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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반딧불이 있는 풍경 / 이덕대

부흐고비 2021. 12. 14. 08:34

라디오도 텔레비전도 흔하지 않은 시절, 여름밤 시골 풍경은 적막하고 무서웠다. 눅눅하고 짧은 밤, 보이지도 않는 도깨비가 골목길을 막았고 간간이 들리는 새끼 떠나보낸 어미 고라니 울부짖음은 들어보지도 못한 귀신 울음소리만큼이나 무서웠다. 먹물 같은 어둠이 장막을 치고 온 집을 둘러싼 감나무들로 인해 연못만큼 작아진 하늘에서 별빛 쏟아져 내리면 밤이 깊어도 쉬이 잠들지 못했다. 일찍 홰에 오른 닭들도 꿈을 꾸는지 부스럭댔다.

여름비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면 동사 뒤 창고에 있던 상여에서부터 어룽어룽 희끄무레한 인憐불이 날아 나와 숲속을 떠다니고, 숲을 감싸고 흐르는 개울에는 밤이 찾아오자마자 꽁무니에 인불을 단 개똥벌레 날았다. 신비神祕와 전설傳說이 어둠을 장식하는 고향 여름밤은 무덥고 서늘했다.

사계절 중 여름밤은 어릴적 추억 속에서 각별하다. 가을밤 쓸쓸함이나 겨울밤 적적함, 봄밤의 막연한 울렁거림과는 사뭇 다른 스멀스멀함이 있다. 들도 산도 넘치는 생명의 열기로 꽉 찬 데다 하늘마저 별들로 형형히 빛난다. 겨울밤은 길지만 가난과 추위로 긴 시간 이야기하기가 어려웠다. 들로 산으로 뛰어다닌 봄이나 가을은 몸을 누이기 무섭게 꿈나라 여행이 바빴다. 비록 짧지만 가장 많은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것이 여름밤이다. 견우직녀가 만나는 것도 여름밤이 요 오작교를 만드느라 까치와 까마귀가 민머리가 되는 것도 이때다. 인불이 날고 도깨비가 무시로 고샅길을 드나드는 것도 여름밤이다.

세찬 바람을 두들겨 맞고 마당가에 떨어진 감나무 잎과 까닭 없이 길게 자란 우물가 키다리 꽃나무 대궁을 잘라 피운 모깃불은 알싸한 연기를 낮게 깔아댔다. 살쾡이 무서운 닭들은 산꼭대기에 어스름 걸리자마자 홰에 오르고 늦은 저녁 배불리 먹은 늙은 암소는 외양간에서 되새김질하기 여념 없었다. 축축한 밤안개와 같이 내려온 어둠은 선들선들 부는 남풍에 이내 별들로 해서 장막을 걷었다. 마른 보리 대궁을 물에 적셔가며 타는 모깃불 위에 올리자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매캐한 연기가 할머니의 부채질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렸다. 연기는 거짓말하는 사람을 찾아간다며 아이들은 툴툴대고 낄낄댔었다.

맵싸한 풋고추만 넣고 양념 없이 끓여낸 조갯국에 보리밥을 말아 열무김치를 척척 걸쳐가며 먹어댄 아이들은 대나무 평상 위에 아무렇게나 누워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감나무 잎 사이로 달이 숨고 별이 쏟아져 내렸다. 가끔씩 들리는 모깃소리에 괜히 다리를 긁적이다. 할머니 부채를 멀거니 쳐다보곤 했다.

오늘은 꿈속에서 반딧불을 본다. 별도 잦아들어 칠흑같이 어두운 밤, 몽환적인 몸짓이 어둠을 뚫고 난다. 먼 하늘에는 별똥별이 떨어진다. 바다가 춤을 춘다. 춤추는 반딧불이 이야기를 만든다. 불이 반짝거리는 꽁무니를 만지면 마른 개똥 냄새가 난다. 깜빡이며 나는 것은 궤적이 자유롭다. 언뜻 사라지기도 하고 수시로 나타나기도 한다. 한두 개 파장이기도 하고 멀리 있는 하늘을 조각내어 옮겨다 놓은 듯 별 무리가 반짝이는 것인가도 하다. 노을이 지는 개울가나 이른 아침 햇살 아래서 여울이 멈추는 담潭 수면에 부딪힌 물방울의 잔잔함, 산등성이를 따라 피어오르는 안개가 주는 고요함 같기도 하다. 깜빡거리며 나는 반디는 혼魂을 앗아간다. 어둠과 빛이 교차하는 공간은 마음이 만들어 내는 바다다. 소리 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은 무섭다.

아주 천천히 살랑거리는 할머니의 부채 바람은 잠을 몰고 온다. 모기장이 쳐진 마루 소나무 판재 바닥은 시원하다. 스르르 눈이 감긴다. 해마다 여름밤이면 할머니는 도깨비 이야기를 했었다. 도깨비 이야기를 할 때마다 인불이 떠올랐다. 집 앞 개울에 사는 반딧불이 감나무 밑을 찾아오고 우물가를 맴도는 것은 언제나 밤이 이슥해지면 서다. 할머니 이야기 속 도깨비는 꼭 여름에만 나타났다. 장마가 아직 끝나지 않은 여름밤은 무덥고 습했다. 잔뜩 흐린 날은 바람도 간데없이 숨는다.

할머니의 이야기가 아니라도 숲을 지나 개울을 건너는 곳에는 간혹 인불이 둥실둥실 하늘로 떠오르곤 했다. 흐릿하긴 하나 꼬리가 긴 인불은 총각이 죽어 만들어진 인불이고 또렷하고 동그란 인불은 처녀가 죽은 인불이라고 했다. 꼬리가 긴 인불은 개울을 지나 산속으로 너울너울 날아가지만 동그란 인불은 동네 숲 위에서 한참을 맴돌다 가는 것을 보았다는 사람이 많았다. 이런 날 밤이면 할머니의 도깨비 이야기는 더 무서웠다. 개울을 따라 나타나던 반딧불이 호기심 가득한 아이들에게 환상과 꿈을 선사했다.

불빛은 따뜻함이다. 달빛도 별빛도 따뜻하지 않지만 차갑게 빛나는 불은 비현실적이다. 상상할 수 없는 상상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지는 것은 신비로운 마법이다. 반딧불이가 가져다준 것은 단순히 반짝이는 푸른빛이 아니다. 다가갈 수 없는 세계로 인도하는 유혹의 빛이다. 반딧불이와 도깨비불, 인불이 서로 어우러져 마음속으로 들어오곤 했다.

호박꽃을 꺾어 만든 호롱에 반디를 집어넣고 주둥이를 꽁꽁 묶으면 호박호롱은 부잣집 대문에 매달린 전등보다 더 멋지고 빛났다. 시렁에 매달아둔 호박호롱은 아침이면 언제나 시들어 있었다. 밤새 불을 밝혔을 반디는 어디에도 없이 사라졌다. 도깨비가 반디를 잡아갔으려니 했다.

언젠가부터 고향 개울에는 반딧불이 날지 않는다. 도심의 불빛이 밀려와 그런지 별똥별도 사라지고 눅눅한 여름밤에도 도깨비불, 인불이 너울거리지 않는다. 기다릴 사람도 무서워할 아이도 없으니 여름밤의 불들이 있으면 무엇 하리. 반딧불이 만들어 내던 이야기는 이제 전설이 되고 아득한 기억 속의 묻힘이 되어가고 있는데. 다시 자연 속으로 돌아가면 밤마다 개똥벌레가 하늘을 나는 신비의 세계가 펼쳐질 수 있을까. 세상이 다시 돌고 아픈 상처들이 회복되면 하늘에 많은 빛들이 제대로 떠다닐 수 있을까.



이덕대 수필가 《김포문학》(2017), 《한국수필》(2021) 등단

                 〈경남일보〉, 〈아시아투데이> 등에 다수의 칼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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