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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에 수많은 골짜기가 있다. 어느 곳으로 오르든 신라의 흔적과 마주하게 된다. 그중 가장 큰 골짜기는 용장골로 길이가 3km에 달한다. 신라시대 용장사茸長寺라는 절이 있었다 하여 ‘용장골’로 불리며, 아직도 탑이 남아있어 ‘탑상골’로 불리기도 한다.

남산은 해발 500m도 안 되는 산이지만 발길 닿고 눈길 머무는 곳마다 석불이요, 석탑이요, 절터다. 이 골짜기만 해도 용장사 외에 20여 개의 절터가 있다. 불교가 왕성했을 시절엔 목탁 소리와 염불 소리가 끊일 날 없었을 것이다.

일연은 『삼국유사』에 서라벌을 ‘사사성장寺寺星張 탑탑안행 塔塔雁行’이라고 묘사했다. '절과 절은 하늘의 별처럼 펼쳐졌고, 탑들은 기러기 행렬처럼 늘어섰다‘고 했을 만큼 불교가 융성했던 시절이었다.

용장골을 오르는 동안 물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햇살이 비쳐드는 숲과 바위를 밟고 오르는 계곡 길은 고적하다. 곳곳에는 작은 돌탑들이 즐비하다. 기술자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소원을 염원하며 한 탑 한 탑 각각의 모습으로 정성스레 쌓은 투박한 탑들이다. 그래서 더 자연스럽다. 탑상골'이라는 말이 과거를 지나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는 걸 실감한다. 설잠교(2000년대에 설치한 용장계를 가로지르는 다리로 김시습의 법명 ‘설잠'을 따서 붙인 이름)를 지나니 길이 가팔라진다. 지금까지 물소리, 바람 소리 벗하며 한가롭게 자연을 미미했다면 여기서부터는 힘겨운 고행이 시작된다.

그러나 크고 잘생긴 소나무 수십 그루가 손을 잡아줄 것이니 그리 겁낼 일만은 아니다. 곧고 높게 뻗은 소나무는 용이 승천하듯 힘 있게 자랐다. 하늘에 다다른 듯도 하다. 거북의 등껍질처럼 갈라진 껍질의 크기가 어른 손바닥만 하다. 소나무 껍질은 나이테처럼 수령이 오래될수록 두껍다는데, 이 나무의 껍질은 손가락 한 마디를 족히 넘는다. 몇 세상을 건너왔는지 가늠도 어렵다.

빼곡히 숲을 이룬 대나무 군락 사이로 몸을 숙여야만 겨우 지나가 수 있을 만큼 좁은 길이 나 있다.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는 통로처럼 미묘한 느낌이 든다. 대숲이 보이면 유난히 반갑다. 절터나 집터같이 인간이 기대 산 흔적이 가까이 있다는 표시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대숲을 빠져나와 가파른 길을 오르니 그리 넓지 않은 평지가 펼쳐지고 이내 시야가 탁 트인다. 가쁜 숨을 고르며 풍광을 눈에 담는다. 가슴마저 ‘뻥’ 뚫린다. 용장사 터는 금오봉이 남쪽으로 뻗어내린 봉우리에 있다. 한 칸 법당만 겨우 존재했을 만큼 좁은 터지만, 풍광만큼은 고고하고 장엄하다. 욕심을 버리고 이상적인 삶을 좇는 사람이라면 지나치지 못할 풍광이다.

‘갑술삼월일용장사甲戌三月日 茸長寺’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절의 이름이 확인되었다. 용장사는 신라 유가종의 종조 대현스님이 기거했고, 그 후 어느 시절에 무슨 연유로 폐사됐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폐사된 뒤에 매월당 김시습이 이곳에 숨어 살면서 금오신화』를 집필하기도 했다. 조선 초, 단종이 폐위되고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김시습은 대성통곡하며 읽던 책을 모두 불살랐다. 단종의 복위를 꿈꾸던 신하들마저 참형을 당하자 벼슬의 꿈을 끊고 승려가 되었다. 어지러운 속세를 떠나 수년간 전국의 명산대찰을 유유자적하며 떠돌다가 가 용장골에 들어와 은둔했다.

김시습이 용장골에 있는 것을 안 세조가 사람을 보내 데려오게 했으나, 김시습은 건너편 골짜기로 몸을 피했다. 지금은 그 골짜기를 김시습이 자취를 감춘 곳이라 하여 '은적隱迹골'이라 부른다. 세상에 인걸은 많으나 내 사람으로 곁에 두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용장사는 사라지고 거대한 석축과 몇 개의 탑 부재만 남아, 요요하고 적적한 풍경을 자아낸다. 바위 벼랑 아래, 단출한 암자 하나 짓고 밤낮으로 법등 밝히고 살았을 김시습을 생각한다. 바람이 문 두드리면 ‘뉘시오? 그저 시나 한 수 읊고 가시오’ 할 것 같은 키 작은 탁발승.

용장골에서

용장골 깊으니
오는 사람 볼 수 없네

가는 비에 신우대는 여기저기 피어나고
비낀 바람은 들매화를 곱게 흔드네

작은 창가에 사슴 함께 잠들었어라
낡은 의자에 먼지만 재처럼 쌓였는데

깰 줄을 모르는구나 억새 처마 밑에서
들에는 꽃들이 지고 또 피는데,

김시습은 골짜기마다 미친 척 희희낙락하다 결국엔 산기슭 꽃 한 송이, 바람 한 점에도 슬퍼하며 북향화를 심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꺼억꺼억’ 울었을 탁발승은 세월 따라 가고, 그가 홀로 서성였을 벼랑엔 키 작은 소나무 한 그루 서서 그를 대신한다. 그가 가고 흐른 세월을 생각하니 저 멀리 풍요로운 들판도 그새 많이 변했겠다 싶다.

용장사 터를 뒤로하고 조금만 더 오르니 높은 대좌에 머리 없는 부처가 앉았다. 보물 제187호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이다. 자연 바위에 동그란 좌대를 3단으로 쌓아 꼭대기에 앉아 서쪽을 향하고 있다. 부처의 자태가 정갈하다. 가볍게 흘러내린 가사의 주름이 섬세하고, 조여 맨 옷고름의 맵시가 뚜렷하여 바람 불면 금방이라도 훌훌 풀어질 듯하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경덕왕 시절, 용장사 주지 대현이 매일 탑 주변을 돌며 염불을 하자, 석상의 얼굴도 함께 돌았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니 이 머리 없는 석불을 두고 대현을 따라 얼굴을 돌렸다는 미륵불로 보기도 한다.

간혹 석불의 머리가 없는 것을 두고 일제강점기 때, 민족말살정책에 의한 훼손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자연적인 상실과 조선시대에 행해졌던 숭유억불 정책에 의한 훼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용장사 터 석조여래상은 뒷목 쪽에 내려친 흔적이 있다 하니 자연 상실보다는, 어떠한 이유가 됐든 훼손에 가깝다는 견해가 크다.

얼굴이 없으면 어떤가. 얼굴이 있어야만 표정을 읽을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따뜻하고 환하게 웃고 있어도, 속은 어둡고 냉골인 사람이 있다. 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부처의 표정도 있는 것이다. 내가 웃으면 부처도 웃고, 내가 슬프면 부처도 슬프다.

석불 뒤로 병풍을 세운 듯 암벽이 펼쳐져 있다. 보물 제913호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 이다. 약간의 돋을새김으로 있는 둥 마는 둥 앉아있는 여래좌상은 고고한 느낌을 풍긴다. 옷자락에 얇고 잘게 주름이 잡혔다. 가사의 흘러내림이 물결처럼 촘촘하고, 굴곡진 선이 여울지듯 자연스러워 가벼운 느낌이다. 화강암의 무늬와 가사의 촘촘한 결이 어울려 언뜻 호랑이가 연상된다. 크고 긴 귀와 오뚝한 코, 두툼한 입술과 제법 통통하게 살이 오른 두 뺨은 금방 잠에서 깬 사내아이 얼굴같이 해 맑다. 가부좌한 다리 위에 올려진 왼쪽 손바닥은 하늘을 향했고, 오른쪽 손바닥은 다리를 향했다. 여래좌상 앞에 서면 두 손이 딱 부처의 손 위치에 닿는다. 그래서일까. 부처의 양손이 반지르르하다. 나도 모르게 부처의 손 위에 손을 올린다. 햇살의 기운일까. 따뜻하다. 삼단 대좌 위에 높게 앉아있는 석조여래좌상의 머리가 있었다면 아마 마애여래좌상의 표정을 하지 않았을까.

마애여래불 바위에 명문이 새겨져 있다. ‘三層石塔 大正 十一年삼층석탑 대정 11년, 三國佛塔 大正 十二年삼층불탑 대정 12년, 小石毾殘部 大正 十三年春再建소석탑잔부 대정 13년 춘 재건’ 삼층석탑은 대정 11년(1922년), 삼층불탑은 대정 12년(1923년) 도굴로 무너진 상태였지만 부재를 모아 대정 13년(1924년) 봄에 새로 쌓았다는 내용이다. 일제강점기 때, 일제의 우리 문화재 수탈이 심했던 터라 조선총독부의 복원 명문이 썩 달갑지만은 않다.

마애여래불 오른쪽을 돌아 가파른 암벽 사이로 밧줄이 놓였다. 밧줄을 잡고 수직으로 단숨에 뛰어 올라야 한다. 딱히 길이 없으니 죽으나 사나 이 방법밖에 없다. 험하고 아찔한 순간을 경험하자마자 고개를 들면 눈앞에 보물 제186호 ‘용장사곡 삼층석탑’이 나타난다. 아찔한 순간에서 헤어나오지도 못한 채 맞닥뜨리는 신선한 충격이다. 석탑은 용장골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벼랑에 서 있다. 해발 400m의 암반을 기단으로 삼아 쌓아 올린 석탑은, 늠비봉 오층석탑과 함께 산 전체가 탑이고, 탑이 산이 된 셈이다. 몇 번의 도굴로 사리함은 사라졌고, 벼랑 아래 무너져 있던 것을 일제강점기 때 복원해 세웠다.

아무것도 새기지 않은 탑은 건강하고 잘생긴 청년 같다. 삼단의 지붕돌 모서리는 살짝살짝 치솟아 날아갈 듯, 날아갈 듯하다. 비록 사람의 손을 빌려 섰을지언정, 그 모양새나 위치가 자연과 더불어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앞으로는 고위산과 용장골, 은적골의 능선이 힘차게 흘러가고, 서쪽으로는 경주의 너른 들판이 훤히 내다보인다. 탁 트인 시야속에 유유히 흘러가는 형산강과 평화로운 들판이 걸림 없이 한눈에 들어온다. 내다보면 산봉우리나 골짜기나 지척인 것을, 탑은 저 들판이 변하고 변하는 것을 묵묵히 보아왔을 것이다.

다시 용강사 터로 내려와 자리를 튼다. 이 깊은 골짜기에 법등을 밝혔던 용장사는 어디로 가고 까마득한 터만 남아 나를 불렀을까. 이쯤에 법당이 있었을 테고, 부처는 또 이쯤에 놓였을 것이다. 올려다보면 머리 없는 석불이나 석탑이 모두 한 능선 아래로 나란하고, 여기서 기도를 하면 석불도 석탑도 다 들었을 것이다. 용장사는 가고 터만 남았지만, 탑과 부처는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며, 그저 오가는 이들이 무탈하기를 살핀다.

'내가 새라면 훠얼 훨 날아 금오봉, 고위봉 다 둘러보고, 골짜기와 제국 다 훑어본 후 석불좌상 깨진 목에 앉아 얼굴이 되었다가, 마애여래상 손바닥 위 한 송이 꽃이 되었다가, 석탑 끝에 앉아 천년을 우짖다 끝내는 탑이 되고 싶다. 없어진 것은 편안히 가고, 남은 것은 남겨진 대로, 꾸밈없이 남고 싶다.

내려오는 동안 대숲 사이사이에서 많은 기와 조각을 보았다. 실처럼 시작된 계곡을 따라 무수히 많은 기와가 옛 흔적을 따라 아래로 이어졌다. 설잠교를 건너 바위에 앉아 저무는 볕을 쬐었다. ‘콸콸콸’ 흘러가는 용장골 물소리를 따라 매월당의 시가 함께 흘렀다.

용장사 경실에 머물던 감회

용장산 골짜기가 아주 고요해서
사람의 왕래를 볼 수 없구나
가랑비가 시냇가 대나무를 일깨우고
저녁 바람이 들판의 매화를 감싸는구나
집안의 작은 창도 잠에 빠져 있고,
마른 가래나무도 여전히 회색을 띠고 있네
초가 처마 쪽 밭두둑이 알지 못하는 사이
마당 꽃밭에 꽃이 지고 또, 피는구나


적성령

높고 높은 산길은 험하고
찍찍 우는 새들 이곳에 있다
일천 산봉우리 밖에 지는 해 비치고
외기러기 같은 한 조각 마음이로다
걷고 또 걸으니 개울물 가깝고
가도 또 가지 고개 위 구름은 깊어진다
숲 속 계곡이 내 삶의 소원이라
세상살이 인연이야 침범하지 못하리라

글,사진 박시윤 지음, 디앤씨북스 펴냄

 

 

 

⚫ 합천 영암사터 –눈 감고 들었네, 바람이 전하는 말 / 박시윤

경주 감은사 터 –바람은 어디에도 머물지 아니하고 / 박시윤
속초 향성사 터 – 그리하여, 오래오래 눈이 내렸다 / 박시윤
고성 탑동리 절터 –볼 것 하나 없으면 어떠리 / 박시윤
울진 구산리 절터 -바람이 흔들면 못 이긴 척 따라 나섰다 / 박시윤
울산 운흥사 터 –구름에 들었는가, 안개에 휩싸였는가 / 박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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