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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소리꾼의 길 / 김순경

부흐고비 2022. 1. 18. 09:15

몇 달째 답보상태다. 아무리 단전에 힘을 줘도 소리가 되지 않는다. 개미 쳇바퀴 돌 듯 같은 장단을 반복하다 보니 스승도 학생도 지쳐간다. 몇 발짝 들어가니 한 소절도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돌아서는 날이 늘어난다. 벽에 부딪힐 때마다 입구는 있어도 출구는 없다는 어느 소리꾼의 말을 실감한다.

광대는 직업적인 예능인이다.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늪처럼 빠져든다. 우연히 발을 들였다가 평생 굴레를 벗지 못하기도 한다. 꿈에 부풀어 시작하지만, 예인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중도 하차하는 경우가 많다. 누군가가 부추기는 말에 고무되어 어설프게 들어섰다가는 의식주도 해결하지 못하고 가족들까지 힘들게 한다. 끼도 재능도 없으면서 화려한 무대에 심취되어 멀고도 험한 이 길을 선택하면 진정한 광대가 되지 못한다. 간혹 설익은 실력으로 성급하게 무대에 섰다가 관객의 무반응에 바로 접기도 한다.

소리 선생님을 만난 지도 수년이 지났다. 첫 만남은 판소리 다섯 마당을 단독 공연하는 국립국악원이었다. 어둠이 객석을 채우자 장막이 천천히 올라갔다. 천장에서 빛이 떨어지니 샛노란 저고리에 붉은 치마의 단정한 소리꾼과 도포에 갓을 쓴 고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적을 깨는 장구가 가야금 연주와 아니리를 불러왔다. 춘향가 눈대목인 <사랑가>의 가야금 병창이 끝나자 북소리를 타고 적벽가의 <새타령>이 구슬프게 이어졌다. 애절한 가락이 나올 때마다 객석에서 추임새가 터졌다. 수궁가의 <토끼 배 가르는 대목>은 해학적인 사설에 걸맞게 박진감 있게 진행되었고 흥보가의 <제비노정기>는 가야금 병창으로 마무리되었다. 화려한 경력보다 수리성을 갖췄다는 사회자의 말이 심청가의 <심봉사 눈뜨는 대목>에 집중하게 했다.

공연이 끝나자마자 무대 뒤로 갔다. 고수를 만나 소리꾼을 만나고 싶다고 했더니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유려하고 재치있게 무대를 이끌었던 사회자를 만나 공연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하루라도 빨리 배우고 싶었다. 다음날 출근하자마자 바로 전화를 했다. 판소리를 배우고 싶다고 하자 사무실로 찾아오는 방법과 날짜를 정해 줬다. 얼떨결에 덜렁 약속부터 하고 나니 약간의 두려움과 기대감이 교차했다. 괜히 문제를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도 지금 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 무조건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한恨의 소리는 만만치가 않았다. 평소에 민요를 좋아해 자신 있게 시작했지만 쉬운 노래는 하나도 없었다. 장단을 맞추는 것은 물론이고 가성 하나 내는 데도 몇 날 며칠이 걸렸다. 누구나 쉽게 따라 부르는 진도 아리랑도 그냥 하는 것이 아니었다. 굵은 목과 가는 목으로 흔들고 뻗고 꺾는 시김새는 제대로 흉내 낼 수가 없었다. 조금만 많이 떨면 발바리 목이라며 절대 내지 말라하고 사설의 내용에 맞게 표현하라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민요 몇 곡으로 몇 달을 보냈다. 가끔은 목청이 제대로 나오지도 않고 시김새도 잘 만들어지지 않았다. 엉뚱한 목청이 반복되고 한 장단도 소화하지 못하는 날은 사서 고생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원 동편제 성지를 방문한 적이 있다. 한적한 시골이라 방문객이 거의 없었다. 조심스럽게 건물 안으로 들어서니 갖가지 풍물과 악기들이 전시되어 있고 동편제의 계보가 벽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조선 최고의 명창이며 동편제의 창시자인 송흥록은 아들과 손자 증손자인 송만갑에 이르기까지 소리의 업을 이어가게 했다. 타고난 재능과 철저한 조기교육으로 명성을 얻은 송만갑은 구성진 서편제의 장점을 동편제에 접목하여 관객들을 열광시켰지만, 가문과 동료들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송만갑의 바디가 그때 만들어졌다. 지금도 대대로 업으로 삼는 집안이 더러 있다. 세습 무당집에서 태어나 정형화된 진도 씻김굿을 아들딸에게 전수한 사람도 있고, 좋은 직장 다 버리고 광대의 길을 걷는 형제도 있다.

소리의 길은 무병처럼 다가온다. 한번 가슴을 파고들면 마음대로 내칠 수가 없다. 달아나려고 하면 더욱 처절하게 다가온다. 종착지가 어딘지도 모르고 무작정 떠난다. 언제 어디서 깨달음을 얻을지도 모르면서 화두 하나에 매달리는 구도자의 길을 걸어간다. 득음하겠다고 성급하게 덤벼들었다가 떡목이 되면 광대의 길을 접어야 하고, 조급증을 참지 못하고 섣불리 무대에 섰다가는 명창이 되지 못하고 또랑광대에 머물러야 한다. 세습 광대들이 도중에 그만두고 다른 길을 택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한을 소리로 승화시키는 소리꾼이 되면 제대로 먹고 입지 못해도 무대를 떠나지 못한다. 빛 좋은 개살구라는 것을 알면서도 굴레를 벗을 수가 없다.

소리꾼의 삶이 순탄치만은 않다. 우선 오랫동안 수련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좋은 스승을 만나기도 어렵지만, 설사 만나서 사사를 해도 재능과 열성이 없으면 공력이 쌓이지 않는다. 유년시절에 시작해도 기회가 닿지 않아 빛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타고난 끼를 주체할 수 없어 시작한 소리가 신동의 반열에 들어도 시간이 지나면 유성처럼 빛을 잃고 만다.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처럼 비록 명창의 꿈은 저버린 지 오래지만, 무대만 보면 신들린 듯 생기가 난다.

소리꾼은 사설에 따라 일인다역을 수행한다. 때로는 부자가 되어 빠르고 신나는 가락으로 나가다가도 가사가 바뀌면 바로 마당쇠가 되어 신세 한탄의 소리를 토해낸다. 관객이 광대의 연기에 열광하고 눈물짓는 것도 공감하기 때문이다. 역할에 공감하지 않으면 공연이 끝나기도 전에 관객들은 자리를 뜨고 만다. 돌아보면 마디처럼 이어지는 모든 삶이 주어진 배역을 열심히 소화하는 배우와 다르지 않다. 그러고 보니 광대 아닌 사람은 없다. 날마다 자신만의 배역에 충실하며 살아간다. 삶이 그렇듯이 늘 좋은 역할만 하기는 어렵다. 오늘 행복하다고 내일도 같은 날이 되지는 않는다. 인간이 마음대로 선택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정상은 기대하지도 않는다. 화려한 무대가 기다리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안다. 하지만 관성 때문에 멈출 수가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조급해하지 않고 돌다리를 두드리는 심정으로 한 장단씩 배우려고 한다. 어렵사리 판소리 한 대목을 끝내자 어둡고 긴 터널을 겨우 몇 걸음 지나온 기분이다. 언제쯤 출구의 빛을 볼 수 있을는지.


김순경 수필가 1958년 울산 대대리 출생. 수필과비평 신인상 수상(2016), 경북문학대전 은상(2017), 포항스틸에세이공모전 대상(2018), 경북문화체험수필공모전 금상(2018), 부산문인협회, 수산수필문인협회, 수필과비평작가회의, 부경수필문인협회 회원, 수필집 ‘대대리 별곡’(2017), ‘모탕’(2019). 동아대 대학원 공학박사(1995), 동의과학대학교 자동차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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