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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소리 없는 언어 / 김새록

부흐고비 2021. 12. 30. 12:59

슬픔이 잠긴 송아지의 큰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비록 말 못한 짐승의 눈물이지만 이 장면을 보는 순간 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눈물은 어떤 꾸밈이나 가식이 아닌 순수해질 때, 단단히 맺혔던 마음이 녹아내릴 때 저절로 흐르는 게 눈물이지 싶다. 그 속에는 겸손한 마음 부드러운 마음 진실한 마음이 녹아있다고 본다. 물론 눈물의 내용과 질도 다양할 것이다. 그리움도 보고픔도 미련도 아닌 세상만을 탓할 수 없어 남몰래 숨어 우는 가장家長의 눈물도 있을 것이고, 자식을 위해 헌신하는 부모님의 눈물도 있을 것이며, 그리움에 사무쳐 가슴속으로 흐르는 눈물도 있을 것이다.

눈물은 잠시나마 마음을 가라앉히는 단비이기도 하다. 영혼을 맑게 하는 청심제 역할을 하는 눈물은 눈에서 나오는 것만이 아닌 마음 속 깊은 바닥에서 용암처럼 치솟는 마그마다.

텔레비전 프로에서 보았던 눈물 흘린 송아지는, 항문이 없고 꼬리가 없는 선천성기형으로 태어났다. 몸이 기형임에도 불구하고 갓 태어난 송아지는 삶의 애착을 보인다. 살겠다고 어미소의 젖을 놓칠세라 집착을 보이며 배를 채운다. 어미소는 기형으로 태어난 송아지를 혀로 핥아주면서 송아지 옆을 떠나지 않는다. 모성본능이 사람과 다를 바 없다.

먹으면 배설을 해야 하는데 항문이 없는 송아지는 배설을 못하니 몸속에 쌓여만 간다. 그 노폐물은 혹 주머니처럼 불룩하게 튀어나와 엉덩이 아래 뎅그렇게 달려있다. 소통과 순환이 막혀 있는 시한폭탄을 달고 있는 것처럼 언제 터질지 모를 상태로 그저 안타깝다.

집에서 기른 동물도 정성들이어 키우다보면 자식처럼 정이 들건만 고통스런 모습을 매일 지켜보는 송아지주인의 마음은 오죽할까! 오뉴월에 장작개비 불에 타들어가듯이 후드득후드득 타들어간 것은 아닌지 헤아려진다. 아니나 다를까 주인장은 보다 못해 태어난 지 삼일 째 되던 날 여기저기 신뢰감이 가는 수의사를 찾아서 수술을 청했다. 수술을 하기위해 송아지를 어미소 곁에서 데리고 나오니 어미소는 정신 나간 것처럼 좌불안석이다. 안절부절 불안감을 보이며 한없이 울어댄다. 말 못한 짐승이라고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통한에 찬 울부짖음이다. 송아지를 빼앗긴 분노와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절정에 쌓인 절규이다.

애착 집착 두려움 불신 등이 배어있다. 환희와 고통과 승리와 패배의 정점에서 초연함과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다 비울 때, 텅 빈 투명한 영혼이 신체적 변화에 의해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것이 눈물이다. 높고 낮은 깊고 얕은 다양한 색깔의 희로애락이 녹아서 승화된 결정체이다. 순백의 눈물 꽃이다. 류시화 시인도 ‘눈에 눈물이 없으면 그 영혼에는 무지개가 없다.’라고 표현하지 않았던가.

송아지와 어미소의 눈물이 가교 역할을 했는지 수술은 성공리에 끝났다. 인공항문을 만들어서 어렵게 단 수술을 마친 송아지는 그 동안 쌓여 있던 노폐물을 소낙비 퍼붓듯이 배설한다. 생사의 고비를 넘기고 어미를 다시 만난 송아지는 어미젖을 입에 물고 눈물을 흘린다. 털이 촉촉하게 적신다. 아픔의 고통과 어미를 만난 기쁨이 승화된 눈물은 소리 없는 언어이다. 그 어떤 말의 위력보다 진한 감동을 지니었다.

눈물 속에는 또 각기 다른 색깔이 있다.

얼마 전 그이의 뒷모습에서였다. 아버지 생신차 친정에 온 고향의 가을하늘과 들녘은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나 자신과 과거의 시간을 되돌려준 계기가 되었다.

<화려한 외출> <편지> <연인> 등 영화촬영지로 유명한 메타세쿼이아의 길은 서녘하늘빛에 물들어있었다. 긴 내 머리카락이 살랑대도록 불어대는 가을바람을 휘젓고 남편과 둘이서 2인용 자전거를 타고 양쪽으로 즐비하게 서있는 메타세쿼이아 길과 관방제림의 길을 달렸다.

그이가 앞에서 핸들을 잡고 달리면 나는 뒷좌석에서 보조 바퀴를 돌리는데 감정이 울컥 인다. 아직은 젊은 나이로 여기는 50대 중반으로 접어들, 쓸쓸한 퇴역장교의 뒷모습은 해거름의 아린햇살처럼 온 몸을 찡하게 만든다. 진해 흑산도 구룡포 목포 인천 계룡대 여러 지역을 이사 다니면서 낯선 문화를 익히며 살았던, 허술하고 오래된 관사생활이 석양처럼 설핏한 들판을 가로질러 간다. 찌릿한 액체가 피돌기를 한다.

25년을 군인가족으로 살아온 내 마음도 이럴진대 33년의 군軍생활을 마감한 그이는 만감이 교차한 속울음을 삼켰을 것이다. 마지막 종착지 부산에서 인생 1막을 내리고 2막의 돛을 올렸다. 다행스럽게 전역과 동시에 또 다른 캡틴으로 취직이 되었지만 현역시절만 하겠는가…. 퇴역을 하고 돌아오던 날, 그이의 표정 속에서 침묵으로 깎은 온갖 파노라마를 읽을 수 있었다. 사열대처럼 즐비하게 서 있는 메타세쿼이아 길을 그이는 열병식을 하듯 달린다. 나도 덩달아 보조바퀴를 돌리지만 자꾸만 햇살보다 더 부드럽고 따스한 감사의 눈물 꽃이 아릿하게 피어오른다.

송아지의 크고 슬프고 애절한 눈물의 씨앗이 흑갈색이라면 그이의 뒷모습에서 피어난 또 하나의 눈물은 가을 해거름에 피어있는 연노랑 국화일 것이라며 나는 애써 마음을 즐거운 쪽으로 다독거린다.

눈물은, 모든 것을 내려놓게 하는 소리 없는 언어이다. 놀빛 속에 핀 꽃을 마음으로 꺾어 그이의 어깨에 살포시 꽂는다.


김새록 수필가 전남 담양 출생으로 대학에서 교육학과 및 국문과를 전공했다. 2004년 ‘수필과 비평’에 수필이 당선돼 줄곧 수필가로 활동했으며, 2017년 ‘계간문예’를 통해 시인으로도 등단했다. 한국문인협회 회원, 계간문예 중앙위원, 수필과 비평 이사, 부산문인협회 홍보이사, 부산수필문인협회 부회장, 영호남문인협회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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