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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물질하는 아내 / 김백윤

부흐고비 2022. 2. 8. 08:34

어둠 사이로 서서히 햇귀가 퍼진다. 이내 햇빛은 어둠을 사르고 바다 위에 우뚝 솟는다. 바다는 몸빛을 바꾸느라 분주한데 갈매기 한 마리가 푸른 아침을 물고 창공으로 날아오른다.

해풍이 불어와 잔잔한 호수를 깨운다. 동그랗게 퍼져나가는 물살을 밟는 철새들의 날갯짓 소리가 들린다. 앞마당 같은 호수는 어릴 적부터 무시로 바라본 곳이다. 호수는 계절에 따라, 날씨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한다. 안개가 자욱한 날은 신비스러움으로, 바람이 부는 날은 역동적으로 보인다. 가끔은 마음 상태에 따라 호수가 달라 보일 때도 있다.

이 시각이면 부지런히 집안을 오갈 아내의 움직임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아직 잠자리에 있다. 평소에 없던 일이라 잠든 아내의 얼굴을 바라본다. 어제 종일 밭일을 했던 터라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다. 허약체질인 아내를 염려해 만류했지만, 기어이 비어 있는 큰조카 집 텃밭을 괭이로 일궈 무와 배추를 심었다고 한다.

민박을 치는 것만으로도 버거울 텐데 왜소한 체구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아내는 보기와 달리 모도리 같은 면이 있다. 내가 집을 자주 비우는 바람에 혼자 살림을 꾸리느라 억척스럽게 변해 가는 건 아닌지 마음이 켕긴다. 항상 가까이 있기에, 또 언제나 변함없는 모습이기에 소홀히 한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한때 집안일보다 밖에서 하는 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며 살았다.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날뛰는 망둥이나 다름없었다. 정말 돌봐야 할 내 주변을 살피지 않고 하고 싶은 일에만 매달려 지낸 시간을 생각하면 이 경건한 새벽을 대하기가 부끄럽다.

하도리는 바닷가 마을이라 해산물이 가정경제의 큰 몫을 차지한다. 아내가 물질을 시작하기 전, 어느 해 따뜻한 봄날이었다. 바다에서 소라, 오분자기, 문어 등을 망사리 가득 짊어지고 나오는 해녀를 보던 아내가 불쑥 말했다.

“여보 나 물질하면 안 돼? 나도 저 해녀들처럼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느닷없는 말에 나는 펄쩍 뛰었다. 아내는 이미 40대 중반을 훌쩍 넘어섰기에, 물질하기에는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깜냥 없이 덤비는 섣부른 생각이라 치부했다. 다시는 그런 말 말라며 눈을 부라린 채 나무라고는 넘겨버렸다.

그 후 여름 어느 날이었다. 평소 같으면 집에 있어야 할 아내가 보이지 않았다. 집안 곳곳을 찾아보고 주변도 둘러봤지만 없다. 휴대전화로 연락해도 받지 않아 마음이 초조해졌다. 비교적 한적한 동네인데 그날따라 더 조용했다. 갈만한 곳을 가늠하며 찾아다니다가 동네 어르신을 만났다.

‘자네 집사람 큰 형수와 같이 바다로 가더라.’는 게 아닌가. 부랴부랴 바닷가에 도착하니 갯바위 끝에 형수 혼자 앉아 있는 게 보였다. 헐떡이며 그쪽으로 다가갔다. 형수는 내가 온 줄도 모르고 바다를 향해 고함치듯 얘기하고 있었다.

바다 쪽으로 시선을 돌리다 너무 놀라 발을 헛디딜 뻔했다. 아내가 바다에 떠 있는 게 아닌가. 작은 손으로 테왁 망사리를 겨우 붙잡고, 새파래진 입술로 어찌할 바를 몰라 허우적댄다. 나 또한 당황하여 우두망찰 서 있었다. 인기척을 느꼈음인지 형수가 뒤돌아보았는데 오히려 담담한 표정이다.

“아주방 와서? 어떻게 찾안?” 하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웃는다. 그 모습에서 바다와 삶을 같이한 한 사람의 옹골진 삶이 느껴졌다.

형수는 아내가 하도 조르는 바람에 할 수 없었노라 했다. 물질을 배우기 위해 큰동서를 스승으로 모신 셈이다. 아내의 생각이 놀랍고 기특하여 만류하지 못했다며 형수가 대신 상황을 설명한다.

“힘들엉 못헌덴 허여도 해보고 안 되면 그만두겠다고 해서 왔는데, 물질 허여지커라.”

걱정하지 않아도 좋겠다고 말하는 형수의 얼굴에는 무척 흡족해하는 빛이 서렸다. 바다에서 테왁과 씨름하다가 나를 보았는지 아내가 뭍으로 나온다. 허둥대던 모습과는 달리 자신감에 차 있다. 야단맞을까 싶어 먼저 선수 치는 아내의 의지가 강해 보여서 ‘힘들지 않아?’라고 물었을 뿐 더는 말을 못 하고 말았다.

아내와 함께 철썩이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집으로 향하는데 이런저런 생각으로 마음이 편치 않다. 남편이 얼마나 못났으면 아내에게 물질을 시키느냐고 나무랄 동네 사람들을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러나 아내는 가정 살림에 보탬이 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남편 밥상에 신선한 해산물을 올리고 싶어서라고 말한다. 물질을 꼭 배우고 싶다며, 자신 있다고 큰소리까지 쳤다. 아내의 깊은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게 오히려 부끄러웠다.

어렵고 힘든 일이 닥쳐야 아내를 소중한 존재로 인식하니 나는 아직도 덜된 사람이다. 그동안 얼마나 기대고 싶었을까. 가장의 몫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일들을 새삼 되돌아보았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으니 소중함과 고마움을 몰랐다. 어려운 살림에도 불구하고 화목한 가정을 지키려고 애쓴 아내다. 그 마음이 물질에까지 닿았으니 좁은 소견으로는 헤아리기가 힘들었다.

몇 개월 동안 아내에게 물질을 가르친 형수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형수 덕분에 이제 아내는 능숙한 진짜 해녀가 되었다. 해산물 밥상뿐 아니라 가정경제에도 보탬이 될 만큼 실력도 점점 좋아졌다. 이제는 물질하고 돌아오는 아내를 마중 나가는 발걸음도 한결 가볍다.

있는 듯 없는 듯 늘 옆에서 같이 하고, 깊이를 알 수 없어도 늘 품어주는 아내는 호수를 닮았다. 생명을 살리는 호수처럼 아내의 마음에도 끊이지 않는 깊은 샘물이 있는 것을 안다. 그 샘물로 인해 탁한 마음이 정화되는 것도 이제는 알겠다.

호수를 바라보며 사색에 잠겨 있는 동안 아내가 잠에서 깼는지 발소리가 들린다. 오늘은 아내와 마주 앉아 물안개 걷히는 호수를 함께 바라보고 싶다.



김백윤 수필가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 출생, 제주문화원 문예창작반, 제주수필아카데미 수료, ‘수필과비평’에서 등단, 제주문인협회, 제주수필문학회, 구좌문학회 회원, 제주수필과비평작가회 회장. 수필집으로 『365일 교도소를 읽다』, 『해녀와 초가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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