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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물망초 / 이병훈

부흐고비 2021. 12. 16. 08:31

자신감에 넘치던 젊은 시절, 대한민국 육군 병장, 이(李) 병장으로 제대신고를 할 땐 자신감과 열정으로 의욕이 넘쳤다. 당시 제대 장병들끼리는 병장은 오성장군 중 하나라고 농담조로 말했다. 미래의 무한한 가능성과 발전을 의미하는 뜻이리라. 그러나, 군대에서 제대 후 산촌의 시냇가 작은 오두막 골방에서 책과 씨름하며 혼자 지낸 시간이 꽤나 흘렀다. 청운의 꿈을 안고 큰 뜻을 품었지만 시험에서 몇 번의 고배를 맛보며 좌절했다. 의욕과 자신감에 넘치던 혈기는 시나브로 사라지고 가슴은 초겨울 찬바람에 나뒹구는 낙엽처럼 을씨년스럽고 막막해져 갔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부는 어느 날 오랜만에 그녀가 오두막에 찾아왔다. 둘은 시골의 작은 호숫가를 걸었다. 꽁꽁 언 호수 위에 간밤에 눈이 내려 하얀 눈밭이다. 그녀의 한숨 섞인 넋두리는 부모님의 결혼 독촉이 점점 더 버티기가 힘들 만큼 성화라는 것이다. 그녀의 나이가 많아지니 이해도 된다. 난 아직 세상에 나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 지금 와서 시험을 포기 할 수도 없었다.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하면서 합격의 미련을 버리지 못했고 당시로는 별다른 묘책이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녀는 더 이상 우리의 관계를 반대하는 부모님의 결혼 독촉을 피하기가 힘들다면서 피곤해 하며 푸념을 털어놓는다. 답답하고 막막했다. 내 자신의 무능함에 스스로 자책하고 있었다. 시험을 포기하고서는 그분들께 나설 용기가 없었다. 어떻게 부모님을 이해시킬까. 난 면목도 없고 그녀에게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아니 미안하다는 말도 이제는 염치가 없었다. 어찌하면 좋을까. 답답한 마음이지만 둘은 서로에게 용기를 주겠다는 마음으로 다정히 팔짱을 끼고 하얀 눈밭을 걸었다. 발자국이 나란히 또렷하다. 호숫가 얼음판위 하얀 눈밭에 그녀가 작은 막대로 글씨를 쓴다. ‘사랑해요.♡’라고 하얀 눈밭에 큼지막하게 쓴 글씨가 선명하게 내 가슴에 아로새긴다.

우리는 몇 년 전 가슴 설레며 따뜻한 사랑의 눈길을 의식한 뒤 서로 좋아하게 되었다. 일 년쯤 지났을 때 사랑의 표현을 넌지시 했다. 그리고 또 얼마가 지났을 때 사랑의 고백을 하고 서로를 확인하며 미래를 꿈꾸었다. 남녀의 사랑이라는 것이 무슨 계산이나 목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냥 자연스러운 인연과 좋아하는 감정에서 생겨나는 것 같았다.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하는 나의 부탁에 그녀는 그윽한 눈빛으로 내 손을 꼭 잡고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갔다.

이듬해 나는 다시 내 아둔함 때문인지 노력의 부족인지, 2차 시험에서 또 고배를 마셨다. 아~ 이것이 내 운명이고 나의 한계란 말인가. 이제 더는 기다려 달라는 말을 할 수가 없다. 염치도 체면도 없는 이기적인 일이라 생각하고 쿨하고 자유롭게 보내주는 것이 남자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부끄럽고 죄스럽고 미안하였다. 나를 잊고 떠나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내 젊음은 왜 이리 어둡고 앞이 보이지 않은 걸까요. 이대로는 당신과 세상 앞에 나설 용기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나의 부족함의 소치일진데 달리 변명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들의 인연은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하고 더 이상 기다리지 말고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는 슬픈 이별의 손 편지를 써야 했다.

그 후로 침묵의 세월은 흘렀다. 몇 해 동안 아무런 소식이 없었고 나도 내 무능한 아픔의 슬픈 사연을 잊으려 노력했다. 꽃향기가 바람에 휘날리는 따뜻한 봄날에 나는 결국 꿈을 포기하고 현실 사회로 돌아왔다. 다시 도회의 직장에 다니며 평범한 직장생활로 현실에 적응하며 소시민으로 살고 있다. 이따금 그녀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였지만 알려고도 찾으려고도 하지 못했다. 알려고 하면 도리어 더 서로가 힘들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첫눈 내린 겨울날에는 호숫가 눈밭에 새긴 ‘사랑한다♡’는 글씨가 눈에 선해 온다. 간혹 혼자서 그곳을 찾아 아련한 추억에 젖어본다.

며칠 전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 같은 피곤한 일상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퇴근길이다. 지하철에서 우연히 고향친구를 만났다. 반가움에 회포나 풀자며 포장마차 소줏집에 들러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그 친구가 그녀의 소식을 알고 있었다. 어느 부잣집으로 시집가서 일 년도 살지 못하고 결혼에 실패하여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는 것이다. 그 후로는 소식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정말 안 듣기만 못하였다. 티 없이 맑고 순수했던 그녀의 미소 띤 하얀 얼굴이 자꾸만 떠올라 가슴이 아려온다. 지나간 일이지만 안타깝고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도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사는지 모르지만 그녀가 행복하기를 빌어보며 하얀 눈 내린 호숫가 눈밭에 다시 한번 더 가보고 싶은 마음으로 집을 나선다.



이병훈 수필가 한국문협 문화진흥위원, 한국낭송문학회장, (사)세계문협 정회원.

                 에세이집 『알피니즘을 태운 영혼』 시집 『시를 위한 연가』 작품집 『수필과 음성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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