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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카이로스의 길 / 김정아

부흐고비 2021. 11. 10. 08:28

2021년 제12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옹이 깊은 나무가 손님을 맞이하듯 반겼다. 그의 아픔도 꽤나 깊었나 보다고 한참을 눈에 담았다. 35세의 일기로 세상을 뜨기 전까지 굴곡진 삶을 살다 간 한 여인. 장희빈과 숙종 사이에서 사랑과 권력에 희생된 비운의 삶. 왕의 후계자를 낳지 못하는 치명적인 결격사유에도 불구하고, 민초들까지 널리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는 그녀. 그녀가 장희빈의 계략으로 서인으로 강등되었을 때, 3년 동안을 머물며 복위를 기원한 곳이 바로 수도산 청암사다

‘새도 나의 벗이고, 산과 꽃들도 나의 벗이니 외롭지 않구나.’ 안내도에서 단장을 한 고운 여인이 반긴다. 산길의 초입에서 왕후의 안내를 받으니 기분이 묘해진다. 수도암으로 가는 길을 뒤로하고 인현왕후길로 접어들었다. 야릇한 느낌은 가쁜 호흡을 멈추어 세운다. 마치, 고혹의 여인이 다소곳이 품은 아이 같다고 해야 할까. 느낌이 좋은 날, 우리는 사유의 숲길에 들었다.

사람도, 일도 늘상 그러했다. 내가 접하지 않은 일, 만나보지 못한 사람,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는 언제나 모종의 설렘을 동반한다. 낯선 장소도 그러하다. 더러는 전혀 기대가 없던 소득이 더욱 보람이 크게 다가오는 법이다. 김천 인현왕후길은 나의 고향 상주에서 가까운 곳이라 왠지 모를 푸근함에 그냥 마음이 부풀었다.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이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큰 위안이다. 새삼 생각을 확인시켜 주듯이, 언제나 끝을 보이려나 손가락셈을 하던 여름이 꼬리를 보이며 달아나고 있다. 간사하다는 말을 품에 안으니 정말이지 우리는 간사한 게 맞다. 본능적으로 옷깃을 여미게 하는 시간 앞에 와 있음을 감지하며 길을 걷는다.

인현왕후길은 김천에서 3년을 보낸 그녀를 기리기 위해 조성한 길이다. 수도암 갈림길에서 길에 대한 설명을 일견(一見)하고 나니 오솔길이라고 여겼는데, 차 한 대가 넉넉히 다닐 수 있는 임도가 나왔다.

길은 길에 연하여 있다고 했다.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고, 사람들이 적게 간 길을 택했노라고, 그것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는 프로스트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이 아닌 다른 길은 어떠했을까? 그 길로 걸어갔더라면 지금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남의 떡이 커 보이듯 어쩌면 그 길이 훨씬 낫지 않았을까….

한 걸음 한 걸음, 발 아래로 밟히는 촉촉한 낙엽의 푹신함은 지난 겨울 앙상히 말라 버린 탈색의 빛깔도 아니요 황량한 소리도 아니기에 오히려 환상적이다. 사위에 둘러싸인 대자연의 황홀함에 나른히 취해 갔다.

인고의 오랜 시간을 그녀가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거닐었다는 그 길, 감정이입 된 내 가슴이 점점 뜨거운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스쳐가는 바람 한 줄기에 마른 나뭇잎들이 후드득 비처럼 발등에 떨어질 때, 우리는 무방비로 전율한다. 이는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자연이 주는 무한의 기쁨이다.

너른 자연의 품이 우리에게 주는 위로는 ‘어진 이는 산을 좋아한다’는 인자요산(仁者樂山)이라는 말을 절로 알게 한다. 걷기의 즐거움을 배가하게 하는 산세의 푸근함과 맑은 공기에 만상(萬狀)의 이야기들이 하나둘씩 떠올라 가던 걸음을 멈추고 여러 생각에 잠긴다.

물들어가는 산하는 고운 자태를 지나치기가 못내 아쉽다. 걷다가 쉬고 걷다가 쉬고를 반복하며, 눈앞의 스크린을 찬찬히 둘러본다. 아~!! 좋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절로 탄성이 나오는 걸 보면 내 안의 희열은 그대로 자연스럽다. 이토록 따뜻한 평안의 날들이 생애 얼마나 될는지,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킨다.

지금 나는 쏟아지는 황금물결의 출렁임 속을, 그대로의 별천지를 걷고 있다. 짙은 구름이 드리운 비련의 길목 길목, 왕후에서 평민으로 전락한 인현왕후를 가슴에 담고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이야기로 누군가 나를 위로하였다.

호사를 누리다 무흘계곡이 옆이다. 장쾌한 물소리가 웅장한 오케스트라다. 말갛게 가슴의 시름을 씻어주는 힘찬 물의 위용은 장관이다. 길은 용추폭포까지 이어진 깊고 맑은 산세에 점점 취해가도록 우리를 안내하였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고 했던가? 정말 그럴까? 경험해 본 바,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있다 보면 하루가 금방 흘러가는 것 같은데, 괴롭고 힘든 시간은 어찌 그리도 느리게 가는지? 나에게 배정된 일과, 나에게 주어진 시간, 앞으로의 미래를 잠잠히 구상한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크로노스의 시간과 달리 카이로스의 시간은 내가 마음먹기에 따라 관리를 하는 것이다. 마음의 풍요 또한 내가 만들기 나름이라는데….

그녀의 굴곡진 삶이 어린 인내의 길을 걸으며 내가 오늘 바라는 일이 어느 순간 가슴에서 깊은 나락의 아픔으로, 침잠하게 하였던 일들이 지독하게 나쁜 꿈을 꾼 듯이 스르르 회복되기를 기도했다. 오래 함께하지 못함이 내내 아쉬움을 가지게 하는 사람인 듯, 마음에 여운이 남는 길을 걸음은 그 자체로 축복이리. 호젓이 혼자라도 좋고, 두런두런 여럿이라도 좋을 길. 후일 누군가와 함께 이 길을 걸어볼까.

저 산 중의 붉은 화음이 이내 사라질지라도, 나 지금은 활활 타는 중임을, 저토록 아름다운 자연을 따라 우리도 점점 원숙하게 익어가는 중임을.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 당신이 누구인지, 우리는 누구인지, 관계와 관계를 생각하며, 거미줄처럼 얽힌 인연의 소중함을 가만히 돌아본다.

치유의 숲을 지나 청암사에 들었다. 마주친 비구니 스님이 고개를 숙여 합장을 하셨다. 우리의 발은 이미 극락교를 건너왔다.

 

수 상 소 감

가끔은 홀로 숨어들 피신처가 필요했습니다. 그런 때면 프로스트의 시를 뇌어보곤 합니다. 내가 가지 않은 길, 아니, 가지 못한 그 길은 어떠했을까…. 앞산터널을 지날 때면 고독에 갇힙니다. 긴 터널, 나는 지금 어느 구간을 건너가고 있는 걸까를…. 생의 구간구간, 내 인생의 화양연화는 언제일까를 생각합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적지 않은 위안입니다. 카이로스는 온전히 마음을 다하는 순간이자, 내 존재의 의미를 느끼는 결정적 시간입니다. 기회의 신은 그냥 오지 않는다고, 장거리 마라톤에서 점점 뒤로 쳐지고 있는 나를 채찍질합니다. 나를 가장 나답게 살아있게 하는 독백으로 주문을 거는 시간, 간만에 깊은 호흡을 했습니다.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과 대구일보사에 깊은 고마움을 전합니다. 자주 나를 외면하던 행운과 이어지는 모노톤의 일상, 이 무사의 평안에도 새삼 감사합니다. 가장 나다운 나를 찾는 그날까지, 어느 길 위에서, 내일도 나는 무언가를 향해, 오감(五感)의 날을 활짝 세우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가을볕이 너무나 환합니다.
△ 경북 상주출생 △ 계명대학교 대학원 졸업(사회복지 전공) △ 계간 ‘문장’ 29회 시부문 신인상 수상 △ 형상시학회, 대구시인협회, 문장작가회 회원 △ 시집 ‘채널의 입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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