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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꽃으로 피다 / 이미영

부흐고비 2021. 12. 13. 16:13

꽃은 주고받는 것이었다. 연인에게 받은 장미 한 다발, 친구의 전시회에 건넨 수국 한 송이, 화원을 지나다 사 온 프리지어 한 묶음, 모두 뿌리에서 잘린 시한부 생명이다. 반쯤 살아있는 것들은 가볍게 주고받는다. 감탄으로 안았다가 시들기 전에 물구나무서기를 시킨다. 식탁 전등에 검게 마른 장미가 매달려 있다가 툭 떨어져 바스러진다. 밥상으로 낙상한 것이 아니라 천만다행이라며 행주로 쓸어 담는다.

팔순을 넘긴 엄마는 꽃을 키운다. 아기를 대하듯 조심스러운 손길로 꽃잎을 쓰다듬는다. 엄마의 베란다 온실에는 어떤 꽃이라도 피어있다. 크건 작건 흔하건 귀하건 꽃이면 웃음이 피어난다. 도로를 단장하느라 길가에 심어 놓은 이름 모를 꽃들에게도 감탄사를 보낸다. 그러고 보니 어버이날 드린 카네이션도 물에 담가 두고 밑동을 잘라가며 오래 보았다.

방긋한 녀석을 우리 집으로 데려오면 금세 시무룩해진다. 분홍색 조명을 사방으로 밝힌 산철쭉 화분을 들여서 두 해 만에 텅 빈 분으로 엄마에게 돌려보냈다. 그 후로는 꽃을 탐내지 않기로 한다. 자꾸 죽어 나가는 것들을 보기가 힘이 든다. 꽃다발과 무게가 사뭇 다르다.

대학 시절 캠퍼스에는 때를 기다려 벚나무가 연분홍 꽃잎을 터트리고 장미정원에는 빨간 잎이 너울거렸다. 장미원은 친구들과 정해둔 만남의 장소였다. 서로 다른 과를 다니는 여러 명이 모이기에 적당한 위치이다. 얼굴을 바라보며 웃고 떠들다 흩어진다. 장미가 봉오리를 올렸는지 시들었는지 모르고 지나간다. 벚꽃이 만개한 길은 꽃소식을 듣고 소풍 나온 동네 주민들 차지다. 아기는 유모차에서 잠이 들고 어른들은 이리저리 사진을 찍는다. 한낮을 더 눈부시게 만드는 꽃그늘 아래에서 노년들은 오가는 우리를 쳐다. 본다. “꽃보다 예쁜 시절이다. 자기들이 꽃이라서 꽃을 쳐다보지도 않는구나.” 작은 소리로 부러움을 드러낸다. 캠퍼스의 주인들에게 벚꽃은 중간고사를 알리는 하얀 신호등이었다.

우리가 가끔 사진을 찍은 곳은 굵은 밑둥치를 자랑하던 플라타너스 곁이었다. 학교를 가로지르는 널찍한 길 양쪽에 늘어서서 봄이면 여린 잎으로 한들거린다. 여름에는 짙은 그늘을 만들어 청춘이 버거운 학생들을 식혀준다. 늦가을 대학노트만 한 이파리가 가로에 뒹굴 때 가지 사이로 드러난 높은 하늘을 쳐다보게 만든다. 한겨울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도서관으로 향할 때 묵언으로 위로한다. 플라타너스는 사계절 고루 요동치는 우리 곁을 지켜주었다.

아버지가 안 계시고부터 나무보다 꽃 옆에 서게 되었다. 엄마와 여행을 다니면서 꽃을 키우는 일을 생각한다. 오래 병상에 누우셨던 아버지를 수발하느라 엄마는 집을 나서는 일은 꿈도 꾸지 못했다. 입맛이 떨어져 기운을 쓰지 못할까 삼시 세끼를 살뜰히 챙기고 오전과 오후로 운동을 시키면 하루가 지나갔다. 성품이 고운 아버지도 환자가 되고 나서 짜증을 숨기기 어려웠다. 웃음기가 마른 집에서 아침저녁으로 쓰다듬어 주면 꽃으로 답하는 작은 것들이 얼마나 어여뻤으랴. 베란다에서 방실거리며 기운을 돋우는 초록의 결정들이 얼마나 고마웠으랴. 적은 보살핌에도 많이 웃어주는 화분은 자꾸 늘어났다. 아버지의 기력이 쇠할수록 꽃은 활짝 피었다.

엄마는 집에서 자라는 식물과 오랜 친구다. 이파리를 살살 닦아주고 화분의 흙에 손가락을 찔러본다. 햇빛이 드는 방향을 살펴서 자리를 바꿔준다. 온목이 비에 흠뻑 젖어 본 적이 없고 바람에 흔들리지 못한 것들의 마음을 안다. 새들의 노래를 듣지 못하고 벌들의 군무를 볼 수 없는 베란다 꽃들의 신세를 측은히 여긴다. 집 안의 식물들은 살펴 주어야 꽃을 피운다. 가꾸는 정성에 화답하는 것이다.

우리는 무조건 꽃이 피는 여행을 나선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경치가 빼어난 장소를 다녀온다 해도 소용이 없다. 어디에서 꽃잔치가 벌어지는지를 살핀 후에 길을 떠난다. 덩달아 내 스마트폰에도 장미 넝쿨 앞에서 수국 옆에서 활짝 웃는 사진이 늘어난다. 엄마의 얼굴에서 아버지의 그늘이 지워져 간다.

햇빛 속에서 흔들리며 피는 꽃들은 힘이 있다. 태풍이 지나간 뒤에 오히려 개운하게 피어있는 것들에게서 강철의 속성을 본다. 시들시들하다가도 단단한 가지 끝에 핀 화사한 봉오리를 보면 손뼉을 치게 된다. 꽃잔치에 다녀오면 며칠은 가슴이 들썩거린다. 초록들은 제 몸속에서 분홍, 노랑, 보라를 만들어 색의 요술을 펼친다. 무리를 이루어 핀 꽃들을 보면 향연이라는 단어의 고향은 꽃동산이 틀림없을 것 같다.

엄마는 꽃을 키우다 어느새 꽃이 되었나 보다. 아파트 입구에 마중 나와 손을 흔든다. 멀리서 내 이름을 부르는 하얀 머리에 함박웃음이 바람에 흔들리는 구절초 같다. 어두웠던 마음이 금세 밝아진다. 만세를 하듯이 두 팔을 벌리고 먼저 다가온다. 꼭 껴안아 등을 쓸어주면 막혔던 가슴에 길이 나는 것 같다. 아버지를 돌보며 꽃을 피운 엄마는 꽃이 되어 간다. 한 번도 꽃 대접을 받아 본 적이 없는 엄마가 저무는 시간에 꽃으로 핀다.



이미영 수필가 2011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 2019 대구문화재단 문예진흥기금 수혜. 2019 대구수필가협회 작가상 수상. 수필집 『행복은 말이야』, 『너에게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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