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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처하태평(妻下太平) / 백춘기

부흐고비 2022. 2. 16. 08:05

말다툼을 하고 나서 며칠 동안 서로 말을 하지 않는다. 사실 별 일도 아닌 데 의견충돌을 하고나면 소심 A형인 나는 나대로, 대쪽 B형인 아내는 아내대로 먼저 말을 건네지 않는다. 서로 손해 날 것 없다는 식이다. 말을 안 한지 3일째 되는 날 저녁식탁에서 “여보, 당신은 식사 전 기도를 왜 하는 거요?”라고 하니 “왜 하기는, 해야 하니까 하는 거지!” 하고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것이다. “남자가 집에서도 대접받지 못하고 가볍게 취급 받는데 전쟁터 같은 경쟁사회에 나가서 어떻게 살아 나갈 수 있겠소! 다음부터는 기도할 때, 주여! ‘은혜로이 내려주신 이 음식과 저의 남편 스테파노에게 강복하소서! 이렇게 기도 해 주시오!” 그렇게 선전포고 하듯이 경고 하였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수색에서 버스를 타고 시청에 가야 하는데 나는 불광동을 거쳐 가는 것이 가깝다 하고, 아내는 신촌으로 해서 가는 것이 가깝다고 고집하다가 서로 각자 버스를 타고 가서 시청에서 만나기로 했다. 누군가 한사람이 양보하면 될 일인데 왜 그렇게 서로 고집을 피웠는지 모른다. 여행가서 식당을 정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배고플 때 적당한 곳에서 해결하자고 하면 아내는 먼 곳까지 가서라도 꼭 먹고 싶은 어느 특정한 음식을 먹겠다고 한다. 그것이 여행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결혼한 이후 35년이 지났지만 아내가 먼저 화해를 청하거나 말을 먼저 걸은 기억이 없다. 매번 내가 먼저 화해의 제스처를 쓰면 그때서야 마지못해 슬그머니 말을 걸어 주는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소심 A형인 나는 오랫동안 잊지 않고 있지만 B형인 아내는 그런 일이 언제 있었는지 모른다며 깨끗하게 잊어버리고 자기는 뒤끝이 없는 사람이라고까지 한다. 같은 사무실 직원 5명중 3명이 공교롭게도 남편이 A형이고 부인이 B형이었다. 이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말다툼이나 언짢은 일이 있고 난 뒤에는 서로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절대로 B형인 아내가 먼저 말을 한다든지 화해를 청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혈액형에 따른 성격을 분석한 자료는 각양각색으로 의견이 많다. 흔히 A형은 소심하고 감성적이며,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이 강하나 상처를 잘 받는 성격이라고 한다. B형은 현실적이며 자존심이 강한 성격으로 화를 잘 내지만 '뒤끝이 없는' 성격이라는 분석을 대체로 인정하고 있는 듯하다. 혈액형 조합 중에 가장 좋지 않은 조합이 A형 남자와 B형 여자의 조합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를테면 물과 기름과 같은 조합이다. 물론 사람마다 다를 테지만 개성이 뚜렷하고 확실한 성격이라 의견충돌이 많을 것이라 해서 하는 말이다. 오죽하면 ‘A형 남자와 B형 여자’라는 책이 발간되었을까!

노후에 행복하려면 음악 미술 체육 그리고 문학에 취해보라는 말이 있다. 나는 A형에 어울리는 감성적 취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 가곡을 즐겨 부르며 문학 소년의 꿈을 이루어 수필 글쓰기를 하고 있다. 아내는 B형의 특징인 집중력이 강하여 바둑을 잘 둔다. 한국기원 5급 실력으로 바둑채널을 즐겨 시청한다. 한 때는 테니스도 열심히 하였고 오래전부터 하모니카에 심취하여 지금은 문화센타에서 하모니카를 가르친다. 서로 각자의 취미생활을 즐기며 산다. 설령 상대편의 말과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도 각자의 생각을 존중하고 참는다. 한편 무뚝뚝하고 현실적인 B형 아내가 감성적인 A형 남편을 감동시키기도 한다. 최명희 문학관과 박경리 문학관에 갔더니 글 쓰던 책상에 손때가 묻은 우리말 사전이 놓여 있었다고 한다. 등단까지 하고 글을 쓴다는 사람이 사전이 없어서 되겠느냐고 커다란 우리말 사전을 선물하여 나를 감동시켰다. 나이가 들어가면서는 자칫 냉철하고 차겁게 느껴지는 이성적인 표현보다 따뜻한 감성적인 접근이 상대편의 기분을 좋게 한다. 젊어서 그렇게 토닥토닥하더니 이제는 하고 싶은 말도 참고 기분이 나쁘지 않게 대하며 지낸다. 나름대로 화합하는 방법을 깨우친 것이다. 이제는 서로에게 익숙하게 스며들어 평행선의 기차 레일같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바라보며 산다. A형 남자와 B형여자의 조합에서 화해를 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다.

우리부부는 서로 말을 하지 않다가도 화해가 필요하다 싶으면 가는 곳이 있다. 명동의 로얄 호텔 커피숍이다. 결혼할 당시 아내는 방송국에 근무하는 멋쟁이였다. 나는 땟국이 줄줄 흐르는 현장 유니폼과 진흙이 묻은 구두를 신고 나타났다. 우리는 이곳에서 처음 만났고 결혼식도 올렸다. 그렇게 일생을 약속했던 아름다웠던 추억이 남아 있던 곳에 가서 다시 그 때 마음으로 되돌아 가 보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그곳은 우리의 화해와 용서의 방법이며 장소이다. 가난하고 어려웠지만 행복했던 지난 시절을 회상하면 하찮은 말다툼일 뿐인 것이다.

‘천하태평(天下太平) 하려면 처하태평(妻下太平)’ 하여야 한다!



백춘기 님은 2013년 《한국산문》 등단, 한국산문작가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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