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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찬란한 슬픔 / 이정숙

부흐고비 2022. 2. 18. 07:41

몇 년 동안 방치해 두었던 난이 작년 봄에 꽃을 피웠다. 그때도 뜻밖에 찾아온 손님처럼 반가웠지만 꽃이 진 뒤 기다림도 그리움도 키우지 않고 무심히 세월을 흘려보냈다. 첫 만남의 감격이 컸기에 아주 잊은 건 아니어서 가뭄에 콩 나듯이 눈길을 주었을 뿐인데, 어럽쇼, 귀띔도 없이 그는 내게로 다시 한 발짝씩 다가왔다. 그러니까 작년에 이어 두 번째 만남이다.

동지섣달 꽃은 아니지만 나 좀 바라봐달라고, 나한테 사로잡혀달라고 묵시적 신호를 보내며 장엄한 호흡을 시작했다. 제구실을 다하기 위해 온 힘으로 꽃대를 밀어 올리는 저 생명의 불꽃. 세 개의 꽃대에 다섯, 일곱, 열한 개의 마디마디에 터를 잡더니 꽃 고추마냥 연둣빛으로 봉긋하게 부풀어오르며 날이 갈수록 여인네 버선코 모양을 하고 수줍은 듯 금방이라도 터질 것같이 탱탱해졌다. 초록인 듯 노랑인 듯 은근한 색깔에 잡동사니 하나 없이 깔끔한 모습의 제법 고귀한 품격의 자태다.

난은 꽃을 채 피우기도 전에 아침마다 이슬을 머금고 애처로이 날 바라본다. 나는 조심스럽게 혀를 갖다 대보았다. 달착지근했다. 그 달콤함을 생산해내느라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쏟았을까. 곧 피어날 꽃과의 만남을 생각하니 반가움이 떨림으로 밀려왔다.

며칠 후, 노랑나비가 나풀나풀 춤을 추는 듯 순박한 웃음으로 꽃망울들이 웃음기를 흘리며 벙글기 시작했다. 오늘을 위하여 먼 길을 걸어왔을 것이다. 참으로 오지게도 피고 있다. 말로 다 못할 속내를 꽃으로 노래하고 있으리라. 가슴에 고이는 이 두근거림, 나날이 애틋해지는 꽃. 서로 나누는 미소, 나는 꽃과 마주하면서 사랑에 빠진 여인이 되기도 하고, 명절을 기다리며 가슴 설레는 어린아이가 되기도 했다.

어느 땐 꽃과 사랑놀이를 하다가 잠이 들어 이튿날 일어나보면 간밤에 무도회라도 열었는지 약간은 흩어진 이슬이 송알송알 맺혀 있곤 했다. 이는 필시 꼬마천사들이 발레를 하고 노란 참새들은 노래를 하며 꽃잎들이 박장대소 눈물까지 흘려가며 웃고 즐겼음이다. 나를 재워놓고 ‘글쎄 요것들이, 즈떨끼리만…….’ 그러나 실은 벌·나비를 유혹할 수 있는 충분한 끼를 지녔음에도 스스로 제 사랑을 찾아 나서지도 못하는 베란다 화분 속의 난 꽃이 안쓰럽다. ‘아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그대 나의 사랑아.’라는 노랫말이 떠올랐다. 오늘은 창문을 열어 벌·나비들을 초대해주어야겠다.

쉽게 피지 않는다는 난 꽃이 우리 집에서 두 번이나 함박지게 피어주었으니 이는 나와 특별한 인연 때문이리라. 그러한 인연 속의 우리 집 난을 막연히 난이라 부르지 말고 그만의 이름으로 불러주어야 예의일 듯싶어 인터넷을 뒤져보았지만 똑같은 꽃이 보이지 않았다. 잎이 셋인 다른 난과 달리 우리 난은 꽃잎이 여럿이다. 밑으로 두 꽃잎이 쳐져 있고, 그 위로 양쪽 팔을 뻗은 양 두 잎이 평행을 이루며, 가운데 꽃잎 하나는 하늘을 향해 있다. 그리고 중심 아래에 몸체인지 넓적하고 도톰한 잎이 있고, 위에는 작은 씨방 같은 것이 사람이 인사하는 양 고개를 숙인 형상이다. 세습되지 않은 돌연변이로 시 같은 꽃을 피웠는데 귀하신 몸의 진가를 몰라본 게 아닌가.

그러나 꽃은 이미 다 저버리고 마지막 한 송이. 미안한 마음에 늦게나마 사진을 찍어줬다. 그럴싸 그러한지 오히려 흐드러지게 핀 때보다 마지막 남은 그 한 송이가 더 단아한 맵시를 지니고 있었다.

꽃이 피고 지는 세월 속에서 난 잎 몇 개도 혈색이 변해갔다. 우리 집 난도 살아있는 생명체이니 생로병사의 굴레를 피해가지 못하는가 보다. 작년에는 한 달 남짓 꽃이 피었는데 올해에는 기간이 많이 짧아졌다. 얼핏 든 생각으로, 이러다가 다시는 꽃을 보지 못할까 봐 조바심이 났다. 좁은 집에 대가족살이가 힘이 들었을지도 모르니 제금을 내 신접살림이라도 차려주어야 될 것 같다. 분신을 그리워하며 몸살하지 않도록 바로 옆에 두어 서로 바라보며 가끔 손도 잡으면서 행복하게 살다가 다시 꽃을 피울 수 있게끔.

이제 나는 꽃이 시들어 저문 뒤의 허망을 견디면서 다시 꽃이 피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 나래에 새겨지는 찬란한 슬픔의 봄을, 그리고 다시 피어나지 않을 나의 젊음을, 나의 사랑을…….



이정숙 님은 《수필과비평》 등단. 국제 PEN한국본부 전북위원장, 한국미래문화부위원장. 전라북도 수필분과위원장, 가톨릭문우회부회장 역임. 수필집 『지금은 노랑신호등』, 『내 안의 어처구니』, 『꽃잎에 데다』, 『계단에서 만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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