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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나의 남자 / 최지안

부흐고비 2021. 12. 6. 08:28

차를 수리하는 일이 잦아졌다. 차도 나이가 드니 사람처럼 병원을 자주 오간다. 식구들은 타던 말이 늙었으니 젊은 말로 바꾸란다. 아직 쓸 만한 것 같은데.

자동차 매장을 다니며 보니 차마다 개성이 제 각각이다. 중형 세단, 스포츠카, 소형차. 가격과 성능을 비교하다가 차가 남자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면, 여성의 남성에 대한 선호도를 차에 비유한다면 어떨까?

20대 여성이라면 스포츠카를 고르지 않을까 싶다. 카리스마 짙은 외모에 배기량 넘치는 에너지, 단도직입적인 제로백이 관심의 rpm 게이지를 올릴 것이다.

30대라면 고가의 승용차를 고를 것이다. 그 즈음의 여자들은 경제적 능력을 가장 우선순위에 두지 않을까 싶다. 여성은 배우자를 고를 때 본능적으로 사냥 잘하는 수컷을 선호하니까. 결혼을 하고 난 후에는? 수시로 연료탱크를 점검하며 현실적인 준중형 승용차로 꼬리를 내리겠지.

40대 이후의 여자들은 어떨까. 능력 있는 중형세단? 근육질의 우람한 SUV? 아니, 깜찍한 경승용차가 아닐까? 내 주위 아줌마들은 소년처럼 예쁘장한 남자를 좋아한다. 미소년 하면 떠오르는 대명사가 아이돌 그룹이다. 그들을 따르는 수많은 팬이 10대, 20대만은 아니다. 아줌마 팬들도 만만치 않다. 아줌마 특유의 경제력과 기동력을 바탕으로 콘서트와 팬 미팅 가속도를 올린다. 이들이 사랑하는 방식은 경차처럼 가볍다. 열렬하지만 뒤탈이 없어 연비 또한 좋다.

내 취향은 중형 승용차다. 구레나룻에 은발이 적당하게 섞인, 따뜻한 눈빛에 무게감 있는 음성의 하드웨어와 감성적인 마인드에 통찰력을 장착한 소프트웨어를 선호한다. 비굴하지 않은 겸손과 느긋한 유머에 흥분한다. 거기에 배려와 예의를 옵션으로 갖춘, 성능 좋은 엔진을 갖췄다면 나는 영혼까지 꺼내 헐값에 넘겨버릴지 모른다.

열정적이고 힘 있는 젊음도 좋다. 그러나 미숙함과 무모함은 젊음이 갖고 있는 결함이다. 그렇다고 신(神)은 리콜하지 않는다. 인간은 나이가 들어서야 스스로 노련미를 터득한다. 연륜은 젊음과 패기를 가져가는 대신 시간과 경험으로 다져진 노하우를 선물하므로.

중년은 인생의 황금기다. ‘중년의 발견’이라는 책을 쓴 데이비드 베인브리지는 양식을 모으는 인간의 능력이 정점을 찍는 시기를 45세로 봤다. 기운과 골량과 민첩성은 잃지만 오랜 시간 축적된 노하우와 경험이 있기 때문에 중년을 인생의 정점에 놓았다. 요즘은 이 시기를 55세로 늦춰야하지 않을까 싶다.

내가 사랑한 남자도 중년이었다. 그리스인이었던 그를 고등학교 때 내 방 책장에서 만났다. 카잔차키스가 탄생시킨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조르바. 그가 생각하는 방식, 여린 것들을 대하는 태도, 이념이나 국가관에 지배받지 않는 사고를 좋아했다. 그런 사고를 할 수 있는 중년이라는 나이를 흠모했다. 많은 착오와 실패와 눈물로 사포질한 부드러운 나이. 유연한 사고와 통찰력으로 다듬어지는 나이, 중년.

사람으로 말한다면 중년인 내 차. 연식은 좀 되었어도 늘씬한 몸매와 은은한 실버톤의 클래식한 외모를 가졌다. 커브를 돌 때에는 흐트러지지도 쏠리지도 않게 신사처럼 나를 에스코트한다. 상대의 허리를 감싸고 턴을 하는 무용수처럼 부드럽고 든든하다.

만약 이 차가 남자라면 나는 벌써 넘어갔으리라. 매일 차를 몰고 오르가즘의 언덕을 오르내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이미 나의 남자나 다름없다. 내 엉덩이 사이즈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차로 말한다면 중고인 나. 새 차 구입은 미뤄두고 올봄엔 애인을 몰고 벚꽃이 흐드러진 길을 달려보리라. 너는 이제 내 연인이라고 속삭이리라. 지금이 가장 화려한 시기라고. 그대를 응원한다고. 중년의 애인 위에 올라타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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