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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실상과 환상 / 이희순

부흐고비 2021. 12. 14. 09:01

한 칸 폭에 대여섯 걸음 작은 웅덩이 가에 노랑꽃창포 가족이 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무심한 사십년지기였다. 노랑꽃창포는 초여름의 문턱에서 좁고 무성한 잎사귀 사이로 길쭉한 꽃대를 올려 듬성듬성 노란 꽃 한 번 피우면 그뿐 더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 만한 매력이 없어 보였다. 그래선지 내 고장 사람들은 개난초'라 불렀다.

논배미가 밭으로 바뀌면서 창포 가족한테 변고가 생겼다. 쓸모가 없어진 웅덩이가 메워지고 창포 무리는 뿌리째 뽑혀 돌무더기에 널브러져 죽어 가고 있었다. 언덕 아래 후미진 진창에 있는 것들은 이미 목숨을 잃었다. 뽑아내기가 까다로워 제초제를 뿌린 듯했다. 나는 한낮의 참상에 넋을 놓았다. 겨우 숨이 붙어 있는 세 뿌리를 추슬러 남새밭 가에 심었다. 두 해가 지나니 창포 삼 남매는 몰라보게 번성하였다.

더운 날 해거름에 물을 주고 있자니 그들이 말을 건넸다. 그들이 내 은혜를 잊을 수 없다고 입을 모았다. 그들은 나와 마주칠 때마다 내 눈을 들여다본다고 했다. 긴 칼처럼 머리를 쳐들어 거칠고 볼품없는 그들의 모습이 오늘도 내 눈동자에서 사람의 얼굴로 반짝이고 있음을 확인했다고 한다. 나는 노랑꽃창포 가족의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참지 못했다. 그 눈물은 기쁨과 자랑이 넘치는 득의의 눈물이었다. 그렇다. 나는 그들에게 생명의 은인이고 사랑의 화신이었다.

제비 부부는 방문 앞 도리 안쪽에 집을 지었다. 여러 날 걸려 집을 짓는 동안에 걸핏하면 마루에 질척한 논흙을 떨어뜨려 아내를 귀찮게 했다. 그들은 새끼를 여섯 마리나 깠다. 나는 매일 아침 제비집을 지켜보며 제비 부부의 안부를 확인했다. 부부가 거의 동시에 먹이를 물어오는 걸 보고서야 눈을 뗐다. 제비들은 골목길 바닥에 스칠 듯 아슬아슬한 저공비행을 일삼는다. 저러다가 차에 치이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볏논에 나가 농약 맞은 벌레를 잡아먹고 일이 나면 노랑 부리 여섯은 속절없이 굶어죽으리라 걱정했다. 먹이를 받아먹은 새끼들이 돌아앉아 배설을 하면 부부는 재빨리 받아 물고 바깥으로 날아가지만 마룻바닥에 떨어뜨리기 일쑤였다. 나는 적당한 골판지를 챙겨 제비집에 받쳐주었다.

유난히 소란한 아침이었다. 제비 부부가 번갈아 들락거리면서 새끼들을 충동질한다. 어서 밖으로 나와 날아보라 채근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새끼들은 망설이다가 차례로 두 마리씩 짝을 맞춰 집을 나섰다. 며칠 전 내가 처마 앞에 쳐놓은 줄에 잠시 앉았다가 창공으로 솟아 높다란 전깃줄에 안착하는가 했더니 홀연히 어디로 떠나버렸다.

한 보름 만에 제비 부부가 들렀다. 그럼 그렇지, 우리는 작별인사 쯤은 나누어야 했다. 그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는 아침마다 당신의 낯빛을 살피다가 이내 마음을 놓았다. 우리의 안부를 염려해주는 아침마다 우리는 당신의 눈동자에서 눈부처를 보았다. 당신은 우리를 한 가족으로 안아주었다. 아, 제비 부부는 살뜰한 내 마음을 알고 있었구나. 그들의 고백을 들은 나는 자랑에 차서 공연히 파란 하늘을 휘둘러보았다.

해가 바뀔 적마다 나는 우리 집 닭 두 마리가 세 살이다, 네 살이다, 다섯 살이다, 자랑했다. 사람들은 참 대단도 하다며 감탄했다. 올해로 여섯 살이라 내 자랑에 더욱 기세가 올랐다. 비록 암탉은 두 달 전에 죽었지만 나는 여섯 살짜리 장닭(수탉)을 애지중지 먹여 살리고 있다 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했다. 노랑꽃창포도 그랬고 제비도 그랬듯 늙은 수탉도 내 눈에서 제 모습의 '사람 눈부처'를 보았으리라. 내가 저한테 얼마나 마음을 써주었는지 넉넉히 느끼고 있으리라 치부했다.

몇 날을 비틀거리던 수탉이 오른짝 눈을 감아버렸다. 외눈박이가 되니 더욱 짠했지만 나는 수탉을 다그쳤다. 눈을 떠라. 십 년은 살아야 하지 않으냐. 별안간 수탉이 말을 꺼냈다. 우리는 당신의 눈에서 눈부처를 보아왔다. 그 눈부처는 죽은 암탉과 내 모습의 '사람'이었다. 우리 나이 여섯은 노인에 비할 수 있을 터이니 당신을 만난 우리는 행운아였다. 암탉도 당신을 고마워했었다. 나는 감격에 겨웠으나 늙은 수탉은 두 번 다시 오른짝 눈을 뜨지 않았다. 모이를 먹으려고 하지도 않고 맨바닥에 엎드러져 고개를 떨어뜨리고 지내는 날이 늘었다. 그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마침내 수탉은 임종을 맞았다. 나는 그저 속수무책 그의 곁에 묵묵히 서 있었다. 수탉이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우리는 몇 해 전에 당신이 어떤 사람과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신은 말했었다. 단지 모가지를 비틀 기회를 놓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지금껏 저 닭들을 살려둔 거라고, 우리는 경악했다. 뜬눈으로 밤을 새운 우리는 어렵사리 마음을 다잡았다. 어떻든 우리 목숨이 붙어 있는 건 당신 덕택이라 여겼다. 그러다가 우리는 우연히 당신의 눈에서 눈부처를 발견하곤 또 한 번 놀랐다. 당신은 더는 모가지 비틀 기회를 놓친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는 당신의 눈에 어리는 눈부처를 받아들였다. 암탉이 죽은 뒤에 나는 당신의 눈부처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문득 나는 눈부처 뒤편에서 그것을 보았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한테 알리고 싶어 설레발 치는 당신의 마음을 본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한쪽 눈이라도 감아 당신의 눈을 보지 않으리라 작정했다.

고마운 당신, 나는 당신의 눈에 그저 수탉이기를 바란다. 내 눈에 비친 당신도 한 마리 수탉이기를 바란다.



이희순 수필가 《한국수필》 등단(2007).

                   한국수필가협회, 한국수필작가회, 여수수필, 동부수필 회원.

                   저서 : 『방언사전 여수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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