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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발효 / 김상환

부흐고비 2022. 2. 8. 08:48

오랜 도시생활에서 까맣게 잊고 있었던 냄새가 나를 깨웠다. 그 냄새를 따라가 보니 우리 집 부엌에서 아내가 청국장을 끓이고 있었다.

상쾌한 아침, 구수한 청국장 냄새를 맡으면서 뜬금없이 왜 퇴비 냄새를 떠올렸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추억의 향기가 더해져 그랬으리라.

퇴비는 땅의 힘을 길러주는 고품질의 영양소로 풍년을 들게 해주는 유기질 비료다. 대지의 입김처럼 아지랑이가 아롱아롱 피어오르는 봄이 되면 농부들은 바빠진다. 우선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퇴비를 바지게에 담아 나르면서 풍성한 가을을 꿈꾼다. 도시인들은 퇴비 냄새가 고약하다고 코를 막지만 농부들은 그 냄새가 구수하고 달다고 한다. 퇴비를 준비하는 농부에게는 꿈과 희망이 담겨 있기에 쿰쿰한 냄새조차도 달고 구수하게 느꼈으리라.

청국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발효다. 좋은 퇴비 또한 잘 띄워야 한다. 즉 온갖 쓰레기를 모아서 썩히는 것이 아니라 발효시켜야 한다. 완숙되지 않은 퇴비는 많은 세균이 살아있어 오히려 농작물에 피해를 주기 때문이다.

식당에서 청국장을 처음 먹어본 사람이, 옆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사람에게서 풍겨오는 냄새인 줄 알았다고 했다는 말을 듣고 문득 어렸을 때 어머니의 땀냄새가 떠올랐다.

힘든 농사일을 끝내고 저녁 늦게 돌아온 어머니의 냄새가 바로 그랬었다. 부드러운 피부는 화상을 입은 것처럼 벌겋게 되어 있었으며, 상처가 나도 치료를 하지 못한 등은 소나무 껍질 같았다. 그리고 땀에 절어 소금꽃이 피어있는 옷에서는 독특한 냄새가 났다. 나에게 그 냄새는 어머니의 사랑이 더해져 배가 고플 때 맡은 음식 냄새만큼이나 좋았다.

힘든 노동을 하고 흘리는 땀에서는 건강한 삶의 냄새가 난다. 하지만 사우나실과 같은 온도가 높은 곳에 가만히 앉아서 흘린 땀에서는 냄새가 별로 나지 않는다. 그러니 노동으로 인한 땀냄새는 삶이 발효되는 냄새라고 할 수 있다.

청국장을 만들 때 고초균枯草菌을 배양하기 위해 주로 볏짚을 사용한다. 볏짚에는 천연 효모가 착상되어 있으며 물에 젖은 볏짚은 수분까지 공급해주어 자연 발효시키기에 좋은 환경이다. 고초균은 번식하면서 단백질을 분해하는 효소를 만들어 콩의 단백질을 아미노산으로 만들어준다. 이때 암모니아 가스가 생긴다. 이 암모니아 가스는 다른 잡균들이 번식하는 것을 막아 청국장이 상하지 않도록 도와준다.

내가 요구르트 제조기를 만들 때 알아본 바에 따르면, 고초균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유산균은 끓이면 죽는다고 한다. 또 유산균은 위산에 의해서도 죽어버리기 때문에 공복에 요구르트를 먹을 때는 반드시 물을 먼저 마신 다음 먹어야 효과가 있다고 했다. 하지만 고초균은 끓여도 잘 죽지 않는다고 한다.

몸에 이로운 성분을 생성하면 발효라 하고 효소에 의해 변하는 것을 숙성이라고 한다. 우리 인생도 발효되는 삶을 살아가면 생명의 냄새가 나고 부패된 삶을 살아가면 썩는 냄새가 날 것이다. 부패는 나를 지키지 못하는 것이고 발효는 고초균처럼 본성을 유지하면서 제2, 제3의 물질을 탄생시키는 일이다.

부패하는 데는 노력이 필요 없다. 하지만 발효되는 일은 항상 긴장하고 깨어 있어야 하며 고통이 따른다. 미움과 원망도 오랜 기간 잘 삭히고 발효시키면 오래 담근 술이 맛과 향기가 나듯이 고운 정,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뀐다. 그렇지만 원망으로 키워가면 독이 되어 몸과 마음을 상하게 한다.

현대인들에게는 발효되고 숙성될 시간이 부족하다. 고향이 없고 이웃이 없고 평생직장이 있다. 오래 묵은 친구조차도 드물고, 살고 있는 집도 직장에서도 언제나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니 정과 사랑이 오래 묵고 숙성될 공간도 시간도 없다. 애경사에도 마음에 없는 인사치레로 현금 봉투만 오고간다. 그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은 인스턴트식 사랑에 익숙해지고 매스컴에서는 날마다 부패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세상이 시끄럽다.

발효 식품에는 과학과 철학이 담겨있다. 알고 보면 발효란 크고 웅장한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도 않은 미생물의 증식에 의해 일어난다. 우리들의 삶 또한 아름답고 행복하게 하는 것들은 미생물처럼 눈에 보이지 않은 작고 하찮은 것들이 모여서 이뤄지지 않던가.

내가 나이를 먹어가는 일도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숙성 발효되어 가도록 힘쓸 것이다. 그러면 미움도 원망도 가슴 아팠던 일까지도 곰삭아서 사랑이 되고 기쁨이 되어 아름다운 추억으로 승화하리라.

아내는 지금 청국장을 끓여놓고 음식이 다 식는다고 독촉이다. 수십 년 숙성 발효된 사랑의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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