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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밀삐 / 김장배

부흐고비 2022. 2. 20. 08:29

2021년 신라문학 대상

지게를 멘 토우가 뚜벅뚜벅 걸어온다. 등 뒤엔 커다란 항아리가 얹혀 있다. 둥글게 흘러내리는 얼굴엔 슬쩍 엷은 미소가 번진다. 팔을 뻗고 무릎을 약간 굽힌 채 힘차게 걷는 모습이 이제 막 집으로 돌아오는 아버지 같다. 용강동 고분에서 발견된 통일신라시대 토우 중 ‘지게를 진 인물상’이다.

지게를 등에 지고 다닐 수 있도록 하는 어깨끈이 밀삐다. 평형수가 선박의 균형을 유지하듯 지게가 흔들리지 않게 잡아주고 무게를 지탱해주는 역할을 한다. 잘려 나간 토우의 왼쪽 팔은 필시 밀삐를 단단히 움켜쥐었으리라.

시골의 삶은 다들 척박했다. 논밭이 적었고 그마저 땅 힘이 약해 많은 사람이 풀뿌리죽으로 끼니를 때웠다. 더벅머리 같은 초가지붕 아래 아이들은 왜 그리 줄줄이 많은지. 뉘 집 할 것 없이 굶주림에서 벗어나는 일이 먼저였다. 삼 형제 중 둘째였던 아버지는 스무 살 초반에 혈혈단신 일본으로 떠났다. 잔심부름부터 닥치는 대로 잡일을 하다 어렵사리 전기회사에 들어갔다. 하지만 심한 교통사고를 당해 수 년여 만에 귀국하고 말았다.

고향에 돌아와서도 덜 아문 상처와 정신적 고통으로 여러 해 동안 고생을 겪었다. 어느 정도 회복이 된 다음 일본에서 모아온 돈으로 낡은 운반선을 한 척 구매할 수 있었다. 연안 화물을 싣고 나르는 배는 전 재산이나 다를 바 없었다. 추운 겨울 어느 날, 부산에서 묵호로 짐을 싣고 가는 도중 풍랑을 만나 좌초당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아버지와 선원들은 배를 버리고 간신히 바위에 피신했다. 마을 사람들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건졌지만 집안 형편은 난파선처럼 기울어지고 말았다.

어릴 적 우리 집엔 지게가 넷이나 되었다. 아버지, 형, 나와 동생 것이었다. 요즘은 경운기를 비롯한 농기계들이 많지만 그때는 지게가 없으면 농사를 짓지 못했다. 방학이나 휴일이 되면 어김없이 집안일을 거들었다. 산에서 땔감을 옮기거나 논밭에 퇴비를 나를 때, 추수한 농작물을 거두어들일 때도 지게는 요긴하게 쓰였다. 때론 커다란 짐을 지고 나를 땐 밀삐가 우리를 짊어진 것처럼 어설펐지만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익숙해졌다.

어느 날, 마당에서 타작한 보리 한 포대를 지게에 얹었다. 마침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 혼자 옮겨보기로 했다. 평소보단 좀 무거운 무게였으나 가족들에게 대견스럽게 보이고 싶은 욕심도 슬며시 생겼다. 밀삐를 단단히 붙잡은 다음 등으로 지게를 살짝 밀어 작대기를 분리한 후 일어서려다 그만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겨우 보리 한 포대도 제대로 질 수 없는데 아버진 그처럼 무거운 짐을 지고 어떻게 평생을 살아냈을까 싶었다.

사진 속 토우가 황금색으로 빛난다. 항아리를 짊어진 인물상의 모습이 편안하게 보인다. 자세히 보면 몸과 지게가 밀착되어 거의 빈틈이 없다. 몸은 지게를 받치고 지게는 몸을 의지하면서 평생을 동고동락했기 때문일 것이다. 항아리 속엔 필시 가족들의 끼니가 될 곡식이 가득 찼겠다.

화물선 사건이 있고 난 뒤 아버지는 부산으로 내려가 간신히 일자리를 얻었다. 마른오징어와 명태 등의 건어물을 일본으로 수출하는 회사의 창고지기였다. 겨울에는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았고 식사와 잠자리도 변변찮았다. 그렇게 번 돈으로 멸치잡이 목선을 한 척 샀다. 해상 사업의 미련을 버리지 못해서였다. 두 해 정도 운영했으나 이 역시 재미를 보지 못하고 빚만 진 채 접고 말았다. 보통학교를 나와 한학을 공부한 아버지는 농사꾼도 사업가도 제대로 되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어느 해 형이 맹장염 수술을 받았다. 요즈음 같으면 큰 병도 아니겠으나 그때는 의료수준이 지금 같지 않았다. 더욱이 지방의 경우는 더 나쁜 상황이었다. 세 번이나 수술한 후 겨우 목숨은 건졌지만 의료보험 제도가 시행되지 않을 때라 많은 병원비가 지출되었다. 치료비를 충당하려고 그나마 가지고 있던 논 세 마지기마저 팔고 말았다. 가뜩이나 어려운 가계는 잘못 진 짐처럼 더욱 기울어졌다.

아버지는 해가 갈수록 병원 신세를 지는 날이 늘어났다. 사고로 다친 부위가 자주 헐었고 감기를 비롯한 잔병도 수시로 찾아왔다. 그러는 중에도 정작 당신은 성하지 못한 몸으로 거름을 옮기고, 김을 매고, 장작도 마련하곤 했다. 급기야는 쓰러져 자리보전할 때까지 밀삐는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아버지는 삶의 무게에 짓눌려 몇 차례나 넘어졌다. 이국에서의 교통사고와 화물선 난파, 멸치잡이 어선의 부도로 실패의 연속인 삶이었다. 하지만 가족이라는 짐은 결코 벗어버릴 수 없는 것이었다. 비틀거리다 쓰러지면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섰다. 밀삐를 단단히 메고 작대기로 힘차게 딛고 앞만 보며 걸었다. 어느 날, 어깨에 멘 짐을 내려놓았을 때 몸은 죄다 해지고 뭉그러졌지만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우리는 당신의 희생으로 무사히 성장했고 나름대로 사회에서 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밀삐는 무거운 짐만 진 건 아니었다. 가끔 나뭇짐 위에 진달래나 찔레, 청미래덩굴을 꽂아왔다. 어떨 땐 어른 팔뚝보다 굵은 칡을 얹어오거나 개암을 주렁주렁 매달아 오곤 했다. 일이 없어 쉴 때는 어린 우리들을 태우곤 마당을 몇 바퀴씩 돌아주었다. 팍팍한 삶의 한가운데를 힘겹게 지나가면서도 노동을 놀이로 바꾸는 여유도 있었다. 나는 커서 아버지만큼만 될 거라고 자주 다짐하곤 했지만 실패만큼은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살면서 어려울 때마다 아버지의 음성이 들리곤 한다. “얘야! 삶은 무거운 것도 가벼운 것도 아니란다. 누구든 자신만의 짐을 지고 한평생을 살아간다. 삶에도 요령이 있지. 몸의 중심을 한곳에 집중한 후 긴장을 놓지 않아야 한다. 짐을 지려면 먼저 밀삐를 단단히 메고 무릎을 굽혀야 되는 법. 넘어질 것이 두려워 일어서는 것을 포기하면 안 된다. 높은 곳보다 평지일 때가 더 힘이 든단다.”

토우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아버지의 눈물과 한숨과 기쁨이 생각난다. 한시도 등에서 짐을 내려놓은 적이 없었던 당신은 토우가 아니었을까? 자꾸만 느슨해지려는 밀삐를 다잡으며, 무릎에 불끈 힘을 주고 내일을 향해 힘차게 한 발을 내딛는. 뭉툭한 손 하나가 슬쩍 내 등을 토닥인다.

* ‘밀삐’는 지게에 매여 있는, 지게를 지는 끈을 가리키는 우리말.



김장배 님은 약학박사, 철학박사. 울산광역시 교육위원회 의장 4회 역임. 학교법인 동신학원(울산제일고)을 설립. 2015년 제1회 매일시니어문학상 시조 부문 우수상, 제6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은상 수상했다. 2017년 신춘문예 사상 최고령으로 국제신문 시조 부문 당선. 저서로는 『건강생활의 지혜』와 시조집 『사막개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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