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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환갑 이듬해에 돌아가셨다. 나도 아버지 나이쯤에 세상을 떠날 거라고 마흔 중반부터 생각했으나 덤으로 몇 년을 더 살고 있다. 언론 매체에서 백 세 장수가 일반화된 ‘호모 헌드레드(Homo-hundred)’시대라고 떠드니 최소한 20년 정도는 더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걱정이 교차한다.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수영사적공원과 팔도시장이 있다. 사람 구경도 하고 바람도 쐴 겸해서 가끔 간다. 공원에 갈 때마다 수십 명의 노인이 바둑이나 장기를 두면서 여가를 보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바둑 두는 것을 한참 구경하고 있으면 옆에 있던 어르신이 “어이, 젊은이! 내기 바둑 한판 둘까?”라고 말을 건넨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얼른 시장통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단골 반찬가게 50대 아주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아이고, 어르신. 요즘 어디 편찮으세요? 통 안 오시고.”라며 반갑게 맞아준다. 집으로 가면서 생각해본다. ‘나는 젊은이인가. 늙은이인가.’

35년 전, 아버지는 예순이 되기 전부터 할아버지나 노인이란 소리를 들으며 경로우대를 받았다. 지금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나는 중년도 중노인도 노인도 아니다. 뚜렷한 소속이 없다. 버스나 지하철을 타면 자리를 양보해주는 젊은이가 없고 텅 빈 노약자석에 앉아 가기도 눈치가 보인다. 일반 좌석에 앉아 있다가도 임산부나 유아를 동반한 젊은 부녀자가 타면 자리를 양보한다. 어릴 적 학교에서 배운 공중도덕을 실천하지 않으면 목적지까지 가는 내내 마음이 불편하다.

60대를 시쳇말로 ‘낀 세대’라 한다. ‘낀 세대’는 부모 부양 의무를 고수하는 마지막 세대이자 자신의 노년을 스스로 준비해야 하는 첫 세대, 베이비붐 세대를 의미한다. 사회와 가정이 급속도로 변화하는 과정에 끼여 총대를 메지도, 비겁한 침묵을 방관하지도 못한다. 특별하게 내세울 것이 없지만 젊은이들에게 보수적인 말을 하면 꼰대라고, 일흔이 넘은 어른들에게 진보적인 말을 하면 좌파라고 욕을 듣는다. 60대는 빨강도 녹색도 아닌 노랑이고, 온수도 냉수도 아닌 미지근한 물이다. 젊은이와 노인이 앉아 있는 2인용 의자에 엉덩이만 살짝 걸치고 있는 세대다.

나 같은 베이비붐 세대 남자들은 가정에서도 눈치를 보며 산다. 아내 말에 토를 달거나 아내의 바깥 활동을 간섭하는 남편을 ‘간 큰 남자’라고 한다. 여자들은 남편이 가사를 도와주지 않거나, 아내의 외출 시 이것저것 따져 묻거나, 전화해서 귀가를 독촉하는 경우 이혼당할 빌미를 제공한다고 겁박한다. 나이가 들수록 남자들은 음의 기운이, 여자들은 양의 기운이 강해지는 경향도 있겠지만 가장으로서 권위 의식만 내세워 큰소리치며 살아온 남편에 대한 앙갚음인지 보복인지 모르겠다.

아내들은 남편보다 자식들을 먼저 생각한다. 본인들은 절대 아니라고 말하지만 집안의 행사 날짜를 잡는 일부터 외식 장소와 메뉴의 선택까지 자식들에게 우선권을 준다. 그런 일이 거듭되면서 남편들은 아내의 의견에 아무 대꾸도 못 하고 무조건 따라간다. 자연스럽게 60대 남자들의 집안 서열은 꼴찌다. 애들이 집에 오면 2위에서 4위로 밀려난다. 애완견을 키우는 친구는 서열 5위라며 신세타령을 한다. 아무리 잘못한 게 많아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확고부동하게 서열이 1위였던 아버지가 부럽다.

얼마 전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함께 술을 마시는 특별한 경험을 했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정리하고 싶어 시장통 포장집에서 혼자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청승스럽게 보일지 몰라도 나름 알찬 시간이다. 빈 테이블이 없는 상태에서 단골손님인 듯한 남자 두 명이 들어왔다. 주인아주머니의 간절한 합석 요청에 애주가로서의 동병상련을 느끼며 흔쾌히 승낙했다. 각자의 안주를 먹으며 인사를 했다. 나는 나이와 신분을 먼저 밝혔다. A와 B, 두 사람은 고등학교 동기로 나보다 세 살 적었다. 그들은 나를 형님이라 불렀고 반갑게 잔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안주를 나누어 먹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가족에 대한 불만까지 털어놓기 시작했다.

A는 건축업을 하면서 십여 년 전 부도를 맞고 어려움을 겪었으나 지금은 괜찮은 편이다. 아들 둘 다 결혼시켰다. 부산에서 의사를 하는 큰아들은 병원을 개원해 달라며 친구 아버지들과 비교하고, 서울에서 대기업에 다니는 작은아들은 아파트를 사달라고 요구한다. 게다가 A의 아내는 남편을 능력 없는 남자로 취급한다. 근심도 많고 집에도 가기 싫어 일을 핑계 삼아 회사에서 자주 숙식을 한다. 자식 교육을 잘못시킨 후회와 함께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인테리어업을 하는 B에게는 결혼한 딸과 회사를 그만두고 대학원에 다니는 아들이 있다. 딸은 맞벌이하고, 아들은 원룸에서 혼자 생활한다. B의 아내는 딸 집에서 손주들을 돌봐주고 시간이 나면 아들의 원룸에 가서 찬거리를 챙겨준다. 집에는 가끔 온다. 인물인 훤칠한 B는 얼마 전 대학 때 사귀던 여자와 카톡을 몇 번 주고받았다는 이유로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고 산다. 많은 역경을 이겨내고 열심히 살아온 30년 세월의 공적은 첫사랑에게 안부를 물어본 괘씸죄에 걸려 산산이 깨어져 버렸다.

나는 특별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 술잔만 건네며 고개를 끄덕거려주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상담이자 위로의 표현이었다. A와 B의 일방적인 이야기만 듣고 누가 옳다 그르다를 판단할 수 없지만 두 남자는 아무한테도 말 못 하는 가슴앓이를 술잔으로 털어냈다. 떵떵거리고 사는 것처럼 보이는 60대 남자들의 속을 들여다보면 모두 오십보백보다. 나는 연장자로서 “한번 왔다가는 인생. 즐겁게 삽시다.”라는 마지막 건배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60대 남자들은 민주화운동과 외환위기, 금융위기를 겪었으나 한 가정을 그런대로 이끌어 왔다. 남은 건 주름살과 흰머리밖에 없다. 이제 자식들 뒷바라지에 열성을 다하는 아내의 말에 순종하면서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살아야 한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현실을 피할 수도 벗어날 수도 없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는 말처럼 모든 걸 감사하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여생이 편할 것 같다.

〈아! 옛날이여〉라는 유행가를 흥얼거리며 집으로 털레털레 걸어간다.



양희용 님은 필명 양일. 충남 금산 출생 · 수필과비평 신인상 수상(2015) ·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상(2016) • 부산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2017) - 제5회 금샘문학상 수필 부문 대상(2013) · 수영구문화예술문인회 우수작가상(2019) - 부산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2019) - (수필과비평》 올해의 수필 10선 선정(2020) - 부산문인협회, 수영문인회 회원 • 부산수필과비평작가회의 감사 · 부경수필문인협회 홍보국장 - 부산수필문인협회 사무국장 • 수필집 『꽃놀이패 (2017), 산복도로 계단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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