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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봄비 / 정영태

부흐고비 2021. 12. 20. 09:13

겨울도, 봄도 아닌 2월. 진눈깨비가 사락사락 소리를 내며 흩날리는가 싶더니 비로 바뀐다. 비가 그치면 따스한 봄이 온다는 기대감에 마음이 들뜬다. 바람과는 달리 기상청 예보는 강추위가 몰아친다고 한다. 추워 봐야 하루 이틀이면 되겠지 생각하는데 산 너머에서는 따사로운 햇살이 동그마니 피어오른다.

나만 그렇지는 않으리라, 1월을 보내고 2월 달력을 넘기면서 이제 봄이 왔구나 하는 마음으로 기대에 부풀었을 것이다. 실제로 몸에 와 닿는 체감은 여전히 엄동설한이다. 영하의 날씨에 얼굴에 부딪히는 찬바람은 볼살을 따갑게 하고 손은 주머니 속으로 자꾸만 파고든다. 달력 한 장 넘겼다고 봄이 왔다며 두꺼운 외투를 벗었다가는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여남은 살 때이었다. 그땐 어찌 그리도 추었든지, 눈이 오기 시작하면 무릎까지 쌓여 한동안은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길만 터놓았다. 겨울이 오고 얼음이 얼면 어린 아이는 개울에서, 나이가 조금 있는 형들은 저수지에서 썰매를 탔다. 5학년쯤 되었을 무렵이었다. 어느 날에 사는 형편이 좋은 집 아이가 날이 잔뜩 선 스케이트를 들고 썰매를 타러 왔다. 나는 스케이트는 꿈도 못 꾸고 아버지가 만들어준 나무에 철삿줄을 박은 앉은뱅이 썰매를 탔다. 며칠 지나 한 명이 또 스케이트를 샀다. 나도 엄마에게 스케이트 싸 달라고 졸랐다. 엄마는 지금은 어려서 위험하니 내년에 싸 주겠다고 약속했다.

산에는 진달래가 피고 연초록이 숲을 이루는 봄이 왔다. 나는 봄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겨울이 오기를 기다렸다. 얼음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생각을 하니 마냥 즐거웠다. 지루한 장마와 무덥던 여름이 지나고 고추잠자리가 하늘로 차오르는 가을이 되었다. 누렇게 익은 벼는 모두 베고 황량한 벌판이 되어갈 무렵 드디어 날이 차가워지고 얼음이 얼었다. 나는 엄마에게 스케이트 이야기를 꺼냈다. 엄마는 지난겨울에 한 약속은 잊었는지 내년에 중학교에 가려면 열심히 공부해야지 하며 다른 말을 했다. 스케이트를 타고 싶은 욕심에 며칠은 방안에서 공부하는 척하며 밖을 나오지 않았다. 다시 엄마에게 공부 열심히 할 테니 스케이트 싸 달라며 졸랐더니 내일 가잔다. 그날 밤 기분이 좋아 잠이 오지 않았다. 겨우 잠들어 깨어보니 밤새 눈이 얼마나 내렸는지 발이 푹푹 빠질 정도였다. 엄마와 아버지는 마당에서부터 동구 밖까지 마을 사람들과 눈 치우기에 바빴다. 그날은 스케이트 싸달라는 말은 꺼내지도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 앓듯 나 홀로 전전긍긍했다.

근래 들어 지난겨울이 가장 추웠다. 추위가 절정일 때는 영하 15도까지 내려갔다. 그래도 예전과 비교해 보면 추운 것도 아니었다. 지금이야 겨울이면 가벼우면서도 따뜻한 기능성 옷이 많지만 그때는 추위가 몰아쳐도 변변한 방한복 한 벌 없이 차디찬 겨울을 지냈다. 추위를 견디기 위해 불을 놓다가 산불로 번지기도 했고, 소여물 끓인 부엌 앞에서 불장난하다 초가집을 태우기도 했다. 추우나 더우나 열심히 노력한 끝에 언제부터 우리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성실하게 일한 덕분이었다. 그땐 불평불만이 특별히 없었다. 오로지 배불리 먹고 자식 공부시키는 것이 최대 행복이었다.

봄을 재촉하는 비가 차분히 내리던 날, 나는 아스라이 멀어져간 지나가 버린 시간을 돌이켜 본다. 그렇게 타고 싶었던 스케이트는 결국 못 샀다. 눈이 녹자 이내 입춘이 코앞으로 다가왔고 얼었던 땅을 녹이는 얄미운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어머니는 소한, 대한 다 지나고 봄비까지 오는데 이제 얼음이 녹는다면서 잘 못 하다가는 못에 빠져 죽는다고 다시 내년으로 미루었다. 중학생이 되자 개울이나 저수지로 썰매 타러 가는 날이 점점 줄어들었다. 새로운 친구를 만나고 스케이트 타는 것보다 더 재미있는 놀이가 있었다. 그것은 초등학교 다닐 때 알지 못했던 우리 역사 이야기라든지, 과학 탐구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는 것이 더 좋았다.

절기는 무시할 것이 못 되나 보다. 입춘이 지나자 곧바로 봄기운이 감돈다. 바람은 여전히 차갑지만 햇살은 훈훈하다. 하늘에서 하얀 눈 대신 봄비가 촉촉이 내린다. 성급한 매화는 꽃봉오리를 터뜨렸다. 이대로 한숨 자고 나면 봄꽃은 물밀 듯이 피어나 있으리라.



정영태 수필가

계간 <문장> 등단. 문장작가회, 대구수필가협회, 대구문인협회, 한국수필 회원,

                 제1회 삼국유사스토리텔링공모전, 제2회 경상북도이야기보따리수기공모전,

제50회 한민족통일문화제전 수필부문,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6,8,9회) 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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