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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외출 준비 / 양희용(일섶)

부흐고비 2022. 2. 21. 07:45

친구들과 야유회를 가는 날이다. 새벽에 눈을 떠 목적지 날씨부터 확인하니 낮에 비 올 확률이 70%라고 예보되어 있다. 바깥에 나갈 때 비가 오면 불편하다는 걱정과 괜찮을 거라는 기대가 엇갈린다. 어쨌든 서둘러야 한다. 나들이옷과 신발을 준비해놓고 갈아입을 속옷을 챙긴다.

잠을 자고 일어나면 어디든 가야 할 곳이 있어야 한다. 갈 곳이 없어 집에만 머물러야 한다면 자신을 어둠 속에 가두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학생은 학교에, 직장인은 회사에, 농부는 들판으로 나가야 하루가 즐겁다. 집을 나서기 전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고 크고 작은 준비물을 잘 챙겨야 외출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외출은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디딤돌이다.

외출할 때마다 샤워한다. 아무리 바빠도, 밥은 안 먹어도 샤워를 꼭 하고 나간다. 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한 목적은 없으나 샤워를 하고 용모를 단정히 해서 나가면 발걸음이 가볍고 기분도 상쾌하다. 집에만 있는 날에는 얼굴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는다. 급한 연락을 받고 세수만 하고 나갈 때는 용무가 끝나자마자 귀가하려고 신경을 쓴다. 언제부터 그런 습관이 만들어졌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으나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몸에 배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새 팬티와 러닝만 챙겨 욕실로 들어간다. 사람들은 샤워할 때 10분 정도면 웬만한 이물질을 씻어내는데 충분한 시간이라고 하지만 나는 적어도 3·40분이 소요된다. 나에게 샤워 시간은 몸을 씻는 일 외에 스트레칭과 면도하는 과정이 포함된다. 그중 면도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다른 남자에 비해 신체의 이곳저곳에 털이 많은 편이다. 털이 많은 걸 좋아하거나 남자답게 보이려고 일부러 기르는 사람도 있으나 나에게는 큰 고민거리다. 구레나룻과 콧수염을 사나흘 깎지 않으면 역사드라마에 나오는 산적 두목처럼 보인다. 게다가 대학 신입생 시절에 생긴 트라우마도 있었다.

1학기를 마친 초여름, 테니스 동아리 회원 십여 명이 통영의 비진도 해수욕장으로 1박 2일 MT를 갔다. 반바지를 입고 민박집 우물가에서 쌀을 씻고 있을 때 찬거리를 장만하기 위해 여학생 두 명이 왔다. 함께 잡담을 나누던 중 여학생 한 명이 깜짝 놀라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친구가 왜 그러냐고 묻자, “저 다리에 털 좀 봐. 무슨 짐승 같아.”라고 말하며 나의 종아리를 가리켰다. 나는 ‘짐승’이라는 말에 모멸감을 느끼며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하던 일을 제쳐 놓고 남자들 방으로 달려갔다. 반바지 대신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이불장에 기대어 앉은 채 눈을 감았다. ‘내 몸에는 왜 털이 많을까.’ 온몸에 털을 가위로 자르고 족집게로 확 뽑아버리고 싶었다.

40대 초반까지 반바지는 집에서만 입었다. 반바지를 입고 외출하면 사람들이 짐승이라 놀리며 깔깔거리지 않을까 하는 두렵고 창피한 생각에 엄두를 내지 못했다. 여름철 강이나 바다로 지인들과 피서를 가면 물속에 오래 머물러 있거나 아예 긴바지를 입고 평상에 앉아있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인간은 내면에서 발생하는 불안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 기제防禦機制’를 갖고 있다는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나는 도피와 억압으로 불안감을 극복하려고 노력했다. 다른 사람이 찾아낼지도 모르는 나의 단점을 꼭꼭 감추고 싶었다.

아내가 “당신 다리 쳐다보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라고 십수 년을 설득했으나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언젠가 상가 마트에 가던 중 무심결에 반바지를 입고 나왔다는 것을 알았다. 하는 수 없이 빠른 걸음으로 마트에 오가며 행인들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나의 외모에 눈길을 보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제 나이가 들어 다리에 털도 많이 없고 낯가죽이 두꺼워져 부끄럽고 창피한 생각도 들지 않는다. 무더운 여름철 반바지를 입고 시장에 가면 너무 편하고 시원해서 좋다.

칫솔질한 후, 목 허리 팔다리 손목 발목 운동을 한다. 작년에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적잖이 다루면서 키보드를 계속 두드리는 작업을 하다가 어깨와 팔에 통증이 생기는 ‘VDT 증후군’에 걸려 몇 달을 고생했다. 이제 욕실에 들어오면 뭉친 근육을 풀어주기 위해 그때그때 필요한 스트레칭을 간단하게 한다. 특별한 운동 효과가 없을지 몰라도 아이들이 목욕탕에서 뛰어놀 듯 한바탕 몸을 휘젓고 나면 나를 위해 뭔가를 했다는 성취감과 만족감을 느낀다.

입었던 내의를 홀랑 벗고 면도를 준비한다. 피부 보호를 위해서는 전기면도기를, 깔끔한 면도를 위해서는 칼 면도기를 사용해야 하지만 나는 깔끔한 쪽을 선호한다. 십여 년 전까지 면도하던 중, 입술이나 턱 주변을 면도칼에 베어 피를 흘린 적이 가끔 있었다. 피를 흘리면서도 면도는 중단하지 않았다. 지금은 3중이나 5중 날로 제작된 칼 면도기가 나와 그럴 염려는 거의 없다. 눈 아랫부분부터 목, 가슴 부분까지 면도용 거품을 여러 번 문지르고 벽면 거울을 보며 면도를 시작한다.

거품 가면을 쓴 거울 속의 나와 면도를 하는 내가 서로 묻고 답한다. “너는 외모와 심성 중 무엇을 더 중하게 여기냐?” “가식적으로 마음이 더 소중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솔직히 둘 다 중요하게 생각한다.” 공원에 가면 깨끗한 벤치를 선택하여 앉듯이 용모가 단정하면 사람들과 거부감 없이 만나 속마음을 털어놓고 대화할 수 있다. 무슨 일이든 형식과 내용은 별개가 아닌 함께 소중하게 다루어야만 전체가 빛날 수 있다. 후박한 마음씨에 깔끔한 외모가 더해지면 그야말로 금상첨화다.

샤워는 심신의 건강과 휴식을 위해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상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몇십 년 전까지는 부유층만 할 수 있었으나 요즘은 애완동물까지 샤워를 시켜주는 시대다. 샤워는 가끔 공포영화의 사망 플래그나 멜로 영화의 성적 매력을 어필하기 위한 수단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꼭 변태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다른 사람의 일기장이나 사생활을 몰래 보고 싶은 호기심이 조금은 있다. 시나리오나 소설 작가들이 그러한 심리를 적절하게 활용하기 위해 샤워 장면을 삽입한다.

물 온도를 적당하게 맞추고 샤워를 한다. 샤워는 몸보다 마음을 씻는 물세례의 시간이다. 참된 종교인이 되기 위해 세례를 받듯 머리부터 발끝까지 소나기를 맞으면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이다. 샤워기를 최고 강하게 틀면 흘러내리는 비눗물이 피부 속으로 스며들어 육신의 일부처럼 자리 잡은 헛된 욕망을 분쇄해 몸 밖으로 배출시킬지도 모른다. 온몸을 세차게 두들겨 맞으며 어제를 반성하고 깨우치는 이 순간은 어떤 고해성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성스러운 시간이다. 누군가 내 이마에 손을 얹고 기도라도 해주었으면 좋겠다.

사람 몸에서 손이 닿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곳을 수필가 최민자 작가는 「외로움이 사는 곳」이란 작품에서 ‘아무리 애를 써도 만져지지 않는 견갑골 등성이 아래 후미진 골짜기’라고 표현했다. 그곳이 유별스레 가려울 때가 많다. 그래서 ‘나이 들면 등 긁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이나 효자손이라는 도구가 생겼을 것이다. 비누 거품을 머금은 30㎝ 정도의 샤워용 수건 끝자락을 양손으로 잡고 가로세로 대각선 방향으로 등을 문지른다. 그렇게 한다고 가슴속 깊이 숨어있는 외로움을 쫓아낼 수 없지만, 사람을 만나 대화를 하거나 음식을 먹는 도중에 등을 간질이는 행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 등은 혼자 있을 때만 외로워야 한다.

마른 수건으로 전신의 물기를 말끔하게 훔쳐낸 후, 습기 찬 뿌연 거울을 닦는다. 다이빙 선수가 물속에서 나오듯 머리 얼굴 가슴 순으로 나신이 조금씩 드러난다. 우화등선하여 하늘에 오른 것 같은 기분이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스킨과 로션을 듬뿍 바른다. 특히 마른버짐이 가끔 생기는 눈가와 볼에는 한 번 더 바르고 비벼 외출 시 불쑥 나타나지 않도록 미리 단속한다.

외출 준비의 마지막은 빗질이다. 쿠션 브러시로 머리의 전체적인 윤곽을 잡고 꼬리빗으로 세세한 모양을 만든다. 가르마를 어느 쪽으로 탈까, 앞머리를 올릴까 말까 고민하다가 원래 하던 대로 한다. 변화는 새롭지만 내내 신경이 쓰인다. 드라이기 대신 맨손으로 머리를 매만지며 오늘도 즐겁게 의미 있는 하루를 만들자고 다짐한다.

집을 나서기 전, 한 번 더 거울을 본다. 거울 속에 괜찮은 남자가 미소를 짓고 있다.



양희용 님은 필명 양일. 충남 금산 출생 · 고등학교 교사 명예퇴직. 수필과비평 신인상 수상(2015) ·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상(2016) • 부산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2017) - 제5회 금샘문학상 수필 부문 대상(2013) · 수영구문화예술문인회 우수작가상(2019) - 부산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2019) - (수필과비평》 올해의 수필 10선 선정(2020) - 부산문인협회, 수영문인회 회원 • 부산수필과비평작가회의 감사 · 부경수필문인협회 홍보국장 - 부산수필문인협회 사무국장 • 수필집 『꽃놀이패 (2017), 산복도로 계단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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