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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누워서 피는 꽃 / 오정자

부흐고비 2021. 12. 13. 09:00

눈이 부셨다. 치자나무가 꽃을 피웠다. 병이 났는지 가지며 이파리가 까칠하니 야위어 가고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곁가지에서 줄기를 뻗어 잎을 틔우고 꽃을 피워 올린 것이다. 포기하지 않고 일어선 그 투혼의 용기가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답다. 두근대는 가슴으로 살며시 다가가 조심스럽게 꽃잎을 쓰다듬어 주었더니 함박웃음으로 화답한다.

이 꽃나무는 7년 전 어느 봄날, 친구의 품에 안겨 와 한 지붕 아래서 살게 되었다. 타원형 잎사귀 사이로 수줍은 듯 함초롬히 피어난 하얀 꽃송이는 면사포를 쓴 신부처럼 어찌나 눈부시던지. 그 자태에 온통 마음을 빼앗겨 한동안 눈을 뗄 수 없었다. 눈이 시리도록 흰 얼굴은 청초하면서도 우아해 절세미인 양귀비도 울고 갈 정도다. 순결한 것을 좋아하는, 이 꽃에 얽힌 전설 속의 ‘가데니아’라는 그 소녀가 환생해 온 것만 같았다.

꽃나무를 바라볼 때마다, 순백의 꽃송이가 뿜어내는 눈부신 빛에 나같이 때 묻은 혼도 순결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하얀빛과 푸른빛에 홀린 나는 눈만 뜨면 고사리 같은 손을 흔들며 내게 말을 걸어오는 그에게 다가가 눈을 맞추고 살포시 입맞춤하며 코를 갖다 대곤 했다. 그러다 보면 향긋한 미향이 내 온몸에 스며들어 마음마저 향기로워지는 것이다. 꽃나무는 향기로 자신의 고유함을 지키며 온 생애를 아름답게 가꾸어 가는데, 나는 향기는커녕 허구한 날 병고에 시달려 아픔만 토로하고 있으니 그런 내가 부끄러워진다.

언제 보아도 마음을 정화해 주는 꽃의 빛깔과 자태에 이끌려 틈만 나면 잎을 닦아주고, 블라인드로 빛의 양을 조절해 주면서 이틀에 한 번 물을 주며 정성을 쏟았다. 그런 내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하듯 연둣빛 새잎을 연신 피워 올리며 설렘과 환희의 기쁨을 안겨 주었다.

아침나절엔 창으로 쏟아지는 눈부신 햇살을 머금고 진초록 잎의 싱그러움을 한껏 드러냈으며, 저녁 어스름에는 다소곳이 무릎 끓고 앉아 기도하는 소녀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 꽃나무는 내가 이른 아침부터 한나절까지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쓰러져 자는 날이면, 그윽하고 은은한 꽃향기로 나를 불러낸다. '몸을 다스리지 못하면 마음이 병든다.'고 나직이 속삭이며 내 마음을 다독여 주고 언제나 손 내밀어 벗이 되어 주었다. 그 도타운 속삭임은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위안과 평안을 안겨 주었다. 무심히 건넨 말 한디로 상처를 주는 사람보다 낫지 않은가. 식물도 감각이 있어 돌보는 사람의 손길을 감지한다는데, 내가 꽃나무에서 느끼는 따스한 정을 그 또한 느끼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윤기 흐르는 작은 잎사귀는 사시사철 푸르렀으며, 꽃은 피고 지면서 신비로운 순환의 아름다움을 보여 주었다. 해마다 꽃대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무성한 이파리를 달고 순백의 하얀 꽃을 피워 올리며 온 집 안 가득 향기를 풍기어 얼마나 가슴이 설레었던지. 그런 그가 언제 부턴가 봄이 오고 여름이 다 가도록 꽃봉오리를 맺지 못하고, 흰 가지가 바닥에 닿을 듯 더 휘어져 드러누우면서 시나브로 이울어 갔다.

메마른 가지를 볼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아려 오곤 했다. 그러고 보니 화훼식물에 문외한인 남편이 내가 집을 비운 사이에 모양을 다듬는다고 사정없이 가지를 쳐낸 것이 꽃나무로 하여금 모진 삶을 살게 했나 보다. 그럼에도, 앙상하게 흰 가지는 온갖 풍상을 겪은 노거수처럼 해를 거듭할수록 절묘한 균형 감각으로 운치를 더해 예술적인 곡선의 미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토록 가녀린 몸으로 시련에 맞서 푸른 줄기를 뻗어 꽃 한 송이를 피워 낸 것이다. 절망의 늪에서 희망을 꽃피운 것이다.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해 얼마나 오랜 시간 속울음으로 인내해야 하는지를 여러 해 동안 나는 낱낱이 지켜보았다. 긴 침묵 속에서 소리 소문 없이 가지 끝에 매달린 앙증맞은 꽃봉오리는 자신의 내면을 가득 채워 활짝 피어난다. 수많은 꽃망울을 터뜨리고도 절대로 뽐내지 않는다. 그저 인간들이 바라봐 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한다. 탐욕을 부리지 않고 자신의 모습 그대로 겸허하게 일생을 살아간다. 만개한 꽃송이는 열흘가량 온몸으로 향기를 뿜어내고는, 먼 길 떠날 채비를 하듯 미색 수의로 단정히 갈아입고 점차 갈색으로 변해 어느 날 뚝 떨어진다. 어찌 보면 그 속절없음은 인간의 생과 다를 바 없어 보이나, 향기로운 삶의 여정이란 생각이 든다.

누워서도 앓는 소리조차 내지 않고, 가느다란 줄기 끝에 매달려 온 힘을 다해 꽃을 피우며 순간순간의 삶에 충실한 꽃치자나무, 그 푸르던 어제의 기억을 미련 없이 지워 버리고 지금은 평상심만으로도 아름다워야 할 때라고, 그러기에 오히려 더 치열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바라볼수록 꽃나무에선 달관의 경지에 오른 듯 초연함이 배어난다. 건강한 육체를 지니고도 귀중한 생명을 초개와 같이 내던지는 용감무쌍한 이들이 속출하는 기막힌 세태를 향한 절규가 아닐까. 아니, 그보다도 그의 몸짓은 어쩌면 나를 향한 질책인지도 모르겠다.

언제부턴가 육신의 아픔으로 천지간에 혼자 남겨진 듯한 외로운 마음은 줄곧 우울하고 자신감을 잃어 갔다. 그 바람 같은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는 나는 때때로 희망과 절망 사이를 넘나들며 허우적거리기도 했다. 이제 더는 스스로 연민에 빠져 나 자신을 어둠 속에 가두어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싶지 않다.

누구에게나 빛깔이 다를 뿐, 저마다 고통이 있을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육제의 가시와도 같은 고통이야말로 삶을 가장 아름답게 꽃피울 수 있는 인생의 자양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순리를 따르며 제 빛깔, 제 향기를 잃지 않고 삶에 대한 열정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한 꽃나무는 내게 생명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지. 또 내 삶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일러 주었으며, 무엇보다도 산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라는 보석보다도 빛나는 성찰로 삶의 지혜를 일깨워 주었다. 그는 묵언의 소리로 깨달음을 준, 말 없는 스승이었다.

저 꽃나무처럼, 누워서 꽃을 피워 낸 열정과 희망을 가슴에 품고 살다 보면 나도 내 생애 어느 날인가에는 꽃피고 열매 맺지 않을까.



오정자 수필가

《한국수필》 수필 등단(2004), <미주중앙일보> 신춘문예 논픽션 당선.

한국수필가협회 운영이사, 한국수필작가회 이사, 국제펜한국본부 한국문인협회 회원.

해외한국수필문학상, 재외동포문학상, 경희해외동포문학상, 원종린문학상 수상.

수필집 『짝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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