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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에서 뻗어온 산줄기는 북쪽에 다다라서야 금강산이 되었다. 금강산에서 동쪽으로 흘러내린 산줄기는 해금강에 가 잠겼다. 해빛을 받은 바위들이 굴곡진 뼈대를 그대로 드러냈으며,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7번 국도를 사이에 두고 고성 사람들은 바다와 산기에 삶을 두루 의지했다. 사람들은 전쟁의 폐허가 된 땅에 새로이 터를 다지고 지붕을 얹었다. 남과 북 사이에 군사분계선이 그어졌고, 길이 있되 더는 가지 못하는 길이, 끝나지 않은 분단의 서글픔을 턱밑까지 불러냈다.

고성읍에서 북쪽으로 30여 km만 가면 끝이 아닌 끝에 통일전망대가 있다. 통일전망대로 가는 길에서 '온정리'라는 이정표를 읽는다. 가슴 한구석이 서늘하기도 하고, 아릿한 통증을 일으켰다. 사람들은 통일전망대가 ‘끝’ 이라고 했다. 그러나 길은 북고성(북한) 온정리로 이어진다. 전쟁의 상흔과 이산의 아픔이 중첩된 고성, 분단된 나라에서 분단된 도道에서, 군郡 마저 분단된 비운의 땅덩이가 고성이다.

서둘러 통일전망대로 향했다. 건봉사 봉서루에 걸려 있던 사진이 다급히 최전방으로 몰아댄 것이다. 봉서루에는 금강산에서 번성했던 옛 사찰 사진들이 전시돼 있다. 사진 중 ‘유점사 전경’은 생각지 못한 것을 보았을 때의 놀라움과 희열로 나를 흔들었다. 흑백의 사진 속엔 크고 작은 절집이 산언저리 언저리마다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절로 들어가는 입구엔, 개울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무지개처럼 놓였고, 산영루는 무지개 다리 위에 우뚝 서 있었다. 궁궐을 연상시킬 만큼 빼어난 처마와 곡선으로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먹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은 참을 수 있어도, 가고 싶은 곳은 참지 못하는 내게 유점사는 불치의 병病처럼 들끓었다. 공간적으로는 여기, 시간상으로는 몇 백 년을 거슬러 올라가야만 진짜 고성이 보인다는 말을, 고성의 사라진 절터를 찾아다니며 실감했다.

분단 전, 고성은 설악산 북쪽에서부터 금강산 일대를 아우르는 패 큰 고을이었다. 외금강은 남성적이지만, 내금강은 수려한 계곡미를 자아내 여성적인 풍경을 이룬다. 내금강과 외금강과의 경계지역에는 비로봉과 영랑봉, 중향성, 령추봉, 백운대, 향로봉, 법기봉, 혈망봉 등 높은 산봉우리들이 즐비하고, 만폭동 골짜기를 비롯해 백천동, 태상동, 구성동 등 이름난 계곡들이 셀 수도 없다. 유점사는 북한 영역이 된 고성군 서면 백천교리 125번지, 금강산 효운 동 계곡에 들어 있다고 했다. 천하 절경을 이룬 금강산 깊숙한 곳이었다.

고려 평장사 민지가 쓴 『금강산유점사사적기』에는 유점사 창건 설화가 전해진다. 3천 년 전, 인도에서 53불을 조성한 뒤, 종에 실어 인연 있는 국토에 안착하기를 축원하며 바다에 띄웠다. 종은 인도의 소국 월지국을 거쳐 항해한 지 900여 년 만인 서기 4년 신라 남해 왕 때, 안창현(지금의 고성 간성)의 포구에 닿았다. 고을 최고 담당관 노준이 그 말을 듣고, 왕에게 알려 53불을 안치하기 위해 절을 지었다. 53불이 든 종을 들고 금강산에 들어와 느릅나무楡에 처음 걸었다고 해서 유점사楡岾寺라 하였다.

유점사는 장안사, 신계사, 표훈사와 함께 금강산 4대 거찰 중 하나였다. 금강산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절이기도 했다. 신라시대에 지어져 고려와 조선을 거치며 크게 융성했다. 조선 세조는 유점사를 왕실의 복을 비는 원당으로 지정하고, 직접 유점사를 찾아 해마다 쌀 200섬과 소금 50섬을 하사했다. 조선 후대까지도 왕실의 지원을 받을 만큼 명성 높은 절이었다.

1901년, 독일 기자 지그프리트 겐테(Sigfried Centhe)는 조선을 방문하고 ‘한국여행기’를 남겼다. 겐테의 기록은 2007년 『신선한 나라 조선, 1901』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돼 한국에서 출간되었고, 나는 유점사에 대한 그리움을 겐테의 기록을 필사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겐테가 그토록 아름답게 유점사를 바라본 시선이 내 안에 깃들 좋은 기회였다.

겐테는 아시아의 여러 나라와 조선에서 알게 된 건축물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매력적인 암자를 손꼽자면 단연 유점사라고 했다. 조선의 불교 은자들은 청빈함을 철저히 지키고, 오늘날까지 손수 일을 하고 다른 사람들의 기부를 받으며, 가난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고 기록했다. 이 사실만으로도 금강산의 승려들은 이국인의 관심을 받을 자격이 충분했다.

사찰의 시설이나 수도승들도 사람의 때가 묻지 않은 태고의 순수함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극히 소수만 남아 있는 세상의 외딴곳, 원시 민족들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자연 그대로의 원초적인 모습과 태고의 문화가 변함없이 생생하게 보존된 곳이 유점사라고 칭송했다. 겐테의 유점사 이야기는 속삭이듯 온 촉각을 건드리내 안으로 들어왔다.


유점사 능인전에는 일제강점기 초까지 53불 중 50불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현재 우리에게 전하는 것은 단 한 불도 없다. 문화재를 잃어버린 민족의 한 명으로 분노와 자괴가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12년 금강산 지역의 불교 유적을 조사하러 갔던 일본인 전문가 세키노와 야쓰이는 유점사에서 신라시대 ‘53불 신앙’의 실상을 말해주는, 금동불상 50구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53구 가운데 3구만 잃었을 뿐 거의 고스란히 보존돼 있었던 것이다. 세키노와 야쓰이는 『조선고적도보』 총독부간행에 ‘기적적인 대발견’이라고 표현하며 사진과 글을 실었다. 그러나 다른 일본인 무법자들에게 일확천금할 수 있는 좋은 약탈 거리의 정보였다.

1916년 3월, 치밀한 사전계획을 세운 일당의 일본인 무법자들이 마침내 금강산 유점사로 침입해 53불 중 17불을 훔쳐 달아났다. 얼마 후, 범인에게서 도난품을 압수했다면서 일본인 순사가 가져온 불상은 17불이 아니라 9불뿐이었다. 그러나 돌아온 9불도 형편없는 것이거나 악당들이 가지고 있던 원위치 불명의 것들과 바꿔치기한 형편없는 것뿐이었다. 무력했던 승려들은 9점만이라도 돌아온 것을 다행으로 여길 뿐, 돌아온 불상에 의심을 품은 승려는 유점사에 하나도 없었다.

일본인 악당들은 그 후 유점사에서 깨끗이 절취한 14점의 신라 불상들을 ‘유점사 전래상傳來像’이라는 족보까지 붙여 공공연히 국내외로 암매·유출 시켰는데, 현재 보스턴미술관이 언젠지 모르게 입수해 갖고있는 ‘금동약사여래입상’은 그중의 하나로 1917년의 "조선고적도보」에 사진과 조사기록이 수록돼 있다. 또 일본인인 요코다, 이토 등이 그때의 유점사 도난품을 입수 ·소장하고 있었으나 오늘의 행방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유점사 오십삼불 해설』, 황수영 편, 1967.

한편 1935년 3월에 총독부 박물관의 촉탁이던 일본인 가야모토와 사와가 14일간 유점사의 53불을 다시 본격 조사했는데, 뒤에 그들이 작성한 복명서에는 1910년대의 조사보고에 수록된 원래의 전래상은 36점뿐이고, 엉뚱한 것이 6점(1916년에 일본인 도둑들이 바꿔치기한 것), 그리고 과거 조사보고에 있는 것 중의 11점(사실은 전의 고적조사 보고에 이유 없이 빠진 3점을 합쳐 14점)은 도난당하고 없으며, 따로 1930년에 송만공 선사 등이 발의 하여 당시 경성미술품제작소에서 새로 만들어 보충한 8점의 금동여래상과 보살입상이 있었다고 상세히 기록돼 있다. 그러나 8·15 해방 이후 북한 지역인 금강산 유점사의 53불이 어찌 되었는지, 해방 직후에 누군가가 모두 싸가지고 남한으로 내려왔다는 설과 평양으로 옮겨 갔다는 미확인 정보가 전할 뿐이다.
                                                                                                      『한국문화재 수난사』, 이구열, 2013.


백주에 일어난 일이었다. 프랑스 고고학자 에밀 부르다레가 1900대 초 조선을 답사하면서 쓴 『대한제국 최후의 숨결』에도 유점사의 모습과 능인전에 안치했던 53불에 대한 기록이 있다. 유점사는 100여 명의 수도승과 일하는 사람 200여 명이 기거할 만큼 큰 사찰이었다. 건물 상태는 매우 좋았으며, 14세기에 제작한 큰 종이 있다고 기록했다.

제단에는 불상 53점과 용상 9점이 있었지만 거의 가치 없는 것으로 대체되었다는 것이다. 에밀 부르다레가 ‘현재는 거의 가치 없는 것으로 대체’라고 표현한 것은, 그가 유점사에 들렀을 땐 금동불을 도둑맞은 뒤 다시 제작해 놓은 시기였기 때문이다.

유점사에는 53불을 비롯해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보물이 많았다. 우리나라 중세 건물 중 가장 높고 화려했다던 능인전을 비롯해 20여 동의 목조건물은 물론, 세조가 하사한 앵무배와 호박잔, 지공대사가 인도에서 가지고 와 만들었다는 패엽경, 인조대비가 불경을 필사한 사경寫經, 신라 남해왕이 하사했다고 전해지는 향로와 비취옥배, 고려 말 나옹선사의 가사 장삼 등은 누대에 걸쳐 칭송받을 보물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 미군은 인민군 토벌을 위해 금강산 일대 사찰을 중심으로 어마어마한 폭탄을 투하했다. 유점사, 장안사는 무차별적인 공격에 잿더미가 되었다. 건축기술이 우수했던 아담하고 화려한 목조건물과 유적은 모두 파괴되었다.

1798년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탑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귀중한 유적이었다. 북한에서는 미군의 유점사 폭격을 두고 “귀축(야만적이고 잔인한 짓) 같은 만행이었다”고 맹비난했다. 전쟁을 치르는 군대는 무정하고 가혹하다. 가리지 않고 부수고 쏘고 파괴하고 죽이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다. 그것이 자국이 아니라 타국일 때는 몇 곱절 더 잔인하고 가혹하다.

한국전쟁 당시, 목숨을 걸고 문화유산을 살린 한 장교의 일화가 있다. 미 공군은 우리나라 공군 전투기 편대에 합천 해인사에 소이탄(목표물을 불살라 없애는 데 쓰는 폭탄)을 투하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해인사에는 팔만대장경 목판이 있을 뿐 아니라, 사찰 전체가 민족문화의 얼이 서려 있다는 것을 안 김영환 대령은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소이탄은 일체 사용하지 말 것과, 대신 기관총으로 위협만 가할 것을 명령했다.

이후 명령 불복종에 대한 즉결심판을 받을 때, 김영환 대령은 이렇게 말했다. “해인사에는 700년을 내려온 우리 민족정신이 어린 문화재가 있습니다. 2차 대전 때 프랑스가 파리를 살리기 위해 프랑스 전체를 나치에게 넘겼고, 미국이 문화재를 살리려고 교토를 폭파하지 않은 이유를 상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지켜낸 해인사를 볼 때면, 인간이 무차별적인 공격으로 사라진 유점사가 아까워 애석했다.

다행히 1469년에 제작된 유점사 동종은 소실된 지 40년 만에 북한이 발굴하여 국보로 지정한 뒤 평안북도 향산군 묘향산 보현사에 보관중이라 한다.


고성 출입신고소에서 약 10km를 달려 통일전망대에 당도했다. 북한까지 연결된 도로가 시원하게 뻗었지만, 남방한계선 철문은 굳게 잠겼다. ‘여기서부터 비무장지대입니다. 금강산 21km’라고 적힌 표지판이 보였다. 서늘했다. 한때는 금강산 관광객들을 싣고 군사분계선을 넘었던 길이다.

통일전망대에 오르니 북한 땅이 한눈에 들어왔다. 구선봉(낙타봉) 방향 산자락에는 남북을 잇는 동해선 철도와 금강산 육로가 해안선을 따라 나란히 놓였다. 그 허리춤 어디에 휴전선 철책과 한국군, 북한군 초소가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촉을 세운다. 무척 가까워 날이 맑은 날엔 북쪽 사람들이 선명하게 포착된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 것 같다. 지척에 두고도 갈 수 없는 섭섭함이란 이런 걸까.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산들은 서로 능선을 이으며 북에서 남으로, 남에서 북으로 유유히 이어진다.

북한 레이더기지가 설치된 국지봉,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의 마지막 봉우리 구선봉이 보이고, 그 아래 감호라는 이름의 호수가 고요하게 놓였다. 능선이 끝나는 해금강엔 작은 암초들이 촘촘히 놓였다. 현종암, 만물상, 복선암, 부처바위, 사공바위, 외추도까지 이름도 정겹다.

현종암은 유점사의 창건과 닿아 있다. 53불이 고성 해안에 닿았을 때, 53불과 종을 실은 배를 묶어 놓았던 곳이다. 부처 바위는 금강산으로 들어가기 전 53불이 잠시 쉬어간 곳이고, 사공 바위는 53불을 태우고 가던 사공이 일부러 배를 뒤집어 불상을 물속에 빠트린 죄로 귀양살 이를 했다는 곳이다. 만물상은 물밑에 수정같이 맑은 바위들이 많은데, 햇빛에 반사되면 별천지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전망대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눈이 호사롭다. 금강산 자락이 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일출봉, 채하봉, 육선봉, 짐선봉, 세존봉, 옥녀봉이 가까웠다. 북한 지형을 안내하는 분에게 유점사의 위치를 물으니, 금강산 자락 한곳을 가리키며 “이쯤”이라고 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이쯤’을 나는 쉽게 가늠하지 못했다. 대동여지도를 그린 고산자 김정호도 금강산과 유점사를 선명히 표시했다. 나는 ‘이쯤’이 어디쯤일까를 오래도록 생각했다.


1990년 중반 출간된 『북한불교답사기』를 쓴 정태혁은 유점사 가는 여정을 이렇게 기록했다.

유점사로 가려면 고성이나 온정리에서 보현동普賢洞을 지나 백천리百川里까지 가서, 거기서 다시 걸어 개잔령開殘嶺을 넘어 유점사를 찾게 되는 것이다. 해금강을 먼저 보고 유점사로 가려면 이 노정을 밟아야 하겠으나, 만일 내금강에서 이곳으로 가려면 마하연을 넘어 내무재령內務在嶺을 넘는 것이다.

뒤에는 청룡산이 우뚝 솟았고 앞에는 남산이 우람하게 섰으며, 그 사이에 포근히 싸여 서쪽으로 보이는 미륵봉이 마치 큰 주먹을 구름 사이에 치켜세운 듯 금강산의 뛰어난 멋을 충분히 맛볼 수 있게 한다.


‘유점사로 가려면 고성이나 온정리에서…’ 나는 몇 번이고 이 구절을 되풀이했다. 언젠가 그날이 오면 여기, 고성에서 꼭 여정을 밟아 보고 싶기 때문이다. 민간인 통제선에서 군사분계선까지 버스로 15분, 통일전망대에서 북한 온정리까지 약 20km, 이대로 쭉 달린다면 채 30 분도 안 돼 온정리에 닿을 것이다.

온정리에서 조금만 더 가면 금강산에 닿을 것이고, 금강산 깊숙한 곳 그 어딘가에 유점사 터가 있을 것이다. 소나무와 참나무가 숲을 이룬 골짜기 어디쯤, 넓고 평평한 곳이 ‘그곳’이 아닐까. 수백 년간 자란 아름드리 느릅나무[楡]가 많았다는데 지금도 그러한지, 터는 보존되어 있는지, 무지개다리와 9층 석탑은 온전한지…. 사라진 여느 절터처럼 잡목이 우거져 터조차도 찾지 못하는 무방비의 지경에 이르렀는지, 모조리 다 궁금했다.

2018년 무렵이었을 것이다. 남북이 북한 땅에 있는 장안사와 유점사를 복원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언제쯤이 될지는 모르나, 몹시 기다려지는 일이다.

전망대 앞바다는 고요했다. 민간인 통제선, 휴전선 분단된 군郡, 탄흔, 단절의 아픔, 군사보호구역 등 고성에 따라붙는 비운의 수식어들이 파도에 밀려왔다 쓸려갔다. 명파해변엔 ‘접근금지’라는 팻말이 곳곳에 붙었다. 눈이 부실 만큼 아름다운 금강산과 해금강을 바라보며 분단의 서글픔이 배가 되었다. 눈을 철망 가까이 갖다 대자, 어느새 철망은 시야에서 사라지고 온전한 바다가 보였다. 이것이 고성의 진짜 모습일까. 바다는 그렇게 경계 없이 출렁거렸다.

글,사진 박시윤 지음, 디앤씨북스 펴냄

 

 

⚫ 삼척 흥전리 절터 –먼 산언저리 어이하여 쇠락을 말하는가 / 박시윤

⚫ 강릉 신복사 터 –천년 근심도 잠시 쉬어서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 박시윤

 부산 만덕동 절터 –내 마음이 불편하다고 해서 어찌 그릇된 것이랴 / 박시윤

 경주 용장사 터 - 주인 없는 허공에 발 딛고 서니 / 박시윤

 합천 영암사터 –눈 감고 들었네, 바람이 전하는 말 / 박시윤

 경주 감은사 터 –바람은 어디에도 머물지 아니하고 / 박시윤
 속초 향성사 터 – 그리하여, 오래오래 눈이 내렸다 / 박시윤
 고성 탑동리 절터 –볼 것 하나 없으면 어떠리 / 박시윤
 울진 구산리 절터 -바람이 흔들면 못 이긴 척 따라 나섰다 / 박시윤
 울산 운흥사 터 –구름에 들었는가, 안개에 휩싸였는가 / 박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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