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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우대식 시인

부흐고비 2021. 11. 11. 00:01

우대식 시인
1965년 강원도 원주에서 출생하여 숭실대 국문과 졸업하고 아주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9년 『현대시학』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늙은 의자에 앉아 바다를 보다』 『단검』 『설산 국경』 『베두인의 물방울』과 요절 시인 열 명의 대표시를 모은 『요절 시선』 이 있다. 그 밖의 저서로는 『해방기 북한 시문학론』이 있음. 「해방기 북한 시문학 연구」로 박사학위 받음. 현재 숭실대 문예창작과 강사로 재직 중이다.

 



오리五里 / 우대식
五里만 더 걸으면 복사꽃 필 것 같은/ 좁다란 오솔길이 있고,/ 한 五里만 더 가면 술누룩 박꽃처럼 피던/ 香이 박힌 성황당나무 등걸이 보인다/ 그 곳에서 다시 五里/ 봄이 거기 서 있을 것이다/ 五里만 가면 반달처럼 다사로운/ 무덤이 하나 있고 햇살에 겨운 종다리도/ 두메 위에 앉았고/ 五里만 가면/ 五里만 가면/ 어머니,/ 찔레꽃처럼 하얗게 서 계실 것이다.//

귀거래사 / 우대식
돌아온 듯 보이지만 돌아온 적이 없다. 돌아갈 것처럼 보이지만 돌아갈 곳이 없다. 이것이 나의 귀거래사다. 시간의 미래만이 나의 고향이다. 그곳에 설령 꽃이 피지 않고 마실 생수가 없더라도 그리워하리라. 낯선 어느 거리, 몽유의 회벽을 개어 바른 건물 앞에서 나는 헤매리라. 그 집 앞에 흑 박태기 보랏빛 꽃이 피어 있다면 입은 맞추겠지만 사랑하지는 않으리라. 술도 사양하겠다. 담요를 한 장 다오. 부끄러운 아랫도리를 감추고 바다로 향한 길 위에서 동백 아가씨 같은 절창의 노래나 부르겠다. 아주 오랜 옛 친구들이여, 푸른 하늘에 동백이 뚝뚝 지던 그때를 생각하며 코러스를 넣어다오. 허밍이어도 좋다. 내 노래에 대한 야유여도 좋다. 한 때 사랑했던 그대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나의 먼 미래를 탓하지 말아다오. 해일이 몰려오거나 폭설이 몰아치거나 그곳에 당도하면 노래 부르겠다. 푸르다 하얗다. 이것이 나의 귀거래사다.//

시詩 / 우대식
시는 나를 일찍 떠난 내 어머니였으며/ 왜소했던 내 아버지의 그림자였으며/ 쓸쓸한 내 성기를 쓰다듬어 주던 늙은 창녀였으며/ 머리에 흐르던 고름을 짜주던 시골 보건소 선생이었다/ 시는/ 마당가에 날리는 재(災)였으며/ 길을 잃고 강물 따라 흐르는 밀짚모자였다/ 폭풍전야, 풀을 뜯는 개였으며/ 탱자나무 가시 아래 모인 새이기도 하였다/ 늘 피가 모자라 어지러워하던/ 한 소년이 주먹을 힘껏 모았다 피면/ 가늘고 푸르게 떨리는 정맥/ 그곳에 시가 파랗게 질려 있었다//

시詩 / 우대식
음악 아닌 것으로 음악하기/ 나인 것을 나 아닌 척하기/ 가을날 듣는 만가輓歌/ 겨울날 곁불을 옆에 두고 옹송거리며 마시는 낮술/ 사람은 거리를 두고 그림자 사랑하기/ 집 떠난 모든 이들의 이름을 불러보기/ 그리워하다가 다시는 생각하지 않기/ 집 떠난 모든 이들의 이름을 다시 불러보기/ 악다구니로 떼쓰며 울다가 아무 보는 이 없을 때는/ 슬그머니 일어나 옷 털기/ 꾀죄죄한 민낯으로 설산雪山에 대적하기/ 눈이 멀어도 먼 것을 모르고 형형색색 달콤하게 이야기하기/ 신을 실컷 조롱하다가 그 발아래 한없이 통곡하기/ 영원한 것이 있나요/ 이런 물음으로 모든 것을 탕진한 나그네처럼/ 우물가에 오래 앉아 있기/ 아주 오래도록 허공을 응시하다가 저 푸른 한 점으로/ 쑥 들어가기//

고래와 시인 / 우대식
저인망 그물에 걸린 고래가 죽었다/ 익사(溺死)다/ 그의 몸에 남은 망사스타킹 같은 그물자국에서/ 선(線)에 관한 몇 개의 보고서를 읽는다/ 윤리학(倫理學)이 아니다/ 생의 근친(近親)인 죽음 앞에서/ 물에 빠져 죽은 고래에 대한 내 명상이 길어질 대/ 시(詩)에 대해 생각해본 것뿐이다/ 말[言]의 촘촘한 저인망에 걸려 죽어가는/ 한 시인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하는 것이다/ 진정한 죽음이란/ 저와 가장 친근한 곳에서 완성되는법/ 객사(客死)를 면한 고래와 시인//

이력 / 우대식
누가 이력을 묻는다면/ 내 치욕의 성명서를 보여주겠다/ 원래의 나로 돌아가기 위해/ 밤거리를 헤매었지만/ 아무도 집을 가르쳐주지는 않았다/ 본래의 나는 유령처럼 나타나/ 가짜의 내가 돌아갈 수 없음을 비웃었지만/ 나는 크게 결심하였다/ 나는 간다/ 내가 도달한 곳이 본래(本來)이다/ 돌아가는 것은 하나도 없다/ 낯선 두려움에 대한 위로일 뿐/ 간절함이란 이런 것/ 한숨 잠이 깨고 나면/ 달콤한 물을 한 잔 다오/ 아버지도 어머니도 실은 팽팽한 활시위에 놓인/ 내 굴욕의 촉이었음을 고백한다/ 시위가 끊어지도록 당겼다가 쏘아버린/ 어느 푸른 창공에서/ 한 인간의 굴욕이 음각된 것을/ 선명히 바라보는 삼월의 오전이다//

수레바퀴 아래서 / 우대식
비가 오는 가을/ 국화 옆에서 내 몸도 시드나 보다/ 지상에서 사람을 만나/ 몇은 이별을 하고 몇은 남았다/ 쇠살로 된 수레바퀴 아래서/ 한 철에서 다른 한 철로,/ 이것이 여행이라면 빨리 다른 곳에 닿고 싶다/ 비가 오나 보다/ 젖은 것들이 내 안에서/ 안개가 되어 피어오른다/ 사람 이전/ 깊은 중력의 물기를 머금고 올라오는/ 푸르고 푸른 감각들,/ 깊은 상처 위에 혓바닥을 대본다/ 더 따뜻하게 비를 맞고 서 있지 못해서 미안하다//

사라진 역 / 우대식
카스테라 봉지를 뜯던 여자가 있었다/ 주홍빛 망에 담긴 계란이 빛나던 시절/ 허기진 시간 속에서/ 자그마한 사람들이 모두/ 조금씩 먹고 있었다/ 역에서 사람들은 나누어 먹는 연습을 했던 것/ 부자들은 역을 줄였다/ 더 빨리 가기 위해/ 역을 폐쇄했다/ 나누어 먹는 연습을 할 곳이 사라졌다//

모자란남움직씨 -불완전타동사를 위한 변명 / 우대식
불완전타동사의 우리말은 모자란남움직씨/ 모자란 채 움직여야 하는 언어의 운명/ 그 무언가를 만나야만 의미가 되는 쓸쓸함 앞으로/ 도원경(桃源境)이 흘러가고 기린(麒麟)도 지나가지만/ 무엇 하나도 잡을 수 없다/ 모자란남움직씨인 내 필설로는/ 내 눈을 찌를 길밖에는 없다/ 모자란 채 흘러가야 하는/ 그러나 끝까지 움직임을 멈추지 않을/ 내 푸른 사상,//

빗살무늬 상처에 대한 보고서 / 우대식
아내의 가슴에서/ 못 자국 두 개와 일곱 개 선명한 선이/ 발견되었다// 못 자국 두 개의 출처는 내 분명히 알거니/ 빗살무늬 상처는 진정 알지 못한다/ 말도 없이 집을 나가 해변에서 보낸/ 나날들의 기록인가 생각해보았다// 혹 주막에서 보낸 내 생을/ 일이 년 단위로 가슴 깊이 간직한 탓이라고도/ 생각해보았다// 매일매일 생의 싸움터를 헤매인 것은/ 나라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왜 저의 가슴에 저토록 선명한 상처의 보고서가 남아 있는가// 나 바다에서 죽음을 꿈꾸었을 때/ 그는 지상에서 죽어갔던 것//

뻥의 나라에서 / 우대식
초등학교 3학년 막내와 돈키호테를 읽는 밤/ 11월 바람은 창을 두드리고/ 키득키득 책을 읽던 놈이/ 불현듯 묻는다/ '아빠 이거 다 뻥이지요'/ 그와 깊은 가을로 여행하는 중이다/ 뻥의 마을에서 서성이다가/ 어린 그와 목로주점에 들어/ 설탕을 듬뿍 탄 와인을 한 잔 시켜주고 싶은 것이다/ 독한 술 한 잔을 단숨에 마시면/ 창을 꼬나들고 달리는 늙은 기사도 만날 것이다/ 도무지 세상에는 없는/ 공주들과 긴 늦잠을 자고/ 풍차 아래서 휘파람을 불고 싶은 것이다/ 뻥이 없으면 이 세상은 도무지 허무하여/ 살 수 없음을 아이가 불현듯 깨닫기를/ 중세의 성당에 앉아 기도하고픈 것이다//

낡고 깨끗한 방 / 우대식
강원도 산간/ 낡고 깨끗한 방안에 들어 윗묵에 놓인/ 멍석이며 멧방석이며 홍두깨를 바라보다,/ 내 할머니며 어머니의 쓸쓸한 죽음도/ 생각해보는 것이다/ 고양이 발목을 적시던 빗물도 가끔/ 창호문을 두드리다 문득 눈물처럼/ 번지기도 하는 것이다/ 황매화, 백매화 우두커니 비를 맞는/ 만춘의 먼 뜨락,/ 불두화 아래 지나가는 뱀처럼/ 나 죄가 많다/ 연당, 연하, 예미, 자미원, 별어곡, 나전, 여랑, 구절/ 석탄으로 멱을 감은 태백선 간이역/ 슬픈 향가는 내 몸에 박혀/ 木魚 배지느러미 아래 앉아/ 흐린 발등을 닦아 보기도 하는 것이다/ 따뜻한 이 방 안에 누워/ 먼 바다 집어등을 켜든 한 척의 배가 되어/ 망망대해의 어지러운 꿈속을 헤매다 돌아오곤 하는 것이다/ 어미 잃은 검은 고래가 되어 등을 지지며/ 낡고 깨끗한 방안에 누워 있곤 하는 것이다//

꿈 / 우대식
꿈을 꾸었다. 두 눈이 멀어 누군가에게 길을 묻는 꿈./ 문득 아내도 아이들도 없고 지팡이 하나만 내 손에 쥐어져 있었다./ 누가 내 손에 이것을 쥐어 주었을까./ 혹 나를 버리며 건넨 마지막 위무의 선물은 아니었을까./ 눈이 먼다는 것은 깊은 슬픔이었다./ 말을 건네면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의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산동지방의 방언 같기도 하고 깊은 산맥에서 울려나오는 잔향 같기도 하였다./ 차라리 죽음에 이르는 길이었으면 바라기도 하였다./ 옹달샘에 이르러 찬물로 목을 적시고 바위에 앉아 있을 때/ 새 한 마리가 날아가며 어깨를 툭 치기도 하였다./ 눈이 먼 내가 눈을 감고 어느 먼 봄날의 평화를 그리워하고 있을 때/ 낡고 화려한 문양의 천을 걸친 늙은 여자가 내 몸을 지나갔다./ 천산 산맥이 하얗게 보이는 천막 밖에는 포도가 부드럽게 가지를 뻗고 바람은 나를 일으켰다./ 살아야 한다. 살아야 한다. 꿈속에서 내 이름이었다./ 누군가 큰 소리로 나를 불렀다. 살아야 한다./ 지팡이를 짚고 벌떡 일어서다 잠이 깬 음력 이월의 어느 날이었다. 신발을 신은 채였다.//

먼 날 / 우대식
화롯불에 호박 된장국이 뉘엿뉘엿/ 졸아가던 겨울밤/ 육백을 치다가/ 짧게 썬 파와 깨소금을 얹은 간장에/ 창포묵을 찍어 먹던 어른들 옆에서/ 찢어낸 일력(日曆) 뒷장에/ 한글을 열심히 썼던 먼 날/ 토방 쪽 창호문을 툭툭 치던/ 눈이 내리면/ 이젠 없는 먼 어머니는/ 고무신에 내린 눈을 털어/ 마루에 얹어 놓고/ 어둠과 흰 눈 아래를 돌돌 흐르던/ 얼지 않은 물소리 몇,/ 이제 돌아오지 않는 먼 밤/ 돌아갈 귀(歸) 한 글자를 생각하면/ 내 돌아갈 길이/ 겨울밤 창호문 열린 토방 한 구석임을/ 선뜻/ 알 것도 같다//

사유하는 텔레비전 / 우대식
우리 집 뒷산에 누군가 가전제품을 버리기 시작하면서 텔레비젼이 무려 열 대 가까이 버려졌다. 어떤 놈은 모로 처박히고 어떤 놈은 나무 둥치에 버젖이 걸터앉아 있기도 하다. 로뎅의 조각처럼, 백남준의 비디오아트처럼 그 놈들은 각기 무언가를 열심히 사유하고 있었다. 햇빛의 방향과 농도에 따라 끊임없이 수신된 이미지를 화면에 주사했다. 놀라운 일은 화면에 비추어진 모든 것들이 살아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죽은 듯 고요하다가 일순 생생한 바람이 떠오르면 함께 떨며 몸부림치는 풀잎과 나무들. 온 산에 가득한 텔레비젼들이 밤마다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태백에서 칼국수를 먹다 / 우대식
영주에서 동해로 가다가/ 태백 작은 마을에서 국수를 먹었다/ 우뚝우뚝 산 아래 그늘진 마을/ 눈이 쓸쓸히 내리는 날/ 한겨울에 냉이를 넣은 칼국수/ 작은 가게 안에는 사람 하나 없고/ 연탄난로가 냉랭히 앉아 있었다/ 어린 날 사북으로 간다고 말하는 것은/ 내 모든 삶을 유폐시키고 싶다는 욕망이었음을 고백한다/ 신발을 방 안에 들여놓고 자야 하는 사북 여인숙/ 긴 형광등을 두 방이 함께 써야 하는 그곳에서/ 한 마디 말도 없이/ 검고 검은 세상의 그림자를 조금씩 깨물어 먹었다/ 그곳에서 추방되어/ 먼 나라를 떠돌다 이제 다시/ 사북 언저리에서 후춧가루를 듬뿍 친/ 칼국수를 먹으며/ 과연 내 삶은 옳은가/ 물어보는 것이다/ 눈송이는 점점 커져/ 오도 가도 못하는 산협 마을에서/ 내 멱살을 잡는 한 푼어치 평화와/ 또다시 싸움을 하였다//

의심 / 우대식
사람은 참말로 알 수 없는 것이어서 신께서 내게 옷 한 벌 지어주셨다. 의심이라는 환한 옷,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잠을 잘 때도 벗지 않는다. 견고한 이 한 벌의 옷을 입고 사람을 만나고 술을 마신다. 나는 너를 의심한다. 잠들지 못하는 밤을 위해 의심이 내 등을 다독인다. 내가 너를 지키마. 편히 쉬어라. 어떤 평안이 광배처럼 나를 둘러싸고 있다. 당신은 나의 아버지이고 전지전능하사 나를 보호하시며 한없이 사랑하시는도다. 꿈속에서 나의 찬양은 오래도록 울려 퍼졌다. 배화교도처럼 의심의 불을 조용히 밝히고 내 아버지마저 그 제단에 바치기로 결심한 어느 새벽, 당신도 내 의심의 눈길을 피할 수 없다고 고백했을 때 천둥과 벼락으로 인해 의심의 옷이 더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위태로운 사랑 / 우대식
어둡던 하루가 지나간다/ 공장 굴뚝에서 하루 종일 흰 연기가 쏟아져 나오고/ 회색 구름은 내 가슴 아래까지 내려와 있다/ 당신도 그 구름 어딘가에 숨어 있다/ 비타민을 조금 잘라 당신에게 내민다/ 구름 속으로 쑥 들어간 내 손을 무언가 핥는다/ 당신이라 믿는다/ 손이 젖어 간다/ 눈을 뜬다/ 온통 당신이다/ 온통 붉다는 말이다/ 내 손이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 아무것도 없기를 기도했다/ 내 젖은 손도 당신의 혀도/ 붉은 모든 당신도/ 지상에는 존재하지 않기를/ 슬프도록 기도했다/ 검은 구름은 지금 배꼽 아래 와 있다/ 위태로운 당신의 사랑이 내게 거의/ 닿고 있다는 말이다/ 피안으로 흘러가는 배처럼/ 당신과 나,//

가을비 / 우대식
가을비는/ 가을비는/ 떨어진 갈참나무 잎에 내리고/ 붉은 단풍나무는 차갑게 울고 있네/ 어디로 가나/ 가을,/ 어디에도 깃들 수 없는 새,/ 가릉빈가의 노래를 듣는다/ 잔기침 소리 간간이 들리는/ 빗속에서/ 아주 먼 당신은/ 이 가을에서 다시 먼 가을로/ 빗속을 헤매는 도다//

왼손의 그늘 / 우대식
용서하라/ 용서하라/ 용서하시라/ 이 가을날 나의 사랑을/ 얼마 남지 않은 저 잔광의 빛으로/ 당신을 몰고 가는 일/ 그것이 내 연애법이다/ 그 몰입에 얼마나 당신이 괴로워했을 줄/ 모든 빛이 꺼지고/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처럼/ 당신과 내가 어느 풀밭에 앉아 있다 하자/ 젓가락을 들어 당신은 내 입에 음식을 넣어준다/ 음식 밑에 바쳐진 당신의 왼손/ 그 아래로 그늘이 진다/ 왼손의 그늘,/ 지상에서 내 삶이란/ 당신이 만들어준 왼손의 그늘에서 놀다 가는 일/ 놀다가 가끔 당신이 그리워 우는 일/ 코스모스처럼 내 등을 툭 한번 쳐보다가/ 돌아가는 당신의 늦은 귀가/ 그림자가 사라질 때/ 나의 연애는/ 파탄의 골목길/ 용재 오닐의 비올라 소리 같은 깊고 슬픈/ 당신의 오랜 귀가//

정거장 그리고 낙타 / 우대식
정거장에서 한 여자와 그리고 또 다른 한 여자를 기다리며 오래 서 있었을 때 한 여자는 집을 나섰다는 연락이 오고 다른 한 여자는 기다리고 있다는 연락이 왔다. 기다림으로 한 계절이 흘렀을 때 낙타 한 마리가 정거장 주변의 마른 풀을 뜯고 있었다. 콘크리트 틈으로 얼굴을 내민 시든 풀을 찾아 지하에서 지상으로 오천 킬로미터를 돌아 다시 정거장에 섰을 때 사막의 대상(隊商)들만 점점(點點)이 오갈 뿐 기다림이란 없었다. 낙타에게 기다림 없는 나머지 생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오랜 기억을 더듬어 옛집을 찾아간다. 평택, 낯익은 이름 같기도 하고 낯설기도 하다. 어쩌면 세상의 모든 것은 그러하다. 당신도 그러하다. 떠오른다. 당신이 물을 길어 올린다. 물에서 풀 냄새가 난다. 당신의 손이 담긴 냄새다. 향기의 진원을 찾아 낙타는 걸어간다. 세상의 모든 기다림이 끝났을 때 옛집을 찾아가는 낙타, 정거장은 여전히 석양 중이다.//

스토커 / 우대식
당신의 손가락/ 길게 허공을 젓다가 오른손 검지부터 차례로/ 움켜 쥘 때 손 안의 모든 공기는 부풀어 올라/ 숨조차 멈추는 팽팽한 세계/ 당신의 발뒤꿈치/ 창백한 더러 붉은 색이 번지는/ 단 한 번에 목숨을 앗아갈/ 치명의 기록/ 그리고 당신의 등/ 언제나 바라볼 수 있음/ 후, 등에 대고 멀리서 불어보는 입김/ 가 닿지 않음/ 누군가의 손바닥 흔적이 희미하게 보이는 아픔/ 당신의 가슴/ 그것만큼은 순결이어야 하는/ 언제나 무릎을 꿇고 머리조차 들 수 없는/ 내 가엾은 목숨의 저류지/ 당신의 귀밑 머리/ 몇 올이 턱 선을 따라 내려오다 다시 살짝 말려 올라간다/ 만날 수 없음/ 쓸쓸한 회귀/ 당신의 한 가운데 피어난 꽃/ 겹겹이 색이 다른 피를 머금은/ 입술을 대면 울면서 노래 부르는/ 그 노래를 듣는 일은 괴롭고도 즐거워/ 차라리 내 안의 칼을 내게 겨누어/ 죽음에 이르는 사랑이라 말할 수 없는 사랑/

의심 / 우대식
사람은 참말로 알 수 없는 것이어서 신께서 내게 옷 한 벌 지어주셨다. 의심이라는 환한 옷,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잠을 잘 때도 벗지 않는다. 견고한 이 한 벌의 옷을 입고 사람을 만나고 술을 마신다. 나는 너를 의심한다. 잠들지 못하는 밤을 위해 의심이 내 등을 다독인다. 내가 너를 지키마. 편히 쉬어라. 어떤 평안이 광배처럼 나를 둘러싸고 있다. 당신은 나의 아버지이고 전지전능하사 나를 보호하시며 한없이 사랑하시는 도다. 꿈속에서 나의 찬양은 오래도록 울려 퍼졌다. 배화교도처럼 의심의 불을 조용히 밝히고 내 아버지마저 그 제단에 바치기로 결심한 어느 새벽, 당신도 내 의심의 눈길을 피할 수 없다고 고백했을 때 천둥과 벼락으로 인해 하얀 의심의 옷이 더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유서遺書 / 우대식
바람이 분다고 쓴다/ 바람은 무기질처럼 얼굴을 핥고 지나간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호흡을 타고 들어와 나라고 불리는/ 존재가 되었다/ 나는 바람의 후레자식/ 압록역을 지나며/ 푸른 강물에 내 모든 것을 던졌다고 생각했다/ 생각했다/ 생각의 한계에 대해서는/ 다음 어느날 생각하기로 한다/ 물향기 수목원에서 칼을 든 한 그루 나무를 보았다/ 어느 순간도 자족하지 않는 자세,/ 불편함으로 이어가는 삶도 있다/ 모든 것은 끝이 있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생각의 힘줄은 거미줄처럼 남아/ 이 세상을 지배할 것이다/ 살아 있다 살아 있다/ 이를 내 유서라 하자//

바람의 사원 / 우대식
바람의 사원 흰 회벽에/ 두 줄기 눈물이 아로새겨져 있다/ 바람의 사원은/ 천국으로 가는 입구이거나/ 천 길의 낭떠러지/ 음각, 나의 사랑을 파재끼기로 한다/ 세모꼴의 칼을 들고 직선의 사랑을/ 낭자한 피로 물들인다/ 두렵습니까/ 칼이 말을 걸어왔다/ 떨리는 목소리가 내 안에서 밀려나온다/ 몽골 대초원에서 들었던 울림/ 이예/ 공손한 나의 대답이 초원으로 쓸려 간다/ 한번도 들어본 일이 없던 노래가 흐른다/ 나의 배회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알 수 없다는 것/ 혼돈의 땅위에 나는 아직 발을 딛고 서 있다/ 시간이 많지 않다/ 바람의 사원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쳐박는다/ 바람이여/ 다시는 나를 이곳으로 인도하지 마라/ 허무의 모가지, 모가지/ 고향을 떠난 염치없는 이리들이 들판을/ 배회한다//

단검 / 우대식
8월 염천, 서울역 광장 바닥에 얼굴을 대고 잠자던 한 할머니가 문득 일어나 앉았다. 담배를 길게 빨더니 여기서 가장 가까운 시장이 어디냐 묻는다. 남대문 방향을 가리키며 남대문시장이라 말했더니 가장 큰 시장은 어디냐 물었다. 아침 햇살이 얼굴에 쏟아져 몹시 더웠다. 남대문 시장이 가장 크다고 일러주었다.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수원이라고 대답했다. 순간 수원시가 아니라 수원부와 같은 조선 후기의 지명으로 받아들였다. 무엇을 사려고 그러냐 물었더니 무엇을 팔려고 한다고 하였다. 신문지로 둘둘 말아 보자기에 싼 뭉치가 하나 옆에 놓여 있었다. 뭔데요. 몰라도 된다고 대답할 때는 마치 함흥 사투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차라리 동대문 벼룩시장 같은 난전에 물건을 펼치라고 했다. 할머니는 그럴 물건이 아니라고 화를 냈다. 뭐냐고 다시 물으니 할머니는 일어서며 말했다. 칼이다 이눔아. 서울역에서 지하도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남대문을 향하고 있었다. 서울역 광장에서 잠자던 한 자루 단검이 꼿꼿하게 한성역 광장을 건너는 중이었다.//

꿈은 멀었다 / 우대식
바람 피운 아내를 죽이는 꿈을 밤새 꾸었다/ 죽여도 죽여도 죽지 않고/ 다시 머리를 쳐드는 아내를 계속 죽였다/ 어떤 놈이냐고 몇 번을 물었지만 아내는 씨익 웃기만 할 뿐/ 죽일 테면 죽여보라고 돌부처처럼 돌아앉아 있었다/ 앉아 있는 그녀를 바라보다 가느다란 철필로 반야심경을/ 그녀의 등짝에 새기고 싶었다/ 마음 심을 새기면 하얀 등짝에서 피가 하나 둘 셋 쏙쏙쏙 돋아나다가/ 긴 강물을 이룰 것 같기도 하였다/ 강 같은 평화는 이미 물 건너 간 것이다/ 꿈은 너무 길어 자도 자도 끝나지 않았다/ 이 꿈속을 계속 걸어가면 왕오천축국에 이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오히려 꿈이 더 지속되기를 바라기도 하였다/ 아내를 죽이다가 다시 길을 가는 지랄 같은 윤회 속에서/ 막내 아이가 계속 울고 있었다/ 아이 울음에 잠에서 깨어나/ 오래동안 천장을 보고 누워 있으려니/ 나와 관계했던 여자들이 스쳐갔다/ 왜 아내는 한 번도 나를 죽이려 하지 않았는지/ 아내는 이미 왕오천축국에 도달하여 강물에 몸을 씻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녀는 나와 함께 사막을 넘어 강에 이르는/ 긴여행을 하고 싶지 않았나보다/ 나도 이제 혼자 가야 한다고 굳게 마음을 먹으며/ 다시 꿈을 찾아갈 때 왜 눈물이 나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어/ 쓸쓸해지기도 하는 새벽이었다/ 꿈은 멀었다//

​소풍 / 우대식
귓속에 재봉틀 소리가 산다/ 야적장에 함박눈 내리는 밤/ 재봉틀 소리가 촤르륵 촤르륵/ 누워 자는 내 어린 가슴 위로 굴러간다/ 엄마가 발 구르는 소리였던 것/ 반야심경 구절구절이 흘러가는 소리였던 것/ 온 땅과 온 하늘이 맞서는 밤이었을 거다/ 양철 함지박에 눈 쌓이고/ 플라스틱 챙에 눈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와 엄마와 재봉틀 소리가/ 촤르륵 촤르륵 머언 소풍을 가던 것/ 그곳에서 아주 살았던 것//

이순耳順 / 우대식
이제 묵념 따위가 매우 잘된다/ 어떤 형식도 괜찮다/ 벌써 귀가 순해지는지 부끄럽기도 하지만/ 하나님이나 부처님 이런 분들도 크게 나무랄 것 같지는 않다/ 내친 김에 봄날 꽃나무와도 한번 크게 겨루어보고 싶다/ 몇 합 겨루지 못하고/ 낙화의 황홀에 굴복할지라도/ 내 안에 뻗은 칼로 된 나뭇가지와 꽃잎도/ 쨍그렁 쨍그렁/ 낙화의 종년(終年)을 맞고 싶다/ 봄비에 붉은 녹물을 뚝뚝 흘리며 울고 있는/ 내 안의 꽃들이여/ 순백의 어느 한 날을/ 우리도 그리워하지 않았겠는가/ 귀가 순해진다/ 내 귀를 잘라내고 싶다//

​무애無碍에 관한 명상 / 우대식
개에게 무슨 말을 했는데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고/ 자꾸 손을 핥는다/ 한참을 그러다가/ 무애(無碍)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벌판에 내리는 눈 속에/ 한순간 개의 혓바닥도/ 내 손도/ 그나저나 그도 나도/ 오늘 겨울 강을 건너는/ 한 마리 짐승이라 생각되었다/ 거칠 것이 없었다/ 그가 무어라 짖는데 나는/ 알아들을 수 없고/ 눈 속에 파묻힌 그의 네 발을/ 핥아보고 싶은 것이다//

금팔찌 / 우대식
면사무소 앞 제과점/ 아이들과 팥빙수를 먹는데/ 열대 외국인 노동자 한 사람이 유리창 밖에/ 털썩 주저 앉는다/ 새로 산 믹서기 한 대를 앞에 놓고 롯데 마트/ 계산서를 뚫어지게 보고 있다/ 땀이 흐르는 손목에 낀 금빛 싸구려 팔찌가 촌스럽게 빛났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뚜껑을 여는 순간/ 한 여인과 두 아이의 사진이 보석처럼 박혀 있었다/ 그는 아버지였다/ 한 시간에 한 대씩 지나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오렌지를 갈아 아이들에게 주었을 것이다/ 얼음을 갈아 아이들과 맛있는 팥빙수를 먹었을 것이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열대의 야자수 나무에 코드를 꽂고/ 그는 수도 없이 믹서기를 돌렸을 것이다/ 그의 팔찌가 순연의 금빛을 띠었다//

중경삼림 / 우대식
중경에서 장가계 가는 길/ 허름한 시골집/ 할머니와 발바닥이 빨간 손녀딸이 의자에 앉아/ 전깃불도 없는 현관 앞에서 이야기를 나눈다/ 아이 머리를 쓰다듬고 고개를 끄덕이며 끝없이/ 끝없이……/ 저 먼 협곡가로는/ 길고 하염없는 길을 예쁜 처자가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고/ 가을의 협곡은 조금씩 붉어져/ 삼림을 물에 담고 흐르다가 하얗게 사라진다/ 모든 것은 사라져/ 어둠만이 커다란 짐승처럼 소리 지를 때/ 싸우면서 만년을 살아온/ 너와 내가/ 오늘은 비를 맞고 대륙의 한가운데 서 있다/ 너와 나는 너와 나인가/ 중경삼림에서/ 가을을 보내며/ 내 생각에도 단풍이 들었던 것이다//

안개는 힘이 세다 / 우대식
안개 속에서,/ 사회주의 옹호자가 나온다/ 조금 있다가 자본주의자가 나온다/ 안개 속에는 많은 주의자들이 산다/ 안개 속에서/ 사회주의자인 체하는 자본주의자가 걸어 나온다/ 교회주의자인 체하는 완전 자본주의자가 걸어 나온다/ 안개가 걷히면 자본주의자만 남았다/ 그게 뭐 대수냐고 누군가 중얼댔다/ 나는 자본주의는 힘이 세냐고 물었다/ 자본주의자들은 슬그머니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눈이 쏟아지고 앞을 볼 수 없었다/ 눈도 자본으로 만들 수 있다고 안개 속에서 히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안개는 고맙다//

산역山役 4 / 우대식
초여름 내리는 비는/ 여전히 슬프고/ 초여름 내리는 빗속에 마시는 술은/ 여전히 맑고/ 개울물은 조금씩 불어/ 장화 발목을 넘고/ 목수건에 물은 듣고/ 밥그릇에 내리는 빗물,/ 황토흙이 엉킨 장화를 벗고/ 공손히 술과 밥을 받고/ 스윽 허공에 젖은 수건을 문지르면/ 환한 얼굴이 몇,/ 보이다 다시 사라진다//

수레바퀴 아래서 / 우대식
비가 오는 가을/ 국화 옆에서 내 몸도 시드나 보다/ 지상에서 사람을 만나/ 몇은 이별을 하고 몇은 남았다/ 쇠살로 된 수레바퀴 아래서/ 한 철에서 다른 한 철로,/ 이것이 여행이라면 빨리 다른 곳에 닿고 싶다/ 비가 오나 보다/ 젖은 것들이 내 안에서/ 안개가 되어 피어오른다/ 사람 이전/ 깊은 중력의 물기를 머금고 올라오는/ 푸르고 푸른 감각들,/ 깊은 상처 위에 혓바닥을 대본다/ 더 따뜻하게 비를 맞고 서 있지 못해서 미안하다//

바빌론 강가의 아침 / 우대식
새벽 거리에 나와 인사를 건넸다/ 모든 것은 완벽했고 그대로 였으며/ 술에 취한 몇몇 사람들이/ 생각과 사물을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애를 쓰다가 돌아갔다/ 아무 것도 옮기지 못했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혼자 대지의 기운을 빌어 읊조렸지만 신(神)은 듣지 않는 눈치였다/ 당연히 여전한 세상,/ 흘러내린 이어폰을 다시 귀에 꼽고 보니엠을 듣는다/ 햇살이 내리쬐는 자메이카를 떠올리며 썬그라스를 낀다/ 세상은 더 어두워졌다/ 보니엠의 노래를 들으며 나는 오래 전 바빌론의 포로가 되어/ 이곳에 끌려왔다고 생각했다/ 아내와 아이들은 식민(植民)의 흔적이라는 생각도 했다/ 이 낯선 땅에서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하나/ 이 눈물을 어디에 뿌려야 하나/ 강가에 도착했을 해는 다시 떠올랐고/ 시온으로 가는 티켓은 할인 된 가격으로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었다//

겨울날의 모든 저녁은 슬프다 / 우대식
지옥을 유예하는 꿈을 꾸었다/ 내가 원한다면 다음 생애를 이어가며/ 지옥을 영원히 유예할 수 있다는 꿈/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영원 너머 한 번은 그곳에 가야 한다는/ 괴로움에 몸을 떨었다/ 지상의 소시민이/ 이렇듯 큰 생각을 하며/ 지옥 아래 마을을 떠돈다는 사실이/ 조금은 쓸쓸했다/ 추운 겨울 저녁/ 들기름 바른 김을/ 숯불에 굽던/ 옛집으로 돌아가/ 솜이불을 뒤집어쓰고 눕고 싶다/ 오한 속에서 만나는/ 지옥의 야차와 일대의 싸움을 끝내고/ 오랜 잠을 자고 싶다/ 겨울날의 모든 저녁은 슬프다/ 봉당에 켜진 알전구처럼/ 겨울날의 모든 저녁이 나를 기다렸다//

아버지의 발자국 / 우대식
꾹꾹 눈 쌓인 산소를 밟으며/ 무슨 대답을 해야 합니까/ 무엇을 물어도 답할 수 없습니다/ 어린 날 만종 驛 어느메 즈음에서/ 당신과 함께 걷던 먼 들판을 기억합니다/ 그 들판에 눈도 내리고 저녁놀도 지곤 하였습니다/ 오늘 당신과 나의 거래(去來)는 무엇입니까/ 무엇이 가고 무엇이 왔습니까/ 아마도 번뇌 같은 것이겠지요/ 그물과 같이 던져진 그것/ 눈이 시린 하늘을/ 새가 날아오를 때/ 당신과 나의 거래는 원만히 성사된 것이지요/ 이제 다시 만종 驛 즈음에서 서성입니다/ 기사 식당에 들어가 혼자 밥을 먹고/ 다시 길을 걷습니다/ 풀리지 않는 답/ 이것이 저의 대답입니다/ 아버지의 발자국이 흐려졌습니다//

아버지의 쌀 / 우대식
아버지가 쌀을 씻는다/ 쌀 속에 검은 쌀벌레 바구미가 떴다/ 어미 잃은 것들은 저렇게 죽음에 가깝다/ 맑은 물에 몇 번이고 씻다보면/ 쌀뜨물도 맑아진다/ 석유곤로 위에서 냄비가 부르르부르르 떨고 나면/ 흰 쌀밥이 된다/ 꾹꾹 눌러 도시락을 싼다/ 빛나는 밥 알갱이를 보며 나는 몇 번이나 눈물을 흘렸다/ 죽어도 잊지는 않으리/ 털이 숭숭 난 그 손으로 씻던/ 그./ 하. 얀./ 쌀//

신폭神瀑에 들다 / 우대식
윈난성 신폭 아래/ 객잔에 들었다/ 숯불을 피우고 당신이 오기를 기다렸다/ 쿵쿵 발자국 소리가 들렸지만 먼 당신은/ 가끔 눈사태만 엽서처럼 보냈을 뿐/ 흔적이 없다/ 떡을 떼어 객잔의 창으로 흐르는 눈발에 섞어 먹었다/ 반야의 밤에 달이 떠오르면/ 야크의 젖통은 부풀어/ 신의 나라에서 온 것 같은 울음소리를 냈다/ 아무 것도 나를 지우거나 세울 수 없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붉은 숯불이 잦아든다/ 국경 아래 뜬 달이 조금씩 기울면서/ 그 아래를 걷는 당신의 모습이 보인 듯도 했다/ 환상 속의 당신/ 그대 어깨가 붉어진다/ 아눗다라삼먁삼보리/ 무명도 무명의 다함도 없다는 설산 국경에서/ 영원히 만날 수 없는 당신을/ 기다리던 한 생(生)이 있다//

사람의 꿈을 찾아 / 우대식
지금/ 나는 절대 영도를 꿈꾼다/ 소리가 사라지고/ 감각이 사라지는 어떤 지점/ 의식이 무언가 잡으려고 애쓰는 상태/ 俗마저 얼어버려 聖이 되는 상태/ 당신은 내게 무어라 할 것인가/ 신이여 이곳에 살았습니다/ 사람의 꿈은 너무 황홀하여/ 밤마다 성기를 붙잡고 울었습니다/ 이제 절대 영도에서 당신을 만나겠습니다/ 그러니 당신은 내게/ 용기를 달라/ 사람의 꿈을 넘어서고 싶다/ 용기를 달라//

천국의 나날 / 우대식
천국의 나날을 사는 동안/ 신은 늘 너무 먼 곳에 있었다/ 황량한 마을 공한지에 핀 낡은 꽃잎처럼/ 마음이 엷어질 때/ 마리아를 불렀다./ 마리아 당신의 등에서/ 어떤 외로움이 낸 물길을 바라본다/ 마리아 내 성기는 이미 사타구니 살에 붙어 버렸다/ 천국의 나날을 사는 동안/ 불행의 구름들은 늘 나를 조준하였지만/ 당신 등에 기댄 내 얼굴은/ 행복했었다고 고백하겠다/ 어떤 서원(誓願)도 내가 당신의 과거를 생각하는 일보다/ 위대하지는 않다/ 당신의 윤기 흐르는 머리칼을 생각하는 일보다/ 깊은 심연은 없다/ 지금, 여기/ 내 발에 고인 먼지를 당신의 머리칼로 닦아준다/ 영원히 깨지지 않는 항아리를 등에 지고/ 당신이 허리를 숙인다/ 죽으면 안 되는 것들은 지상엔 없다/ 당신의 허리에서 솟아나온 하나의 목소리/ 천국의 나날들이 지겨워질 때/ 까마귀 한 마리가 들판을 건너간다/ 세상에 나보다 더 아픈 건 없다/ 세상에 나보다 더 아픈 건 없다//

마흔 네 번째 반성 / 우대식
집에서 키우는 개가 낳은 새끼/ 세 마리를 다 죽인 후 알았다/ 나는 가짜다/ 마흔 세 번을 반성했지만/ 그것도 가짜다/ 간절하게 불렀던 신의 이름도/ 그 때 그랬을 뿐이다/ 텅 빈 그 무엇이 되고자 한다고 말했다/ 거짓말이다/ 겨울 저녁/ 간장에 감자를 졸이던 냄새가 난다/ 희부연한 냄새가 골목길에 진동한다/ 어린시절이었다/ 집에 가고 싶다//

뒤편 / 우대식
철암역에 내렸다/ 흑백사진들이 서있다/ 건너편 길가 드럼통에서는 화톳불이 오르고/ 뒤편이 절경인 읍내/ 철주 하나에 아슬아슬하게 걸린/ 금강산 보덕암이/ 읍내 뒤편에는 수두룩하다/ 위태한 경계에 선방들이 늘어선 것이다/ 검은 배경,/ 생각을 아무리 모아도 빛이 보이지 않는 마을/ 생각이 몸이 되어 타오르면/ 잉걸불이 되는 철암마을/ 눈이 내린다/ 불꽃이 튄다/ 백악기에 솟아오른 검은 생명들이 수마노탑을 도는 저녁이다/ 침잠이라는 말이 이렇게 어울리는 곳은/ 지상 어디에도 없다/ 이 배경에서 공산주의를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여겨진다/ 다방 아가씨 붉은 머리띠가/ 별처럼 솟아오르고/ 눈은 여전하다/ 긴 철로가 뻗은 길까지가 사람이다//

철창 / 우대식
사선(斜線)의 철창을 몸 안에 박았다/ 살을 헤집고 철창을 박은 다음/ 콘크리트를 개어 발랐다/ 살 속으로 스미는 짠물/ 몸 안에 완연히 빛나는 철창을 부여잡은/ 두 손이 있다/ 아직 덜 굳은 철창을 흔들 때마다/ 명치끝이 아프다/ 어느 순간/ 손이 사라진다/ 검은 몸 어딘가로 서서히 떨어지는 손이 있다/ 완강한 강물소리/ 혹, 녹슨 망치소리/ 어떤 관념과도 면회가 금지된 날/ 다시,/ 철창을 부여잡으려는/ 검은 손 하나가 떠오르고 있었다//

꿈 / 우대식
꿈을 꾸었다. 두 눈이 멀어 누군가에게 길을 묻는 꿈. 문득 아내도 아이들도 없고 지팡이 하나만 내 손에 쥐어져 있었다. 누가 내 손에 이것을 쥐어 주었을까. 혹 나를 버리며 건넨 마지막 위무의 선물은 아니었을까. 눈이 먼다는 것은 깊은 슬픔이었다. 말을 건네면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의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산동지방의 방언 같기도 하고 깊은 산맥에서 울려나오는 잔향 같기도 하였다. 차라리 죽음에 이르는 길이었으면 바라기도 하였다. 옹달샘에 이르러 찬물로 목을 적시고 바위에 앉아 있을 때 새 한 마리가 날아가며 어깨를 툭 치기도 하였다. 눈이 먼 내가 눈을 감고 어느 먼 봄날의 평화를 그리워하고 있을 때 낡고 화려한 문양의 천을 걸친 늙은 여자가 내 몸을 지나갔다. 천산 산맥이 하얗게 보이는 천막 밖에는 포도가 부드럽게 가지를 뻗고 바람은 나를 일으켰다. 살아야 한다. 살아야 한다. 꿈속에서 내 이름이었다. 누군가 큰 소리로 나를 불렀다. 살아야 한다. 지팡이를 짚고 벌떡 일어서다 잠이 깬 음력 이월의 어느 날이었다. 신발을 신은 채였다.//

내 안의 겨울, 三冬을 찾아서 / 우대식
내 안에도 三冬이 있어 펑펑 눈이 쏟아지는 진부 골짜기에서 다시 나를 만났을 때 붉게 언 손도 못 내민 채 쓸쓸히 쳐다보기만 하였다. 겨울을 찾아 헤매던 어느 여름날 나는 임계 장터의 각다귀이거나 봉평 냇가 여울목 쏘가리이기도 하였다. 차디찬 겨울은 눈 속에 묻혀 보이지 않고 아무르 강까지 찾아간 발걸음은 허탕이었다. 하루 종일 멱에 지친 등짝 까만 사내아이처럼 아무 것도 모르는 나의 무지는 병이 되었다. 모든 것을 잊어버렸을 즈음 허파 속에서 강력한 눈보라가 일어나 허름한 방에 나를 눕혔다. 가물거리는 백열등 아래 차디찬 방바닥에 몸을 묻으면 하나의 환영(幻影)이 다가오다 사라지곤 하였다. 내 안의 겨울, 三冬은 반갑지도 슬프지도 않은 사내의 형상으로 진부 골짜기 허름한 방에 불쑥 들어와 한참을 바라보다 눈보라와 함께 사라졌다. 이미 멀리 겨울까지 도달한 내 몸을 느낄 수 있었다. 봄으로 가는 모든 회로를 끊은 채 하늘 높이 눈이 쌓여가는 三冬 아래 잠들 것이다.//

삵 / 우대식
내가 한 마리 삵이 되어/ 발해만 앞바다를 서성이는 이유는/ 어디 먼 해조음이 들려오는 탓이다/ 울지 말고 그만 잠들라는/ 그 어떤 먼 신호도/ 울음 소리였다는 것을 아는 때문이다/ 달 아래/ 그대 젖가슴으로 찬 손을 천천히 뻗어본다/ 죽음이란 이런 순간 다가오는 것/ 내가 한 마리 삵이 되어/ 발해만 앞바다를 서성이는 이유는/ 발이 네 개인 때문이다/ 해변을 달린다/ 달림, 들림 혹은 울음/ 모든 것을 받아들이겠다/ 다만 12월의 해변을 내달려/ 나의 울음도, 너의 울음도/ 그대 핏줄 어딘가에 돋아난/ 푸른 감각이기를 간절히 원할 뿐이다/ 그대에게 보낸 한 통의 竹簡은 받아보았는가/ 내 입에는 날이 선 이빨이 가득 고여/ 입을 벌리면 한 마리 삵이 되어/ 눈 내린 험한 산을 떠돈다고 썼다/ 지금 기차는 발해만을 떠나 극락강을 지나고 있는 중이다/ 광포한 노래에는 눈물이 고여 있다고 썼다/ 너는 읽었는가/ 모든 근육이 일제히 발이 되어 걸어가는/ 한 마리 삵,/ 꽃무늬 발자국이 그대 젖은 분화구를/ 어지럽게 흩뜨려 놓았을 것이다//

야크의 꿈 / 우대식
나는 첩첩이 우랄산맥의 야크였다가/ 첩첩이 돈황의 바람이었다가/ 첩첩이 화장터 위의 구름이었다가/ 첩첩이 애비를 버리고 떠나기도 하였다/ 또 첩첩이 천장天葬의 독수리였다가/ 첩첩이 한 꽃나무이기도 했다/ 첩첩이 떠나는 한 여자였으며/ 한 남자이기도 하였다/ 내 발길은 더러 허공의 길마저도/ 밟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저 절벽의 길을 걸어 첩첩한 발바닥의 무늬로/ 첩첩이 집으로 가는 길이었으며/ 첩첩이 집을 떠나는 길이었다//

나의 두바이 / 우대식
3.13. 14:00~19.00 서울시 도봉구 창동 '두바이 무도장' 방문자는 가까운 보건소에서 코로나19 검사를 받으시기 바랍니다(☎120, 1339). 자고 일어나니 먼 나라 두바이에서 문자가 와 있었다. 역병이 창궐하는 세상에 청정의 별이 박힌 두바이 무도장으로부터 이런 문자를 받고 나니 아침부터 눈물이 났다. 낙타를 타고 푸른 밤길을 헤치던 시절이 떠올랐다. 초승달이 문장처럼 새겨진 밤하늘 아래 신과 단 하나의 인간만이 대화를 나누던 아름다운 시절은 모두 지나갔다. 흰 천으로 얼굴을 가린 두바이 무도장. 눈으로 만나 눈으로 춤을 추던 먼 이국의 추억. 오연하던 낭만은 쭈그러져 목숨에 빌붙는구나. 나의 두바이여.//

유배流配 / 우대식
오늘날에도 유배라는 것이 있어/ 어느 먼 섬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는 형벌을 받았으면 좋겠네/ 컴퓨터도 없고 핸드폰도 빼앗겨/ 누구에겐가 온 편지를 읽고 또 읽고/ 지난 신문 한 쪼가리도 아껴 읽으며/ 탱자나무 울타리 속에 웅크리고 앉아 먼 바다의 불빛을 오래 바라보고 싶네/ 마른반찬을 보내 달라고 집에 편지를 쓰고/ 살뜰한 마음으로 아이들의 교육을 걱정하며/ 기약 없는 사랑에 대해 논(論)을 쓰겠네/ 서슬 위에 발을 대고 살면서/ 이 먼 위리와 안치에 대해 슬픈 변명을 쓰겠네/ 마음을 주저앉혀/ 서로 다른 신념을 지켜보는 갸륵함을 염원하다 보면/ 염전의 새벽에 어둑한 불이 들어오겠네/ 바닷가의 수척한 노동과 버려진 자의 곤고함을 배우다/ 문득 얼굴에 새겨진 주홍글씨를 물속에서 발견하면/ 삼박 사일을 목 놓아 울겠네/ 며칠 말미를 낸 그대가 온다면/ 밥을 끓이고 대나무 낚시를 하며 서로의 글을 핥고 빨겠네/ 글이란 무섭고도 간절하여 가시나무를 뚫고/ 천둥처럼 울릴 것이라 믿고/ 그대의 글을 읽다가/ 온통 피로 멍울진 내 혓바닥을 보겠네/ 유배의 길에 떨어져 흩어진 몸을 살뜰히 아껴보겠네//

정선을 떠나며 / 우대식
파울 첼란의 시에 이런 구절이 있었던가/ 아름다운 시절은 흩어져 여자의 등에 반짝인다고/ 시선을 거둔다/ 운명이란 최종의 것/ 정선 강가에 밤이 오면/ 밤하늘에 뜨는 별/ 나에게 당신은 그러하다/ 성탄절의 새벽길/ 눈이 쌓이기 시작하면 기찻길 옆 제재소에서는/ 낮은 촉수의 등이 켜지고/ 이미 오래전에 예언한 미래가/ 사라지는 것들을 받아내고 있다/ 선명한 모든 것들을 배반하며/ 산기슭으로 흐르는 눈발 속에서/ 당신의 얼굴을 그리는 일은 또 언제나 부질없다/ 가끔 당신을 생각한다/ 당신을 생각하며 밥을 먹는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밥을 남긴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사랑이다//

며칠 / 우대식
청령포 부근 마을/ 작은 방을 빌려 한 며칠,/ 죽은 왕은 눈 속에도 자꾸 물을 건너고/ 어쩔 수 없다/ 꿈에서 꿈으로 며칠/ 배가 고플 즈음 강가에 서면/ 감발을 치고 길을 나서는 사내들의/ 눈이 매섭다/ 쉬이이 귀때기를 치고 가는 바람/ 눈은 며칠 멈추지 않으리/ 다시 걸어 강줄기를 거슬러 올라갈 때/ 칼같이 선 바위꼭대기에서/ 우르르 눈이 몰려 내려온다/ 나라는 무엇입니까/ 사랑은 무엇입니까/ 어린 왕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자꾸 장에 가는 아낙들의 뒤를 따른다/ 여기에 이르러/ 얼음장 아래 물소리는 소리 죽인 천둥소리가 되고/ 어두운 하늘 날아가며/ 점점이 우는 겨울새/ 그,/ 겨울날의 며칠//

오늘 / 우대식
그 시절 나무는 다 키가 작았고 가끔 맺힌 과실은 쪼그라들었다. 겨울이 되어도 눈은 오지 않았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죽도록 미워했다. 먼 별에서 도착한 신호처럼 폐에서 올라온 숨소리는 몹시도 으르렁댔다. 꿈은 늘 사나워 계곡에서 계곡을 뛰어넘고 돌부리에 채여 천 길 낭떠러지기로 떨어져 어둠으로 빨려 들어가곤 하였다. 신은 조롱의 눈빛을 던지며 어디 한 번 견디어 보라는 듯 나타났다 사라지곤 하였다. 영원히 죽은 아버지는 일어나지 않았고 장례는 끝날 기미가 없어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다. 죽으면 그만이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살면 사는 거다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 시절은 왜 이렇게 길었나. 미래만이 구원일 뿐, 아무 시절로도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먼 미래만이 망각이라는 미망으로 나를 밀어 넣을 것이다. 곤죽이 된 육체는 썩은 내를 풍기며 땅 밑을 흐르거나 땅 위를 흐르거나 잠잠한 단풍나무 한 그루 아래 잠시 머물 것이다. 그 때 나는 신을 조롱할 것이다. 나는 사라졌다. 나는 원래 없었다.//

기도 / 우대식
고등학교 신입생 시절 나는 사이비 전도관의 신도였다. 산동네 언덕배기 작은 교회 골방으로 기도를 하러 들어갈 때마다 신의 커다란 손바닥이 내 등짝에 천국의 인을 쳐주기를 간절히 바랬다. 꽃무늬 손수건을 늘 손에 쥐고 있던 피아노를 치던 여자 아이와 함께 천국에 이르러야 한다는 강박은 그를 대신해 두 배로 기도했던 것이다. 산동네에 뜨던 별들은 가난했지만 아름다웠으며 신의 말씀에 왜 나는 기쁨보다 눈물을 흘렸는지 알 길이 없다. 내가 믿었던 것은 슬픔의 신이었나. 여자 아이가 늦은 밤 혼자 피아노를 치고 있는 뒷모습은 신 앞에 흘리던 눈물보다 더 많은 슬픔을 안겨다 주었다. “신은 죽었다”고 말한 짜라투스트라를 한없이 미워하며 그 여자 아이와 함께 천국에 이르기를 무릎이 까지도록 기도했었다.//

봄눈 / 우대식
골담초/ 나비꽃잎 아래/ 봄눈 오는가// 월천(越川)꾼/ 둥그레한 등짝에도/ 눈 내리는가// 걸어 사나흘 길/ 뱃길 삼백리 길// 아래녘 차(茶) 이파리 눈 뜨고/ 첩첩 청산은 젖어/ 발 아래,/ 발 아래,/ 백창포 꽃잎 소리 낮추어 우는가//

택리지 -겨울남행 / 우대식
해가 떨어진 겨울 대숲가에는/ 모든 사물의 뒤편이 일제히 솟아올랐다/ 그 동안 내 눈으로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는 뜻/ 무너져 내린 소쇄원에 한 조각 빛마저/ 사그러질 때 둥근 내 뼈를 바위에/ 갈아본다/ 택리지의 쓸쓸한 기억 위에/ 한 줌 전등이 켜질 때/ 뼈대로 지켜낸 저 시간들이란/ 얼마나 물렁한 것일까/ 죽지 않고 살아있음/ 남녘의 섬 흑산도에서 쓰던 정약전(丁若銓)의 편지들은/ 또 얼마나 하얗게 야위었던가/ 댓잎들은 위리안치의 생을 씹고 씹으며/ 저 깊은 어둠의 중심에서/ 몇 마리 새를 키울 뿐/ 야윈 물고기들이 편지의 행간을 기어/ 목마른 뭍으로 오르고 있다/ 눈 속에서 편지 위로 번지는 불꽃들/ 한 획을 그을 때마다 빠르게 혹은 느리게/ 재가 되어 주저앉는 흰 종이/ 이 만행의 길 위에서/ 겨울 해변에 이르러 한 장 편지를 쓴다/ 한 순간/ 모든 빛과 어둠을 뚫고 그대와 연락되기를// 눈발이 펄펄 내리는 하늘에서/ 물고기들이 수직으로 하강하고 있었다//

철창 / 우대식
사선(斜線)의 철창을 몸 안에 박았다/ 살을 헤집고 철창을 박은 다음/ 콘크리트를 개어 발랐다/ 살 속으로 스미는 짠물/ 완연히 빛나는 철창을 부여잡은/ 두 손이 있다/ 아직 덜 굳은 철창을 흔들 때마다/ 명치끝이 아프다/ 어느 순간/ 손이 사라진다/ 검은 몸 어딘가로 서서히 떨어지는 손이 있다/ 완강한 강물소리/ 혹 녹슨 망치소리/ 어떤 관념과도 면회가 금지된 날/ 다시,/ 철창을 부여잡으려는/ 검은 손 하나가 떠오르고 있었다//

생각의 정거장에서 보내는 엽서 / 우대식
마지막 꽃잎이 지는/ 오월 저녁/ 블랙 사바스의 체인지/ 바꾸고 싶다/ 이 끝과 저 끝/ 사람과 짐승/ 뒤바꾸어 놓고 술 한 잔/ 여보세요/ 여기가 저쪽인가요 이쪽인가요/ 지구는 여전히 아름답지요?/ 이방의 별에서 도착한 엽서/ 신은 죽었다/ 이 사람을 보라/ 생각의 정거장에서/ 오랫동안 버스를 기다립니다/ 낮술은 왼쪽 뇌를 물어뜯어/ 두 눈을 충혈시키고/ 붉다,/ 붉은 금이 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고함-반지름을 넘어 / 우대식
진실로/ 우리는 푸른 세상 아래 살았다 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의 배경이었을 뿐/ 아름다운 배경이 슬픔이라는 것을 아는가/ 우리가 디딘 지구 한 켠/ 땅바닥은 단단하게 굳어간다/ 그대들이 건넨 한 끼 밥,/ 감사를 드리겠다/ 우리가 밀어낸 생의 마지막 것에 대해서/ 그대들도 그리 생각해주기를 바란다/ 끈의 반지름이 우리들 세상이다/ 딱딱한 땅에서 솟아오른 잡초를 보며/ 희망을 키우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하늘에 떠오르는 그믐달을/ 죄스럽게 바라본 적은 있다/ 살아있는 것으로서의 죄스러움/ 들로 나간 고양이들에게 존경의 염원을 담아 보낸다/ 더러 그들과 밥을 나누는 것은 우리가 멍청하거나/ 그들을 두려워해서도 아니다/ 그들이 내뿜는 자유의 냄새/ 우리는 비를 사랑한다/ 비가 오는 날 반지름의 산책은 남다르다/ 심장을 녹이는 사상충도/ 우리의 영혼을 녹일 수는 없다/ 우리의 영혼은 반지름을 넘어/ 그토록 갈았던 이빨로 모든 사물을/ 찢어보고 싶을 뿐이다/ 멈추지 않을 것이다//

위태로운 사랑 / 우대식
어둡던 하루가 지나간다/ 공장 굴뚝에서 하루 종일 흰 연기가 쏟아져 나오고/ 회색 구름은 내 가슴 아래까지 내려와 있다/ 당신도 그 구름 어딘가에 숨어 있다/ 비타민을 조금 잘라 당신에게 내민다/ 구름 속으로 쑥 들어간 내 손을 무언가 핥는다/ 당신이라 믿는다/ 믿는다/ 손이 젖어간다/ 눈을 뜬다/ 온통 당신이다/ 온통 붉다는 말이다/ 내 손이 제 자리로 돌아왔을 때/ 아무 것도 없기를 기도했다/ 내 젖은 손도 당신의 혀도/ 붉은 모든 당신도/ 지상에는 존재하지 않기를/ 슬프도록 기도했다/ 검은 구름은 지금 배꼽 아래 와 있다/ 위태로운 당신의 사랑이 내게 거의/ 닿고 있다는 말이다/ 피안으로 흘러가는 배처럼/ 당신과 나,//

추방 -寂寞同病客 P에게 / 우대식
처참한 사람들/ 레미제라블/ 꼭 기다려줘/ 맑은 겨울날 낮달이 뜨면 잊지 않고 찾아갈거야/ 콧바람을 흥흥 불어대는 당나귀의 허밍을 들을거야/ 그때 우리는 국경 넘어 눈길을 걸어가자/ 낡은 신발은 젖어 발이 부르트겠지/ 괜찮아/ 죽음이란 늘 평균율로 우리를 위협하지/ 지금 우리는 죽지 않고 살아있지/ 괜찮아/ 우리는 맹목의 종언(終焉)을 맞이하겠지/ 기다려달라는 말, 조금은 촌스럽지/ 그만큼 너를 사랑한다는 말/ 눈길을 걷다보면 연기가 오르는 집이 한 채 보일거야/ 감자를 쪄서 나누자/ 너에게 보랏빛 모자를 씌워주겠다/ 눈물의 무늬로 짠 숄을 어깨에 걸쳐주겠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 레미제라블/ 입김을 후후 불어대며 부르는 노래,/ 여자였으며 남자였던 그대의 노래 소리를/ 오래도록 듣겠다//

강이 휘돌아가는 이유 / 우대식
강이 휘돌아가는 이유는/ 뒷모습을 오래도록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직선의 거리를 넘어/ 흔드는 손을 눈에 담고 결별의 힘으로/ 휘돌아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짧은 탄성과 함께 느릿느릿 걸어왔거늘/ 노을 앞에서는 한없이 빛나다가 잦아드는/ 강물의 울음소리를 들어보았는가/ 강이 굽이굽이 휘돌아가는 이유는/ 굽은 곳에 생명이 깃들기 때문이다/ 굽이져 잠시 쉬는 곳에서/ 살아가는 것들이 악수를 나눈다/ 물에 젖은 생명들은 푸르다/ 푸른 피를 만들고 푸른 포도주를 만든다/ 강이 에둘러 굽이굽이 휘돌아가는 것은/ 강마을에 사는 모든 것들에 대한 깊은 감사 때문이다//

풍경 / 우대식
시골 마을 정류장에 긴 등나무 의자가 하나 있다/ 가을 날 오전,/ 등나무 의자에 앉은 사람들은 모두 사라진다/ 장날 행상을 꾸린 할머니도 지상으로부터 추방되어/ 보따리만 정겹게 놓여있다/ 보따리 안에 아욱과 콩이 재잘거리고/ 스스로 버스에 올라/ 빈 자리를 찾아 앉으며 창문을 활짝 열어 재킨다/ 가을볕이 좋구만/ 션하구만/ 무가 튼실혀/ 사람 같은 소리를 해대며/ 장터로 씽씽 달려가고 있다/ 기사 아저씨가 왜 사람짓을 하냐고 호통을 치니/ 다 그게 그거고 그거 아닌가 하고 항의를 한다/ 뒷자리 누군가가/ 맞지 암만 맞고 말고 역성을 든다/ 씽씽/ 장터에 도착한 콩과 아욱이 길거리에서 가을바람을 쐬고 있었다/당당했다//

유년시幼年時 / 우대식
서울 달동네/ 행당동 수도국산/ 어둠이 하냥 푸르른/ 10월의 밤길/ 저녁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 남자 아이들은 간혹 여자 아이들을/ 어둠 속에서 놀래키고/ 그러면 더 따뜻하게 모여 체온을 나누고/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있었다/ 하나님이 있었다/ 나는 무서워져/ 집으로 뛰어갔다//

홍수환 약전略傳 / 우대식
대머리가 벗겨진, 한수 이남 새들이 유유히 날던 압구정의 영원한 챔피언 무사 홍수환을 선생이라 아니할 수 없다. 남들이 흰 와이셔츠를 입고 사무를 보거나 100만불 수출 고지를 점령한다고 부산을 떨 때 선생은 사각 빤쓰를 입고 왕십리 살곶이 다리까지 달리고 또 달렸다. 남의 집 장작을 수도 없이 패주곤 하였다. 세상을 모르는 이들은 나이를 생각해 이제 그만 싸움질을 그치라고 핀잔을 주었으나 개의치 않았다. 세상은 혼돈스러웠다. 군인들은 늘 총을 차고 다녔고 무림의 세계는 정의가 없었다. 어느 날 흑인의 강자 카라스키야가 무림을 뒤흔들 때 선생은 의연히 싸움판에 뛰어들었다. 모두들 정신이 나갔다고 비아냥거렸지만 무림에도 법이 있다는 것을 선생은 알리고 싶었다. 쓰러지고 쓰러지고 또 쓰러진 선생의 얼굴은 피로 얼룩졌다. 무림에 법을 세워야 한다. 다시 한 번 쓰러졌다 일어난 선생은 흑인 무사의 배를 도끼 내리찍듯 승부를 결정지었다. 그가 왜 싸우는지 아는 이들은 별로 없었다. 어떤 이는 파이트머니 때문이라고 어떤 이는 승리에 대한 열망 때문이라고 게거품을 물었다. 강자는 늘 고독한 것, 약한 인간들은 모른다. 그가 떠났을 때 무림도 무너져 버렸다. 선생은 진정한 싸움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었을 뿐이다. 아아 선생은 속세를 등지고 압구정에 날던 새들도 자취를 감추었다. 기인은 늘 이렇게 왔다가 사라지는 법. 선생의 덕을 흠모한 학생이 약전을 지어 남길 따름이다.//

술꾼 내력 / 우대식
술을 마셨다/ 사람들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진짜와 가짜/ 괴로웠다/ 2차에 갔다/ 진짜와 가짜가 뒤바뀌었다/ 3차에 가기가 두려워졌다//

로드킬 2 / 우대식
오라/ 이 곳은 눈비 내리는 곳이다/ 이 진창으로 해탈도 오고/ 길 잃은 개들도 오라/ 철없는 사람도 용서하시라/ 바람의 지도를 따라 오늘 이 암유의 도시에/ 꽃이 피고 새도 운다/ 미학주의자들은 다 죽었다/ 내 몸의 회로도 다 끊어졌다/ 피안(彼岸)에서 흘러오는 배 한 척/ 점등이 안 되는 초 한 자루가 오늘의 양식이다/ 이 시대에 시인들이 적어도/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가르쳐야 하지 않는가/ 나는 계몽주의자인지도 모른다/ 인간에 대한 예의는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몸에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이 어두운 밤, 묵시의 밤/ 여자와 남자들 사이를 걸어 내가 도달한 강가에서는/ 아직도 노예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 가슴에 닿는 황홀한 물기, 황홀한 복종/ 신(神)은 죽어서 우리를 구속하고/ 적(敵)은 살아서 나를 죽이네/ 이 별에서, 이 거리에서 나는 죽어갈 것이다/ 로드 킬,/ 킬킬킬대며 나는 살아갈 것이다//

우주로 가는 당나귀 / 우대식
가고 싶은 곳 : 우주/ 까닭 : 우주에 가서 지구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 2학년짜리 막내 아이의 숙제다/ 우주는 어디에 있는가/ 그곳에서/ 저무는 지구의 황홀한 일몰을 보고 싶다/ 한 남자를 탐하는 한 여자의 저녁을,/ 긴 상을 맞붙인 대가족의 공양을 보고 싶다/ 꺼져가는 장의사의 노란 불빛과/ 막 쪄낸 시루떡의 하얀 김,/ 미시령을 몰려다니는 눈발을 보고 싶다/ 어느 겨울, 시골 마을/ 불 켜진 낮은 집에 엎드려 숙제를 하는 내 아이의/ 뒷모습도 보일 것이다/ 매일 밤 집으로 돌아가는 당나귀는/ 며칠을 걸으면 우주에 당도하는가/ 나도 그곳에 가고 싶다//

直方의 그늘에 서다 / 우대식
直方齋 마루 끝에 앉으니/ 굽은 허리가 펴졌다/ 이 집 그늘 저 아래가 피끝마을이다/ 피가 끝나는 마을,/ 피란 대저 운명이며/ 피란 대저 마음 이전의 마음이며/ 피란 대저 몸 이후의 몸이라는 사실/ 직방 퍼붓는 눈을 맞으며/ 가시 돋은 내 몸 들여다본다/ 검은 배 한 척 눈이 흐르는 莊園 위에 떠 있다/ 피를 선적한 배 한 척,/ 위리안치의 탱자나무 울타리를 직방으로 건너는 중이다/ 강철 같은 마음의 絃이 울릴 때/ 오도 가도 못하는 운명이란 어디에도 없으며/ 끝내 칼끝에서 솟아난 새 한 마리/ 희부연 하늘을 날아올랐다//

방문 / 우대식
마지막 낡은 옷을 볼모잡혀 가지고/ 신세진 親舊의 빚을 갚아주마/ ―김관식, 「지구 최후의 날에」// 눈이 내리는 날 친구가 온다/ 눈은 친구의 그림자에 내린다/ 큰 창문을 열면/ 막걸리 잔으로 녹아드는 눈/ 눈은 친구의 심장 부근/ 차가운 線路에 내린다/ 얼음 낀 동치미 국물을 뜨는/ 친구의 손이 떨린다/ 수평을 놓친 맑은 국물이/ 수저에서 흘러내려 상 위로/ 떨어지는 정월 보름 즈음/ 내리는 눈 속에 언뜻/ 달무리가 보이는 듯도 했다//

근사록近思錄에 관해 / 우대식
나의 神은 언제나 왼쪽 귀로만 온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편애에 익숙한 그는 왼손잡이인지도 몰라/ 사륵 사르르/ 긴 옷자락을 끌며/ 하루도 빠짐없이 전례처럼 그가 다녀가고/ 내 왼 귀는 그래서 종교적이다/ 지극히 도덕적이다/ 오른 귀의 낭만과 사철 부는 바람을 이해하지 못한다/ 좌우의 기류가 풀 멕인 하늘처럼 팽팽한 날/ 그런 날은/ 성난 신의 발자국 소리가 더욱 거칠어진다/ 데칼코마니 같은 내 몸의 경계에는/ 반절짜리 연애가 산다/ 절반쯤 달려가다 돌아오고 돌아오는/ 슬픈 연인이 산다 그래도 모른 척 신은/ 왼쪽 귓속에 더 깊은 소리의 동굴을 파고//

폐허 / 우대식
꽃은 지고 사이보그 빌리지에서 떨어진 붉은 꽃잎을 깔고 앉아 자위를 한다. 무너진 한쪽 지붕으로 달빛이 스민다. 폐허다. 폐허의 터전이다. 천천히 속도를 조절한다. 모든 깃발이 내려온다. 모르스 부호를 타전한다. 돈쓰돈돈 돈돈돈돈 어떠한 구조요청도 아님. 수신자가 있다면 어서 여기를 떠나라. 폐허 속에서도 한 인간이 잠들고 가끔 어떠한 생각을 하는지 알리고 싶을 뿐, 아무도 당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서 겸손히 지구에서의 생을 마치라. 체리 브로솜, 구겨진 얼굴로 벚꽃이 쏟아진다. 어떤 향기, 여자의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아득함이 몸을 감싼다. 누구도 죽지 않았지만 누구도 살아있지 않다. 가끔씩 인기척이 들린다. 요금 청구서가 쌓여간다.//

백 년만의 사랑 / 우대식
백 년 전 나는/ 긴 난전의 뒷골목에 앉아 있었다/ 점점이 어두워지는/ 거리에 등불이 켜지면/ 사람들의 긴 그림자가 내게로 왔다/ 젖은 채 다가오는/ 사람들/ 호리병 같은 젖가슴을 가만히 내밀었다/ 지긋이 입술을 대면/ 저 멀리 골목 끝에서 날려 오는 벚꽃 잎들/ 온통 꽃잎이 깔린 뒷골목에서 등불을 들고/ 걸어가는 반백의 사내가 있었다/ 이제 어둠의 잔을 채우고/ 꿈같이 지나온 날들을 생각하노니/ 시여 백 년만의 시여/ 이제 내게 검이 아닌/ 하나의 사랑을 다오/ 차마 만질 수 없어 치어다 보다 울고 떠난/ 한 송이 꽃을 다오/ 백 년만의 사랑이 또 다시 뒷골목을 헤매도록/ 그대로 놓아다오//

정선 아라리, 당신 / 우대식
비가 오는 삼월의 마지막 날/ 마음의 회랑 안쪽에/ 정선 아라리 긴 휘장을 친다/ 다시 비가 내리고 또 다시 눈이 내린다/ 그 휘장 아래를 걸으면/ 밑도 없는 물길, 끝도 없는 산길이 나타나고/ 사라지고/ 내 슬픔이 무엔가 생각할 즈음/ 당신에 대해 명상을 한다/ 정선 아라리, 당신/ 왜 그렇게 천천히/ 또다시 굽이굽이 적막강산에 서 있는가/ 비는 여전히 내리고/ 그 긴 휘장에 앉아 한 마리 짐승처럼/ 온 몸을 웅크린 채/ 소금 사러 가던 먼 길과/ 석탄으로 몸을 씻던 내(川)와/ 그런 길과 그런 내에서/ 당신을 기다리던/ 배가 고팠던 저녁/ 정선 아라리/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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