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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1875~1926) 오스트리아 태생 독일의 시인, 작가
1875년 프라하에서 미숙아로 태어났다. 본명은 르네 카를 빌헬름 요한 요제프 마리아 릴케. 부친은 군인이었으나 병으로 퇴역하여 철도회사에 근무하였다. 릴케의 어머니는 릴케의 이름을 프랑스식으로 르네Rene라 짓고, 여섯 살까지 딸처럼 키웠다. 양친은 성격의 차이로 해서 릴케가 9세 때 헤어지고 말았다. 열한 살에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지만 적응하지 못한다. 이후 로베르트 무질의 첫 장편 『생도 퇴를레스의 혼란』의 배경이 되는 육군고등사관학교로 옮기나 결국 자퇴한다. 1895년 프라하대학에 입학하고서 1896년 뮌헨으로 대학을 옮기는데, 뮌헨에서 릴케는 운명의 여인 루 살로메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평생 시인으로 살겠다고 결심한다. 살로메의 권유로 르네를 독일식 이름인 라이너로 바꿔 필명으로 사용한다. 1901년 조각가 클라라 베스트호프와 만나 결혼한다. 그녀가 로댕의 제자였으므로 그 자신도 로댕을 만나게 되어 예술적으로 깊은 영향을 받았다. 1902년 파리에서 로댕을 만나 그를 평생의 스승으로 삼는다. 클라라와 헤어진 릴케는 로마에 머무르며 『말테의 수기』를 완성하였으며, 이후 1911년에 마리 폰 투른 운트 탁시스-호엔로에 후작 부인의 호의로 두이노 성에서 겨울을 보낸다. 이곳에서 바로 전 세계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될 릴케 만년의 대작이며 10년이 걸려 완성할 『두이노 비가』의 집필을 시작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릴케는 스위스의 뮈조트 성에 머무는데, 이곳에서 그는 폴 발레리 등과 교유하며 여생을 보낸다. 발레리의 작품을 독어로 번역하고 또 직접 프랑스어로 시를 쓰던 시인은 1926년 백혈병으로 스위스의 발몽 요양소에서 죽는다.
가을날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얹으시고/ 들녘엔 바람을 풀어놓아 주소서.// 마지막 과일들이 무르익도록 명해주소서,/ 이틀만 더 남국의 날을 베푸시어/ 과일들의 완성을 재촉하시고, 진한 포도주에는/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하소서.//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더 이상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혼자인 사람은 그렇게 오래 남아/ 깨어서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며/ 낙엽이 흩날리는 날에는 가로수들 사이로/ 이리저리 불안스레 헤맬 것입니다.//
가을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잎이 진다, 하늘나라 먼 정원이 시들 듯/ 저기 아득한 곳으로 떨어진다/ 거부하는 몸짓으로 잎이 진다// 그리고 밤에는 무거운 지구가/ 모든 별들로부터 고독 속으로 떨어진다// 우리 모두가 떨어진다, 여기 이 손도 떨어진다/ 다른 모든 것들을 보라 떨어짐은 어디에나 있다// 하지만 이 한없는 추락을 부드럽게/ 두 손으로 받아주시는 어느 한 분이 있다.//
가을의 종말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언제부터인가 눈앞에/ 만물의 변화가 보인다./ 무엇인가 우뚝 서서 몸짓을 하며/ 죽이고 또 아픔을 준다.// 시시로 또 아픔을 달리하는/ 모든 정원들./ 샛노란 잎새들이 차차 짙으게/ 조락에로 물든다./ 내가 걸어온 아득한 길// 이제 빈 뜨락에서/ 가로수길을 바라보면/ 먼 바다에까지 이어닫는/ 음울하고 무거운/ 차디찬 하늘//
그리움이란 / 라이너 마리아 릴케
그리움이란 이런 것/ 출렁이는 파도 속에서의 삶/ 그러나 시간 속에 고향은 없는 것/ 소망이란 이런 것/ 매일의 순간들이 영원과 나누는 진실한 대화// 그리고 산다는 것은 이런 것/ 모든 시간 중에서도 가장 고독한 순간이/ 어제 하루를 뚫고 솟아오를 때까지/ 다른 시간들과는 또다른 미소를 띠고/ 영원 속에서 침묵하고 마는 것//
내 눈을 감기세요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내 눈을 감기세요./ 그래도 나는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내 귀를 막으세요./ 그래도 나는 당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발이 없어도 당신에게 갈 수 있고/ 입이 없어도 당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내 팔을 꺾으세요./ 그래도 나는 당신을 잡을 것입니다./ 손으로 잡듯이 심장으로 잡을 겁니다.// 심장을 멎게 하세요./ 그러면 뇌가 고동칠 겁니다.// 마침내 당신이 나의 뇌에 불을 지르면,/ 그 때는 내 피가 흘러 당신을 실어 나르렵니다.//
고요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너는 들리는가, 사랑하는 이여, 나는 두 손을 쳐든다-/ 너는 들리는가, 이 술렁이는 소리가······/ 고독한 사람의 몸짓에는/ 많은 사물이 귀를 기울이고 있지 않을까./ 너는 들리는가, 사랑하는 이여, 나는 눈을 감는다./ 이것도 소리가 되어 너의 귀에 닿는다./ 너는 들리는가, 사랑하는 이여, 나는 다시 두 눈을 뜬다······./ 그러나 왠지 너는 여기 없다.// 보일 듯 말 듯한 나의 움직임이/ 비단 같은 고요 속에 뚜렷이 떠오르고,/ 지극히 약한 자극도 지워지지 않고/ 먼 곳에 드리운 장막에 찍혀 나온다./ 나의 숨결에 따라/ 별이 뜨고, 별이 진다./ 나의 입술에 마시란 듯이 향기가 밀려온다./ 나는 먼 곳에 있는 천사들의/ 손목을 분별한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고 있는 사랑하는 너만은/ 보이지 않는다.//
고독 / 라이너 마리아 릴케
고독은 비와 같다./ 고독은 바다에서 저녁을 향해 오른다./ 고독은 아득히 외딴 평원에서/ 언제나 고독을 품고 있는 하늘로 향한다./ 그러나 비로소 하늘에서 도시 위로 떨어져 내린다.// 동틀 녘에 고독은 비가 되어 내린다./ 모든 골목들이 아침을 향할 때,/ 아무 것도 찾지 못한 몸뚱어리들이/ 실망과 슬픔에 서로를 놓아줄 때,/ 서로 미워하는 사람들이/ 한 침대에서 자야 할 때,// 고독은 강물과 함께 흐른다.//
고아의 노래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나는 아무도 아닙니다./ 앞으로도 아무도 되지는 않으렵니다./ 지금은 존재하기에도 너무 초라한 몸/ 그러나 훗날에도 마찬가지일 게요.// 어머님들 아버님들이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정말 키워 주신 보람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잘려지는 몸입니다./ 아무한테도 쓸모없는 신세입니다./ 지금은 너무 이르고 내일이면 너무 늦습니다.// 내가 걸친 옷은 이 옷 한 벌뿐/ 헤어지며 빛이 바랩니다./ 영원을 간직하는 옷입니다./ 어쩌면 신 앞에서도 지킬 수 있는 영원입니다./ 나한테 남은 것이라고는 이 한 줌 머리카락뿐입니다./ (언제까지나 똑같은 것이지만)// 한때는 사랑하는 이의 것이었어요./ 이제는 사랑이라고는 모르는 그 사람 이어요.//
고독한 사람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낯선 바다를 항해하는 사람처럼./ 그렇게 나는 영원히 귀향길에 있습니다./ 그들 식단을 보면 충족된 날들로 가득하지만/ 내게는 아득한 곳의 모습만 있습니다.// 내 얼굴 속에 세상이 스며듭니다./ 달처럼 어쩌면 사람이 살지 않는 세상,/ 그러나 세상은 어떤 감정도 남겨두지 않습니다./ 세상의 온갖 언어에는 삶이 끼어 있습니다.// 멀리서 내가 가져온 것들은/ 희귀하게 보이면서, 제몸에 매달려 있죠:/ 그들의 넓은 고향에서 그들은 짐승이지만,/ 여기서 그들은 부끄러움을 타며 숨을 죽입니다.//
존재의 이유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아! 우리는 세월을 헤아려 여기저기에/ 단락을 만들고, 중지하고, 또 시작하고/ 그리고 두 사이에서 어물 거리고 있소.// 그러나 우리가 마주치는 것은 어쩌면/ 모두가 친한 관계에 있고, 태어나고, 자라고/ 자기 자신으로 교육되어 가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결국 그저 존재하면 되는 겁니다./ 다만, 단순하게 그리고 절실하게 말이요.// 마치도 대지가 사계절의 돌아감에 동의 하면서/ 밝아졌다, 어두워 졌다 하며 공간 속에 푹 파묻혀서/ 하늘의 별들이 편안하게 위치하는/ 그 숱한 인력의 그물 속에 쉬는 것 밖에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것과 같이......//
사랑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사랑이 어떻게 너에게로 왔는가/ 햇빛처럼 꽃보라처럼/ 또는 기도처럼 왔는가// 행복이 반짝이며 하늘에서 몰려와/ 날개를 거두고/ 꽃피는 나의 가슴에 걸려온 것을// 하얀 국화가 피어있는 날/ 그 집의 화사함이/ 어쩐지 마음에 불안하였다/ 그날 밤늦게 조용히 네가/ 내 마음에 닿아왔다// 나는 불안하였다./ 아주 상냥하게 네가 왔다./ 마침 꿈 속에서 너를 생각하고 있었다./ 네가 오고 은은히 동화에서처럼/ 밤이 울려 퍼졌다.// 밤은 은으로 빛나는 옷을 입고/ 한 주먹의 꿈을 뿌린다./ 꿈은 속속들이 마음 속 깊이 스며들어/ 나는 취한다.// 어린 아이들이 호도와/ 불빛으로 가득한 크리스마스를 보듯/ 나는 본다/ 네가 밤 속을 걸으며/ 꽃송이 송이마다 입맞추어 주는 것을//
사랑의 노래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당신의 영혼이 내 영혼에 닿지 않은 바에야/ 어찌 내 영혼을 간직하겠습니까?/ 어찌 내가 당신 아닌 다른 것 에게로/ 내 영혼을 쳐 올려 버릴 수 있겠습니까?/ 오, 어둠 속에서 잃어버린 어떤 것 옆,/ 당신의 깊은 마음이 흔들려도 흔들리지 않는/ 조용하고 낯선 곳에/ 내 영혼을 가져가고 싶습니다./ 당신과 나의 몸에 닿는 모든 것은/ 확실히/ 마치 두 줄의 鉉에서 한 音을 짜내는/ 활 모양의 바이올린처럼 우리를 한데 묶어 놓습니다./ 어떤 악기에 우리는 얽혀져 있는 것인가요?/ 어떤 바이올리니스트가 우리를 사로잡은 건가요?/ 오, 달콤한 노래입니다.//
사랑에 빠질수록 혼자가 되라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사랑에 빠진 사람은/ 혼자 지내는데 익숙해야 하네./ 사랑이라고 불리는 그것/ 두 사람의 것이라고 보이는 그것은 사실/ 홀로 따로따로 있어야만 비로소 충분히 전개되어/ 마침내는 완성될 수 있는 것이기에.// 사랑이 오직 자기 감정 속에 들어 있는 사람은/ 사랑이 자기를 연마하는 일과가 되네./ 서로에게 부담스런 짐이 되지 않으며/ 그 거리에서 끊임없이 자유로울 수 있는 것,/ 사랑에 빠질수록 혼자가 되라./ 두 사람이 겪으려 하지 말고/ 오로지 혼자가 되라.//
사랑한다는 것과 사랑받는다는 것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오직 타버린다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기나긴 밤을 새운 아름다운 불빛이다./ 사랑받는다는 것은 스러지는 것이고,// 사랑하는 것은 영원한 지속이다//
당신 말씀의 파수꾼으로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나를 당신 말씀의 파수꾼으로 삼아 주소서./ 돌에 귀기울일 줄 아는 자가 되게 해 주소서./ 나에게, 바다의 고독을 볼 수 있는 두 눈을 주소서./ 양 기슭의 맞부딪치는 소음 속에서/ 멀리 밤의 음향 속으로/ 나를 당신의 텅빈 나라로 보내 주소서./ 그곳을 지나 끝없는 바람이 불어/ 큰 수도원의 승복처럼/ 아직 살아 보지도 못한 삶의 주위에 서 있는 그곳에/ 어떤 유혹에 의해서도 다시는/ 그들의 목소리와 모습에서 벗어나는 일 없이/ 거기서 나는 순례자 쪽에 서렵니다./ 눈 먼 늙은이의 뒤를 따라/ 모르는 사람뿐인 길을 가렵니다.//
저녁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밤이 되면서 서서히/ 고목의 한 가장자리에 깃든 옷 빛깔이 바뀌어가며/ 그대 보듯이 그대로부터 땅은 떠나간다./ 하늘로 날아가는 땅과 바닥으로 떨어지는 땅// 그리고 그대를 아무것에도 전혀 소속시키지 않는다./ 괴괴한 집처럼 그렇듯 어둡지는 않고,/ 밤마다 뜨는 별처럼/ 그렇게 확실한 영원을 약속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대에게 (풀기 힘드나)/ 삶은 두렵고, 거대하고, 성숙한 것으로 만들어줌으로써,/ 때로는 야금야금 때로는 흠뻑/ 그대 속에서 돌이 구르고, 또 별이 구른다.//
인생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인생을 꼭 이해해야 할 필요는 없다./ 인생은 축제와 같은 것/ 하루하루 일어나는 그대로 살아가라./ 바람이 불 때 흩어지는 꽃잎을 줍는 아이들은/ 그 꽃잎을 모아 둘 생각은 하지 않는다./ 꽃잎을 줍는 순간을 즐기고/ 그 순간에 만족하면 그 뿐.//
나의 투쟁은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나의 투쟁은/ 그리움에 몸을 담아/ 나날이 방황하는 일./ 그러다가 억세고 드넓게/ 수없는 뿌리를 뻗치며/ 인생의 깊은 곳을 파고든다./ 그리고 고뇌를 뚫고/ 멀리 인생의 외부로 성숙하는 것,/ 멀리 시간을 벗어나!//
젊은 시인에게 주는 충고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마음 속에 풀리지 않는 모든 문제들에 대해/ 인내를 가지라./ 문제 그 자체를 사랑하라./ 지금 당장 해답을 얻으려 하지 말라./ 그건 지금 당장 주어질 순 없으니까./ 중요한건/ 모든것을 살아보는 일이다./ 지금 그 문제들을 살라/ 그러면 언젠가 먼 미래에/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삶이 너에게 해답을 가져다 줄테니까.//
내 눈의 빛을 꺼주소서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내 눈의 빛을 꺼주소서, 그래도 나는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내 귀를 막아주소서, 그래도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발이 없어도 당신에게 갈 수 있고,/ 입이 없어도 당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내 팔을 부러뜨려주소서, 나는 손으로 하듯/ 내 가슴으로 당신을 끌어안을 것입니다,/ 내 심장을 막아주소서, 그러면 나의 뇌가 고동칠 것입니다,/ 내 뇌에 불을 지르면, 나는 당신을/ 피에 실어 나르겠습니다.//
* 릴케가 연상의 여인 루 안드레아 살로메에게 사랑을 고백한 시
표범 -파리 식물원에서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스치는 창살에 지쳐 그의 눈길은/ 이젠 아무것도 붙잡을 수 없다./ 그 눈길엔 마치 수천의 창살만이 있고/ 그 뒤엔 아무런 세계도 없는 듯하다.// 아주 조그만 원을 만들며 빙빙 도는,/ 사뿐한 듯 힘찬 발걸음의 부드러운 행보는/ 하나의 커다란 의지가 마비되어 있는/ 중심을 따라 도는 힘의 무도(舞蹈)와 같다.// 가끔씩 눈동자의 장막이 소리 없이/ 걷히면 형상 하나 그리로 들어가,/ 사지의 긴장된 고요를 뚫고 들어가/ 심장에 이르면 존재하기를 그친다.//
삶의 평범한 가치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따금 나는 륨 드 세인 같은 거리의 조그만 가게의/ 윈도우 앞을 어정거리는 일이 있다./ 그것은 고물상이나 조그만 헌 책방의 동판화를 파는 가게로/ 어느 윈도우에나 자질구레한 물건들이 많이 들어차 있다./ 나는 손님이 한 사람도 들어가는 것을 본 일이 없다./ 아마 장사를 하려고 가게를 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그러나 가게 안을 들여다보면 역시 거기에 사람이 있는 것이다./ 앉아서 무엇을 읽고 있다. 정말 한가한 모습이다./ 내일을 걱정하는 것도 아니고, 부자가 되려고 억척을 피우는/ 모습이란 눈곱만치도 없다./ 발치에는 살이 찐 개가 배를 깔고 누워 있다./ 개가 아니면 고양이가 있다. 고양이는 꽂혀 있는 책에/ 몸을 비비며 표지의 등 글자를 지우듯이 걸어 다닌다./ 그것은 주위의 조용함을 더욱 깊게 하는 것 같다.// 아아, 이런 생활에 만족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느 가게 하나를, 구닥다리 물건이 차 있는 윈도우를/ 고스란히 사들여 개 한 마리와 함께 그 안에서/ 20년쯤 앉아 있을 수 있다면 하고.//
오월의 하루를 너와 함께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오월의 하루를 너와 함께 있고 싶다./ 오로지 서로에게 사무친 채/ 향기로운 꽃 이파리들이 늘어선 불꽃 사이로/ 하얀 자스민 흐드러진 정자까지 거닐고 싶다.// 그곳에서 오월의 꽃들을 바라보고 싶다./ 그러면 마음속 온갖 소망들도 잠잠해지고/ 피어나는 오월의 꽃들 한가운데서 행복이 이루어지리라./ 내가 원하는 그 커다란 행복이.//
소녀의 기도 / 라이너 마리아 릴케
그 언젠가 그대가 나를 보았을 때엔/ 나는 너무도 어렸습니다./ 그래서 보리수의 옆가지처럼 그저 잠잠히/ 그대에게 꽃피어 들어갔지요./ 너무도 어리어 나에겐 이름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대가 나에게 말하기까지/ 나는 그리움에 살았었지요./ 온갖 이름을 붙이기에는 내가 너무나 큰 것이라고./ 이에 나는 느낍니다./ 내가 전설과 오월과 그리고 바다와 하나인 것을,/ 그리고 포도주 향기처럼/ 그대의 영혼 속에선 내가 풍성한 것을...//
엄숙한 시간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금 이 세상 어디에선가 우는 사람은,/ 까닭없이 이 세상에서 우는 사람은/ 내가 슬퍼 울고 있다.// 지금 이 밤 어디에선가 웃는 사람은,/ 까닭없이 이 밤에 웃는 사람은/ 나를 비웃고 있다.// 지금 이 세상 어디에선가 가고 있는 사람은,/ 까닭없이 이 세상에서 가고 있는 사람은/ 나를 향해 걷고 있다./ 지금 이 세상 어디에선가 죽어가는 사람은,/ 까닭없이 이 세상에서 죽어가는 사람은/ 나를 보고 있다.//
석상의 노래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소중한 목숨을 버릴만큼/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은 누구일까./ 나를 위하여 누군가 한 사람 바다에 익사한다면/ 나는 돌에서 해방되어/ 생명체로, 생명체로 되살아나는 것이다.// 이렇게도 나는 끓어오르는 피를 그리워한다./ 그러나 돌은 너무 조용하기만 하다./ 나는 생명을 꿈꾼다. 생명은 참으로 좋은 것이다./ 나를 잠깨울수 있는 만큼/ 용기를 가진자는 아무도 없는가.// 그러나 언젠가 내가, 가장 귀중한 것을 내게 주는/ 생명을 갖게 된다면---//
봄을 그대에게 / 라이너 마리아 릴케
갖가지의 기적을 일으키는/ 봄을 그대에게 보이리라./ 봄은 숲에서 사는 것,/ 도시에는 오지 않네.// 쌀쌀한 도시에서/ 손을 잡고서/ 나란히 둘이서 걷는 사람만/ 언젠가 한번은 봄을 볼 수 있으리.//
작별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우리 이제 서로 작별을 나누자, 두 개의 별처럼,/ 저 엄청난 밤의 크기로 따로 떨어진,/ 그거야 하나의 가까움이려니, 아득함을 가늠하여/ 가장 먼 것에서 스스로를 알아보는.//
흰 장미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너는 죽음에 몸을 맡긴 채/ 잎새 위에 서럽게 얼굴을 뉘인다./ 유령 같은 빛을 숨쉬며/ 희푸른 꿈을 띠고있다.// 하지만 노래마냥/ 마지막 가냘픈 빛을 띠며/ 아직도 하룻밤을/ 달콤한 네 향기 방안에 스민다.// 네 어린 영혼은 불안스럽게/ 이름없는 것을 더듬거리다/ 내 가슴에서 웃으며 죽는다./ 내 누이인 흰 장미여.//
장미의 내부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어디에 이런 내부를 감싸는/ 외부가 있을까. 어떤 상처에/ 이 보드라운 아마포 (亞麻布)를 올려놓는 것일까./ 이 근심 모르는/ 활짝 핀 장미꽃의 내부 호수에/ 어느 곳의 하늘이/ 비쳐 있을까. 보라,/ 장미는 이제라도/ 누군가의 떨리는 손이 자기를 무너뜨리리라는 것을 모르는 양/ 꽃이파리와 꽃이파리를 서로 맞대고 있다./ 장미는 이제 자기 자신을/ 지탱할 수가 없다. 많은 꽃들은/ 너무나 충일하여/ 내부에서 넘쳐나와/ 끝없는 여름의 나날 속으로 흘러들어 간다./ 점점 풍요해지는 그 나날들이 문을 닫고,/ 마침내 여름 전체가 하나의 방,/ 꿈속의 방이 될 때까지.//
서시序詩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네가 누구라도, 저녁이면/ 네 눈에 익은 것들로 들어찬 방에서 나와보라;/ 먼 곳을 배경으로 너의 집은 마지막 집인 듯 고즈넉하다:/ 네가 누구라도./ 지칠대로 지쳐, 닳고닳은 문지방에서/ 벗어날 줄 모르는 너의 두 눈으로/ 아주 천천히 너는 한 그루 검은 나무를 일으켜/ 하늘에다 세운다: 쭉 뻗은 고독한 모습, 그리하여/ 너는 세계 하나를 만들었으니, 그 세계는 크고,/ 침묵 속에서도 익어가는 한 마디 말과 같다./ 그리고 네 의지가 그 세계의 뜻을 파악하면,/ 너의 두 눈은 그 세계를 살며시 풀어준다.//
피에타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렇게, 예수여, 저는 당신의 발을 다시 봅니다,/ 제가 가슴 떨며 벗기고 씻겨드렸던,/ 그 때는 한 젊은이의 발이었지요./ 내 드리운 머리카락 속에 당황하여 서 있던 모습/ 마치 가시덤불 속에 하얀 야수 같았지요.// 이렇게 저는 당신의 사랑 받은 적 없는 팔다리를 봅니다/ 처음으로 이 사랑의 밤에./ 우리는 아직 함께 누워 본 적도 없는데,/ 이제는 경이로와 지켜볼 뿐이로군요.// 그런데, 보아요, 당신의 손이 찢겨 있군요-/ 사랑하는 이여, 저 때문에, 제가 찔러서 그런 것이 아니에요./ 당신의 심장은 열려 있어, 누구나 들어갈 수 있군요/ 어찌 저만 들어갈 수는 없었던가요.// 이제 당신은 지쳤고, 당신의 지친 입술은/ 제 슬픈 입술에 아무런 욕구도 없군요-./ 오 예수여, 예수여, 우리의 시간은 언제였나요?/ 어쩌면 기이하게도 우리 둘 다 몰락하는지.//
사람들은 모두 자기 자신에게서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사람들은 모두 자기 자신에게서 달아나려 합니다./ 박해받으면 갇혀 있는 감옥에서 풀려나려는 듯이// 그러나 이 세상은 하나의 위대한 기적입니다./ 나는 느낍니다.여기에는 모든 삶이 살고 있다고.// 그러나 대체 누가 사는 것이겠습니까?// 연주되지 아니한 선율이 하아프 속에 깃들여 있듯이/ 저녁 어스름 속에 숨어 있는 것들이겠습니까.// 물 위에 불어 오는 바람이겠습니까,/ 신호를 주고받는 나뭇자기겠습니까,// 향기를 풍기는 꽃송이겠습니까,/ 늙어 가는 긴 가로수 길이겠습니까,// 오고가는 따뜻한 동물들이겠습니까,/ 갑자기 떠오르는 새들이겠습니까.// 대체 누가 사는 것이겠습니까, 신(神)이여, 당신입니까-/ 이 "삶"을 살고 있는 것은.//
만년의 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밤이여, 오 그대 나의 얼굴에서/ 깊이 속으로 녹아든 얼굴이여./ 그대여, 내 경탄하는 관조의 가장 위대한/ 과중(過重)함이여.// 밤이여, 나의 응시 속에 전율하며,/ 그러나 스스로 그토록 확고한:/ 고갈되지 않는 피조물,/ 대지의 잔해(殘骸) 위에 영원한;// 저네들의 가장자리의 도피로부터/ 중간영역의/ 소리 없는 모험 속으로 불길을 던지는/ 어린 별들로 가득한;// 그대 다만 존재함 자체만으로도, 우월한 존재여,/ 나는 얼마나 왜소한 모습인가 ― ;/ 허나 어두운 대지와 한 몸 되어/ 내 감히 그대 안에 존재하려 하노라.//
두이노의 비가 -제4비가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오 생명의 나무여, 겨울은 언제이뇨?/ 우리는 한 마음이 아니다. 철새들처럼 그렇게/ 때를 알지도 못해 뒤쳐지고 늦어서야 우리는/ 느닷없이 억지 바람을 일으켜/ 무심한 못 위로 떨어질 뿐이다./ 피고 지는 것을 우리는 동시에 의식하고 있다./ 어디에선가 당당한 걸음걸이로/ 가고 있는 사자들은 무기력을 모르련만.// 그러나 우리가 서로 아주 하나라고 생각하는 곳에서도/ 이미 상대편이 필요함을 느낄 수 있다./ 적대감은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것, 여인들도/ 언제나 서로 안에 하나가 되어/ 가장자리로 나아가지 않는다./ 거기 아득한 넓이와 사냥과 고향이 약속되어 있건만./ 한 순간의 그림을 위한 여기에도/ 애써 대조의 바탕이 마련된다./ 우리가 그것을 보기라도 하듯, 사람들은 아주 분명하게/ 우리를 아니까. 우리는 감정의 윤곽을/ 모른다. 아는 것이라곤/ 밖에서 그것을 형성해 주는 것일뿐.//
두이노의 비가 / 라이너 마리아 릴케
꼭 하고 싶거든, 위대한 사랑의 여인들을 노래하라, 하지만/ 그들의 유명한 감정도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못하리./ 네가 시기할 지경인 사람들, 그들이 너는 사랑에/ 만족한 이들보다 훨씬 더 사랑스러움을 알았으리라./ 결코 다함이 없는 칭송을 언제나 새로이 시작하라,/ 생각하라, 영웅이란 영속하는 법, 몰락까지도 그에겐/ 존재하기 위한 구실이었음을, 그의 궁극적 탄생이었음을./ 그러나 지친 자연은 사랑의 여인들을,/ 두 번 다시는 그 일을 할 기력이 없는 듯,/ 제 몸 속으로 거두어들인다. 너는 가스파라 스탐파를/ 깊이 생각해 보았는가, 사랑하는 남자의 버림을 받은/ 한 처녀가 사랑에 빠진 그 여인의 드높은 모범에서/ 자기도 그처럼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느끼는 것을?/ 언젠가 이처럼 가장 오래된 고통들이 우리에게/ 열매로 맺지 않을까? 지금은 우리가 사랑하며/ 연인에게서 벗어나, 벗어남을 떨며 견딜 때가 아닌가?/ 발사의 순간에 온 힘을 모아 자신보다 더 큰 존재가 되기 위해/ 화살이 시위를 견디듯이. 머무름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두이노의 비가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내가 소리친들, 천사의 계열 중 대체 그 누가/ 내 목소리를 들어 주리오? 설령 한 천사가 느닷없이// 나를 가슴에 끌어안는다 해도, 나보다 사뭇 강한 그의/ 존재로 말미암아 나 스러지고 말텐데.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간신히 견디는 무서움의 시작에 다름아니니까./ 우리 이처럼 아름다움에 경탄하는 까닭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천사는 무섭다./ 나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어두운 흐느낌의// 유혹소리를 꿀컥 삼키는데, 아, 대체 우리는 그 누구를/ 부릴 수 있을까? 천사들도 아니요 인간들도 아니다.// 영리한 짐승들은 해석된 세계 속에 사는 우리가/ 마음 편치 않음을 벌써 느끼고 있다. 우리에게 산등성이// 나무 한 그루 남아 있어 날마다 볼 수 있을런지./ 우리에게 남은 건 어제의 거리와, 우리가 좋아하는// 습관에의 뒤틀린 맹종, 그것들은 남아 떠나지 않았다./ 오 그리고 밤, 밤, 우주로 가득찬 바람이/ 우리의 얼굴을 파먹어가면, 누구에겐들 밤만 남지 않으랴,// 그토록 그리워하던 밤, 모든 이의 가슴 앞에 힘겹게 드리운,/ 약간 환멸을 느끼는 밤. 밤은 사랑하는 이들한테는 더 쉬울까?// 아, 그들은 그저 몸을 합쳐 그들의 운명을 가리우고 있구나./ 너는 아직 그것을 모르는가? 우리가 숨쉬는 공간을 향해// 두 팔을 벌려 네 공허를 던져라. 그러면 새들은/ 더욱 당찬 날갯짓으로 넓어진 대기를 느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 봄들은 너를 필요로 할지 모르지. 수많은 별들은/ 네가 저희들을 느끼기를 바랐다. 과거 속에서// 파도 하나 일어나고, 혹은/ 열려진 창문 옆을 지나갈 때/ 너는 바이올린 소리를 들었겠지. 그 모든 건 사명이었다.// 그러나 너는 그것을 완수했는가? 모든 것이/ 네게 애인을 점지해줄 듯한 기대감에// 너는 언제나 마음이 어지럽지 않았는가? (네가 그녀를/ 어디에 숨겨도, 크고 낯선 생각들은 네 가슴속을/ 들락거리며 밤이면 어김없이 네 안에 머무르는데.)// 그리웁거들랑, 사랑을 하는 자들을 노래하라, 하지만/ 그들의 유명한 감정도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못하리라.// 네가 시기할 지경인 그 사람들, 너는 그들이 사랑의/ 만족을 맛본 이들보다 훨씬 더 사랑스러움을 알았으리라.// 결코 다함이 없는 칭송을 언제나 새로이 시작하라,/ 생각하라, 영웅이란 영속하는 법, 몰락까지도 그에겐/ 존재하기 위한 구실이었음을, 그의 궁극적 탄생이었음을.// 그러나 지친 자연은 사랑에 빠진 자들을,/ 두 번 다시는 그 일을 할 수 없다는 듯이,// 제 몸 속으로 거두어들인다. 너는 가스파라 스탐파를/ 깊이 생각해 보았는가, 사랑하는 남자의 버림을 받은// 한 처녀가 사랑에 빠진 스탐파의 드높은 모범에서/ 자기도 그처럼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느끼는 것을?// 언젠가 이처럼 가장 오래 된 고통들이 우리에게/ 열매로 맺지 않을까? 지금은 우리가 사랑하면서// 연인에게서 벗어나, 벗어남을 떨며 견딜 때가 아닌가?// 발사의 순간에 힘을 모아 자신보다 더 큰 존재가 되기 위해/ 화살이 시위를 견디듯이. 머무름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목소리, 목소리들, 들어라, 내 가슴아, 지난날 성자들만이/ 들었던 소리를, 엄청난 외침 소리가 그들을// 땅에서 들어올렸지만, 그들, 불가사의한 자들은/ 무릎꿇은 자세 흐트리지 않고, 그에 아랑곳하지 않았으니,// 바로 그렇게 그들은 귀 기울이고 있었다. 신의 목소리야/ 더 견디기 어려우리. 바람결에 스치는 소리를 들어라,// 정적 속에서 만들어지는 끊임없는 전언을./ 이제 그 젊은 주검들이 너를 향해 소곤댄다.// 네가 어디로 발을 옮기든, 교회든 로마든 나폴리든/ 그들의 운명은 조용히 네게 말을 건네지 않았던가?// 아니면 얼마 전의 산타 마리아 포르모자의 碑文처럼/ 비문 하나가 네게 엄숙히 그것을 명하지 않았던가?// 그들은 내게 무엇을 바라는가? 내 그들의 영혼의/ 순수한 움직임에 가끔 조금이라도 방해가 되는/ 옳지 못한 인상일랑 조용히 버려야 하리라.// 이 지상에 더 이상 살지 않음은 참으로 이상하다, 겨우 익힌 관습을 다시는 행할 수 없음과, 장미들과 그밖의 무언가 나름대로 약속하는 사물들에게/ 인간의 장래의 의미를 선사할 수 없음과,// 한없이 걱정스런 두 손 안에 들어 있는 존재가/ 이제 더 이상 아님이, 그리고 자기 이름마저도 마치// 망가진 장난감처럼 버리는 것은 참으로 이상하다. 서로/ 연결되어 있던 모든 것이 그처럼 허공에 흩어져 날리는 것을// 보는 것은 이상하다. 그러므로 죽어 있다는 것은/ 점차 조금이나마 영원을 맛보기 위한 힘겨움과 만회로// 가득 차 있는 것 ―― 그러나 살아 있는 자들은/ 모든 것을 너무나 뚜렷하게 구별하는 실수를 범한다.// 천사들은 살아 있는 자들 사이를 가는지, 죽은 자들/ 사이를 가는지 때때로 모른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영원한 흐름은 두 영역 사이로// 모든 세대를 끌어가니, 두 영역의 모두를 압도한다.//
끝내 그들, 일찍 떠난 자들은 우리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으니,/ 우리는 어느 덧 자라나 어머니의 젖가슴을 떠나듯, 조용히// 대지의 품을 떠난다. 그러나 그토록 큰 비밀을/ 필요로 하는 우리는, 슬픔에서 그토록 자주 복된 진보를// 울궈내는 우리는 ―― 그들없이 존재할 수 있을까?/ 언젠가 리노스를 잃은 비탄 속에서 튀어나온 첫 음악이// 메마른 단단함 사이를 꿰뚫었다는 전설은 헛된 것인가,/ 거의 신에 가까운 한 젊은이가 갑작스레 영원히// 떠나버려 깜짝 놀란 공간 속에서 비로소 공허함이/ 우리를 매혹시키고 위로하며 돕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것.//
릴케의 마지막 시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오라, 너, 내가 알아보는 마지막 존재여,/ 육체의 조직 속에 깃든 고칠 수 없는 고통아./ 정신의 열기로 타올랐듯이, 보라, 나는 타오른다./ 네 속에서. 너 넘실거리는 불꽃을/ 받아들이기를 장작은 오랫동안 거부했다,/ 그러나 이제 나 너를 키우고, 나는 네 속에서 타오른다./ 이승에서의 나의 부드러움은 너의 분노 속에서/ 여기 것이 아닌 지옥의 분노가 되리라./ 아주 순수하게, 미래에 대한 아무런 계획 없이 자유로이/ 나는 고통의 그 어지러운 장작더미 위로 올라갔다,/ 속에 든 모든 것이 이미 침묵해버린 이 심장을 위해/ 그토록 빤한 어떤 미래의 것도 사지 않기 위함이다./ 저기 알아볼 수 없이 타고 있는 것이 아직도 나인가?/ 불꽃 속으로 추억을 끌어들이지는 않겠다./ 오 생명, 생명이여, 저 바깥에 있음이여./ 그리고 불꽃 속의 나여, 나를 알아보는 이 아무도 없구나.//
* 1926. 12월 몸에 지닌 수첩에서 발견
릴케의 명언 중에서 |
◾ 여행이란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것일 뿐이다.
◾ 사람은 고독하다. 사람은 착하지 못하고, 굳세지 못하고, 지혜롭지 못하고 여기저기에서 비참한 모습을 보인다. 비참과 부조리가 아무리 크더라도, 그리고 그것이 사람의 운명일지라도 우리는 고독을 이기면서 새로운 길을 찾아 앞으로 나아갈 결의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
◾ 경쟁심이나 허영심이 없이 다만 고요하고 조용한 감정의 교류만이 있는 대화는 가장 행복한 대화이다.
◾ 우리는 고독하다. 우리는 착각하고 마치 그렇게 고독하지 않은 듯이 행동한다. 그것이 전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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