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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강연우 시인

부흐고비 2021. 11. 14. 08:26

 

 

 

 

 

강연우 시인
2017년 계간 《시와 사상》으로 등단

 

 

 

원고지의 윤리 / 강연우
어머니가 일기장을 원고지로 내어주면서부터 나는 일기를 쓰지 못 하는 날이 많아졌다 아침 빈 원고지에 어머니에게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는 일조차 일기가 되지 못했다.// 가로 세로가 만든 빈칸, 다음 칸를 넘어가기 전 세로로 놓인 선분을 바라보며 눈 내리는 가자 지구 라파*의 밤을 생각한다.// 들어서지 못할 것은 없다 그러나 그곳을 넘어선다 해서 그곳에 눈이 내리거나 하지는 않는다 봉쇄된 지면이 멀뚱멀뚱 천장만 내다본다.// 소모품인 지우개는 비품이 되었다. 돌돌 글자를 말소해 나가는 지우개는 제 부피를 언제까지고 보존한다 연필에 들어 있는 다량의 낱말이 지우개의 부피를 들인다는 것을 안 것은 최근의 일이다 그러나 그 무게는 그냥 지우개 만큼의 무게일 뿐이다.// 빈칸에 글자들이 채워지면 원고지는 나를 중심으로 자전과 공전을 시작한다. 궤도 없는 불친절한 여정에 활자들은 쏟아지고 날아오르고 한다 지그시 오른손을 왼손으로 누르는 날이 많아진다.// 침대에 누운 밤이면 손에 난 지느러미들이 분열을 향해 새벽까지 건너간다 점멸된 가로등만이 아침에 맞는 하루의 이정표다.// 늦은 밤 나는 다시 원고지 한 장, 한 장을 넘기며 한 칸, 한 칸 글자를 적어나간다 안온하지 않은 生들을 오래도록 떠받쳐온 직선들은 생에 관한 원고지의 윤리라 믿기 때문이다.// 데면데면한 글자들이 다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걸어 나가는 밤이다.//
* 라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국경지대

자정으로 가는 희망곡 / 강연우
1// 작은 마을에 나와 집집마다의 난간을 바라보며 서 있습니다 지난 겨울이었습니다 난간을 타고 어김없이 떨어져 내리던 미래를 산산조각 난 미래들이 종종 찾아오는 봄의 몸뚱어리를 갈갈이 찢어 내고는 했습니다 음-/ 질량이 탈각된 마을이라 할까요? 마을 사람들 모두가 잘릴 반의 여백을 둥둥 떠다니고는 했습니다 흔하지는 않았지만 왕왕 중력을 구매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발목에서 발가락이 자라 날 때쯤 다시 그들은 붕-붕- 허공으로 솟아 올랐지요 땅으로 내려앉기에는 몹시도 가벼운 주머니였습니다.//
2// 눈보라가 궁굴린 마들은 공중에서 망루가 되었습니다 망루가 된 마을 사람들 모두가 지상을 쏘아 보았지만 망루를 지나는 사람들은 마을 사람들을 두려워하거나 불쾌해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정면만을 보며 걸었기 때문인데요 사람들은 역시 정면이 좋았던 것입니다 정면은 언제나 달콤한 맛이 나잖아요?// 아이들이 골목에서 시간의 단추를 잠그고 있습니다 바람 빠진 축구공이 다리를 절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군요 어느 미래에도 풀어 헤치지 못할 단추이겠습니다.//
3// 오들도 천 개의 날개가 달리고 천 개의 얼굴을 가진 사람들이 마을 사람들을 방문했습니다 카메라와 마이크 도시락을 천 개의 손에 들고 말이지요 방문을 마친 그들은 돌아갈 시간이 되었는지 마을 사람들과 다감하게 웃으며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기근이 영광이 되는 순간이겠습니다.// 마을이 밤의 모가지에 걸려 어둠이 벌컥벌컥 달빛을 들이켜는 월 명기// 오늘 하루 안녕하셨는지요? 지금 여러분은 천 개의 귀 중 몇 번째 귀로 이 방송을 듣고 계신가요?// 이상 신길동에서 전해 드리는 자정으로 가는 희망곡이었습니다.// 자, 하나 둘 셋. 다시 자정// 0시입니다.//

 

공일空日 / 강연우
뒤척이는 몸의 가장자리마다 나무의 피가 고이기 시작한다 타공음이 아침을 타공하는 아침이다 조각난 조각들이 잘 붙지 않는다 누군가와 나누었을 어제의 말들을 떠올려 찢어진 근육들을 재단한다 얼굴의 근육들은 그냥 두기로 한다 그곳은 모래전 내가 떠난 섬이다.// 유서 같은 햇빛이 그림자를 내린다 시간을 들여 그림자에서 어제를 수습한다 어제는 내가 살아 보지 않은 오늘이다 안치된 어제로 몇 구의 시신들이 따라가 눕는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 둘 모두에게 혐의가 없다 나에게는 연보가 없다.// 다단조의 냉장고 컴프레셔 진동이 울컥 바닥으로 쏟아진다 달력의 숫자들이 쏟아진 음역으로 투신하기 시작한다.// 공일이 시작된다.//

낙타의 밤 / 강연우
아직 자살하지 않은 친구를 몇을 만났고 돌아오는 길에 돌아갈 곳을 잃었다.// 막차는 오지 않고 하릴없이 나는 스크린도어에 나붙은 詩들을 읽어 나갔다 아기자기한 관형어와 체언들이 나를 보며 윽박지르고 있을 때 옆에 서 있던 중년의 부인이 시를 읽다 나를 향해 서고는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를 바라보며 나는 내가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모든 안온함에는 잔혹함이 있다.// 좌석에 앉은 조선족 무리가 서로의 손금을 뜯어보며 전철에서 내려 집에 도착했을 때 누가 가장 먼저 울음을 터뜨릴지를 점지하고 있었다. 희희덕거리는 그들의 입술이 붉은 빛을 잃은 채였다. 궁극적으로 실패할 인간들이었다.// 전철의 혈관에서 점차 빛이 새어 나가기 시작했고 우뚝 솟은 전철이 마침내 어둠을 허리춤으로 올리고 있었다. 사방이 구멍인 서울이 치마를 내리고 있었다.// 사거리를 지나 집으로 향하는 언덕을 막 오르자 가로등 아래에서 노인 하나가 종이 박스 하나를 쌀알 스무 알로 리어카에 옮겨 담고 있었다. 노인은 나에게 바람에서 감정을 박리하는 훌률한 기술을 선보였다 길을 지나는 껑뚱한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토막, 토막으로 썰려 버려진 여행 가방으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현관을 열자 오늘도 침대에는 낙타 한 마리가 엎드려 잠들어 있었다 낙타는 움직이지 않았다. 현관을 뛰쳐나간 자신의 네 다리를 오늘도 기다리고 있었다.//

13월의 편지 / 강연우
매일 밤 엄지와 검지, 중지 사이에서 태어나고 자라는 망설임은 무릎에 접힌 주름과 같은 속죄의 순수함이겠지요. 묵상은 직선을 발명해 냈습니다. 심장이 사십오도로 누운 만년필의 끝을 향해 있는 밤 입니다.// 기도를 위해 모은 당신의 손이 투명한 물방울을 닮았습니다. 고해 같은 밑줄을 스스로 지나쳐야만 하는 일상에 물방울로 만든 쉼표와 마침표를 달아주고 싶지만 뉘우침은 고백을 낳지만, 그렇지만 모늘 나의 고백은 영원할 것만 같습니다.// 오늘밤 폭설을 이끌고 온 당신을 안습니다.// 당신이 나의 인중과 턱에 자란 수염을 손으로 가만, 훌칩니다.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나의 입술을 매만집니다. 당신이 말합니다. 수염이 많이 자라났군요. 나는 대답합니다.// 우리가 침묵해 온 시간입니다.// 앉은 나의 곁으로 면도 거품과 면도칼을 내온 당신은 내게 말합니다. 당신, 나는 준비되었어요. 그래요. 당신. 나는 말합니다.// 이제 우리가 울어야 할 시간입니다.// 나는 다시 당신을 안습니다. 당신을 흘려보내 세계의 끝, 모서리를 둥글게 둥글게 펼쳐 보일 수만 있다면,// 눈이 멈출 것 같지 않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대. 기다리다 당신이 그치면 볕을 내겠습니다.// 나의 당신에게, 잘 자요, 내 사랑.//

맨도롱 하우꽈?* / 강연우
바다가 소금기를 잃어가고/ 육지가 발자국을 잃어간다// 옴팡밭// 수선화의 비명이/ 노랗게 채록된// 바람의 억양// 기억을 되돌릴수록 시간은 너른 묘지를 갖는다// 애기 무덤에 괴인 작은 돌들의 울음에/ 나무 잎사귀가 가만, 귀를 대어주는 오후// 자분자분 햇발에 어슷 누운 그림자/ 그곳에 두 무릎을 꿇으면// 첨벙, 첨벙 소리// 동그랗게 만 등뼈도 눈물방울을 닮았다// 신열을 앓는 나의 입술로// 맨도롱 하우꽈?/ 땅 아래라고 좀 맨도롱 하우꽈?// 서리서리 말리는 둥근 혀에/ 잠시 머물다 떠난다는 한 아이의 안부가/ 달 깊은 새벽까지 오래, 오래/ 머물러 있다 가고는 하였다//
* 맨도롱 하우꽈?: 따뜻하세요? 제주도 방언

곡哭 / 강연우
마지막 칸을 남겨둔 채/ 문장은 누구도 만나지 않는다// 터빈은 멈췄고 알전구를 갈아 끼우듯 가을은 시작됐다 농담濃淡, 빛의 입자를 거느린 목적어의 성지에는 가슴팍을 쥐어뜯으며 당신이 사람을 살고 있다 당신 앞에 날카로워 당신은 비껴간다 토막이 진다 몸을 얻어 차가워지는// 사람이 태양의 자리에 달을 옮겨 놓고/ 손톱을 자른다// 사람은/ 나를 만나주지 않는다// 나는 우는 것 같다//

많아지면서 우리는 / 강연우
눈이 자주 감겼다 자주 누웠고 번번이 나는 흘러내리고 싶어 했다 이불을 덮는 일이 상처에 시간을 발라 두는 일 같아 몸은 체온과 어색해했다 간혹 베란다에 나가 담배를 피웠지만 행운목에 슨 곰팡이는 그냥 두었다 균사, 줄기, 포자자루, 포자 백과사전에서 몇 번 곰팡이에 관해 찾아 읽었지만 나처럼 직유법은 익숙해지지 않았다 공사가 한창인 집 밖의 타공 소리는 아무리 구부려도 뾰족했고 여지를 두는 일보다 마음가짐을 갖기로 하는 내가 무서워졌다 플랫폼 5-3, 문래, 목화, 교사校舍, 분필, 도서관, 그림책 어제와 오늘과 내일 당신이어서 당신 아니었을 리 없을 것들을 엽서에 적으며 아프다는 말이 그럴듯해 나는 입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당신도// 당신을 비집고 나오고 싶어 했을지/ 눈이 눈과 가까워지려 하는 그때 한 번/ 만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많아지고 있었다//

발자국 / 강연우
몸은 따라가지 못한다 물의 보폭은 짧아지고// 잔 대신 세워둔 몸이 인칭의 순배를 돌고 반 마디 잘린 아마, 의 말들은 한 마디의 혼자를 안으려 든다 날숨을 뛰쳐나가고 싶은 몸으로부터 빛의 둘레는 선명해지고 이런 것을 윤곽이라 불러도 괜찮을지 뭉텅이진다 기울어진 몸은 이제 반대편의 안부를 궁금해 하지 않는데// 스케치북에 그려 둔 당신이 사는 산촌마을에도 십이월이 닿았을지// 편도로 가요, 대답하면/ 괜찮겄어? 편도는 어디 먼 데여? 답하던// 떨리는 당신의 외꺼풀로/ 내가 가진 외꺼풀을 엮어도 좋았을// 이른 봄 초가草價// 벽에 걸어두고 싶던 풍경의 혈관// 연필의 여섯 면만을 붙들어 흘려 쓴 이야기들// 가방 하나에 담기는 세간에 안전화 한 족을 넣고/ 마지막 칸에 내려놓고 싶던 마침표는 파기한다 나보다// 먼저 깬 흰 눈이 하염없이 쏟아진다 새벽으로// 당신의 새벽을 덮어주려 하던 그때//

용산의 기억 -당신, 어디에 계세요? / 강연우
길을 걸어요 불타던 파란 망루가 있던 길이요 문득, 뒤를 돌아봤거든요? 발자국은 발걸음을 떠나보내면서 자신을 완성하고 있었어요 기억을 지운 기억 때문에 지금 여기, 흥청망청 현재가 탄생하고 있어요 당신, 어디에 계세요?// 그날 이후 배역을 잃어버린 건지 바람이 비명을 내지르고 있어요 고층빌딩의 육중한 모서리들이 아스팔트에 대가리를 들이받는 소리도 들려요 구름은 언제쯤 수의를 벗을까요? 길가에 피어난 꽃들은 일심동체 상여가 됐네요// 남일당 맞은 편 카페에 앉아 낙서를 하고 있어요 그 들, 너희 들, 우리 들 ‘들’을 떼어내 나를 솎아내고 있어요 고유명사 말고 의존명사 할래요 당신으로부터 조금의 여지가 주어질 것 같아서, 한 모금 커피에 무릎이 젖어요// 당신은 지금 어디선가 사랑에 대해 열렬히 토로하고 있겠죠? 발전에 대해 개발에 대해 성공에 대해 틀림없어요 당신은 지금 다시 사랑을 저지르고 있을 거예요 당신이 사랑을 저지르고 있는 동안 가로수가 유일한 나의 알리바이가 된다 하지만// 그날 당신이 바라보고 있던 정면이 나의 정면이었다 한들 어디까지나 우리는 방향의 배후일 뿐이지 않은가요? 이글거리는 당신의 열 손가락을 생각하면 숨이 가빠져요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 말 말고 말해 봐요, 툭 까놓고 말해 봐요, 그날의 불기둥은 나의 신념이었다고// 그만 쓸래요 그만 할래요 손금에 걸려 넘어진 운명처럼 당신의 말씀처럼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거잖아요 종이 한 바닥을 채우는 동안 연필이 얼어붙었네요 하지만 걱정하지 말아요 이 연필로 당신을 찌르지는 않을 거예요// 당신을 향해 앞으로 걷고 있어요 그런데 왜 자꾸 나는 뒤에 도착하는 거죠?// 이봐요ㅡ, 말해 봐요, 지금 당신, 어디에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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