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수필 읽기

언제 노인이 되는가 / 성낙향

부흐고비 2021. 12. 30. 09:11

버스를 타면 유난히 자리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있다. 대개 예순 전후, 초로의 여자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버스에 올라 요금을 결제하면서도 시선은 어딘가에 있을 빈자리를 찾아 바쁘게 움직인다. 운이 안 좋아 서서 갈 경우에는 누군가 좌석에서 일어서는 기척을 느낄 때마다 고개를 돌려 끈끈이 파리 덫 같은 눈빛으로 그쪽을 바라본다. 이번에 빌 좌석이 여자로부터 너덧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다고 해도, 그리고 그 좌석 앞에 서서 오랫동안 버스를 타고 온 사람이 있다 해도, 그것이 그 여자의 욕망을 저지하지 못한다. 좌석 앞에 서 있는 사람이 학생이거나, 젊은 승객이라면 그가 아무리 착석의 우선권을 가졌더라도 그 권리 또한 고려되지 못한다.

여자는 재빨리 뛰어가 그 사람을 제치고 앉아버린다. 자신의 그런 행동에 대해서 여자는 어떤 변명도, 사의도 늘어놓지 않는다. 주름진 얼굴 위에 그저 잠시, 지치고 피곤한 표정만을 풀어놓을 뿐이다. 그것으로 그만이다. 예순 정도 먹은 여자는 버스의 좌석 하나쯤 얼마든지 차지할 자격이 된다고 굳게 믿는 듯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었다 해서 누구나 자리를 탐하고, 양보를 바라는 건 아니다.

그는 머리칼이 희끗했고 마른 체구를 가진 초로의 남자였다. 그가 버스에 올라 내 앞에 섰을 때, 나는 무릎에 놓인 가방을 들고 일어나 그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그는 괜찮다고 말했다. 하지만 자리를 양보받는 사람들은 으레 그런 말을 하곤 했기에 대수롭잖게 여겼다. 얼른 앉지 않고 주저하는 그에게서 뭔가 난처한 기색이 느껴졌지만, 그가 나에게 신세 지는 것을 미안해하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그가 덜 미안하도록 그 자리를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버스 뒤쪽으로 가서 천장에 달린 둥근 고리를 잡으며 초로의 남자를 돌아보았다. 남자는 그때서야 엉덩이 위쪽의 몸을 의자 위에 털썩 내려놓고 있었다. 의자에 앉은 그의 모습이 서 있을 때보다 훨씬 더 피로해보였다. 그 몸짓을 보지 않았다면 나는 노약자를 대신해서 받아들인 수고로움을 달콤하게 음미하며 버스에서의 남은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남자의 그 마뜩찮은 몸짓, 보이지 않는 무엇엔가 억지로 몸을 구겨 넣는 듯한 그 앉음새를 보았을 때, 나는 해서는 안 될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남자는 정말 그 자리에 앉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자리를 양보받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아직 그럴 만큼 자신이 늙지 않았다고 생각하는지 몰랐다. 그런 사람을 노인 취급해버린 사실을 깨닫자, 느닷없이 달려든 전봇대에 이마를 부딪친 것처럼 머릿속에서 노랗게 불티가 튀었다. 왜 그런지 손에서 놓친 접시가 바닥에 떨어지기까지의 그 짧은 순간이 떠올랐다. 접시는 아직 깨지지 않았지만 곧 깨질 것을 알고 있고, 그것을 알면서도 막을 수 없는 순간의 절망감이 고통스럽고도 생생하게 마음속을 파고들었다. 그것은 어쩌면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는 진동 같은 것, 그러니까 진동처럼 내게로 전해진 그 남자의 마음속 느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나이가 들어보여도 나보다 심신이 훨씬 젊은 사람일 수 있다. 산 하나를 거뜬하게 넘을 체력이 있고, 자식을 여의어도 그 슬픔을 견딜 수 있는 정신력이 있고, 사업이 난관을 맞았어도 헤쳐나갈 지략과 배포를 지닌 강건한 사람인지 몰랐다. 고작 한 줌의 흰 머리칼 때문에 그를 늙은이로 규정하고, 억지로 자리에 앉기를 강요한 내가 오만하게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그를 모욕하고 그에게 상처를 입힌 것만 같아서 시뻘건 화덕 곁에 서기라도 한 양 몸이 오그라들었다. 그는 어쩌면 그날, 태어나 처음으로 자리를 양보받았는지 모른다. 그의 연륜을 평가하는 세상의 눈을 나를 통해 확인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도 어쩔 수 없이 늙어간다는 사실을 아프게 인식했을 것이다.

그때 이후로 자리 양보하는 일이 불편해졌다. 나이 든 사람이라고 해서 누구나 양보를 바라지도, 기뻐하지도 않는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또 다른 누군가의 마음을 다치게 할지 몰라서 늘 조심스러웠다.

그날 남자는 저항했다. 그러나 양보가 계속되면 어느 날엔가는 저항을 포기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반복되는 현실에 익숙해질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자신이 양보하는 사람보다도 먼저 자리를 탐하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저항이 사라진 순간, 그는 진짜로 늙어갈 거란 사실 말이다. 나는 남자가 버틸 수 있는 한 마지막까지, 지금처럼 서서 가는 걸 고집하고, 또 고집하기를 마음속 깊이 바랐다.

지친 몸을 노약자석에 내려놓고 가는 모든 노인들에게는 남자가 겪은 것과 같은 최초의 그런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도 그 순간은 닥칠 것이다. 맞닥뜨려야 할 그 순간이 두렵다.


성낙향 수필가 2009년 경남일보 신춘문예 당선. 2010 에세이문학 등단. 에세이부산작가회회원.

                    수필집 염장다시마 , 낯선 계단 위의 에세이.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