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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이 명백했던 밤이다. 부푼 달이 밤새 허공을 휘저었다. 잠을뒤척이다 홀린 듯 부산으로 향했다. 부산의 길은 어지러워서 매번 처음인 듯 낯설었다. 내비게이션이 아무리 최첨단의 정확한 신문물이라 해도, 뒤죽박죽인 거리에서 전후좌우 혼란해지는 판단까지 막을 수는 없없다. 무조건 용기 있게 ‘고go’를 외치던 자만마저 숙지게 했다. 순간의 판단은 수많은 오류와 섞이기 마련이어서, 매번 목적지를 지나치거나 되돌아 나오기를 반복했다. 그곳이 산간이든 오지든, 도심 한복판이든 아무리 반복해도 자라지 않는 길눈은, 생의 바깥에서 건너온 매우 낯선 어제이거나 그제 같다.

동래에서 구포로 넘어가는 고개를 넘다 잠시 멈췄다. 산 아래 펼쳐진 부산의 새벽은 깊다. 이 고개를 부산 사람들은 ‘만덕재’ 또는 ‘만등재’라 부른다. 동래 장과 구포 장을 오가던 장꾼들의 지름길이기도 했거니와, 금정산과 백양산을 거느린 덕에 산세가 깊어 임진왜란 때는 지역민들이 몸을 피했던 곳이기도 했다. 만 가지 덕을 품은 절 ‘만덕사萬德寺’가 있었다 하여 ‘만덕재’라 불렀다는 설과, 장꾼을 노리는 도적이 들끓어 많은 사람이 무리 지어 고개를 넘었다고 해서 ‘만등재’라 불렀다는 설이 전해진다.

만덕고개 구불구불한 산길에 가을이 농익고 있는지 낙엽 냄새가 제법이다. 숨을 들이쉬니 달빛을 한껏 머금은 고요가 폐 깊숙이 밀려든다. 낯선 여정으로 불안했던 마음이 비로소 안정된다. 숲속엔 아직 저물지 않은 한가위 달빛이 살아서, 몰래 감추어진 것들의 이름을 부른다. 나무들과 풀들은 적막 한가운데 서 있고, 목청 곱던 새들은 숲 어딘가에서 소리를 접었다. 그들은 자연에 미개한 내게 쉽게 밤을 발설하지 않았다. 어쩌면 밤을 보았다고 말하는 나를 믿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달빛이 온전히 나를 비춘다. 발바닥이 환해지고, 은둔하던 발가락들이 일제히 일어나 더듬거린다. 이 고즈넉한 밤을 두고 급히 내려가야 할 까닭조차 하얗게 잊어버린다. 깊은 밤이든, 이른 새벽이든 술은 태초의 모습으로 젖은 손을 내밀어 살아 있음을 내보인다.

숲에 몸을 들인다. 달빛은 내 영혼을 모조리 뽑아 바닥에 누인다. 그림자는 숲의 기운을 온몸으로 빨아들인다. 몸뚱어리를 빠져나간 그림자는 주변의 것들과 섞여 자연에 충실해진다. 그림자를 잃어버린 몸뚱어리는 감추고 있던 어떤 서글픔을 뱉어 혼자 물컹해지는 연습을 한다. 그리고는 나무를 가슴에 심었다가 풀을 심었다가, 때로는 집채만한 바위 하나 쿵 박아놓기도 한다.

도시의 아름다움 따위에 관심 둘 여지도 없이 밤이 허무하게 저물었다. 허무를 지우기 위해 새벽은 말없이 찾아와 숲에 들었다. 맞닥뜨린 고요에 홀로 즐기는 사색은, 더 넓고 깊어져 즐길 만하다.

날이 희붐하게 새고 있다. 어둠과 옅은 안개가 소멸을 준비한다. 묽은 어둠 속에서 자연은 조금씩 선명해진다. 밤 동안의 가뭇한 업을 거둬들이기라도 하듯 천혜의 빛이 고개를 훑는다.

천천히 고개를 내려간다. ‘구만덕로’를 따라 내려오니 오래된 육교가 나타난다. 내비게이션의 안내에 따라 육교를 지나자마자 차를 세운다. 주변을 훑으니 작은 암자들이 더러 눈에 띈다. 만덕동 절터를 찾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다. 난감하다. 어느 암자 앞을 서성이다 텃밭을 살피는 스님과 눈이 마주쳤다. 만덕동 절터를 물으니 100여 m 떨어진 곳이라며 자세히 일러준다.

차를 암자 마당에 세워두고 만덕대로로 나오니 그제야 ‘만덕사지’를 알리는 표지판이 눈에 띈다. 코앞에 두고도 헤매는 이 무지한 길눈을 어디다 써먹을까. 자책하며 가파른 길로 오른다. 50여 m 즈음 앞에 돌계단과 만덕사 터를 알리는 표지판이 보인다. 만덕사 터는 가까운 곳에 있었다.

오르막길 입구에서 개 한 마리가 사납게 짖어댄다. 벌렁거리는 입술 사이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허옇게 드러난다. 개 짖는 소리와 날뛰는 쇠사슬 소리가 한데 섞여 극한 공포감을 더한다. 금방이라도 쇠사슬을 끊고 달려들 기세다. 개의 기세에 눌려 멀찍이서 누군가가 나와 주기를 기다린다. 때마침 길을 오르는 노인이 있어 뒤를 따른다. 개는 나와 노인을 번갈아 살피며 짖을지 말지 고민하는 듯하다가 입술을 몇 번 씰룩이더니 이내 바닥에 엎드린다.

만덕동 절터는 금정산 줄기의 하나인 상학산 가파른 기슭에 자리 잡았다. 옛날에 기비골로 불리던 골짜기다. 석축 아래 ‘만덕사지’라는 표지석과, 만덕사 터가 문화재로 자리매김하기까지 적잖이 공을 세운 이들의 기념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절터로 오르는 계단 양옆으로 쌓아 올린 석축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크고 작은 바위들을 끼워 허튼 쌍기 한 옹벽은, 거대하고 웅장하여 위압감마저 든다.

그러나 좁고 가파른 길 끝에서 만나는 만덕사 입구는 다소 혼란스럽다. 콘크리트로 두서없이 포장한 뒤, 끌개로 마구 골을 낸 억센 길도 그랬거니와 이미 새로운 절이 들어선 것도 그랬다. 빈 절터에서 오는 막연한 쓸쓸함과 적막함은 어디에도 없었다. 경계 없이 펼쳐지는 집요한 감각들이 방향을 잃고 비틀어지기 시작했다. 누가 쓴 것인지도 모를 주련과 거대한 태극기, 절제되지 않은 현수막의 설명은 두서가 없어 ‘그냥 돌아설까’ 하는 마음마저 들게 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천천히 돌계단을 밟는다. 알루미늄 가건물로 성글고 위태롭게 얹은 절집은, 겨우 부처만 모신 듯 열악해 보였다. 사유지가 된 절터 곳곳에 불상과 석재가 즐비했다. 옛것과 지금의 것이 섞여 서로 어색했다. 간간이 옛 유물들이 보이긴 하나 시대와 출처를 알 수 없고, 옛것에 지금의 것이 올라 앉아 어색함을 자아냈다.

금당이 있었다던 곳에 새로 세운 작은 석탑 2기와 서구식의 그네 의자가 놓였고, 법당 터로 추정되는 곳에 개개인의 불사로 세운 부처가 줄지어 섰다. 발굴 당시 출토된 기와는 차곡차곡 탑처럼 쌓아 하나의 조형물처럼 세워 놓았다. 연화대석으로 보이는 커다란 바위에 새로 세운 불상이 섰고, 곳곳에 놓인 파라솔과 플라스틱 의자, 생활 도구들이 난잡하게 널브러져 상당한 이질감이 일었다. 어떤 말로 어떤 감정으로 표현해야 좋을까.

만덕사는 고려의 큰 사찰로 알려졌다. 1356년 공민왕 시절, 고려의 왕자 석기가 출가한 절이기도 했다. 『고려사高麗史』 ‘종실열전’과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는 충혜왕의 서자 석기의 머리카락을 잘라 만덕사 에 가두었다고 기록돼 있다.

석기는 고려 28대 왕인 충혜왕의 아들이었다. 왕의 아들이었다고는 하나 왕좌와는 거리가 멀었다. 어머니는 사기 장수의 딸이었다. 지체가 총명하고 미모가 출중해 충혜왕의 간택을 받고 ‘은천옹주’라는 명칭을 받게 되지만, 사기 장수의 딸을 빗대 ‘사기옹주’라 불리기도 했다. 비천한 신분의 어머니로 인해 석기는 왕이 되지 못했다. 아버지 충혜왕이 왕위에서 물러나자 이복형 충목왕이 왕위에 올랐으나 일찍 승하했다, 그 후 12세의 충정왕이 즉위하였으나 폭정을 일삼은 죄로 원나라에 의해 폐위되었다. 이후 숙부인 강릉대군 왕기가 공민왕으로 즉위했다. 공민왕은 충정왕을 유배 보낸 뒤 독살했다. 이때 충혜왕의 서자였던 석기 역시 강제로 머리카락이 깎여 개경에서 까마득히 먼 부산 만덕사로 유배되었다. 어떻게 보면 숙부에게서 멀어져 유유자적하며 세월을 살 기회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석기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반란이 일었다. 이를 안 공민왕은 만덕사에 유폐됐던 석기를 개경으로 불러올려 다시 제주도로 유배 보내는 길에 살해하려 했다. 공민왕은 석기를 추대하려 했던 사건에 연루되었던 찬성사 강윤충을 불렀다. 목숨을 살려주는 대신 부산 동래 현령으로 가서 석기가 유폐되었던 만덕사의 흔적을 없애라는 밀명을 내렸다. 어명에 따라 부산에 내려온 강윤중은 만덕사를 무참히 폐사시켰다. 이곳에 남아 있는 지주나 석조 유물들이 하나같이 깨져 있는 것도 어쩌면 강윤충에 의한 정치적 훼손이 아니었 을까.

이후 제주도로 유배된 석기는 수정사라는 절에 숨어 살다 섬을 탈출했다. 이곳저곳 방랑생활을 하던 중, 강원도 이천군(현재 북한땅) 안협의 백성 백언린의 집에 숨어 살다 민가의 여인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다. 19년 동안 쫓기는 생활을 하던 석기는 처형되고, 그의 아들도 살해당했다고 전한다.

절터를 거닐며, 고려 말 왕자 석기가 이곳에 머무르며 지켜봤을 석물을 바라본다. 제 마음 하나 편히 누이지 못한 어떤 지극함이, 이 차다 찬 석물 위에 남아 있는 듯하다. 숙부의 마음에 가닿지 못하는 진실된 마음이 이 석물 위에서 버둥댔을 것이다. 증식하는 미움보다 뾰족한 생 을 숙명처럼 받아들이기 위해 마음을 비우고 비웠을 것이다. 그의 발자국은 오래전 사라졌을 테지만, 설핏설핏 그가 남긴 손길이 눈에 띈다.

만덕사의 정확한 창건 시기나 폐사 시기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이 절터가 왕자 석기가 머물렀다던 만덕사 터가 맞는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불교사전에 ‘만덕사는 경상남도 동래군 우이면 만덕리에 있는 절’이라 하였는데 이것의 근거 또한 명확하지 않다. 기록이나 유물 어느 것 하나 정확한 것이 없으니 이곳을 ‘만덕사 터’로 부르는 건 무리가 따른다. 다만 절터에서 ‘기비사祇毗寺’라는 명문 기와가 여러 개 나왔으므로 ‘기비사’ 또는 ‘만덕동 절터’로 불려야 한다. 일부에서는 기비사를 ‘가사 입은 왕자 비구의 절’이라는 의미로 해석하며 애써 석기 왕자와 연관 짓기도 한다.

이른 아침, 경내를 밟는데 어떤 시선이 뒤따른다. 마스크를 낀 남자와 나 사이의 거리는 불과 10여 m, 남자는 경내 이곳저곳을 살피면서도 집착처럼 나를 살핀다.

“안녕하세요.”

먼저 인사를 건네니 내가 궁금했던지 이것저것 물어 온다. 애써 할 이유가 없어 필요한 것만 답한다. 민망했던지 내가 굳이 묻지 않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 놓는다. 현재의 절터 말고, 그 위 밭이나 산기슭까지 만덕동 일대가 전부 옛날 절터였다는 것과, 경내 어딘가에 연못이 있는데 물고기가 산다는 것이다. 지금은 절이 아니지만 만덕대로 육교를 건너가면 당간지주가 있다는 것 등 귀에 담을 만한 이야기였다.

흥이 오른 그는 종일 무슨 말이든 끊임없이 해줄 것 같다. 그는 조금 빈틈이 보이긴 하나, 순수하고 사심 없는 깨끗한 마음의 만덕동 사람이다. 뒤란으로 접어든 내가 보이지 않으면 꼼짝 않고 기다리다, 내가 모습을 드러내면 그제야 분주히 오가며 하던 일을 한다. 내가 발길을 돌려 나가려 하자, 아쉬운 듯 다급히 불러 울타리 속으로 안내한다.

“여기가 옛날 우물터예요. 상수도가 들어오기 전엔 이 물을 가지고 밥을 지었어요.”

제법 큰 우물이다. 전혀 관리되지 않은 탓에 낙엽과 불순물이 섞여 탁하다. 탁한 물속에 유유히 몸을 놀리는 비단잉어가 보인다. 진흙탕에서 연꽃이 피고, 더러운 우물에 물고기가 산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씀이 떠오른다.

지난한 시간이 읽힌다. 온전히 절터로만 존재할 수 없는 현실과, 누구에겐 또 다른 삶의 터전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을 왜 이해하려 들지 않았을까. 현재의 시간을 송두리째 환수하여 그저 휑한 공터로만 남아 있기를 바랐던 것은 내 어리석은 욕심이다.

인사를 건네고 그가 일러준 당간지주를 보러 간다. 가파른 내리막을 내려오다 걸음을 멈춘다. 개가 엎드린 채 힐끔 쳐다본다. 짖을까 말까 고민하던 개는 별 볼 일 없다는 듯 눈을 감는다. 그새 익숙해졌나 보다. 내심 섭섭한 마음이 든다.

육교를 건너 언덕 아래로 조금 내려가니 당간지주가 보인다. 절터와 당간지주까지 200여 m 정도 됨직하다. 주변은 온통 고철과 재활용품이 쌓여 번잡스럽다. 번화한 삶의, 보이고 싶지 않은 뒷모습 같아 민망하다.

당간지주는 기와 담장 안에 있었다. 당집 한 채와 신목으로 보이는 오래된 나무 한 그루가 겨우 풍경을 만든다. 지주는 원래 하나만 남았으나 하나를 복원해 쌍을 이루게 했다. 누런 석태가 덕지덕지 낀 원래의 것에서 세월이 엿보인다. 제아무리 복원술이 뛰어나다 해도 세월까지 만들어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만덕동 절터 석탑과 출토된 유물이 보관된 부산박물관으로 향했다. 석탑은 박물관 입구 정원에서 나를 맞았다. 새하얗게 빛나는 모습은 꽤나 매혹적이다. 머릿돌은 없으나 제법 완전한 모습으로 고전적 우아함을 풍긴다. 10월의 가을 햇빛과, 높고 푸른 하늘과, 맑은 바람과 퍽 잘 어울리는, 귀한 태가 흐르는 탑이다.

탑을 마주하니 강제로 머리카락이 잘리고, 타의적 출가로 유폐된 비운의 석기 왕자를 떠올렸던 내 상상은 오산이었다. 머릿돌 없는 탑꼭대기에 이따금 새들이 날아와 조잘대다 가곤 했다. 뾰족한 생을 버리고 유유자적하던 석기 왕자의 젊음을 간직한 것처럼, 탑은 무척 훤칠하다. 이제 그는 지상에 없지만 탑이 분신처럼 남아 그를 대신한다.

잘 정리된 잔디 위에 미끈하게 서 있는 탑을 한참 바라본다. 나는 오래도록 탑을 서성인다. 집요한 내 시선과 햇살이 포개져, 어른거리는 이면의 어떤 무늬들을 만들어 낸다. 해는 등 뒤에 있다. 한껏 부풀어 오른 고요가 그즈넉이 피어, 해가 기울 때마다 무성한 그들을 드리운다. 늦은 오후, 석기 왕자의 낮은 목소리가 탑 그늘 속으로 걸어간다. 침묵하는 동안 내가 들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단숨에 늙어 갔다.

박물관 실내엔 만덕동 절터에서 출토된 여러 유물이 전시돼 있다. 그중 가장 돋보이는 것이 치미다. 치미는 궁궐이나 사찰 같은 큰 건물의 기와 양 끝에 얹는 매와 날짐승의 꼬리 모양 장식이다. 만덕동 절터의 치미는 거대한 새의 날개에, 크고 작은 꽃무늬 장식이 돼 있다. 매우 화려하다. 하단부만 출토되었는데 그것을 중심으로 사라진 곳을 복원했다.

유리관 안에 절터에서 출토된 기와와 잡상, 그릇이 가지런히 전시됐다. 명문 기와와 수막새, 암막새의 기와 문양이 두드러지게 아름답다. 절터를 거니는 것보다 박물관에서의 감흥이 더 깊다. 내가 보고자 했던 절터의 풍광은 오간데 없지만, 매혹적인 탑과 기와의 귀환은, 증식하려던 서글픔을 밀어내고 지상에 없는 아름다운 무늬로 나를 꽃그늘 속으로 데려간다. 오래 머물러도 좋을 고요한 뜰이다.

태양은 등 뒤에서 석탑을 구슬려 가늘고 긴 그림자를 뽑아 저녁에 가 닿는다.

글,사진 박시윤 지음, 디앤씨북스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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