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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어둠의 행복 / 조병렬

부흐고비 2021. 12. 20. 13:13

나는 평생 책과 함께했다. 40여 년의 교직 생활과 글쓰기로 행복을 쌓으면서 책은 내 삶의 필연적인 동반자가 되었다. 그런 책을 지난해부터 가까이하기가 불편해졌다. 안경을 바꾸어 껴도 별 차이가 없었고, TV 화면의 자막 글씨마저 볼 수 없었다. 안경원에 가서 점검하니 안경 도수 조절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안과 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했다. 왼쪽 눈을 과거에 다친 적이 있는지 확인하면서 그 눈이 유달리 백내장이 매우 심하니 수술이 필요하다고 했다.

수술 날짜를 잡았다. 담당 의사가 걱정스러운 말을 했다. 과거에 왼쪽 눈에 상처를 입은 적이 있느냐고 다시 확인하여 없다고 했는데, 있었을 것이라고 재차 물었다. 아마 자신도 모르게 상처를 입고 저절로 나았을 것 같다고 했다. 내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설명을 하면서 수술을 해 봐야 자세히 알 수 있겠지만, 만약에 눈의 상태가 심하면 수술 도중에라도 119구급차를 불러서 큰 병원으로 가야 할는지 모른다고 했다.

수술대에 누웠다. 난생처음으로 내 몸에 칼을 대는 순간이었다. 온몸이 긴장되어 굳어져 가는 듯했다. 수술 중에는 눈동자를 절대로 움직이면 안 된다고 간호사부터 의사까지 신신당부했다. 눈에만 부분 마취를 한 뒤, 고요 속에서 수술은 시작되었다. 나는 숨도 깊이 쉬지 못하며 민감한 눈동자에만 온 신경이 집중되었다. 잠시 후, 수술의는 걱정스러운 말을 했다. 안구 옆쪽에 과거 상처 때문에 안구를 지탱하는 힘줄의 절반 정도가 떨어져 있다고 했다. 걱정했던 것이 현실로 나타났다. 이럴 경우, 수술하다가도 구급차를 불러 큰 병원으로 이송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숨죽인 채 수술대 천장만 쳐다보는 수밖에 없었다.

의사는 한숨을 쉬면서 힘든 수술이지만, 한번 해보자고 말했다. 고맙기도 하고 걱정도 되었다. 처음 수술을 상담하던 간호실장은 10분 남짓이면 되는 수술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보통 경우의 수술이라면 끝나야 할 시간이 지나면서, 갑자기 의사는 간호실장을 불렀다.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으니 다른 외래환자들에게 양해를 구하라고 했다. 그 후 또 시간이 상당히 지나서 의사는 다시 간호실장을 불러 수술이 더 늦어질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걱정과 긴장 속에서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런 순간에도 수술의는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나를 위로해 주었다. 고마움이 울컥했지만, 걱정이 더욱 커져만 간다.

거의 한 시간 정도 만에 수술을 끝냈다. 의사는 나에게 위안의 말을 건네며, 이런 수술은 10여 년 전에 해보고 이 병원에서는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힘든 수술이었지만, 후배의 부탁도 있고 해서 스스로 끝까지 최선을 다했다고 덧붙였다. 나는 고맙고 미안했다. 다른 분들의 백내장 수술 시간보다 서너 배 시간을 할애하면서 애써 주지 않았던가. 수술 후에도 상당히 오랫동안 자주 병원에 가서 경과를 지켜보며 치료했다. 다행히 수술 결과가 좋았다. 그 후, 오른쪽 눈은 아직 초기라서 할 때가 덜 되었다는 의사의 소견을 들었지만, 수술한 눈이 안정적으로 회복하자마자 오른쪽 눈마저 수술하기로 작정했다. 한 해라도 빨리하는 것이 회복에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했다. 다행히 왼쪽 눈 수술 때와는 달리 짧은 시간에 끝냈고 경과도 좋았다.

두 눈을 수술하고 나니 온 세상이 달라 보였다. 요즘은 청소기를 수시로 들고 설친다. 바닥에 흩어진 작은 티끌 하나라도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집 군데군데 물수건으로 닦을 곳이 많아졌다. 그뿐인가, 세수하고 거울 앞에 보이는 내 모습이 어느새 이렇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아내의 한마디 말이 잊히지 않는다. 당신은 눈 수술하기 전이 좋았고 행복했겠다고. 집에 티끌 먼지가 좀 있어도 보이지 않았으니 좋았겠고, 당신이나 마누라 얼굴에 주름이나 검은 점이 있어도 덜 보여서 예뻐 보이지 않았겠느냐고.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눈이 좋은 편이어서 평생 안경을 쓰지 않고 책과 함께 교직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지난해 연말 즈음에 문학 단체에서 발간하는 종합잡지에 수필 월평 원고청탁을 받고, 그전에도 두 차례에 걸쳐 2년 동안 쓴 경험이 있기 때문에 수용했다. 그렇게 약속을 하였으나 갑자기 수술해야 할 상황이 되었고, ‘이젠 나이도 있으니 되도록 눈을 너무 무리하게 사용하지 말라’는 안과 의사의 조언을 듣고서 나는 체면 불고하고 중대한 약속을 파기해야 했다.

이런 과정에서 작은 깨우침 한 조각을 또 얻게 되었다. 눈이든 귀든 나이가 들면서 퇴화하는 게 당연하고, 그것이 어쩌면 다행일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내 인생도 스산한 바람이 불어오는 계절의 문턱에서, 어둠 속에서 보기 싫은 꼴 덜 보면 더 행복할 것이고, 듣기 싫은 소리 덜 들으면 오히려 다행한 일이 아닐까 싶다. 또한, 코도 입도 세월이 갈수록 무디어지면 어떨까. 좀 역겨운 냄새가 나도 알지 못하고, 가급적 말수도 줄이고, 입맛에 덜 맞는 음식도 그냥 맛있게 배불리 먹으면 좋을 듯하다. 그러면 인간관계도 무난해지고, 나 자신도 행복한 삶이 되지 않겠는가.

그뿐인가, 요즘 대선을 몇 달 앞두고 탈도 많고 말도 많은 것들도 덜 보고 덜 듣는 그런 세상에서 살고 싶을 때가 적지 않다. 서로 비판하고 욕하길 좋아하는 인간 세상이다. 자기 잘못은 관대하게 용서하면서 남 잘못은 한 치도 용납할 줄 모르는 세태, 함부로 남들 욕하고 비난하는 말도 알아듣지 못하는 바보처럼 살면 어떨까. 될 수 있으면 눈 감고 귀 닫고 입 다물고 조용히 살아가는 늙은이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한데….

오늘도 스산한 바람은 불고 흐린 날이지만, 먹구름 저 위에는 파란 하늘과 밝은 빛이 펼쳐져 있을까?



조병렬 수필가

대구문인협회 수석부회장. 대구수필문예대학, 중앙도서관 수필창작 강사.

                 2021년 대구예술상, 제17회 신곡문학상, 제1회 대구시민문예대전 최우수상,

제1회 사학연금수기공모 최우수상. 수필집 『왕대밭에 왕대 나고』, 『그래도 이 세상이 낫다』,

평론집 『현ㄷ대수필 창작이론과 평설』,

               영남일보 『고교논술독서특강』(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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