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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정적靜寂의 신품神品 / 이철호

부흐고비 2021. 12. 20. 09:10

고려청자는 유화, 진실, 신앙을 나타내는 심원한 철학적 고찰을 의미 하는 청색을 바탕으로 한다.

산에 우거진 나무의 푸른빛인 듯, 연잎의 푸른빛인 듯, 또는 얼음의 푸른빛인 듯하면서도 단순한 푸른빛이 아닌 청자靑磁. 푸른 듯하면서도 맑고 투명하고 아름다운 빛깔을 지닌 신비의 비색秘色,

그 우아하고 부드러운 자태와 갖가지 독특하고 다양한 기형器形과 문양, 그러면서도 빛깔이나 무늬, 형태가 너무나 아름답고 귀족스러워 좀처럼 접근하기 어려운 위엄과 냉엄함마저 풍기는 예술품, 그 정적 속에 은은히 풍겨 나오는 불교의 종교적 성스러움과 신품神品.

이것이 바로 중국과 우리나라 등지에서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고귀한 예술품 청자의 모습이다.

특히 고려청자의 빛깔은 더욱 신비롭고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고려청자의 기형器形이나 문양 등은 독특하고 독창적이며 아름답고, 아주 정교하면서도 절묘한 솜씨로 빚어진 훌륭한 예술품이다.

청자의 기원은 확실하게 문헌에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대략 서방의 문물이 중국으로 흘러 들어왔고, 우리 것은 중국에서 다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의 청자는 중국으로부터 그 기법技法 등은 도입하였으되 단순한 모방에 그친 것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 중국 청자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이나 창조성 없는 모방에 그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우리 청자의 독특한 기형器形이나 상감象嵌의 수법手法은 그들에게 없었던 것이고, 빛깔이나 장식 문양 등도 그들과 다르다는 것을 잘 증명해 주고 있다.

중국의 청자를 모방했다가 이를 탈피한 것은 대체로 고려 문종文宗 때라고 한다. 《조선도자감상朝鮮陶磁鑑賞》이란 책을 보면, ‘고려 도자 창시의 연대에 대하여는 하등 기록으로써 취할 바 없으나 그 시대의 상태, 또 송宋과의 관계에 비추어 보아 고려청자란 것은 문종대文宗代에 생긴 것이 아닐까.’ 라고 쓰여 있다.

《조선도자감상》에서 일본인 내산성삼內山省三은 ‘동양 정신의 극치는 정적靜寂이요, 정적의 극치가 무無라 할진대 무의 세계의 소산인 고려청자야말로 동양 정신의 극치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리라.’고 했다. 얼마나 고려청자를 잘 봤으면 ‘동양 정신의 극치’라고까지 했을까?

또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도 고려청자에 대한 칭찬과 감탄이 그득 실려 있다. 우리에게 청자를 전해 준 중국 사람이 고려청자를 보고 그 솜씨와 빛깔, 모양 등에 대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과 감탄을 아끼지 않고 있는 것이다.

기실 고려 청자를 만들던 고려인의 사상, 감정은 무상無常과 허무의 느낌이었을 것이다. 유구한 대자연의 마음을 생각할 때 그것은 영원한 정적일 수도 있었다. 현세를 믿지 않고 유구한 정적을 동경했던 고려인의 청자는 ‘푸른 꽃’으로 피어났던 것인지도 모른다.

청자를 노래한 문학적, 낭만적 정서는 그 표현이고 풍화 설월風化雪月을 애달프게 만들고 이에 도취하려 한다. 이같이 자연으로 돌아가 유명幽冥에 놀고 정숙의 세계에 이르고 취몽醉夢 속에서 세상의 어지럽고 고통스러운 것들을 잊으려는 마음은 확실히 ‘파란 마음’이다.

이러한 청색은 제일 차가운 색이며, 허색虛色의 상相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이것은 마음의 평화를 나타내고, 이 평화는 생명이 있는 유기체의 평화로서 무생적無生的 평화의 백선과는 차이가 난다.

유화, 진실, 신앙을 나타내는 심원한 철학적 고찰을 의미하는 청색을 바탕으로 한 고려청자는 한 줄기의 어두움을 품고 있기도 하다. 이른 겨울, 가랑비 그치고 난 뒤 하늘의 파란색에나 비할까.

고려청자는 보는 이로 하여금 침잠한 다정으로 이끌고 간다. 오감五感으로만이 감상할 수 있는 고려청자는 일국의 역사를 대변하며, 정신을 대변하고 습성을 대변하고도 남음이 있다.

아무런 무늬가 없던 청자가 상감象嵌 청자로 바뀜에는 양의 변화가 질의 변화를 가지고 오게 한 근본이 되기도 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화금畵金 청자에 이르면 말할 나위도 없다.

화금 청자란 상감 청자에다 순금으로 표면 그림에 장식한 것을 말 하는데, 고려청자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청자가 가장 활발하게 구워지던 시기는 고려 충렬왕과 의종毅宗의 두 임금 때로 보는 데, 이 두 임금이 모두 호탕하게 놀기를 좋아했다는 사실은 묘한 느낌을 갖게 해준다.

청자투각칠보 향로靑瓷透刻七寶 香爐를 보면 이것은 사람의 솜씨가 아니라 신의 작품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향로의 세 개 받침목은 도끼가 앉아 목으로 받치고 있는 위에 연꽃으로 향로를 만들고, 향로 뚜껑은 둥근 원을 조리 있게 끝머리만 포개어 무늬를 만든 공예 공간을 많이 내어 향의 연기나 향내가 밖으로 새 나가도록 했으니, 어느 위대한 조각가라고 한들 이렇게까지 착상하고 구상해서 만들 수 있을까.

이러한 신품神品에다 향을 피워 놓고 청자조각어용형 주자靑瓷彫刻魚龍形 注子에다 감주甘酒을 담아 잔을 돌리던 이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주자注子의 목은 용머리로 장식했고, 주전자 뚜껑은 붕어 꼬리로 했으며, 손잡이는 모양 있게 꼬아서 붙였다. 주전자도 고기비늘과 용의 지느러미로 장식하였으니, 이것이 신품이지 어찌 사람의 손으로 빚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시서화詩書畵가 일치된 미술 공예품으로서 고려청자가 앞지를 것은 없다. 미술 공예품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문학관이 공예품에 담겨 있지 않다면, 이것은 가치가 반 이상 절감되는 것이다. 문학적 정취를 느낄 수 없는 공예품은, 인간에 비한다면 생명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이라 하겠다.

고려청자에 얽힌 이야기로, 중국 원나라 세조에 화금 청자를 헌공 할 때 세조가 물었다.

“화금金한 것은 그릇을 견고하게 함이냐?”

그러자 화금 청자를 가지고 사신으로 갔던 조인규趙仁規가 답했다. “자기는 깨어지기 쉬운 물건인지라 귀하게 다루기를 금처럼 해야 한다는 뜻으로 하였으며, 깨어진 자기에 채색되었던 금은 쓸 수가 없게 되므로 사람들이 귀하게 여길 것이옵니다.”

이처럼 중국의 황제들도 갖기를 좋아했던 물건이 지금은 구워낼 수가 없게 되었으니 얼마나 애통한 일인가.

싸늘하면서도 시원한 파란 빛깔의 자기가 집 안의 분위기를 좌우 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게 없다. 자기의 주제를 우선 음각하고 파진 곳에 백토, 흑토를 감입嵌入하여 문양을 나타내고 여기에 순금으로 채색하는 것이 나전칠기의 세공을 응용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러한 시공법은 중국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고려의 독특한 수법이라 하니 얼마나 자랑스러운 것이냐.

상감에 있어서야 흑백 두 가지 색으로만 문양되어 꽃이면 꽃, 구름이면 구름이 한 가지 색으로 메우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만, 화금으로 가면 여기에 금빛이 더 보태어지니까 그 찬란함이란 어찌 글로 다 나타낼 수 있겠는가!

주제만 해도 그렇다. 주제, 그 자체를 흑백으로 나타내는 것과 주제는 생지生地 그대로 두고, 그 배경이 되어 있는 면을 구분해서 이것을 색으로 나타내는 방법이 있다.

앞에서 말한 것은 가장 일반적인 수법으로 질적인 면에서는 뒤처지고 뒤에서 말한 것은 특이하고, 귀하며 질적으로 우수한 것이다. 그러나 어느 것이나 주제는 수세공手細工으로 현대에서는 찾아볼 수없는 진품들이다.

그림 하나하나의 의미가 담겨 있고 글자 하나하나의 내용이 실려 있는 고려청자를 노래할 수 있는 시인이 있다면 무엇이라 읊을지 궁금해진다. 한 구절 시문으로 나타내기가 어렵다면 불가佛家의 선승禪僧은 혹 알 수 있을까.

‘차의 미는 색, 향, 미味에 있고, 이것을 살리는 것은 도자이다.’라는 옛말이 있다.

다도茶道는 선禪에 의하여 생각해지고, 선은 다도에 의하여 볼 수 있으니, 다도는 선과 통하는 데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선의 경지인 오감五感의 세계를 초월하는 경우에는 고려청자를 감상할 수 있으니, 푸른 빛깔의 이 진품은 선의 경지까지 거슬러 올라간 것이 아닐까?

선의 경지에 올라선 고려청자를 보면서 인간의 무궁한 세계를 그려보는 그 시간은 더없이 값지고 소중한 것이다.



이철호 수필가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 국제펜한국본부 부이사장 역임. 한국소설가협회 최고위원, 사단법인 새한국문학회 이사장, 종합문예지 《한국문인》 발행인, 김소월문학기념사업회 이사장. 국민훈장목련장 및 동백장, 조연현문학상, 한국문학상, 노산문학상, 후광문학상 수상.

시집 『앉아서도 꿈꾸는 숲』 『홀로 견디기』 외, 수필집 『무상연가』 『당신 품에 얼굴을 묻고 싶을 때』, 외, 『수필평론의 이론과 실기』 외, 소설 『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이제마 1.2.3』, 다큐멘터리 『허준&동의보감 1·2·3』 외 70여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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