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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이령 시인

부흐고비 2021. 12. 13. 08:24

이령 시인
경북 경주 출생. 동국대 법정대학원을 졸업하였다. 2013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신인문학상을 수상하여 등단하였다. 저서로 시집 『시인하다』, 『삼국유사 대서사시 사랑 편』. 스토리텔링집 『대왕소나무 발화법-금강소』, 한중작가공동시집 『망각을 거부하며』 기타 저서로 『Beautiful in Gyeongju-문두루비법을 찾아서』가 있다. 동리목월기념사업회이사. 웹진시인광장 부주간. 문학동인 Volume 고문.

 



직소퍼즐 / 이령
굿모닝! 난 맨홀뚜껑이야/ 가로세로 높이보단 대각선이 좋아/ 하지만 사각은 사양할게 체할 수 있잖아/ 구름 지름이 내 입보다 큰 법은 없으니까 원형을 지향하지// 굿앱터눈 난 엘리베이트야/ 사방이 내 눈이지/ 10층의 넌 1층 누르고 외출을 하고/ 돌아올땐 7층 누르고 4층은 걸어가지// 넌 난장인가봐/ 키 작은 넌 비오는 날엔 우산으로 엘리베이트 버튼을 누르지/ 지하에서 옥상으로 다시 옥상에서 10층은 비켜가고/ 지금쯤 지상은 무사할까 비상벨이 필요하니?// 여기서 하나 더 우린 누굴까, 맞춰볼래?/ 스핑크스 앞에서 죽은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옆 보올엔 독약이 없지/ 스핑크스? 아니 그 앞에 죽은 안토니?// 아니아니 독약을 든 클레오파트라? 왜 죽은걸까 그 여자?/ 고양이가 엎지른 어항에서 탈출 했지만/ 절로 호흡법 모르는 우린 죽은 금붕어 커플 이었거든/ 언제나 난 너의 사각판 너머 둥근 햇살이고 싶었건만// 어디로 흘러 가야만 하니?/ 가끔 네 성기에서 누런 똥이 묻어나지만/ 난 애써 외면하지/ 풀리지 않는 숙제 같은 넌 내 속에서 아프게 박힌다니까// 그래 넌 온몸이 가시였구나/ 내게서 푸른잎이 되지못한 한 편의 비루(悲淚)/ 세면대 거울에서 걸어나오는 널 어떻게 정의할까/ 그것도 매일아침마다 말이야// 어떤 에로티시즘으로 우리들의 아침을 열어줄래/ 부기로 자릴 옮긴 아침의 위력/ 사실 넌 사각의 틀에 갇힌 내 손톱이야/ 새살로 돋는 아침의 나신(裸身), 넌/ 아물지 않는 나의 상처// 살면서 내려지는 이름들을 너에게 전하려다/ 점점 동글동글 모가 닳고 있나봐//
* 2013년 《시사사》 신인문학상 등단시

시인하다 / 이령
난 말의 회랑에서 뼈아프게 사기 치는 책사다/ 바람벽에 기댄 무전취식 속수무책 말의 어성꾼이다/ 집요할수록 깊어지는 복화술의 늪에 빠진 허무맹랑한 방랑자다// 자 지금부터 난 시인是認하자// 내가 아는 거짓의 팔 할은 진지모드/ 그러므로 내가 아는 시의 팔 할은 거짓말/ 그러나 내가 아는 시인의 일할쯤은/ 거짓말로 참 말하는* 언어의 술사들// 그러니 난 시인詩人한다// 관중을 의식하지 않기에 원천무죄지만/ 간혹 뜰에 핀 장미에겐 미안하고/ 해와 달 따위가 따라붙어 민망하다/ 날마다 실패하는 자가 시인** 이라는 것이 원죄이며/ 사기를 시기하고 사랑하고 책망하다 결국 동경하는 것이 여죄다/ 사기꾼의 표정은 말의 바깥에 있지 않다/ 그러니 詩人의 是認은 속속들이 참에 가깝다//
* 장콕토
** 이성복

자명한 오늘 -꺾꽂이를 하다가 / 이령
지금 내 손가락은 꽃의 위험한 확증적 가설이다/ 너는 불손한 마고할미의 굽은 손가락을 기다린 적 없으나/ 우리가 꿰뚫어 볼 수 없는 비린 생의 마디는/ 모두 향기로 돋을 것이니 꺾이는 것을 두려워 말자// 만약, 걸어온 시간의 흔적이 독을 품은 우리의 손끝에 있다 해도/ 너와 나는 꽃을 밟아 길을 만들지 말고 꽃이 피기를 기도하자/ 지금, 내 손가락은 또 한생의 격조 있는 말을 관통하는 중이다// 우리가 놓인 시간은 자명한 내일과/ 불확정한 오늘의 노래로 비명횡사 하는 것이니/ 사랑과 이별과 거부할 수 없는 어느 가설을 몰고 와서/ 꽃은 지금 선연한 안녕을 뚝뚝 고하는 것이다// 사색의 별빛과 수 만겁의 바람과 무수한 불멸의 밤들은/ 분분한 낙화落花의 회랑으로 내달리고/ 우리는 머나 먼 나와 가장 가까운 당신을 데려와/ 생의 마디에 꾹꾹 방점을 찍는 것이다// 태초 나를 매혹시키는 모든 것들은 불가해여서/ 나는 너를 모르고 너는 나를 모르고 우린 우릴 알려하지 않는다/ 이쯤에서 너는 다만 잠시 덜컹일 뿐,/ 비리게 찬란하게 죽어가는 것이다//

밤의 아리아 / 이령
빈 방에 누워 입각점을 찾는 난 망원경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밤이네 창 너머 미립자 별들도 혼자서는 길을 잃고 별무리 지는 밤이네 밤은 너무나 가혹한 미래여서 낮의 표정을 싹 갈아 치우네 소유거리에 들고 싶던 마당귀 소사나무조차 이참에 그림자를 접고 잠든 밤이네 밤은 세상의 모든 배반을 노래하는 디스토피아, 난 어머니 배속에서부터 어둠을 사랑 했네 성운으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그림을 벗어나기 위해 힘차게 어머니의 배를 두드리며 시간의 테이프를 감아 또각또각 그림자를 그리며 놀았네 어머니는 씩씩한 아들일거라 꿈꿨겠지만 망원경은 이미 수 만년동안 인간의 것은 될 수 없었네 이제 난 밤과 새벽의 경계에 서서 그림과 그림자가 어우러지는 꿈을 애달피 구상 하네 고서의 귀퉁이처럼 닳고 닳아 빈 방에 널브러진 난그림 너머 그림자마저 사랑하기로 하네 세상에서 내가 설 곳을 찾기엔 어둠은 너무 빨리 죽는다고 느끼는 밤이네 어둠의 장막을 걷고 고상한 야만인처럼 새벽이 또 밝아오네//

무늬와 무늬 사이가 멀다 -자동차 접촉사고 처리를 하면서 / 이령
​말의 무늬, 스타카토로 박히는 풍경, 내 심장은 크로스스티치, 지금 당신 목청은 라이트앵글스티치, 이 순간 배경은 죄다 아웃라인뱅글스티치라 하자 이 간극을 메우려면 뭐가 필요할까 지워야 할까 더 그려야 할까// 경고음 울리고/ 갓길에 차를 세우고 연락처를 주고받는 사이/ 우린 하나 무늬가 될 수 있을까/ 시각과 시각의 간극이 도안에 옮겨질 때/ 나 살고자하는 시간은 이미 지나버린 걸/ 이 순간 한길뜨기로 마무리 한다면 훨씬 수월하겠는데/ 당신 무늬를 내 의식의 도안에 옮겨보라니까/ 우리 위장무늬를 그려 봐/ 당신은 오늘 내게 가장 완벽한 무늬라니까/ 무늬의 속성을 거슬러 우리 눈빛은/ 드르륵 드르륵 바코드로 박히잖아/ 시간의 흐름은 각진 것들도 궁글리겠지/ 우린 서로의 무늬에 길들여질 수 있을지 몰라// 뱉은 말의 무늬는 가지런할 수 없잖아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 어디쯤, 난 어떤 무늬를 직조하는 중일까 최단거리는 직선이 될 수 없다는 거, 공간을 접으면 겹쳐진 순간 하나 점이 된다는 거, 가정은 필요치 않아 익숙한 자취만 남을 일, 그렇게 난 또 다른 당신의 무늬라니까//
* EH, 카아의 <역사란 무엇인가> 저서에서 차용.

불가사의한 방 / 이령
간(間)이다/ 유통기한 지난 통조림이다/ 썩은 시간의 냄새, 기류에/ 편승하지 못한 이들의 아우성이다/ 틸문, 천공의 성에 닿으려고 새삼/ 골똘한 밤이다/ 혁명가가 광장에서 깨진 사상을/ 수리한다/ 앵커가 거품을 물고 평화를 타전한다/ 찌지지직 비둘기가 구역질 한다/ 올리브 열매를 물고 온 비둘기가/ 소음에 깔려죽자 비린내가 진동한다/ 비둘기가 사라지자 죽기엔 너무/ 이른 앵커마저 평화를 가장한다/ 자취방 알전구 빛이 무지개로/ 뜬다/ 빨간 동그라미가 쳐진 구직(求職)란이/ 구신(仇信)란으로 굴절된다. 미궁이다/ 문을 열어 줄래!/ 人間과 時間과 空間 안에/ 밑도 끝도 없는 주문만 쌓여간다/ 봉인된 채 문드러진 문장들, 잘/ 길들여진 시간 안에서/ 이 생은 누구도 완성하지 못할 연대기다//

기하학적 사랑 / 이령
a./ 일이사분면에 애인들을 열거 한다/ 머리 없는(둘) 심장 둘인(셋), 다리 짧은(하나)// 하나가 다른 하나의 머리를 가르자/ 해가 없다/ 하나가 다른 하나의 심장을 파고들자/ 해가 무수하다/ 심장을 파며 머리를 가르고 한 점에서 절뚝이자/ 우리 사랑은 수렴되거나 발산 된다// b./ 삼사사분면에 꽃을 그린다/ 색 바랜(하나), 새순 핀(셋) 흐드러진(둘)// 하나가 다른 하나의 색을 거부할 때/ 해가 진다/ 하나가 다른 하나의 가슴에 새순을 피워내자/ 해가 뜬다// 색 바랜 후 새순 돋고 꽃가지 늘어지면/ 우리 사랑은 답이 없거나 무수한 극과 극에 닿는다// 겹치거나 평행을 반복하다/ 결국 원점을 향하는 우리 사랑은/ 무한대다//

박달재 신화 / 이령
Ⅰ.// 모두가 알 것 같았지만 모두 모르는 척 했다// 똬리 튼 살모사 눈알이 사금파리마냥 반들거리던 봄이었다/ 경운기 엔진 음 같은 이장의 목소리가 부고를 알렸다/ 회관 확성기 소리를 베낀 부추밭 꽃이랑이 일순 내밀한 비밀처럼 술렁거렸다// 과부였던 감실 할매가 대를 이어 청상이 된 며느리, 반성 댁을 지목할리 없었다// ”내사 암 것도 모린데이~, 갸가 이거를 목마르면 마시라꼬.....“// 치명(致命)은 몽롱했다/ 깨진 막걸리 사발만이 예리한 정황을 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침묵이 어리석은 자들의 미덕임을./ 누가 실존에 앞선 본질을 강요할 수 있나// 남편의 무덤에 풀 약을 치고 왔다는 알리바이는 허술해서 더 자명했다/ 그 밤, 해거름 아지랑이도 감실 할매의 혼인 냥 귀촉도 소리 따라 박달재를 울고 넘었다// 반성 댁의 곡소리만큼 밤은 깊고 마을은 흉흉했다/ 모두가 알 것 같았지만 모두가 모르는 척 했다//
Ⅱ.// 밤마다 시아비는 군에 간 서방대신 속곳 봉두에 불 지피고 낮이면 가로 톳 숭숭한 젊은 시아재가 영주 댁의 문지방을 들락거렸다// 철없는 시누이가 근거 있는 소문을 퍼트리는 동안 마을은 술렁거렸다 까마귀 까악까악 소리에 놀란 봇도랑 고마리가 오종종 줄지어 피던 봄 영주 댁은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았고 다음해 가을엔 꽃순 같은 딸을 낳아 삼대가 멍석말이를 당하고 동구 밖으로 쫓겨났다 시아비는 시아비, 시아재는 여전히 시아재, 삼촌이 오빠가 되었지만 영주 댁은 평온했다 서방의 전사(戰死) 통지서가 날아들던 날, 마을은 잠시 아주잠시 술렁거렸을 뿐 울바자 너머 소란을 잠재우듯 박꽃이 줄지어 피어나고 동구 밖 까치소리에 처마의 고드름이 녹아 죽담 돌 허벅에 또롱또롱 맺히는 봄, 마을도 곧 평온을 되찾았다// 돌을 던질 자격은 누구에게 있는가?/ 돌 대신 거울을 내 얼굴에 비춰본다/ 돌을 던져 거울을 깬다면 그것이 필경 마뜩한 윤리가 될 것이다//
Ⅲ.// 돌탑 보 얼음장이 쩍쩍 갈라지고/ 성황당 오방색 깃발도 웅웅 바람소리를 베꼈다/ 범 부엉이 당수나무 우듬지에 들명날명 암흑의 밤을 쪼아대면/ 마을의 전설이 소리로 부활했다// 당골의 점사는 잔인했다/ 난 자리에서 내리 여섯, 죽어나간 자식의 명을 이으려/ 초유도 먹이지 못한 아이의 목을 새끼줄에 묶고 박달재를 울고 넘었다는/ 감실 댁의 곡성일거라고들 했다// 만물에 응해도 자취가 없는 사람마을에/ 만물의 감응이 가혹한 모정을 타전하는 밤 이었다//

사사로운 별 / 이령
꿈에서 깨자 나의 공의는 가까스로 정의로웠다/ 테이블 아래 아베크족의 엉킨 다리를 이해하고 애인의 휴대폰 비밀번호를 존중하기까지 반백이 지났다. 마냥 선한 것이 미덕임을 주입하던 부모의 혈통을 거부하자 통장의 잔고가 늘었다. 대체로 진영의 문제는 정의와 따로 놀았다. 빨강과 파랑이 섞이면 보라색으로 고상해졌지만 내 눈엔 멍 같았다. 사람들은 색을 잃어가면서 익어가는 거라고 우겼다.// 칸트의 도덕과 벤담의 공리 사이에서 머리로 시소를 타던 시절이 있었지만 허기는 여전했다. 바로크풍의 마차에 탄 공주를 조소하며 샤넬의 로고를 수집했고 여성을 강조하자 천공의 성이 무너졌다. 운명은 신의 영역이고 인간을 거부하자 신은 빛의 속도로 컴퓨터자판에서 부활했다. 불면증으로 밤보다 깊은 새벽을 밝힐 때마다 정의는 어둠과 한통속이라 쓴다.// 옆집 채식주의자의 개가 거세를 당하자 온순해진 건 아파트였고 사람들은 평화를 가장했다. 놀랍게도 불면증은 옆집 개가 죽고 나서 완치됐다. 아파트 소장의 잦은 훈화가 사라지자 으르릉 거리던 사람들은 저마다의 채도로 착해지고 목줄로 길들이며 개를 사랑한다고 우기던 옆집 채식주의자는 점차 사나워졌다. 피를 뚝뚝 흘리는 풀을 뜯고 있는 개의 싱싱한 혓바닥이 쓰윽 이마를 핥고 나서야 난 꿈에서 깼다.// 정의를 부정하자 정의가 생겨났다./ 꿈속의 꿈처럼 모호한 생은 어디까지 견뎌야하는 불면증인가. 시뮬레이션 같은 지구의 무게를 견뎌야하는 당신들과 난 또 어느 지점의 불면증인가.// 저울과 칼을 들고 서 있는 꿈, 생이 영원하다면 잔인하다는 선인의 치명이 별빛으로 뜬다. 서슴지 않는 밤의 질문들이 빼곡하게 빛나는 밤, 아스트리아의 가려진 눈을 오래 보는 나는 정의를 섣불리 정의하지 않는 사사로운 별이 되겠다.//

덫 / 이령
난 사각의 틀 앞에 놓여있다/ 붇기로 자릴 옮긴 알콜은 그와 내가 대면하는 아침의 위력을 보여준다/ 거울은 보고자 하는 것 보다 더 많은 것을 담아내는 영사기,// 머릴 감는 동안 그는 염장 미역처럼 푸른 필름으로 풀어진다/ 샤워 콕에선 파도 소리 들리고 그는 비누거품으로 자라나/ 난 눈이 맵다// 사각의 틀에 들 때마다 내 눈은 선명하다/ 그도 투명한 물속을 숙영하는 내 머리카락을 보고 있다/ 헤어드라이기 속에는 아직 그가 남기고 간 더운 입김이 서려있다// 물의 무게가 덜어질수록 무겁게 달려드는 그는/ 사각의 시간에 잠식된 한편의 비루飛樓// 그 비릿한 바다 냄새 가시지 않는//

무거운 구름 / 이령
나 해거름마냥 태생 노마(駑馬)의 습속이거니/ 너 하나 들여놓자 곡두마저 하나 더 늘어/ 계절의 권도를 잃고/ 행려만큼 엉거주춤 꽃차례마저 놓쳤네.// 잡아 둔 그림만큼 엇나간 그림자를 구상하는 건/ 너나 나나 익숙한 이 무렵의 풍경이지만/ 나 더는 지나간 것들을 갈망하지 못 하네.// 가릉빈가(迦陵頻伽) 극락조를 꿈꾸다/ 어김없이 개짓고 닭 홰치는 곳에서 깨는 일상/ 빛 가림 이음새 모지라지듯 비로소 자명한 저 생의 주름들.// 누구의 갸륵한 말씀인가/ 해거름 번져오는 적막을 몰고/ 일망무제 시름 내려놓고 설움에 겨워/ 벼름벼름 저녁놀에 걸터앉아 여울지는 저 감정의 편린(片鱗)들.//느닷없이 파고든 심연에 부대낄 때 사랑하는 이여!/ 너와 난 이쯤에서 선고 없는 종신형에 든 것인가/ 하늘 언저리에 부려놓은 가둔 시간을/ 하릴없이 펼쳐든 망망 슬하의 저 무거운 형량들!//

있는 그대로 분리수거함 / 이령
분리돼 버려진 쓰레기들은 모두/ 누군가 쓰고 지워낸 알뜰한 생의 목록이다/ 드러난 어둠과 매복된 희망이 그로테스크 하게 조합된/ 궁행(躬行), 얼룩진 기억을 필사적으로 구겨 넣기 위해/ 모두 한번쯤은 그림자 말아 쥔 그림을 품었던 자세다// 진종일 덜컹거리는 생각, 지웠다 다시 쓰는// 차별이 세밀하게 재차 차별되는 수거함/ 서늘한 쇳소리가 허공을 들어 올리면/ 분리함 앞에서의 성긴 생각이 녹슨 어둠을 베낀다/ 묵은 짐을 내려놓고 가벼워지는 쓰레기들,/ 칸칸이 몸을 누인 저켠, 수평의 거처가 환하다// 더러는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는 버림과 비움 사이// 시간이 머문 자리마다 채록된 풍경들/ 녹음아래 한 잠 든 노인처럼/ 기억창고에 저장된 저 다채로운 흔적들/ 남루의 시절을 지워내고 때 없이 불어오는 바람의 냉혹함,/ 그마저 비켜 가면 쓰레기들이 놓였던 저 자리마다 빛의 노래만 남을 것이다// 버려지기 전 버린다는 것은 황혼의 리듬을 우리 함께 타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걸어온 자취로 깊어지고/ 버릴게 많을수록 흔들리다 간다/ 무덤처럼 깊은 저녁나절/ 그림의 완성을 기도하는 주술처럼 휘파람을 불며/ 그림자 짙은 누군가 한아름의 흔적들을 또 부려놓고 간다//

李美子를 듣다가 / 이령
나비가 되고 싶은 난/ 겨드랑이를 살피지만 소식 없다/ 오래된 무덤처럼 적막할 뿐/ 면역 없는 노래, 내 머리를 매혹시키는 건 늘 불가해여서/ 우리의 엇박자는 밤보다 깊고 별보다 서늘하다// 지상의 모든 악보는 눈 감고 보는 것/ 세설(細說)하는 바람, 삼월의 꽃망울에 내려앉고/ 약에 쓸려고 해도 없던 진심의 그 찰나마저/ 수의를 벗은 적 없는 넌/ 왜 세상의 공동묘지를 사유(思惟)라 부르나/ 난 너의 symmetry./ 새순으로 접목할 시간이/ 내 사랑의 무게로 파멸되고 말 이 순간이/ 우리가 부르는 비극의 시작일까// 왜 우린 교착을 잊는가/ 나비도 길을 잃고 불온은 사랑의 영토를 잃어간다/우리 모두의 슬픈 노래,/ 너에게로 가는 목소린 가장 비극적 엘레지// 태양이 네 검은 옷을 태우고 있다/ 봄엔 가면을 벗고 썩은 백합의 악취를 날려버리자/ 표정을 바꾸지 않으면 날 수 없을 것 같은 이 불모의 광장에도/ 한 때 스스로 빛나던 것들 날개 펴고/ 지옥으로 안내하는 천국의 계단 어디쯤에서 우리 함께 가고 있다/ 눈먼 사랑아!/ 죽음 너머 삶을 생각하며 난 네게로 간다/ 겹친 순간 이별은 시작되니, 평행의 자기장에 갇혀/ 거짓 표정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봄날엔/ 그대만이 오직 그대요라고/ 그대 안에 쓰여 진 그대를 베낀다//

모자이크 동화 -형법 제33장 제307조~제311조 관련 규정과 위법성 조각사유 / 이령
1.// 아마존 밀림이 삼켜버린 마로카에는 데사나족이 산다 짧은 해가 들지만 가장 긴 하루를 산다는, 남자는 입고 있던 야자수 잎을 태워 마니오크를 심고 그 독에 기린처럼 혀가 늘어 혀가 짧아 착한 여인들이 사는 곳, 향기 없음이 가장 향기로운 땅, 고립이 도리어 낙원이 된 그곳에서 아이들에겐 삼촌이 형이 되고 언니가 엄마가 되기도 해 밀림 밖 문명인들 가슴에 혼돈의 독을 뿌리기도 하지만 위라를 신으로 모신 그들에겐 독이 때론 향기가 되어 오늘도 파릇파릇 생명의 꽃을 피운다 데사나족에겐 그들만의 경전이 있고 독을 중화 시킬 숲이 있다 언젠가 욕망의 숨골을 찾아 빌딩으로 들어간 여자가 있었다 숲 아닌 허위의 땅, 내 딛는 곳마다 비릿한 공기만 가득 했으므로 밀림으로 떠난다 했다 밀림의 숨구멍이 자릴 찾으면 지구의 숨고르기가 시작되고 끝나는 그곳에서 문명을 비질하며 늘어난 혀를 허리에 감은 내가 걸어 나올 것만 같다//
2.// 사과 독에 죽었단 건 오해야 도넛으로 말린 양말, 맥주 거품이 삼킨 거실, 게우다 넘친 변기통, 이런 정황증거엔 무슨 생각해야 하니? 속병은 머리에서 시작되지 마녀가 팔러 온 건 책 일거야 책장이 넓어질수록 입에 축적되는 독은 넘쳐나지 마력이 속도를 불리면 저주가 된다는 걸 거울은 일러 주었을까 거울아거울아 누가누가 나쁘니 세상에서 말이 말을 등에 지면 독이 된다는 걸 모르는 난쟁이들이야 사생아를 버려두고 궁전을 뛰쳐나온 그녀, 길을 잃었다는 자책, 말 탄 왕잔 없어 모든 입은 무기가 될 수 있어 흰색은 물들기 쉽지 흑 빛의 그녀를 보면 알 수 있잖아 난쟁이들아 난쟁이들아 네 키들을 다 엮으면 중독 된 혀들을 중화 할 수 있겠니? 하얗게 죽을 수 있다면 우린 걸리버가 되어도 좋아 목젖이 붇도록 불러 보지만 삶의 변방엔 늘 그림자가 자릴 잡지 키가 작을수록 그림자는 길어져 늘어진 혀를 밟고 까치발로 서야해 계단 마다 구두를 벗어 두지만 결국 우린 소리만 요란한 속 빈 유리 구두일지 몰라 자살은 많은 경우 타살이 아니겠니? 모자이크로 편집된 현장, 우린 지금 누구를 죽이고 있을까//

오렌지 맛 향 오렌지 주스 / 이령
사랑을 유지하려면 이별을 잘 해야죠. 이건 뭐 실체적 진실이구요. 대게 눈에 보이는 것들이 더 의뭉스럽죠. 오렌지 주스엔 오렌지 맛 향이 오렌지를 대신하죠. 마치 사랑이라는 감정을 사랑이라 우기는 것처럼.// 구속되고 싶은 유일한 자유가 더러 사랑일 수 있어요. 오렌지 맛 향과 사랑의 감정을 이해한다면 우리가 도모하는 삶은 생각보다 단순할지 몰라요. 사랑과 이별이 경합할 땐 눈 딱 감고 이별 해야죠. 오렌지 맛 향 주스를 오렌지 주스라고 우겼으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실은 더 선명하죠.// 꽃보다 잎이 먼저 피는 나무도 있어요. 긴 밤, 짧은 밤, 이건 뭐 온도차이구요. 떨기나무가 꽃 피우기 전 절반이상 잎을 버리듯 지난 날 우리들의 굳은 맹세는 가급적 잊는 게 좋아요. 잎보다 꽃이 먼저 피듯이 가슴이 머리보다 뜨겁다는 건 좀 슬픈 얘기죠.// 사랑을 지키려면 황색4호, 적색2호, 배합이 잘 돼야지, 끼워 넣기, 과장 표현은 필수죠./ 얼었다 녹았다 밀었다 당겼다// 얼음이 얼마나 뜨거운지 목구멍을 데어본 이들은 압니다./ 삼키다 걸린 얼음은 당혹스럽지만/ 오렌지 주스처럼 따갑진 않습니다./ 사랑도 그래요. 달고 시큼하고 향기롭지만 결국 갈증을 부르는 오렌지 주스가 꽃보다 잎이 먼저 피는 떨기나무 같은 거라서. 몸이 머리보다 뜨겁다면 이별은 현명한 사랑입니다.// 이별에 익숙한 시인과/ 오렌지를 속이는 오렌지 맛 향 오렌지 주스와/ 어긋난 꽃차례를 자랑하는 떨기나무와/ 녹는점이 헷갈리는 얼음의 공통점은 없어요. 이건 머 현상에 대한 나의 상상적 경합이구요.// 오렌지 맛 향이 오렌지 보다 더 오렌지 같듯/ 사랑의 감정이 사랑이라고 믿듯/ 이별은 사랑이후의 사랑 이란 건 어디까지나 객관적 진실입니다.// 그다음 사랑은 오렌지 맛 향이 아닌 오렌지 같을 것.//

개미와 구덩이와 날개의 콜라보레이션 / 이령
점, 선, 면 이었어요/ 공간을 의식하면서 눈이 커지데요/ 율동을 익히면서 시간은 사라지기 시작 했죠/ 피할 수 없는 구덩이를 만나면 최대한 오그라들지만/ 빛 드는 쪽으로 더듬이를 펼 수 있다는 건 참 다행이에요// 나는 참조무결점의 고독을 지향하는 조그만 땅꾼이라서/ 활자들에 이끌려 밤마다 하얗지만 괜찮아요./ 우리 사이에 평행만 그리는 건 너무 심심하잖아요./ 사선으로 만나 영원히 이별하는 거리가 좋아! 가르쳐 준 구덩이, 구덩이는 참 흥미롭죠?/ 빵조각을 차지하려고 당신은 나를 묻고 나는 당신을 밞고/ 눈 감고 있어도 길이 보이는 건 이제 시간문제죠/ 굴을 파듯 당신과 나를 파고들지만 그건 그냥 아주 잠시잠깐일 텐데/ 나는 이 길의 끝을 모르죠.// 당신과 나/ 깊이 빠질수록 눈 먼 감정이 희망인 줄로만 알았던.// 구덩이는 구덩이를 키워요/ 이유 없음의 이유 있음이 우리니까/ 당신과 나는 그런 사이니까/ 곧 날개가 돋을 것 같아요/ 구덩이는 구덩이가 아니니까/ 더 이상 얄팍하게 빠지진 않을 거니까//

곡비(哭婢) / 이령
비만큼 나는 쉽게 읽힌다/ 무슨 연주되기도 전 파쇄 된 악보처럼/ 맥없는, 가락이어서 푹 젖지도 못 하는/ 수직 묘경妙境의 합주인 냥 종일 비가 온다/ 원시의 층리인가/ 달무리 가르며 쏟아지는 숱한 문장들/ 사라졌다 다시 뜨는 부록과 반복되는 밤의 헌사들/ 어느새 하늘병풍이 빼곡한 질문들을 찍어 내고/ 그 부호들을 타전하듯 비는 온몸으로 운다/ 울음을 덧대면 웃음은 기록이 되고/ 그 심중을 더듬는 길 하릴없음을 그대는 아는가/ 그대의 울음을 등에 지고 가는 그대들이 근근하듯이/ 태생 나는 불립문자로 우기를 견디었으니/ 바람에 홀려 굽이치면서 저 비구름도 제 곡조에 못 이겨 이울겠거니/ 반복되는 연주도 소리를 낮춰야만 건기를 불러오거니/ 수직의 득음인 듯/ 수척한 하늘에 얼룩진 표정들을 마저 거두어가는/ 비가(悲歌), 다음 생으로 들 듯 차분히 목청을 다듬고 있다/ 쉬이 젖는 내가,/ 나를 간파한 비만큼 흥건하다//

삼국유사 서사시 제1장 배경설명
[백률사栢栗寺 - 삼국유사三國遺事 권3 흥법3 원종흥법염촉멸신原宗興法猒髑滅身조에 나오는 이차돈의 순교와 관련된 절, 불교공인을 위해 법흥왕 14년(527) 이차돈이 순교를 자청하였고 그의 목을 치자 흰 피가 솟구쳐 소금강산에 떨어졌다. 자추사刺楸寺라 불림, 절의 진입로에는 대나무 숲이 있다. 대나무는 풀이면서 나무이며 꽃이 피기까지 약 76년이 걸리고 한 나무의 꽃이 피면 숲 전체가 따라 꽃을 피운다]
삼국유사 사랑 서사시 -백률사에서 / 이령
1// 누구의 피울음인가 꽃 비경 덧널처럼 쌓이는 대숲, 땅속 금강이 일제히 솟구치니 내 귀, 천년 서루에 올랐다 내린다. 소름 돋는 저잣거리 원성을 말아 쥔 북악산 솔이끼며 귀신새 소리마저 이곳에선 하얗게 날이 선다.// 만파식적 듣고 자란 서라벌 백률송순, 황룡이 승천하듯 굽이굽이 내달린 곳, 자추사 흰 피도 찰나에 피고 찰나에 지는 줄 그 누가 알았을까?//
2// 대(竹), 풀이면서 나무요, 한꺼번에 피고 지기까지 장엄하면서도 소담스러워, 기품 있는 죽음이요, 생이다.// 나는 이미 세상의 화려함이 싫어진지 오래다/ 나쁘게 태어나 짐승이 된다면 그것으로 족하오!/ 음악으로 세상을 다스리라던 법민의 말씀/ 해룡이 된 대왕의 넋이 날아와 앉은 11면 6비 탑신 너머/ 지금 천년을 사르는 꽃불 경전 그윽하다/ 귀로부터의 자유가 귀로부터 전해오니/ 현생의 저잣거리 이전투구를 누군들 멈추게 할까/ 황금도 녹이 쓸고 맞가지 금관이며 굽은 옥도 세월을 이기지는 못한다며/ 치렁치렁 대나무 가지마다 귀 드리개가 지천이구나!/ 풀이면서 나무요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이면서 너이려니/ 귀 닫고 눈 먼 이생의 치정자들이여!/ 가멸찬 꽃 죽비를 받으시오!//
3.// 바자울 너머 내달리는 말발굽 소리, 다그닥다그닥, 수막새에 오르고 하늘이 울렁대듯 메아리치는 도리깻장부, 풍월주의 그 기백이 천년의 주술로 환생한 곳. 날아가는 새도 잠시 쉬어가고 뿌리가 땅에 닿지 않는 부평초가 여전하지만, 화르륵화르륵 쏟아지는 꽃 무덤, 지금 내 귀에 앉은 풍경마다 시간을 거슬러가니 분명 이 곳에선 나무장도 곧 꽃 사태에 들겠구나.// 감언처럼 달디 단 화주다. 어느 불씨가 저리도 애달플까. 댓잎하나 솔잎하나에도 덕업일신 망라사방(德業日新 網羅四方) 사방팔방 기도소리가 시간을 말아 쥐고 피어나니......,//
4.// 만 가지 파도를 잠재우니, 만파만파 화평이고, 주령구 내려앉은 월지엔 연꽃이 만발하니 온 고을이 소리에 취했겠다. 굴불사면석불 보일 듯 보일듯한 저 미소가 천마를 타고 하늘을 가르니 이생의 꽃 소리 꽃값을 어디에서 물을까 관음도 꿈이요, 미륵도 꿈 이언데 모래 같은 지금 여기가 바로 극락이요 부처라는 것일까?//
5.// 네 등 뒤에 꽃을 두는 일은 서사적이다/ 밤보다 깊은 새벽을 밝히는 현재의 일이다/ 가고 올 시간의 흔적을 보듬는 일/ 이별의 비수와 비가를 숨기기엔 이 계절이 너무 짧다/ 너를 품어 꽃을 피웠지만 자리마다 물컹하다/ 모든 서사는 지금, 바로지금 서정적으로 완성된다/ 지나보니 꽃 피고 잎 지나 잎 지고 꽃 피나/ 무릇무릇 사랑이라 부르던 것들이 죄다 미쁘다/ 너를 건너왔으니 나를 데려와야지/ 머리를 버리고 심장을 얻었다, 가벼웠다/ 흔들리던 날들이 마른 나무에 핀 꽃 순처럼 싱싱하다/ 울던 별들이 지면 새싹은 움 튼다/ 네 등 뒤에 꽃을 두고/ 걸어온 걸어갈 길을 벅차게 걷고 있다//

삼국유사 제9장 배경설명
[흥덕왕릉 – 통일신라의 능원 양식이 가장 잘 보존된 피장자가 정확히 밝혀진 왕릉이다. 정목왕후와 합장할 것을 유언한 흥덕왕에 의해 합장릉이라 봉분의 크기도 동시대의 왕릉보다 크다. 사랑의 크기가 왕릉의 크기로 내려앉은 곳, 서역인상의 무인석상과 빼곡한 소나무 숲이 무덤을 지키고 서 있다]
삼국유사 Ⅸ -흥덕왕릉에서 / 이령
1// 짚대를 타고 내리는 빗물은 서두르지 않는다/ 또로록 또로록 내리는 낙수/ 나직이 흐느끼는 속울음처럼/ 면역 없는 그리움, 사랑이 천년의 봉분을 타고/ 저리 오래도록 깊고 서럽게 흐른다.//
2// 합장된 것은 몸 아닌, 마음이었다.// 아라비아 푸른 눈을 베껴/ 한 발 아래 뛰어내리지 못해 한 발 뒤에서 우는 여인아/ 비가悲歌에 젖은 처용무처럼 자못 흔들리는/ 귀부의 몸돌 난간에 핀 저 제비꽃// 덕이 흥하면 천국이요, 사랑이 멸하면 지옥이라지./ 사랑이 움트는 일은 꽃이 피는 일./ 철지난 말의 개화, 왕릉이 일어선다./ 산 그림자 눕는 숲, 솔잎 침낭 들추며 나온 저 제비꽃// 합장된 것은 금관이 아닌 한 사내의 순정이었다.//
3// 적막이 하도 좋아 나 그 적막에 들었네.// 비(雨), 땅에 떨어지기까지 꿈이었네./ 사랑은 꿈꾸는 자들의 눈물./ 비(悲), 터진 비명은 더 이상 꿈이 아니네./ 사랑은 살아있는 자들의 비상./ 비(飛), 한잔 술에 취해 슬픔을 말리며 하늘을 나네./ 사랑은 꿈에서 깬 신들의 눈물.// 적막이 좋아 적막에 드니 나를 취하게 한 그 적막, 사랑이었네.//
4// 비 그치자 달이 머리 위로 솟는다. 가래톳 돋는 밤꽃 향 분분하다. 천년 면벽에 든 돌부처도 벌떡 일어나 걸어 나올 것만 같은 밤. 무덤이 열리고 엎드려있던 자라가 기지개를 켜는 금오산, 신검의 부활인가? 산이 품은 그리움, 휙휙 휘리릭 귀신 새 소리마저 구슬프다.//
5// 세상 꼴딱 모르고 지나치고 말 발걸음을/ 귀신 소리가 불러 세워 밤이 하얗다/ 밤물 같은 어둠을 밝혀주는 목청/ 처음에는 낮은 속울음이었을 산이 품은 그리움/ 무덤을 싸안은 적막의 세월들이 소리를 높이게 했던가 보다/ 그리움에는 면역이 없어/ 발자국들이 점이 될 때까지/ 새는 부리에 허공을 달았을까/ 바람의 입을 빌린 나뭇잎, 밤마다 곡성에 쫓겨 사그락거리고/ 나는 산중을 헤매는 꿈을 꾼다/ 내 닿는 길마다 달빛 들어 마음의 그물을 깁고/ 비명의 시간들 차분히 목청 내려놓으면/ 귀신 새가 무덤가에서만 우는 이유를/ 그제서야 알 것만 같다.//

비나리 / 이령
먹물 같은 밤, 어둠이 호흡인 듯 마뜩하다/ 피고 지는 꽃, 개맹이 선연한 밤하늘 별무리 진다// 하루치의 그늘을 거두기 위해/ 별들은 자랑거리다 잠잠하다, 구름이 그림자를 가리면/ 사라졌다 다시 뜨고 또 제 자리다// 문득 치미다 지워지다 그느르다/ 갈피없이 불쑥이는 통점들// 구겨진 구름 언저리 쓰린 심박을 흩뿌리는 별 내음만으로는 나,/ 가슴 멍울을 더는 바오 다독이지 못 하겠다// 더러는 기척도 없었을 날비 같은 것/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면 꽃은 처음부터 피면 안 되는 것일지도 몰라/ 바투 당길 수 없는 인연이라면/ 꿈이었을까, 한 꼬리별 깜빡 시야에서 지고 있다// 너무 많은 눈물샘이 그렁그렁 몰려나와/ 서로가 서로에게 젖고 있어도/ 그 슬픔의 수위를 갱신하지 못할 때/ 밤새 다 닿지 못할 별들의 개화만 그늘의 무게를 키울 때/ 이 밤에 더 많은 다짐들이 또 피고 지겠다// 별꽃들이 내 울음을 제 등에 지고 가는 밤/ 당신의 얼굴이 이슥토록 흐드러진다//

자명한 오늘 -꺾꽂이를 하다가 / 이령
지금 내 손가락은 꽃의 위험한 확증적 가설이다/ 너는 불손한 마고할미의 굽은 손가락을 기다린 적 없으나/ 우리가 꿰뚫어 볼 수 없는 비린 생의 마디는/ 모두 향기로 돋을 것이니 꺾이는 것을 두려워 말자// 만약, 걸어온 시간의 흔적이 독을 품은 우리의 손끝에 있다 해도/ 너와 나는 꽃을 밟아 길을 만들지 말고 꽃이 피기를 기도하자/ 지금, 내 손가락은 또 한생의 격조 있는 말을 관통하는 중이다// 우리가 놓인 시간은 자명한 내일과/ 불확정한 오늘의 노래로 비명횡사 하는 것이니/ 사랑과 이별과 거부할 수 없는 어느 가설을 몰고 와서/ 꽃은 지금 선연한 안녕을 뚝뚝 고하는 것이다// 사색의 별빛과 수 만겁의 바람과 무수한 불멸의 밤들은/ 분분한 낙화落花의 회랑으로 내달리고/ 우리는 머나 먼 나와 가장 가까운 당신을 데려와/ 생의 마디에 꾹꾹 방점을 찍는 것이다// 태초 나를 매혹시키는 모든 것들은 불가해여서/ 나는 너를 모르고 너는 나를 모르고 우린 우릴 알려하지 않는다/ 이쯤에서 너는 다만 잠시 덜컹일 뿐,/ 비리게 찬란하게 죽어가는 것이다//

부부 판독 -컴트레일에 묻다 / 이령
파랑 일자/ 예기치 않게 찾아든 당신이/ 어쩜 매지구름 가르는 캠트레일 만큼 쓸까스르다// 모르는 그대, 몰라서 안전한 그대여!/ 제 안의 어떤 허방에 이끌려 우리/ 하늘 밖, 길 아닌 길에 함께 있는가// 오래 스민 인연이라면/ 공멸에도 질긴 피가 흐른다는 것/ 살가운 울바자이거나 각담 지천인 어느 길섶에서/ 그대는 영원히 몰라야 할 사람// 문득 동행한 인연/ 난 달리고 넌 걷고 가끔 난 왼쪽을 바라보고 넌 오른쪽을 향해도/ 골똘하게 휑한 건 마음의 빈 고섶 때문.// 우리는 더 진한 핏줄을 결탁해야 하리/ 당신은 영원히 몰라야 할 유일한 사람/ 아무리 걸어도 끝없는 하늘 길, 탄금을 긋는 단 하나의 획!//

遣奠견전 / 이령
하루치의 햇살을 말아 쥔 처마에 핀 철지난 와송,/ 혈이 막히는지, 치미 끝에 주검처럼 널브러져 있다// 죽어서도 살아 기쁜 노제(路祭)가 어디 있을까/ 와락, 어떤 울음이 있어 이 면벽에 닿아/ 저리 애달프게 어스름 적막을 몰고 왔을까// 계절 거스르는 개화도 아직은 이곳저곳/ 견딤의 시간을 더듬거려야 할 것만 같아/ 어제를 지우려면 멀고멀었는데 필사적인 내일도 더러는 푸름푸름 넌출 거리는데// 북향 하늘에 노을 지는 한 얼굴이 있어/ 꽃은 져도 축관의 곡처럼 또 비가 내리고/ 햇살에 젖은 땅이 굳고 새가 울고 바람이 불어오면/ 나는 이별의 시작, 사랑의 지척을 기꺼이 품으면 그만.// 적절한 별리다, 비린 생을 거두고 선/ 죽은 자의 행장, 버려서 아름다운 자세로/ 오늘의 휘장을 펄럭이며 생보다 먼저와 기다린 죽음, 영구에 든다//

손바닥 유전 / 이령
어디쯤에서 발원 됐을까 난 혈구를 타고 당신 몸속으로 들어간다 유전 여행은 시작되고 화성평원, 두툼한 입구 주름진 둔덕 거슬러 오를 쯤, 평평한 대지였을 당신의 푸른 날들 펼쳐진다// 월구 쪽으로 방향을 틀면 시간의 축척, 알마게스트와 난 동일성이다 수륙양용 M3벤의 궤도에 안착하는 푸르고 노란 이중성이 되기도 하는 난, 당신의 손금과 너무 멀다 당신은 저리도 먼 위성 이었나 목성구를 지나 검지로 오르면 회오리치는 지문. 토성구, 태양구, 수성구를 지날쯤 생명선과 지능선은 하나의 섬*을 만들고 그 둔덕 어디쯤 난 쉬어가기로 한다// 한때 당신에게 쉼터였을 난/ 단일 유전자로 이 얼키고설킨 사슬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절단기에 손가락이 죄다 잘려버린 당신/ 대출을 받아 보금자리 주택을 마련할 때/ 희망 아파트 경비직을 구할 때/ 농성 주모자로 피의자 신분 확인을 받을 때조차/ 끊긴 지문을 내게 보이지 않으셨다/ 신작로 같은 내 손금을 만들기 위해/ 당신의 손바닥엔 저리도 많은 실금들이 생겨난 걸까/ 다행히 그곳엔 M*자형 쉼터가 있고/ 꽃피고 노래하던 당신이 깨어있고/ 반 마디, 그 반의 반 마디를 잇다보면 저 너머 내 손금이 보인다// '해고자 복직사수' 현수막 펄럭이는 송전탑 위에서 당신은 지금도 손금을 긋는 중이다 살그머니 손바닥을 포개자 실눈을 뜨며 웃으시는 당신 그렇게 당신은 잠자듯 깨어있고 깨어 있듯 잠을 잤다 그래 이쯤에서 손금이 내는 길은 유전이다 당신의 손금을 읽는 일은 내 손금을 보는 일, 당신의 손금이 내 손바닥으로 흘러 들어와 길을 열어 준거다 '손금을 그어라 없던 길이 열린다' 갈라진 논바닥 같은 아버지의 손금은 사라지고 어느새 내 손바닥엔 선명한 물길 흐른다//
*섬-생명선과 지능선 운명선이 교차해서 생기는 삼각형의 손금 수상학에서 손바닥에 섬이 형성되면 잠재된 질병이나 우환을 예견할 수 있다고 한다.
*M-수상학에서 생명선과 지능선 감정선이 교차해서 M자형 손금이 생기면 횡재운이 있음을 예견한다고 한다.

칼이 사는 풍경 / 이령
1.// 자국은 찍히는 순간 음각이다 패여 본 후 돋을새김된다// 둥글게 살기를 당부 받지만 삶은 대체로 세모다 높이를 벗어나기 위해 날개가 돋는 순간 내 방 작은 커튼은 어깨 죽지에서 달싹 거린다// 파닥거리는 깃털을 말려줄 빛은 없는걸까// 구로동 협성주택 사람들의 안부가 성가시고 질주하는 차들은 아득하고 화단구석 히야신스의 흰색이 '하자보수 궐기' 현수막에 가려 흔들리고 제 발자국에서 걸어 나와 날개를 펼치는 일이란 다비드의 손에 들린 돌멩이의 각오와 같아, 난 라임오렌지를 가슴에 새기며 '자기로 부터의 혁명'을 발 까락 마디마다 느낀다 난 꽃의 향기를 말했고 그들은 꽃의 부패를 노래했다// 난 자주 납작하고 싶다//
2.// 날숨과 들숨의 비례가 각을 잃은 저녁, 난 아점을 먹는다 의도하지 않는 아침에 대해선 할 말이 없다 흘러간 구름의 배꼽을 베는 일, 뭉텅한 머리로 저녁을 준비하는 여자의 뒷모습에 관해서도 할 말이 없다 쟈크의 콩나무처럼 자란 칼로 제 심장을 꺼내 샐러드를 버무리는 여자의 비장한 결의에 관해서도 할 말이 없다// 된장이 끓어 넘쳐 붉새로 흐르는 저녁, 창 너머 '만도정밀 복직사수' 현수막이 쟈크 나이프의 각도로 걸려있고 삼교대의 아침과 저녁은 늘 메슥이고 뾰족하다는 건 누군가에겐 헛웃음이 되는 일인지라 저녁에 아침을 먹을 때처럼 아침에 지난 밤참을 먹을 때처럼 삶은 피쟁이 굿판같아 늘 실전적이다 명치에서 날이 선 호흡은 날카롭고// 아침은 늘 반 이상 잘려 나간다//
3.// 바람을 집도(執刀)한 어둠, 공장의 창을 흔든다 베어링 기계음처럼 쫌쫌한, 가슴에서부터 부식된 별들이 사그락거리는 밤은 예리하다 어둠속으로 걸어간 별들이 건조한 각도로 사라지기도, 밤은 늘 금관악기처럼 섬세하고 파재래기처럼 적극적이기도,// 새로운 별의 탄생을 예비 한다 나날이 자라는 별들이 있다 보이지 않는 빛이 궁금한 난 날카로운 빗살무늬 칼을 안고 산다 칼이 밤의 그림자를 도려내고 달빛을 드리워 아침의 내장을 가를 때, 난 싱싱하다 싱싱하게 산다는 건 머리에 별 하나쯤 새기는 일이라 나날이 벼르는 중, 굴뚝너머 달무리 쪽으로 새 한 마리// 양각을 새긴다//

옹브르* -어느 5월의 이별 / 이령
액자를 막 탈출할 것 같은 새 그림이 걸려있는 파스구치 카페 창가에 앉아 불만에 스스로 속지 않는 그림자와 반시계 방향의 빛을 이해하는 그림에 대해 생각한다.// 액자 속, 날개는 그림자가 되지 못하고/ 그림 밖 세상, 두 개의 그림을 물고 가는 저 새/ 이곳과 저곳의 경계를 생각지 않았으므로/ 내일은 비상(悲傷).// 날개를 접는다면 우리는 아직 절망을 모르리// 그림의 완성은 그림자/ 도망치는 건 언제나 그림 너머 그림자일 뿐/ 영혼을 날개라 노래하지 않았으므로/ 오늘은 비극(悲劇).// 밝음에서 어둠까지 모조리 생이라 부르리// 그림자를 드리우는 애인과 그림을 꿈꾸는 내가 서로 속이고 있다는 생각, 액자 밖 날개를 접지 않는다면 그림이 되지 못하는 새, 그녀와 나 사이의 거리를 날아와 식은 커피 잔에 내려앉고 오래 마음 둔 것들이 와칸 빛으로 쏟아지는 오후, 자꾸만 그림 없는 그림자 깊어진다.//
* 그늘을 뜻하는 프랑스어

테제*의 봄 / 이령
머리에 꽃씨를 심지 마세요 씨앗은 불행의 시작 입니다 가급적 색色을 띠지 않음이 행복의 근원입니다 꽃을 기다리지 마세요 화단엔 똥내가 지천입니다 죽음이 삶의 시작이라는 건 명백한 오해입니다 책 속 불가지의 궁극적 실체는 모두 화단 밖의 일이니까요// 시들다 곤죽이 된 칼라와 쥐꼬리망초와 로벨리아 꽃잎은 잉여의 기도를 낳고 당신의 봄을 화단에 가둘지 몰라요 생은 악취 외에 무엇을 남기나요?// 행복은 오해로부터 시작되고 오해에서 오해로 점점 멀어지는 중이죠 당신은 아직도 꽃이 꽃씨 속에 있다 착각하나요?// 죽음과 삶은 동시발아중이죠 표정을 감춰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면 삶과 죽음이 달라야 합니다 넌출거리는 봄, 삶의 경이적인 표현은 모두 화단 밖의 일이니까요 그러니 우린 화단을 만들어 꽃씨를 심을 것이 아니라 꽃을 품어 화단을 벗어나기로 해요 당신, 심장은 지금 어느 계절에 닿아 있나요?//
* 독일어 these. 논리를 전개하기 위한 최초의 명제 또는 주장.

에바리스트 갈루아가 죽기 전날의 풍경 / 이령
참치 캔에는 참치가 없어요/ 체리 잼 성분엔 체리 맛 향만 있어요// 수납장을 열자 풍문에 기댄 소리들이 쏟아져요/ 근거 없는 것들은 빨리 해치워야 할 것 같아/ 귀를 후비다 말고 난 요리를 합니다// 아래층 여자가 봤다는 여자의 허리를 자르고/ 당황해 하더라는 그이의 눈빛을 뽑아 샐러드를 버무립니다/ 볶고 지지고 데치고 비벼서 귓바퀴에 걸린 소리들을 펼쳐 놓아요// 인터폰이 울립니다/ 아래층 여자는 부지런합니다 몰라도 되는 것까지 알려주지요/ 먼저 말을 건넨 적 없어 내 귀는 자주 피곤합니다/ 그냥 아는 사람일거야 능청은 예정에 없던 양념이지요/ 모르는 것은 약이라서 모르는 척 하는 건 안전 하니까를 고명으로 얹습니다// 참치 캔의 잡어도 때론 참치 속살만큼 꼬솜해요/ 체리 맛 향은 체리보다 체리 같죠// 난 근거 있는 근거 없음을 조리고 있답니다/ 근거 없음의 근거 있음이 소리의 속성 아니던가요/ 난 지금 손잡이가 꺾인 수납장이고 속으로 자꾸 깊어갑니다// 그녀는 색다른 재료들을 마구 쏟아내고 난 밤이 되면/ 그중 실한 소리들을 고르고 골라 쟁여두지요/ 힘에 부대끼면 재료들을 이제 그만 가져오라 합니다만 그녀는 여전히 똠방입니다// 아직도 귀가전인 그이는 알까요/ 숙련된 소리 요리법을, 오늘은 그이에게 살짝 귀 뜸 해 줘야 할까봐요/ 지금 내 귀는 창을 넘고 거실을 지나 지하주차장쯤에 걸려있어요/ 밤보다 깊은 새벽이네요//

갸루식으로 화장하기 / 이령
여자가 화장을 지우지 않는 것은/ 내일이 오늘보다 먼저인 까닭일지 모른다/ 화장이 짙어가는 시절에 누군들/ 먼저 도착한 시간 앞에 말간 속 살 보일 수 있을까/ 눈을 덮는 자귀나무 꽃잎 같은 속눈썹이/ 만지면 파르르 손가락을 감아 통 채로 몸을 삼킬 것 같은 혹독한 파르티즘을/ 자분자분 다져 숨기고 있을 것이다/ 숨 쉴 만큼만 남겨둔 모공/ 파우더로 얼굴을 죄다 가리지만/ 내일이면 또 오늘이 되는 생,/ 쉬이 벗을 수 없는 가면에 길들여지지 않을까/ 주소를 떠올릴 수 없는/ 누구에게나 주어지지만 아무렇게나 벗어 날 수 없는/ 어둠이 오지만 끝끝내 밝음 쪽으로 번져가는 변장의 계절/ 그녀의 생존법은/ 10센티 통굽에 올라 발아래 굽어보지 말자고 다짐하는 것/ 까닭 있게 얼굴이 두터워 지는 것/ 표정을 무표정으로 연출하는 것/ 덧니 속에 감춰진 미소로 당신들의 조롱에 가볍게 응수하는 것/ 무릎이 작아 쉬이 관절이 꺽이지 않는 고양이 한 마리/ 반의 반 그 반에 반의 시간을 의식하지 않으면서/ 남은 계단을 마저 오를 수 있을는지/ 속을 드러내지 말자는 맹세를 굳건하게 덧칠하다가/ 막이 오를 때 쯤 맨 얼굴이 보일 거라며 마지막 대사를 갸르릉 거릴지/ 한층 짙은 아이라인을 그리는 그녀// 가벼운 것들의 장막에 실상 숨어있는 무거움에 대해//

논픽션을 위한 픽션 -<네델란드의 속담, 피터 브뤼겔의 그림 속으로> / 이령
악마의 눈알이 박혀 있는 4 층 벽돌집/ 웅덩이를 파는 여자와 그 웅덩이에 머리를 묻는 남자가/ 심장으로 벽돌을 깬다/ 자궁을 드러낸 여자와 머리가 서늘한 남자의/ 눈빛은 높낮이가 달랐으므로/ 벽을 부수는 일은 오히려 시나위다// 쪽방 3 층에서 흘러나오는 여자의 교성이/ 2 층 카드 판 블러핑에 몰입하던 남자의 눈알을 녹인다/ 같은 명도의 눈빛들은 절실함이 같기 때문이라는 건 내 생각/ 채도가 다른 눈알이 층간을 잡아먹는 아귀로 자란다는 건 내 주장/ 남자의 입에선 귀신들이 걸어 나온다/ 산발한 그들은 벽돌의 더깨를 지우고 밤마다 돌림음을 지붕에 건다/ 여자가 되돌이표로 걸어 나와 그 집 꼭데기에 종 주먹을 날리면/ 이내 그들의 집은 귀신들의 눈알이 득실거리는 아수라가 된다// 화음판이 역류했는지/ 상대의 패가 내 손에 든 패보다 좋다는 걸 아는지/ 내일은 다시 손잡고 나란히 걸어 나올 그들/ 오늘밤 벽돌집 담장 너머 눈 먼 별들이 총총하다// 보이는 것만 믿는/ 보는 쪽만 방향인 줄 알던 난/ 그 집 아래층 나락에 거꾸로 매달려 살았다// 내면의 눈과 이면의 눈을 제자리에 내려두는 밤/ 그 집 , 귀신들은 목에 걸린 눈알들을 모조리 뱉어두고/ 알차타행 무대를 벗어난다// 여기는/ 수억 개의 눈알들이 협연하는 웅덩이 세상//

모자 찾아 떠나는 호모루덴스 / 이령
신이 하늘의 모자를 훔쳐 인간에게 준 반역/ 순수의 퇴락은 거기서부터다// 모자 홀릭,/ 자꾸만 바뀌는 시간의 파장을 난 모자의 부피라 읽고/ 후흑(厚黑)의 비밀이 그 모자의 무게여서/ 보이는 것에만 눈이 어두워지는 시간을 내일이라 쓴다// 비밀이 늘어날수록 난 어지럽다/ 시간의 안녕을 훔치기 위해 나의 생은 쥐뿔도 없는 블러핑// 머리는 있는데 모자가 없고/ 모자는 있는데 머리가 없다/ 부피와 무게는 대체로 비례하지 않기에/ 갇힌 것은 언제나 자신일 뿐// 마피아도 곧은 남자/ 창녀도 정숙한 여자/ 알고 보니 카사노바는 불멸의 고자// 수평선 너머를 보게 된 직립의 저주로부터 우리는 모자를 얻었다// 머리에 묘혈을 파니 모자는/ 어디든 있고 어디든 없다/ 먼지를 불리는 책상 아래 숨어있고/ 화분 물받이 구석 곰팡이로 안착되고/ 일간지 사회면에서 착하게 부활 한다// 신이 자신의 형상으로 만들지 못한 유일한 피조물,/ 머리엔 모자가 없어 우린/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된다//

무리 / 이령
소리에 대한 모든 반응은 깃털을 타고 굴절 된다 당신과 나는 가까울수록 멀어 진다 거리를 두다 사라지고 다시 뜨는 별, 무리 짓지만 결국 우린 각자에게 타인이다// 삶은 기민하다 당신을 거쳐 온 시간은 대체로 불안했다 그러니까 나에게서 잘 번식하는 욕망은 세상으로 날아가는 발원지다 꼬리별을 잡고 눕는 어둠과 서러움을 타전하는 결핍을 당신과 나를 포함한 바람결의 압축된 슬픔이라하겠다// 잡담과 웃음이 잘 버무려지면 나와 당신은 우리가 될 수 있을까 잊었던 이름들이 포탄처럼 쏟아지고 지웠던 얼굴들이 밤하늘에 젖어든다 이런 날은 찌든 깃털을 씻어 잘 말려둔다 여기서내 울음은 근거 없음의 증명이라하겠다// 산들 바람이 먹구름을 하늘언저리에 부려놓는다 뜬 구름에 뭉그러진 음원(音原)의 산란이다 구름이 별빛을 가려 어둑하다 겨울은 빛의 직진이 온통 굴절되는 짐승이다 그 누구도 그 짐승의 습격을 피할 수 없다 하여 당신과 나는 욕망하는 자들의 먼 기원이다//

꽃을 기억해 / 이령
1.// 가지가 휘었다 꽃차례로 화분에 칼자국이 늘었다 여자는 엄마의 손가락을 잘라 흙속에 묻었다 비 오고 바람 불고 달빛 창을 넘는 사이 썩은 손가락에서 별 빛 새순이 돋았다 여자는 양철지붕에 비드는 날이면 피 냄새에 놀라 꽃잎을 뚝 뚝 뜯었다// 꽃 핀 자린// 무한, 유한, 복합, 어긋나기, 돌려나기, 마주나기// 꽃 핀 자린// 비밀, 어둠, 잘린 손가락 속에 숨어있던 기억들의 아우라// 꽃을 오래 보기위해 여자는 화분을 음지로 옮겼다 핏기 없는 엄마는 침대에 누워 파라미타를 꿈꾸었다 아상, 인상, 중생상 너머 보살이 되려 했지만 되레 화분에 새겨진 빗금 하나 지워내지 못했다//
2.// 빛이 사라졌다 화분에 칼자국이 지워지고 있다 여자는 흙속에 묻어둔 손가락을 까맣게 잊었다 그림자 없는 창으로 화분을 돌렸다// 꽃 지고 잎 피나 잎 지고 꽃 피나 무릇 사랑이라 부르던 것들은 까마득 사라졌다 사이 나무는 하늘에 오르는 꿈을 꾸었다 구름에 앉았다 느닷없이 동인(動因) 하는 꿈, 새 화분을 들였지만 더 이상 꽃 필 기미 없다// 꽃 진 자린// 자웅동주, 자웅이주 할 것 없이 진물이 흐르고// 꽃부리, 꽃덮이 그 흔적마저 거두었지만// 꽃 진 자린// 소멸, 침묵, 환생, 한때 스스로 빛나던 것들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오랜 기다림 이란 걸// 여자는 깨진 화분 파편을 가슴으로 모으고 있다 화분과 여자는 동숙이다 기꺼이 잘린 손가락을 지탄(指彈)하지 않던 엄마, 꽃 진 자리는 새로 필 꽃을 위해 휘어지도록 우거졌다//

오래된 미래를 읽다 / 이령
나는 구름의 문장을 베고 행간의 이불을 당겨 밤 보다 깊은 새벽을 밝히며// 살아도 죽은 듯, 죽어도 산 것처럼 회전하는 부호에 갇혔다.// 치릿(chirrit)-해 뜨기 전 새들이 지저귀는 아침//이제 가시금작화도 눈(雪)을 툭툭 걷어내야 할 텐데/ 잠든 시간과 깨어있는 시간 그 간극을 가르며 후투티는/ 만년설의 심장, 붉은 꽃의 형상을 소리로 베낀다/ 새소리는 설원의 심장을 쪼아 먹고 허공의 한 점이 된다/ 상사병으로 죽은 이는 붉은 꽃으로 환생 한다지/ 울음을 제 등에 지고 가는 슬픔을 베낀 다지/ 달을 건지려고 호수에 빠졌다는 남자와/ 그이의 심장이고 싶었던 여자 사이엔 백년의 시차가 있다지// 니트스(nyitse) -해가 산꼭대기에 걸려 있는 낮// 줄담배를 피우듯 먼지구름을 몰고 지프가 달리고/ 총을 쏘며 휘파람을 부는 풍광을 섬기게 된 나라/ 어디든 언제든 있어야 했다는 듯 익숙한데/ 소리 잃은 새들과 소리를 잊어버린 사람들의 눈빛은 어디든 있는데/ 눈길만으로 피어나던 우리들의 꽃은 다 어디로 갔나?/ 가시금작화가 사라진 이곳에서 그는 더 이상/ 보릿가루, 양젖만으론 오래된 미래*를 살 수 없다지/ 그는 어디에든 있고 어디에도 없다네// 공고르트(gongrot)- 어두워진 다음부터 잠잘 때까지// 아마트라 옴*이 댕강이는 내 머리는 어디에 둘 것인가?/ 노련한 표정과 만나면 난 어지러워. 뒤통수에도 눈이 달린 사람들이 있지./ 던지는 일만 생각하는 넌 늘 오른쪽을 좋아하고 목마른 난 가끔 왼쪽이 궁금하지/ 난 걷고 넌 달리지. 넌 없고 난 있지// 지금이라 말하는 순간 이미 지금이 아니어서 난 깨어 있어도 잠든 거라네 넌 어디든 있고 난 어디든 없다네 이별 이전에 그리움은 이미 시작 된다네 이별 후의 사랑까지 사랑이라네//
* 오래된 미래 - 헬레나 노르베리의 저서명.
* 아마트라 옴 - 나타나지 않는 실재 즉 초월세계를 포함한 침묵을 뜻함.

사막으로 간다 / 이령
사자, 원숭이, 낙타, 토끼와 함께 가는 길, 목이 마를 쯤, 난 토끼들이 뛰노는 선인장 밭을 지나고 있고 갈기가 거추장스러운 사자는 미련 없이 버린다.// 노을에 잠긴 토끼들의 눈이 하루치의 햇살을 머금고 붉게 익어간다.// 토끼들이 아가베 속처럼 영글고 나의 사막엔 간간히 비가 내리고 길이 무너지기도 하지만 간혹 원숭이들이 찾아와 더운 입김으로 손을 녹여준다.// 등을 내주던 낙타가 등을 보이며 멀어져 갈 때 토끼들이 내 신발 끈을 물고 잘근거림으로 안녕이라 할 새도 없이 밤은 오고 다시 아침이 열리고 사막엔 끝없는 길이 나고 있다.// 사자를 버리고/ 원숭이를 저버리고/ 낙타를 떠나보내고/ 토끼가 남은 사막// 함께 한 이들을 생각 한다. 보이기 위해 피는 꽃은 향기를 덥고 멀리 가는 길의 발자국은 자취를 지우고 라플레시아 꽃잎 속쯤이 나를 스쳐간 흔적들의 먼 근원이었으리라. 이 밤, 사막의 결은 같이 걸었던 이들의 온도로 차분해 진다.// 어둑한 길에서 야성이 돋는다. 문드러진 발이 되어야 온기를 얻을 수 있던 사자를 데려와 나는 다시 사막으로 간다.// 원숭이, 낙타, 토끼도 따라와 밤하늘에 오르고 달무리에 어리는 시간들 쏟아져 나를 베끼는 밤, 사막에는 마음이 좌표다.//

글라디올러스 그녀 / 이령
그녀와 내통하던 프리젤리 칵테일 바, 그 집 이름이 내려지는 통에 내 속엔 잔 바람이 일고 있어요. 지붕 끝에는 아라베스크 둥근 달이 고갤 내밀어 그녀의 만삭 배가 출렁이고 있구요. 그녀는 커피포트를 잘도 타일러 골목 구석구석 삼부카 아니스 향길 피워 올렸죠. 그때마다 나는 은비늘 햇살과 뉴에이지풍의 음표를 쏟아내는 아라베스크 둥근 지붕에 올라갔어요. 그녀가 하루치의 햇살을 걷어내면 알레포 티포트 뚜껑 옆에 붙어 벌름벌름 코를 세웠죠.// 오늘도 그녀는 궁전 지붕에 올라 내려피는 글라디올러스 꽃잎 하나씩 따고 있겠죠. 언젠가 나는 밤새 밤보다 깊은 새벽길을 걸으며 그 향기에 가슴을 베었구요. 그녀가 열어논 아치 창문 너머 나는 기린처럼 목을 빼고 아라비아 푸른 별을 바라봤어요.// 나는 그녀 손에 들린 화이바 커피잔, 비워도비워도 채워지는 만삭의 잔, 나는 살면서 내려지는 이름들을 그녀에게 전하려다 점점 동글동글 모가 닳아요.//

인조 당단풍 나무 / 이령
붉새에 잠긴, 광중길 공원가에, 투섬플레이스 입간판 옆에, 소사나무 숲 건너편에, 인조 당단풍 한그루 외따로 서있다. 애초 물기 없던 몸이라 저녁놀도 성가신지 빛조차 없다. 계절을 베낄 일 없으니, 사철 빳빳한 인조 잎사귀가 애처롭기까지 하다.//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저 나무, 단 한번 살지도 선뜻 죽지도 못하는 저 나무, 건너편 소사나무들의 생로병사가 마냥 부러운 저 나무, 오래 볼 요량으로 숨을 거두어들인 박제 같은, 나무야나무야 당단풍나무야 진짜 이름 불러주고 싶은 저 나무, 죽어도 귀는 열려있다지, 칭칭 감은 알전구에 불을 켰다. 100촉짜리 꽃을 주렁주렁 피워낸, 어둠에 들어서야 제 존재를 알리는 저 나무, 오히려 나무 같다.//

悲歌비가 내리다 / 이령
겹창을 열자 화단에 모인 시간들이 울고 있다.// 꽃의 표정은 늘 문 앞에 있었는데 닫기만 했다는 생각/ 계절을 미처 받아 적지 못했다는 생각/ 그래서 누군가와 꽃같이 아득하게 단 한번 살아본 적 없다는 생각.// 아물지 못한 계절, 꽃 지고 있다./ 비의 투하에 터진 비명들, 아프기 때문이다./ 어떤 울음으로도 씻을 수 없는 기억이기 때문이다.// 내가 정작 사랑한 것은 당신이 아니라 사랑의 감정이었음./ 어떤 울음도 웃음보다 아플 수 없음, 피었다. 진다. 진종일// 사랑융단폭격에 베어본 사람일지라도/ 이생에서 타전하지 못할 한 영혼을 품고 사는 사람일지라도/ 이 음률탁란에 거듭 개화(開花)될 울음 우는 사람일지라도// 차원을 넘어서는 이야기도 기껏해야 몇 생을 견디는 일이었는데/ 곡조를 이기지 못한 어떤 슬픔도 간신히 한 생의 일이었는데/ 장마 전선을 통과하는 슬픔들, 계면조로 옴팡지게 왔다. 갔다.//

문단도킹 / 이령
식탁위의 오렌지를 유한개로 쪼개어 붙이면 우주다 나는 유한의 글자를 이어붙이는 무한 우주인이고 식탁은 미묘한 공포가 흐르는 무대다 요즘 식탁 밖의 오렌지는 소음이고 지구 종말의 잠언이다 해독 불가한 오렌지글자군단이 무차별로 공격 한다 눈, 코, 입은 후방, 사방이 거처인 귀를 전방에 배치해도 날마다 패전이다 귤도 탱자도 오렌지 비슷하다 오렌지는 오렌지를 잊고 귤과 탱자는 서로 원조라며 상을 주고받는다. 오렌지가 되레 포복하는 놀라운 식탁, 안팎의 시큼한 이야기다 오렌지와 오렌지종의 넓지만 온기 없는 이상한 집! 식탁만의 문제겠는가? 오렌지글자가 못 마땅한 우주인 입맛의 문제겠는가? 저 우주에 닿기 위해선 지구를 떠나야만 하나? 식탁은 더 이상 식탁이 아니다. 식탁의 풍경이 어지럽다//

아주 현실적인 L씨가 오제의 죽음*을 이해하는 방법 / 이령
도무지 이 악장을 지나칠 수 없다/ 사코리투스의 후예답지 않게 모난 나는/ 늘 마이너코드다// 올림내림올림내림/ 올림올림 내림내림/ 세상은 1,4,5,8 음정에서만 완전음// 늦었다고 생각할 때 가장 늦은 거야/ 후생은 없어 마음대로 살란 말이야/ 생의 관절 마디마디 파열음이 부지기수다// 나이도 많고 아이도 있는 내가/ 나이도 어리고 아이도 없는 소녀시대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나/ 온음과 반음, 셈여림에 질식하며/ 대칭구조로 꾸역꾸역 오늘을 살다 죽을 것인가// 점점빠르게 혹은 점점느리게/ 항문과 입은 한통속/ 점점아프고 점점무감하게/ 반음 올려 볼까 반음 내려 볼까// 기존의 음이 갈리며 새 음이 생겨나듯/ 비스듬히 빌붙으며 리듬을 타볼까/ 나의 진화는 지금 반음에 걸려있다// 어제와 오늘의 크로스오버처럼/ 쪼개고 쪼개도 완전체를 꿈꾸는 사코리투스처럼/ 처음으로 돌아가 되풀이 하지 않고 여기서 마침./ 마침내 삶과 죽음이 동시에 열리자/ 푸른 입들이 뿜어내는 저 불협화음처럼//
*그리그의 페르귄트 모음곡 중 2번째 곡

낙타가시나무풀* / 이령
고비戈壁를 건너며 생각했죠.// 난/ 잘 번식하는 種// 이 시간, 이 방향엔/ 평균적일 경우 착하다는 엄마,/ 왜 하필 소소초죠?/ 젊다는 건 이미 봄이니까! 뿌리를 내리렴!/ 어떤 방식으로도/ 너희는 작고 작아/ 엄마가 파리하게 웁니다// 난/ 매우 적합한 種// 축축한 엄마와 갈라진 언니는/ 한 번의 우연으로 모래톱을 쌓나요?/ 이곳에선 오해가 행복의 근원입니다/ 예측불능은 아름다운 거잖아!/ 만삭의 언니가 뾰족 합니다// 난/ 잘 적응할 種// 무엇을 위한 출발점인가/ 방을 춥게 하려면 벽난로를 두시죠/ 차라리 크라이머스와 오스카 클라인을 심지 그래?/ 언니의 엄마, 나의 엄마/ 제 피로 목을 축이며 연명하는 낙타여!/ 다르다는 건 틀린 것과 달라!/ 이곳에선 불협화음이 지천입니다// 사막의 결이 자주 바뀌는 동안에도 언니는 돌아오지 않고/ 가시와 뿌리와 별과 사랑과 침묵과 빛과 다시 어둠/ 고비를 건너며 생각 했죠!/ 넓이와 깊이는 비례하지 않아// 모래집의 다른 이름, 가족/ 결국 우린/ 필연적으로 자주자주 뭉치고 흩어지는種//
* 蘇蘇草라 불리는 낙타가 먹는 풀.

바람의 혁명사 / 이령
어둠과 나, 빛과 나/ 부르카 너머의 시선, 빨강 루즈의 혁명/ 환희의 오르가슴, 철학이 사라진 골목 같은/ 배리의 공식이 빛나고 있기에/ 나의 새벽은 왼쪽으로 깊다// 신의 소관에 대해 궁금한 귀/ 그림 이면의 그림자를 쫓는 손/ 비루함이 불러오는 거짓의 눈/ 쓴맛에 익숙한 입/ 달콤함에 길든 들창인 코까지/ 육감의 향합이 봉인된 채// 나는 무엇인가?/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 耳目口鼻를 촉으로 전하는 바람의 몸/ 명징한 바람의 문장/ 사루비아 꽃잎으로 입을 닦는 습성/ 무감자처럼 맛있는 이야기를 담은 귀/ 기게스의 반지를 낀 손가락/ 나비 없는 모란의 향기에 걸린 코// 바람의 혁명사는 새벽이 내게 전하는 헌사며/ 부록은 백색의 어둠이다/ 나는 눈 뜨고 자고 있다// 인간 사이에서만 신이 태어난다는 확신 같은 것,/ 몰라도 되는 것까지 알게 되는 슬픔 같은 것,/ 보이는 것만 믿게 된 나이의 안착 같은 것,/ 태초 선택적 출생이 내게 주어졌다면 촉각적 속지주의를 표방하는/ 바람으로 태어났으리. 바람은 스스로 그림을 그리지 않기에.//

밤의 각角 / 이령
안이 텅 빈 난/ 바깥으로 뾰족 합니다./ 모서리가 답입니다./ 질문을 위한 질문도 답입니다./ 바깥 표정으로 안을 볼 수 있나요./ 잠깐 다녀간 당신들도 둥글지 않습니다.// 검푸른 고독에 각이 생겨요./ 밤낮으로 내가 아닌 나와 대면하는데/ 왜 우리의 답안지엔 사선만 남나요./ 별의 표정은 어느 계절의 첨부 인가요./ 부피를 잃어가던 밤은 당신의 호명에/ 누구나의 깊이로 본문이 됩니다.// 답을 찾느라 잠 들 수 없다는 건/ 나와 당신들의 습관성 오독입니다./ 밤은 우주의 낮이고 정(正)은 반(反) 너머의 궤적 인가요./ 난 어느 궤도쯤에서 당신이 됩니까./ 당신은 나의 바깥입니까 안입니까./ 너무 먼 나와 너무 가까운 당신은 늘 첨예한 질문입니다.// 누벼 이은 별자리가 수천의 물음표로 반짝이는 이 밤,/ 금서목록에 골똘한 우린/ 우주의 어느 끝점에서 나인가요 당신 인가요./ 당신 인가요 나인가요.//

움트다 -즉시현금卽時現金 갱무시절更無時節 / 이령
네 등 뒤에 꽃을 두는 일은 서사적이다/ 밤보다 깊은 새벽을 밝히는 현재의 일이다/ 가고 올 시간의 흔적을 보듬는 일/ 이별의 비수와 비가를 숨기기엔 이 계절이 너무 짧다/ 너를 품어 꽃을 피웠지만 자리마다 물컹하다/ 모든 서사는 지금, 바로지금 서정적으로 완성 된다/ 지나보니 꽃 피고 잎 지나 잎 지고 꽃 피나/ 무릇무릇 사랑이라 부르던 것들이 죄다 미쁘다// 너를 건너왔으니 나를 데려와야지/ 머리를 버리고 심장을 얻었다, 가벼웠다/ 흔들리던 날들이/ 마른 나무에 핀 꽃 순처럼 싱싱하다// 울던 별들이 지면 새싹은 움 튼다/ 네 등 뒤에 꽃을 두고/ 걸어 온, 걸어갈 길을 벅차게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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