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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등성이 / 김정화

부흐고비 2021. 12. 14. 14:34

한국의 산을 보다가 두 사진에 마음이 끌렸다. 안개가 자욱한 언덕에 텐트가 있었다. 풀잎에 반쯤 가려진 불이 켜진 노란 텐트가 달무리로 보였다. 동트자 어둠에 가렸던 바위와 능선이 어깨를 걷고 옅은 구름 아래로 펼쳐졌다. 커다란 물돌이가 굽이치며 흘러가는 듯한 산등성이에 마음이 뛰놀다 잠이 들었다.

날이 밝자 배낭을 꾸려 밀양으로 향했다. 영남 알프스산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산꼭대기 아래 흰 바위가 눈부시고 산 아래로 매끄럽게 펼쳐진 구릉의 초원이 이국을 떠올리게 했다. 띄엄띄엄 터를 잡은 집은 네모나고 뾰족하고 고운 지붕, 알알이 붉게 익은 사과가 푸른 산을 물들인다. 어린 날에 보았던 만화에 나오는 하이디와 빨간 머리 앤 그리고 말괄량이 삐삐가 뛰노는 환영을 보는 듯했다. 내 안에 어린 나도 등성이 풀밭에 뛰어놀면서 골짜기에 다다랐다.

쉰 명을 태운 승강기가 움직이고 내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조금씩 높아 갈수록 산 아래 풍광이 한눈에 들어왔다. 지나온 길이 트이고 갈리고 산자락 모퉁이로 사라졌다. 새길은 이쪽 산자락 따라 굽이 틀고 구불구불한 옛길은 저쪽 산자락 따라 굽이졌다. 두 길은 틈을 두고 나란히 갈 길로 뻗어 길 따라 자리 잡으며 세상과 소통하는 길섶에 사람들은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우리가 갈 수 없는 길이 없다는 듯 묵묵한 두 길은 만날 듯 만나지 못하는 그리움의 간격으로 뻗었다.

오솔길로 들어섰다. 한참 걷고 오르락내리락 밧줄로 보폭을 옮기며 우거지 좁은 숲길을 빠져나왔다. 비렁길 바위에 많은 사람이 모였다. 허리춤에 손을 괴고 먼 산을 보거나 옹기종기 앉아 간식을 먹는다. 우리도 천천히 멈추고 천천히 둘러 산 아래를 휙 둘러보았다. 작은 풀이 산을 메우고 정상이 눈앞에 탁 트인다. 여름풀은 말라가고 풀과 풀 틈으로 피어난 풀꽃이 깊어 가는 가을을 부른다. 산들바람에 산비탈 산국화가 허리 굽혀 넘놀고 풀덤불 속 파랗고 보랏빛 용담꽃도 사르르 나뭇결에 흔든다. 쓴풀·노랑 도깨비바늘·참취·산부추·산 구절초·쑥부쟁이와 푸새도 산을 찾아온 색바람 단맛에 하늘거리며 웃는다. 꽃도 바람 따라 자유롭고 해맑은 모습으로 고운 제 빛 깔로 물들어 가을 이야기꽃을 피운다.

꼭대기로 이어진 등성이에 나무판이 깔렸다. 앞서는 사람은 서두르지도 느리지도 않고 바닥을 보며 한 발 두 발 딛는다. 나도 첫 계단을 밟는다. 발소리가 나를 따르고 숲으로 숨었던 그림자가 나를 따른다. 그림자는 억새 풀과 작은 풀을 쓰다듬고 들꽃을 톡톡 건들고 심심해하는 흙에 속살거린다. 햇볕이 어깨를 타고 내려오자 그림자는 방향을 틀고 나무판에 얼비진다. 능청스러운 바람은 잽싸게 등성이의 허벅지를 매만졌다 사라졌다. 숲이 참 재미나게 지루하지 않게 저들끼리 잘 어울리며 삶을 짓는다. 느린 보폭으로 한 걸음 두 걸음 오르니 내 고향 등성이에 뛰놀던 때가 아롱아롱하다.

여름 방학이 되면 마을 아이들은 내남없이 유목민이 되었다. 예순 집이 넘는 집집이 소를 한 마리씩 키웠다. 뒷산은 백악기 화산인 금성산을 끼고 있어 산등성이가 여러 갈래로 마을로 뻗어 골골이 모여 산다. 쇠뜨기풀이 있는 곳으로 앞산과 옆 등성이를 번갈아 가면서 소를 몰았다.

소가 풀을 뜯는 동안 등성이는 놀이터가 되었다. 납작한 돌을 주워 비사치기도 하고 누가 빠르나 용을 쓰며 등성이를 달린다. 비석에 한 사람이 기대어 기둥을 하고 여럿이 차례대로 꼬리 물고 엎드리고 말타기를 한다. 풀밭으로 흩어져 호랑나비와 잠자리를 쫓고 벌집을 막대기로 쑤시고 달아났다. 나무 그늘을 찾아 먹국과 공기놀이하고 무덤가에 둘러앉아 술래잡기한다. 콩서리는 내 어린 날 한폭의 그림이 되어 언제나 눈앞에 펼쳐진다. 풀밭에 드러누워 바람에 두 팔을 뻗어 조각구름 떼는 상상을 하며 놀았다.

하늘땅은 내가 본 세계가 세상 전부이다. 세상 밖은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다. 놀이가 즐겁고 이기면 기뻤다. 뛰놀다가 작은 그루터기에 발이 걸려 넘어져 얼굴을 갈아붙이고 손바닥이 터지고 무릎이 깨져도 금방 뚝 그치고 또 놀았다. 말타기는 안쪽으로 쑥쑥 들어가야 뒷사람이 총총히 앉고 많이 타서 쓰러지면 통쾌했다. 두 줄로 나란히 손에 손잡고 두꺼비 놀이할 때는 골골샅샅 새콤달콤한 웃음소리가 메아리쳤다. 메아리도 나를 따라 웃으며 기뻐했다.

오빠 따라다니면 늘 놀이가 생겼다. 정신이 팔려 지칠 줄 모르고 놀다가 집에 늦게라도 들어가면 엄마에게 꾸지람을 듣는다. 오빠는 괜찮고 나는 안 괜찮았다. 꼬박꼬박 말대꾸하여 엄마 속을 뒤집는다. 화가 난 엄마가 부지깽이를 들면 그길로 나는 골목 끝까지 줄행랑을 쳤다. 따라오던 엄마가 포기하고 돌아가면 나는 등성이에 올라갔다. 그대로 집에 들어가면 꾸지람이 이어지기에 내가 갈 곳이 딱히 없었다. 등성이 끝에 있는 하얀 비석 봉우리에 올라가 마을을 내려보면 어느새 마음이 풀렸다.

등성이가 나를 등에 업고 보듬어 주는 듯하다. 어른이 되어 도시 상자에 갇혀 마음도 각졌다. 아파트에 갇혀 책에 갇히고 글에 갇히고 매운 말씨에 갇혔다. 꿈에 갇혀 내 한 몸을 숱한 괴로운 관념어로 가뒀다. 꽁꽁 얼 듯한 머리를 풀려고 나는 자연이라는 넓은 문을 힘겹게 열었다. 등성이에 오르면, 풋풋한 풀 내음 구수한 흙 내음을 바람결에 맡는다. 마음이 느긋해진다. 온 몸에 싱그러운 기운이 깃들고 마음을 기대어 주는 편안함을 얻는다.

나는 자연의 숨결을 날마다 오십삼 그램은 마셔야 한다. 산에 들어 가뿐가뿐 한걸음 자연에 의지하고 싶은 내 몸이 간절하다. 흙이 좋아 땅에 난 거이며 예사로 보지 않는다. 저절로 퍼지고 마음껏 눈 비비는 풀같이 얽매이지 않는 마음이 깃든다. 현실에서 받은 지친 마음 짊어지고 오르면 넉넉한 자리를 내어 주어 갇힌 마음을 치유하고 새로운 마음을 샘솟게 힘을 보 태준다.

어느새 끄트머리 나무판을 딛는다. 사진 속 말뚝 앞에 섰다. 넉넉한 언덕에서 눈을 지긋하게 감고 나도 하룻밤 묵는다. 고요한 밤의 음색이 빛으로 다가오고 담담한 달빛이 내려온 숲하루에 나를 가둔 세상의 긴장을 깬다.



김정화 수필가 2018 《마중문학> 수필 신인상, 2021년 《문장21》 시 신인상. 제10, 11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장려상·입선 수상. 대구문인협회 수필사랑문학회, 텃밭시인학교 회원/ 공저 『양철지붕 두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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