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숯불이 내 시선을 잡아끈다. 활활 타올라 뜨겁던 시간은 이미 지나고, 회색빛 재는 설핏 붉은 기운만 감돌고 있다. 불은 곧 꺼진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저 불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꼭 무언가를 할 수 없는 불이어도 괜찮았다. 오히려 뜨겁게 타오르지 않아 그 곁을 오래도록 지키고 싶었다. 재만 덩그러니 남은 화로의 뭉근한 기운에서 겨울밤 따스함이 느껴진다.

알루미늄 호일에 싸인 고구마 세 개를 넣었다. 이렇게 꺼져가는 불로 통통한 고구마를 익힐 수는 없겠지만 따스한 명당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명분이 필요했다. 이때는 거창한 장비 없이도 집게 하나면 충분했다. 특별하게 분주하고 화려한 손놀림도 필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고구마를 잘 익히는 기술이었다. 집게로 숯을 뒤적거려 고구마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집게가 닿을 때마다 불꽃은 빨간 기운들을 내뿜었다. 타다닥 불꽃이 일자 내 얼굴은 화끈 달아올랐다.

내 안에 뭉근함이란 단어가 들어온다. 난 무엇을 뭉근하게 익혀본 일이 있던가. 알고 보면 세상의 거의 대부분이 뭉근하게 익혀야 제 맛이 난다. 삶도 사람과의 관계도, 글과 사랑도 하물며 흐르는 계절과 사소한 일상들까지도 활활 타오르는 불로는 익힐 수 없다. 익었나 싶어 찔러보면 겉만 타고 속은 익지 못해 단단했다. 익은 냄새가 날 수는 있어도 깊은 단내와는 비교되지 않았다. 어쩌면 난 매번 뭉근함의 힘을 믿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이쯤이면 충분하다며 익기 정도를 스스로 판단하려 했다. 곧 꺼질 것 같은 불안함도 있었다. 타는 냄새가 나지도 않는데 지레짐작하고 얼른 그것을 찔러보는 데만 급급했던 것이다. 내게는 다른 어떤 일보다 뭉근하게 익히는 일이 세상 큰 일 이었다.

‘뭉근함’이란 단어를 익혀본다. 뭉근함에는 욕심이 없다. 하지만 힘이 세다. 그것에는 어떠한 결과보다 익히는 과정에 힘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알록달록한 개성도 없으며 화려하게 치장하는 것도 싫어했다. 바로 반응이 나타나거나 겉으로 티가 나지도 않았다. 재미와는 거리가 멀다. 거칠 것이 없는 20대의 뜨거운 열정도 아니요, 새것 같은 낯설음도 아니다. 오히려 진득하게 오래 오래와 같이 꾸준함과 성실함이 뭉근함과 어울리는 단어였다. 신선한 재료들이 뭉근함 속에 들어간다면 그것은 시간이라는 조미료와 함께 깊은 맛이 나는 요리가 된다. 아마도 그 재료가 무엇이든 값이 얼마나 되었든 상관이 없을 것이다. 뭉근하게 익힌 것은 언제나 재료가 가진 가장 최상의 맛을 껄쭉하게 끓여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난 지금 얼마쯤 익어가고 있을까. 모르긴 해도 아마 절반쯤은 익지 않았을까. 뜨겁게 달구어 바쁘던 시간들이 지나고 회색빛 재를 한 겹 덮어쓴 마흔을 넘은 내 모습에서는 이제 뭉근하게 익혀낼 것들만 남은 것 같다. 육체적으로 바쁘기보다 내 안에 마음으로 오래도록 같은 열을 내며 익혀야 한다. 내 아이들도, 관계도, 삶도, 사랑과 수필까지도..,

내가 익힐 것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나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그 어떤 것들도 익히려 노력하는 내가 보였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게 했고, 지금이 있기까지의 과정과 그것들의 처음을 기억하게 했다. 오래도록 사소한 모든 것들을 손에서 놓지 않으며 추억했다. 지금 내 옆에 놓인 것들을 바라본다. 손때 묻어 나무가 반쯤 벗겨진 연필, 이가 빠진 빗, 자잘한 빗금이 무늬가 되어버린 컵, 모서리와 귀퉁이가 낡아진 책 한권, 오랜 시간 나를 받치고 있던 삐걱거리는 의자. 반복되는 일상 어느 것 하나도 내겐 의미가 되지 않는 일이 없었다. 이처럼 사람은 훗날 자신의 모든 것을 태우고 재만 남더라도 그것들을 받아들이며 추억할 수 있어야 한다. 내 젊은 날들을 하얗게 불태웠노라고 말이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이제는 단내가 나도록 뭉근하게 익히자. 익힘에 있어 뭉근하게 익히는 일은 가장 잘 익히는 방법이지 않을까. 지금의 삶을 잘 사는 것 또한 뭉근하게 익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고구마 익는 단내가 난다. 회색빛 재를 뒤적거려 고구마 하나를 집었다. 호일에 싸인 고구마는 그 익힘 정도를 전혀 가늠할 수 없었다. 젓가락으로 호일을 뚫어 고구마를 찔렀다. 젓가락이 반쯤 들어가다가 더 이상 들어가지 않았다. ‘아직 한 참 멀었구나.’ 다시 고구마를 집어 그것을 숯불 속으로 밀어 넣었다. 다른 것들도 한 바퀴 뒤집으며 숯으로 빈 공간을 메웠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온다. 회색빛 숯들의 빨간 기운들이 화로를 가득 메운다. 겨울밤이 뭉근하게 익는다. 어둠이 익는다. 하루가 익는다.
                                                                                       계간 《문예감성》 재창간호 21호(2020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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