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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최문자 시인

부흐고비 2021. 11. 11. 08:57

파란 대문에 관한 기억 / 최문자
막다른 집에서 꽤 오래 산 적이 있다./ 헐어빠진 나무대문들을/ 희망처럼 보이게 하려고/ 페인트로 파랗게 칠을 했었다./ 대문의 나뭇결은 숨을 그치고/ 그날부터 파랗게 죽어갔다./ 늦은 밤 돌아와 보면/ 길고 좁은 골목 마지막 끝에/ 자기 그림자 꼭 껴안고/ 바다 속으로 뛰어들 것 같은/ 그런 흔들림으로 서 있던 파란 대문/ 그 대문을 바라보고/ 가끔 생각난 듯 개가 짖어댔다./ 덧바른 낯선 색깔을 알아보고 짖어댔다./ 어느 날은/ 죽은 나무대문이 다시 나무로 살아날 것처럼/ 사정없이 짖어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긴 골목도 없이 나를 막아서는 802호/ 지금은 거기에 산다./ 열쇠를 돌리려면 한참씩 문 앞에서 달그락거리지만/ 잠긴 저 안은 언제나 쇠처럼 고요하다./ 하루 종일/ 이 색깔 저 색깔로 덧칠 당하고 돌아온 나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 희망처럼 보이는 푸르딩딩한 폐허를/ 아무도 짖어대지 않는다./ 사라진 개를/ 찾아나서고 싶다.//

빈집 / 최문자
나를 거둬 가는 그대 때문에/ 나는 빈집이예요./ 아주 고요해서/ 불마저 켜기 싫은/ 고통의 부위만 남겨놓고/ 나의 집은 비어 있어요./ 당신은 언제나 날카롭게 직립하세요./ 내 쪽으로 오는 저 칠흑의 어둠을 안고/ 내가 쓰러질게요/ .질벅한 눈물의 한 부피로/ 생생하게 쓰러질게요./ 다시 살아날까 겁이 나서/ 혼자 흔들리는 문을 잠그고/ 살듯이 투명하게 죽을게요.//

생가 / 최문자
살아 있는 한 돌아서지 못한다./ 꼬집으면/ 확, 하고 꽃 터질 듯한 자리/ 누구나/ 모래바람 일으키며 떠났다가/ 허기진 애증으로 군데군데 살이 떨어진 채 돌아와/ 그 원형에 영혼을 다시 대 보지만/ 닿기만 하고/ 멍이 지워지지 않는 자리./ 무한정하고 소리없이 떨어지던 뒷마당 물앵두꽃/ 내 가슴을 수없이 다녀갔던 분홍꽃잎/ 그 꽃비린내로/ 가슴 울렁이는 매연 속에서도/ 푸른 뼈 세우며 산다.//

벽과의 동침 / 최문자
이십 년 넘게 벽 같은 남자와 살았다. 어둡고 딱딱한 벽을 위태롭게 쾅쾅 쳐 왔다. 벽을 치면 소리 대신 피가 났다. 피가 날 적마다 벽은 멈추지 않고 더 벽이 되었다. 커튼을 쳐도 벽은 커튼 속에서도 자랐다. 깊은 밤, 책과 놀다 쓰러진 잠에서 언뜻 깨보면 나는 벽과 뒤엉켜 있었다. 어느새 벽 속을 파고 내가 대못처럼 들어가 있었다. 눈도 코도 입도 숨도 벽 속에서 막혔다.// 요즘 밤마다 내가 박혀 있던 자리에서 우수수 돌가루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벽의 영혼이 마르는 슬픈 소리가 들린다. 더 이상 벽을 때릴 수 없는 예감이 든다. 나는 벽의 폐허였다. 그 벽에 머리를 오래 처박고 식은땀 흘리는 나는 녹슨 대못이었다.//

고백 / 최문자
향나무처럼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제 몸을 찍어 넘기는 도낏날에/ 향을 흠뻑 묻혀주는 향나무처럼/ 그렇게 막무가내로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고백의 幻 / 최문자
버스 종점에 서서 오래 금요일을 기다렸다// 고백하려고/ 개 한 마리처럼 자꾸 손을 내밀었다// 고백은 나의 벽돌로 만든 나의 빨간 지붕이 달린 아직/ 아무도 열어보지 못한 창문 같기도 하고 창문 아래 두고/ 간 그 사람 같고 내 앞을 떠나지 못하는 슬픔 같고 흰구름/ 같고 비바람 불고 후드득 빗방울 날리는 것이 눈보라/ 같아서 내 몸 같아서 나는 고백 할 수 있을까?// 금요일// 상처투성이 하얀 운동화를 신고 철야기도 하러 간다/ 걸어서 가는 길에 손이 닿지 않는 구름이 있어서 좋았다/ 아무 짓도 하지 않는 구름이라 더 좋았다 회현역 근처/ 흰 구름 밑에서 더러운 봉지들을 찢어버렸다 긴 시간/ 목이 탔던 증발접시를 깨뜨리고 거대한 절벽 하나를 밀어버렸다 오래 무거웠던 내가 해체되는 굉음이 구름/ 속에서 들렸다/ 우리는 각자의 색으로 기도했다 손으로 만들지 않고/ 새로 태어나는 외로움으로 기도 했다 눈물나게 던져도/ 죽지 않는 뼈들이 기도 내내 하얗게 서성거려 주었다 주기도문을 외우고 나서 신과 한없이 더 멀어지는 느낌/ 자꾸 옥타브 밖으로 나가려는 나에게 기도는 흰/ 눈송이로 만든 눈물, 잠시 눈물을 고백이라고/ 오해하기도 했다// 심야버스 타고 오는데/ 모든 것이 녹고 있었다// 마음 아래 흙이 생기고 뿌리가 달리고/ 강을 건널 때/ 이곳보다 저쪽이 더 출렁거렸다.//

외출 / 최문자
시인이 생선을 고른다/ 값을 물어보기 전에/ 깊은 바다에 얼마나 드나들었나?/ 아가미를 열어본다// 바다에서 나와 땅에서 떠돌기 얼마나 쓸쓸했나?/ 지느러미 힘줄을 들쳐본다// 정말 바다의 자식인지/ 등짝에서 파도에게 매맞은/ 푸른 멍자국을 찾아본다// 얼마나 바다를 토애내야 죽을 수 있었나?/ 핏발 선 눈알을 들여다본다// 아직도/ 뻐끔거리던 입마다 바다가 몰려있는데/ 와르르 와르르 파도가 몰려와 좌판을 때리고 가는데/ 싸요, 싸/ 단 돈 오천 원에 싱싱한 주검이 두 마리/ 수산시장 비린내만 묻히고 그냥 돌아온다/ 나를 따라 일어서는 겨울 바다/ 노량진 역에서 같이 지하철을 탄다//

무서운 봄 / 최문자
무섭게 봄이 오고 있네/ 봄밤은 숨차고/ 자꾸 간지러운 지느러미가 새로 생기네/ 내 마음/ 너무 많은 기둥을 세웠네/ 단추 풀고 홑치마 훌렁 들추고/ 출렁출렁 달려드는 봄을/ 마구 비틀거리며 쫓아버렸네/ 그토록 굵은 기둥을 세우고/ 푹푹 나에게 오는 봄을 잃었네/ 나도 봄인 적 있어서/ 매일 밤 가위 눌렸네/ 나 가는 길 군데군데 서 있던/ 꽃 같은 여인/ 왜 그토록 오래오래/ 봄을 무서워했을까//

눈물 / 최문자
어릴 적 외할머니가 이불 빨래하는 날은/ 뒷마당에서 잿물을 내렸다/ 금이 간 헌 시루 밑에서 뚝뚝 떨어진/ 재의 신음소리/ 꼭 독한 년 눈물이네/ 열아홉에 혼자된 외할머니 독한 잿물에/ 덮고 자던 유년의 얼룩들은 한없이 환해지면서/ 뒷마당 가득 흰 빨래로 펄럭였다/ 하나님은 내가 재가 되기를 기다렸다/ 하루종일 재가 되고 났는데도/ 아직 남아 있는 뭐가 있을까? 하여/ 쇠꼬챙이로 뒤적거리며 나를 파보고 있었을 때/ 재도 눈물을 흘렸다/ 어제의 재에다/ 새로 재가 될 오늘까지 얹고/ 독한 잿물을 흘렸다/ 조금도 적시기 싫었던 사랑까지/ 한없이 하얘져서/ 세상 뒷마당에 허옇게 널려 있다/ 재는 가끔 꿈틀거렸다/ 독한 눈물을 닦기 위하여//

믿음에 대하여 / 최문자
그녀는 믿는 버릇이 있다./ 피가 날 때까지 믿는다/ 금방 날아갈 휘발유 같은 말도 믿는다./ 그녀는 낯을 가리지 않고 믿는다./ 그녀는 못 믿을 남자도 믿는다./ 한 남자가 잘라온 다발 꽃을 믿는다./ 꽃다발로 묶인 헛소리를 믿는다./ 밑동은 딴 데 두고/ 대궁으로 걸어오는 반토막짜리 사랑도 믿는다./ 고장난 뻐꾸기 시계가 4시에 정오를 알렸다./ 그녀는 뻐꾸기를 믿는다./ 뻐꾸기 울음과 정오 사이를 의심하지 않는다./ 그녀의 믿음은 지푸라기처럼 따스하다./ 먹먹하게 가는 귀 먹은/ 그녀의 믿음 끝에 어떤 것도 들여놓지 못한다.// 그녀는 못 뽑힌 구멍투성이다./ 믿을 때마다 돋아나는 못,/ 못들을 껴안아야 돋아나던 믿음./ 그녀는 매일 밤 피를 닦으며 잠이 든다.//

하루 / 최문자
하루 잘 살기란 힘들지요/ 하루는 하루살이의 전 생애지요/ 하루살이에게 시한부로 걸린 하루는 사실 하루가 아니지요/ 사랑하고 꿈꾸고 아이 낳고 투병까지 하는 사람들의 생애지요/ 삶의 시간은 배고팠지만/ 하루만 살고도/ 하루만 더, 하루만 더, 하고 삶을 구걸하지 않는 하루살이/ 바둥거리지 않고 내리꽂히는 가파른 죽음을 보셨는지요/ 사람들에게는 없는 하루지요//

잎 / 최문자
누군가의 잎으로 산다는 것// 한 번도 내가 없는 것/ 새파란 건 새파랗게 울고 싶다는 뜻/ 뒤집혀도 슬픔은 똑 같은 색깔이 된다/ 누구의 잎으로 산다는 건/ 많이 어둡고 많이 중얼거리고 많이 울먹이다 비쩍 마르고/ 많이 죽고 죽어서도 가을이 그렇듯 몇 개의 마지막을/ 재로 만들고/ 잘 으깨져서 얼어붙고 많이 망각되고/ 붉은 탄피처럼 나뒹굴고/ 사방에서/ 연인들은 마른 소리를 내며 밟고 가는 것/ 누구의 잎으로 산다는 건/ 한 번도 꽃피지 않는 것/ 어금니를 다물다 겨울이 오고/ 마치 생각이 없다는 듯/ 모든 입술이 허공에서 죽음과 섞이는 것//

꽃잎 / 최문자
유럽 여행 중/ 이름 모를 이국의 해변에서/ 온몸에 머드팩을 한 적이 있다./ 몸에다 진흙을 바르고 진흙 속에 누웠었다./ 분명,/ 여자의 몸에는 깊은 꽃잎이 있는 듯 했다./ 흙냄새 풍기는 꽃잎이 있는 듯했다/ 진흙은 꽃잎을 덮고도 꽃잎 위에서 넘실거렸다./ 비누보다 몸에 익숙한 꽃잎/ 몸의 정맥에 대고 속삭이는 꽃잎/ 자신만의 풍경을 가지고 있는 꽃잎/ 이브가 수치를 가릴 때/ 흔들리던 부표, 그 떨리던 꽃잎/ 자장가처럼 간지럽게 흘러내리는 꽃잎/ 태초에 신이 진흙을 주물럭거릴 때/ 진흙을 뚫고 여자로 움트던 꽃잎/ 진흙 위에 진흙을 바르며 꽃잎을 느꼈었다./ 가장자리가 다 닳아빠지도록/ 그 동안 얼마나 창백하게 내버려둔 꽃잎인가?/ 삶의 들판 사이사이에서 울고 웃던 꽃잎/ 울다가 구름을 안고 집으로 돌아오던 꽃잎/ 진흙인 줄 모르고 쇠처럼 써버리던 꽃잎/ 진흙 속에 누워 유년의 꽃잎을 기억했다./ 파들거리며 부끄럼 타던 발그레한 속꽃잎/ 그 발기한 분홍색 꽃잎을.//

꽃구경 / 최문자
1/ 꽃은 몇 겹으로 일어나는 슬픔을 가졌으니 푸른 들개의 눈을 달고 들개처럼 울고 싶었는지 몰라 저 불완전한 꽃잎 하나만으로 죽음도 환할 수 있으니 저 얇은 찍어짐 하나 가지고 우울한 우물을 파낼 수 있으니 이게 바람 대신 울어주는 창호지 문인지 몰라 꽃은 죽고 나무만 살아 있으니 나무 속에 끓고 있던 눈물의 일부일지 몰라 검은 점으로 부서졌다가 재가 되는 꽃의 마지막 뼈일지 몰라 밤새 꽃을 내다 버리는 부스럭거리는 소리 죽은 동그라미의 질감으로 바람에게 끌려가는 소리 간지러웠던 피 모두 흘려버리고 매운 꽃나무 뿌리를 다시 찾아가는 순간일지 몰라// 2/ 꽃들이 꽃 한 송이 피지 않는 공허한 내 등뼈를 구경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이곳에 꽃이 없어졌을까 언제부터 이곳에 이처럼 딱딱한 굵은 슬픔 한 줄 그어져 있었을까// 3/ 어떤 봄날에 꽃 보러 가는데 불현듯 배가 고팠다 배고프면 위험한데 깜깜한데 눈먼 푸른 박쥐처럼 더러운 바닥에 엎드리는데 허기져도 꽃은 여전히 꽃이 되고 있었다 모른 체하고 하루씩 하루씩 꽃이 되고 있었다// 4/ 그동안 산맥과 구름 사이에 너무나 많은 꽃잎을 날렸다 어떤 슬픔인지도 모르는 그걸 멈추려고 거기다 너무나 많은 못을 박았다//

그 날의 꽃구경 / 최문자
그 날,/ 벚꽃이 만개했다는 그곳으로/ 우리들은 꽃구경을 갔다./ 갖가지 통증을 감추고/ 꽃을 찾아 나선 사람들은/ 꽃 아래 가득 차 밀려다녔다./ 꽃들은 감춘 통증을 알아보고/ 매워서 연신 재채기를 해댔다./ 봄 끝에 매달렸던 돌풍이 일자,/ 꽃의 살점들은 떨어져 나갔다./ 눈발처럼 서쪽을 향해 허옇게 날아갔다./ 꽃나무는 동쪽에 그냥 남아 있었다./ 따라가 볼 수 없는 꽃의 살점/ 반쯤 남은/ 꽃 아래서/ 사람들은 서로 살점 뜯긴 얘기를 나눴다./ 푸드득/ 푸드득//

꽃처럼 보이지만 / 최문자
사랑이 꽃처럼 보이지만/ 꽃과 뿌리 사이/ 가는 틈새/ 거기, 몸 처박고/ 한철 피고 나면/ 끓는 심장 만지고 돌아오면/ 헐덕거리는 신발처럼 자꾸 벗겨지는 것이/ 피 마른 꽃잎처럼// 자꾸 흘러내리는 것이/ 꽃철이 아닌데도 뒤흔드는 것이/ 꽃처럼 보이지만/ 바람이야//

꽃냉이 / 최문자
모래 속에 손을 넣어본 사람은 알지/ 모래가 얼마나 오랫동안 심장을 말려왔는지./ 내 안에 손을 넣어본 사람은 알지/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나를 말려왔는지./ 전에는 겹 백일홍이었을지도 모를/ 겹 동백이었을지도 모를/ 꽃잎과 꽃잎 사이/ 모래와 모래 사이/ 나와 그 사이/ 그 촘촘했던 사이./ 보아라. 지금은 손이 쑥쑥 들어간다./ 헐거워진 자국이다/ 떠나간 맘들의 자국/ 피마른 혈관의 자국.// 신두리 모래벌판 가본 사람은 알지/ 피마른 자국마다 꽃 피는 거/ 헐거워진 모래자국으로도 노랗게 꽃 피우는 거/ 지금, 신두리 모래벌판 꽃냉이 한철이다/ 슬픔도 꽃처럼 한 철을 맞는다.//

달맞이꽃을 먹다니 / 최문자
감마리놀렌산이 혈행에 좋다고/ 그렇다고그 꽃을 으깨다니/ 그 꽃 종자를 부수고 때리고 찢어서/ 캡술 안에 쳐넣다니/ 그 피범벅 꽃을 먹고/ 혈관의 피가 잘 돌아가다니/ 욕심껏 부풀린 콜레스테롤이 그 꽃에 놀아나다니/ 그렇다고 나까지/ 하루 두 번 두 알씩 그걸 삼키다니/ 머지않아 꽃향기로 가득 찰 혈관/ 그렇다고/ 하필 그 환한 꽃을 죽이다니// 밤마다 달을 바라보던 그 꽃을/ 꽃 심장에 가득 찼을 달빛을/ 그 달빛으로 기름을 짜다니/ 노오란 꽃에 앉았던 나비의 기억까지/ 모두 모두 으깨다니/ 부서진 달빛, 꽃잎, 나비,/ 두 알씩 삼키고 내 피가 평안해지다니/ 생수 한 컵으로 넘긴 감마리놀렌산 두 알/ 혈관에 달맞이꽃 몇 송이 둥둥 떠다닌다//

꽃은 자전거를 타고 / 최문자
그녀가 죽던 날/ 꽃은 자전거를 타고 왔다/ 그녀의 남자가 입원실 현관 앞에 자전거를 세우고/ 막 아네모네 꽃을 내리려고 할 때/ 그녀의 심장은 뚝 멎었다/ 꽃은 다시 자전거를 타고 영안실 근처로 갔다/ 죽을 자리에서도 타오른다는 아네모네가/ 놀란 자전거를 타고 앉아/ 헛바퀴만 돌리고 또 돌렸다// 그날,/ 꽃은 온종일 자전거에 끌려 다녔다/ 꽃을 태운 자전거는 참았던 속력을 냈다/ 꽃도 그녀처럼 자전거를 타고 앉아/ 남자의 등을 탁탁 때리며 달렸다/ 꽃의 내부가 무너지도록 달렸다/ 마지막 꽃 한 송이가/ 바닥에 떨어지면서 뭐라고 말했지만/ 바람이 그 말을 쓸어갔다/ 그날,/ 빈 자전거 한 대/ 고수부지 잡석 사이에 쓰러져 있었다//

후회하는 풀 / 최문자
다년초가 못 될지라도/ 뿌리만은 살아 있고 싶었다.// 뿌리의 온몸 중 한 군데라도 성해서/ 그 자양으로/ 수도 없이 넘어지던/ 지난 사랑을 일으키고// 사랑의 끝/ 그 닫힌 쇠철책 끝에/ 처음 기쁨을/ 깃발처럼 매달고 싶었다.//

사과 처럼 / 최문자
사과를 사랑하자 사과 처럼 사과 냄새가 났다/ 사과와 속삭이자 사과를 먹고 잠들어 버렸다/ 잠 속에서도 사과 냄새는 휘발 되지 않아/ 누가 사과 처럼 날 따버린 거야/ 반복 되는 태초의 사과 연습/ 남자들은 매일 같이 밭을 갈고 굵은 수고의 땀방울을 흘려 준다 / 땀밭에다 아이를 툭툭 떨어뜨리는 사과의 엄마들처럼/ 내일이 와도 사과는 날 놓아주지 않아/ 사각사각 사과 처럼 아이를 낳았다/ 어두워도 여긴 둥근 사과의 우주/ 사과의 불운은 휘발되지 않아/ 뱀과 여전히 헤어지지 않아/ 조그만 아이들이 새까만 사과씨를 품고 지구에서 자란다/ 사과 처럼 구르며 사과의 발자국을 찍는다/ 사과가 사람을 홀리던 그 때의 사과 처럼/ 어린 사과에게 남은 태초가/ 사과 처럼 다가오고 있다//

사과 사이사이 새 / 최문자
나는 사과의 피가 흐르는 사람이었을까/ 사람의 피가 흐르는 사과였을까/ 연대조차 알 수 없는/ 선과 악의 무수한 점들이 찍힌/ 영혼을 걸친 듯한/ 계속 사람의 문장을 같이 쓴 흔적이 있는/ 사과 같은 사람들은 사과 없는 광야를 건넜다// 사과 옆은 무서운 난간/ 난간에서 난간으로/ 누군가가 위험한 높이까지 새처럼 올라간다/ 날마다 새로 생긴 사과의/ 틀린 고백 틀린 허기 틀린 반성 틀린 눈물/ 틀린 틀린 사과의 밥을 보고 있다/ 죽어라고 틀리게 태어나서/ 그 누구의 틀린 기쁨을 맛있게 먹여주던/ 사과 수프/ 누군가가/ 틀린 사과들을 통째로 삼키고 통째로 부서진다/ 수직으로 수직으로 떨어지는 그 누구의 부서진 어깨뼈/ 통증이 빛난다//

시선들 / 최문자
아까부터/ 사과들이 나를 쳐다보네/ 나는 딴 생각 반, 사과생각 반으로 보는데/ 사과나무는 온 사과들을 다 데리고 나를 보네/ 사과 사이사이에 새가 있네/ 울어줄 새를 안고 살았나보네/ 어쩌다 새의 작은 눈알과 마주쳤네/ 새까지 고집스럽게 나를 쳐다보네/ 이상한 눈으로 나를 보네/ 사과가 없어진 나를 보네/ 뻥뻥 구멍 뚫린 나를 보네/ 누구와 누구가/ 사과를 다 따갔는지 의심하며 보네/ 내가 놓아버린 사과들을 찾고 있네/ 사과 뒤에서 달이 뜨고 있네/ 알알이 불을 켜고 나를 쳐다보네/ 이대로 둘까 어쩔까/ 그런 생각으로 쳐다보네/ 사과들이 방패를 뚫고 나를 찌르네/ 사과와 새와 달빛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나를 죽이네/ 사과무덤에 내가 묻히네/ 새가 무섭게 울고 있네//

흔적들 / 최문자
식탁 위에 놓인 붉은 사과/ 한 쪽 얼굴이 발갰다/ 나는 사과에게 물었다 피묻은 뺨에 대하여/ 사과는 아무 말 안하고 있다/ 말이 답답할수록 우리는 바벨의 언어로 말했다/ 사과와 나는 서로 다른 언어로 말했지만/ 잠시 후 우리는 금세 알아차렸다/ 흔적들은 소리내지 않고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자세히 보면, 누구나 흔적들로 가득하다/ 사과가 떠나올 때 울었던 흔적/ 사과와 나무가 갑자기 잃어버린 어느 한 부분/ 그 한쪽에 피가 몰렸다/ 피 한 방울 없이도 핏발선 얼굴로 지냈다/ 사과나무 속에도 사과가 들어갔던 흔적이 있다/ 가슴팍에 머리를 처박고 이별을 버티던/ 쑥 들어간 부분/ 사과를 씻어주면 소리없이 눈물이 고이던 그 자리/ 아, 생각난다/ 단칼에 잘라먹던 사과의 눈물/ 칼에도 도마에도 묻어 있던 사과의 눈물/ 사과나무가/ 아팠던 자리마다 사과를 배는 것은/ 그 자리에 열린 사과가 더 빨간 것은/ 떠난 사과들의 흔적 때문이다./ 흔적들이 다 말하도록 내버려두고 있다./ 푸른 눈물이 마를 때까지//

오렌지에게 / 최문자
사랑할 때는 서로 오렌지이고 싶지/ 먼 곳에서 익고 있는/ 어금니가 새파란// 이미 사랑이 끝난 자들은/ 저것이 사랑인가 묻는다/ 슬픈 모양으로 생긴 위험하게 생긴 내린 비가 부족해서 파랗게 죽을 지도 모르는 저것/ 사랑하기에 좋도록 둥근, 바람에 대해 쓰러지기 좋은 죽기에도 좋은 저것// 우리는 쓰러지기도 전에 겁이 나서// 오렌지는 너무나 굳게 오렌지를 쥐고/ 나는 어디에도 없는 나를 쥐고// 짐승처럼 나빠지고 싶은 오 두려운 여름 거짓으로 빚어지는/ 둥그런 항아리 같은 저것/ 저것의 안을 깨뜨리며/ 죽었던 여름이 우리를 지나갔다//

틈새의 詩 / 최문자
이 나무와 저 나무 사이가 허전하다 그 틈새를 지우려고 바람이 수시로 등을 밀어 붙였다/ 이 가지와 저 가지 사이가 허전하다 그 틈새를 지우려고 새가 수시로 가지를 물고 드나들었다/ 나뭇잎과 나뭇잎 사이가 허전하다 그 틈새를 지우려고 햇빛이 수시로 바느질을 했다/ 바람과 새와 햇빛의 움직임을 다시 보았다/ 나무와 나무가 주고받는 그것은 나무끼리의 눈짓이란 걸, 나무의 허전함이란 걸 오래 기다린 끝에 처음 알았다/ 나에게는 없는 바람과 새와 햇빛의 움직임이 나를 느닷없이 허전하게 하는 걸 처음 알았다//

시인 / 최문자
삶의 혓바닥이 나를 찾아낸다./ 나를 얼른 알아보고 속도를 낸다./ 끔찍한 혀를 가지고 미끄러져 온다./ 구체적인 절망을 낼름거리며/ 목마름으로 온다.// 빠져나가라/ 흘러가거라/ 나는 길을 비켜준다.// 혓바닥은 완강했다./ 드디어 내 알몸이 드러난다./ 어느 시인이/ 삶에게 당했다는 추문이 한동안 무성했다.// 그러나/ 확고한 알리바이가 하나 있다./ 나는/ 결코 먹지 못하는 먹이/ 끝간데까지 가면 터져 버리는 비린내나는 핏줄과/ 삶의 혓바닥을 찌를 수 있는/ 위험한 감성의 가시를 감추고 있지.//

시와 시인 / 최문자
시보다 사과/ 사과보다 빵이 주인공처럼 보이니/ 빵을 보면 애인보다 빨리 솟는 눈알을 가진 너에게// 빵보다 느린/ 너의 사과가 되어줄게/ 말 없이 자란 사과처럼 그대로 있어봐// 세상에 아무렇게나 놓인 사물들/ 시보다/ 사과는 그 다음 다음 다음 사과보다 빵은 그 다음 다음 다음 다음…/ 그리고 그 밖에다 치는 노란 선/ 우리는 함께/ 무서운 빵냄새의 네거티브// 이 세상에 흔한/ 그러나 잘 없는/ 시와 시인// 그럼에도/ 사과처럼 있어봐/ 사과는 말 없이 너무 사과잖아//

땅에다 쓴 시 / 최문자
나는 땅바닥에 대고 시를 썼다./ 돌짝도 흙덩읻 부서진 사금파리도/ 그대로 찍혀 나오는/ 울퉁불퉁했던 삶./ 삐뚤삐뚤 한글 잠가 나가고/ 미어진 종이 위에서// 연필은 몇 자 못 쓰고 부러졌다./ 지금지금 흙 부스러기가 씹혔다./ 숨기고 있던 내 부스러기들이 씹혔다.// 더 이상 세상에 매달리지 못하는 것들은/ 모두 땅바닥에 와 있었다./ 죽은 꽃잎에 대고/ 죽은 사과 알에 대고/ 작은 새의 죽은 눈언저리에 대고/ 꾹꾹 눌러썼다./ 에스겔서의 골짜기 마른 뼈처럼/ 우두둑 우두둑/ 무릎 관절 맞추며 붙이며/ 죽은 것들이 일어섰다./ 나는 흙바닥에 대고 시를 쓴다./ 죽음도 사랑오 절망도 솟구치며 직혀 나오는/ 미어지는 종이 위에 꾹꾹 눌러쓴다./ 몇 자 못 쓰고 부러지는 연필 끝에/ 침 대신 두근거리는 피를 바른다./ 시에서 늘 비린내가 풍겼다.//

나는 언제 자전하나 / 최문자
지구가 돈다/ 날마다 오고 있는 저녁을/ 이 별빛을/ 내가 먹어버린 사과를/ 한꺼번에 쓰러뜨리는 방법// 의심이 생긴다// 모두 쓰러뜨리고 싶을 때/ 나는 자전한다/ 잉크가 떨어졌을 때/ 의자가 넘어졌을 때/ 부스러기들이 쏟아질 때/ 사마리아 여인처럼 물동이를 내던질 때/ 깜빡거리다 내가 아닐 때/ 부서지면서 가능한// 저녁이 오고/ 지구가 사과를 놓친다// 사람들이/ 마구마구 의심의 사과를 찾아다닌다// 사과 같은 나를 찾아서/ 나를 반도 안 읽고 반도 안 먹어보고/ 마구마구 내동댕이 친다// 지구는 더 많은 사람들을 사과처럼 떨어뜨린다// 남아도는 사과들/ 남아도는 불행들// 지구는/ 까맣게 탄 폐허 한 채/ 얼굴이 붉은 거대한 부표 하나// 한 밤 자고나면/ 사과가 발각해낸 내일이 희미하게 밝아온다//

달콤한 은유 / 최문자
미안해. 시 쓰는 이런 체위로 전력 질주 40년./ 미안하고 미안해서 물끄러미 있는 남편에게 이런 여자 하나 얻어주고 싶다 내 영혼 반쯤으로 낮추고 반쯤은 남편의 영혼인 여자. 남편을 찾을 때도 구름으로 쉽게 찾기, 표정으로 쉽게 찾기, 입모양으로 감정 찾기, 찾기 놀이 하다가 호주머니 속에 쏙 들어가 잘 우는 여자. 꼴까닥 넘어가게 섹스 잘 해주는 여자. 남편 젓가락에 잘 집히는 여자. 남편이 초록을 생각하면 초록을 감고 분홍 까지 들고 나오는 여자. 맨발로 벌레를 잡아 보여주는 여자. 군데군데 있는 남편의 얼룩을 베고 잠드는 여자. 가끔 봄나물 뜯어다 나물무침 위에 꽃다지를 얹어놓는 여자. 위스키를 주문하고 남편이 취해도 돈 안 달라는 여자. 형님, 형님, 하면서 내 등에다 고추 달린 사내 아이 업혀주며 마실 보내 주는 그런 여자./ 어디 가서 그런 여자를 구할까? 생각하는 사이 벌써 집에 닿았다 어림 택도 없는 여자가 초인종을 누른다. 미안해 미안해 그런 여자 찾다가 또 이런 낡고 어설픈 형이상학적 체위로 돌아와서//

실명 / 최문자
흠집이 많은 과일이 좋았다/ 열망할 적마다 찌무러진 그 자리가/ 흉할수록 좋았다/ 한사코, 불구의 반점으로 남고 싶은/ 위험한 사상은/ 가을을 기다려 오히려 흉터가 되었다/ 흠집이 많은 과일일수록 좋았다/ 용서할 수 없어 한없이 헛구역질하던/ 그 자리가 좋았다/ 아플 것 다 아파본 것들/ 실상은 눈이었다/ 밖으로 흉하게 자란 눈이었다/ 꿈꾸고 있다가 실명된 눈이었다/ 감긴 눈이 많은 과일이/ 나는 좋았다/ 꼭 감고 흘린/ 그 어두운 눈물 자국이/ 더 없이 좋았다//

Vertigo 비행감각 / 최문자
계기판보다 단 한 번의 느낌을 믿었다가 바다에 빠져 죽은 조종사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 그런 착시현상이 내게도 있었다. 바다를 하늘로 알고 거꾸로 날아가는 비행기처럼, 한쪽으로 기울어진 몸을 수평비행으로 알았다가 뒤집히는 비행기처럼 등대 불빛을 하늘의 별빛으로, 하강하는 것을 상승하는 것으로 알았다가 추락하는 비행기처럼// 그가 나를 고속으로 회전시켰을 때 모든 세상의 계기판을 버리고 딱 한 번 느낌을 믿었던 사랑, 바다에 빠져 죽는 일이었다. 궤를 벗어나 한없이 추락하다 산산이 부서지는 일이었다. 까무룩하게 거꾸로 거꾸로 날아갈 때 바다와 별빛이 올라붙는 느낌은 죽음 직전에 갖는 딱 한 번의 황홀이었다.//

입이 큰 모녀 / 최문자
시간을 달라고 하던 어린 딸에게/ 돈을 주었다/ 천 원짜리 한 장 들고/ 울려고 하다말고 학교로 가던 딸// 시간을 달라고 하면/ 돈을 주는 딸/ 만 원짜리 한 장 들고/ 울려고 하다말고 마트로 간다// 우리는 입이 컸었는데/ 꿀꺽거리며 패트병으로 하나쯤/ 서로를 단숨에 들이켜고 싶었는데/ 너무 뻣뻣한 종이/ 너무 목마른 지폐로/ 목을 축이고/ 눈물 어린 눈을 가리고/ 둘 다 학교로 갔었다// 시간은 참지 못하고/ 우리를 들이마시고/ 우리는 시간의 뱃속에 들어가/ 그 뒤틀린 내장을 지나는 동안// 커피 한 잔을 타서 반씩 나누고/ 마들렌 과자봉지를 뜯어놔도/ 잠깐만, 잠깐만 딸은 외출하고/ 모래밭에 혼자 남는다// 우리는 입이 컸었는데/ 큰 입에서 슬슬 나오던 타액처럼/ 하고 싶은 말이 혀 밑에 그렇게 고였었는데/ 그래서 죽어라고 목말랐었는데/ 시간의 生木 자른 자리/ 모래만 수북하게 남아 있다//

청도, 방음리에 듣다 / 최문자
아침이면 동촌 할머니 콩밭 푸른 콩잎들 깨끗한 햇살 한줌 놓치지 않으려고 쑥쑥 손바닥 펼치는 소리 들었습니다.// 한낮 가득 옥양목玉洋木 흰 빨래 속 맑은 물기가 뽀도독 뽀도독 마르는 소리 들었습니다.// 저물 무렵 그대와의 저녁밥상을 위해 맑은 샘물을 길어 담근 쌀들이 편안하게 불어나는 소리 들었습니다.//

보통리 저수지에서 / 최문자
보통리 저수지를 핥으며/ 웅크렸던 봄안개 저리로 건너가면,/ 생풀잎이 푸릇푸릇 들춰지듯/ 나는 말할래./ 아프면 아프다고 말할래./ 당신 때문에/ 고통이 이만큼 부어올랐다고/ 흉터까지 그냥 내보일래.// 지워지지 않는 건/ 안 지울 거라고 나는 아예 말할래./ 살아남은 종소리처럼/ 아직도/ 지울 수 없는 생생한 물들이/ 보통리 가슴에 이렇게 갇혀 있다고 나는 말할래.// 아무리 바짝 옹쳐매도/ 독하게 풀어지는 매듭처럼/ 풀릴 건 다 풀리더라고/ 나는 말할래./ 바짝 엎드린 마음끝이/ 너풀너풀 실밥 풀려/ 보통리 물아래 그립게 빠져 있다고/ 나는/ 말할래.// 다시 아랫 마을로 내려갈/ 냉랭한 물을 지켜낸 땅/ 보통리의 쓸려가는 삶을 놔두고/ 물안개의 살갗이 슬금슬금 당신처럼 물러나도/ 나는 쓰디쓴 알약을 삼키듯/ 울음 참지 않을래.// 보통리 저수지 뚝길로 나가/ 휘어드는 안개 고랑에 눈물 쏟다가 목이 쉬면/ 내가 누구인지 모르게/ 낯선 옷 갈아입고/ 그대에게 가볼래./ 저버린 분실물을/ 다시 찾은 듯한 기쁠 그대에게//

​페루 살리네라스 / 최문자
안데스산 깊숙한 계곡/ 깍아지른 듯/ 여차하면 천길 낭떨어지로/ 떨어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가파른 산길을/ 무서움에 눈을 질끈감고/ 비명을 날리며/ 손에 땀을 쥐고 버스를 타고가면/ 계단식 밭처럼 만들어진 신기하고/ 놀라운 소금밭이 있다// 잉카시대부터 만들어졌다는/ 소금밭은/ 지각변동으로 바다가 육지로 되어/ 지하에서 용출되어 흐르는 물을/ 작은 수로를 통해 밭으로 흐르고/ 가두기를 하여/ 햇빛에 말려 천연소금을/ 만들어낸단다// 고산지대에 사람이 살아가기도/ 힘든데/ 염전을 만들어 소금을 생산해 내는/ 잉카인의 소금에 비췬 반짝이는 삶의/ 지혜가 놀랍다/ 밭 언덕에도 좁은 길 옆에도/ 태양이 증발해간 자리에/ 눈물자욱같은 소금이 붙어있다/ 살짝 떼어 맛을 본다/ 짭쪼롬하다// 잉카인의 얼룩진 눈물인가/ 수천년의 응축된/ 하얀 고독의 응어리//

닿고 싶은 곳 / 최문자
나무는 죽을 때 슬픈 쪽으로 쓰러진다./ 늘 비어서 슬픔의 하중을 받던 곳./ 그 쪽으로 죽음의 방향을 정하고서야/ 꾹 움켜 잡았던 흙을 놓는다.// 새들도 마지막엔 땅으로 내려온다./ 죽을 줄 아는 새들은 땅으로 내려온다./ 새처럼 죽기 위하여 내려온다./ 허공에 떴던 삶을 다 데리고 내려온다./ 종종거리다가/ 입술을 대고 싶은 슬픈 땅을 찾는다.// 죽지 못 하는 것들은 모두 서 있다./ 아름다운 듯 서 있다./ 참을 수 없는 무게를 들고/ 정신의 땀을 흘리고 있다.//

팽이 / 최문자
세상이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하나님,/ 팽이 치러 나오세요/ 무명 타래 엮은 줄로 나를 챙챙 감았다가/ 얼음판 위에 휙 내던지고, 괜찮아요/ 심장을 퍽퍽 갈기세요/ 죽었다가도 일어설게요/ 뺨을 맞고 하얘진 얼굴로/ 아무 기둥도 없이 서 있는/ 이게,/ 선 줄 알면/ 다시 쓰러지는 이게/ 제 사랑입니다 하나님//

얼룩말 감정 / 최문자
재가 된 그를/ 북쪽으로 가는 거친 파도 위에 뿌렸지만// 그는 익사하지도 떠오르지도 않았다// 죽음은 아무래도/ 내게 잘못 보내주신 낯선 짐승// 도심 어느 골목에 멍하니 서있는 얼룩말 한 마리// 그가 없는 밤이 지나가면/ 밤이 왔다// 우리만 모두 살아있는 새벽/ 내다버린 유품들이 비를 맞았다// 죽음은/ 한 장을 넘기면 또 한 장의 털이 다른 가슴// 무턱대고 감정을 만드는 모조 같은 하양과 검정/ 부스럭거리며 살아서 온다// 전에는 닳도록 시만 썼는데/ 시에서 한 사람을 빼는 일// 안보일 때까지 깜빡거리는 흑백의 잔등이다// 검었다 하얘졌다 하는 심장 사이/ 하는 수 없이 숫자로 가는/ 눈물투성이 초침 사이// 내일 켜질 불빛은 또 다른 검정// 내가 아닌 그도 아닌/ 이것은 어떤 잠일까// 스칠 때마다 슬픈 소리가 났다// 세상은 언제부터/ 나를 마구 읽어내는 격렬한 독자가 되었나//

죄책감 / 최문자
하나님이/ 강둑에 세워둔 표지판/ '낚시 금지'/ 하나님이 말갛게 씻어놓은 죄를/ 이미 용서받은 물고기들을/ 밤새워 내가 끄집어올립니다/ 비린내 진동하는 날밤 새우며//

밥의 오해 / 최문자
밥은/ 자기가 중심인 줄 안다/ 밥 없으면 시(詩)도 없는 줄 안다/ 끼니를 거르는 순간, 시보다 중심에 서는 밥/ 그래도/ 밥에서 시(詩)가 태어났다는 소문은 없다/ 밥에서 시(詩)로 몸을 기울일 때/ 주린 내장에서 시(詩)가 자맥질한다던 어느 시인/ 배고픈 휘파람 불다 쓰러진 사람// 어떻게 알아낸 것일까?/ 잔뜩 밥을 퍼먹던 수저는/ 듣기만 해도 시(詩)가 죽어간다는 걸/ 오해 안 풀린 밥이 웃고 있다/ 시와 뒹구는 시인을 보고//

정거장 / 최문자
강 건너 저 편/ 내 철없는 정거장에/ 기차 한 대 멈춰서 있었다/ 긴 가을 건너/ 아무렇지도 않게 내게 도착한 기차/ 가슴까지 밟고 서 있다가/ 슬금슬금 떠나고 나니/ 번갯불로 바퀴를 껴안았던 레일/ 쓰러져 울다 지쳐 잠들었다/ 들꽃 한 무더기가/ 피다 흔들리다 흠뻑 비를 맞는 곳/ 강 건너 저 편/ 철없는 내 자리에/ 싹을 못내는 검은 침묵들을 눕히고/ 새로 레일을 놓는다/ 안개 낀 가슴/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며/ 들이닥친 기차를 위하여//

서부역 / 최문자
옛날에는 동쪽에서 그를 기다렸다./ 난해한 책을 끼고 그가 내려오던 계단을 향해 서있었다/ 지금은 세상 전부가 서부/ 없어진 방향이 그리웠다/ 사랑의 절반은 반대 방향에서 기다리는 것/ 자작나무 숲길을 끝까지 걸어가도 못 만나는 것/ 피고도 남은 꽃 위 바람 어디쯤/ 한 번도 태우지 못한 생풀 타는 연기 오른다/ 매워서 잡지도 놓지도 못하고/ 눈물로 쓰라렸던 얼굴/ 지금은 서부역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

구름 애인 / 최문자
한 남자를 사랑했다// 짐승 안에 들어 있는 구름 같은 남자// 짐승에게 구름 같은 게 있을까 싶지만/ 뒤집으면 구름이 펄럭거렸다// 짐승이 뭉게뭉게 달아나던 미루나무 끝까지/ 까맣게 멀리서 소낙비가 오고 있었다/ 구름이 바늘처럼 따갑게 쏟아졌다// 구름을 만지고 싶어서/ 어쩌다 한 마리 짐승을 사랑했다/ 구름 같은 짐승/ 설산에 가끔 출몰한다는/ 털이 따가운 짐승// 짐승에게 눈물 같은 게 있을까 싶지만/ 뒤집어보면/ 짐승의 털이 흠뻑 젖어 있었다// 젖은 몸으로 설산을 기어오르는/ 반투명 구름의 기쁨// 자작나무 숲에/ 구름 같은 짐승이 살았다/ 따가운 사랑이 있었다//

구름과녁 / 최문자
흐린날/ 그녀의 구름 사격은 시작된다// 그녀가 뜬구름 잡는 얘기만/ 하는 것은 구름 때문이다// 그녀가 명중시키고 싶은 것들은 모두/ 허공에 떠있었다// 그녀는 매일 허공을 조준했다/ 그때마다 뜬구름이 흘러와 표적의 얼굴을/ 가렸다.// 구름이 가려도 과녁은 과녁이다// 흐린날./ 탕탕탕 구름을 쏜다// 구름들이 팍팍 쓰러진다/ 닿는 것은 너무 위험한 구름의/ 유탄들// 그녀는 매번 구름만 잡는다// 다 깊은 하늘속으로 들어간/ 그녀의 표적들//

첫사랑 / 최문자
언젠가/ 믿지 않았던 말/ 그 말이 갑자기 믿어진다.// 온몸에/ 푸른 녹이 잔뜩 슬은 말.// 오늘 밤/ 녹을 닦아내고/ 날을 세워/ 그 말에 새롭게 찔리우고 싶다.// 처음부터/ 뿌리에 불을 가지고 있던 말// 항상/ 엉기던 생체/ 그 말에선/ 푸성귀 냄새가 난다.//

사랑의 모든 것 / 최문자
슬픔의 마지막 페이지는 살구색/ 후일/ 우리는 살굿빛을 이해했네/ 훌쩍거리는 동안/ 증발하지 않는 눈물과/ 달려 나간 말발굽/ 살구가 뭉개진 더 진한 살굿빛/ 풀처럼 조용했지만/ 서로가 서로를 따 들어가다/ 이내 살구를 다 떨군 살구나무/ 왼쪽 뺨을 살구에 대고/ 나무 아래 쪼그리고 있을 때/ 천천히 나를 떠나고 있었네/ 오래전 죽은 살구들이/ 둥둥 떠가는 뭉클뭉클한 살구들이/ 후일/ 우리는 살구 맛을 이해했네/ 슬픔의 혀로.//

미움 / 최문자
그는 온 몸이 칼이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칼이 된다./ 그를 품는 자도 칼이 된다./ 세상은 물처럼 돌아가도/ 그는 얼어서 흐르지 않는 물이 된다.// 그가 있어서/ 세상은 늘 얼룩지고/ 그가 있어서/ 비명은 물소리처럼 가깝다.// 그는 불면증이라 잠들 수 없다./ 저 홀로 누워/ 함부로 눈뜨고/ 깊은 병 앓다가/ 흐를 피의 깊이를 지니고 있는/ 사시사철 영롱한 칼이다.//

거짓말을 지나며 / 최문자
이번 여름에도 거짓말이 슬쩍슬쩍 나를 지나갔습니다/ 동방은 어디인가?/ 추운 동방으로부터 왔다고 들었습니다/ 곧 허물어질 바람 위에 지어졌습니다/ 힘이 아니라/ 점이 아니라/ 선이 아니라/ 장미꽃 장면으로/ 펜스를 넘고/ 꽃잎을 접고/ 나에겐/ 거처가 없어요라고 말합니다// 거짓말에게서 동방의 가루약이 밝혀진대도/ 내 혀끝은 서쪽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아주 잠깐 믿었습니다// 거짓말은 오렌지색/ 나직한 뱃고동 소리로 구슬프게 부릅니다/ 흐린 연필 끝으로/ 꽃을 그리며/ 나에겐/ 망치가 없어요/ 톱날이 없어요/ 위함이 없어요라고 말합니다// 한여름 밤/ 여름 마지막 부분에서/ 뭉게뭉게 지나가는 거짓말/ 누군가는 시를 쓰고/ 누군가는 잠에서 깨고/ 누군가는 서쪽으로 바람을 보냅니다// 여름에는 거짓말이/ 동방으로 난 창문으로 마음놓고 드나듭니다//

나라고 할 것인가 / 최문자
아주 천천히 손을 씻는다// 크고 따뜻했던 손이/ 때때로 검정 색이야/ 피를 흘리고 가끔 붕대를 감고// 봄밤 연인의 손을 잡다가 너무 많이 울어본 손이/ 여러 개로 손을 쪼개고 어느 한 조각에 잠긴다// 대낮에는 내 손이 아니다/ 나를 떠난다/ 나를 이긴다/ 풋과일처럼 새파랗고 단호하게 다른 손을 잡는다/ 눈을 감고 있으면 뻐근했다/ 하루가 꿈틀거렸다/ 뭔가를 할퀴고 만지다가 깊은 밤에야 돌아왔다/ 잔을 돌리며 우리는 아무도 그것을 묻지 않았다// 한꺼번에 몇 개의 손이 되려 하는 손에게/ 왜 피가 나느냐고 묻지 않았다/ 아아, 하얗게 자고 싶어/ 얼굴 같은 손이 나에게 말했다//

노랑나비 / 최문자
사랑은/ 내게 마지막 남은 들판이다./ 아직도 노랑나비 비릿한 속삭임으로 꽉 차 있다./ 들판에 서면/ 물결 같기도 하고/ 눈물 같기도 한 노랑나비가/ 들풀의 정강이에서 글썽이고 있던 들판이다./ 울지도 않고/ 뒤돌아보지도 않고/ 날아가던 노랑나비 들판.// 사랑의 문장을 노랗게 새긴 꽃잎을 들판에 놓았었다./ 홀라당홀라당 허물을 벗어놓고/ 문장을 건너뛰던 노랑나비/ 메두기 다리로 뛰어가던 노랑나비 들판// 내가 쓴 시에서/ 노랑나비는 십 년 이상 날아다녔다.//

못의 도시 / 최문자
쇠와 섞이고 싶은 살이 있다./ 더 깊이 찔리고 싶은 상처가 있다./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고 싶은 영혼이 있다./ 온몸을 찔려도 성이 안 가시는 쾌락이 있다./ 서울에선 못이 잘 팔려나간다./ 나날이 수요가 급증한다.//

핀의 도시 / 최문자
이토록 외로운 도시/ 핀의 도시에 삽니다// 핀 하나로 눈물을 만들 수 있습니다// 핀은 꽃이 아니라서/ 꽃을 모르고/ 둥근 것을 모르고/ 꽃까지 가려면 얼마나 여러 번 부러져야 할까요// 핀 하나로/ 살아 있는 마음/ 사라지는 마음/ 맨손의 마음/ 흩날리는 마음/ 생피를 흘립니다// 짐승의 살을 꿰매던 핀으로 나를 마구 꿰맬 때// 밤에도 뾰족하게 서 있는 말들을 생각했습니다/ 무릎이 넘어가도 마음을 가지고 걸었던 붉은 말/ 말들은 둥근 것에서 출발하여 흉터에 닿습니다// 말들이 돌아오면/ 슬퍼진 부분에서 나와/ 꼬리를 흔들고 싶어집니다// 밤에는 말 울음소리가 들립니다/ 유난히 슬픈 것에만 작동하는 후들거리는 말의 목소리/ 핀 속으로 들어간 말의 몸들은 아직도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얼마나 아파야 할까요// 모르는 사이/ 꽃은 피고// 모르는 사이/ 핀은 가라앉겠지요//

비누들의 페이지 / 최문자
눈물이 나는 건/ 슬픈 시를 쓰는 건/ 모두 비누 때문이지/ 소량의 물에도 사라지는 거품이 그리는 그림/ 불행한 불확실성 때문이지// 죽어도 거품이 일어나지 않던 그 해/ 논문 두 편 쓰고/ 두 번째 아이를 지우고/ 가능하지도 결코 불가능하지도 않았던/ 빡빡한 영혼으로 누구를 사랑한 적 있다/ 끊어진 계단/ 무릎을 다치며/ 귀뚜라미 두 마리처럼/ 유리문에 숨을 불고 작은 소리를 내다 죽는 일이었다/ 나를 모르는 자와/ 그를 모르는 내가/ 비누의 페이지로 가서/ 거품으로 말을 나누고/ 장롱 깊은 곳에 그 말들을 넣어 두었지만/ 말조차 깊은 비누였던 것// 깊은 서랍을 열고/ 쓸데없이 남은 것들을 뒤적이다 그때의 분홍 비누 한 조각을 찾아냈다/ 지금은 어떤 거품을 만들지 고민하지 않는다// 얼마나 달렸을까/ 어떤 후회스러운 청춘이 지나간 미끄러운 길로/ 한 불확실한 거품을 통해/ 그 해 겨울/ 끝없이 폭설이 내리고/ 거짓말처럼 나의 모든 비누들은 눈 속에 잠들었다//

소나기 / 최문자
선바위역 근처에서 소나기를 만났다./ 물이 무작정 손 발 다 씻어 줬다./ 세상의 것들이 모두 우산을 폈다./ 젖을 수 없는 부위에다 우산을 씌웠다./ 묽어진 세상에 더 물을 붓는다./ 없었던 것들이 떠올라 비를 맞고 있다./ 풀들도 제 뿌리에서 나와 아무데로나 가고 있다./ 어떤 것의 발자국도 남아 있지 못하고 흐르고 있다./ 그 사람만 아직 가만히 있다./ 당분간 젖지 않을 양/ 나에게 마른 풀잎으로 바스락거린다./ 우산을 쒸우지 않아도 젖지 않는 마른 풀이 있다.//

백지유감 / 최문자
아버지,/ 흰 종이처럼 살지 못합니다./ 섞이고 사무치는 무늬가 없으므로/ 모든 색깔을 깍아낸벌거숭이 그 몸뗑이 구석구석/ 알 한 번 낳아본 적 없는 숨을 곳 없는 하양/ 아버지,/ 흰 종이는 녹지 못하는 소금입니다./ 한번도 멈추지 않고 소금이 되려고/ 갈수록 캄캄한 세상의 물 속에/ 깊숙히 가라앉아 본 적도 없는/ 한 번도 짠맛을 버리지 못하는/ 흰 종이는/ 흰빛을 무기처럼 숨기고/ 밤새 앓는 소리내는 짜디짠 위선입니다./ 어느 날 아버지,/ 부끄럼도 없이/ 걷잡을 수 없게/ 살 냄새 풍기면서도 흰 종이처럼 짭짤하게 살고 있다는/ 제 얘길 들으신다면/ 아버지,/ 그건 헛소문입니다./ 무서운 헛소문입니다.//

어머니 / 최문자
알고 있었니/ 어머니는 무릎에서 흘러내린 아이라는 거/ 내 불행한 페이지에 서서 죄없이 벌벌 떠는 애인이라는 거/ 저만치 뒤따라오는 칭얼거리는 막내라는 거/ 앰불러스를 타고 나의 대륙을 떠나가던 탈옥수라는 거// 내 몸 어디인가 빈 방에 밤새 서 있는 여자/ 지익 성냥불을 일으켜 촛불을 켜주고 싶은 사람// 어머니가 구석에 가만히 서서/ 나를 꺼내 읽는구나// 자주 마음이 바뀌는 낯선 부분/ 읽을 수 없는 곳이 자꾸 생겨나자 몸밖으로 나간 어머니/ 알고 있었니/ 기도하는 손을 가진 내 앞에 양 한 마리//

재료들 / 최문자
어머니를 꽉 쥐면/ 주르르 눈물이 쏟아진다/ 주원료가 눈물이다// 사랑을 꽉 쥐어짜면/ 쓰라리다/ 주원료가 꺼끌꺼끌한 이별이다// 매일매일 적의를 품고 달려드는 삶을 쥐어짜면/ 비린내가 난다/ 주원료가 눈이 어두운 물고기다// CT로 가슴을 찍어보면/ 구멍 뚫린 흰 구름 벌판/ 주원료가 허공이다//

여름 산책 / 최문자
일 년 중/ 한 보름 정도만 빼고 나머지는 추웠다./ 지구의 가슴이 점점 뜨거워져서/ 빙벽이 녹아 무너져내린다는데/ 오랫동안 여름을 보지 못했다./ 나는 여름 동안 어디 있었나?/ 한여름 문 열고 나와본다./ 깊은 밤/ 군데군데 뭉쳐 있던 몸속의 얼음/ 소름 돋아 오슬오슬 떨려오던 장기들/ 같이 따라 나선다./ 활활 타오르는 땡볕 아래를/ 얼음을 품고 걷는다./ 꽃인지 나무인지 분간 못하게/ 온몸을 쥐어짜며 푸르기만한/ 푸르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시린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걷는다./ 한여름 속에 살고 있는/ 이 은밀한 한기/ 이 추위 깊숙이 저 아래/ 어쩌면 내가 있으리라./ 갑자기 여름이 되지 않는/ 찬우물 같은 내가/ 순간순간을 진저리쳐대야 바뀌던 나를/ 붙잡고 헉헉대며 이미 다 써버린 여름/ 소낙비처럼 쏟아지다 뒤틀린 땀방울/ 씻어주는 이 없어 얼고 또 얼던 얼음 위의 얼음/ 어느 장기 옆일까?/ 어느 마음 옆일까?/ 나를 버티게 하던 울툴불퉁한 빙벽이 서 있는 곳/ 팔보산 정상까지 걸었다./ 언젠가 그와 같이 산을 걷다가/ 추위 깊숙이 웅크린 얼음 서로 만져볼 수 있다면/ 이 푸른 공기로도/ 어쩌면 내가 녹아 있으리라./ 눈물처럼.//

지상에 없는 잠 / 최문자
어젯밤 꽃나무 가지에서 한숨 잤네/ 외로울 필요가 있었네/ 우주에 가득찬 비를 맞으며/ 꽃잎 옆에서 자고 깨보니/ 흰 손수건이 젖어 있었네/ 지상에서 없어진 한 꽃이 되어 있었네/ 한 장의 나뭇잎을 서로 찢으며/ 지상의 입들은 여전히 싸우고 있네/ 저물녘 마른 껍질 같아서 들을 수 없는 말/ 나무 위로 올라오지 못한 꽃들은/ 짐승 냄새를 풍겼네/ 내가 보았던 모든 것과 닿지 않는 침대/ 세상에 닿지 않는 꽃가지가 좋았네/ 하늘을 데려다가 허공의 아랫도리를 덮었네/ 어젯밤 꽃나무에서 꽃가지를 베고 잤네/ 세상과 닿지 않을 필요가 있었네/ 지상에 없는 꽃잎으로 잤네//

쇠 속의잠 / 최문자
와우리 성애원 옆 금곡계곡엔/ 벌써 십년 넘게/ 쇠와 싸우는 풀들이 있습니다/ 보통리 그 넓은 벌판 다 빼앗기고/ 벼두리로 밀리고 밀리다/ 페차장 무쇠덤이 속까지 떠밀려와 살고 있습니다/ 쇠와 살 대고 살면서도/ 쇠와 썩이지않는 강아지풀 하나/ 지난 봄에 살해당한/ 풀의 아이를 배고/ 죽은 엔진 뼈대에 기대어 잠이 들어 있습니다//

다른 빵 / 최문자
미지근한 것들은 불길해 매일매일 이곳에서 미지근한 빵을 먹으며 지냈다 미지근한 욕조의 물처럼 미지근한 기도처럼 그 날 데모 군중 끝에서 미지근한 얼굴로 따라가건 어떤 시인처럼 가장 늦게 남아있는 나의 온도, 무슨 정말인 것처럼 날마다 멀리서 나에게 오고 있다 이렇게 생각이 다른 빵을 먹고 내 시는 멸망할 수도 있어 미지근한 것을 꽉 깨무는 순간 세상은 맹세처럼 시고 달고 짜고 매운 혀가 넘쳐난다 저마다 다른 빵을 찾는다 세상의 혀는 왜 자꾸만 정확해지는걸까 기다리지 않아도 돌아오는 생일, 그것조차 나의 것이 아닌 것 같은 모서리 없는 미지근한 빵 생일 축하케익을 자른다// 다른 빵을 먹고 섬광이 되고 싶다/ 미지근함으로부터 탈구된 단 한 줄의 시라도//

정전기 / 최문자
건기인가 봐요 우리,/ 새들도 입안이 마른다는./ 바짝 마른 말로 통화하고 있잖아요 지금,/ 마른 대궁만 남은 당신 말에/ 나는 없는 미련 지지직거리며/ 타는 시늉 다 해보지만/ 갑자기 들러붙어요/ 말과 말 사이/ 부슬부슬 떨어지는 말의 먼지들 뿌연데/ 들리죠/ 우리 언어가 물 마르는/ 소리 따가워요/ 메마른 통화/ 갈라진 언어의 살 사이로/ 피 내비쳐요/ 건기인가 봐요 우리,//

2014년 / 최문자
2013년 다음에 2015년이었으면 좋겠어// 오늘도 어김없이 건초 더미 사이로 2014년이 보인다// 2014년의 허리는 푹 패여 있다/ 죽음의 지푸라기가 날리고/ 때때로 깊어진다/ 오래된 우물처럼// 집에 돌아왔을 때/ 남자는 죽어 있었다// 삶과 죽음 어느 것이 더 무서운가/ 죽음은/ 죽자마자 눈을 더 크게 떠야 할 삶이 기다리고 있다// 남자는 뭉텅뭉텅 사라지는 중이었고/ 나는 왼쪽 폐 반을 자르고/ 진통제 버튼을 계속 누르다가/ 살아나는 게 무서워 함부로 하나님을 불러냈다// 매일매일// 새까만 풀씨가 날아와/ 물에 젖고/ 차가운 흰 꽃이 피고// 미숙하고 슬픈 기사처럼 함부로 시계 바늘을 돌렸다/ 절벽과 산맥을 넘다 밤늦게 돌아와 미래가 적힌 달력을 찢었다//

푸른 고통 / 최문자
괴로웠으리라./ 뿌리보다 더 괴로웠으리라./ 희망처럼 푸르러야 했으므로/ 시퍼렇게 멍울진 허세로/ 꼭 한여름만큼만 연인이어야 했으므로/ 얼마 안 있어/ 사랑이 멈출 나무를 잡고/ 더 괴로웠으리라.//

밤에는 / 최문자
얼마나 낮이 무거운지 새들은 밤에 죽습니다 밤은 가끔 내 맘에 듭니다 증거 없이도 믿어집니다 밤에는 눈을 부릅뜬 물고기를 때려잡지 못해도 와인 잔을 들고 취해 본 적 없어도 비틀거리다 자주 웃고 그리우면 눈물 핑 돕니다 이유 없이 한 계절에 몇 번씩 그가 나를 모른 체 해도 밤이 와 주면 밤의 가게처럼 철문을 닫고 사계절 검은 의자에서 나의 실패담을 썼습니다 아직도 나는 별빛이 모자랍니다 낮이 얼마나 쓰라린지 벌레처럼 밤에 맘 놓고 웁니다 낮에 아팠던 자들의 기침 소리가 들립니다 낮 동안 너무 환한 재를 마시고 밤에 심한 기침을 합니다 쿨룩쿨룩 참았던 낮이 불쑥불쑥 튀어나옵니다 피가 섞여 나옵니다 어떤 기도가 이 밤을 이길까요//

무음의 밤 / 최문자
딩신의 사랑은 소리가 안나/ 무음에서 나는 무쇠 냄새/ 무음으로 진열되어 있는 시간은 달려오다 사라지거나 죽어버리는 것들이 있어요// 오늘은 당신을 만나러 가려한다/ 어쩌나 나는 어제까지 자갈밭 근처에 살던 사람 그리워하는 만큼 나는 자갈 구르는 소리가 나는데/ 소리는/ 나일까 적일까/ 무음의 소매를 잡아당기다 슬픔은 엎어졌다/ 오랫동안 자갈은 조금씩 깨지고 어쩔수 없이 소리가 없어지고// 당신 옆을 지날 때/ 무음은 꿈이라 생각하자// 당신은 자갈밭도 꽃밭처럼 걸어온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무음으로/ 풀처럼 흔들리면서/ 조금도 찢어지지 않는다/ 걷고나면 가슴이 더 두꺼워지는/ 당신의 사랑은 곧 큰 무쇠가 될 겁니다// 수없이 주고받은 무쇠 냄새// 별 없는 밤/ 풀이 안 보이는 밤/ 무쇠에다 등을 기대면/ 누가 더 슬픈가//

시계의 아침 / 최문자
가끔 ‘정의’라는 말/ 두꺼운 텍스트 속에서 읽는다// 내게 시간이 잘 도착하는 시계가 있다/ 내 것 아닌 감정으로 시계는 가고 있다 나는 그때 일을 시계에게 말하려고 했다/ 시계의 얼굴이 하얗다 질려 있다// 내가 나쁜 손을 잡으면 시계가 죽었다/ 나를 발견하듯이 깜짝 놀라며 시계를 발견한다// 시계를 들여다본다/ 12시였다// 지난 토요일도 시계는 한 번 죽었었다/ 죽음 후, 숫자 1에서 12개의 뼈가 휘어져 있다/ 숫자 2는 1을 떠안고 까마득한 자전의 길을 떠난다 네가 나였으면 좋겠어, 네가 그냥// 너였으면 좋겠어 두 가지 감정의 바늘이 갈 길 가면서 정하지 못하고 있다// 숫자 1과 숫자 2 사이 좁은 허공에서 조금 늦거나 조금 빠른 시간이 웃고 또 웃는다 한/ 때 나는 자주 웃던 무례한 시계를 강변에 버렸다// 시계를 고치러 간다// 이번 여름에도 슬쩍슬쩍 나를 지나가던 시계의 죽음/ 죽음이란 말은 어느 지붕 밑에서 우연히 자다가 깨어난 참새처럼 어감이 부스스하다/ 건물 담벼락에 ‘정의’라고 쓰고 밑줄까지 긋던 흰민들레 한 송이 같던 제자가 갑자기 떠오른다// 가끔 그들의 ‘정의’는 장미꽃 장면으로 펜스를 넘고 새콤달콤한 체리주스를 찍어 편지를 써/ 보낸다 선생님, 들립니까 들립니까? 잠깐 시계 안에 있다가 바로 시계 밖으로 나간 이 실종을/ 친구야, 어찌하니? 그 많은 민들레가 앉을 의자들이 텅텅 비어 있다// 거짓말에게서 흰 가루약의 정체가 밝혀진다 해도/ 꽃 같은 시간 몇 개가 흐린 연필 끝으로 꽃을 그려준다/ 나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사랑에나 빠질까 봐/ 6이 9가 되는 무분별한 경우처럼// 그가 정의롭다는 말/ 그가 정오를 사랑한다는 말/ 너를 만지다 나를 만지고 끝으로 마른 흰 수건 끝을 만진다// 이 아침 나는/ 시계를 찾으러 간다//

여자와 콩나물 / 최문자
헌 시루에 불린 콩을 넣고/ 여자를 기른다/ 그릇 안에/ 잡힌 여자는/ 싹이 난다/ 여자는 보이지 않고/ 옆구리에서 움트는/ 흰 뿌리/ 여자는 말없이 육탈한다/ 콩나물처럼 그릇 위로 자라난다// 여자가 자라나는 것은/ 울지마 울지마 하면서/ 바가지로 눈물을 퍼주는/ 물의 테러/ 쓸데없이 키가 크는/ 이 비린내 나는 성장을/ 가느다란 우울을/ 콩과 콩 사이를/ 그 사소한 구멍들을/ 오해와 이해 사이를/ 자객처럼 나타나/ 살아갈 발원수까지/ 깨끗이 내려주는 테러리스트/ 물/ 푸푸/ 물에 빠져 죽을 뻔해야/ 콩나물이 되는/ 여자.//

휘파람 / 최문자
암병동 베란다에서 한 청년이 휘파람을 불고 있다/ 저런 휘파람에 취해서 휘파람을 따라한 적이 있다./ 길을 걷다가 발을 멈추고/ 휘파람 때문에 휘파람 속으로 들어갔다가/ 휘파람에서 나와보니/ 간다는 말도 없이/ 악보와 함께 휘파람은/ 바다를 건너갔다./ 빈집 같은 몸에서 몇십년 둥둥 떠다니던 휘파람 소리// 지금,/ 췌장암 말기 청년의 심장에서 다시 그 소리가 난다/ 어둠이 될 그 높은 음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휘파람 숨 마디마디 피가 고인다./ 아무리 닦아도 고이는 피같은 음절/ 지붕으로 보이는 암병동 베란다/ 뭉텅뭉텅 살아있는 시간들이 빠져나간다./ 허공에 걸려있다 죽음의 음역.//

나무고아원* / 최문자
지금쯤/ 노을 아래 있겠다./ 그 버려졌던 아이들/ 절뚝거리는 은행나무/ 포크레인에 하반신 찍힌 느티나무/ 왼팔 잘린 버즘나무/ 길바닥에서 주워가 기른/ 신갈나무, 팥배나무, 홍단풍/ 지금쯤/ 찬 눈 맞으며/ 들어올린 팔뚝 내리지도 못하고/ 검단산 바로보고 섰겠다.// 한여름/ 맑은 쑥대 큰 기름새 사이로/ 쌀새와 그늘사초 사이로/ 불쑥불쑥 꽃 피던/ 은방울꽃 소곤대는 사이로/ 버림받고 엎어졌던 아이들/ 지금쯤/ 바람 부는 솟대길 지키며/ 그럭저럭 키만 커서/ 주워다 붙인 이름표 달고/ 지금쯤/ 표정 순하게 강을 보고 있겠다./ 창백했던 시간을/ 강물에 씻으며//
* 나무고아원: 하남시에서 한강 둔치에 만들어놓은 나무들의 공원. 개발공사 때 버려진 나무들을 옮겨다 심어 가꾸고 있다.

염색 / 최문자
색깔도 뿌리를 갖고 있네/ 서로 부둥켜안는다고 물들지 않네/ 누가 누구를 염색했다는 말/ 한꺼번에 지문이 사라지는 일이네/ 사람은 살갗이 아니네/ 역사와 또 다른 하늘이 있네/ 푹푹 삶아도/ 구름은 폐기되지 않네/ 불온한 물감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쳐들어오네/ 얼굴은 젖지만/ 하늘은 적시지 않네/ 딱, 한 번 참으로 위험했네/ 갈기갈기 실뿌리까지/ 막무가내로 물들고 싶은 적이 있었네/ 자욱한 물감이 밀려와 무릎뼈에 고일 때/ 흰 뺨에 뜬 붉은 구름/ 아프게 문질러도 지워지는 건 아주 조금이었네/ 하나의 영혼이 아주 다른 또 하나의 영혼 속으로/ 염료가 되어 드나들었다는 말/ 가장 외로운 일이네/ 가끔씩 그에게/ 황홀한 색깔을 빌려 오는 나/ 순백의 양말을 벗어 놓는 일이네/ 물들어 보일까 봐 눈을 꼭 감네//

 



최문자 시인
194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성신여대 대학원 졸업(문학박사)했다. 1982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귀 안에 슬픈 말 있네』 『나는 시선 밖의일부이다』 『울음소리 작아지다』 『나무고아원』 『그녀는 믿는 버릇이 있다』 『사과 사이사이 새』 『파의 목소리』 『우리가 훔친 것들이 만발한다』가 있고, 시선집 『닿고 싶은 곳』이 있다. 한성기문학상, 박두진문학상, 한국여성문학상, 한국시협문학상, 야립대상, 신석초문학상, 한국서정시문학상, 한송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협성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동대학 총장을 역임했으며, 배재대학교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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