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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리폼하기 / 이정숙

부흐고비 2022. 2. 18. 07:50

헉, 새벽 4시 38분! 닭울녘이다. 밤을 꼬박 샜다. 밤을 낮으로 건밤을 보냈다. 불면증도 아니고 고민이 잠을 추방한 것도 아니다. 직수그리고 바느질을 고부라지게 하느라 시간 간 줄 몰랐던 것이다. 가슴이 드러나 입을 수 없던 묵은 옷이 멋지게 변신했다. 수선집에서도 불가능한 일을 난 밤을 도와 해냈다.

목은 뜨개질로 검정색 레이스를 달아주고, 뒷부분은 주홍색과 주황색 그리고 노란색과 갈색 색실로 꽃도 몇 송이 피워주었더니 특별난 원피스가 완성되었다. 회색과 주황색의 조합이 상당히 어울린다. 참으로 맵자하다. 내가 만들었지만 맨드리가 맘에 들어 이리보고 저리보며 입어보니 흐뭇하기만 하다. 등글기가 아닌 나만의 고유 작품이 탄생했다.

눈빛을 모아 일을 하다 보면 시름까지 사그라져 어느새 무념상태다. 이 일을 할 때만큼은 나에게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눈 깜짝할 사이에 밤이 지나고 오늘처럼 새벽이 온다. 꼼지락꼼지락 일을 하고 있을라치면 내 마음에 황금 나비가 난다. 시간이 갈수록 뻐근해지는 몸과 달리 정신은 가볍고 찬란하다. 그러나 몰입하는 동안에는 아무렇지도 않다가 일을 마무리하고 나면 여지없이 어깨와 허리에 통증이 엄습하고 눈도 아프다. 그래도 어쩌랴. 옛사람들이 자연에 파묻혀 사는 것을 하나의 질병으로 여겼듯이, 내손으로 하는 이 일이 나의 고질병처럼 여겨지는 것을.

리폼은 에멜무지로 시작한 일이지만 언제나 나를 들뜨게 한다. 될성불러서 일을 저질렀는데 두동져 버리는 경우도 간혹 있지만 대부분 흡족하게 완성한다. 그럴 때마다 뿌듯하고 마음이 기쁨으로 충만했다. 정말 오달졌다.

일상의 사소한 일일지라도 정성을 다하는 일은 성스럽다. 그 옛날 웅녀가 그랬듯이, 꿈과 희망이 현실로 실현되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실현은 신화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래서 실현은 숭고하고 성스럽다. 요새 트랜스포머가 유행한다. 영화에서 트랜스포머는 자동차가 로봇이 되고 로봇이 전투기가 된다. 하지만 이런 기계적인 조작이 아니라 트랜스포머는 사실 우리들 자신인지도 모른다. 관심과 의지만 있다면 그리고 변화의 욕망만 있다면 누구나 트랜스포머가 될 수 있다.

리폼하는 사람은 옛것을 새것으로 만드는 트랜스포머이자 또 다른 창조자이다. 모든 형태는 기능을 따르기 때문이다. 리폼작업은 다른 형태로 점차 바뀌어가는 생성의 즐거움을 나에게 준다. 그 무념의 시간이 순수한 나를 만나는 아름다움이기도 하다. 다양한 디자인과 색상으로 기능성 상품이 넘치는 현실에서 남이 볼 때는 궁상맞은 짓일 수도 있지만 나에겐 달콤한 만족이고 의젓한 행복이다.

처음에는 묵은 것들을 버리기가 아까워서 리폼을 시작했다. 그것이 시나브로 몸에 배이더니 이젠 아주 그럴 듯하게 완제품들을 만들어낸다. 그럴수록 죽었던 세포가 하나하나 되살아나듯 봄날 대지를 뚫고 나오는 풀들처럼 푸릇푸릇한 기운이 내 몸에서 감돈다. 실은 나는 잘하는 게 하나도 없는 맹한 사람이라고 투덜대며 자책하고 살았다. 그런 내가 야속했다. 내게 이러한 잠재력이 있는데도 늘 삶의 일상은 단조롭고 밋밋하기만 했다. 정말이지 나는 이날 입때까지 진짜 나를 알고 살았는지 부끄럽기만 하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손재주가 내게 주어진 달란트였다. 분명 나름 운명의 부름으로 신께서 기회를 주고자 했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에게는 신은 귀띔도 해주지 않고 나침반도 쥐어주지 않았다. 내가 나를 모르고 살았던 숱한 세월을 생각하니 가슴에 쩡 금이 가는 것 같다.

돌이켜보니 나는 물건의 리폼을 꽤 잘하고 살았다. 그러나 사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정작 나 자신은 들여다보지 못했다. 내 삶을 수선해볼 생각도 못한 채 잡동사니에 매달려 젊음의 고개를 넘어 내리막길로 질주하는 나이가 되었다. 세월이 몸과 마음을 장악하기 시작한 어느 날부터 리폼의 필요성을 느꼈다. 하루하루 마음이 부서져 내리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마냥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런 내가 나를 괴롭혔지만 동동거리기만 했을 뿐 별다른 몸짓을 해보지 못했다.

이제 물건 리폼보다는 내 자신을 리폼해야겠다는 생각이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감추려고 해도 삐져나온다. 그런데 그게 가능이나 할까. 그렇다면 나를 어떻게 변신시켜야 하나? 아직도 나를 제대로 모르겠다. 알아야 어떻게든 할 텐데 막연하기만 하다. 부족함을 채우고자 하는 욕망에 불과하지 날갯짓 없이 날고자만 했던 나를 본다. 내게 가능한 것은 무엇이고, 그것을 실현해야 할 내용은 무엇인지? 아직도 나는 나의 삶의 지평 안쪽에서 돋아나지 못하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한때는 얼리어답터(early adopter)로 살았건만 남편과 자식에서 본디 나로 되돌아온 지금의 나는 갈피를 못 잡고 있다. 내 인생의 절정은 언제였을까. 몸과 맘 모든 힘 다 소진할 정도로 혼신을 다해 살았던 시절이 있었을까. 기억하건대 클라이맥스도 없이 어영부영 오늘에 이르고 만 것 같다. 내 삶의 내용을 채우지 못하고 텅 비어 있는 밥그릇을 바라보며 허기에 안절부절못한다. 늙어가고 있는 지금 녹슬고, 낡고, 허접해서 재생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만 바빠진다. 어떤 의지의 힘, 무엇인가를 닦달하는 욕망만 나를 채근한다.

굼벵이가 매미로 변신하듯이 리폼은 변화와 생성이다. 풍물에서 꽹과리 소리는 하늘의 소리를 뜻한다고 한다. 그래서 갱지갱갱역갱更之更 更亦更의 꽹과리 소리는 바로 하늘의 음성인지도 모른다. 바꾸고 또 바꿔라! 나이 핑계 삼아 낮아져만 가는 내 생의 높이는 오직 리폼의 변화로 가능할 일이로다. 인생 후반기에 축복으로 내려지는 제2의 사춘기. 구닥다리 헌옷에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를 알록달록 피워 내 삶의 동산에서 거주하게 하리라.



이정숙 님은 《수필과비평》 등단. 국제 PEN한국본부 전북위원장, 한국미래문화부위원장. 전라북도 수필분과위원장, 가톨릭문우회부회장 역임. 수필집 『지금은 노랑신호등』, 『내 안의 어처구니』, 『꽃잎에 데다』, 『계단에서 만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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