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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어쩌자고, 이름표 / 김근혜

부흐고비 2021. 12. 13. 15:40

생이 서문을 읊는다. 마이크에 기름을 바른 듯 반지르르한 말이 굴러 나온다. 경매사는 넘어서는 안 될 선까지 마음대로 넘나들며 흥정을 붙인다. 지긋이 묵상하는 구경꾼들 등줄기에 실핏줄이 일어선다. 시간을 추리하려는 사람들의 인기척을 가만가만 듣고 있는 촛대 하나가 마음을 졸이고 있다. 한 해가 가기 전 매출이라도 올리려는 걸까. 경매사의 목소리에 고이는 힘이 만만찮다.

사람들의 잠자던 손가락이 눈을 열고 서성거린다. 물건은 전파탐지기를 매단 고래가 된다. 큰 화면으로 그를 보며 둘째손가락으로 왼쪽을 쉼 없이 클릭, 클릭하는 사람들. 마우스는 설렌다. 여체를 조각한 목각 인형에게도 극적인 장면이 나올까. 새소리마저 죽은 금요일 밤, 경매장의 열기는 뜨겁다.

잠시 쉬고 있는 나에게 DNA가 두드린다. 휴지기 동안 결핍을 보강하기보다는 마음 놓고 푹 쉬었다. 머릿속에서 맴돌다 누술하지 못한 많은 언어를 매장하고 마음을 눕혔다. 고삐를 풀어놓고 다른 용도로 사육했다.

날마다 문턱을 넘어오는 언어들과 줄다리기했다. 마르지 않은 우물을 애써 파묻고 밀실에 가뒀다. 잠수하고 있는 언어들이 책장을 넘길 때는 가슴이 무거웠다. 달빛의 뒤태마저 쓸쓸하게 느껴지던 날들이다. 맨발이어서 활자화되지 못한 내 이름, 높지도 않은 담장이 높아서 뛰어넘지르 못했다.

이름이 이름값을 하는 틈에서 검색기를 돌린다. 어떤 이름은 나를 단련시키고 이스트를 넣은 허명은 실망하게 한다. 세 음절밖에 안 되는 이름표를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이 있는데 내 삶의 보고서는 빈약한 것 같다. 이름값에 가격표를 붙이려고 눈과 귀가 멀어 마음이 불구가 된 적은 없는가 이름은 책임이 따라서 함부로 내세우기가 조심스럽다.

이름은 과시하려는 속성이 있다. 체면치레를 위해 무리해서라도 ‘샤〇' ’루○○똥' 가방을 사는 것처럼. 축적된 셈법으로 군살을 찌운다. 내 이름값에 물음표는 여전히 남아있는데 마침표를 찍어야 하는 쓸쓸함, ‘지경'과 '경지' 사이에서 견디는 법을 훈련하고 있다. 이름도 생명체와 같아서 성장하고, 아프고, 늙고, 결국에는 죽는 것을.

인간도 때론 경매시장에 내놓은 상품 같지 않은가. 아무리 좋은 것도 제대로 볼 줄 아는 사람이 없으면 그 가치는 무의미하다. 낙찰되어야 비로소 존재가 된다. 인생은 낙찰과 패찰 사이에서 늘 조마조마한 가슴을 움켜잡고 사는 것 같다. 반드시 건너야 할 13월의 강,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손가락을 펼쳐 나에게 지문을 찍을 때 비로소 낙찰된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다리를 요염하게 꼬고 밥상 위에 앉아 노려보는 음식이 있다. 맛이 없어 손이 가질 않는데 성인병에는 좋다고 인기다. 구약나물이 되기 전의 알줄기처럼 나는 성격이 뾰족하다고 생각했을 뿐 예쁘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어릴 때부터 쫓아다니는 남학생들이 많아 도망을 다니다 보니 달리기 선수가 된 적은 있다.

네 맛, 내 맛, 없는 구약나물 같은 나도 값을 매길 수 있을까. 골동품 경매장에 가는 날이면 물건에 나를 대입해 본다. 경매사는 입력된 정보에 호흡을 불어 넣고 마이크를 잡는다. 속옷이 다 비치는 시스루 원피스를 입고 가림막이 쳐진 단 위에 오른다. 경매사의 손짓에 따라 가림막이 서서히 벗겨진다. 사람들은 조리개를 크게 열고 숨을 죽인다.

경매사의 손가락은 여든여덟 개의 건반을 오르내리며 생의 분량을 연주한다 높은 ‘도’ 자리에서 뒤척이던 음절이 갑자기 끊긴다. 마른 침 삼키는 소리가 정적을 깨고 자리다툼이 인다. 경매사는 현기증을 일으키는 응찰자들을 위해 ‘파’ 음에서 잠시 지휘를 멈춘다.

유찰된 목각인형이 내 동작을 놓치지 않으려고 열심히 받아쓴다. 삐거덕거리며 일어나려고 분절음을 내는 글자, 이름값이 한 뼘쯤 자라나는 소리 같다. 반가사유상이 빙긋이 미소 띤 얼굴로 눈치 없이 다가오다 낙찰된다.

아흔여섯 살 된 포르투갈의 현역가수, ‘셀레스트 드리게스’가 ‘Chuva’를 부르며 응찰자들을 압도한다. 좁은 경매장 안은 삽시간에 파두 하우스로 바뀐다. 그녀는 노래한다. “인생의 이야기 속에 여전히 살아있는 이들이 있지만, 그 이름조차 기억되지 않는 사람도 있다.”고. 사람이 어찌 이름값만으로 살겠냐만 어쩌자고 나는 존재감도 없는지 의수같이 슬프다.

가장 저지르기 쉬운 것이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오독이 아닐까. 경매사가 아무리 진품이라 우겨도 모조품을 가려내는 것은 응찰자의 눈이다. 모조품이 진품으로 행세하는 경우도 가끔 있다. 청진기를 들이대고 가슴이 보내는 신호를 살살 들어보고 싶다. 나는 가품佳品인가, 가품假品이 아닌가.

응찰자의 통찰력이 좋아서 내가 낙찰되는 꿈을 꾼다. 응찰자의 안목이 나빠서 내가 낙찰되는 꿈을 꾼다. 상영 중인 극은 막이 내리질 않는다. 패찰된 누군가가 큰 목소리로 아쉬움을 토로한다. 쨍그랑 꿈이 달아난다.



김근혜 수필가 《동리목월》 신인상. 제11회 산림문화대전 대상, 제3회 대한민국독도문예대 전우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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