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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잊혀진 왕국 / 서영윤

by 부흐고비 2021. 11. 17.

2021년 제12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역사는 침묵 속에 살아 숨을 쉰다. 겹겹이 둘러싸인 산허리를 돌아서면 산수화 같은 마을이 펼쳐진다. 비슬산 자락에 물이 달을 품는 수월리(水月里)다. 깊디깊은 산골이라 실개천만 있을 뿐 작은 물웅덩이 하나 없어 도저히 달이 내려앉을 수 없는 촌락이었다.

마을 이름을 천 년을 내다보고 지었을까. 긴긴 세월 동안 조용하고 고요했던 이곳에 댐이 들어섰다. 댐이 가두어 놓은 물 위로 달이 내려앉았다. 비로소 수월리는 제 이름을 찾았다.

물과 달은 혼자 오지 않았다. 댐을 건설할 때 무려 삼천육백여 점의 유물이 땅 깊은 곳에서 기지개를 펴고 세상 밖으로 나왔다. 유물은 신라 백제 고구려 삼국 시대의 것도 아니요. 선사 시대의 것도 아니었다. 이서국(伊西國)이 남긴 자취였다.

낯선 이름 그 역사, 일천 칠백 년간 알려지지 않았던 이서국은 어떤 나라인가. 경산의 압독국, 상주의 사벌국, 의성의 조문국, 울릉의 우산국처럼 씨족국가에서 번창한 부족국가였다. 이서국은 일찍이 나라의 틀을 세우고 국력을 키워 주변국보다 위풍이 당당했다. 그 위세를 몰아 신라 금성으로 진격했다. 삼국유사, 삼국사기, 동국여지승람에는 신라 14대 유례왕(서기 297년) 때 “이서국인들이 신라 금성을 침공했다. 금성이 함락 직전 대나무 잎을 머리에 꽂은 죽엽군들이 나타나 신라를 구했다”라고 적어 놓았다. 신라를 위태롭게 간담을 서늘케 한 용맹한 군사들은 이서국 병사들이었다. 이서국이 금성을 침공해 승리했다면 신라는 사라진 나라로 기록되지 않았을까.

신라 금성을 함락하지 못하고 퇴각한 후, 이서국은 쇠락의 길로 걸었다. 침공을 당한 신라는 오히려 국력이 강대해졌다. 그 후 오 년 뒤 신라 유례왕(서기 302년)은 강성해진 군사들을 이끌고 이서국으로 밀고 들어왔다. 주변 부족국가를 흡수한 강력한 신라군의 공격에 이서국은 결국 패망하고 말았다.

삼국유사는 이 날을 건호십팔년벌이서국멸지(建虎十八年伐伊西國滅之)로 기록하고 있다. 이서국이 군사를 앞세워 신라를 침략한 대가는 나라를 잃은 왕국으로 한 줄의 글로 역사 속에 묻히고 말았다.

손자병법의 손무는 국력을 이루는 세 가지의 핵심 축은 군사력, 물력, 국민들의 신뢰라 했다. 나라를 위해 부득이 버려야 한다면 제일 먼저 군사력이라고 한다. 이서국은 국력이 번창하면서 군사력을 앞세웠고 되돌릴 수 없는 멸망의 길을 걸었다.

신라군에 맞서 마지막 결전을 벌인 곳은 청도군 청도읍 거연리 오례산성이다. 달무리처럼 희미한 토성의 흔적이 당시의 항전을 오롯이 보여준다. 오례산성은 요새였다. 이서국으로 들어오는 길목을 지키는 목진지로 산과 산으로 둘러싸인 골짜기 능선에 자리 잡았다. 이서국 병사들은 며칠 낮, 며칠 밤을 이곳에서 신라군의 칼날과 맞섰다. 화살은 꽂히고 칼끝이 파고드는 치열한 전투에서 치욕스럽게 목숨을 구하기보다 장렬한 죽음을 받아들였다. 일사불퇴의 용맹함도 물밀 듯 밀려오는 신라군을 감당하지 못했다. 병사들은 하나둘 검붉은 핏물이 되어 오례산성 성벽을 적시며 물들어 갔다.

그날의 상흔을 따라 산성으로 향한다. 산마루를 오르는 오솔길은 낙엽들로 인해 길인지 능선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길이 낙엽 속으로 스며들었다. 저 고스러진 이파리도 이서국처럼 푸름에서 단풍으로 밟으면 바스러지는 낙엽으로 추락했으리라. 발을 휘저어 낙엽을 헤치며 나아간다.

허물어진 성벽 주춧돌에 앉아 숨을 고른다. 동쪽에는 동창천이 흐르고 서편에는 청도천이 회룡을 만들며 내려온다. 능선이 아니라면 쉬이 오를 수 없는 곳, 사방의 움직임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산성이 자리 잡았다. 여기라면 신라군에 맞서 배수진을 치고 결사 항전을 펼칠 만한 곳이란 걸 금방 알아차린다.

수령을 알 수 없는 아름드리 후박나무 우듬지에 산까치가 보인다. 침입자를 경계하듯 꼬리털을 쫑긋이 세우고 올렸다 내렸다 반복한다. 이곳은 삶과 죽음이 따로 없는 곳인가. 골바람에 떨어져 흩날리는 후박나무 잎들이 시공(時空)을 뛰어넘어 이서국 병사들처럼 산성 갈대밭을 뒹굴며 피를 흘리며 울부짖는 듯하다. 생(生)과 사(死), 기억의 회로는 사십 년 전으로 되돌린다.

분절과 금절의 땅 비무장지대는 연두색 물결로 오월을 맞이하고 있었다. 수색소대인 나는 소대원들과 함께 남방한계선으로 들어갔다. 산봉우리 칠부 능선에 오를 때였다. 귀가 날아갈 듯한 총소리와 함께 총알이 날아왔다. 찰나, 누구 할 것 없이 가슴팍을 땅에 박고 엎드렸다. 첨병으로 나선 소대원은 소리 낼 여유도 없이 날아온 총알에 맞아 이미 쓰러졌다.

무장공비였다. 엎드린 자세에서 날아오는 총알에서 살아 보고자 팔을 뻗어 주먹만 한 돌이라도 가슴 앞으로 당겼다. 정신을 가다듬고 반격에 나섰다. 수적 우세인 수색대의 총구에서 불을 뿜었다. 수류탄이 터지고 아비규환이었다. 총성이 멎자 무장공비 한 명은 사살되었고 조금 전 담배를 나눠 피웠던 전우 한 명은 주검으로, 수류탄 파편을 맞은 전우들은 숨을 헐떡이며 고통을 참으려 몸을 뒤틀고 있었다.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주검을 껴안으며 소대원들은 짐승처럼 울었다. 전쟁터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으리라.

저 멀리 기와 등골 같은 능선을 지나 동쪽 하늘 아래는 승리국으로 역사에 남긴 신라 금성의 경주가 버티고 있다. 천칠백 년이 지난 오늘은 경주와 청도는 한 시간 만에 닿는 거리이다. 지척이고 이웃인 이서국과 신라는 무슨 원한이 쌓였기에 원수처럼 쳐들어가고 목숨을 빼앗고 했을까. 역사 속에 역사를 묻어 둔 것 같다.

청도 오일장 한 켠, 나이 든 대장장이는 이서국의 노병처럼 이마에 수건을 두르고 모루에 망치를 내리치며 칼을 다듬질한다. 난전에 곱창국을 끓이는 아낙은 망치소리가 흥겨운지 파를 썰며 어깨를 들썩거린다. 옛 정취가 물씬 묻어나는 장터를 보노라니 천칠백 년 동안 잊혀진 이서국의 숨결을 보는 듯하다.

왕궁이 있었던 백곡산성을 곁에 둔 청도군 이서면사무소에‘이서 고국(伊西 古國)’이란 표석이 있다. 이서국 땅 위에서 살아감을 말한다. 마주 보는 남산에 운무가 걷히자 이서국 왕이 신라군에 쫓겨 기이한 은왕봉(隱王奉)이 측은하게 다가온다. 잊혀진 고국, 침묵의 역사는 말문을 트려 꿈틀거린다.

수상소감

공모전에 글을 응모하고 발표 날을 기다리는 것은 어찌 보면 취준생과 다를 바 없을 듯하다. 응모할 때는 금상, 대상을 받을 만큼 자신감이 넘치지만 정작 발표일이 다가오면 그 자신감은 사라지고 입선이라도 턱걸이 했으면 하는 간절함으로 애를 태운다. 친구와 통화 중에 지역번호가 053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직감으로 대구일보가 아닐까 하며 통화 중 대기를 누르고 전화를 받았다. “수필대전에 수상을 축하드립니다”며 여직원의 목소리이다. 숨 쉴 틈도 없이 대꾸했다. “무슨 상입니까” 하자 “입선에 수상 하셨습니다”고 했다. “또 입선입니까”라며 서운함을 감추지 못하자 여직원은 “입선도 대단한 거죠”라며 나를 달래는 듯 전화를 끊었다. 대상, 금상을 꿈꾸다 입선이라도 했으면 하는 바람이 막상 입선이 되자 섭섭한 마음을 가눌 수 없는 나의 변덕스러움과 이중성의 끝은 어디까지일까. 결국, 저 변덕스러움은 내 안에 허황된 욕망의 꿈틀거림이다. 정신을 차리고 정진하자. 2022년 공모전을 기다리며….
△청도도서관 오후수필반 △제6회 청송 객주문학대전 입상 △제11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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