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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저녁은 경계에 걸린다. 낮의 끝과 밤의 시작 사이. 낮이라 하기에도 그렇고 밤이라 하기에 어정쩡한 시간. 차를 마시기엔 늦고 술을 마시기엔 이르다. 무엇을 시작하기엔 좀 늦은 것 같고, 그렇다고 포기하기엔 아까운 인생의 절반을 지난 시점 같다. ‘아직도’와 ‘벌써’에서 망설이는 애매한 시간. 미적거리다 보면 어느새 밤이 되고 만다. 인생이란 것이 모두 그러하듯.

저녁은 슬그머니 온다. 서쪽 산등성이에 결렸는가 싶은데 어느새 그림자를 이끌고 그렇게 시치미 떼고 온다. 고양이 담 넘어 집 뒤로 사라지고 새들도 둥지 찾아 날아가면 그제야 저녁은 눈치 보며 깃든다. 도로는 차량이 넘치고 조용하던 거리는 사람들로 붐빈다. 슬그머니 시작된 저녁. 길이 막히고 거리는 북적인다. 순간이다. 나이도, 시간도, 삶도 마법처럼 처음엔 ‘슬그머니’ 오지만 어느 틈에 순식간이다.

저녁은 사물의 채도를 바꾼다. 저녁 하늘빛, 분홍색인가 하면 오렌지색이고 퍼플인가 하면 블루다. 그것마저 회색으로 바뀌면 농도가 짙어서 사방은 어둠에 잠긴다. 건물들도 색을 거두고 무채색의 명암으로 바뀐다. 밤처럼 캄캄하지도 않고 한낮처럼 환하지도 않은 확실치 않은 회색이 거리로 스민다. 확실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윤곽이 희미해지고 잡으려 해도 잡혀지지 않는다. 저녁 어스름, 그것이 저녁의 주조색이다.

저녁은 소란하다. 조용하던 집안은 갑자기 바빠진다. 도마에 칼질하는 소리, 된장 항아리 뚜껑 여는 소리, 압력솥 추가 흔들리는 소리, 물소리가 들린다. ‘지안아, 상 펴라.’ 엄마의 바쁜 목소리, 일 끝낸 아버지가 돌아와 티브이를 켜는 소리가 들린다. 골목으로 난 문들은 주섬주섬 아이들을 빨아들인다. 마지못해 들어온 아이의 투덜대는 소리.

저녁은 냄새로 공복을 자극한다. 밥을 뜸 들이는 냄새, 찌개 끓이는 냄새, 고등어를 굽는 냄새, 그 냄새는 집 나간 것들을 불러들인다. 새끼들은 어미를 부르고 어미들은 새끼를 부른다. 아이를 부르고 회사 간 가장을 부른다. 일하던 사람들은 연장을 챙기고 서류를 챙기고 일터를 나온다. 자동차를 타고, 전철을 타고, 만원 버스를 타고, 환승을 하고 집으로 간다. 아침에 나갔던 가족들이 저녁 냄새에 꿰어 집으로 달려온다.

돌아갈 곳이 없는 것들의 저녁은 서글프다. 주인 잃은 개는 다리를 절며 남의 집 대문을 기웃거리고 집이 없는 노숙자는 이슬을 피할 곳을 찾는다. 저녁이 되면 집이 없는 사람들은 갑자기 불안해진다. 퇴근길이 피곤해도 조촐한 저녁상과 익숙한 얼굴이 기다리는 집으로 간다. 그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서글프다.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은 거리에서 거리로 방황할 수밖에 없다.

결혼을 하고서 처음 얼마간은 퇴근할 때 친정으로 차를 몰았다. 가다 보면 어느새 나는 친정집 앞에 가 있었다. 습관이란 이름의 기억은 그럴 때 서글프다. 시댁으로 차를 돌릴 때의 아쉬움. 낮은 천장 이래 저녁 밥상에 둘러앉았을 친정 식구들 얼굴. 편하고 익숙하고 따뜻한 친정집으로 한 발짝 들여놓고 싶은 간절함을 깨물며 돌아가던 길. 시야가 흐려져서 도로 갓길에서 멈추고 다시 가다가 멈추면서 시댁으로 가는 길을 천천히 돌아서 가야 했다. 나의 이십 대에는 그렇게 시렸던 많은 저녁이 있었다.

저녁은 안식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가족이 없는 사람들에겐 두려움의 시간이지만 차려진 식탁이 있고 반기는 식구가 있는 사람에겐 기다려지는 시간이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돌아갈 곳을 찾으러 헤매지 않는다. 아이가 내 키를 따라잡기 시작하면서, 된장찌개가 맛을 내기 시작하면서 나는 가족이 돌아갈 식탁이 되었고, 보금자리가 되었고, 그리고 고향이 되었다. 이제야 비로소 나는 누군가가 돌아와서 쉴 저녁이 되었다.


최지안; 에세이문학으로 등단(2015). 제6회 매원수필문학상 수상.

         수필집 『행복해지고 싶은 날 팬케이크를 굽는다』 『비로소 나는 누군가의 저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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