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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돌아보고 또 돌아봐도 / 한판암

부흐고비 2021. 12. 13. 08:28

영원에 견주면 사람의 일생은 촌음이나 찰나에 지나지 않을 게다. 하지만 아무리 장수 운운해도 개인 삶에서 희수喜壽는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의 강을 건넌 섬이다. 그럼에도 아직 바른 삶을 꿰뚫어볼 재간이 없고, 넘침과 모자람의 경계를 명확히 가름할 수 없으며,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이 애매해 끌탕을 치기 일쑤여서 때로는 당혹스럽다. 그래서 모든 걸 홀가분하게 내려놓고 두 어깨에 걸머진 걸망에 단표자單瓢子 하나 달랑 매단 채 죽장망혜竹杖芒鞋의 차림으로 길을 나선 구도자 같은 무애無礙의 삶은 일찌감치 접기로 했다.

사전적인 정의에 따르면 '실현하고 싶은 희망이나 이상' 또는 '실현 가능성이 아주 적거나 전혀 없는 헛된 기대나 생각'을 꿈이라고 하며, ‘분수에 넘치게 무엇을 탐내거나 누리고자 하는 마음’을 욕심이라고 한다. 이렇게 간단명료하게 정의되는데도 불구하고 치열한 현실에 부대끼다 보면 어디까지가 꿈이고 욕심인지 헷갈려 혼란을 겪는 경우가 숱하다. 이런 우매함 때문일 게다. 무언가의 이해 다툼이나 주거받는 과정에서 부족하다고 여겨 죄다 얻으려고 터무니없는 몽니를 부리다가 되레 큰 손해를 뒤집어쓰고 가슴을 쳤던 적이 꽤나 많다. 이처럼 어리석지 말라고 '족함을 알면 욕되지 아니하고,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며 '지족불욕知足不辱/지지불태知止不殆'라고 일렀나 보다. 이 말은 '부족하다 할 때 손을 뗄 줄 알면 욕을 보지 않고, 멈출 줄 알면 위험을 면한다.'는 뜻일 게다.

무언가를 남보다 더 이루고 얻었거나 가진 이들이 기고만장하여 망나니같이 행동하는 망종들을 종종 목격한다. 특히 덜떨어진 위인이 벼락감투를 쓰거나 벼락부자가 되었을 때 언행이 표변하는 눈꼴사나운 경우가 많다. 그런가 하면 난세나 혼란기에 천지분간을 제대로 못하는 얼간이들이 완장을 차고 거들먹거리는 꼬락서니는 상상을 초월한다. 구태여 남의 얘기가 필요할까. 자신에게 조금의 힘이라도 주어졌거나 물질적 얻음을 거뒀을 때 약자를 얼마나 배려했던 가를 돌아보면 될 법하다. 이런 몽매함을 깨우쳐 주기 위해 옛 선조들이 '열흘 붉은 꽃이 없다.' 해서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십 년을 가는 권세가 없다.'는 뜻의 권불십년權不十年, '달이 차면 기운다.'는 의미의 만월즉후滿月則, '권력은 안개처럼 사라진다.' 해서 권서여무權逝如霧라고 경고했나 보다.

화자話者의 진솔하고 올곧은 말은 진한 감동이나 공감을 불러일으켜 청자聽者를 웃기고 울리는 마력을 지녔다. 그런 관계로 단 한마디의 말이 심금을 울려 내 편으로 끌어들이기도 하고 때로는 영원히 척隻을 지게 만들기도 한다. 이 같은 맥락에서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라고 일렀나 보다. 하지만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함을 새겨보는 슬기로움이 필요하다. 과하게 자신을 낮추는 겸손은 되레 듣기에 민망하며, 지체가 높거나 윗사람의 아들딸 등을 들먹일 때 낯 뜨겁게 높여 존칭하거나 추켜세우는 비루한 언행 따위는 오히려 예의에 어긋난다. 결국 '지나치게 과도한 공손' 즉 과공過恭이 비례非禮이듯이 '도에 넘치는 칭찬'인 과찬過讚 또한 비례非禮이다. 이런저런 경우에 건네기 마련인 말이 함축하는 오묘한 마력을 제대로 꿰뚫어 헤아리는 게 그리 호락호락한 문제가 아니지 싶다.

흔히들 무언가에 불광不狂 즉 '미치지 않으면', 절대로 불급不及 즉 '미치지(이루지) 못한다.'는 뜻으로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고 조언한다. 그런데 여태까지 살면서 어느 하나에 모두 걸기all-in 했던 적이 없다. 그런 가치관에서 주위에 견줘 크게 뒤지지 않는 게 성공이고 이룸이라 여기고 어깨동무할 수준에서 머물렀던 지난날이 숨김없는 내 진면목이다. 이제서 돌이켜 보니 그런 이유였던가 보다. 크게 이룬 업적도 없을뿐더러 쓰라린 실패도 없었다. 이는 젊음을 송두리째 바쳤던 일터나 현재의 글쓰기에서 내세울 바가 없는 장삼이사張三李四의 밋밋한 삶을 꾸렸다는 증명인 셈이다. 이런 삶을 벗어나라고 선지자들이 '어려서 배우지 않으면 늙어서 아는 바가 없게 되고, 봄에 만약 경작하지 않으면 가을에 바랄 것이 없다.'는 의미로 '유이불학幼而不學/노무소지老無所知, 춘약불경春若不耕/추무소망秋無所望'이라고 충고했지 싶다. 하기야 아직도 세상을 보는 눈이 관견管見*의 경지를 벗어나지 못한 안방퉁소가 구차하게 무슨 변명을 늘어놓으리오.

나는 군자와 거리가 먼 소인배다. 새해 벽두인 정초에 손주 유진이가 치과에서 턱의 부정교합 교정 시술을 받았다. 의료보험 적용이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시술 비용이 상당했다. 그래도 명성이 자자한 명의名醫의 시술을 받는다는 뿌듯함에 우쭐해 눈 딱 감고 일시불로 결제했다. 그것으로 입을 닫아야 했는데 이제 중학교 2학년에 진급할 손주에게 시술비 운운하며 매사에 최선을 다하라는 장광설을 퍼부었다. 어디 소주에게만 그랬을까. 주위의 모두에게도 그 같은 무례한 행동을 저질렀으리라. 자고로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도 모르게 하라고 일렀거늘 민망한 못난이 짓을 했다. 남우세스러운 행동에 어이가 없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언뜻 '선한 일을 하더라도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라는 뜻의 '소작복덕所作福德/불응탐착不應貪着’이라는 옛말이 떠올랐다.

태산북두泰山北斗를 꿈꿨던 적이 없다. 그런 때문에 젊은 시절의 업業에서의 제대로 거둔 결실이 하나도 없음을 서러워할 일이 아니다. 게다가 요즘의 글쓰기에서도 주마가편走馬加鞭의 단호한 결기가 없이 물러터졌던 까닭에 천의무봉天衣無縫의 결실 또한 부질없는 탐욕이다. 그뿐 아니다. 생의 황혼녘을 지나며 돌아보고 또 돌아봐도 세상 이치나 하늘의 섭리를 제대로 깨우친 게 없다. 언제나 맺고 끊음이 흐리멍덩한 채 좌고우면하며 허송세월하다 백수白叟에 이른 삶이 과연 부끄럽지 않은지 곰곰이 곱씹어 볼 일이다.

* 관견管見 : 가는 붓 대롱으로 하늘을 본다는 의미로 장자莊子의 추수편秋水扁에서 나오며 '가는 붓 대롱으로 보는 하늘은 좁기만 할 터이다'



한판암 수필가 경남IT포럼 회장, 경남신문 객원논설위원 역임, 한국문인협회·마산문인협회 회원.

                  수필집 『8년의 숨가쁜 동행』(2014년 세종도서), 『반거충이의 발밭산책』(2019년 문학나눔 도서) 등 1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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