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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공암풍벽 / 김병락

부흐고비 2021. 11. 9. 08:53

2021년 제12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우린 병풍 같은 풍광 하나에 눈이 멎었다. 길 아래 몇 굽이 골짜기가 겹쳐 지나고 은빛 물결이 가을 햇살에 반짝인다. 동생은 한참 그곳을 바라보다 감회에 젖은 듯 눈물을 글썽였다.

용의 기맥이 끌어 당겼을까. 그 듬직함에 빠져 절로 발길이 옮겨졌다. 운문댐을 안고 경주 쪽으로 이십여 분 가다 보면 오롯이 깎여진 절벽 하나, 동생은 기이하게 뻗친 그곳에서 지난한 삶을 읽기라도 했는지 잠시 멀뚱해하다 안내판을 찬찬히 읽어 나갔다. 얼마 전 부지의 뇌경색으로 쓰러진 그는 바깥 활동이 힘들어 겨우 산책만 하는 정도였다. 그날 동생과 난 어떤 말도 없이 주변을 오래 떠나지 못했다.

구룡산의 거대한 용이 물을 마시기 위해 개울에 내달려온 모습을 하고 있다는 공암풍벽. 경주 산내 앞 물줄기가 한데 모여 물돌이를 이루는 곳이기도 하다, 신기하게도 풍벽 정수리 부분에 사람 한 명이 들어갈 만한 크기의 구멍이 뚫려 있다. 맨 아래 수면과 바로 닿아서 돌을 던지면 낭낭거리며 한참을 울리더라고 전해진다. 하여 공암(孔巖)마을이라 했고, 가을에 단풍나무가 멋진 풍광을 이뤄 풍벽(楓壁)이라고 불려졌다. 그 위용이 장대하다.

동생 표정이 일순 굳어지다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지금의 자기 처지와 지내왔던 역정이 물안개처럼 스쳐 갔으리라. 그간의 삶이 순탄치 않았음을 저 벽을 보고 더욱 절감하는 듯했다. 유난히 정의감이 강했던 동생이었다. 이혼 후, 혼자 살면서 여러 장애를 극복하지 못하고 방황의 수레바퀴를 돌았다. 나이 오십 후반이 되어서야 홀어머니를 모시고 겨우 정착하는 듯했으나, 의지한 어머니가 노환으로 돌아가시자 얼마 안 돼 그만 자신이 몹쓸 병을 얻고 말았다.

세간엔 절벽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벽은 잘난 사람 못난 사람, 가능과 불가능, 있고 없고를 단도에 가름한다. 하지만 벽이라고 해서 다 모질지만은 않을 터, 아득했던 일도 탁 트인 산 정상에 서면 불가사의한 힘을 얻기도 한다. 절망을 딛고 서면 희망의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지곤 했다. 고난을 걷고 과감히 일어서는 그 기백, 단연 승리자의 몫이기에 장벽은 끝이 아니었다.

그땐 세상이 참 어둡고 낯설게만 보였다. 일찍 아버지를 여읜 우리 형제는 외롭고 무기력했다. 유약했던 시절에 큰 울타리가 뚫려버린 것이다. 따스한 보금자리에서 위험과 이탈을 막아주고 사랑으로 감싸 주셨을 아버지…. 철벽의 방패막이를 잃어버려 곧장 흔들댔다. 바깥에서 다른 집 아이들이 아버지를 부르며 행복해하는 모습을 몹시도 부러워하며 자랐다. 현실의 벽은 성인이 되어서도 겨울 한복판처럼 매서웠지만, 내 자식한테만은 튼실한 보호막이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한시라도 놓지 않았다. 그런데 불쑥 이런 아픔이 찾아들 줄이야. 동생의 병세는 좋은 것 같다가도 금세 혼란에 빠지기를 거듭했다. 병간호에 밤낮없이 매달렸다. 세월은 나와 아무 상관없는 듯 그래 또 지나갔다.

그 후, 넉 달 만이다. 오늘은 아들과 이곳 공암풍벽을 찾았다. 오색 단풍은 지고 앙상한 등골나무 잎들만 길가에 흩날린다. 낮게 드리워진 회색빛 하늘, 절벽 위로 스산함이 가로누웠다. 그새 동생은 가슴속 맺힘을 다 털어내지 못하고 저 하늘나라로 가고 없다. 앓던 병에다 결국 폐암까지 오고 말았다. 벼랑 끝이었다. 나 역시도 보호자로서 방패막이가 되지 못했고 나약함에 고개를 숙여야 했다. 찬바람이 몹시 불던 지난겨울, 동생을 고향 선산에 묻었다.

누구나 힘들고 외로울 때 극단에 이르게 되고, 자연을 찾아 그 해결책을 구하기도 한다. 세월의 모진 풍파를 다 감수한 절대적인 것이기에 얻는 힘이 크다. 모든 건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했다. 생전 동생에게 벽은, 높이 둘러쳐진 억압의 대상으로 바라봤을는지 모른다. 다시 한번 뛰어 넘고 싶었지만 그제 힘이 부쳤으리라. 벽은 그저 경계일 뿐인 것을.

내겐 저 벽이 역경을 뛰어넘는 희망의 벽이었으면 좋겠다. 어리석음과 실패를 자책하며 밤잠을 못 이루기도 했지만, 비굴하지 않고 변치 않는 깨달음을 공암풍벽에서 얻어 오고는 했다. 어느새 걸음은 용머리에 섰다. 첩첩의 산 사이로 댐 물이 가득 차 흐르는 걸 보니 더불어 흡족하다. 늘 마음속으로는 더 강해지려고 애를 써도 행동은 엉뚱한 방향으로 틀어진 게 한두 번이었던가. 묵묵하게 사위를 호령하는 듯 저 늠름함, 내게도 그런 보이지 않는 힘이 없었다면 어찌 여기까지 올 수 있었으랴.

몸 하나가 겨우 빠져 나갈 수 있는 석문 앞에 섰다. 선조께서 끈덕진 삶을 위해 수도 없이 다녔을 굴바위틈에 두 손을 얹어 눈을 감고 옛 숨결을 느껴본다. 머리 위로 부처손 잎이 비록 강말라 엉켜있어도 자비심이 가득해 보인다. 저만치 뒤 따라오는 아들의 발걸음에도 힘이 차있다.

천하 절경이 그러하듯 이곳도 깊이 감춰져 있다. 드넓은 호수를 끼고 산등성이를 달리다 보면 그새 분답함을 다 털어내고 없다. 세파의 찌든 때가 묻지 않았으니 긴 세월 동안 이 고을을 잘 지켜주고 있는가 보다. 청도팔경 중에 으뜸이라 할 만하다. 설령 전설로 내려오는 공암의 비밀일지라도 이 답답한 시국을 풀어가듯, 용굴 저 밑바닥까지 후련히 한 번 뚫어 봤으면 좋겠다. 혹여 알 수 없다. 동생도 그 소리에 두 손을 흔들며 와락 달려올는지.

아마 처음부터 그랬나 보다. 우리 형제는 저 거대한 공암풍벽을 본 순간,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큰 벽의 아버지 모습을 떠올렸을지도.

 

 

△2006년 수필과 비평 신인상

△2020 대구일보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수필집 ‘매호동 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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