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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안개 / 김새록

부흐고비 2021. 12. 30. 09:22

안개 속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은 움직이는 한 폭의 그림이다. 가까이 있던 집들도 멀리 떨어진 자리에서 움직이는 실루엣이다. 한 개가 그런 술수를 부린다. 꿈처럼 신비스럽기조차 하다. 활동사진을 보는 듯한 재미도 있다.

어제와는 전혀 다른 도시의 분위기다. 창밖을 유심히 보고 있노라니 곱고 아름다운 사람이 사는 마을이 떠오른다. 가위로 삭둑 잘라내면 가장 멋진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전원도시 같은 것이 손에 잡히겠다. 그런가 하면 쑤군거리기를 좋아하는 음지식물 같은 마을도 곰팡이처럼 자랄 것이라며 공연히 비위를 긁어본다.

그렇게 안개를 보고 있는데 사람들이 쑤군거리는 소리가 어디에선가 희미하게 들린다. 그것은 물론 환청이다. 그 소리는 우윳빛 같은 안개 속에서만 들을 수 있는 소리의 미약한 울림이다. 실제로는 들리지 않는 환청에 귀가 솔깃해진다.

안개는 새로운 소리를 들어보라고 타이르는 듯하다. 커다란 얇은 가리개로 살짝 씌워놓은 눈앞 세상을 자상하게 뜯어보기를 바라는 걸까. 그렇지 않아도 그 속은 여전히 궁금하거나 답답한데 안개는 부러 내숭을 떤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먼 뱃고동 소리 같은 다소 가라앉은 정서는 나에게 세상을 보고 듣는 가르침과 암시를 준다.

완전노출보다는 살짝 가리는 것이 오히려 호기심을 유발하는 수법이다. 호기심에서 해방되고자 사람들은 그 속내를 일목요연하게 까발리기를 원하는데, 안개는 오히려 나 잡아보란 듯 유들유들하다. 살짝 가린 자태가 더 유혹적인데 왜 벗는단 말인가. 고집을 꺾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속내가 이러니저러니 하는 말은 추상적이거나 그냥 떠벌려 보는 속이 빈 입씨름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 안개 속으로 들어가면 보이지 않던 것이 새삼스런 듯 고개를 내민다. 모난 것이었는데 그 예리한 각이 깎이고 후한 포용정신처럼 나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 나타나서 보는 눈을 놀라게 한다. 그러나 잘 보이던 것이 그 속을 단단히 감추고 드러내지 않으려 고집을 피우는 것 또한 있다.

나는 어쩌면 불확실한 세상을 보고 있다. 그 세상은 이것 아니면 저것이란 것도 아니다. 희망도 절망도 아닌 정체불명인 판단유보를 한 모양새다. 그런데 그런 세상도 조금 더 관심을 갖고 가까이 다가가 보면 새싹이 돋아나는 것이 보이기도 한다. 어쩌다 썩어 무너지는 것이 있지만 그 속에는 또 다른 새 눈이 드러나 사물을 대하는 재미를 갖게 한다.

어릴 적이었다. 때가 지난 시간에도 아직 돌아오지 않는 가족을 어머니는 밥상 둘레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나는 배가 고팠지만 어머니가 덮어두신 정갈한 상보에 함부로 손을 대지 못했다. 상보 속의 따뜻한 밥은 아버지를 기다렸고 언니와 동생들이 어서 돌아오길 기다렸다. 그런 기다림에 길들면서 나는 안개를 털고 나오는 나무처럼 자랐다.

그러면서 때로는 내 마음 안에 가라앉는 안개를 본다. 하고자 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세상의 낯선 어둠을 끌어안고 안개 속 항해나 다름없는 길을 간다. 잘 풀리지 않는 일에 다시 매달리기도 한다. 불투명하고 내숭쟁이 같은 안개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다. 베일에 가려진 내숭은 은근한 호기심을 발동하게 하는 매력을 지녔을지 몰라도 엉큼하고 답답하다. 주위의 분위기를 망치는 일이 아니라면 자기중심적이고 독단적인 탁 트인 진솔한 감정노출이 차라리 마음에 든다.

내성적이고 속을 쉽게 드러내 보이지 않는 사람의 마음은 안개가 잘 자랄 수 있는 온실이다. 외향적이며 직선적이고 화끈한 성격을 갖는 사람과는 그 온도가 다르다. 나 또한 때로 내 안에 안개를 끼고 살지는 않았는가. 눈과 마음에 다른 사람이 미처 눈치 채지 못하는 안개를 덮어쓰고 진실을 가리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품고 있음을 본다. 내 마음 안의 미지근한 온실을 걷어내고 한 폭 아름다운 그림이고 싶다.

밖을 좀 더 자세히 볼 생각으로 창문을 열었다. 문을 여는 소리에 안개란 놈이 후닥닥 놀랬던 모양이다. 그 속에서 달아나는 것이 보였다. 검은 도둑고양이였다.


김새록 수필가 전남 담양 출생으로 대학에서 교육학과 및 국문과를 전공했다. 2004년 ‘수필과 비평’에 수필이 당선돼 줄곧 수필가로 활동했으며, 2017년 ‘계간문예’를 통해 시인으로도 등단했다. 한국문인협회 회원, 계간문예 중앙위원, 수필과 비평 이사, 부산문인협회 홍보이사, 부산수필문인협회 부회장, 영호남문인협회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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