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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박일만 시인

부흐고비 2022. 1. 28. 08:25

박일만 시인
전북 장수 육십령에서 태어났다.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법학과를 졸업하고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과정(詩)을 수료하였으며, 2005년 《현대시》를 통해 등단했다. 문예창작기금(2회), 제5회 송수권시문학상, 제6회 나혜석문학상을 받았으며, 시집으로 『사람의 무늬』, 『뿌리도 가끔 날고 싶다』, 『뼈의 속도』, 『살어리랏다』 등이 있다. 한국작가회의, 한국시인협회, 전북작가회의 회원이다. 경기도의회 전문위원을 정년퇴직하고 현재 '논개정신'에 관해 집필하고 있다.



두타행 / 박일만
시끄럽던 우기를 견딘 몸이다/ 축생의 지하를 청산하고 땡볕 속에 나섰다/ 발자국을 총총히 새기는 애벌레/ 제 몸속 습기를 뽑아 길을 놓는다/ 세상을 짚어가는 필사의 솔기/ 걸친 가사도 짊어진 바랑도 없이 오직/ 태생의 살갗만으로 밀고 가는 길이다/ 산과 계곡을 버리고 혼돈의 세상에 나와/ 빌딩 숲에서 지하철에서 들끓는 길거리에서/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넘나드는/ 속도를 온몸에 두르고 살았다/ 배를 채우고 몸에 걸치는 일에 골몰하며/ 거대한 콘크리트 무덤 속에서/ 인간이기를 자처하며 살았다/ 몸 속 진액들이 서둘러 부패 됐다/ 아우성의 틈서리에서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 걸친 옷보다 먼저 몸이 닳았다/ 몸보다 먼저 신념에 삭았다/ 회색 도시를 거처삼아 흙살 한 줌 없이 살았다/ 무성한 소음 제치고 음습한 도시 벗어나/ 뙤약볕에 벌건 몸으로 간다/ 나는 한 마리 알벌레다, 적멸은 멀다//

전대미문 / 박일만
오늘은 야성적이고 싶다/ 웃통을 벗어 제치고 알통을 내보이고/ 좀처럼 쓰지 않던/ 삼두박근, 승모근 까지 선보이며,/ 균형 잃은 뇌수와/ 허접한 내용물일 뿐인 내 몸/ 잠 깨우고, 채찍질로 호되게 하고 싶다/ 내 머리는 이제/ 돋보기로 더듬대며 독서를 해도/ 득도는 애당초 글러버린 이성일 뿐이니/ 양단간에 패만 거는 시대에/ 도전장 한번 내밀지 못했던 어리석은 삶인,/ 그래서 오늘은 좀 벗어 보이고 싶다/ 빈약한 근육을 잘 말려서, 말아서/ 활활 타는 당신의 불쏘시개로 삼고,/ 갈수록 늘어지는/ 치열한 현실에서 한참을 비켜난/ 심, 근, 육을 집대성하여/ 시대와 단단하게 접-붙-고 싶다//

전조등을 켜면 / 박일만
스쳐가는 눈을 들여다 볼 수 있을까/ 바퀴가 지배하는 긴 풍경과/ 일렬로 진군하는 가로수에 가위눌린 사람들/ 주름진 일상을 볼 수 있을까// 전조등을 켜고 훑어 봐도/ 접점을 잃은 삶엔 평행선만 이어질 뿐/ 바퀴가 가르는 바람의 살덩이가/ 길바닥 위에 흩어지며 아픈 소리를 지른다// 얼마쯤 가면/ 내 남루한 삶의 배경도 볼 수 있을까/ 조각들로 기워진 보도블럭 위 토악질 자국에/ 목울대를 넘어오는 신산함을 삼켜본다// 얼마나 밝아야/ 손금에도 없는 후생,/ 쇼윈도에서 사계절 내내 웃고 있는 가족사진/ 식솔들의 전생까지 읽어 낼 수 있을까// 둥근 빛에 갇히는 안개의 입자들, 사람들/ 밤 무지개가 환하게 피는/ 전조등을 켜면/ 어둠에 휘말려 속수무책인 현생이/ 머~언 발치로 달아난다//

뼈의 속도 / 박일만
시간을 수없이 접었다 펴가며/ 반듯한 철로에서도 뒤뚱댄다/ 험준한 산길을 만날 때마다/ 쉼 없이 허리를 꺾어대야 하는 몸/ 세상을 건너 시절을 건너 혈을 짚어가면서/ 뼈를 한 치씩 늘였다 줄여 가면서/ 종점에서 시작, 늘 종점에서 끝난다/ 주렁주렁 식솔들에게 등을 내주고/ 길고 고단하게 달려야만 하는 몸은 태생부터/ 속도라는 패에 온 생을 걸었다/ 칸칸이 바람으로 가득한 속도는 뼈의 아비들/ 삐걱대는 관절을 마디마디 이어 붙인 남루한 골격/ 달리다 멈출 때마다 허리의 통증은 더해진다/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인 줄 알았던 세상 모든 아비들이/ 가끔 자리 펴고 누워 앓는 소리를 내는 연유도/ 속도가 지켜 내는 올곧음 때문./ 속도와 한 몸인 아비들/ 역마다 부려 놓은 허기를 되삼켜 가며/ 해지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전복되지 않으려고/ 뒤척이는 속도를 줄이지 못하는 내력,/ 속도는 세상의 아비들//

지구의 저녁 한때 4 / 박일만
애들이 장성한,/ 이제는 머리 희끗한 나이에 이른 나를/ 어머니는 여전히 젖살 붙은 애로 보신다// 저녁 밥상에 생선 한 토막./ 한사코 내 앞에 두신다// 괘념치 말고 드시라고 밀쳐 내도 어느새/ 내 쪽으로 놓여지는 생선 한 토막// 보릿고개 넘던 시절을 떠올리시는지/ 무엇보다 귀한 음식이라 여기시는지/ 늘그막의 아들이 아직도 어머니는/ 안쓰러운 것이다// 연세는 저녁에 닿아 있으나/ 마음은 아직 중천에 정박해 계신다// -제가 요즘엔 생선이 영 안 땡겨요 어머니!/ 재차 밀어 놓는다// 네댓 개의 반찬 그릇이 다 비어가도/ 덩그러니 남는/ 생선 한 토막//

숯 / 박일만
뼛속까지 화기를 받아냈다/ 검다고 비웃을 것이냐// 막막하고 긴 시간 속에서/ 뜨거움을 통째로 들이 마시고/ 까마득히 숨을 멈춰야 온전한 생이리라// 온몸을 불구덩이에 던지고 누워/ 치명적으로 견뎌야 다시 숲을 이루는 나무/ 절정에서 머뭇대다가는 허망한 재가 되고 만다/ 검다고 거부할 것이냐// 달궈진 채 조용히/ 석탄처럼 깊어진 몸/ 검을수록 생을 맑은 소리를 품으리라// 이 세상에 알몸으로 와/ 삶의 화탕지옥을 지나고 나면/ 나의 뼈들도 종내는 저런 색이 되기나 할는지// 검다고 버릴 것이냐//

헛방정* / 박일만
나의 피는 산천을 닮았다/ 함부로 몸 부리지 않고 돌아온 골짜기는/ 자궁처럼 비리다/ 대양의 거센 물살을 받아내며/ 혼신을 다하는 내력의 핏줄기가 어느덧/ 양수의 비린내를 기억해낸다/ 태생을 향해 오르는 일이란/ 기쁨도 슬픔도 잠시 잊는 일/ 온몸을 바닥에 뜯기며 헤엄치는 곳곳은/ 이제/ 탯줄이 끊기고 시멘트벽에 막혀/ 마음마저 접힌다/ 물길이 멈춘 웅덩이를 타고 넘지 못한/ 여자들은 알 낳을 자리를 찾아/ 이리저리 궁굴다 자궁만 해져간다/ 알을 찾지 못한 나는 몸을 뒤척이며/ 서둘러 아무데나 사정을 해댄다/ 알 수 없는 통증이 전신을 파고든다/ 이렇게 헛방정만 해대는 시대라니!/ 내가 흘려버린 정충들, 새끼들/ 콘크리트 벽을 야속해 하며/ 우글대는 지금은 폐허 곳 삶이다//
* 헛방정 : 연어들의 수난시대

동행 / 박일만
헐레벌떡,/ 전동차에 오른 그녀가 거칠다/ 귓전을 덥히는 숨소리/ 흔들리며 휘청이며 쏟아낸다/ 들척한 온기가 내 몸을 휘감는다/ 전신에 흡수되는/ 연신 뿜어대는 아찔한 향내와/ 요동치는 심장이 내 몸과 섞인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혼과 혼/ 전생에 스쳤던 인연으로 겹친다// 누천년을 그리워하던 끝에 한몸 되는,/ 숨소리 잠잠해질 때까지/ 영원이 순간을 끌어안는 잠깐 사이/ 그녀와 내가 억만년의 지하세계에서/ 화석으로 살아나는/ 이 기막힌 동행.//

다운타운 / 박일만
허리에 링거병, 어깨끼리 손 걸쳤다/ 깁스, 목발에 묶여 오가도 못하는 처지다/ 계절도 기울고 입동 부근을 배회하며/ 무거운 시간을 터는 나무들, 후두둑/ 돌입하는 찬바람에 뼈마디가 삐걱인다/ 노을빛에 데어 얼굴 또한 붉다/ 어디를 향해 행군하는지 모를 자동차들/ 손가락 접어가며 셈하다가/ 그도 저도 겨운지 한길에 다리 뻗고 기댄 나무들/ 시절은 쾌속으로 겨울을 향해 발진 중이다/ 아뜩한 귀착지를 찾아 가는 나무들은 허허롭다/ 몸을 공중에 매단 간판이/ 시침 뚝 떼고 미간을 흔들어대는 역 부근,/ 이쯤에서 버거운 짐을 부려야 하리/ 난처한 자세로 도심을 관통하는 고가도로 밑이든/ 쥐들과 소통하는 지하역 어디쯤도 상관없는 투로/ 삼삼오오 모여드는 검고 깡마른 나무들/ 더러는 때절은 배낭을/ 더러는 계절을 앞지른 누더기로 모여든다/ 상처없이 사는 법을 끝내 익히지 못한 채/ 버린 만큼 얻는다는 말씀도 터득하지 못한 채/ 한 계절을 덮고 지낼 온기를 찾아 꾸역 꾸역/ 하초를 탕진한 목발 짚고 모여든다/ 더 깊고 어두워진다//

진달래 / 박일만
춘삼월이면 온다// 연분홍 저고리를 나풀거리며/ 눈썹 가늘게 그리고 온다// 봄 한때/ 저 여자의 애인이 되고 싶다// 아직은 나이 어려서/ 풀 향기 나는 젖가슴에 얼굴을 묻고/ 꽃가루를 듬뿍 묻혀도 좋겠다// 왼종일 여자와 산 속을 헤매고 싶다// 동장군이 가실 무렵이면/ 영락없이 고개를 넘어 찾아온다// 양지골 숲속에 숨겨두고/ 나 혼자만 몰래 만나고 싶다//

푸른 염불 / 박일만
고깔 쓰고 바라춤 추었다는 용주사/ 온몸으로 기억하는 느티 몇 그루/ 승천을 자주 시도했는지 뒤튼 이무기 같다/ 빛나던 여의주 버거워 물고 오르지 못해/ 한켠 바위덩이로 내려놓았다/ 왕매미 난상토론 중인 거목 가슴께를/ 법당 앞 종소리가 후벼 파 놓은,/ 펄펄 끓는 녹음 두르고/ 드넓은 들판 거느린 소나무 숲 아래엔/ 거시기 형상으로 수도하는 입석(立石)들/ 살갗에 덕지덕지 세월 꽃을 입고 있다/ 한때는 강이었을까 호수였을까/ 낙엽 잠긴 연못에서 트림을 해대는/ 미꾸린가 개구린가 살 오르는 녀석들/ 거품 게워내며 자손 번식 염불 따라 왼다/ 깊이 가라앉을수록 뿌리는 흙과 가깝고/ 낮게 숙일수록 사람은 길과 가깝지 않은가/ 몸 띄우고 고개 내민 연잎 아랫도리 푸른 용주사/ 뒷산과 앞뜰에서/ 뻐꾸기란 놈 악을 쓰며 초록불에 부채질한다//

엿장수 / 박일만
어느 시대의 검객인가/ 야밤을 피해/ 대낮에도 칼질을 해대는// 시대를 늦게 탄 외로운 검객인가/ 혼자서도 쌍칼을 들어 잘도 겨룬다// 아예 두 칼을 단단히 비끄러매고/ 더 이상의 후퇴란 있을 수 없다는 듯/ 비장한 각오로 불꽃을 튀긴다// 매미마저 도심나무 위에 숨어 칼을 가는/ 저 무림 속의 현대/ 우리들의 검객/ 마땅한 상대도 없이 무한정 고수를 찾아// 제 속의 저와 겨루며 사는// 대명천지에 칼꽃을 튀기며/ 온 동네를 피로 물들이는/ 예리한 손놀림의 저 검객//

상처가 사람의 무늬를 만든다 / 박일만
포경수술을 하고 온/ 중학교 삼 학년/ 아들 녀석을 보고 우리 부부는/ 웃었다/ 투정과 장난기 덕지덕지 하던 얼굴/ 온데 간데 없고/ 제법 근엄한 미륵불 같았다/ 산전수전 다 겪은 듯/ 무거운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 소리 없는 등짝을 타고/ 들바람, 산구름, 눈, 비 들이치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빠르게 건너가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도 예전 그 모습/ 돌아오지 않아 웃었다/ 녀석,/ 깊어지고 있었다.//

낫 / 박일만
이것은 불의 뜨거움 속에서/ 순함을 다스려 우려낸 몸이다./ 저잣거리를 떠나 떠도는, 다분히/ 천박한 태생이었으나/ 짙푸른 분노를 두드려/ 날카로움을 얻었기에/ 그 품성이 매사에 도리를 다하는/ 촌부의 둥근 갈비뼈를 닮았다./ 그러하니 암흑 속에서 몸을 던져/ 세상을 세우고자 하는 모든 이의/ 귀감이 되고도 남음이 없도다, 오늘밤/ 한 시대의 어둠을 삭혀 횃불을 높이 드는/ 거짓 선지자의 눈빛이여, 이것은/ 침묵을 섬기는 몸./ 짙푸른 분노를 두들겨/ 날카로움을 안으로 숨긴/ 지혜의 둥근 덩어리.//

등 / 박일만
기대오는 온기가 넓다/ 인파에 쏠려 밀착돼 오는/ 편편한 뼈에서 피돌기가 살아난다/ 등도 맞대면 포옹보다 뜨겁다는/ 마주보며 찔러대는 삿대질보다 미쁘다는/ 이 어색한 풍경의 간격/ 치장으로 얼룩진 앞면보다야/ 뒷모습이 오히려 큰 사람을 품고 있다/ 피를 잘 버무려 골고루 온기를 건네는 등/ 넘어지지 않으려고 버티는 두 다리를 대신해/ 필사적으로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준다/ 사람과 사람의 등/ 비틀거리는 전철이 따뜻한 언덕을 만드는/ 낯설게 기대지만 의자보다 편안한/ 그대, 사람의 등//

아버지 목욕을 시켜드리며 / 박일만
자꾸만 기우는 몸을/ 벽에 세워드리고 등을 민다/ 구순 넘어 거동 불편하신 아버지/ 뼈 삭고 근육 무너지는 동안 상처투성이다/ 가죽 처진 소처럼/ 늘어진 등판에 무늬가 새겨져있다/ 강 무늬, 산 무늬, 나무, 돌, 비바람 무늬까지/ 무수하다/ 저 등과 어깨로 버텨온 무게가 얼마던가/ 살을 발라 식솔들 먹여 온 세월 얼마던가/ 짚고 선 벽은 평생을 두고/ 맨살로도 넘지 못하신 꿈이다/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 태생으로 돌아가고 계신다/ 내외하시듯 돌아서 있는 뒤태가 애처롭다/ 물기를 닦아드려도 또다시 기우는 몸,/ 아버지 몸에서는 무궁화꽃 향기가 난다/ 노구를 씻겨드린 밤/ 꿈속에서 내 팔다리도 가늘어져 갔다//

유물론 / 박일만
아버지가 아프시다/ 칠순의 강 건너 오신 정신 줄을 놓으셨다/ 용하다는 점쟁이는 부적을 권장하고/ 신통방통 보살님은 치성을 주장하고/ 도립병원 추천받아 응급실 간 대학병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입원수속 속전속결,/ 부적 값을 부르는 점쟁이,/ 밤낮으로 기도해 준다는 보살님께 전권을 위임하고/ 청진기도 대보지 않고 입원한 대학병원/ 시간당 얼마 한다는 ××병동에 아버지를 가두고,/ 아버지가 아프시다, 아뜩하시다/부적 값이 아쉬운 점쟁이는 한 판 굿을 주문하고/ 삼천배가 힘들면 경전을 사서 읽으라는 보살님/ 현대적인 원인을 묻는 나에게 의사는 현란한 용어로/ 한시라도 더 입원하라는 특유의 진단을 설파하고,/ 쪼들리는 살림 좀 펴보려고 주워 온 물건들을/ 집안에 속속 들여놓는 병이 나신 아버지,/ 아버지가 모질게 아프시다/ 딴에는 식솔들 끼니 걱정이 불러들인 병/ 평생 가난 탈출이 유일한 목표였던 아버지/ 삼백육십오일 쉼 없이 공사판을 떠돌던 아버지가/ 팔순에 당도하자 그렇게 아프시다/ 평일도 휴일도 가림없이 아뜩하시다//

이장(移葬) / 박일만
한 생을 감쌌던 늑골이 무너져/ 누우신 자리가 무척이나 불편하셨겠다./ 용서하는 법을 터득하는 중이신가,/ 염을 했던 허물까지 벗으신 채/ 의치를 내보이며 웃으신다./ 가지런한 뼈 사이에서/ 들려오는 헛기침 소리./ 식솔보다 객짓밥을 좋아하셔서/ 늘 바람 속에 집을 짓고 사셨지./ 비탈진 삶,/ 호방하시던 성품,/ 이제 그만 세상의 업보를 푸세요./ 꽃 덮고/ 햇빛 덮고/ 바람처럼 잊으세요./ 천 근 만 근 떨어지지 않는 발을 떼며/ 내려오는 하산길,/ 희끗한 머리카락 몇이 따라와 기척을 한다./ 아, 아버지!//

산 속 모텔, 입관 / 박일만
비스듬히 언덕에 기댄 몸체/ 창문마다 들판을 그리고 있었다/ 편편하고 네모난 들판,/ 창문은 모두 사람을 기다리는 그림// 허리띠로 두른 정원수가 헐거워 보였다/ 안쪽 붉고 바깥 검은 커튼에 가려 질 때/ 삶과 죽음의 색이 얇은 막 하나로 갈렸다/ 당신의 표정은 오히려 편안했고/ 입관은 밝고 짧게 마감됐다// 누구나 흰 꿈, 노란 꿈인 듯 살다 가는 세상/ 눈꺼풀 내려 깐 창문 틈새로 불빛이/ 가끔 탈출을 시도하다 이내 갇히는 세상/ 유언처럼 무슨 말소리가 들렸던가 말았던가/ 당신의 알몸은 이승의 마지막 빛인 듯 빛났다// 묘혈을 덮는 흙은 따뜻했다/ 벽 틈새 덧난 상처로도 살아 온 날들은 충분히 남루했고/ 궁전같은 원죄를 올려 쓴 쓸쓸한 몸뚱어리/ 살아남은 자의 눈으로 물끄러미 산야를 바라보는/ 삶의 배후는 늘 검정이었다// 기쁨도 슬픔도 모두 잊은 봉분이 서고/ 산자락까지 기진한 꿈을 꾸러/ 늦은 걸음으로 찾아오는 사람도 반가워/ 이마가 붉게 타는/ 그래서 어둠도 먼저 찾아드는,// 아버지 돌아가신 날 나는 고향에 가서/ 고향에 들지 못했다//

파장(罷場) / 박일만
시동 꺼졌다/ 관절을 헤집는 바람에 섞여/ 완강했던 근육질도 풀렸다/ 눈 한번 껌벅이는 기력도/ 저물 줄 모르고 힘껏 달려온/ 추진력도 모두 빠져나갔다/ 숨소리 한층 무거워졌다/ 야윈 관절을 접고 접으면// 결국 점이 되는 몸/ 헐렁해질 대로 헐렁해진 몸속에서/ 적막한 절 한 채 짓고 계시다/ 아버지//

감자껍질 / 박일만
버려진 껍질에서 싹이 났다/ 얇은 껍질이 싹을 키웠다/ 껍질은 제 살을 먹여 씨눈을 키우고/ 몸통을 바쳐 사람을 먹였다/ 껍질은 이 세상의 어미가 되었다// 하여 나는 어머니의 알몸인 것이다/ 여리고 얇은 가죽을 남기고 나온 나는/ 게다가 가죽에 남은 젖눈까지 빨아댔겠지// 세상 모든 잉태는 껍질의 후생이다/ 감자가 그걸 제일 먼저 일러줬다// 천대받는 껍질 거기에서 네가, 내가 나왔느니/ 비로소 껍질이 자자손손 피를 돌게 했느니// 어머니/ 지금은 저렇게 물 빠진 가죽만 남으셨다//

모친 / 박일만
아파서 곧 죽겠다는 전화를 받고/ 서둘러 갔다/ 두 차례 낙상사고로 누워 계신지 몇 해/ 겨우 몸 추스르고 사신다/ 몸은 날이 갈수록 작은 점이 되고/ 늘어가는 약봉지가 유일한 낙이시다/ 낡을 대로 낡은 관절들,/ 숨이 턱에 차도록 도착해 보니/ 겨우 발목에 통증이시다/ 걸어서 내 집에 오실 수 있는 지척이지만,/ 안다, 핑계 김에/ 다 늙은 자식이라도 보고 싶은 것이다/ 발목을 문질러드리자/ 벌떡 일어나 밥상 차리러 가신다//

객관적인 달 / 박일만
1// 저문 당신의 정원은 관습처럼 교교하다./ 서늘한 눈빛으로 당신의 정원을 흔드는,/ 나는, 객관적인 달이다./ 망연한 허공 그 중심을 듣고 서서/ 은하계와 내통하는 은밀함으로/ 오늘밤 당신과 불온한 인연을 맺고 싶다./ 그러나 당신은, 내가 도저히/ 건널 수 없는 무채색의 들판을 키우고,/ 수심 가득한 책을 읽는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목소리로,/ 당신의 이름을 부른다, 성호를 긋듯,/ 마, 리, 아//
2// 당신, 내 안에 있군요./ 무수한 시간 속에 나를 저장하는군요./ 쿵쾅거리는 심장의 격렬함,/ 마음속 깊이/ 희미한 의식에 전깃불이 들어오면서/ 붉은 피가 흐르네요./ 오래 전에 꾸었던 꿈의 한 장면이/ 스, 크, 랩, 되, 네, 요./ 내가 당신 안에 있어도 될까요?/ 추억 속에 깨알 같은 시간을 슬어 놓고….//

빵집 앞 / 박일만
풍겨오는 빵 냄새, 개 한 마리 어슬렁댄다/ 내 유년과 닮았다/ 배고픈 날 방앗간을 기웃대던 시절,/ 저 풍광은 기억 속 밀밭이다/ 그곳에는 부풀어 오르는 질량이 있었다// 철야근무를 마치고 빈 도시락 통 철렁이며/ 모퉁이 돌아가면/ 언제나 푸르게 넘실대던 꿈이 있었고/ 그럴 때 마다 어김없이/ 파릇한 향기보다 먼저 허기가 밀려왔다// 자전거 빵 배달원의 꽁무니를 따라 돌던/ 온종일의 내가 있었고,// 식솔들 앞세우고 밀고 가는 리어카 위/ 밀가루 포대에/ 아버지는 발효되는 듯/ 늘 허리를 주무르셨다// 나 이제 그 나이 되어/ 빵집 앞에 배불뚝이로 서 있다//

커피 / 박일만
그리움은 쓴가/ 핏빛이어야 하는가/ 혀끝을 굴리며 생각한다// 어느 생의 한이 무덤가로 뻗쳐/ 어둠 속에서 피어났다/ 생혈을 닮았다// 떠난 사람보다/ 남겨진 사람의 눈물 맛이고/ 눈물이 떨어져 땅속을 물들인 죄의 빛이다// 맛이 쓰고/ 잠도 오지 않는 연유// 밤낮으로 그리워한 맛이다/ 낮밤으로 그리워한 빛깔이다//

계단 / 박일만
이 발밑에 단단한 짐승은 무엇인가/ 꼿꼿한 등뼈를 자랑하며 앞발을 치켜들고/ 부동자세의 근본을 마스터한 짐승/ 누군가는 이 길을 따라 출세에 오르고/ 누군가는 이곳을 거쳐 퇴장도 했겠지/ 땅 속에 아랫도리를 깊이 박고 포효하는 짐승/ 수많은 발들이 육중하게 오가도/ 끄떡 않는 선천성,/ 힘과 근육이 적나라한 태생이다/ 난간을 레일 삼아 층층이 달려가는 고속열차다/ 시간도 여기서는 힘을 보태며/ 생의 속도를 가늠해 보기도 한다/ 야성의 본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견고한 짐승/ 멈춤을 모르는, 질주에 익숙한 근성/ 한때 나에게도 저런 유전자가 있었던가/ 이곳에 기대어 상승의 욕망을 키운 적 있었던가/ 등뼈를 타고 오르내리는 식솔들의 눈총을 맞으며/ 숨차게 페달을 밟기도 했겠지/ 들숨 날숨 없이 건물 한 곳을 덥석 물고/ 초원을 회상하며 돌진하는 태세의 외로운 짐승/ 천상과 지하세계를 수없이 넘나든다, 짐승//

모퉁이 수선집 / 박일만
골목은 늘 객관적이다/ 희망을 켜 놓은 듯 백열등 밝혀 둔 좁은 공간/ 의족을 수선실 바깥으로 길게 걸쳐놓았다/ 바닥까지 검정물 든 손을 탁,탁 치며, 이제 그만 해야죠/ 그만둬야죠, 습관처럼 중얼거린다 초로의 사내/ 십수년인 듯 굵어진 손마디가 고집스럽다/ 피곤한 구두를 벗어 수선을 맡기는 저녁 무렵/ 내 구두는 이제 항해를 끝낸 폐선처럼 어둡다/ 좀처럼 광택이 살아나지 못할 거죽으로 찌그러져,/ 능동적이지 못한 내 성품을 비웃듯 손 빠른 사내/ 해진 일상을 기우고 봉긋한 광택을 생산한다/ 허리춤을 꾸욱 찌르고 견고한 실로 혈관을 심고/ 벌겋게 온몸을 지지고 닦아 환하게 빛을 복사해 낸다/ 자, 다시 한번 가면을 쓰고 살아 보세요/ 그래도 세상은 적당히 가리면 살만 하잖아요/ 손에 친친 광목을 감은 사내의 손놀림에 취해/ 왁스에 취해 밖을 바라본다/ 이 거리에서 오래오래 부대끼며 살아온 나/ 그만 둬야지, 이제 정말 쉬어야지 하면서도/ 끝내 꽃피우고 싶은 무화과나무가 있는 거리 모퉁이/ 천천히 아주 객관적으로 어두워 간다//

 

득음 / 박일만
얼마냐는 물음에 대꾸 없다/ 청계사 가는 산문 주차장 한쪽/ 낡은 트럭 짐칸에 앉은 국화빵 여자/ 또다시 가격을 물어도 미소만 보내온다/ 볼 붉은 꽃잎이 내 가슴을 파고든다/ 오천 원 지폐를 내밀자 그제서야 손으로 가리킨다/ ‘한 봉지에 이천 원’/ 천장에 달린 가격표/ 비로소 알아차리고 셈이 건네진다/ 구구구,/ 산 쪽에서 우는 비둘기 소리, 듣는지 마는지/ 묵언수행도 저처럼 슬퍼보이진 않을 것이다/ 한 생을 선천성 침묵으로 태어나/ 멀찌감치 한구석 빌려 살아가고 있는/ 손짓, 몸짓만으로 세상을 읽는/ 저렇게 말없이 통하는 절 한 채도 있는데/ 쉿!/ 봄산이 꿈틀대며 기지개 켜는 소리 들린다//

아웃렛 / 박일만
과실들 앞 다투어 출생지를 등에 붙였다/ 제각기 태생을 할인하는 몸으로 서 있다/ 씨앗을 뿌리고/ 물동이에 오줌을 받아 거름을 내며/ 농사일을 하시던 어머니/ 젖 냄새 오줌냄새 풍겨오던 등,/ 업어 키우던 등을 헐어/ 여섯 자식에게 나눠주셨다/ 튼튼하지 못한 과실로/ 도회지에서 박리다매로 살아가는/ 자식들에게 골고루 내어주셨다//

망막수술 / 박일만
수십 년을 혹사시켰으니/ 당연한 처사겠다/ 건조하고 까칠한 속내를 보이더니/ 종내는 파업을 시도했다/ 제 몸을 가르고 피를 토하더니/ 딱! 문을 닫아 걸은 왼쪽 눈/ 좌이지만/ 좌편향도 우편향도 가리지 않고/ 기울기를 조절해주던 눈/ 언제나 동등하게 나를 이끌던 네가/ 조용히 직장을 폐쇄했다/ 문 닫고 마음 닫은 속 깊은 불만/ 예고 없이 나를 안개 속으로 밀어 넣은 저항심,/ 노력봉사에 임금체불까지 겹쳤으니/ 나로서는 함구무언이다/ 속절없이 저물었으니 시름만 깊어진다/ 제 스스로 할복하고 생피를 뿌리며/ 파업을 시도한 왼쪽 눈,/ 균형을 잃은 오른쪽 눈이 전력투구한다/ 그도 아프다//

출가 / 박일만
일주문까지 따라온 내외가/ 더 이상 들지 못하고/ 머리 파랗게 깎은 아들을 마주한다// 여기만 넘으면 이제 피안이다// 끝인사가 포옹 대신 합장/ 지상에서 마지막으로 불러보는 아들의 이름/ 차마 말하지 못하고/ 얼굴 한 번 더 익히려고 애써 고개를 든다// 뒤를 돌아보면 이제는 지상에 남는 건/ 무수한 연민뿐// 일주문 앞/ 지상에서 영원으로 가는 길목//

티눈 / 박일만
균형을 거부하며 수평을 포기한다/ 중심을 찾아 헤매던 세포가/ 내 발바닥에 와서/ 생을 통째로 뒤뚱거리게 한다/ 백발이 물드는 나이 탓도 있겠으나/ 아직 둘러보아야 할 산천이 많은데/ 느닷없이 찾아와 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댄다/ 가던 길이 자꾸 휘청거릴 때/ 가랑이 사이로 바람도 많이 드나든다/ 딛을 때마다 바닥에 온통 통증을 깔면서/ 서둘지 말라고/ 아래를 보고 살라고/ 발걸음을 더디게 하는,/ 걸음걸음마다 뼛속 깊이 송곳을 박으며/ 한 쪽 발이 수상하다/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 나이 어린 애인처럼/ 기세가 완곡하다/ 작은 알맹이 하나에도 몸을 절뚝여야 하는/ 나의 생을 향해 쉬어가라고/ 자꾸만 오는 길 가는 길을 붙든다//

울란바토르의 소매치기 / 박일만
뻗어 오는 손길이 서늘하다/ 돈 냄새를 향해/ 예리한 눈빛을 감추고 태연하다/ 닮은꼴의 멋쩍은 미소만 교차했으나/ 다가오는 동안 너보다 내 숨이 더 먹먹했다// 눈과 눈이 지구를 반 바퀴쯤 돌아 마주치는 순간/ 너는 그냥 눈매와 살갗이 닮았다고 주장할 것이나/ 속마음을 들킨 지갑이 외려 짧은 역사를 펼쳤다// 그래,/ 네가 정작 훔치고 싶은 건 지폐가 아니라/ 몸속에 흐르는 따뜻한 피였는지 몰라/ 긴 시간을 에돌아 맞닥뜨린 한 물길인지 몰라// 순간, 내가 지닌 지폐의 냄새보다/ 몸에 묻은 돈 냄새가 더 부끄러웠다// 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너였고/ 너는 나였는지 몰라//

겨울 공허 / 박일만
나조차 바람일수 밖에 없는 쓸쓸한 시간의 중심/ 바람은 겨울산 자락을 울리고 나목위에 쌓인 눈이/ 간간히 벼랑아래로 아스라히 스러져 눕는다/ 무엇이었을까/ 바람처럼 마음을 울리고 사라진 사랑의 슬픈 몸매는/ 사랑을,떠나간 사랑을 추억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때로는 쓸데 없는 욕심일 지라도/ 가슴 반쪽에 늘 남아 있어야 하는/ 사랑의 영상은 모두가/ 눈발처럼 날리는 눈물이다/ 그 알수 없는 눈물속에서 피어오르는/ 누군가를 향한 무언의 증오와/ 하늘을 올려다 보는 마음 부끄러운 분노는/ 나의 못난 청춘이라 이름 부르자/ 창을 열면 산맥 가까운 곳엔 얼굴 고운이의 미소인양/ 흰눈이 쌓여 있는데,가슴속 고여 있는/ 사랑의 미소는 보이지 않는다/ 이 겨울/ 눈덮힌 세상이 한순간으로 정지된 듯한/ 적막함 속에서/ 우리의 옛 얘기는 작은 숨소리도 없이/ 자꾸만 자꾸만 망각속으로 떠나고 있다/ 사랑한다는 것, 그리고 그리움의 아픔은/ 사랑의 완성을 희망하기엔/ 조금은 나약하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가슴죄며 사랑한다는 것은/ 비록 쓸쓸한 종말이 예고될 지언정/ 얼마나, 그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사랑할수 있는 곳으로 도피하고 세상 사는 일/ 너무도 험난하여 눈감아 보려는 의지도/ 해변가득 밀려와 부서지는 파도의 형상처럼/ 차거운 담벼락에 바람으로 부서지는 추억이 된 지금/ 어지럽게 내 정신과 같이 혼미한 눈날림을 응시하고 있다/ 맨처음 사랑과 좋아함을 구별해 놓은/ 얼굴처연한 마음의 소유자는 누구일까/ 사랑한다는 것이 왜 그다음은 고통이어야 하는지/ 아무도 알수 없다,알수 없을 것이다/ 나 조차 바람일수 밖에 없는 쓸쓸함의 계절/ 바람은 창밖에서 울고 산자락도 저대로 울고 있다//

빵집 앞 / 박일만
풍겨오는 빵 냄새, 개 한 마리 어슬렁댄다/ 내 유년과 닮았다/ 배고픈 날 방앗간을 기웃대던 시절,/ 저 풍광은 기억 속 밀밭이다// 철야 근무를 마치고 빈 도락 통 철렁이며/ 모퉁이 돌아가면/ 언제나 푸르게 넘실대던 꿈이 있었고/ 그럴 때마다 어김없이/ 파릇한 향기보다 먼저 허기가 밀려왔다// 자전거 빵 배달원의 꽁무니를 따라 돌던/ 온종일의 내가 있었고// 식솔들 앞세우고 밀고 가는 리어카 위/ 밀가루 포대에/ 아버지는 발효되는 듯/ 늘 허리를 주무르셨다// 나 이제 그 나이 되어/ 빵집 앞에 배불뚝이로 서 있다.//

발파명령, 이후 / 박일만
자궁을 들어내고 병실로 온 누님은/ 여러 날 째 짐승처럼 울었다/ 단 한 번도 허투루 살지 않은/ 강변 복사꽃 살구꽃 순하던 몸에/ 갈퀴를 들이대어 죄다 잘라 내었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주검처럼 드러누운 누님에게 해준 일이라곤/ 가랑이 사이로 흘러내리는/ 진물을 닦아주는 일 뿐/ 침묵하고 외면하고/ 더 이상 피가 돌지 않는 아랫도리를/ 더 이상 물길이 막힌 속살을/ 네 갈래로 찢으며 무시로 드나들던 중장비들/ 피 묻은 손을 몰래 씻고 있었다/ 수평을 깎아 수직을 세우는 나라/ 강가 들풀에게 붕대를 친친 감아 놓은 나라/ 타고난 토건 유전자로도 모자라/ 강 따라 물 따라 시멘트를 발라 놓은/ 참담하고 미안하고/ 자궁을 긁어내고 병실로 온 누님은/ 내내 짐승처럼/ 울음 덩어리를 뱉고 있었다//

사랑 / 박일만
사랑의 반죽만으로 익힌 콘크리트는/ 푸석 거린다/ 미움의 돌멩이가 간간이 섞인 사랑이/ 더 단단하다//

이모 ㅡ2020년 3월19일(목)중부일보 / 박일만
돈 벌러 외지로 간 남편이 행불처리 되자/ 호적에 빨간 줄 그어놓고 사셨네// 노점상으로 키운 자식들 홀씨처럼 흩어지고/ 이 집 저 집 전전하셨네// 궂은 날은 좌판 접고 화투패 떼가며/ 일진도 사납게 홀로 사신 단칸방/ 계약기간 끝나 더 변두리로 이사 가시네// 죽어서 이월 새나 될까/ 죽어서 구월 국화나 될까// 화투패는 궂은 날을 잘도 맞히는데/ 단출한 짐마저도 업이라 무겁다 하시네/ 다 버리고 십이월 비나 될까 하시네// 해묵은 장롱 들어내자 벽에 핀 곰팡이가/ 정 떼기 아쉽다고 냄새를 묻혀주네// 1톤도 안 되는 세간을 싣고 보니/ 짐 칸 반쪽은 폐허가 다 차지했네.//

늙은 마라토너의 기록 / 박일만
출발도 도착도 아닌/ 지금은 철저히 혼자다/ 늘어가는 나잇살로 가능성을 점쳐 보지만/ 신기록은 요원하다/ 재기를 위해 목숨을 건 몸만들기/ 모자 눌러쓰고, 운동화 끈 동여매고/ 새벽에 출발, 이슥하여 돌아온다/ 온몸에 어둠을 칠하고 귀가하는 나이/ 막판까지 뛰어야 한다는 다짐만 늘어간다/ 한때의 영광은 묻혀진지 오래/ 팬들의 갈채도 이제는 기억조차 하얗다/ 어떻게든 맞바람을 깨고 기록갱신 해야 하는/ 몸은 점점 늘어지고/ 아득한 기록이 앞서가며 나를 따돌린다/ 달려본 사람만이 아는 저승같은 골인지점/ 악천후를 뚫고, 달리는 것만이 살길이라는/ 좌우명에 땀 절은 짧은 팬츠로 왔다/ 단 몇 초의 기록 단축도 억겁과의 싸움이다/ 반환점을 돌아도 한참을 지나 온/ 저무는 길은 또 가파르고/ 아침부터 뛰어 여기에 당도했으나/ 변변한 기록하나 건진 게 없는 나이/ 생을 바쳐 달려온 두 다리만 기진할 뿐,//

초행길* / 박일만
잘 못 살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잘 죽고 싶다고 했다/ - 살아 가 본 길도 길이거니와/ 죽어 가는 길도 초행길이다 -/ 불현듯 몸속으로 날아 든 최후의 통첩/ 정말 반듯하게 죽고 싶다고 했다/ 생의 보따리를 싸라는 신의 호명, 의사의 전언/ 이승의 외출을 마치고 가는 외통수 길에/ 홀로 마음 밝혀 앞세우셨다/ 육신은 무너지는데, 정신은 외려 날이 서는데/ 완곡한 덩어리만 커져갔으니/ 이내 다가올 긴 여정을 준비하셨다/ 서둘러 하던 일을 파하고/ 이승의 그리운 끈을 거둬들이고/ 허깨비처럼 꺼져가는 숨결에 근근이 불지펴가며/ 인연의 꼬리를 모두 잘라 작별을 만드셨다/ 되돌아보면 산다는 건 한 편의 곡절을 낳는 일/ 저어함 없이 스스로를 수습해 떠나는 일/ 그래도 참 잘 살았다고 생각했다 백부께서는/ 쭉정이만 남아가는 왜소한 몸으로/ 삶의 무거운 끝을 온전히 끌어안고/ 아름다운 기억들도 함께 묻어 달라,/ 고 하셨다//
* 초행길 : 살아서 혹은 죽어서 처음 가는 길

경전 / 박일만
낚시꾼이 수면을 읽는다/ 물속을 종일 해독하는 중이다/ 페이지를 수 없이 넘겨도/ 바닥에 깔린 진리는 좀처럼 깨달을 수 없어/ 번번이 물고기만 오리무중이다/ 물빛이 눈부신 건 그 아래에/ 무수히 많은 표리가 있기 때문일 것인데/ 무엇 하나 세상에 능통할 혜안도 없고/ 숨겨져 있는 문장 하나 제대로 찾아내지 못한다/ 얼마나 읽어내야 할 삶인지/ 이 나이 먹도록 한 줄도 깨달은 게 없다/ 물속에서 허우적대며 잡고기마저 놓치는/ 낭패감만 안고 여기까지 흘러왔다/ 응시하는 세상의 물빛 눈부셔! 눈부셔!/ 그 마저도 제대로 섭렵하지 못하고/ 온 생을/ 겉표지만 해독하고 있을 뿐인/ 나는,//

라일락 / 박일만
새벽,/ 아파트 입구를 막 나서려다 화들짝 놀랐다/ 아저씨 저 좀 잠깐 보세요/ 희미한 빛 속에서 향수냄새 짙게 풍기며/ 보랏빛 머리로 염색한 여자가 나를 덥석 붙들었다/ 질겁하며 달아나려는데/ 발걸음이 영 떼어지지 않는 거였다/ 어느새 나는 향기에 젖고 빛깔에 눈멀어/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헛발질만 해댔다/ 가끔 뒤태를 훔쳐보았던 이웃집 여자/ 지난밤 남편 몰래 치장하고 나가/ 술집과 노래방을 전전하다 늦어 혼쭐났을 거야/ 된통 매 맞아 얼굴이 푸르딩딩 하고/ 맨발로 쫓겨나 화단에서서 밤새웠을 거야/ 애절한 표정으로 앞을 가로막는 여자, 농염한 여자/ 측은한 생각에 한참을 붙들렸다 정신을 차리니/ 해는 중천에 와 있고/ 계절이 사방에 온화한 융단을 깔아 놓는 거였다/ 순간, 여자는 사라지고 꽃향기만 나를 감염시켰다/ 일장춘몽이 따로 없는,/ 봄, 봄은 병이고 항생제다//

소머리 국밥 / 박일만
젖이 잘 돈다고 하여/ 아들을 낳고 아내가/ 미역국 대신 찾은 뽀얀 국물 소머리 국밥/ 그 덕인지 아들은 자라면서/ 머리로 들이받고 뒷발질도 해 가면서 장정이 됐는데/ 사실, 때마다 아들이 먹은 건 소머리가 아니었다/ 엄마 젖 보다 태반이 소젖으로 빚은 분유였고/ 이유식도 정작 소젖으로 발효시킨 우유였고/ 크면서도, 머리 빼고/ 소의 각종 부위로 가공한 먹거리뿐이었다/ 하필 몸통 대신 머리냐고 반문하겠지만/ 그렇다고 소머리 속 뇌수를 먹인 것도 아닌데/ 다 큰 녀석은/ 지금도 몸집을 불리려고 우유를 입에 달고 사는데/ 모유를 먹기는 먹었는지 흔적도 없는데/ 분유는 알다시피 서양식 모유이고/ 진짜 모유가 모자라면 분유를 먹였는데/ 이를 먹고 국제적으로 자란 아들 녀석이/ 소머리 국밥의 의미를 알기나 할는지/ 소머리 국밥을 먹은 엄마 젖의 영향과/ 소젖으로 가공한 온갖 것들의 상관관계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엄마 젖 대신 소의 온갖 것들을 먹는 아들들의 나라/ 미국산 쇠고기나/ 호주산 분유나/ 머리고기나 우유나 치즈나/ 대한민국에서는 그게 그것일 뿐//

투잡 / 박일만
가세가 기울자 아내가 떠났다/ 쫓겨 다니기 일쑤인 노점상/ 공치는 날 많아 억장이 무너져갔다/ 일용직, 트럭운전까지 거쳤는데/ 빚으로 시작한 장사마저 넘어갔다/ 공사판에서 얻은 고질병, 쌓여가는 약봉지/ 공과금 독촉장 수북한 우편함/ 집주인의 잦은 호출에 철렁인다/ 쪼그라드는 심장,/ 잡초처럼 자라나는 아이들/ 등 떠밀어 학교로 보내고/ 밤낮없이 뛰어도 구멍만 커져가는 형편/ 거친 일로 손과 팔에 흉터만 늘어갔다/ 틈틈이 야근을 하고 전단지를 돌리고/ 적빈한 몸 추스려 나선 대리운전/ 낭떠러지에서 붙잡은 운전대마저 비틀댔다/ 소속도 없이 단신으로 발품팔고 나섰으나/ 허탕만 치는 저 사내, 중년 가장/ 헐렁한 거리에서 허름하게 호객을,//

봄꽃 / 박일만
만나자마자 몸부터 섞자는 꽃이 있었다/ 계절도 풀리지 않아 좀 이른 것 아니냐는/ 성급한 것 아니냐는/ 나의 항거에도 무차별 향기로 파고드는/ 바야흐로/ 여몄던 옷 단추 풀리고 물 차오르는 때/ 여기저기 새들을 호명하며 피는 꽃들이/ 대지를 녹이고, 사지를 한껏 벌려/ 한번 앉아 보라고/ 누워서 가슴에 귀를 대보라고 재촉하는/ 봄꽃 이었다/ 나는 좀 망설였으나 이내 익숙해졌다/ 서로에게 전염돼가는 계절은 속사포 같아서/ 몸에 깃들 겨를 없이 꽃 지고 잎 돋고 하였다/ 세상 모든 사람의 애인인 꽃/ 지상의 젖꼭지를 살짝 깨물며 터지는/ 꽃은 늘 첫 마음으로 피었다/ 몸피 말랑말랑한 봄꽃//

육십령 1 / 박일만
큰 산과 작은 산이 어깨 겯고/ 몸을 바투 섞고 사는/ 덕유와 백운 사이/ 고라니와 산토끼가 주인이다// 옛날에는 호랑이와 산적들이/ 이쪽과 산 너머 고을을 가로막고/ 세금을 톡톡히 챙겨 갔다는, 그래서/ 육십 명이 손잡고 넘었다는// 이무기가 승천하듯/ 구불구불한 몸으로 오르는 등성이에서/ 뻐꾸기가 마을의 적막을 깬다// 봄에는 안개에 눈썹이 젖고/ 여름에는 굵은 빗줄기에 온몸 매맞고/ 가을에는 찬바람이 나무의 뺨을 후려쳐/ 벌겋게 물들게 하고/ 겨울에는 하얀 융단을 깔아 길을 내주는// 삶이라는 것이/ 가파른 고갯길을 수없이 오가는 거라며/ 인간들의 태생을 넌지시 일러준다//

육십령 2 / 박일만
겨울이 막 떠난 논밭에다 들불을 지피며/ 자운영 꽃이 피었지/ 산속 토기들도 배가 고프던 시절/ 분홍빛 튀밥이 지천으로 터지고/ 꽃밭에 누워 나는 시장기를 몰래 달래곤 했었지/ 자운영이 한창일 무렵이면/ 게으른 소를 앞세워/ 남의 논 써레질 품팔이를 하시던 아버지 곁에서/ 나는 종아리에 붙은 거머리에게/ 피를 나눠주곤 했었지/ 파랗게 비원진 하늘에서 공중돌기를 하며/ 강남제비가 돌아오는 봄날이면/ 자운영! 제 몸을 꺾어/ 다디단 향기를 땅속 깊이 묻곤 했었지//

육십령 4 / 박일만
사람 없는 마을에서 개들이 짖습니다/ 몇 안 되는 사람들이 들일 나가고 나면/ 주인인 척 개들은 어깨에 힘이 들어가서/ 낯선 이가 들면 목이 터져라 고자질 합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무시해도 막무가내입니다// 마당 한켠에 낮게 줄 쳐놓은 꽃밭에는/ 꽃 대신 잡초가 주인입니다/ 향기도 없는 녀석들이 무리 지어/ 향기를 날리는 척 몸을 흔들어대지만/ 잡초는 잡초일 뿐 어림도 없습니다// 사람 따라 도회지로 나가서/ 고양이가 사라진 빈집 마루 밑에서는/ 쥐 떼들이 해마다 운동회를 하고/ 곡식이 모자란다며 땅굴을 파댑니다// 나는 고갯길을 멀찌감치 바라보며/ 그래도 너희들이 있어 심심치 않다고/ 그래도 너희들과 더불어 산다고/ 슬쩍 눈감아 줍니다// 긴듯했던 고갯길이/ 내려올 때는 짧아 보이는/ 그런 시절입니다//

육십령 5 / 박일만
골목을 몇 바퀴 돌아도 적막하다/ 빈집은 스러져 가는데 마당에 꽃이 폈다/ 작년에 돌아가신 이모님이 이승을 떠도시는지/ 생시에 심어놓은 꽃들만 마당에 가득하다/ 봉숭아꽃이 마지막 피를 토하고/ 꽃무릇이 손톱으로 하늘을 할퀸다/ 남겨진 사람들의 모습은 흑백이다//

육십령 여자 ㅡ육십령 13 / 박일만
하루에 고작 차 몇 대가 붕붕거리는/ 육십령 날망에서 구름 조각 팔며 산다// 사람 기다리는 일에는/ 차 한 잔만큼 찬란한 게 없다// 갑장인 나랑 친구 먹자고/ 대뜸 악수를 청하는 여자// 기다리는 건 손님이 아니라/ 십수 년 전 고개를 넘어간 구름이란다// 비 내리고 선산 살갗이 벌겋게 벗겨지던 날/ 밥 벌러 도회지로 떠나간 사람// 마을에 사람은 줄고, 땅값은 뛰고/ 사이비 단체가 마을 땅을 모조리 사들였다는// 그래서/ 터를 잃고 고개를 비척비척 넘어간 사람/ 산 그림자를 닮아 우직했던 사람 기다린단다// 육십령 고개에 군청 땅 임대받아/ 휴게실 열고/ 구름 조각 얹어 커피 파는//

꽃거울 ㅡ육십령 15 / 박일만
산에 피는 꽃이나 들에 피는 꽃이나/ 환하다/ 저마다 피어나 향기를 뿜어댄다/ 가시 돋친 나무도 꽃을 피우면/ 가시는 더 이상 가시가 아니다/ 꽃의 파수꾼이다/ 얼어붙은 땅속의 묵은 때를 털어내고/ 폭설에 꺾인 모가지의 상처를 쓰다듬으며/ 제 속에 씨앗을 품으며 핀다/ 산비탈과 벼랑에서 아슬아슬하게 버틴 계절이/ 저렇게 화사한 몸으로 왔다/ 꽃들은 한 시절에 피어나도/ 꽃들은 서로 얼굴을 다투지 않는다/ 산꽃은 산꽃대로/ 들꽃은 들꽃대로/ 옆에 꽃을 흉내내지 않는다/ 지천으로 피어난다 해도 다 생이 다른데/ 사람들만이 제 모습을 남에게 비추어/ 초라하게 피었다 진다//

귀울음 ㅡ육십령 18 / 박일만
누군가 울고 있다/ 밤낮없이 소리치며// 배가 고프다고도 하고/ 외롭다고도 하고/ 보고 싶다고도 한다// 도회지에 나가 살던/ 어둡고 막막했던 시절부터/ 무료로 세 들어 살며/ 나를 온통 지배한다// 잠도 없이 매양 울어대는 그이// 어딘가 모르게 허술한 생을 붙들고/ 수십 년째 축구를 찾아 소리치고 있다// 노동은 위대하다는 정부의 구호에 따라/ 노동밖에 길이 보이지 않던 유년시절/ 공장 기계 소리와 함께 내 머리 속에 들어온/ 그가 아직도 울고 있다// 고항 집에 돌아와 누워도/ 귓속에서 내 유년이/ 서러워하고 있다//

띠 ㅡ육십령 19 / 박일만
내 생년은 개띠다/ 베이비 붐 세대 중 대표적인 띠다/ 직장에 출근하면 영락없이 개가 되어/ 호적대로 살아간다/ 하지만 그것은 오류이다/ 까막눈이던 아버지가 마을 이장에게 간청하여/ 여섯 자식을 한꺼번에 출생신고를 한 덕분이다/ 아니 때문이다/ 나는 돼지인데 그때 개가 된 것이다/ 일자무식에 목구멍이 포도청이던 시절/ 오죽하면 대리 신고를 했으랴 싶지만/ 내 마음 속에는 늘 돼지가 거주했다/ 직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개로 살지만/ 집에 오면 부모님의 귀여은 돼지 새끼다/ 사는 게 그렇듯 우리 아버지/ 육이오동란 후유증으로 뒤죽박죽 사시다가/ 한 울타리 내에 가두어놓고 사시다가 문득,/ 학교 보낼 즈음 육 남매를 호적에 올리시면서/ 얻어낸 시대의 산물인 것이다/ 오류투성이인 내 삶과 생년이 뒤바뀐 이 사건은/ 숫제 대한민국의 역사적 오류이다//

봉합 ㅡ육십령 24 / 박일만
어머니는 꿰매신다/ 신접살림으로 장만한 이불을 꿰매고/ 강산이 여러 번 바뀐 옷을 꿰매고/ 식구들 해진 양말을 꿰매고/ 속곳을 꿰매고/ 깨진 조롱박 바가지를 꿰매고/ 자식들이 벌여놓은 사건을 꿰매고/ 잔소리하는 아버지 입을 꿰매고/ 터져 나오는 울분을 꿰매고/ 문틈으로 새어 나가는 살림 밑천을 꿰매고/ 행여 금갈세라/ 나이 든 자식들의 우애를 꿰매고…// 늘/ 꿰매는 삶이 주제인/ 어머니//

오디 ―육십령 29 / 박일만
여름이 오면 똥이 검었다// 밥이 귀하던 시절/ 온 동네 산과 들을 돌아다니며/ 칡이며 잔대 뿌리 캐 간식으로 삼았다// 특히나/ 오돌개, 라고도 불리던 오디가/ 여름이 오면 주식이 되었다// 나뭇가지가 찢어지도록 따먹었다/ 배고프지 않았다// 가지를 찢고 주인을 피해 달아나다/ 똥이 마려우면/ 바위틈에 까맣게 똥을 싸놓고/ 냇가에서 뒷물을 했다// 오디 먹고 싼 똥 속 씨앗들/ 씨앗들은 다시 싹이 돋아 뽕나무가 되고/ 누에가 되고 돈이 되고/ 귀한 밥이 되던 시절// 이제는 돈다발을 함께 묶어서 버려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천한 열매가 되었다//

수구초심 ㅡ육십령 34 / 박일만
수십 년 만에 만난/ 깨복쟁이 친구/ 여느 친구들보다 살갗이 검었다/ 일찌감치 빌딩숲에서 자란 나는/ 희멀건 색깔이지만 그는 건장한 구릿빛,/ 애써 살아오는 동안/ 키우는 소가 친척보다 많다는 친구는/ 소처럼 눈망울이 순했다/ 나이 들도록 줄곧 산골에서 살았다는 친구/ 아직도 간드레 불 밝혀 고동을 잡는다는/ 그의 가슴에는/ 도회지 휘황한 불빛이 아니라/ 개울에서 피어나는 반딧불이가 모여 살았다/ 소 값을 소 끔이라 부르는 옛 친구/ 사투리를 표준어로 살아온 그가/ 나 대신/ 가난한 고향을 살아내고 있었다//

재회 ㅡ육십령 37 / 박일만
수십 가구였던 마을이/ 하나둘 비어갈 즈음에/ 부랑아처럼 고향으로 돌아온 사내// 도인 같은 모습으로 혼자 살던 어느 날/ 꿈인 듯/ 꽃잎 하나 찾아와 피붙이라 했다네// 날품으로 살거나/ 삐기가 되어 밤을 휘젓던 시절에/ 마음보다 몸이 앞섰던 사랑/ 몸보다 마음으로 이루지 못했던 사랑// 타관객지에서 가진 것 없어/ 차마 피우지 못하고 쉬이 져야만 했던 사랑// 그 사연 하나 품고 환갑이 다 되도록/ 떠돌이로 살아온 그에게// 잊고 살았는데/ 삼십 년 만에 불현듯 찾아온 꽃은 또/ 꽃잎 하나 낳고도 여전히 고왔다네// 빈집이 수십 가구인 마을이/ 꽃 사태로 향기가넘쳐나던/ 일대 사건이었다네//

사과밭 ㅡ육십령 44 / 박일만
구황작물을 찾던 군청에서/ 감자나 고구마 대신 신품종을 들였다/ 먹거리를 혁신하겠다던 군수님/ 공약사항이 적중했다/ 사람들은 금맥을 더듬듯/ 전답을 갈아엎고 사과나무 심었다/ 대를 이어 땅을 넘겨 준 조상님들께/ 죄송해하지 않았다/ 노다지를 캐리라는 생각에 은덕을 잊었다/ 한 해, 두 해/ 갈아엎어지는 전답이 늘어나고/ 봄 되면 꽃피고 가을되면 열매 맺었다/ 온 마을이 사과꽃향기에 취해갔다/ 사람들이 사과 빛깔에 물들어 갔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가/ 얼굴이 온통 붉게 익도록 농사일을 해도/ 흘린 땀 대비 수확은 뻔했다/ 능금 빛 공약사항에/ 뼈 빠지게 투자한 마무리였다//

개망초꽃 ㅡ육십령45 / 박일만
작다고/ 뼈대가 없겠는가// 번식력과 결집하는 힘을 보라// 혼자서는 연약할 것 같지만/ 저렇게 마음 모으면/ 저렇게 몸 묶어 연대를 이루면/ 산야를 하얗게 불태울 수 있다.// 크고 화려한 것들 제칠 수 있다.// 사람들이 제 아무리 홀대해도/ 돌아서면 배반을 밥 먹듯 해도/ 들판을 모질게 지키고 서서/ 세상을 향해/ 화해*를 청하고 있지 않은가// 여리다고/ 피마저 뜨겁지 않다/ 하겠는가//
* 개망초 꽃말: 화해.

당산나무 ㅡ육십령 46 / 박일만
한창 클 나이에 질통을 많이 져/ 등이 굽은 나처럼/ 저 당산나무 등도 굽어/ 집집을 내려다보며,/ 마을을 향해 귀 기울이고 산다/ 그 요란하던 때까치 소리도/ 밤 부엉이 소리도 다 듣고 살던/ 젊었던 몸도/ 가지가 하나, 둘 부러져 뼈대만 앙상하다/ 도회지를 떠돌다가/ 뒤늦게 여기까지 온/ 내 몸도 이제 뼈만 남겠지//

소떼 ㅡ육십령 56 / 박일만

인구 이 만에 소가 사 만이면/ 짐작이 가고도 남겠다// 사람보다 소가 많은 군청 살림 뻔하다// 이 소들이 동시에 발길질해댄다면/ 산골은 물론 읍내까지 고강도 지진 나겠다// 육십령을 넘어 오일장 갈 대 가끔 등도 빌려 주고/ 앞서 가며 달구지를 끌어주던 누렁이들// 대대로 저놈들은 뼈대 굵은 족속이었을 거다// 이제 소는 많아도 용을 쓰며 논밭을 가는 놈들은 없고/ 살찌워 도축장으로 팔려 가는 녀석들만 있다// 사람보다 우대받는 놈들은 큰 눈을 껌벅거리며// 죽는 줄도 모르고 몸집을 불린다// 인구는 줄고 소는 늘어/ 이제는 군청 사림을 소들이 좌지우지하는 시대이다//

토막 돌담 ㅡ육십령 58 / 박일만
사람들이 떠나자 돌담도 사라졌다// 바람이 드나들며/ 집 안팎의 소식을 제일 먼저 전하던 돌담/ 다람쥐가 식솔들 식량을 숨겨두던 돌담/ 어두운 밤에도 길잡이가 되어주던 돌담이/ 토막만 남기고 무너져갔다// 돌담 밑을 놀이터 삼아 당 따먹기를 하며,/ 그늘에서 우리는 잘도 자랐다// 민들레도 몇 포기 끌어안아주던 돌담/ 잘못 뿌리내린 패랭이꽃도 품어서 키웠던 돌담/ 층층이 몸을 포개고 오순도슨 옛이야기도 들려주던 돌담// 오랜 세월을 버티다가/ 끝나는 몸 허물고 어디론가 사라져갔다// 온 동네를 헤집고 놀다 사고를 치고/ 혼쭐날까 집으로 들지 못하던 때에도/ 어둠을 배경 삼아 동그라미를 그리며 함께 놀아주던 돌담/ 반듯하진 않으나 품이 넓어 기대기 좋았다// 모두 떠나고 토막만 남은 돌담이/ 더 이상 무너지지 않으려고/ 담쟁이덩굴과 등맹을 맺고 있다//

살어리랏다 ㅡ육십령 60 / 박일만
세 살 때/ 경기를 앓다 죽은/ 남동생이 묻힌 산 아래에 집터를 정하고/ 멀리 육십령 넘어가는 구름에/ 눈길을 얹는다// 이 터가/ 내 무덤이 될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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