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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마경덕 시인

부흐고비 2021. 11. 10. 08:40

마경덕(馬敬德) 시인
1954년 전남 여수 출생.

200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신발論』이 당선.

시집으로 『신발論』 『글러브 중독자』 『사물의 입』이 있다.

북한강문학상 수상.

현재 롯데백화점 문화센터, AK아카데미, 강남문화원 시 창작 강사.

 

* 마경덕 시인 블로그

 

내 영혼의 깊은 곳 : 네이버 블로그

애벌레가 끝이라고 생각할 때 하나님은 나비가 되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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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論 / 마경덕
2002년 8월 10일// 묵은 신발을 한 무더기 내다 버렸다// 일기를 쓰다 문득, 내가 신발을 버린 것이 아니라 신발이 나를 버렸다는 생각을 한다 학교와 병원으로 은행과 시장으로, 화장실로, 신발은 맘먹은 대로 나를 끌고 다녔다 어디 한 번이라도 막막한 세상을 맨발로 건넌 적이 있었던가 어쩌면 나를 싣고 파도를 넘어 온 한 척의 배 과적過積으로 선체가 기울어버린. 선주船主인 나는 짐이었으므로,// 일기장에 다시 쓴다/ 짐을 부려놓고 먼 바다로 배들이 떠나갔다//
* 200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말뚝 / 마경덕
선착장 짠물에 얼룩진 쇠말뚝, 굵은 밧줄이 똬리를 틀고 말뚝의 목을 조이고 있다. 얼마나 많은 바다가 드나들었나. 끙차, 목에 밧줄을 휘감고 버틴 시간이 얼마인가. 투두둑 바다의 힘줄을 끊어먹은 말뚝 모가지가 수평선을 향해 늘어져있다.// 녹이 슨 밑동. 벌겋게 흘린 눈물자국이 지워지지 않는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든 밧줄, 단숨에 바다를 둘러매던 그을린 팔뚝, 노을에 젖은 만선의 깃발, 말뚝에 마음을 묶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가. 철썩, 포구가 몸을 뒤트는 순간 말뚝의 영혼이 새어나간다. 수많은 이별을 치르는 동안 말뚝의 심장은 차갑게 식었다.// 선창가 말뚝에 걸터앉아 떠난 사람을 생각한다. 말뚝 뽑힌 자리, 깊이 파였다. 나를 맬 곳이 없다.//

빈둥빈둥 늙는 집 / 마경덕
지지난 봄, 집 앞에 들어선 연립 한 동, 분양을 알리던 현수막은 바람에 시들었다. 해를 넘겨도 팔리지 않는 집. 빈방에 어둠이 살고 있다. 빛바랜 만국기를 붙들고 집이 생각에 잠기는 동안 어둠이 야금야금 집을 뜯어 먹는다. 하수구를 막고 지붕을 걷어내고 벽에 금을 긋는다. 어둠은 난폭한 세입자, 뒤꼍에 모여 이 곳에 뼈를 묻자고 소곤대는 소리에 벽지가 풀썩 무너져 내렸다. 빈둥빈둥 집이 늙고 5층 꼭대기로 벽돌을 져 나르던 늙은 여자는 노임을 포기하고 떠났다. 어둠이 옥탑으로 올라간 뒤 목을 뽑고 내려다보던 건달같은 사내도 보이지 않는다. 뒤꼍으로 꽁초를 던지고 가래침을 뱉던 사내마저 치우고, 집은 덩그렇다. 마당에 그림자를 내려놓고 잠든 빈집. 창문은 서랍처럼 닫혀있다.//

바께뜨 / 마경덕
먹음직한 빵이었네, 자고 나면 가슴이/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네, 열다섯 되던 해/ 늦은 밤길에서 엄마는 말했지/ "니 나이 때는 기름져서 바라만 봐도 군침이 돌지."/ 골목에서 휘파람을 불어대던 사내들, 모두/ 식성이 좋았네, 그 중 배고픈 사내 하나/ 통째로 나를 집어 삼켰네/ 나 한때 뜯어먹고 싶은/ 갓구운 빵이었네// 물컹한 크림이 들어있는/ 예쁜 빵을 셋 낳고,// 김빠진 딱딱한 빵/ 씹을수록 구수한 때는 지나갔네/ 부딪히면 퍽퍽 소리가 나네/ 멀뚱멀뚱 쳐다보네/ 언제부턴가 덤덤한 빵을/ 나이프로 쓱쓱 썰고 있네/ 잼과 버터를 듬뿍 얹은/ 마른 빵끼리 투덜대네// 대체 왜? 왜 이리 맛없어?//

칙, 칙, 압력솥 / 마경덕
추가 움직인다. 소리가 뜨겁다/ 달리는 기차처럼 숨이 가쁘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더는 참을 수 없는 듯,/ 추를 마구 흔든다. 지금 당장 말리지 않으면/ 머리를 들이받고 자폭할 기세다/ 저 맹렬한 힘은 무엇인가/ 저 안에 얼마나 많은 신음이 고여 있는가/ 슬픔이 몸을 찢고 나온다/ 집 한 채를 끌고 소리가 달린다/ 밤기차를 타고 야반도주하는 여자처럼/ 속이 탄다. 부글부글//

골목이 고양이를 키운다 / 마경덕
막다른 집에서 시작된 골목이 동네를 돌아다녀요. 막다른 집에서 걸어 나와 구불구불 기어간 골목의 등이 보여요. 집과 집 사이로 용케 피해 다니며 골목은 종일 고양이와 놀아요. 지붕에서 옥상으로 아찔한 난간으로 휙휙 고양이를 던지며 하루를 보내요. 즐거워라, 아이들이 사라진 골목. 골목끼리 고양이를 주고받으며 놀아요.// 또 던지려나 봐요. 수챗구멍에 쥐새끼를 풀고 수백 톤의 어둠을 골목에 부려요. 냉장고 음식을 봉투에 싸서 집 앞에 내놓아요. 봉투를 찢고 악취를 끄집어내고 죽은 쥐를 뒤꼍에 던져요. 불안한 눈 의심 많은 귀를 못된 고양이 얼굴에 달고 있어요. 벽을 디밀고 "뛰어 넘어! 골목을 벗어나면 죽을 줄 알아!" 으름장도 쳐요. 막다른 집 골목이 벽을 타고 올라가요. 다시 골목이 시작돼요. 휘익, 고양이가 날아와요.//

우물 / 마경덕
눈물이 다만, 슬프다는 이유만으로 오지 않는다는 걸 안다.// 마른 몸에서 물이 솟는 건 내 몸 어딘가에 우물이 있다는 것이다. 그 깊은 곳에 영혼이 물처럼 고여 있는 것이다. 흐르는 눈물은 내 영혼의 하얀 이마이거나 지친 발가락이거나 슬픔에 퉁퉁 불은 손가락이다. 영혼은 고드름이나 동굴의 석순처럼 거꾸로 자란다. 이것들은 모두 하향성이다. 근원을 향해 생각이 기울어 있다. 내가 나에게 찔리는 것, 슬픔이 파문처럼 번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석순처럼 자란 영혼을 손수건으로 받으면 발간 핏물이 든다. 나는 피 젖은 손수건 석 장을 가지고 있다. 그 오래된 손수건을 차곡차곡 접어 냉동실에 두었다. 꽁꽁 얼어붙은 냉동고의 영혼들은 더 많은 우물을 만들고 영혼을 생산한다. 고드름처럼 자라 맹물처럼 날아가 버린, 그것들은 대개 일회용이다. 나는 쉰밥처럼 변해버린 가벼운 영혼에 대해 속눈썹이 떨리도록 생각해본 적은 없다.// 찌르고 들쑤시고 사막처럼 메마르게 할지라도, 젖은 영혼을 사랑한다. 상처 많은 이 우물에서 詩를 꺼내고 밥을 꺼낸다. 두레박이 첨벙 떨어지는, 서늘히 두렵고 캄캄한 우물. 내 머리칼이 쉬이 자라는 것도 질척한 슬픔에 뿌리가 닿아있기 때문이다. 눈물이 다만 슬픔만으로 오지 않는 걸 이제는 안다.//

놀란흙 / 마경덕
뒤집힐 때 흙도 놀란다/ 쟁기 삽 괭이 호미 쇠스랑 포클레인… 누가 제일 먼저 괭잇날에 묻은 비명을 보았을까/ 낯빛이 창백한, 눈이 휘둥그런// 겨냥한 곳은 흙의 정수리거나 잠든 미간이거나,// 흙의 표정을 발견한 누군가의 첫 생각, 그때 국어사전에 놀란흙이라는 명사가 버젓이 올라갔다// 흙의 살붙이, 지렁이 땅강아지 개미 두더지/ 그것들이 가랑이를 헤집어 집을 짓고 길을 내도 놀라지 않는다/ 나무뿌리, 바위뿌리에도 덤덤한 흙이/ 사람만 보면 왜 그리 놀라는지,// 흙의 나라/ 태초에 그곳에서 태어난 사람을 닮은 흙의 심장은 사람을 잘 알고 있다/ 공사장 주변, 포클레인이 파헤친 땅/ 매장된 산업폐기물을 껴안고 까맣게 죽어있었다/ 싱싱하던 흙빛은 흑빛이었다// 소심하고 겁 많은 아버지는 흙집으로 들어가/ 더는 놀라지 않고,// 나는 아직 살아있다. 그래서 자주 놀란다//

클립 / 마경덕
나무들이 파릇파릇 봄을 끼운다/ 가지마다/ 단단한 집게클립으로// 강을 건너는 누의 클립은 악어의 아가리/ 종유석과 석순도 석회동굴이 클립이다// 봄바람과 스카프가/ 맞물린다 정오와 식곤증과 커피가, 마트와 카트와 카드가/ 맥주와 치킨과 퇴근이/ 빌딩은 빌딩끼리, 골목은 골목을 물고 버틴다// 몸에서 멀리 뻗어나간 각각의 발가락도 하나로 꽂혀있다// 하늘이 새 떼를 감싸는 것도/ 헤어롤이 머리를 휘감는 것도 클립의 방식// 옛 애인과 과거를 정리하지 못한/ 어지러운 연애들// 클립에 끼우지 못한 결혼은 쉽게 깨진다//

객짓밥 / 마경덕
하나님은/ 저 소금쟁이 한 마리를 물 위에 띄우려고/ 다리에 촘촘히 털을 붙이고 기름칠을 하고/ 수면에 표면장력을 만들고// 소금쟁이를 먹이려고/ 죽은 곤충을 연못에 던져주고/ 물위에서 넘어지지 말라고 쩍 벌어진 다리를/ 네 개나 달아주셨다// 그래도 마음이 안 놓여/ 연못이 마르면/ 다른 데 가서 살라고 날개까지 주셨다// 우리 엄마도/ 서울 가서 밥 굶지 말고, 힘들면 편지하라고/ 취직이 안 되면/ 남의 집에서 눈칫밥 먹지 말고/ 그냥 집으로 내려오라고/ 기차표 한 장 살 돈을 내 손에 꼭 쥐어주었다// 그 한마디에/ 객짓밥에 넘어져도 나는 벌떡 일어섰다//

딱풀 / 마경덕
나사를 죄는 방향과/ 나사를 푸는 방향이 있다/ 오른쪽과 왼쪽은 노동, 또는 휴식// 초록 옷에 노란 모자를 쓴 아모스*/ 한 바퀴 돌아 어딘가에 제 몸을 뭉개고 집으로 드는 날/ 딱, 반으로 키가 줄었다// 문방구에 매달린 물체주머니/ 조개껍데기 나무토막 유리구슬 자석 조약돌 플라스틱조각들/ 물체의 대표들은 주머니로 들어가고/ 애매한 이것을 주머니는 밀어냈다// 성분은 종種을 만들고/ 혈족은 혈족끼리 어울리지만,// 짧은 스틱에 갇힌 흰 살점은/ 種이 다른/ 종이와 근친이다// 백지만 보면 지분거리는 버릇은// 누가 봐도/ 딱, 풀이다//
* 아모스 : 상품명

책들의 귀 / 마경덕
책의 귀는 삼각형,/ 귀퉁이가 접히는 순간 책의 귀가 태어나네/ 주차표시 같은 도그지어*/ 졸음이 책속으로 뛰어들면 귀가 축 처지는 책/ 킁킁거리며 손가락을 따라가던 책은 그만 행간에 주저앉네/ 순순히 귀를 내주고/ 충견처럼 그 페이지를 지켰지만 해가 가도/ 끊어진 독서는 이어지지 않고 책의 심장에 먼지만 끼었네// 귀 접힌 자리마다 쫑 메리 해피 도꾸 누렁이…/ 쥐약에 거품을 물고 쓰러진 눈빛이 생각나 눈에 든 문장에 밑줄을 긋네/ 쫑긋, 귀를 추켜들지 못하고 아무에게나 꼬리를 흔들고 가랑이에 바르르 눈치를 밀어 넣던 비굴한 이름들/ 흘러내린 두 귀를 실로 묶다가 본드를 발라본 적 있네/ 셰퍼드처럼 진돗개처럼 자존심을 세우지 못한/ 아비도 모르는 개들은/ 마루 밑 신발짝이나 물어뜯다가 복날에 하나 둘 사라졌네// 순한 책의 귀,/ 녀석도 잡견이네 침을 묻혀도 짖지 않고 책장을 찢어도 물지 않네 누군가의 손짓을 따라가 집을 잃은 책들은/ 귀를 펴고 또 다른 주인을 섬기거나, 귀를 접고 헤어진 주인을 그리워하거나//
* 도그지어(dog's ear) : 책장을 접어놓은 부분이 강아지 귀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층층 또는 겹겹 / 마경덕
폭력의 지층을 보여주는 저 투명한 수조/ 다리와 몸통이 뒤섞인 무질서는 먼 바다를 수입한 피의 연대기/ 짓밟고 올라타고 깔리고, 아우성이 선명한 저 상술商術은/ 모두 물속에 기록되었다// 빽빽한 틈으로 혓바닥과 눈알을 집어넣는 사람들// 저 가느다란 산소호스는 혹독한 고문의 도구/ 치솟는 물방울로 숨구멍을 터주며 서서히 죽이는 방식으로/ 주말은 부활한다// 절반쯤 죽어/ 싱싱하게 꿈틀거리며/ 극한 통증을 넘어 내게로 오는 것들/ 러시아産 킹크랩, 랍스터/ 딱딱한 몸집에 탈피의 고통이 몇 번이나 다녀갔나 태연한 저울은/ 쉬지 않고 그들의 죽음을 계산하지만 절망의 값은 0이다// 쉭쉭 뜨거운 콧김을 내뿜는 길가에 늘어선 대게집 찜통들/ 30분마다 붉은 꽃을 활짝 피우며/ 쌓아놓은 물의 지층이 허물어진다// 가족나들이에 들끓는 주말을 맛보려고 들고나는 접시가 층층이다// 불안한 호흡이 신의 결재를 기다린다//

식빵의 체온 / 마경덕
방금 오븐을 빠져나온 식빵들/ 뜨거운 체온을 식히고 있다/ 훈훈한 기운이 빠져나가는 그 사이/ 참새 한 마리 포르르 저쪽 가로수에 날아가 앉았다/ 빵집 앞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고 우르르 길이 열린다/ 구수한 냄새가 날아가는 동안,/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침대 위에 툭 떨어뜨린 손을 주워/ 뺨에 비비던 그때/ 어머니는 잠깐 살아있었다/ 맥박이 지워지고 식어버린 손은/ 곧 제자리로 돌아갔다/ 빵이 식어가는 그 정도의 시간에,// 따뜻한 온도가 ‘오늘의 빵’이다/ 말랑말랑한 오늘을 사려고 줄을 서는 사람들/ 비닐봉지는 입을 벌리고 성급한 포장지에 김이 서린다/ 딱딱한 어제는 세일로 묶여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식빵들, 마지막 손인 듯 빵을 붙잡는다/ 따스하다/ 아직 빵은 살아있다//

슬픔의 협력자들 / 마경덕
만지면 축축하고 어두운 것들은 배후가 있다// 참나무 숲은 어둑한 기운을 풀어 저녁이란 옷을 입는다/ 해거름이 몰고 온 퍼덕거리는 어린 새 한 마리는 저녁의 마지막 단추가 되고 숲은 닫혔다// 그때 내 감성의 치맛자락이 어둠의 틈에 끼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온전히 슬픔 한 벌을 짓지 못한 탓// 솔기가 터진 늦가을 겨드랑이 사이로 저녁연기가 피어오를 때// 어렴풋한 저편에서 울컥,/ 무언지 모를 뭉클한 것들이/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는 덩어리들이// 검게 그을린 발목이 보이고/ 노인의 손에 주저앉은 저녁의 영혼이 말간 콧물에 번져 굴뚝을 통과하고 있었다// 슬픔의 주성분은 숲의 뼈가 타는 냄새라고 적었다// 목이 잘린 해바라기가 줄지어 서 있는/ 외딴집이 보이는 그 언덕에서// 가만히 무릎을 웅크리며 누군가에게 꼭 슬픔을 들키고 싶었다//

아침의 뼈 / 마경덕
귀에 닿기도 전/ 절반은 바람에 날아가 버린/ 작은 새 소리가 창틈으로 스민다// 간밤이 남아있는 무거운 눈꺼풀로/ 화장실에 앉아 엿듣는 허공의 은밀한 말이/ 빨랫줄에서 살구나무로 번지고 있다// 간장 종지나/ 꼬막껍데기 한쪽에 담기 좋은/ 딱 그만한/ 한 꼬집의 말// 파도에 굴러/ 하얗게 뼈만 남은 조가비에도 반쪽의 소리만 남아있었다// 마요네즈 케첩 칠리소스도 뿌리지 않은/ 맹물 같은// 이 맑은 소리는/ 세상의 약속도 버려두고/ 변기에 멍하니 앉아있을 때만 들을 수 있다// 이른 아침/ 잠깐 내게로 와// 해 뜨면 사라지는,// 허공의 실핏줄 같은 미세한 소리가 아침의 뼈를 맞추고 있다//

측백나무 서재 / 마경덕
황금측백나무는 책꽂이 형식/ 그 앞에 서면 마치 서재 같다는 생각,/ 제목만 보여주는 가지런한 책들처럼/ 줄기에 수직으로 꽂힌 납작한 이파리들 모두 측면이다// 손을 밀어 넣기 좋은 딱 그만한/ 틈과 틈, 시집 한 권 몰래 빼낸 자리 같다// 천지天地를 짓던 셋째 날/ 섬세한 잎맥도 그리고 잎새 둘레 톱날무늬도 새기느라/ 하나님은 돋보기까지 찾아 쓰셨다/ 돌려나기 뭉쳐나기 어긋나기 마주나기, 잎차례도 정해/ 조각조각 그늘까지 붙여 태어난 나무들// 천 가지 만 가지 달라야하니 얼마나 머리가 아프셨을까// 잠시 무릎을 펴고 둘러보니 사방천지/ 가로가로가로가로가로……// 문득 생각을 뒤집고 측백나무를 설득했을 것이다/ 책 한 권 없는 부자보다 책이 넘치는 가난한 시인을 사랑한다고/ 황금이란 호를 덤으로 얹어// 하나님은 그때 각별한 시 한 편을 측백나무에 꽂아두셨다/ 그리고 나는 그 시를 필사중이다//

환지통 / 마경덕
잘린 나무는 어떻게 긴 밤을 견디는 것일까/ 없는 가지가 사무쳐 온몸으로 벅벅 허공을 긁는다는 말, 허공이 욱신거려/ 손목이 돋는 봄을 기다린다는 말/ 이것은 손톱에 때가 낀 나무들만 아는 이야기가 아니다// 피가 나게 허공을 긁어본/ 보기 좋은 나무들은 손목이 없다// 그들이 제일 먼저 떠올린 건 마취제일까 진통제일까// 교통사고를 당한 사내도 다리가 아파 못살겠다고/ 없는 다리를 만지며 엉엉 운다// 의사가 말했다/ 사라진 다리를 기억하는 것은 뇌라고/ 걷고 달리고 걷어차던 습관을 뇌는 아직 붙잡고 있는 거라고// 오래전 죽은 아들의 이름을 부르는 홀아비도/ 없는 자식이 그토록 아프다고 한다// 살아있는 것처럼,/ 없는 다리가 아프고/ 없는 자식이 또 아프다// 치장을 마친 정원의 나무들이 동쪽 허공을 문지르며 우는 밤이다//

내부 수리 중 / 마경덕
오른쪽 다리를 다친 시누이/ 친친 깁스를 하고 목발로 걸어와// 아픈 다리에/ 어서 낫도록 몇 자 적어달라는데// 서슴없이 매직팬으로 써 내려간// “내부 수리 중”/ 박장대소에 시누이도 따라 웃는데/ 문득 “내부 수리” 라는 말이 가슴을 친다// 세상 만물을 지으시고/ 내 머리칼도 다 세는 그분이// 지금/ 설계도를 꺼내놓고 부러진 뼈를 맞추고 계신 것이다// 자칫 공사 기간이 길어질 수도 있으니/ 뼈가 굳을 때까지 조심히 걸으라고// “내부 수리 중”/ 공사 팻말 하나 깁스한 다리에 세워 두었다//

가방, 혹은 여자 / 마경덕
그녀는 무엇이든 가방에 넣는 버릇이 있다. 도장 찍힌 이혼서류, 금간 거울, 부릅뜬 남자의 눈알, 뒤축 닳은 신발. 십년 전에 가출한 아들마저 꼬깃꼬깃 가방에 구겨 넣는다. 언젠가는 시어머니가 가방에서 불쑥 튀어나와 해거름까지 잔소리를 퍼부었다. 그녀의 취미는 접시 던지기, 지난 봄, 던지기에 열중한 나머지 벽을 향해 몸을 날린 적도 있었다. 틈만 나면 잔소리를 향해, 바람난 남자의 뻔뻔한 면상을 향해 신나게 접시를 날린다. 쨍그랑 와장창!// 그녀의 일과는 깨진 접시 주워 담기. 뻑뻑한 지퍼를 열고 방금 깨뜨린 접시를 가방에 담는다. 맨손으로 접시조각을 밀어넣는 그녀는 허술한 쓰레기봉투를 믿지 않는다. 적금통장도 자식도 불안하다. 오직 가방만 믿는다. 오만가지 잡다한 생각으로 터질 듯 빵빵한 가방, 열리지 않는 저 여자.//

벽시계 / 마경덕
벽에 목을 걸고 살던/ 그가 죽었다/ 벽은 배경이었을 뿐, 뒷덜미를 물고 있던 녹슨 못 하나가/ 그의 목숨이었던 것// 생전에 데면데면 바라본 바닥은 그를 받아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시간의 실핏줄까지 환히 꿰더니/ 정작 벽과의 관계는 풀지 못하고// 그는 추락했다/ 드러난 벽의 속살, 뒤편/ 직사각형 족적 하나가 필생의 흔적이었다// 바닥은 허공을 받치는 기둥/ 조각조각 이어붙인 시간이 바닥으로 흩어지고/ 심장이 멎으려는 찰나, 시간은 뼈를 맞추고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손목으로 옮겨와 태연히 흘러갔다// 밤낮없이 분류하고 조합했던 하루들/ 심장을 관통하던 전율과 초를 다투던 치열함은/ 벽을 놓치는 순간 사라지고,// 그가 평생을 섬겨온 시간은/ 그를 기억하지 못했다// 죽은 자식 불알 만지듯 묵직한 추를 만져본다/ 시간이 빠져나간 빈 몸/ 한 번도 몸 밖으로 나온 적 없는 제 몸이 무덤이다/ 관처럼 기다란 나무상자가 죽은 몸을 담고 있다//

뒷발 / 마경덕
빽빽한 원시림/ 어떤 나무는 걸음을 발명했다/ 모든 나무가 땅에 묶여 있을 때 워킹 팜*은 운명을 거부했다// 뿌리를 지지대로 세우고 빛을 찾아 걸음을 뗄 때/ 뒷발은 음습한 그늘에 덮여있었다// 한 해 이동거리는 4센티미터/ 안간힘으로 걸어간 손마디 하나의 거리는/ 물경, 필사적이다// 앞발이 소리 없이 이동할 때/ 뒤처지며/ 잊혀지며/ 끌려간 뒤편의 표정은 아무도 보지 못했다// 먼 훗날 발견된/ 느리게 느리게 진행된 고통은 손마디 하나 안에 있었다// 마지막 걸음을 완성하고/ 나무는 쓸모없는 뒷발을 자르기로 작심했다/ 한 번도 앞이 되지 못한 뒷발이/ 음지에서 하염없이 빛을 기다릴 때//
* 워킹 팜 : 움직이는 야자수

도마의 구성 / 마경덕
나무도마에게 딸린 식구는/ 혼자 사는 여자와 칼 하나/ 닭집 여자는 칼에게 공손하고 칼은 도마를 얕본다/ 서열은 칼, 여자, 도마/ 도마는 늙었고 칼은 한참 어리다/ 칼 받이 노릇에 잔뼈가 물러버린 도마는/ 칼 하나와 애면글면/ 둘 사이에 죽은 닭이 끼어들면 한바탕 치고받는다/ 내리치는 서슬에 나이테가 끊어지고/ 이어 찬물 한 바가지 쏟아진다/ 닭이 사라져도 도마를 물고 있는 칼/ 칼은 언제나 도마 위에서 놀고/ 도마는 칼집 투성이다/ 이 조합은 맞지 않아요/ 도마가 애원해도 여자는 늘 도마를 무시하고/ 칼은 여전히 버릇이 없다/ 어디서 굴러온 막돼먹은 칼을 여자는 애지중지 받든다//

친절한 점자블록 / 마경덕
도시는, 손으로 읽거나 발로 읽는/ 두툼한 점자책이다// 스크린도어 앞에 매달린 점자를 쓰다듬다가/ 바닥에 깔린 올록볼록한 활자를 바라본다// 뒤따라오거나 앞서 걷는 요철은 횡단보도 앞에서 멈추다가/ 끈질기게 이어져// 엘리베이터, 화장실 앞까지 안내를 하고/ 그 자리에서 친절하게 기다려준다// 경계선을 따라가면 입구가 나오고/ 문이 열려도/ 더듬더듬 지팡이로 읽어내는 이 책의 주인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데// 도로 곳곳에 펼쳐놓고 누구를 기다리는 것일까// 도시의 지극한 배려에도/ 아무도 읽지 않는 노란 점자책// 무거운 캐리어가 덜컹덜컹 읽고 간다//

마트료시카 / 마경덕
채 뜯지도 않은/ 내일까지 버려야했습니다// 시퍼렇게 눈뜬 시간을/ 죽일 수만 있다면/ 꽁초처럼 비벼 끌 수만 있다면,// 담배 한 가치로 온전히 하루를 죽인 날은/ 꿈속에서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살비듬이 떨어지는/ 편도뿐인 노숙의 목을 비틀어 왕복티켓을 얻을 수 있다면/ 다시 당신의 몸속으로 들겠습니다// 사흘 전/ 이 바닥으로 흘러든 노랑머리 여자는 차곡차곡 쌓인/ 시간의 몸으로 들어가/마흔, 스물, 일곱 살을 꺼내고 있습니다// 시간은 거꾸로 태어납니다//

비누꽃 / 마경덕
엉뚱한 생각이 한바구니 꽂혀있다// 본색을 감춘 겹겹의 장마들/ 다탁을 장식한 누군가의 뒤집힌 생각이 화사하다// 젖은 손바닥에서 부풀던 흰 꽃들/ 붉은 장미 한 송이를 뽑아 문지르면/ 수북이 거품을 토해낼까// 한순간 얼룩과 함께 사라져버릴, 이후를 모르는 꽃들은/ 박제된 시간을 빨갛게 물들인다// 귀퉁이가 닳고/ 종이처럼 얇게 사라져가는 세상의 비누들을 바라보며,// 몸에 고인 70프로의 물, 비누 일곱 개를 만들 지방이 있어도/ 마음의 때를 씻지 못한 나는/ 꽃도/ 비누도 아니어서/ 문질러도 거품이 피지 않았다//

나팔꽃 조등 / 마경덕
제 죽음에게 조문을 왔다/ 잘려버린 줄기를 붙잡고 안간힘으로// 홀로 치른 장례식, 피를 짜낸 마지막/ 꽃 한 송이, 조등이었다// 그날 아침 깨진 나팔소리가 골목으로 흩어졌다// 밑동이 뚝 잘렸다/ 누구의 짓일까 어안이 벙벙한 나팔꽃, 나팔을 입에 문 채 시들어가고// 허공에 주렁주렁 매달린 고장 난 나팔들,// 이튿날/ 죽은 몸이 활짝 피운 흰 나팔 한 송이// 만장처럼 서 있는 전봇대에 조등을 켰다 제 죽음에게 조문하는 방식으로//

​​해바라기의 오해 / 마경덕
가을이 해체되었다 이 죽음은 합법적이다/ 내장이 드러난 콩밭과 목이 잘린 수수밭은 아무 말도 못했다/ 그 곁에 끝없이 펼쳐진 해바라기밭// 꽃이어서, 해바라기는 다행이었다// 이 작은 오해가 해바라기를 무럭무럭 키웠다 폭염을 삼킨 머리는/ 칼을 쓴 듯 무거워도,/ 함께 사진을 찍으며/ 사람보다 더 해맑게 웃었다 사방을 물들인 노랑노랑노랑// 노랑은 유쾌하고 명랑한 색// 까맣게 영근 늦가을 볕이 누런 해바라기 밭을 들락거리고/ 기름을 줄줄 흘리는 해바라기들// 고개 너머 주인이/ 목을 칠 날짜를 받아놓고 숫돌에 낫을 가는 동안에도/ 발목에 차꼬를 매달고 익어가는/ 죄목도 모르는 수인囚人들// 찬바람이 불면 참수당할 제 머리를 단단히 붙잡고 서 있다//

무꽃 피다 / 마경덕
비닐봉지를 열어보니, 후다닥 무언가 뛰쳐나간다. 가슴을 치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무꽃이다. 까만 봉지 속이 환하다. 비닐봉지에 담긴 묵은 무 한 개 꽃자루를 달고 있다. 베란다 구석에 뒹굴던 새득새득한 무. 구부정 처진 꽃대에 연보랏빛 꽃잎 달렸다. 참말 독하다.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꽃을 피웠다. 손에 얹힌 무, 몸집보다 가볍다. 척, 제 무게를 놔버리지 못하고 주저주저 망설인다. 봄이 말라붙은 무꼬랑지 쥐고 흔들어댄 모양이다. 창을 넘어와 봉다리를 풀고 무를 부추긴 모양이다./ 눈을 뜨다 만 무꽃. 여기가 어디라고 덜컥, 꽃이 되었던가. 어미 살을 파먹고 꽃이 된 무꽃. 쪼그라진 젖을 물고 있는 무꽃.//

화초양배추 / 마경덕
칙칙한 계절/ 청량리역 광장이 서둘러 색色을 심는다/ 수상한 분위기는 쉬쉬 입을 다물고 낌새를 모르는/ 꽃들은 아직 피가 뜨겁다/ 줄 맞추고 깔 맞추고 시시덕거리며/ 길목에 맨몸으로 주저앉는다// 저것은 계산된 죽음/ 도시는 그들을 앞세워 삭막한 거리를 치장중이다/ 누군가 슬금슬금 뒷걸음친 자리에/ 겁 없이 뿌리를 묻는/ 일회용 추위받이들// 전쟁에 무참히 내몰린 총알받이도/ 악, 억!/ 그렇게 눈을 뜨고 무너졌다// 한결같이/ 일그러지고 꼬부라지고 어안이 벙벙한 마지막 표정들/ 한파에 동사한 꽃들도/ 모두 눈을 뜨고 있었다//

딸기의 사생활 / 마경덕
맨발로 기어간다/ 척추가 없는 생, 마디마디 헛뿌리를 내민다/ 흙밭을 뒹구는/ 노숙의 힘으로 딸기밭은 번성한다// 입덧의 계절,/ 헛구역질에 봄이 달콤해진다/ 게워낸 붉은 물에 잎자루가 무겁다// 비닐하우스로 이전해 사람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그녀들/ 벌통 하나가 딸기밭을 다스린다/ 집단 사육당한 사랑들,/ 철없이 무더기로 태어나도 호적에도 못 오르는/ 벌의 혼외자식들// 땅과 하늘의 궁합, 날개가 뒤섞여도/ 여전히 바닥이 우성優性이다// 어차피 노골적인 그녀들/ 살구 자두 복숭아처럼 굳이 씨를 감추지 않는다// 맨몸에/ 깨알 같은 씨를 촘촘히 박는 전략으로/ 딸기의 사생활은 이어진다//

꽃등심 / 마경덕
둥근 접시에/ 선홍색 꽃잎이 활짝 피었다// 되새김질로/ 등에 꽃을 심고 쓰러진 소여,// 피처럼 붉은 저 꽃은/ 죽어야 피는 꽃이었구나//

그녀의 외로움은 B형 / 마경덕
​앞집 레인지 후드에서 빠져나온 저녁메뉴와 반쪽 창문에 걸린 거실 표정을 책상 위에 올려 두고 잠을 설쳤다// 프라이팬과 여자의 관계는 우호적이다 닭다리튀김, 소시지볶음, 햄, 생선튀김, ᆢ 여자는 늘 프라이팬을 의지한다 팬은 지나치게 입이 크다 뱃살이 늘면 외로움도 품을 넓힌다// 먼저 마른 B형과 비만 B형으로 외로움을 분류한다// ​소파나 여자의 무릎에서 느릿느릿 기어 나오는 고양이 울음도 B형이다 두 마리 고양이와 비만형 여자는 24시간 서로를 의지한다 주방에서 맴도는 고양이의 허기는 여자의 우울증과 비례한다 거실에서 주방으로 이어지는 동선을 따라가면 여자는 프라이팬과 고양이를 붙잡고 있다// ​간간이 끼어드는 기침소리, 그 음습한 소리는 주방 반대편에 산다 문턱을 넘지 못한 누군가 그 방에 단단히 밀봉되어 있다 여자는 가끔 방문을 향해 프라이팬을 던지며 소리를 지른다 기침소리에 그녀는 왈칵 고등어조림처럼 쏟아진다// ​마당 늙은 살구나무가 창문을 가리지만 않았다면 그 외로움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을 게다 외로움과 프라이팬, 폭식과 허기는 사랑과 동일한가? 리포트는 아직 미완성이다//

나비표본 상자 / 마경덕
화려한 옷들이 진열장에 걸려있다. 나비는 바느질의 달인. 생전에 가봉을 하던 버릇대로 가슴에 시침핀을 꽂고 있다. 덧댄 자국 없는 천의무봉의 솜씨들. 그동안 주름잡은 허공은 몇 필인지?// 꽃밭은 원단 도매상, 치수에 밝은 나비는 둘둘 말린 대롱줄자를 꺼내 길이를 잰다. 갖가지 원단은 꽃에서 나온다. 호랑나비 가문은 얼룩무늬, 배추밭이 친정인 노랑나비는 배추고갱이처럼 노랗다. 대대로 한 무늬만 고집한 나비의 계보에 유행은 없다.// 옷 한 벌을 짓기 위해 평생을 바친 장인들, 날개옷 한 벌을 완성하고 유리무덤에 갇혔다. 입으면 벗을 수 없는, 아름다운 그 옷이 화근이다.// 나비는 죽어도 날개를 접지 않는다.//

저녁의 걸음 / 마경덕
산을 넘어/ 누군가 저녁의 고삐를 끌고 마을로 내려온다// 새들은 공중의 지도를 따라 날아가고/ 산자락에서 늙은 똘감나무는 늦볕을 목에 두르고 서 있다// 사방으로 번지는 소리 없는 기운에/ 능선의 긴 꼬리가 검은 빛으로 물들고/ 앞산의 등줄기가 아득해지고// 밭두렁에 뒹굴던 흙 묻은 신발짝도, 뿌리째 뽑혀 풀이 죽은 달개비꽃도/ 저녁의 품으로 들어갔다// 거대한 수레에/ 그 많은 저녁을 싣고 오는 이는 누구인가// 눈을 뜨고도 볼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무덤 속에 고인 어둠이 일제히/ 무덤 밖으로 나오는 시간,// 망연히 저편을 바라보며 저무는 일도,/ 모두 저 걸음이다//

골목 끄트머리 / 마경덕
골목 끄트머리 오이꼭다리 같은 여자, 유리문을 반쯤 열고 쩌억 하품을 합니다. 캄캄한 목구멍이 터널 같습니다. 조글조글 마른입이 붉습니다. 대낮에도 홍등이 피는 골목. 헐값에 영혼을 팔러온 늙은 사내가 시든 꽃을 사기도 합니다. 늘 끌탕인 여자, 밀리고 밀려 막다른 골목이 된 여자, 움을 틔운 씨앗들이 뽑혀지고 온몸에 구멍이 뚫렸습니다. 일찍이 도시로 흘러와 사막이 된 여자, 쿨럭 쿨럭 기침을 하는 쓰디쓴 목에서 혓바늘 같은 추억이 쏟아집니다. 역전 불빛이 보이는 골목, 변심한 애인처럼 아득히 기적소리 멀어지고 모래바람 부는 도시의 사막을 목마른 사내들이 건너갑니다. 붉은 등 아래 몇 장의 지폐가 오가는 골목, 시끄럽고 고요합니다. 숨 막히는 은밀한 고요 속에 여자는 한 장의 풍경일 뿐입니다. 함부로 읽고 버린 하루가 펄렁 한 페이지 넘어갑니다. 수년 전 가출한 내 이모 같은, 그 여자 하염없습니다.//

바늘쌈지 두릅나무 / 마경덕
골짜기에 숨은 두릅 한 그루/ 봄을 따라온 발자국 소리에/ 흠칫,/ 마른 침을 삼킨다// 머리 꼭지/ 달랑/ 이파리 한 장// 손 탈라 온몸 꼭꼭/ 바늘 열 쌈// 본적 없는/ 제 몸 깊이 숨은 꽃/ 머리에 꽂고 싶은/ 가시막대기// 민머리/ 민머리에 새순 돋았다// 불안함이 가시를 키웠다//

날아라 풍선 / 마경덕
끈을 놓치면 푸드득 깃을 치며 날아간다// 배봉초등학교 운동회, 현수막이 걸린 교문 앞, 깡마른 노인이 헬륨가스를 넣고 있다. 날개 접힌 납작한 풍선들. 들썩들썩, 순식간에 자루만큼 부풀어오른다. 둥근 자루에 새의 영혼이 들어간다. 풍선 주둥이를 묶는 노인. 하나 둘, 공중으로 떠오르는 새털처럼 가벼운 풍선들. 절정에 닿는 순간 팡, 불꽃처럼 한 생 애가 타버릴, 조각조각 허공에 흩어질 영혼이 끈에 묶여 파닥인다. 평생 바람으로 떠돌던 노인의 영혼도 낡은 가죽부대에 담겨있다.// 함성이 왁자한 운동장, 공기주머니 빵빵한 오색풍선들, 첫 비행에 나선 수백 마리 새떼 하늘로 흩어진다. 뼈를 묻으러 공중으로 올라간다.//

물의 표정 / 마경덕
돌멩이를 던지는 순간/ 둥근 입 하나가 떠올랐다/ 파문으로 드러난 물의 입,/ 저 잔잔한 호수에 무엇이든 통째로 삼키는 거대한 식도食道가 있다// 물밑에 숨은 캄캄한 물의 위장/ 가라앉은 것들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누적된 그것들을 감추고 평온한 호수/ 물가에서 몸부림치던 울음을 지우고 태연하다// 계곡이며 개울을 핥으며 달리다가/ 폭포에서 찢어진 입술을 흔적 없이 봉합하고/ 물은 이곳에서 표정을 완성했다/ 물속에 감춰진 투명한 찰과상들, 알고 보면 물은 근육질이다// 무조건 주변을 끌어안는/ 물의 체질/ 그 이중성으로 부들과 갈대가 번식하고 몇 사람의 목숨은 사라졌다// 물의 얼굴이 햇살에 반짝인다/ 가끔 허우적거림으로 깊이를 일러주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잔잔한 물의 표정을 믿고 있다//

숫돌 / 마경덕
밋밋한 돌덩이가 칼을 쥐고 논다/ 얼마나 칼을 갈아 마셨는지/ 쇠비린내 물큰 난다./ 쇠붙이를 물어뜯은 제 몸도 우묵하다/ 허공에 무수히 칼자국이 나있다.//

단호박 자궁 / 마경덕
죽을 쑤려고 호박을 자른다/ 뉴질랜드産 검푸른 단호박// 자그만 몸뚱이, 어디에 이런 힘이 들었을까/ 칼날을 물고/ 텅,/ 도마에 머리를 들이 받고/ 텅, 텅,// 쩍, 돌덩이 같은 몸이 열린다/ 속살이 눈부시다// 반으로 잘린 단호박 자궁/ 호박씨들 우굴우굴 엉겨있다// 손을 넣어 끈끈한 호박씨를 긁어낸다/ 걸쭉한 피가 묻는다/ 움푹, 구덩이가 드러난다// 세 번이나 도굴 당한 내 몸에도/ 구덩이가 파였을 것이다//

똥 / 마경덕
내 하루는/ 입에서 항문으로 이어지는 미로를/ 벌레처럼 꿈틀꿈틀 기어가는 것/ 숨막히는 갱도(坑道)를 더듬어/ 출구를 향해 나아가는 일// 오로지 하강만이 허락되는/ 내 평생의 하루는/ 소멸의 두려움에 떨며/ 어둠 속을 무사히 통과하는 것// 내 슬픔은/ 돌아오지 못할 길을/ 기억하는 것// 어쩔 수 없는 길의 끝에서/ 가장 천한 이름으로/ 추락한다// 첨벙!//

바람의 악력握力 / 마경덕
저 몸짓, 흔들거나 낚아채거나/ 오래된 습관으로 바람은 주먹을 쥐고 빠르게 북상한다/ 풍속(風速)은 근육의 힘, 움켜쥐는 순간/ 나무의 머리채는/ 머리끄덩이가 된다// 흩날리는 머릿결, 눌러 쓴 가발이 불안하다 일기예보는 외출을 취소한/ 내 기분과 가깝다// 더없이 부드러운 악력도 있다/ 창밖 배롱나무/ 짓궂은 손가락 하나가 허리께를 간질이자 가지 끝이 움찔움찔,/ 참을 수 없는 간지러움에/ 허공의 손아귀가 풀리고 있다// 떨어진 잎사귀는 나무들이 놓친 손가락이다// 실시간 바람의 주먹질을 보여주는 텔레비전/ 악력기와 완력기 틈에서/ 9월의 등이 휘는 소리는 자막으로 뜬다// 뼛속에 바람이 든/ 구불거리는 파마머리는 몇 킬로그램의 악력으로 휘어졌을까/ 리모컨을 차지한 딸은 엄마의 악력을 이긴지 오래다// 기세등등 몰려온 태풍들은 먼 바다로 물러가며 주먹을 편다//

바람의 성별(性別) / 마경덕
썰물처럼 빠져나간 바람이 너울너울 밀고 간 모래물결, 맨발로 사막을 건너간 암컷의 흔적이다. 치맛자락 끌고 조신하게 걸어갔다. 수천 년 모래알을 세며 사막을 걸을 수 있는 자는 몸을 찢은 어미만이 가능한 일, 피 냄새를 기억하는 바람은 어디론가 흘러간 제 새끼를 보려고 족적足跡을 기록해 두었다.// 하지만, 기록이란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낙타의 행렬이 그녀의 발자국에 겹쳐지고 바람이 묻힌 자리에 또 바람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이니,// 이곳에서 이별이란 그저 사소한 일. 평생을 떠돌다가 우연히 마주쳐도 늙어버린 어미를 기억할 바람은 없다. 새끼를 낳은 것들의 형벌은 떠난 자식을 끝까지 기억하는 것이다.// 뼈를 묻으며 살아가는 것은 사막의 오랜 관습. 별들의 장지葬地가 된 이곳에서 떠돌이 바람도 수없이 뒤꿈치를 물렸을 것이다. 그때 물결 같은 발자국이 찍혔을 것이다.// 사구砂丘를 넘어온 회오리바람이 모래밭을 헤집는다./ 짝을 잃은 수컷들이다.//

먼지의 거처 / 마경덕
문득, 숨을 참는 버릇이 생겼다/ 문틈으로 들어온 한줄기 빛에// 어디선가 떨어져 나온 부드러운 입자들, 부유하는 먼지는/ 태연하게 몸을 들락거린다// 저울눈금에도 나타나지 않는 아득한 껍질들// 흘러간 먼 구름, 버려진 낙타의 발목, 바위 한 덩이, 어느 몸의 마지막 호흡이었을까//게으른 자의 핏줄을 붙잡고/ 소리 없이 틈이나 모서리에 가벼운 역사歷史를 기록하는 먼지들/ 느릿느릿 뭉치고 뭉친다/ 찰나에 사라진다 할지라도// 틈만 나면 지층을 쌓는 습관/ 입김 한 번에 생몰연대가 지워진다// 거처를 찾아 떠도는/ 쓸쓸한 저녁/ 먼 곳에서 낙타의 발목을 끌고 온 바람이 매캐하다//

한때 적막이란 말에 집중한 적 있다 / 마경덕
적막을 오래 쓰다듬은 손바닥에 푸른 물이 들었다. 내 오른쪽 어금니처럼 한쪽이 닳아버린, 부르면 혀가 서늘한 적막. 소란한 틈으로 잠깐 뒤태를 보이고 사라진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불쑥 내 몸을 치고 사라지는 그 짧은 1초의 정전(停電)…내 몸의 플러그가 뽑힌, 그 1초.// 떠밀리고 발등을 밟히는 사이, 방심한 내 어깨를 치는 순간, 울컥 혀끝에 닿는 찰나의 암전(暗轉). 그는 인파 속에 나를 홀로 세워두고 길을 끌고 흘러간다. 세상과 불통이 되는 그 시간, 나는 누구에게도 나를 타전할 수 없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그 1초는 적막이 나를 다녀간 시간.// 후박나무 빈 가지에 걸린 낮달을 보듯 그의 쓸쓸한 이마를 바라보고 싶었다. 계절이 한 페이지 넘어가고 공원 분수에 물이 마를 즈음, 무릎에 원고지를 펼치고 그가 네모난 칸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나는 한동안 그를 오독(誤讀)하였다.// 등 떠밀려간 노래방에서 흘러간 노래를 선곡하고 있을 때, 어쩌다 잡은 마이크를 들고 설쳐대고 있을 때, 그를 바라볼 수 없는 난감한 사이, 그 틈으로 반짝 적막은 출몰하는 것이었다.//

층층 또는 겹겹 / 마경덕
폭력의 지층을 보여주는 저 투명한 수조./ 다리와 몸통이 뒤섞인 무질서는 먼 바다를 수입한 피의 연대기./ 짓밟고 올라타고 깔리고, 아우성이 선명한 저 상술(商術)은/ 모두 물속에 기록되었다.// 빽빽한 틈으로 혓바닥과 눈알을 집어넣는 사람들.// 저 가느다란 산소호스는 혹독한 고문의 도구/ 치솟는 물방울로 숨구멍을 터주며 서서히 죽이는 방식으로/ 주말은 부활한다.// 절반쯤 죽어/ 싱싱하게 꿈틀거리며/ 극한 통증을 넘어 내게로 오는 것들/ 러시아産 킹크랩, 랍스터.// 딱딱한 몸집에 탈피의 고통이 몇 번이나 다녀갔나 태연한 저울은/ 쉬지 않고 그들의 죽음을 계산하지만 절망의 값은 0이다.// 쉭쉭 뜨거운 콧김을 내뿜는 길가에 늘어선 대게집 찜통들/ 30분마다 붉은 꽃을 활짝 피우며/ 쌓아놓은 물의 지층이 허물어진다.// 가족나들이에 들끓는 주말을 맛보려고 들고나는 접시가 층층이다./ 불안한 호흡이 신의 결재를 기다린다.//

모래척추 / 마경덕
평생 누워있는 사막,/ 바람이 불때마다 와르르 척추가 흘러내린다// 모래척추는 사막의 고질병,// 수렁과 유사流砂는 살아있는 뼈를 삼켰지만/ 사막의 등뼈는 자라지 않았다// 척추가 무른 아비 어미도/ 그렇게 평생을 뒹굴며 늙어가고/ 흙바람이 불 때마다 낙타의 무릎만 단단해졌다// 만년설에 목을 축이고/ 미라가 된 천년 묵은 호양나무 지팡이를 짚고/ 몇 걸음이나 걸었나// 물결처럼 건너간 바람의 발자국을 신어보아도/ 모래의 유전자는 바닥으로 흘러내린다// 저 모래척추를 무엇으로 부축할까// 무릇, 등뼈는 수직이어야 한다/ 수평이 되면 죽음과 가까워지는 것// 회오리를 붙들고 돌아눕는 사막/욕창 난 등이라도 말려야한다//

그리운 전당포 / 마경덕
풋살구나무에 참새가 고봉으로 열린 아침/ 쌀독 긁는 소리에/ 엄마는 아끼던 두루마기를 꺼냈다// 장롱 깊이 묻어둔/ 비단 꽃 두루마기를 펼치던 엄마는/ 와락, 새색시처럼 고왔다// 빚쟁이가 다녀간 날/ 밤새 늘어난 근심을 조심조심 보자기에 싸던 밤은/ 마루 끝에도 총총 별이 떴다// 금반지도/ 시계도/ 은수저도 다 떠나고/ 끝까지 곁에 남아 엄마를 지키던 모란꽃 두루마기 한 벌// 언니 입학금 마감 날에도 슬그머니 엄마를 끼고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더니,// 어느 날/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엄마의 마지막 호사(豪奢)도 그렇게 가버렸다//

하관 / 마경덕
반듯한 오후 한 시의 귀퉁이가 허물어지고/ 세상의 끝, 출구는 없었다/ 어머니는 마지막 인사를 두 손에 쥐고/ 갱도를 따라 캄캄한 막장으로 들어가셨다// 알고 보니 죽음은/ 생전의 걸음처럼 뒤뚱뒤뚱 무게를 달아 눕히는 것/ 얼마나 모진 삶이었는지 관이 기우뚱거리고/ 멀어서, 바빠서, 힘들어서/ 이런 저런 핑계가 매달려 고인의 무릎이 휘청거렸다// 빙 둘러서서/ 밀린 불효를 지우듯 몇 삽의 흙을 끼얹고 남은 울음까지 얹어드렸다/ 입을 가슴에 묻고 가신 어머니, 아홉 자식의 허물을/ 한 마디도 흘리지 않으셨다// 호상이라는 말로 서로를 위로했다// 긴 병치레에 통장의 잔고는 바닥이 나고/ 유산 한 점 없어 멱살잡이할 이유가 없었다// 빗물에도 녹슬지 않는 단단한 흙/ 고인의 한숨이 새지 않도록 인부들은 시룻번을 붙이듯/ 봉분을 다졌다/ 지상에서 치르는 마지막 못질이었다//

뒤끝 / 마경덕
버스 뒷좌석에 앉았더니 내내 덜컹거렸다/ 버스는 뒷자리에 속마음을 숨겨두었다/ 그가 속내를 꺼냈을 때도 나는 덜컹거렸다/ 뒤와 끝은 같은 말이었다// 천변川邊이 휘청거렸다/ 나무의 변심變心을 보고 있었다/ 이별을 작심한 그날부터 꽃은 늙어/ 북쪽 하늘이 덜컹거렸다/ 코 푼 휴지를 내던지듯 목련은 꽃을 던져버리고/ 남쪽을 향해 돌아앉았다// 발밑에 널린 파지를 밟으며 걸었다/ 자줏빛 눈물이 신발에 묻어왔다// 길가 벚나무가 검은 버찌를 버릴 때도/ 보도블록은 잉크빛이었다/ 뒤가 어두울수록 앞은 환하고 눈이 부셨다// 뒤끝이 지저분한 계절이었다//

칼집 / 마경덕
저 집이 고요하다/ 노련한 주인은 바람의 목까지 벤 전적(前績)이 있다/ 팔을 휘두르던 무사(武士)는/ 끝내 집에 들지 못하고 칼만 제 집으로 돌아왔다/ 과업을 마치고 싸늘히 식은/ 침묵을 달아보니 사백년이다/ 저 잠을 깨우면 잠복한 살의(殺意)가 튀어나와/ 누군가의 목을 겨냥하리라/ 비명을 맛본 칼은 피맛을 잊지 못한다/ 눈을 가리고 정확히 급소를 찾아낸 사내처럼/ 집이 열리면/ 단칼에 어둠의 목까지 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함부로 나서지 않는 칼/ 칼집도 제게 꼭 맞는 몸만 모신다/ 둘은 혈연의 관계,/ 더러 길을 놓치는 천형(天刑)도 있어/ 아들의 귀가를 기다리는 늙은 어미처럼/ 빈 칼집은 불안하다/ 칼날끼리 불꽃을 토하는 칼/ 미쳐 날뛰던 기운도 집에 들면 온순하다/ 칼을 달랠 수 있는 건/ 칼집뿐이다//

어처구니* / 마경덕
나무와 돌이 한 몸이 되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 근본이 다르고/ 핏줄도 다른데 눈 맞추고/ 살을 섞는다는 것/ 아무래도 어처구니없는 일/ 한곳에 붙어살며 귀가 트였는지,/ 벽창호 같은 맷돌/ 어처구니 따라/ 동그라미를 그리며 순하게 돌아간다/ 한 줌 저 나무/ 고집 센 맷돌을 한 손으로 부리다니/ 참 어처구니없는 일//
* 어처구니 : 맷돌의 나무 손잡이

두부의 공식 / 마경덕
저것은 네모난 공식/ 문재를 풀면 네 개의 각을 억을 수 있다/ 사방을 나누고 눈어림으로 재는 중량/ 해답은 말랑해서 비닐봉지에 담기거나 팩에 담긴다// 첫 문장은 함부로 구르고 튕겨나가는 딱딱한 공식/ 변수가 있어 정량을 더하고 거품을 뺐다// 회오리처럼 휘돌다가도 뜨거운 불길만 무사히 건기면/ 잘 될 거라 믿었던 사내/ 완성품을 기다리며 허기진 시간을 견뎠다/ 간수를 넣은 과정만 통화하면 쓸만한 물건이 될거라고/ 부글거리는 잡념까지 걸러내었다// 순두부처럼 뭉글거리는 아들에게/ 반듯하게 살아라/ 물러터지면 아무짝에도 못 쓴다/ 네모난 틀은 아버지의 공식// 거름포를 깔고 뭉친 마음을 부었지만 반듯한 각은 얻지는 못했는지/ 구치소 앞 두부를 들고 기다리는 아버지/ 저기 물렁한 두부 한모 걸어 나온다//

시골집 마루 / 마경덕
마루는 나이를 많이 잡수신 모양입니다/ 뭉툭 귀가 닳은 허름한 마루/ 이 집의 내력을 알고 있을 겁니다/ 봄볕이 따신 궁둥이를 디밀면/ 늘어진 젖가슴을 내놓고, 마루귀에서/ 이를 잡던 쪼그랑할멈을 기억할 겁니다/ 입이 댓발이나 나온 며느리가 아침저녁/ 런닝구 쪼가리로 박박 마루를 닦던/ 그 마음도 읽었을 겁니다/ 볕을 따라 꼬들꼬들 물고추가 마르던 쪽마루/ 달포에 한 번, 건미역과 멸치를 이고 와/ 하룻밤 묵던 입담 좋은 돌산댁이 떠나면/ 고 여편네, 과부 십 년에 이만 서 말이여/ 구시렁구시렁 마루에 앉아 참빗으로 머릴 훑던/ 호랑이 시어매도 떠오를겁니다/ 어쩌면 노망난 할망구처럼 나이를 자신 마루는/ 오래전, 까마귀가 되었을지도 모르지요/ 눈물 많고 간지럼 잘 타던 꽃각시/ 곰살맞은 우리 영자고모를 잊었을지 모르지만,/ 걸터앉기 좋은 쪽마루는/ 지금도 볕이 잘 듭니다/ 마루 밑에 찌든 고무신 한 짝 보입니다/ 조용한 오후/ 아무도 살지 않는 빈 마루에 봄이 슬쩍 댕겨갑니다//

퍼즐게임 / 마경덕
봄이 출하되었다/ 봄을 가장 많이 소비하는 시인들이 몰려들어/ 맨얼굴로 바람을 만져보고/ 육질이 연한 봄을 구입했다/ 재생 뻐꾸기테이프, 냉이초록접시, 민들레바람세트… 봄의 밀도를 올려줄 재료들이 와르르 책상으로 쏟아졌다// 바람의 힘줄도 말랑해져서/ 매만지기 좋은 계절,// 어떻게 특별한 봄을 만들 수 있을까// 아지랑이를 아지랑이로 민들레를 민들레로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은/ 봄을 구기고 찢고 비틀었다/ 가끔 형체를 알 수 없는 기형의 봄도 태어났다// 바람의 본을 뜨고 햇살을 오려 끼워 맞추자/ 봄은 한 장으로 압축되었다. 완성된 봄은/ 메일로 전송되고 출판사로 날아갔다/ 봄바람이 50%만 섞여도 적중이다. 남은 절반은 목에 걸린 머플러의 몫// 봄을 사용한 소비자들/ 당신들은 왜 짜릿하고 상큼한 봄을 개발하지 않는 거죠?/ 톡 쏘는 맛도 없이 밍밍하다고, 그 맛이 그 맛이라고/ 여기저기서 불만을 터트렸다// 붉은 개나리 검은 목련이 나온다는 소문이 퍼졌지만/ 늘 정답 같은 봄만 찾아왔다//

집들의 감정 / 마경덕
이제 아파트도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푸르지오, 미소지움, 백년가약, 꿈에 그린, 이 편한 세상…/ 집들은 감정을 결정하고 입주자를 부른다// 생각이 많은 아파트는 난해한 감정을 보여주기도 한다/ 타워팰리스, 롯데캐슬베네치아, 미켈란, 쉐르빌, 아크로타워…/ 집들은 생각을 이마에 써 붙이고 오가며 읽게 한다/ 누군가 그 감정에 빠져 입주를 결심했다면/ 그 감정의 절반은 집의 감정인 것// 문제는/ 집과 사람의 감정이 어긋날 때 발생한다/ 백년가약을 믿은 부부가 어느 날 갈라서면/ 순식간에, 편한 세상은 불편한 세상으로 바뀐다/ 미소는 미움으로, 푸르지오는 흐리지오로 감정을 정리한다/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진달래, 개나리, 목련, 무궁화 아파트는 제 이름만큼 꽃을 심었는가/ 집들이 감정을 정할 때 사람이 간섭했기 때문이다// 금이 가고 소음이 오르내리고 물이 새는 것은/ 집들의 솔직한 심정,/ 이제 집은 슬슬 속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시간의 고리 / 마경덕
향기를 탕진한 꽃의 낯빛과/ 책장에 갇혀 늙어가는 고서古書의 표정이 동일하다/ 점점 줄어드는 지우개의 불안과/ 전깃줄에 매달린 빗방울의 여생과/ 장롱 속에서 사라진 나프탈렌의 부재를 생각하는 오후/ 흘러간 것들의 나라는 어디인가/ 서랍에 묶인 만년필의 구년묵이 과거는/ 철을 놓친 온열기의 싸늘한 체온이다/ 카펫에 찍힌 의자의 발자국처럼/ 가슴에 새겨진 사람도 초침소리처럼 흘러갔다/ 벽지 속에 핀 꽃들의 누추한 화려함/ ‘벌써’와 ‘아직’ 사이에 수요일이 끼어있다/ 이곳과 저곳의 경계는 선명하고/ 저곳에서 이곳으로 오는 길은 모호하다/ 수요일은 목요일에게 목요일은 금요일에게/ 하릴없이 자리를 내어주듯/ 병실에 두고 온 꽃처럼 그렇게,/ 어쩔 수 없는 것들은 여전히 어쩔 수 없다//

귓속말 / 마경덕
챙겨간 마음/ 차마 꺼내지 못했다// 하도 만지작거려 귀퉁이가 닳아버린,// 동백꽃 피는 지지난해도/ 접시꽃 지는 지난해도// 눈치만 보다가 그냥 들고 돌아왔다// 어느 날/ 송이 째 툭 져버린 아버지// 쑥스럽고 부끄럽던 그 한마디/ “아버지 사랑해요.”// 마지막 가시는 길/ 아무도 모르게 귀에 넣어드렸다//

밀서의 계절 / 마경덕
철새들이 밀서를 물고 날아온다// 문맹인 새들은 궁금증을 나무에게 부탁하고 나무는 구름부호를 해독한다/ 11월이 12월에게 보낸 밀서에는 바람과 눈이 반반半半이었다// 첫 문장은 늘 뼈가 시리다// 하늘과 지상으로 밀서가 오가는 동안 벽은 달력을 한 장 찢어 던지고/ 피가 마른 들판은 바람의 행로를 받아 읽었다// 꼬깃꼬깃 접힌 밀서는 끝내 그 언덕 나무 밑에 묻었다/ 그에게 들키지 않아 불행하다고 겉표지가 닳은 비망록에 나를 적었다/ 어디에도 다행인 밀서는 없었다// 끝 문장은 늘 물음표인 밀서들// 하여 계절은 그치지 않는다 마침표가 없는 밀서를 물고 철새가 돌아갈 때/ 비밀을 알아낸 나무들은 백지로 돌아간다//

 

명태야, 명퇴야 / 마경덕

눈을 뜨고 처마 끝에 매달린 명태/ 건들건들 바람에 끌려/ 북어가 될 젖은 명태/ 방망이에 흠씬 두둘겨 맞고,/ 명태가 아닌 북어라고/ 깨달을 명태// 끈에 묶인 아가미는/ 벼랑 끝에 걸리고/ 꼬리는 허공에 놓여있다// 이제, 그만/ 무거운 바다를 내려놓아라/ 가벼운 생을 내려놓아라// 너는/ 명예롭게 퇴직했다// 바다에게 명퇴 당한 명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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