 어느 저녁//

봄마름병* / 박수현
어버버, 봄이 왔다. 열이 아재의 마지막 삶이 해빙된 흙 속에 묻히던 날, 색시의 붉은 치마가 관 위로 던져졌다. 철늦은 눈이 그 위로 꽃잎처럼 얹혔다. 검은 흙이 한 삽씩 부어질 때마다 해진 치마폭이 날아갈 듯 들썩거렸다.// 어버버, 버버 구불구불한 돌담 너머로 탐스런 풀잎을 더듬으며 다시 봄이 오고 있다. 밭 갈 생각도 잊은 채 종일 색시만 품던 반벙어리 열이 아재를 깨우며, 씨 뿌리지 않아도 들풀처럼 싱싱하던 아재의 하초를 또 흔들며, 부엌으로 뒤꼍으로 도망 다니던 얼굴에 노랑꽃이 핀 색시를 아직도 쫓으며.// 푸른 하초를 견디지 못해 야반도주하던 봄이 또 오고 있다. 우물가, 막 새끼손톱만한 열매를 매단 복숭아나무 아래 곱게 개켜 버려둔 녹의홍상 위로,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억척스레 지게를 지고 쟁기질하던 아재의 어깨 위로, 들리지 않는 귀 대신 노상 벌렁대던 코와 희번덕거리던 두 눈이 우물처럼 고요하던 아재의 얼굴 위로.// 다시, 버버 버버, 봄이 오고 있다. 아재의 퍼런 하초를 기억하느라 더 시퍼래진 들풀들이 봉두난발로 피어난 외갓집 구불구불한 돌담을 넘어, 뒤꼍을 지나, 복숭아밭을 지나, 들판으로 내달리며.//
* 봄마름병: 춘고병이라고도 한다. 3월 하순∼4월 상순경 잔디에 겨울 동안의 휴면상태와 같은 담회색 잎의 모양이 번지는 병.

해거름 / 박수현
바람이 지친 발끝을 내려/ 늘어진 나뭇잎을 흔들다 맙니다/ 강물 속 저어새 부리가 길어집니다/ 넘기던 책장이 손가락에 달라붙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게으른 햇살이/ 책상 위, 먼지 알갱이를 건드려보다 갑니다//

손톱 / 박수현
버스 뒷좌석에 앉아서 손톱을 깎는다// 손톱을 잘라 낼 때는/ 조금 착해지는 것 같다/ 고개를 수그린 채/ 무릎 위 티슈 한 장에 모인 그것들을 들여다본다/ 주먹을 움켜쥔 아이의 손아귀를 펼치며/ 앞니로 첫아이의 무른 손톱을 끊어 주던/ 눈록嫩綠의 순간이 반짝, 돋아난다// 좌석 밑으로 떨어진 몇 조각은 미처 하지 못한 말이며 차창 밖 흩날리는/ 토로스산맥의 눈발처럼 종일 나를 관통해 간 열 개의 감정이다// (더는 할 말이 없는 손톱들)/ 아직 속의 분홍을 다 비워 내지 못했다//

처녑 / 박수현
여름나기로 단골 정육점에서 처녑을 샀다/ 소의 세 번째 위장인 처녑은/ 천 장의 잎새라는 뜻이랬다/ 검정 비닐봉지에 싸인 채 서너 근으로/ 갈무리된 전 생애의 중량/ 밀가루를 묻혀 아코디언 같은 주름을 치댄다/ 위장 하나 다스리는 일이/ 첩첩산중 만경창파를 이고 넘는 것 같다는데/ 어쩌자고 이 초식성 짐승은/ 깊고 어둔 위장을 네 개나 붙잡고 있는 걸까/ 쇠뜨기, 독새풀의 독하고 푸른 숨결과/ 매미의 울창한 울음과/ 마지기 마지기 쏟는 작달비를 오래 되새김질 했겠다// 질기고 무더웠던 여름날을 견뎌내느라/ 크고 순한 짐승의 위장 같은/ 울음의 겹 안에 들어가본 적이 있다// 처녑 한 젓가락을 기름장에 찍는/ 적막한 허기의 저녁,/ 씹을수록 싱싱해지는 천 장의 이파리가/ 가망 없이 몸을 뒤집는다//

어느 고전적 슬픔 / 박수현
딱딱하게 마른 슬픔을 본 적이 있다/ 에레바탄 사라이(Yerebatan Saray*) 계단을 내려서면/ 각기 다른 양식의 석주(石柱) 사이/ 당신은 눈물의 푸른 기둥을 만나게 된다/ 벨그라드 초원에서 끌어온 물길을 가둔/ 이 고고학적 슬픔 앞에서 만약,/ 입꼬리를 올려 셀카를 찍었다면/ 이미 당신은 메두사의 슬픔에 전이되었다는 말/ 페르세우스의 검을 받고서 두 눈을 부릅뜬 채/ 치명적 머리카락을 날리는 그녀/ 맹독(猛毒)의 사랑에 사지가 굳어가는 동안/ 속수무책, 연인들은 죽음에 파 먹히며 캄캄해졌다/ 참수(斬首)된 목덜미엔 달빛 같은 허기들이 희붐한데/ 그녀의 없는 젖가슴과 가랑이에 봄빛이 들었다/ 아직 무너진 어느 신전 기둥 아래 나뒹굴고 있을까/ 나는 어떤 울음들이 새겨진/ 고백의 연대기를 채록(採錄)해 본다/ 너에게 끝내 사랑한다 말하지 못했던/ 나의 글썽임은/ 이오니아식인가 혹은 코린트식 슬픔일까// 살 부러져 망가진 우산을/ 혓바닥 날름대는 석주 옆에 세워두고/ 쫓기듯 지하 궁전을 벗어났다/ 블루모스크를 건너온 빗줄기가 차다//
* 에레바탄 사라이: 532년 동로마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때 7천여 명의 노예가 동원된 지하 물저장소. 135×65cm, 높이 9m의 장방형 이 저장소에는 각기 다른 문양과 양식의 기둥 336개가 있다. 전국의 신전에 버려진 기둥을 운반해 건설했기 때문이라는데 이 중 머리 하나는 옆으로, 또 하나는 뒤집힌 메두사 문양 석주와 눈물의 석주가 유명하다.

사과 / 박수현
에레나 할머니는 우리이웃, 그녀의 뜰에는/ 사과나무가 푸르다// 가으내 그녀는 사과의 속살을 저며 애플파이나 사과를 밀가루 반죽에 싸서/ 구운 아펠슈투루델이나 혹은 팬케익 아펠판구헨을 굽는다 큰 유리병에/ 아펠바인을 담그기도 한다// 오븐에서 사과 향이 익는 동안/ 유리병의 사과들이 발효하는 동안/ 할머니는 장미과 과일 중 가장 오래된 열매의 어둠을 갈무리한다/ 사과는 그녀에게 시장기 같은 것/ 검지를 입술에 대며 쉬! 하던 아버지의 어두운 목소리 같은 것/ 숨죽여 베어 먹던 서늘한 사과의 기억/ 사과는 얼마나 자주 하켄크로이츠 나치 깃발을 나부끼게 했던가/ 사과와 탄피는 왜 둘 다 작고 반질거리는가/ 문지르면 왜 뽀드득 말간 소리가 나는가/ 버둥대며 끌려가다/ 뒤돌아보던 아버지의 핏발선 눈동자// 그때 소녀가 할 수 있는 건/ 사과가 흘린 핏자국들을 훔치며/ 썩은 사과처럼 지하실 구석을 굴러다니는 것뿐// 가을이 오면 사과나무는 여전히 붉게 기침을 한다/ 나무 바깥으로 자꾸 뛰쳐나가려는 북서풍의 후예들/ 그 옛날, 시베리아에서 코카소스 산맥을 넘어온 그것/ 캄캄한 제 심장에서 다섯 개의 별을 꺼낸다// 사과로 만든 그녀의 디저트와 와인을 마시며/ 사과가 거느린 치사량의 둘레를 가늠하기엔/ 그해 가을은 너무 짧았다//

박태기 꽃 / 박수현
복개천 골목시장 입구, 전철 길보다 낮게 웅크린 집 마당에 박태기나무 한 그루가 봄비에 젖고 있다/ 나는 철거 날짜 어른대는 전봇대를 반쯤 열린 대문 옆에 세워놓고 집안으로 들어간다 진자홍 밥풀을/ 따 다담다담 밥을 짓다 손톱으로 목덜미를 긁어대던 가시내가 있다// 철거반원들이 해머로 벽을 치자/ 꽃대 없는 꽃들이 더 붉게 앓아 떨어지던 집/ 대문 한 짝이 떼어지자/ 사과 궤짝 안 토끼 두 마리가 바닥을 긁어대던 집/ 내동댕이쳐진 그림일기장 속/ 바둑이가 낑낑대며 마당으로 달려 나오던 집/ 채 묶지 못한 이불 보퉁이에 매달린/ 수수밥 풀떼기 같은 가시내들 울음소리/ 꼭꼭 씹으면 입맛만 다시던 집/ 속엣것 쏟아내면서 외마디 비명도 없이/ 맥없이 주저앉던 그 집// 박태기 꽃잎들이 후두둑 비속에 지고 있다 얼룩얼룩 노란 철거 날짜가 젖은 봄을 긁어댄다 우산 너머/ 산복도로 쪽으로 마을버스가 엉덩이를 들썩이며 기어오른다 비에 젖어 더 또렷한 꽃잎처럼 기억은 우산/ 만한 가려움을 펼쳐든다 나는 장바구니를 흔들며 ATM 출납기 부스로 들어선다//

호접란 / 박수현
봄엔 꽃잎들이 바람을 일으킵니다// 목덜미가 흰 소소리바람이/ 한 오백 년 품었다가/ 다시 고쳐/ 띄워 보낸 짧디짧은 편지입니다// 꽃잎 끝에 앉은 내 눈길도/ 날개 접은/ 한 점 바람입니다//

오디 / 박수현
검자주빛 오디가 가지마다 맺혔다/ 유월의 햇살 아래/ 저릿저릿 번져들며 휘어지는 오디의 나라에는/ 뽕잎이 펼치는 진초록 그늘들이 있다/ 오딧빛 안에서 젖물 냄새가 비리다/ 피딱지 앉은 유두를 어린것 입에 물리던 딸애/ 누에들이 누비고 지나간 초록의 떼가/ 봉긋하게 솟아 오른 분홍의 아픔이/ 핏물 서린 거먕빛 세계로 내려앉는/ 서툴고 간절한 에미의 요일(曜日)// 어린 시절, 새벽마다 누엣섶에서 상한 누에를 골라내던/ 할머니는 지금쯤 몇 령의 푸른 잠을 건너고 있을까/ 누에가 썩어나가고 잠실(蠶室)에도 불길이 번졌다/ 병든 누에가 잣는 실올처럼 툭툭, 끊어진 길을 따라/ 떠나간 식구들을 기다리던 엄마는/ 여직 고치 속 누에처럼 밤새 둥근 잠을 뒤척일까/ 비 그친 뒤 채 익지 못한 열매가/ 팅팅 불은 젖이 다 빨려 나가듯 떨어져 내렸다/ 갓 젖을 물린 딸애의 환한 젖꽃판에서/ 해 걸러 배불러와 늘 물큰했던 엄마의 젖꼭지에서/ 꼬들꼬들 무말랭이 같은 할머니 젖무덤에서/ 누에나방들이 희게 날개를 펼치고 있다// 올해도 그곳엔 먹빛 오디가/ 손톱 밑 뽕잎물처럼 번져들며 지천일 것이다//

포도원 / 박수현
언덕 위까지 걸어보자고 말했다/ 너에게 포도원을 보여주고 싶었다/ 막 보라 쪽으로 기운 알갱이와 아직 초록인 것들이 뒤섞여/ 지지대가 휘도록 달린 송이들/ 구름이 포도원의 시간을 저 붉은 수도원 지붕 너머로 몰고 가기 전/ 바람은 채도 높은 햇살을 더 칠해야겠다며/ 포도밭 고랑 사이를 바삐 들락거렸다/ 언덕어귀 구절초 향기도 조금 더 보라 쪽으로 스며들었다/ 까마귀들이 자주 내려와 앉았고/ 그때마다 포도알들이 바닥에 검게 흩어졌다// 언덕 위까지 걸어가자고 말했다/ 서리를 뒤집어 쓴 나무들이 마른 잎들을 떨구는 동안/ 잘 익은 포도는 여름의 뭉게구름과 함께 오크통에 갈무리되었다/ 이랑 사이 가파르고 좁장한 돌계단과/ 등짐을 진 채 잠시 기댈 수 있는 돌 의자가 드러나 보였다/ 그 밑으로 뒤틀린 뿌리들이 땅바닥에 달라붙어/ 뻗어가고 있었다 저 천근성(天根性)의 그악스러움,/ 그 많은 비와 웃음과 울음을 발밑에 묻고/ 어떤 몽유의 기억을 더듬더듬 짚어가는 것일까/ 포도알이 숙성되어 유리잔에 맑게 찰랑이기도 전/ 붉은 향기가 청어 가시처럼 코끝을 찌르기도 전/ 참을성 없는 천사들은 날개를 접고/ 밤마다 술통마개를 열어 성찬식에 올릴 포도주를 탐했다/ 아름답지만 타락한 혓바닥들,/ 남몰래 성의(聖衣)에 떨어진 얼룩을 닦으며/ 수도사들은 파르테앙주*만큼 갓 잡은 양의 피를 벌충하곤 했다// 그만 저 언덕 아래로 내려가자 했다/ 무르익은 한 모금의 포도주가/ 또 한 생을 흔드는 동안/ 너는 잠잠히 포도원의 배경이 되어/ 오래도록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파르테앙주: 발효가 되기 전 포도주의 양은 조금씩 줄어 그만큼 벌충해 주는데 이는 천사가 밤사이 내려와 포도주를 맛보았기 때문이라 한다.

어두워지는 연못 / 박수현
이사를 앞두고 부부용 베개를 버린다/ 흰 속청은 얼룩지고/ 메밀 알갱이는 푸슬푸슬 부서지는데/ 베갯모 속 원앙 한 쌍은 여전히 흔들리는 물결 위에 떠 있다/ 베갯모 테두리 예서체 청홍 목숨 수(壽)자가/ 유록빛 수면 위에서 정갈한 이음수의 단잠을 허무는 동안/ 자줏빛 날개를 펼친 수컷과 다소곳한 암컷의 어깨가/ 당초구름문 밴 물풀 사이 반쯤 접혀져 있다/ 함께 살 셋방 얻느라 미리 당겨 쓴 계금을/ 꼬박꼬박 부어 나가야 하듯/ 일생 상대에게 붓는 사랑도 이와 같은 것이라면/ 저 연못으로 한 땀 한 땀 호는 햇살과/ 장대비와 석 달 열흘 가뭄을 마다할 수 있었으랴/ 늦은 오후, 수면에서 굴절되는 햇살이/ 서로를 참아내느라 자글대는 눈가를/ 간신히 매듭수로 꿰매며/ 소금쟁이처럼 물결 위를 미끄러져 간다//

銀星 갤러리 / 박수현
강 노인은 훔친 의치를 물컵에 모았다/ 최 노인은 변기 앞에 쭈그려 앉아 빨래한다며 두루마리 화장지를 풀었다/ 심 노인은 패드 넣은 비닐봉지를 페니스에 묶은 채 복도를 서성였다/ 서 노인은 씹던 껌과 식은 밥 뭉친 경단을/ 다른 이에게 먹이려다가 자칭 보안관 김 노인에게 쥐어 박혔다/ 박 노인은 늘어진 노랫가락을 웅얼대며 현관문에 기대고 있었다// 저녁 8시, 요양보호사 미나 씨가 공평하게 나누어주는/ 두 알의 수면제를 먹고/ 노인들은 저마다 잠으로 빠져들었다/ 허기진 입들이/ 당나귀처럼 커지던 귀가 지워졌다/ 낮 동안 금시계처럼 번쩍거리던 눈길도/ 벽에 걸린 풍경화처럼 평온해졌다// 가을, 겨울, 여름이 지나가도/ 이곳은 언제나 나른한 봄날/ 노인들 흉곽을 맴돌며/ 쟁여둔 그 많은 소리 다 삼킨 괘종소리만/ 혼자 복도를 빠져나와/ 어느 먼, 먼 은하로 흘러가고 있었다//

낙원 찜질방 / 박수현
양머리 모양 타월이 바닥 여기저기 놓여져 있다/ 반쯤 졸며 어둠을 부풀리던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소금기 절은 머리통은 떼어놓고 다 어디로 간 것일까// 돌돌 말려진 초록색 타월 안쪽으로 몰골의 초원이 펼쳐진다/ 목부들의 드높은 가성假聲이 흘러나오고/ 메에에 메에, 흩어져 풀을 뜯던 양떼들이 모여든다/ 딱 벌어진 어깨의 목부는 강가에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양의 가죽을 벗겼다/ 지독한 근시近視라 죽을 때야 하늘을 볼 수 있다는 양/ 멀겋게 눈뜬 채 땅에 묻혔다/ 토막 난 살덩이가 달구어진 자갈 속에서 익어가는 동안/ 피가 흐르지 않는데도/ 피비린내 자욱하던 들판으로 구름은 낮게 흘러들었다/ 고요해진 게르의 숲 위로/ 푸른 포자처럼 돋아난 양의 눈망울들// 먹빛 하늘에 제 눈을 묻은 양떼들이/ 총총, 밤마다 지상으로 돌아오며 운다/ 수정방, 옥돌방, 소금방, 숯가마방, 얼음방마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눈 먼 양들이/ 곱슬한 털을 부비며 제 머리통을 찾느라 종종걸음이다/ 마음이 멀어야 별빛이 멀어/ 볼 수 없던 것이 보인다는 이곳, 낙원으로/ 건너가는 어둠이 깊어서 환하다//

복사뼈를 만지다 / 박수현
난데없이 부어 오른 왼쪽 발목의 복숭씨가/ 복숭아처럼 발그레 익었다/ 의사는 벌써 몇 번째 주사기로 물을 빼낸다/ 복숭아, 나직히 중얼거리기만 해도/ 분홍빛에 오금 저려 덜컥 물러지던/ 솜털 보송보송한 때를 기억하고 싶어/ 사람들은 복사뼈를 복숭씨라 부르는 것일까// 모자라거나 넘친 마음들은 가지를 떠나는 걸까/ 비온 뒤 단맛 빠진 낙과를 광주리에 주워 담던/ 여자의 물크러진 한나절에는/ 쪼글쪼글 벌레들이 하얗게 오글거렸다/ 그런 밤이면 원두막 시렁에 얹힌 달빛도/ 연분홍, 진분홍으로 짓물러졌다// 과육 반점이 부풀어 오른다/ 꿈틀대는 씨앗을 쪼개 벌레를 끄집어낸다/ 꺼이꺼이 발목께에서 펌프질하는 복숭씨여/ 한 바가지 마중물이 퍼 올린 복숭앗빛에/ 여자는 두 발을 이리저리 포갠다//

역광 / 박수현
순환선 지하철 안, 한 늙은이가/ 급한 볼일이라도 있는 듯 빠른 걸음으로 저쪽 칸에서 건너온다/ 끝이 뭉그러진 작업화에 보풀이 인 목도리를 두르고.../ 때 절은 푸대를 감아쥐고 있다/ 선반 위에는 사람들이 읽다 만/ 교차로, 노컷뉴스, 장터마당 등 무가지 신문이 던져져 있다/ 그것들을 모으려고 선반을 더듬는/ 그의 몸체가 빈 푸대 자루처럼 출렁인다/ 손등엔 검푸른 핏줄이 시들하다// 방향을 튼 지하철이 당산역을 거쳐 양화대교를 지난다/ 강의 잔물결을 스치며 시속 80km로 달려온 아침햇살이/ 서치라이트 켜지듯 역광으로 들이친다/ 눈앞이 환해지며 그의 검은 실루엣이/ 먹물을 듬뿍 머금은 듯 또렷해진다/ 1,500볼트의 역광이 왁자지껄한 광고판들을 지나/ 다음 칸의 문을 미는/ 반세기 후 아니 수세기 전의 그를/ 번개처럼 수거해 달아난다//

컵라면 / 박수현
중학생 몇이 사거리 편의점에 들어섰다/ 진열대에는 막 출시된 T사 컵라면이/ 매출 순위 1위인 Y사 컵라면과 경쟁을 하고 있는 중이다/ 와, 이거 오지선다보다 더 꼴리네/ 한 녀석은 두리번거리다 와사비 컵라면을 집어 든다/ 다른 녀석들은 완전 대세라며 불닭볶음면을 찍는다/ 꼬고면, 육개장사발면, 카레면, 팔도시락면, 갓짬뽕면 등/ 음수대 앞에서 녀석들은 책장 넘기듯/ PSD 용기에다 뜨거운 물을 붓고 뚜껑을 닫는다/ 벗어 던진 백팩들이 면발이 풀어지길 기다리는 동안/ 녀석들의 하루가 키득키득 기어 나온다/ 불량한 형광펜과 발랄 엽기 만화책이/ 개념 없는 체육복과 멍 때리는 실내화가 나온다/ 짱박은 반성문과 변비 걸린 화장실 대걸레가/ 발발이 담탱이가 오리 궁뎅이를 흔들며 걸어온다/ 여친의 하얀 종아리가 문자를 씹고/ 아침에 우유 부은 시리얼을 내밀던 잠옷 바람 엄마도 보인다/ 다 불어터진 하루 속으로/ 후루룩 면발이 빨려 들어간다/ 빈 용기를 벌겋게 쓰레기통에 처박고/ 아이들은 컵라면 뚜껑을 챙겨 일어선다/ 컵라면이 컵라면의 족보를/ 쉽게 뒤집는 세계를 이해하는 동안/ 면발 위 뿌려진 건조야채와 분말수프처럼/ 학원으로, PC방으로, 공터로 흩어지는 녀석들//

타임래그Time Lag* / 박수현
흩어졌던 새들이 모여든다 겨울 늪가 마른 물풀들 위에 웅크린 새들, 붉은 울음이 수면을 흔든다 퍼덕이는 날개 짓 때문일까 파문도 일지 않는데 나는 왜 물결이 흔들린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 속으로 흘러가지 못하는 온갖 것이 가라앉아 있을 것이다 연못 한가운데는 더 깊게 파였을 것이다 적막이 밀어 올린 새떼들, 젖은 발 말리다가 어두워지는 하늘로 날아오른다 잠 속에서 깨어 있는지 날아가면서 꿈을 꾸는지 그 늪의 새들, 허공에다 도르륵 독똑 낮은 음을 흩뿌린다 땅거미가 저릿저릿 깔린다 지구의 반 바퀴 구름밭을 걸어온 걸음을 부리 밑에 슬몃 포개어본다 긴 밤을 견뎌야 하는 내가 또 저문다//
* 타임래그: 장거리 여행 후 시차로 인한 현기증(vertigo), 불면, 불안정감 등의 제 현상

타임래그* 2 / 박수현
오월의 봄꽃들이 다 진 뒤 서울을 떠났는데/ 그곳엔 환각처럼 사월의 봄꽃들이 한창이었다/ 암자주빛 수수꽃다리가 숭어리째 흔들리자/ 한 무리 구름떼가 간지러운 듯/ 더 크고 환한 민들레며 해당화 할미꽃까지 까르르 뱉어내는 들녘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아무도 봄이라고 말해주지 않던 첫 번째 봄을 떠올렸다/ 조용히 왔다가 혼자 져버린 봄을,// 이곳은 저녁 7시 서울은 오전 11시/ 다른 두 개의 숫자판이 있는 시계를 손목에 차고 있지만 생각은 자꾸 한 방향으로 감긴다/ 너무 멀리 떠나와/ 그대를 사랑했던 명백한 사실도 희미해지는 이 저녁/ 산책길 막다른 골목길에서는 늘 검은 새떼를 만난다/ 날개를 펼치면 비로소 죽지의 진홍 무늬가 드러나는 새/ 깃털을 세우고 온몸을 떨며 꽁지를 들썩이며 운다/ 도륵독독 도르륵 독독/ 붉은 마음을 건너 늪을 휘돌며 운다/ 늪가 부들이 소스라치며 날을 세운다/ 수면에는 파문이 첫 키스의 떨림처럼 번지고/ 그 무늬는 다시 새의 울음으로 기록되어/ 그대의 꽃대를 흔든다/ 나비핀을 머리에 꽂은 첫 번째 것들의 노래가/ 리플레이 리플레이 허공으로 솟구친다// 초록 밀밭 사이로/ 사랑하기엔 너무 늦은 두 번째 봄이 발꿈치를 들고 걸어가고 있다/ 구름을 베고 누운 어떤 연인들은/ 검은 날개를 일제히 접는 저녁 늪가에서/ 흩어진 새의 울음을 모우기도 하리라//
* 타임래그: 장거리 여행 후 시차로 인한 현기증(vertigo), 불면, 불안정감 등의 제 현상

삼일분의 처방전 / 박수현
치료사는 날마다 내 등 뒤에서 카드를 뽑아들지/ 삼일 분씩 묶인 통증을 뒤집으며/ 숨겨진 일곱 장의 카드를 차례로 펼치지/ 어제는 스페이드를 내밀었다가/ 오늘은 클로버나 하트를 꺼내지/ 언제 쯤 킹을 내밀어 줄까 숨을 죽이지만/ 카드의 뒷면은 언제나 물결 철썩이는 해변/ 다섯 번째 경추에서 떨어져 나간 본 아일랜드(bone island)*,/ 그 섬의 기슭으로 날개 다친 새떼들이 날아들지/ 밀물에 잠겼다가 썰물이면 모습 드러내는/ 젖은 모래밭에서/ 새들은 비릿한 풍경들을 더 깊이 파묻느라 끼룩거리지/ 파도가 밀려들자 다시 날아오르는 새떼들/ 기우뚱, 날개 한쪽이 물결 쓸리고/ 모래알 박힌 깃털들이 수수거리며 날리지// 딱딱하게 조여진 경추마디 마디사이/ 손상된 당신과 나의 파일이/ 지불불능의 채무자처럼 풀썩 주저앉아 있지/ 뼈가 눈물을 흘리다니!/ 수평선이, 휘청 눈물방울 떠도는 몸 안으로 걸리면/ 나는 그에게/ 또 딜러패 한 장 같은 처방전을 건네지//
* 본 아일랜드(bone island): 사고나 노화현상에서 떨어져 나간 작은 뼈조각

손목터널증후군* / 박수현
왼손이 가자는 대로 걸어왔다/ 병아구리를 빠져나오지 못하는/ 땀 밴 손, 그 안에 감추어져 있는 굽은 터널/ 숨가쁘게 바퀴 구르는 소리가 난다/ 밤새 손가락 끝마다 점멸등이 깜빡인다// 손목 안팍으로 고양이 눈깔 같은 가로등이 노랗게 피었다 진다/ 나는 터널처럼 외로워** 차창 밖으로 한 손을 내민다/ 젖은 손으로 콘센트를 만진 듯/ 윙윙, 몸 안으로 밀려들다 잦아드는 진동/ 어둑한 그 안으로 몸을 숨긴다/ 수많은 터널을 삼켰다 뱉는 긴 어둠이 아직/ 내 앞에 엎드려 있다// 자꾸 온 몸이 왼쪽으로 기운다//
* 손목터널증후군: 손목의 혈관에 이상이 있어 전기가 오는 듯한 느낌이 남
** 터널처럼 외로워: 파블로 네루다의 [한 여자의 육체]중 에서 인용

오래된 사랑 / 박수현
반달이 골목 끝을 가로막던 밤이었다 그가 줄장미 번져 오른 담벼락으로 갑자기 나를 밀어부쳤다 블록담의 까슬함이 등을 파고들던 밝지도 어둡지도 않는 첫 키스의 기억, 사랑이란 그렇게 모래 알갱이 같은 까슬한 감각을 몸속에 지니는 것 줄장미가 벙글어 붉은 꽃을 피울 때마다 내 사랑은 모래알에서 자갈돌이 되었고 억센 바위가 되어 물길을 막았다// 가슴 그득 물이 차올랐을 때 나는 정을 박아 바위를 쳐내렸다 돌부스러기들이 텅텅 튕겨나가고 발등에 얼룩지는 피멍, 흐린 날이면 어김없이 날궂이로 상처가 덧나곤 했다// 바람이 헛되이 모래를 쌓는다 엎드린 채 가시울 키우던 등 위로 검은 피가 강처럼 흐르고 마음 속 어디선가 해머 소리 울리며 흔들리기 시작하는 바위, 구르며 부서지며 물길을 낸다 비로소 깊어지며 흩어지는 모래 알갱이들,//

매미 / 박수현
사내는 빨리 발견되길 바랐던 모양이다/ 산책로에서 겨우 서너 걸음 떨어진 나무에 목을 매었다/ 포로로 잡힌 무사가 벗어놓은 방패와 투구처럼/ 자신의 점퍼와 벙거지 모자를 나뭇가지에 걸쳐두었다/ 벗어놓은 옷과 모자가 그의 생을 온전히 열어젖히지는 못했는지/ 끝내 연고자를 찾지 못했다/ 귓바퀴에 고인 매미의 울음을 퍼내느라/ 그는 눈조차 감지 못했을까/ 막 솟아오르는 태양이 활짝 열린 동공에 박힌 채/ 상한 생선처럼 허물어진 그의 시간을 여과 없이 비쳐주었다/ 프란체스코 교황이 오신 날이라 일손이 딸렸다며/ 반나절이 지나서야 구청차가 도착했다/ 1톤 트럭에 죽음의 갈퀴발을 겨우 얹고서/ 그는 성하(盛夏)의 숲을 덜컹거리며 건너갔다// 시체검안서에 기록된 그의 이름은 2014-728A*/ 벗겨지지 않는 신발을 떼내려 안간힘을 쓰는 마음에게/ 이제 무릎을 꺾지 않고 누울 수 있게 된 육체에게/ 그는 남은 소주를 한 모금씩 건네며/ 늑골 아래로 차오르는 청회색 미명을 바라보았을지 모른다/ 검푸른 입술에서 흘러나왔을 시취(屍臭)와/ 싱그러운 숲의 향기가 뒤섞인 그 산책로에선/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졌다/ 일생을 울어도 다 지우지 못하는 목숨이 있다는 듯/ 그 여름 내내, 매미는 검은 곡비처럼 자지러지게 울어댔다//
* 2014년 고독사 중 728번째 죽음. 2013년 한 해 고독사는 1717명이었다.

건조주의보 / 박수현
가을산에 들었다/ 온통 붉은 갈필이다/ 단풍 들기 전 떨어진 나뭇잎들이/ 말초신경을 오그라뜨린 채 말라가고 있었다/ 화독(火毒)을 뒤집어 쓴 채/ 가랑가랑 천식 앓는 소리를 냈다/ 바다가 보고 싶다면 산을 보여주던 이번 생은/ 화르륵 제 몸을 지피는 나무들 아래/ 나를 세워놓고 낡은 화면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붉은색이 너무 쓸쓸해 숲의 목젖은 바랬고/ 나는 편도선이 부어올라 목이 탔다// 산을 다녀온 밤, 마른 가랑잎을 덮고 자는 꿈을 꾸었다/ 누가 불을 질렀을까/ 불길이 타오르는 숲속, 누군가를 기다리는/ 여자의 몸도 서성이며 말라들었다/ 새벽마다 저 붉음에 가위눌린 산자락을 들춰봐도/ 비 소식이 먼 가을이었다//

그저 ( )괄호 / 박수현
나는 기간제 교사다. 육아휴직한 어느 젊은 여교사의 그림자인 나는 교사 명단란 그녀의 이름 옆 ( )속에 갇혀 있다. ( )인 나는 십 년을 일해도 백 년을 일해도 근무연한 5년 차까지만 인정받는다. 성과급 지급은 물론 공무원증도 발급되지 않는다. 전자문서 결재란에도 급여 명세서에도 따라붙는 기간제라는 말, 교무회의 때에도 ( )속을 벗어나지 못한다. 내 목소리는 그들에게 들리지 않는다. 눈도, 귀도, 가슴도 없이 그저 괄호인,// 비온 뒤 여름철 나무마냥 쑥쑥 커가는 아이들, 입학할 때 헐렁했던 교복이 어느새 터질 것 같다. 아이들이 내게 달려와 내년에는 몇 학년 맡을 거냐고 내년에도 우리를 맡을 거냐고 엉겨 붙는다. ( )를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에게 나는 그저 ( )로 웃다가,// 나는 너희들처럼 애먹이는 놈들 안 맡을 거다 으름장을 놓는다. 제 분수 모르고 날뛰던 ( )안의 날들이 돌팔매질로 날아온다.//

샌드 페인팅 / 박수현
밤// 사막을 가로지르는 쌍봉낙타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바람은 능선의 기하학적인 장정(裝幀)을 지우고 바람과 모래의 입술이 맞닿은 텍스트는 다시 백지다 한기가 엄습하는 밤, 육탈한 뼈만 남는 단호한 시간 전갈좌가 밤새 사막의 지붕에 도사리고 있다 무주지(無主地)의 모래톱에서 별빛들이 붐빈다//
아침// 모래 능선이 노파의 턱밑 주름처럼 호(弧)를 그린다 밤새 곱은 손을 비비던 사막은 아침햇살에 사프란빛으로 쾌활하다 능선의 늑골을 향해 검은개미를 먹고사는 도깨비도마뱀이 기어가고 새들은 곱게 접은 색종이 조각처럼 공중을 난다 어린 유칼리 나뭇잎들이 쟁쟁거리는 순간 모래 소용돌이를 온몸이 밀고 가는 캐러밴들//
정오// 모래들이 흰 하늘로 스타카토식 고음의 노래를 바친다 너무 많은 태양은 아무것도 묻지 않는 극사실주의, 팽팽한 스테인리스스틸 판처럼 은유도 없는 시선뿐이다 모래 속에 묻어둔 타조알을 찾아 와디를 헤매거나 소금에 절인 짐승의 살코기를 먹인 까마귀를 쫓아 물을 찾는 삼부루족 여인들 발목을 지운 자코메티의 후예들이다//
저녁// 태양이 각도를 조금씩 눕히면 사막은 카엔후추빛 허밍을 낮게 부른다 낮이 다 타버린 자리에 노을은 낮과 밤을 가르는 도끼처럼 때론 에뮤 깃털 부츠를 신고 걸어온 발자국들을 빗질하며 찾아든다 저물녘, 낙타는 모래 속에 묻은 새끼의 울음소리로 사막을 건너고 차르르 모래 물결 따라 사막은 사라진 누란(樓蘭)의 방언을 써 내려간다//
그리고 다시 밤// 지하철 구로역 출구에서 초록 버스를 갈아탄다 버스의 yap 광고 화면, 엄지손가락으로 그린 모래 꽃다발이 여인의 긴 머리채로, 중지와 검지는 박쥐우산을 받쳐 든 남자와 공원의 벤치를 불연속적으로 배치한다 눈 감으면 모래보다 가벼워진 나는 뜨거워진다 모래 알갱이가 목젖을 타고 내린다 사막의 사구에 쟁여진 만다라(曼茶羅)들 모호크족 머리장식 같은 볏을 세운 새들이 어떤 그늘을 물고 머리 위를 빙빙 돈다 내 몸에는 철 지난 포도알 같은 눈알들이 매달리지만 뒤도 앞도 보이지 않는다 느리게 숨 쉬는 검보라빛 카라부란*이 행간 속에 묻어둔 울음을 흩뿌린다 차창 밖으로 벌써 백만 번째 겨울이 지나가고 있다//
* 카라부란: 사막의 모래바람

외인부대 / 박수현
나는 다섯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지 존 베이커, 미셀 블랑쉬, 마호메드 살람, 차오 그리고 기억도 아물거리는 이름 하나 하지만 이 세계 어느 관공서에도 그 이름들은 등재되어 있지 않다네 그 때문에 흰 달빛을 살비듬처럼 뿌려대는 만월을 바라보며 국경의 사막 한 귀퉁이에서 눈시울을 적신 적도 있다네 눈보라치는 톰스크 설원, 싸늘한 침낭 속에서 이명처럼 달팽이관까지 스산하게 파고드는 바람소리를 안주 삼아 밤새 독한 압솔루트 보드카를 병째 들이킨 적도 있지 참, 파도가 검은 늑대처럼 길길이 뛰는 어느 해변에선 한 번도 정조준해보지 못한 내 삶이 저처럼 부서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두려움에 떨었지// 나는 그토록 많은 나의 이름이 무서웠다네 눈을 감으면 환등기의 슬라이드처럼 켜졌다 사라지는 전투의 장면들 조명탄의 섬광이 번쩍이고 박격포의 폭음과 LMG의 연속 발사음이 벌겋게 귓전을 때리지 그때마다 습기를 품은 편서풍처럼 쓸쓸히 한 정부가 세워지고 새로운 국경의 지도가 그려졌지 때때로 나는 해적방송의 주파수를 끌어 올려 행복지수와 전쟁의 상관관계를 계측해보고 싶다네 그렇다고 돌아갈 수 없는 그곳에다 차례로 파묻은 내 이름들을 새삼 발굴해내고 싶다는 말은 아니네 그저 찢긴 레지옹 에뜨랑제* 깃발과 진흙창에 나뒹굴던 캐피 블랑**그리고 함께 견뎌내던 전우들이 사막의 유령처럼 서성대는 기억의 진원지, 그곳에 수시로 피납된 헬기처럼 곤두박질치는 내 외로움이 불시착하는 것이 유감일 뿐인게지 오래전 빠른 기류에 쓸려가버린 임시 정부의 구호들이 자꾸 귀에 쟁쟁대고 날마다 은폐된 어둠 속에서 내 뒤통수를 향해 30구경 아니 어쩌면 45구경 라이플 총구을 겨누고 있을 저격수의 냉정한 눈빛이 그저 성가실 따름이지//
* 레지옹 에뜨랑제: 외인부대 휘장

** 캐피 블랑: 160년 전통의 외인부대원의 하얀 모자 그의 바다는 아직 살아 있다

 

박수현
아파트 후문 입구, 작업복을 입은 한 사내가 반원진을 펼치고 있다. 연탄 화덕 위/ 국자를 올리고 하얀 설탕을 넣었다가 이어 소다를 넣고 나무 젓가락으로 젓는다./ 부르르 끓어오르며 옅은 갈색이 되자 기름칠한 철판에다 설탕물을 붓고 납작하게/ 눌러 크고 작은 몇 개의 범선을 찍어낸다. 그의 눈엔 갑자기 생기가 돌고 조무래기/ 몇몇이 구부린 그의 옆에 모여든다. 그 중 한 아이가 범선 한 척을 골라 침을 묻힌/ 바늘 끝으로 찍힌 선 따라 돛을 살살 떼어 낸다. 철판에는 햇살을 받은 파도가 밀/ 려오고 출항을 기다리는 하얀 돛이 부풀어오른다. 숨을 죽인 아이들의 푸른 유선/ 형의 등 사이로 갈매기 떼가 푸드득 날아오르고 순간 한쪽의 돛에 툭 금이 간다./ 에이 재수야, 손을 털고 일어서서 아이들은 놀이터 쪽으로 달려가고 사내는 이내/ 동전 통에 누워 있는 백동전과 함께 오수에 빠진다. 바다가 달아난 사내의 생은 저/ 녁 무렵 구멍 숭숭 뚫린 허연 연탄재 두 장으로 길가에 남겨진다.//

풀밭에서 읽히다 / 박수현
집과 반대쪽으로 난 둑방길을 한참 걸었다 둑방 풀들의 키가 한결 낮아졌다 바람의 발바닥이 둑방을 꾹꾹 눌러 밟으며 강을 가로지른다 여름 한철, 여자의 치마 끝을 부풀리던 초록은 허리를 접고 무릎을 꿇고 발목을 꺾어 나지막이 몸을 눕힌다 도꼬마리의 가시도 물러진다 지난여름, 숱한 길을 골몰하던 풀들의 그림자가 더 어두워진다 풀벌레의 날갯짓이 가늘게 풀잎을 흔든다 잎사귀 뒤에서 퍼들대며 바글거리는 것들, 까닭 없이 나를 벌세우던 젊은 날들은 이제 어떤 속임수도 걸어오지 않는다 한결 가벼워진 풀밭에는 헛뿌리가 무성하다 모서리가 바스라진 초록의 한 페이지가 둑방의 으스름한 잔등 뒤로 넘어가고 있다.//

환승 / 박수현
젊은 사내가 새 도장을 주문한다// 벼락 맞은 대추나무의 불행에다/ 자신의 행운을 기대어/ 촘촘히 첨자籤子한다 이름 석 자를 새긴다/ 자충수만 두다 놓쳐버린 바둑 한 판 같은 삶도/ 삼재를 물리치고 재운을 부른다는/ 흑갈색 벽조목霹棗木 도장/ 몇만 볼트 섬광 한 줄기에 되물릴 수 있을까/ 몇 년째 깨진 도장을 들고 다니다/ 인장집에 들른 나도/ 누가 내 삶에다/ 불행한 자국을 꾹꾹 찍는가 생각해 본다// 도장집 노인은 입김으로 나무밥을 턴다/ -이제 찍어봐요, 젊은이/ 하얀 종이에 한평생을 꾹 찍는다/ 대추알처럼 붉은 생의 증거들이 푸시시 웃는다//

우포늪 시집 속으로 걷는다 / 박수현
해그림자가 젖은 이마 닦는다/ 물새 날아오르는 우포늪 서성이다// 자박자박 물속으로 걸어간다// 바람에 휘감긴 스카프 걷어 내듯이/ 발목 감는 어둠 털어 낸다/ 우포늪 왁새* 시집 행간 따라/ 늪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초사흘 달이 개망초에 숨었다/ 미루나무 이파리에 머문 바람/ 사르륵 자갈밭에/ 물 빠지는 소리로 몸 부빈다// 깨물어 뱉은 어둠에 걸려/ 풀물이 든다/ 헐거워진 나이/ 방광이 놀라 눈물 쏟는다// 상처입은 몸에게 신호를 보낸다/ 문명이 주는 혜택에서 사라지는 것들!/ 늪의 생명 위협하는 덫에 걸려 넘어진다// 어둠 속 발광하는 유충 반딧불/ 자연이 준 선물,/ 지상에 내린 별빛 속으로 왁새 울음 걸어간다//
* 배한봉 시집 <우포늪 왁새>

관계 2 / 박수현
아이가나비를뒤쫓는다/ 잠자리채를들고/ 초록에초록을덧칠하는들판을달린다/ 하얀데이지꽃위에서팔랑이던은점표범나비가/ 키낮은산딸나무꽃차례위로날아오른다/꽃잎에박힌두장의날개가/ 싸한햇살에조금씩다른빛깔을펼치는동안/ 아이는터질듯숨을몰아쉰다/ 새소리를한껏물고있던백양나무잎사귀들이/ 일제히한방향으로몰리며수채화풍의투명한울음을풀어놓는다/ 나무그늘에고인풀들도날고싶은지/ 젖은발꿈치를곧추세우며몸을흔들댄다/ 더듬이가부러진나비가잠속에서/ 아이의손등위에검은점무늬날개를하르르펼친다/ 아이의빈잠자리채에어린/ 나비의긴잠이/ 여름하오의적막에빗금을그으며흘러간다//

관계 4 -눈물주 / 박수현
이 작은 보랏빛 술잔엔 무엇이 있나/ 백년초와 함께 잘게 다져진/ 참다랑어의 눈물 알갱이가 목구멍에 엉켜든다/ 몇 번이고 허공에 치솟으며 갑판으로 당겨졌을/ 참다랑어의 거친 지느러미가 툭툭 내 옆구리를 건드린다/ 거뭇거뭇 썰린 눈알들이 나를 휘감아/ 캄캄한 深海로 밀어 넣는다/ 너울너울 튀어오르는 비공개의 굴절된 냉동기록(frozen record)들/ 세 살 때 죽은 여동생의 또록한 눈망울이/ 팔려가며 쳐다보던 황구의 눈꺼풀에 맺히던 눈물이/ 싸이나를 삼키고/ 눈밭에 나뒹구라진 고라니의 부릅뜬 동공이/ 부표처럼 깔딱대다 세찬 물살에 쓸려간다/ 내 눈 속에 묵혀둔 그대 눈빛도/ 높은 파랑에 뒤집히며 이지러진다/ 눈먼 참다랑어 떼가 활공하듯 날개지느러미를 펼친다/ 사람들은 그것이 幽閉된 어떤 영혼의 독백인 줄도 모르고/ 보랏빛 울음을 단숨에 마신다// 다음 특급 서비스는 머릿고기란다/ 요리사는 남은 뽈살과 울대의 살점을 요리조리 저며서/ 접시위에 살구빛 물꽃 몇 송이를 피워 올린다/ 젓가락으로 집어올린 꽃잎마다/ 등 푸른 물결무늬가 새겨져 있다/ 잠수종처럼 무거워진 내 눈꺼풀을 잘라/ 바다가 넘실대는 냉동고에 넣는다/ 영하 50도로 눈물 알갱이들을 얼린다/ 단단하고 싱싱하다//

가습기 / 박수현
내 앞 한 남자가 깊게 잠들어 있다 조금씩 코까지 골며 돌아눕는 그, 목이 마른지 입맛을 다신다 벌린 입에서 껴안을 수 없었던 낮 동안의 일과 권태와 불안이 뒤섞인 쿰쿰한 냄새가 풍겨져 나온다 나는 내 몸을 빙그르 원심분리시켜 잘게 부순 수증기를 그의 위로 뿜어낸다 걸린 옷가지가, 그의 사지가 조금씩 눅눅해진다 쉰내 나는 그의 마음은 여전히 모래가 버석이는지 구름같은 한숨이, 연신 혀를 차는 안개가 뭉글 빠져 나온다 밤새 어지럼증을 견디며 나는 젖은 필터 사이로 몸의 수분을 다 증발시킨다 뻑뻑한 늑골 사이 끄륵 수레바퀴 구르는 소리가 날 때까지,//

마지아미 카페 / 박수현
상제나비 한 마리가/ 연꽃문양 창가에서 날개를 접는다/ 카페 한 구석, 나는 야크차를 마시며 시인의 연가를 생각한다// 주인을 잊은 정원에는 하늘매발톱꽃이 한창이었다/ 포탈라, 달라이 라마의 겨울 궁전/ 긴 계단을 오르자 격자무늬 붉은 문 안으로 미로가 뻗어 있었다/ 창양 가쵸*, 그가 밤마다 몰래 빠져나가던 비밀통로였을까/ 미로의 끝, 검은 법륜휘장 걸린 분통만한 그의 방에는/ 야크버터에 심은 레몬빛 촛불들이 密旨처럼 흔들렸다// - 나는 당신의 사차원 공간, 당신은 나의 초월적 시간/ 하늘이 증명하듯 우리의 사랑은/ 죽음보다 더 마땅하고 자연스런 일입니다**// 천불도가 채색된 긴 낭하를 숨죽인 채 빠져나가는/ 어린 왕을 따라/ 나도 향냄새 자욱한 바코르 광장으로 나왔다/ 불멸의 사랑을 노래하던 목소리가 낮아지고/ 독경소리 커지며 그가 룽다처럼 파르르 나부꼈다/ 따각따각, 눈 위에 뒹굴던/ 마지아미의 하얀 목을 안장 위에 싣고/ 그는 설역 탕구라산을 향해 미친 듯 달려갔다// 나는 식은 차를 마시며/ 그들이 함께 산다는 하늘호수를 떠올렸다/ 여우비가 간간히 쏟아지던 긴 하루였다//
* 창양 가쵸: 200여 편의 연가를 남긴 달라이 라마 6세의 법호. 13세에 왕이 된 그는 연인(마지아미)을 만나기 위해 자주 궁을 빠져 나갔고 그녀는 눈 오는 날 목이 잘렸다 한다. 현재 바코르 광장에는 마지아미 카페가 있다
** 창양가쵸 시편의 한 구절

말문 / 박수현
옹기분에 꽃대 하나 쑥 올라와/ 열흘 넘게 골몰하더니 봉오리가 터집니다/ 갓난쟁이 볼의 실핏줄처럼 얼비치는/ 아마릴리스 세 송이/ 침묵이라는 꽃말처럼 말없이/ 구근만 궁글렸나 봅니다/ 입 꼭 다물다/ 大寒 근처에야 겨우 말문을 틔웁니다/ 둥근 모음을 발음하느라 입술을/ 볼록 내밉니다/ 베란다 식구들/ 모두 귀를 쫑긋 기울입니다// 늦게 배운 아이의 발음이/ 다홍다홍 더 또랑또랑합니다//

흉터 / 박수현
흉터의 시간이 질기다/ 첫 돌 무렵, 볼거리로 생긴 목의 흉터/ 중지 한 마디만큼 음푹 팼다/ 비장해야 할 쓸쓸한 유훈처럼/ 여태 턱밑까지 가리는 윗도리를 입었다// 답답한 목을 빼물고/ 얼마나 오랫동안 걸어왔는지/ 그 언저리께로/ 기척도 없이 날강해진 침묵이 고여 들었다// 늘 응달진 그곳/ 갈증 날 일도/ 서러울 일도 없는데/ 가만가만 만질 때마다/ 멀고 가문 우물이 생각난다//

폐사지에서 부치는 편지 -雲興寺址에서 / 박수현
대숲의 蛾眉에 어둠이 내립니다// 여인의 은밀한 속곳 같은 발굴터, 석탑 그림자 하나/ 보이질 않구요 넘어진 浮屠와 허물어진 돌담만 푸릇한/ 까치꽃 사이 뼛자루처럼 곱게 삭아 뒹구는군요/ 구름으로 지어진 절이어서일까? 50여 개의 말사와/ 암자를 거느렸던 본절은 난리 통에 불타고 금부처와/ 장경각 목판본들은 어디론가 흩어져 버렸다지요/ 경판을 찍어내던 닥돌만 초록 이끼로 알 수 없는 글자를/ 판각하며 금당터를 지켜왔다는데요// 그렇지요, 천년의 시간이 흐른들 모감주 열매로 알알이/ 꿴 마음이야 어디 뜬구름처럼 쉬이 흘러가겠는지요/ 판각하는 스님을 연모했다던 어떤 사랑은 밤새워 탑돌이/ 를 했을 테지요 그믐밤엔 잡초 사이 꽃무덤 속 육탈한/ 뼈마디들 부스스 일어나 스란치마 끌며 찬이슬도 맞았을/ 테지요 누군가 해질녘 절터를 서성이며 녹슨 쇳대를 철걱/ 철걱 흔드는 소리 대숲너머 울려오고요 대웅전 꽃문살보다/ ​고운 누대의 사랑, 산철쭉으로 다시금 피어나는지 온 산/ ​환하게 물이 드네요 기우뚱 고개 내미는 내 몸의 폐사지에는/ ​언제 항라빛 구름사원 한 채 세워질 수 있을는지요//
* 운흥사(雲興寺): 신라 진평왕 때 창건, 고려를 거쳐 조선굴지의 경판 인쇄소가 있던 곳. 경남 울주군 웅촌면 고현리 원적산에 있음.

틸란드시아 이오난사 푸에고* / 박수현
난 박쥐처럼 매달려 있지/ 허공에다 발을 묻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래/ 흙이나 물은 없어도/ 내 두 발에다 발랄한 모자를 씌우고 싶어/ 찰리 채플린이 쓰던 볼러 아니 뉴스보이 캡도 괜찮아/ 사실 더 많은 모자를 신겨보고 싶어/ 골똘하게 생각하는 발이라면 누가 믿어 주겠어?/ 흐음, 모자의 자세는 발의 감정보다 먼저니까/ 먼 길 떠날 때는 신발보다/ 모자를 더 챙기는 풍속도 괜찮아/ 여행지 대합실에서 두리번대는 눈길을 가려주는 모자/ 딱딱한 사각턱도 부드럽게 만드는 모자/ 오래 전 버렸거나/ 옷장 속에서 한 번도 꺼낸 적이 없는 모자/ 해바라기가 즐비한/ 멕시코 티화나의 골목들이 더 깊숙한 골목을 감아 돌 듯/ 모자 한 개에 착생된 감정을 생각하는 그런 밤/ 나는 철봉대에 거꾸로 매달려 흔들흔들 텅 빈 운동장을 바라보지/ 아무 것도 기억하지 않는 모자의 표정을/ 아니 아직 도착하지 않은 나라의 푸른 발들을 궁금해 하면서//
* 틸란드시아 이오난사 푸에고: 미세 먼지를 빨아들인다는 공기정화 식물(에어 플랜트).

가족 / 박수현
1/ 서랍정리하다 찾아낸 열쇠 꾸러미/ 둥근, 네모난, 마름모진 것/ 모양이 제 각각이다/ 한 집안에 열려야 할 문이 이처럼 많은가?// 한솥밥 먹고 킬킬대며 함께 TV를 보다가도/ 문을 닫고 돌아서는 식구들 등 뒤/ 아득하게 몰려들던 어둠이여/ 문 앞 깊게 패인 두려움을 몇 차례씩 헛돌리다가/ 누구의 내면에나/ 빛 한 오라기 닿지 않는 캄캄한 방이 있음을 안다// 뱉지 못한 말들은 어느 구석 먼지로 쌓여 있나/ 서로 다른 열쇠들은 어떤 모양의 열망으로 주조鑄造되었나/ 닫지 않았어도/ 오래 열린 적 없는 식구들 가슴 속/ 열쇠를 들이밀고 차디찬 실린더를 비튼다// 2/ 딸깍, 갈비뼈가 움칫거린다/ 묵직한 어둠이 한 칸 물러선다//

엄마의 재봉틀 / 박수현
아흔넷 울 엄마, 요양병원에서 재활치료 중이시다/ 헛디뎌 부러진 고관절 수술 탓에/ 아가로 돌아가 기저귀를 찼다/ 음력설은 집에서 쇠겠다고/ 보행기 잡고 걸음마 연습하다가/ 휠체어에 주저앉아 헌 옷 뭉치처럼 졸고 있다 / 꿈결 속 헐렁한 날들의 기장을 늘이고 줄이며/ 70년 지기 싱거 재봉틀을 밟는지/ 다륵 다르륵 코를 곤다/ 꽃무늬 블라우스와 프릴 많은 원피스들/ 한 땀씩 여물게 박아내던 그 옛날/ 어깨 위엔 울음이 실밥처럼 날강날강하다/ 북집을 열고 밑실을 조이면/ 시접 뜯어진 저 생의 솔기 다르륵 다시 박아낼 수 있을까/ 허리 굽어진 어둠 일습一襲이/ 허공에서 돌돌, 누비질 되는 줄도 모르고/ 멈춘 바퀴 위, 밭은 숨결이 보풀처럼 팔랑인다/ 짧은 햇살이 창으로 든다/ 잠시 웅크린 그림자가 또렷해진다// 늙고 환한 적막의 둘레가 한 뼘/ 더 넓어졌다//

유리의 길 / 박수현
두께 5mm 식탁 강화유리에/ 어느 날 한 뼘 넘게 금이 갔다// 슬금슬금 한 발씩 더 뻗어 모서리까지 다다른/ 금들 위에 여자가 저녁밥상을 차린다/ 얼마나 오래 쌀을 씻고 밥을 펐는지/ 그녀의 압력솥 추는 밥물 끓는 냄새를 맡지 못한다/ 큰 소리 대신 리모콘이 날아가는 거실/ 욕설 대신 접시가 튀어 오르는 부엌 옆에서/ 울부짖음, 낮은 한탄과 중얼거림, 실없는 웃음의/ 그 많은 식은 밥을 먹고 웃자란/ 창밖, 느티나무 가지 하나가 기웃대며 집안을 들여다본다/ 헌 숟가락과 낡은 접시 사이로 난/ 유리의 길들,/ 바스러진 유리가루 머금은 실금들이/ 부엌을 거쳐 거실 벽을 타고 기어오른다/ 힘센 나무뿌리가/ 재빨리 그 경계로 진진초록 발을 디민다//

동거 / 박수현
녀석이 끙끙대며 현관 앞을 서성거렸다 늙은 주제에 똥은 꼭 한데서 싼다고 고집 부리는 녀석에 끌려 밖으로 나선다 가죽 목사리를 한 녀석과나, 그리고 현관에서 뱅뱅이 도는 녀석을 구슬려 보라며 애먼 봄을 닦달하는 녀석의 주인이 사월의 햇살 속을 걷는다// 한 바퀴 시원히 대장을 털어낸 녀석이 만만한 운동화를 앞발로 눌러보다가 끈을 물고 질근거리다가 뭔가를 찾아 두리번거리다가 현관께에서 조그맣게 구겨졌다 구급차에 실려 간 작은 오빠에게 막무가내 상속받은 14살배기 시츄 누리, 살이 20kg이 내려 반지를 어디 흘렸는지 모르겠다며 병실에서 희미하게 웃던 녀석의 주인, 녀석이 그의 반지 같다는 생각을 했다 개는 제 나이에 7을 곱해야 사람 나이로 환산된다고 한다 과연 녀석이 그의 아비뻘인 셈이다 녀석을 묻어줘야 한다던 작은 오빠가 먼저 땅에 묻히는 날 백내장 온 녀석의 홍채가 유난히 하얬다// 신발 뒤축에 귀를 묻고 녀석이 잠에 들었다 느릅나무 그늘에서 쉬는 주인의 발치께에 저도 엎드렸는지 백태 낀 혀를 내밀며 숨을 몰아쉰다 잠의 발등을 핥는 녀석의 털 빠진 목덜미를 오후 다섯 시 햇살이 따듯하게 감싸고 있었다//

우리 동네 / 박수현
내가 사는 아파트를 낀 소방도로 모롱이에 찻집 단풍나무가 있다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그곳을 기준으로 조회시간 애들처럼 삐뚤빼뚤 줄 서 있는 가게들, 한쪽으로 선미머리방, 둘레수선점, 엄마손분식, 윤가네감자탕, 고운양품점, 장미세탁소와 나리노래방이 있고 맞은편엔 휴치과, 재민이발소, 온누리약국, 파닭한마리, 청미래식당, 세계마트 그리고 싱싱자전거방이 있다 어느 한갓진 소읍처럼 누가 오가는 기척도 귀엣말로 건넬 듯 다닥다닥 매달린 가게들이 요즈음 새 간판을 다느라 분주하다 풍년방앗간 자리에 파리바게뜨와 베스킨라빈스가, 그 옆 미미꽃집은 팡세 아 모아로 상호를 바꾸었다 국수나무가 문을 닫고 개업기념 50% 특가라고 미스사이공 스카이댄서가 아오자이 자락을 펄럭인다 학사문방구 자리엔 24시 GS편의점이 길고양이처럼 호동그랗게 눈을 뜬 채 밤길을 살핀다 새 도로명보다 칼산우성이라 말해야 쉽게 알아듣는 택시기사들, 비가 오면 진창이었다는 이곳에 다코야키 푸드 트럭이, 땅콩 볶는 수레가 다국적 간판을 읽어내느라 잠시 두리번거린다 팡세 아 모아 꽃집이 한나절 생각에 잠긴 동안 매미 소리가 잦아들고 바람이 마른 플라타너스 잎들을 몰고 내달린다 엔제리너스 문을 밀다가 나는 문득 유리창에 단풍잎을 붙이던 단풍나무찻집과 단풍잎 같은 사람을 생각하고 파리바게뜨에서 크루와상을 집다가 뜬금없이 퐁네프다리의 연인을 떠올린다 한 가게 안에는 포인세티아가 붉고 가을을 건너뛴 저쪽 가게 너머에는 첫눈이 내린다 그 사이, 또 새 간판이 올려지고 나는 미미꽃집과 단풍나무찻집과 잊힌 이름 하나를 설핏 접어 주머니에 구겨 넣는다//

따뜻한 안부 / 박수현
마음 시린 나이에는/ 가슴 데우는 안부가 그립다// 얼음처럼 스며든 기억 부스러기/ 강가나 바닷가/ 혹은, 산에라도 펼쳐내고/ 따뜻한 입김으로 소식 전해주면/ 굳어진 언덕 봄눈 녹듯 하겠지// 살기 어려운 세상/ 진부한 넋두리라도 들어줄/ 여유 있는 마음이/ 몹시도 기다려진다// 그렇구나 !/ 그리운 안부만 기다렸을 뿐/ 먼저 전하지 못한 상실된 언어는/ 입안에 가시가 되었지// 오늘은/ 풀어내지 못한 마음 열어/ 나풀거리는 노랑나비 되어/ 따뜻한 안부를 전해 보련다//

빵 / 박수현
눈 덮힌 산길/ 맑은 바람 그리고 반나절의 햇살이/ 젊은 무덤을/ 잘 익은 빵덩이로 빚어 놓았습니다/ 둥싯 부풀어 올라/ 뜯어 먹고 싶을 만큼 부드러워 보입니다/ 하얀 설탕 토핑처럼/ 흠 없고 청결한 마음 몇, 천상의/ 빵바구니에 담겨/ 자못 반짝이는 날입니다//

고해성사 / 박수현
누가 새의 울음을 틀어막을 수 있을까?/ 우는 것밖엔 도무지 할 일이 없다는 듯/ 머리에 붉은 관을 쓴 홍관조, 날갯죽지 푸른 어치, 이름도 모르는 검은 새들이/ 초록으로 깊어지는 백양나무 가지 위나/ 십자가 모양의 산딸나무 하얀 꽃차례 위에서 운다/ 윗윗 위익위익, 도록 도로록독, 쪼로롱 쪼쪽/ 눈송이의 프랙탈이 비슷하면서도 각기 다른 것처럼/ 방울방울 굴러 떨어진 제 각각의 울음은/ 고요의 바닥을 촘촘히 훑으며 내 창가로 흘러든다/ 한 뭉치의 젖은 새벽안개이었다가/ 고슬고슬한 한낮의 햇살이었다가/ 해질 무렵, 짓던 집을 허물며 서성이는 바람소리로 운다/ 금요일 저녁이면 검은 중절모를 쓴 유대인 남자들이/ 두터운 성경책을 끼고 삼삼오오 모여드는 마을,/ 회당으로 가는 길모퉁이에서/ 등 굽은 남자가 낡은 바이올린을 오래 연주하고 있다/ 평생을 읽어도 다 읽어내지 못하는 경전이/ 지켜야 할 그 무슨 서원이라도 되는 듯/ 나뭇잎 사이로 흩어지는 가늘고 높은 음계 속으로/ 종일 번식시킨 울금빛 울음을 갈무리 해두고/ 잠시 반짝이며 날아가는 새들, 새떼들//

마르코 폴로의 모자* / 박수현
마르코 폴로의 하얀 모자가 54층 상공에 떠 있다// 폴로의 모자를 본뜬 접시에 담긴 송이버섯 덮밥,/ 담백한 송이향과/ 차지고 달콤한 맛이 혓바닥에 감겨든다/ 은 숟가락 사이를 지나 한 사내가 홀로 사막을 건너간다/ 동행했던 수사들이 겉옷을 찢으며/ 고국으로 돌아갈 때마다/ 키질쿰 사막의 프슈프슈*가 날린다/ 칸에게 바칠 성유를 감춘 폴로의 옷소매 끝에서/ 사막의 팽팽한 지평선이 구겨지고 있다/ 54층 유리창마다 붉은 구름이/ 모래사구의 주름 문양처럼 들이친다/ 이글거리는 태양과 모래로 버무려진 퀴퀴한 냄새를 걸치고/ 내 앞에 앉은 사내도 몇십 년째 노을을 건너고 있다/ 너무 오래 사막을 걸어왔으므로/ 그의 이마의 땀방울조차 오래 발효된 듯 검무스레하다/ 갑자기 송이덮밥에서 훅 마른 모래내가 몰려온다/ 저 아래, 빌딩의 모퉁이를 빠져나가는 금요일 저녁이/ 그림자를 몸 안으로 들이며 걷는다// 사내의 얼룩진 챙모자를 들여다보는데/ 하늘과 맞닿아 끝이 뭉개진 길들이/ 구름을 끌고/ 내게로 내게로 돌아오고 있다//
* 음식점 이름
* 먼지처럼 가는 사막의 모래

아스팔트 위에서 중생대를 만나다 / 박수현
성산대교로 가는 출근길은 상습 정체구간이다/ 그 길목에 서 있는 타이탄 트럭 한 대,/ 기름 솥을 걸고 있다 흰 마스크를 한 사내가/ 갓 튀겨낸 공룡알빵을 들고 나타난다/ 한 봉지에 이천 원이라고 검지와 중지를 치켜들어 보인다/ 뒷차의 운전자가 선팅한 차창 밖으로 지폐를 꺼내/ 공룡알빵과 바꾼다/ 그가 무표정하게 우적우적 공룡알빵을 씹는 것을 본다/ 공룡알빵은 질긴가보구나! 중얼대다가/ 나도 한 봉지를 산다 빵봉지를 건네는 사내의 손이 털북숭이다/ 문득 그 사내와 함께/ 까마득한 쥐라기, 백악기시대로 순간 이동한다/ 그 자가 튀겨낸 공룡알이 모두 부화한다/ 옆줄의 덤프트럭은 티노사우루스로 쿵쿵 긴 목을 휘두르고/ 자동차행렬은/ 마이아 사우루스, 디메토로돈, 울트라 사우르스로,/ 늘어선 고층아파트들은 울창한 중생대의 숲으로 변한다/ 원시림에서의 그 싱싱한 인간들이/ 공룡이 벗어 둔 신발을 신고 어슬렁거린다/ 익룡이 날아오르고/ 나도 한 순록의 뒤를 쫒아 벌거벗고 뛴다/ 뒷차가 빵빵댄다//

두통에 대한 사소한 견해 / 박수현
모자를 둘로 분류해 본 적이 있다 색깔이나 용도별이 아니라 모자에 향한 취향이랄까? 어울릴 것 같아, 또는 가격이 만만해 덥석 사들였다 처박아 둔 것, 줄창 쓰고 다녀 빛이 바래거나 얼룩진 것, 창이 휜 것, 보풀인 것들이다 장롱에서 먼지나 뒤집어쓴 것들은 산책길에 동행하는 신발이나 장갑이라면 좋겠다고 구시렁댔고 나달나달 해진 것들은 창피하니 이젠 집에서 쉬고 싶다며 앙탈을 부렸다// 이 버릇없는 것들을 처분하고 배달의 민족들이 쓰는 은빛화이버나 하나 살까 궁리하자 눈치 빠르게 담합한 이것들, 저희를 냄비로 써보는 건 어떠냐며 능청을 떨었다 처음엔 뭔 수작인가 싶었는데 움푹 팬 모양새가 닮긴 닮았다 한때 몽글거리는 구름조각을 담고 다니던 모자, 생각이 궁색하면 뒤죽박죽 긁적이던 모자, 때론 벌교꼬막에 소주잔을 기울이며 세상을 훔쳐보던 모자였지만 잠깐 사이 굴러 떨어진 머리통을 찾지 못한 대책 없는 것들, 이쯤에서 용도변경은 나쁘지 않을성 싶다 철삿줄처럼 뻣뻣한 기억을 전부 잘라 부글부글 끓인다면 모처럼 노루잠을 깊이 잠재울 수 있으려나? 모자를 벗어 가스레인지에 올리는데 어디선가 굴러온 머리통이 껌딱지처럼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주름져 흘러내리는 화근내가 목덜미를 적신다// 밑바닥이 꺼멓게 그을린 냄비를 보면 어느새 덜 치댄 된 반죽 같은 생각이 펄펄 끓었다 저기, 저 냄비가 진짜 네 모자란다 누군가 내 귓불에다 끊임없이 속살거렸다//

점경(點景)들 / 박수현
2014년 4월 28일 목동 W아파트. 부러진 목련 가지. 짓이겨진 목련꽃잎 위로 엎질러진 선지 한 사발. 11층과 12층 층간에서 몸을 날린 M고교 2학년생. 카메라 플래쉬. 엠블런스 사이렌 소리. 귓속말을 주고받는 사람들. 저녁 일곱 시 뉴스 자막으로 요약된 한 줄의 점경(點景)// 2015년 11월 15일 J일보 사회면 2단 기사. 충북 보은면 은계리 한 농가에서 발견된 사체 두 구. 치매 앓는 아내의 목을 조른 후 그라목손을 마신 70대 L할아버지. 밀쳐진 이불 옆엔 시반(屍班)처럼 얼룩진 가족사진. 말라빠진 밥그릇과 엎어진 김치보시기. 윗목에는 싹이 노랗게 튼 무 반 포대와 썩은 호박 한 덩이.// 2015년 12월 20일. LPG 가스통을 자전거에 싣고 무작정 상가로 돌진한 일용 잡역부 40대 남자 P씨. 박살난 전면 유리창 파편에 행인 4명이 중경상 입음. 집 나간 제 에미를 찾는 5살 난 딸애를 보육원에 두고 온 저녁, 길 건너편 H병원 응급실로 후송됐으나 이틀 뒤 패혈증으로 사망.// 2016년 8월 11일. 경기도 부천시 생태공원 여자화장실. 중 3 여학생이 갓 낳은 영아를 검은색 나이키 점퍼에 싸서 유기. 피 먹은 생리대 위에 구겨진 영아의 직접사인은 청색증. 근처 PC방에서 게임을 하다 체포된 뉴욕 양키스 야구모의 흐린 소녀.// 2016년 12월 14일. 서울 서교동 H아파트 지하 1층 사우나 탈의실. 남루한 항공점퍼를 입은 60대 남자가 갑자기 쓰러짐. 니코틴 낀 이빨을 덜덜 떨며 배가 고프다고 호소했으나 한 그릇 밥 대신 119 구조대가 출동. (종업원 S씨는 추위를 피해 사우나에 몰래 들어온 것 같다고 증언).) 병원으로 호송 중 사망. 신분증 및 연고자를 추정할 소지품은 발견되지 않음.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공원묘지 무연고 추모의 집 철제 선반에 안치된 유골함.//

양말을 위한 변주곡 / 박수현
침대 밑에서 말린 딸의 고양이 캐릭터 발목양말을/ 소파 구석, 뒤집힌 남편의 줄무늬 양말 한 짝을 찾아낸다./ 아라베스크 무늬 내 수면 양말은/ 분명 세탁기 속에 넣었는데 또 한 짝이 달아났다./ 뒤꿈치에 구멍 난, 엄지발톱이 슬쩍 내비치는/ 그 양말짝들은 어디로 갔을까.// 양말에도 길들이 새겨져 있어/ 딸의 아메리칸컬은 활처럼 등을 휘고/ 맹목적인 낙하라도 감행하려는 걸까./ 베란다 난간에서 불안을 말아 올리며, 야옹/ 거꾸로 매달려, 야옹 야옹.// 남편은 초원을 달리는 얼룩말을 보러/ 케냐행 비행기를 탔는지도 모른다./ 청동기 사내들처럼 양털 발싸개를 감고/ 얼룩말을 겅중겅중 쫒다가/ 바람이 흩어지는 움막으로 돌아오고 있을게다.// 나는 푸른 아스파한으로 간다./ 이맘 모스크의 아라베스크 연속무늬를 신고 따라가면/ 조붓한 골목 안 타일과 카펫 파는 가게들이 늘어서 있다./ 그곳에는 실삼나무, 대추야자 나무가 하늘로 뻗고/ 장미꽃들이 송이송이 포개진다./ 아스파한 로즈를 노래한 어느 시인처럼/ 나도 눈멀어 길을 건넌다./ 노천카페에는 긴 수염의 노인이 물 담배를 피우며 졸고 있다./ 유리호리병 안, 박하향이 끓고 있다./ 강변엔 검은 차도르들이 달디 단 오디를 줍고/ 자전거를 탄 젊은이들이 카주 다리 너머/ 그 옛날 페르시아로 간다./ 세탁 종료 벨이 울린다./ 휘뚜루마뚜루, 헐렁해진 양말들을 넌다./ 짝짝이 양발 사이를 지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올리브 나무 사이로 난 길로 떠난 너를 지나/ 아라베스크 자세로 밤이 오는 쪽,/ 나는 이스파한으로 간다.//
* 압마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이란 영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에서

 



박수현 시인
1953년 대구 출생. 본명 박현주. 경북대학교 사범대 영어과 졸업.

2003년 계간 『시안』으로 등단.

시집 『운문호 붕어찜 』 『복사뼈를 만지다』, 『샌드 페인팅』 연합 기행시집 『티베트의 초승달』 『밍글라바 미얀마』 『나자르 본주』 등 출간.

2011년 서울문화재단 작가창작 활동 지원금, 201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 창작 지원금 수혜. 동천문학상 수상. 현 시인협회 중앙위원. 〈온시溫詩〉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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