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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변명 / 김윤재

부흐고비 2022. 2. 3. 09:17

싸움을 걸기로 했다.

싸워서 결론이 나는 일이라면 기꺼이 원인을 제공하리라 마음먹었다. 나는 그보다 조금 더 건강했고, 조금 더 뻔뻔했으므로 살이 터지고 찢어지더라도 싸우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싸우는 일이 영화보고 커피마시고 밥 먹는 일처럼 마음대로 되는 줄 알았던 철없음에 기가 찰 노릇이지만 그땐 싸우면 해결이 되는 줄 알았다. 드디어 한판 제대로 붙을 기미는 장맛비가 내리는 초저녁부터 보이기 시작했다. 우린 조치원을 벗어나 청주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오송을 지나고 미호 어디쯤이었을까. 초저녁부터 내리던 비는 그치고 우리는 느티나무가 있는 구멍가게 평상에 누웠다. 깜깜한 하늘을 바라보며 나는(우린 살아 있고 오늘 밤 싸움은 시작 될 것이다 )주문을 걸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여자로서 자존심 상하는 일이긴 했지만 그를 떠날 수 없는 구실을 만들어야만 했었다.

과년한 딸이 결혼은 하지 않고 연애나 하고 있으니 어머니는 당장 결혼을 하라고 성화셨다. 그럴수록 그는 위축됐고 장결핵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의 졸업은 점점 미뤄졌고 졸업이 늦어지는 만큼 결혼은 불가능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그가 부모님 앞에서 객기라도 부리기를 바랐다.

“제가 건강해지면 별이라도 따다 주겠습니다. 절 믿고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하지만 그는 현실의 우중충한 진실만 이야기해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제겨디딜 곳 없는 그에게 짐이 되는 것 같았다. 헌데 마음과 달리 사랑은 많은 것을 포기하고 포용하게 하는 마술을 부릴 줄 알았다. 그 마술로 인해 나는 압축된 조각들처럼 모진 사랑을 하는 것이라고 위로 했다. 그 위로는 서글픈 내게 현실과 타협하라는 눈짓을 보내고 있었다.

두 팔을 벌리고 누워있던 그가 새우등을 취하며 돌아누웠다. 등은 젖어 있었다. 병든 몸과 답답한 현실을 벗어나려 몸부림치는 흔적이 묻어 있는 것 같았다. 끈질기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질병이 그의 등을 더 굽어지게 하는 것 같았다. 내 등이 시려왔다.

한참을 웅크리고 있던 그가 내 쪽으로 돌아누웠다. 머리가 내 가슴께에 닿았다. 슬픔 같은 것이 훅 달려들었다. 나는 가만히 그의 목덜미 속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등은 넓고 따뜻했다. 아늑해졌다. 하늘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는 내 얼굴을 끌어당겼다. 어둠으로 인해 그의 눈빛을 불 수 없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나는 문득 작은 벌레가 되어 그의 등속으로 기어 들어가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너를 고생시키는 일이라도 결혼하고 싶어.」이슬도 뒤채지 않을 만큼 숨죽여 중얼거렸다.

그 소리는 그가 내게 들려준 언어 중에서 가장 낮고 무거웠다. 밤보다 깜깜했다. 하지만 어떤 선물보다 감동스러웠다. 설령 행위가 따르지 않는다 해도 그 말속에 담겨진 진실을 알기에 행복하고 외로웠다. 나는 마술에 걸려들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 온전히 이식 되어 거부반응이 나타나지 않는 상태로 안식을 누릴 수 있다면 순결과 바꿔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뱃속에서 뭔가 꿈틀 거렸다. 지금 생각해 보니 다섯 달쯤 된 태아의 발차기 같은 것이었다.

나는 그가 걸어온 싸움에 흥분하기 시작했다. 한판승으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오판삼승제를 해서라도 불안전한 남자에게 인생을 걸었노라고 공표하고 싶었다.

그를 따라 조그만 방으로 들어갔다. 꽃무늬이브자리, 얼룩덜룩한 벽지, 누런 비닐장판이 우리의 눈 보다 더 휑한 눈으로 우리를 맞았다. 미끄러지듯 벽에 기댔다. 스르륵 두 다리가 방바닥에 널브러졌다. 두 시간여 빗속을 걸어온 발가락은 퉁퉁 불어 있었다. 발가락이 꼼지락 거렸다. 숨이 막혔던 모양이다. 나처럼.

남자는 방문께 앉아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젖은 성냥은 피식 거릴 뿐 불꽃을 일으키지 못했다. 담배를 피우려는 행동이 아님을 나는 진작 부터 알고 있었다. 그와 함께 한 8년 세월은 그의 숨소리, 눈동자의 변화, 손놀림까지 여자의 의식 속에 기억도록 했다.

그가 담배 피우는 일을 포기하고 다리를 뻗었다. 커다란 발바닥이 내 발가락 끝에 닿았다. 낯설었다. 같은 방향을 향해 걸어온 발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내 뿜는 숨소리는 조그만 방안에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구름 속에 숨겨 두었다 한꺼번에 내리 쏟아 붓는지 미호천도 범람할 양이었다.

사람들은 소나기가 쏟아지면 혼비백산 한다. 마당에 널어놓은 곡식과 빨래를 거둬들여야 하고. 논에 물꼬도 터 줘야하고, 땔감도 부엌으로 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헌데 남자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방안은 소나기로 인해 흥건한데 그는 뛰어갈 자세를 취하지 않았다.

소나기는 잠시 지나가는 비였다. 흙냄새를 남겨 놓고 신경의 올 사이로 감정의 골 사이로 급하게 지나가 버렸다. 소나기는 겁이 많았다. 자신으로 인해 나뭇잎이 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까닭이다.

나는 벌떡 일어섰다. 잠시 개었던 비가 다시 내리는지 유리문이 울었다. 유리창 밖에선 사람들 소리가 났지만 방안에서 젊은 남녀가 무엇을 하는지 관심도 없는 것 같았다. 손아귀에 땀이 차올랐다. 머리칼을 질끈 묶고 밖으로 뛰쳐나가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싸움에 진 오만한 수 닭의 볏처럼 피를 철철 흘리며 그렇게 서 있었다.

그 후 30년. 돌이켜 보니 모든 것은 순간이었다. 아무런 자취도 없이 젊음은 가고 아늑함마저 기억에 없다. 한때는 그 아늑함이 그리워 문학이다 음악이다 찾아 헤맸지만 그 어디에도 내가 찾는 아늑함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화련의 수필 「떠돌이에게 보내는 북소리」의 한 대목이 여자에게 따뜻한 물 한잔을 건넸다.

“기럭지가 모자라는 이불을 덮고 누운 것 같았어. 목을 감싸면 발이 나오고, 발을 덮으면 목이 드러나는 그 서늘함이 평생의 그림자라니”



김윤재 수필가 1998년 《수필과비평》 등단. 수필집 《하늘밭 열평》, 《그 돌아갈 수 없는》, 《세월은 반음씩 내려가다》, 기도일기 《약속》. 에세이스트 올해의 작품상, 수필과비평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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