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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재배(再拜)의 이유 / 최민자

부흐고비 2022. 2. 4. 08:30

졸업반이 되자 세상의 모든 직장인들이 다 위대해 보였다. 이미 견고하게 짜여 버린 틀 안에 내가 비집고 들어설 틈은 없어 보였다. 큰 톱니, 작은 톱니, 볼트와 너트로 맞물려 일사불란하게 바퀴를 굴리고 있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산달이 가까워지자 아이 난 여자들이 다 위대해 보였다. 어떤 녀석이 나올까. 얼마나 아플까. 손가락 발가락은 다 정상일까…. 기쁨과 설렘보다 불안과 걱정이 앞섰다. 생명을 출산하는 위대한 과업을 손바닥 뒤집듯 몇 번씩 해내고도 호들갑을 떨지도, 공치사를 하지도 않는 평범한 아낙들이 대단해 보였다.

운전면허시험을 앞두고는 운전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정말로 부러웠다. 필기시험은 한 개밖에 안 틀리고도 몸치에 기계치에 겁까지 많아 실기(實技)를 다섯 번이나 실기(失機)하고 말았다. 일생 처음 낙방의 쓴잔을 연거푸 몇 번이나 마시게 된 나는 누가 슬쩍 면허증만 쥐어주면 악마와도 뒷거래를 할 것 같았다.

이렁저렁 한세상을 살아내다 보니 세상의 하찮은 목숨붙이들, 생명 있는 것들이 다 위대해 보인다. 밤새 불던 바람에 뿌리 뽑히지 않고 가만가만 흔들거리던 바람꽃도, 천만 배나 더 큰 인간을 향해 사이렌까지 울리며 도전해 오는 모기도, 태어나 죽을 때까지 제 밥 제 찾아 먹다 가는 거미며 버러지며 붕어새끼 한 마리까지, 세상에 눈물겹고 위대하지 않은 게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위대한 건 수천의 작은 걸음으로는 건너 뛸 수 없는 큰 한 걸음으로 저 너머까지 단숨에 건너가신 분들이다. 하얀 국화 송이에 에워싸여 지그시 미소 짓고 계신 분들, 어떤 위인도 억만장자도 살아서는 결코 당도할 수 없는 그곳에 세상 부역 마치고 무사히 안착한 그분들이야말로 마땅히 예를 갖추어 옷깃을 여미어도 억울할 것 없는 인생 선배들이다. 살아생전 얼굴 한 번 못 봤어도, 나보다 15년쯤 더 젊어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영정 앞에 내가 절하는 이유다. 힘든 세상 살아내느라 애 많이 쓰셨다고, 부디 짐 벗고 편히 쉬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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