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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수 시인
1970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났다.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00년 《시안》으로 등단하여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대산문학상, 제3회 질마재해오름문학상 수상.
시집으로 『귀속에서 운다』, 『물오리사냥』 등이 있다.
2004년 대산창작지원금 수혜. 현재 광주대·중앙대 출강.
물오리 사냥 / 이창수
겨우내 물오리 한 마리 잡지 못했다/ 분풀이로 두텁게 얼은 겨울강 내리쳤던/ 돌멩이도 두고 왔다/ 매화꽃 필 무렵 풀린 강물에/ 그 돌멩이 깊이 가라앉았다/ 면면하게 흘러가는 강은/ 상처 하나 입지 않았고/ 영하 10도의 눈밭에 찍힌/ 고적한 발자국도 사라져버렸다/ 다만 강물 속에는/ 구름상여 지고 가는 물오리만/ 물그림자로 어른거릴 뿐이었다//
웅덩이 / 이창수
길바닥에 흙탕물이 고여 있다/ 흙탕물에 비치는 하늘은 깊고 고요하다/ 하늘 위로 새와 구름이 지나간다/ 누군가 그 안으로 들어가 마음의 빗장 지른다/ 새와 구름이 사라진 고요한 대낮/ 시골집 툇마루 위/ 울다 잠든 아이의 눈두덩이에/ 말라붙은 눈물 자국이 보인다/ 손바닥으로 아이의 눈을 닦아주는 그대여/ 누가 이 허방을 살다 가나요//
임자도 / 이창수
옻이 몸에 좋다는 말 듣고 옻닭을 먹었다/ 옻나무만 보아도 가려움에 시달리는 내가/ 한 그릇 깨끗하게 비웠다/ 밤새 핏자국이 맺히도록 온 몸을 긁었다// 의사는 미련한 짓이라며/ 주사를 놓아주고 처방전을 주었다/ 두 달 동안 병원을 드나들어야 했다// 임자도에 갔다가 옻이라는 임자를 만났다// 내 사랑이 늘 그랬다//
옻닭 / 이창수
장터에서 마스크를 쓴 어머니를 만났다/ 닭이 위장에 좋다는 말을 듣고/ 닭을 먹고 좋이 올랐다고 했다/ 가려움이 심해 병원으로 가던 길이라며/ 주사를 맞으면 금방 나을 거라 하셨다/ 옻이 옮을지도 모르니 가까이 모지 말라며/ 마스크를 쓴 어머니는 얼굴을 보여주지도 않고 사라졌다// 겨우내 위장을 앓던 나에게 친구가 닭을 끊여주었다/ 닭을 먹은 다음 날 병원에서 주사를 맞았다/ 젊은 의사는 미련한 짓이라며 다시는 먹지 말라고 했다/ 위장병은 가난한 어머니가 나에게 보내준 김치통 같은 것/ 어머니는 마스크로 얼룩을 가리고 계셨다/.//
반가사유상 / 이창수
늘 의자에 앉아있던 그녀가 보이지 않는다/ 바퀴가 달린 의자에 앉아 원피스자락 늘어트리던/ 잠시 집에 다녀간 것일까, 영영 이 곳을 떠난 것일까/ 오른 다리를 왼족 허벅지에 올려놓고/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던 의자는 우측으로 기울어져 있다/ 그녀의 생각이 치우쳐 있었던 것은 아닐까/ 치우쳐 있으면 상처를 불려오기 쉽다/ 지난 겨울 난로를 향한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사탕을 입안에 넣고 굴리길 좋아하던/ 그녀가 보이질 않는다, 검정 바퀴의 빈 의자가/ 보이지 않는 그녀의 그림자를 끌어안고 있다/ 나는 자주 그녀의 망막을 훔쳤으나/ 번번이 그녀의 심중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녀는 어디로 가고 싶어 했을가/ 산이 내려다보이는 겨울의 중턱/ 햇볕을 등진 나무들이 만들어 내는 깊은 그림자/ 그녀의 기억에 깊은 늪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천년의 세월로는 결코 지울 수 없는/ 겨울의 깊은 골짜기를 지나 冬眠 에 든 것일까/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내 망막으론 결코 잡을 수 없는 그녀의 슬픔만/ 시름 깊은 의자에 남아 있는데/ 그녀는 지금 어디로 입적했을까//
작명 / 이창수
어머니가 사슴벌레를 잡아왔다/ 사슴벌레는 사슴을 닮지 않았다/ 커다란 뿔이 차라리 코뿔소를 닮았다/ 파란 플라스틱 통 안에서/ 유유자적하는 사슴벌레의/ 다른 이름을 생각해 봤지만/ 새로 이름을 짓기란 쉽지 않았다/ 작은형이 갓 태어난 딸아이를 데리고/ 시골로 내려온다고 했다/ 늙으신 아버지가 백지에다가/ 종일 무언가를 쓰고 지웠다/ 햇볕에 목단이 붉어진 여름/ 사슴벌레가 플라스틱 통 안에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어디 시 한편 쓰기가 그리 쉽나 하면서//
무거운 걸음 / 이창수
주검을 누르고 있는 저 무거운 바위는 삶의 고달픔을 나타내는 청동기인들의 흔적이 아니었을까. 다시는 이 무서운 세상으로 나오지 말라는 비원의 무게로 수천년 동안 엎드려 있던 바위들. 유난히 고인돌이 많은 이 마을은 송장의 진을 먹고 자란다는 진달래도 붉다. 돌무덤과 진달래로 아득한 강가 걸으면, 강물에 잠겨 있는 무거운 구름. 먹구름에 돌 던지면 강은 이마 가득 주름 잡으며 가슴에 무덤 쌓는다. 가뭄에 한 번씩 속 드러내는 강바닥엔 지상보다 많은 돌무덤이 쌓여 있다. 강물에 잠긴 구름이 지상의 바위보다 무거운 까닭 알겠다.//
함평세발낙지 / 이창수
낙지를 먹을 땐 머리부터 천천히 꼭꼭 씹어야 한다/ 무심코 다리부터 입에 넣을작시면/ 뻘밭에서부터 솟구쳐나오는 힘/ 바다로 미끄러지는 꿈/ 땡볕으로 자라나는 뼈마디의 저항이/ 정수리에 달라붙어/ 한꺼번에 당신을 뻘밭으로 끌어당길 것이다/ 토막을 내어도 끊임없이 달려드는 그 고집/ 진흙 속에서 끌려나올 때는/ 사나운 파도와 닮은 성깔이지만/ 젖은 몸 달빛에 말릴 때에야/ 비로소 부드러운 마음 드러내는/ 함평돌머리 바다의 세발낙지/ 몸 안에 응어리져 있던 모든 껍질 다 버리고서도/ 너룬 바다 빛나는 물결 끝내 잊지 못하는 녀석/ 시장바닥, 바닷물 뽀글거리는/ 고무물통에 담겨 함부로 흐물거리지만/ 그대 튼튼한 이빨로는 결코 끊을 수 없는/ 문드러진 눈물과 날 세우는 파도의 꿈/ 개펄의 응집력으로 키우고 있다//
일심(一心) / 이창수
어깨에 一心이라는 문신을 새긴 사내가 목욕을 하고 있다. 열탕에 몸 담그고 두 눈 꼭 감고 있는 이 사내의 몰골에서 젊은 시절의 무용담을 느끼기는 힘들다. 기껏해야 어물전 노인들 상대로 자릿값이나 뜯었을 행보가 엿보일 뿐이다. 사내의 一心에게 들키지 않을 만큼의 거리에서 사내의 흰머리를 본다. 지난날 민주화 운동을 하였을 리는 만무하고 좁은 어깨로 무리를 이끌었을 리는 더더욱 가망 없어 보이는 사내의 一心이 보일 듯 말 듯 열탕에 잠겨 있다. 사내가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사내의 어디에도 잠룡의 기개는 보이질 않는다. 목욕탕에 희미하게 떠 있던 一心이 사내를 따라 휑하니 밖으로 나가버린 뒤 열탕에 앉아 오래전 열망이었던 그대를 생각한다. 그대를 내 몸에 뱀이나 용으로도 새겨 넣지 못했던 용렬함으로 고백하건대 나에게는 一心이 없다. 나에게 없는 一心인 오래전 그대를 지금 무슨 면목으로 뒤돌아볼 것인가!//
가족사진 / 이창수
할머니를 중심으로/ 우리 가족은 카메라를 보고 있다/ 아니, 카메라가 초점에/ 잡히지 않는/ 우리 가족의 균열을/ 조심스레 엿보고 있다/ 더디게 가는 시간에 지친 형들이/ 이러다 차 놓친다며/ 아우성이다 하지만/ 이미 무너지기 시작한 담장처럼/ 잠시 후엔 누가 붙잡지 않아도/ 제풀에 지쳐 제각각 흩어져/ 갈 것이다/ 언제나 쫓기며 살아온 우리 가족/ 무엇이 그리 바쁘냐며/ 일부러 늑장을 부리시는/ 아버지의 그을린 얼굴 위로/ 플래쉬가 터진다/ 순간, 담장을 타고 올라온/ 노오란 호박꽃이/ 푸른 호박을 끌어안고/ 환하게 시들어간다//
허물 / 이창수
벚나무 둥치에 허물만 남은 매미가 있다/ 소리란 소리 여름 들녘으로 죄다 쏟아버린/ 침묵이 전부인 매미의 허물/ 매미의 결가부좌는 나무에 매달린 자세다/ 일순간 꽃을 버린 벚나무 가지에/ 낮달이 희미하게 매달려있다// 매달리는게 허물만은 아닌 모양이다//
바퀴벌레의 집 / 이창수
벽에 사는 바퀴벌레, 천장과 벽이 만나는 아슬아슬한 이곳이, 그의 집이다. 추락하기 쉬운 지점에 그의 생활이 있다. 내 시선의 가장 불안한 곳에 사는 이놈, 시집 한 권을 뽑아들고 다가가니. 벽에 난 미세한 틈, 자신의 몸보다 좁은 균열로 몸을 숨긴다. 균열 속에 사는 바퀴벌레의 집. 너무도 추락하기 쉬운 곳에 있다.//
열쇠 꾸러미 / 이창수
서랍을 정리하다가 열쇠 꾸러미를 보았다/ 이사를 다닐 때마다 하나 둘 모아둔 것들이/ 한 꾸러미나 되었다/ 녹이 슨 열쇠를 만지작거리다 보니/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빈 방들이 생각났다/ 하지만 옛 시절이 그리운 것도 어니어서/ 열쇠 꾸러미를 쓰레기 통에 던져버렸다/ 철렁!/ 열쇠들이 소리를 질렀다/ 쓰레기 통으로 들어간 열쇠들이/ 나를 큰 소리로 불렀다/ 나를 여기까지 데려다 주고 돌아가는/ 순한 짐승들이/ 나를 마지막으로 불러보는 것만 같았다/ 철렁!/ 죄를 지은 것처럼 가슴이 저려왔다//
긴 부리를 가진 짐승 / 이창수
강가에서 죽은 두루미를 만났다/ 뼈만 남긴 두루미는 마지막 까지/ 제 긴 부리 강을 향해 뻗었다/ 물고기 잡기 위해/ 해종일 강물에 집중했을 부리는/ 죽음 이후에도/ 날카로움 잃지 않았다/ 두루미의 녹두알만큼 작은 눈구멍으로/ 일몰의 하늘이 보였다/ 날짐승들이/ 캄캄한 어둠을 뚫는/ 긴 부리를 앞세우며/ 어둠 속으로 날아갔다//
신발 / 이창수
신발을 잃어버린 사람보다 불쌍한 사람은 없다/ 아무리 값비싼 옷을 잃어버려도/ 맨발로 돌아오는 사람보다 불행하지는 않다/ 저물녘 반포대교 아래에서/ 날 저물도록 신발을 찾는 사내를 보았다/ 오래 전 잃어버린 신발 때문에/ 귀가를 미루는 가장을 만났다/ 부도가 난 그의 신발 공장 때문이 아니라/ 여태 가라앉지 않고 떠다니는/ 물거품 같은 신발 한 짝을 찾아다니는 초로의 사내/ 맨발로는 도저히 집으로 돌아갈 수 없기에/ 그는 남은 신발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물거품으로 떠돌고 있는 것이리라/ 너덜너덜한 어둠으로 흘러들어가는 저 사람이/ 오래 전 잃어버린 내 신발 같아서/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고집 센 염소 / 이창수
몇 년 만에 고향에 돌아와 보니/ 한 마리 염소만 남아 빈집을 지키고 있다/ 근처 풀밭으로 염소를 몰고 가는데/ 콩밭이며 고구마밭 눈에 보이는대로 달려든다/ 여린 잎사귀부터 기시돋힌 아키시아 줄기까지/ 닥차는 대로 집어 삼켜야 직성이 풀리는/ 욕망의 관을 쓴 염소/ 이놈의 고삐를 팽팽하게 당기다 보니/ 나를 고집 센 염소로 비유하던 어머니 생각이 난다/ 껍질부터 뿌리까지 송두리째 던져주고도/ 게걸스럽게 자신을 먹어치우는/ 내 욕망의 관 용케도 받아주시던/ 언제나 가슴 속 푸른 풀밭으로 남아있는 어머니/ 자꾸만 벼이삭을 향해 달려드는/ 저 한 마리 고집 센 염소/ 회초리로 내려치며 운다/ 용서해다오 용서해다오//
남산 위의 저 소나무 / 이창수
1// 트랜스젠더와 주차장 영감이 싸웠다/ 영감이 트랜스젠더에게 싸가지 없는 놈이라고 부른 게 발단이었다/ 트랜스젠더는 차라리 년이라고 불러주었으면/ 이렇게까지 화가 나지 않는다고/ 싸움을 구경하는 미국인들에게 호소했다/ 미국인들이 년과 놈의 차이를 이해하는지 알 수 없지만/ 트랜스젠더의 호소에 환호로 답했다/ 호소의 힘은 언어의 밖에 있다/ 광산의 고싸움이나/ 청도의 소싸움처럼/ 이태원에도 년과 놈이란 호칭 때문에/ 밀고 당기는 몸싸움이 있다//
2// 가브리엘이 왔다/ 그는 민중의 지팡이답게 지팡이를 들고 왔다/ 가브리엘을 보자 트랜스젠더의 바지춤을 잡고 있던 영감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트랜스젠더는 긴 손을 휘둘러 영감의 벗겨진 민머리를 내리쳤다/ 가브리엘의 등장으로 영감은 기고만장했지만/ 양성애자인 가브리엘은 어느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았다//
3// 가브리엘의 임무는 이해 불가한 싸움을 말리는 데 있지만/ 년과 놈에 대한 개념이 확실한 영감을 설득할 수가 없었다/ 영감은 그게 있으면 남자고 없으면 여자라는 입장이었다/ 서로에 대한 몰이해가/ 물리적 충돌로 이어진다고/ 미국과 이라크의 싸움도 같은 이치라고/ 주차장 영감을 설득했지만/ 고추 달린 게 놈이지 년이야!/ 소귀에 경 읽기였다//
4// 가브리엘의 등장으로 싸움은 끝났다/ 이놈저놈 이년저년/ 미국인들도 싸움의 원인을 아는 것 같았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싸움의 원인보다는/ 싸움의 결과를 더 중요하게 여겼다/ 미국인들은 새로운 전장을 찾아가고/ 트랜스젠더는 경찰서로/ 영감은 다시 주차를 시작했다/ 흑인과 백인 동남아인과 동북아인들이/ 바쁘게 서로의 자리를 바꾼다// 유목민은 초지를 찾아서/ 농경민은 초지를 불태워 밭을 갈고//
5// 아담의 갈빗대로 이브를 만든 것은/ 아담의 쓸쓸함을 달래주기 위한 하느님의 배려다/ 세상의 쓸쓸함을 지우기 위해/ 저 많은 술집이 생겨났다/ 세상의 모든 쓸쓸함은 술집으로 흘러가고 술집에서 나온다/ 쓸쓸함을 잊기 위해/ 아담의 후예들이 술을 마신다/ 쓸쓸함을 지우기 위해 서로 멱살을 잡고/ 남의 일에 참견하다/ 더 큰 싸움으로 번지기도 한다/ 태초에 쓸쓸함이 있었다//
6// 싸가지 없는 비가 한 달이나 내렸다// 지하에 물이 차서/ 트랜스젠더들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빗소리만 남았다// 애국가에 나오는 남산 위의 저 소나무가/ 어떤 소나무나무를 지칭하는지 궁금해/ 우산을 쓰고 남산으로 산책 갔다// 안익태 선생이 외국 생활을 너무 오래했나?/ 남산 위의 저 소나무는 찾을 수가 없었다/ 중국인들과 일본인들이/ 남산타워에서 시내의 전경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7// 주차장 영감은 그게 있지만/ 남자 구실을 못하고/ 트랜스젠더도 그게 있지만/ 여자로 대접 받는다/ 트랜스젠더는 자신의 용기로 몸을 바꾸려하고/ 주차장 영감은 자연의 섭리를 받아들이라 한다/ 의지와 순응 사이에서 폭력이 발생하는데/ 이태원에서는 종종 있는 일이다//
대흥사 / 이창수
사내들이 화투장 뒤집는 동안/ 여자들은 찜통에 개를 삶는다/ 동백나무가 동박새와 화냥질하는 동안/ 초록의 장삼가사로는 다 덮을 수 없는/ 황홀한 세속에서/ 누군가 오래오래 공염불 읊는다// 찜통에 개를 삶던 오래전 그 여자는/ 화투장 뒤집는 나를 보고 깔깔거리고/ 저녁을 뒤집어도 아침이 오질 않는/ 동백 청동 그늘 아래/ 누군가 오래오래 공염불 읊고 있다//
나비 / 이창수
아이를 업고 다니던 미친 여자가 있었다/ 내가 던진 돌이 그 여자 머리에 맞았다/ 그게 죄인 줄도 모르고/ 종일 그 여자 머리를 노리고 다녔다/ 내가 던진 돌이 쌓여 돌무덤이 되었다// 목단 밭 돌무덤에서 나비가 날아온다/ 눈에 핏발이 서도록 나비는 나만 따라다닌다//
3월에 내리는 눈 / 이창수
3월에눈이 내리네/ 3월에 내리는 눈은/ 땅에 닿기도 전에 녹아버려/ 발자국 하나 남길 수 없네// 그 무엇 하나 새길 수 없는 마음으로/ 3월에 내리는 눈을 보네/ 우우우우 유리창엔/ 바람의 한숨만 쌓이고// 유리창에 흘러내리는 긴 눈물 지우며/ 어둔 창의 뒤편에 골몰하다보면/ 가닿을 수 없는 자리마다/ 오래된 사람의 발자국이 보이네// 삼층석탑 구름이 무너져/ 3월 하늘에 눈이 내리네//
비석거리 / 이창수
누렁소가 된똥을 싸며 집으로 돌아가던 여름날 저녁 이기권과 친구들이 비석거리를 지나가던 여학생들을 둘러쌌다. 무서워서 울음 터트리던 여학생들과 달리 용감한 여학생 하나가 남학생들의 포위를 뚫고 잽싸게 달려가서 논밭에서 돌아오는 마을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멀리서 마을 사람들이 쫓아오자 남학생들이 놀라 도망 쳤다. 친구들은 저만 살겠다고 도망가고 발이 느린 이기권이 맨 뒤로 쳐졌다. 이기권이 큰소리로 친구들을 불렀지만 힘을 다해 도망치는 친구들과 거리가 점점 벌어졌다. 마을 처녀들을 희롱한 놈들을 잡으러 가던 빨간 오토바이가 다가왔다. 이제 죽었구나! 생각하는 찰라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이놈들아 거기 서! 이기권이 친구들을 향해 고함을 쳤다. 빨간 오토바이가 이기권에게 용감한 젊은이라고 칭찬하며 지나갔다. 이놈들아 거기 서! 바퀴에 살이 통통하게 오른 자전거가 지나가면서 이기권에게 사내답다고 했다. 지쳐 기어가다시피 도망가는 이기권에게 동네 노인들이 경운기에 타라고 했다. 얼떨결에 경운기에 올라 탄 이기권에게 노인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논으로 산으로 도망 친 친구들은 잡히지 않았다. 빨간 오토바이와 자전거가 씩씩거리며 돌아왔다. 이렇게 마을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동네 처녀들을 지켜냈으니 막걸리나 한 사발 하자고 이장이 나섰다. 용감한 여학생이 고개를 꺄우뚱하며 이기권을 바라보았으나 시치미를 떼고 어른들이 따라주는 막걸리를 마셨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이기권이 아카시아 향기 날큼하게 날리는 비석거리를 지나 집으로 돌아올 때 깔깔깔깔 여학생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고 했다. 군에서 제대한 후 비석거리에 사는 처녀와 결혼한 이기권은 아내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가 가장 무섭다고 했다.//
배롱나무꽃 / 이창수
창 밖 배롱나무에 핀 꽃이 붉다 부끄럼 잘 탄다고 작은형은 배롱나무 둥치를 살살 간지럽히곤 했다 손가락을 대려는 시늉만 해도 사지를 뒤채는 배롱나무에 백일 동안이나 꽃이 머문다 껍질도 없이 나무껍질에 숨어사는 벌레도 없이 매끈하고 단단한 나무에 바람이 스치기만 해도 온몸을 뒤흔드는 민감한 가지에 꽃이 피어나고 있다 예민한 것들은 쉬 져버리는 습성을 배신하며,// 비 맞고 있는 배롱나무꽃이 진다 허공보다 깊은 침묵 흔드는 나뭇가지에서 붉은 반점이 떨어진다 예민한 것들이 져버린 뒤 푸른 몽우리가 가지 끝으로 올라온다 가지마다 피고 지는 다른 시간들 꽃으로 매달고 배롱나무가 흔들린다 가장 가느다란 가지 끝 붉은 반점이 머리채 흔든다 벌레 한 마리 숨기지 못하는 여린 마음으로 작은 상처 하나 감당 못하며,//
목련은 무엇으로 지나 / 이창수
막다른 골목에 카페 레테가 있었다/ 레테에는 나이 스물의 여자와 마흔의 여자가 있었다/ 나는 스물 된 여자의 손금을 보아주었고/ 마흔의 여자는 그런 내 관상을 보아주었다/ 목련의 속살을 엿보듯/ 스물과 마흔의 몸 찬찬히 훑었다/ 막다른 골목의 레테에서 술을 마셨다/ 하지만 지난한 내 하루가 저물도록/ 두 여자 사이에 흐르는 강을 건널 수 없었다/ 스물과 머흔의 중간에서/ 목련이 활짝 치맛자락을 펼쳤다/ 치마가 펼쳐지는 수간 꽃은 시들어갔다/ 손금이나 간상으로는 알 수 없는/ 그 무엇 때문에 나는 늘 쓸쓸하였다/ 꽃은 지고 나무는 제자리에 있었다/ 지는 꽃은 쓸쓸함을 다해 나무를 잊을 뿐이었다//
신림마을 / 이창수
종점 지나 신림마을이 있다/ 신림마을은 나의 빈약한 상상의 세계/ 그 너머에 있다 하지만/ 나는 아직 신림마을에 들어가 본 적이 없다/ 신림마을의 진입로인 신림교 앞 공터엔/ 누구나 마을로 들어올 수 있다고/ 자귀나무가 분홍 등 켜고 있다// 종점으로 이사온 뒤로/ 내가 꿈꿀 수 있는 시간은 아주 짧았다/ 꿈꾸지 못하는 시간을 조금 떼어내/ 종점에서 조금 더 위로 올라갔다/ 신림마을은 없다 대낮부터 우는/ 소쩍새가 내게 속삭였다// 새벽이면 더럽고 축축한 베개를 껴안고 생각한다/ 지금 자귀나무가지마다/ 찢어지게 걸려 있는 등불을 따라가면/ 더 이상 꿈꾸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마을/ 이 궁벽한 산 속 어딘가에 있을 거라는//
기연(奇緣) / 이창수
눈 덮인 무덤에 손자국이 나 있다/ 지상에서 가장 아득한 높이에/ 자리 잡은 봉분 위/ 따뜻한 손가락이 녹고 있을 때/ 선연한 무엇이 이마에 와 닿는다/ 저기 무어라 할까/ 이울어진 목울음으로만 흐르는/ 애잔한 강바람 소리라고나 할까/ 산그늘 배웅해주는/ 치맛자락 스치는 소리라고나 할까/ 무덤 위의 두 손 맞잡아 들이는/ 이 마음을 무어라 부를까//
흰 알약 / 이창수
의사는 불안이 찾아왔다고 했다/ 작고 흰 알약이 든 약봉지를 주었다/ 아지랑이 몽롱한 봄 들녘 걸었다/ 평생 흘릴 땀을 며칠사이에 흘렸다/ 흰 알약을 삼키고 호수를 돌았다/ 수면 가득 벚꽃과 목련이 가득 피었다/ 발 씻고 머리 감는데 훌쩍이는 소리가 났다/ 돌아보면 아무도 없었다//
사슴 / 이창수
명순 씨가 울고 있다// 화장하고 일 나가는 명순 씨에게/ 왜 이렇게 이뻐졌어! 농담 던지면/ 부끄러워 얼굴 붉히는 명순 씨는/ 올해 쉰 살을 넘겼다/ 누구에게도 나이 가르쳐 주지 않던 명순 씨는/ 서울은 몇 살에 올라왔냐?/ 올라온 지 얼마나 됐느냐는 질문에 나이를 들키고 말았다/ 캔맥주나 사과 같은 걸로 내 입 막으려는 명순 씨는/ 화장하면 스무 살로 보인다/ 며칠 전 몸이 아파 일 나가지 못했던 명순 씨가/ 큰맘 먹고 인터넷으로 사슴피 구했다며/ 북간도농장이라는 상표가 붙은/ 파아란 사슴피가 담긴 비닐봉지를 주고 갔다// 북간도농장 사슴피 먹고 일 나갔다 무리에서 쫓겨난/ 명순 씨가 운다// 사슴보다 슬피 운다//
불 구경 / 이창수
숭례문이 불타던 날/ 흑석동 옥탑방에서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누군가 나서서 금방 끌 거라고 믿었다/ 별일 없을 거라고 아랫도리에 손을 넣고/ 옛 애인을 생각하고 있었다/ 숭례문이 무너지는 모습을 티브이를 통해 보았다/ 아랫도리에서 손을 빼고 양동이를 들고 나서야 했지만/ 나는 나가지 않았다// 용산에 불이 났다/ 티브이를 통해 불구경했다/ 여섯 사람이 죽었다고 했다/ 다시 아랫도리에 손을 넣고/ 식어버린 과거의 일들을 더듬었다/ 비겁하다고 자책하면서도/ 아랫도리에서 손을 빼지 못했다// 사는 게 그랬다//
에덴의 저쪽 / 이창수
1// 에덴은 있다./ 에덴은 이태원에 있다./ 에덴은 이태원 성광빌딩 2층에 있다./ 1층에는 성광빌딩의 전월세를 관할하는 하느님의 권능을 지닌 태양부동산 사장님이 계시고/ 2층에는 그 분이 창업하신 에덴고시원이 있다./ 남산과 한강이라는 든든한 배경을 가진/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명당 건너편에/ 에덴이 있고 그 지하에 지옥이 있다.//
2// 성경 밖의 이야기지만/ 지하의 독일산 최신 엠프 때문에/ 에덴 주민들과 트랜스젠더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곤 한다./ 에덴과 지하에서 받는 월세 때문에/ 하느님과 동등한 권세를 가진 태양부동산 사장님도/ 지상과 지하의 싸움을 구경만 하고 있다./ 지상과 지하 양쪽에서 월세를 받는/ 태양부동산 사장님의 권능으로도 해결하기 어렵다.//
3// 에덴주민들이 용산구청과 용산경찰서에 진정을 넣어보았지만/ 용산철거민들이 불에 타 죽은 이후로/ 자기들 소관이 아니라며 두 손 놓고 있다./ 태초부터 시작된 선과 악의 싸움이/ 성광빌딩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북한의 대포동 미사일이/ 이태원에 떨어질 거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에덴 주민들과 지하 2층 트랜스젠더들 사이의 분쟁을/ 북한의 대포동 미사일이 해결하게 되었다고/ 태양부동산 사장님이 혀를 찼다./ 에덴주민들과 트랜스젠더들 어느 누구도/ 용산구청과 용산경찰서가 아닌 조선인민민주의공화국에/ 민원을 제기하지 않았지만/ 이태원에 대포동 미사일이 떨어질 거라고 했다./ 믿음과 소망에 지친/ 에덴주민들과 트랜스젠더들이/ 차라리 잘 되었다고 했다.//
4// 에덴에 트랜스젠더가 잠입했다./ 총무가 트랜스젠더와 여자를 구별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한 달 치 방값을 미리 지불했기 때문에/ 방을 물릴 수는 없다며/ 트랜스젠더와 여자를 어떻게 구별하느냐고 물었다가/ 태양부동산 사장님에게 면박 당했다./ 날씬하고 예쁘고 상냥한 트랜스젠더였지만/ 에덴에서는 환영받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라고 불러야할 지 그녀라고 불러야할 지 난감했다./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헤 하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군 생활은 어디에서 했느냐고 물었다가 뺨을 맞을 뻔했다.//
5// 철쭉이 천천히 혀를 내밀고 있는 대낮에/ 그도 그녀도 아닌 213호가 봉투를 내밀었다./ 그이면서 그녀인/ 그녀이면서 그인/ 213호의 창백한 봉투를 받아들고/ 213호의 긴 손가락을 보았다/ 남자의 성기를 닮은 가늘고 긴 손가락이었다./ 대포동 미사일처럼 보였다./ 아니 발사에 실패한 나로호처럼 보였다.//
6// 하느님의 권세를 가진 태양부동산 사장님이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다./ 에덴과 지옥을 주관하시는/ 태양부동산 사장님의 눈을 피해 총무가 월세를 가지고 도망쳤기 때문이다./ 일찍이 뱀이 이브를 꼬였던 것처럼/ 총무는 그도 그녀도 아닌 213호와 함께/ 선악과보다 귀한 월세를 들고 도망갔다./ 에덴의 선민들은/ 이 모든 게 하느님의 뜻이라고 했지만/ 태양부동산 사장님의 성서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7// 에덴의 뒤뜰에 오동나무가 있다./ 오동나무 잎은 성서에 나오는 무화과 잎사귀보다 크다./ 무화과 잎은 이브의 치부를 가렸으나/ 오동나무 잎은 에덴주민들의 가난을 가려준다./ 오동나무 잎이 가난을 가려준 덕분에/ 에덴주민들 사이에는 차이와 분별이 없다./ 그래서 사람 아래 사람 없다는 말이 실감난다./ 하지만 신들 사이에는 위계질서가 있다./ 공자도 차이와 분별을 禮라고 하지 않았던가!/ 차이와 분별이 없는 사람들을 신은 용서하지 않는다./ 차이와 분별이 없는 사람들은 예의가 없기 때문이다./ 예의가 없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
8// 신과 같은 권세를 지닌 사람들은/ 예의 없는 사람들을 경멸한다./ 신들이 서로에 대해 예의를 차리듯/ 남산 아래 사는 재벌들은/ 재산의 양중에 따라 서로를 존중한다./ 재산의 양중은 서열을 낳고/ 서열은 차별을 낳고/ 차별이 명품을 낳고/ 명품이 명문을 낳고/ 명문이 족보를 만드는데/ 명문가에는 가끔 족보에 없는 처자식이/ 드라마 주인공으로 나온다./ 에덴 주민들은 주로 이런 막장드라마에 정신을 놓곤 한다.//
9// 에덴은 이태원에 있지만/ 이태원에서는 성광교회보다 이슬람사원이 더 유명하다./ 에덴에 살면서 이슬람사원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하지만 누구도 그 이유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는다./ 이태원에 한국군인들 보다/ 미군들이 더 많이 돌아다니는 이유를 묻지 않는 것처럼/ 신성에 대한 호기심은 종종 재앙을 불러오기 쉽기 때문이다./ 에덴은 이태원에 있고 이태원은 용산에 있다./ 용산에 미 8군이 있고/ 미 8군은 서울이 아니라 머나 먼 캘리포니아에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 맹신이 필요하다./ 맹신의 힘은 헤로인보다 강하지만/ 맹신은 두려움에서 나온다./ 에덴주민들은 두려움에 중독된 자들이다.//
10// 이 년 반 동안이나 두문불출하던 태양부동산 사장님이/ 요즘은 아무나 보고 두 손으로 하트를 만든다./ 길을 가다 노인만 보면 목도리를 걸어주고 운다./ 그걸 보고 그 양반 형님 친구가 따라 울더니/ 요즘은 새로 온 총무마저 아무나 껴안고 운다./ 그런 게 신문이면/ 우리 집 화장지가 팔만대장경이라는/ 234호의 말처럼/ 할 말 못할 말 다하는 신문에서/ 그 양반이 먹는 순대와 오뎅을 대서특필했다./ 오동나무 아래 저녁을 먹던 나이지리아 사람들이/ 저 사람들 왜 저러냐고 묻는다./ 러시아 아가씨들이/ 그걸 왜 우리에게 묻느냐고 역정을 낸다.//
11// 태양부동산 사장님이/ 중국에 가서 태극기를 거꾸로 쳐들고 응원을 했다./ 그 전부터 골프 치러 747을 타고 외국을 드나들더니/ 돌아가신 아버지 영정을 보고 안중근씨라고 부르기도 하고/ 한밤중에 아침이슬을 부르기도 했다./ 보광동 노점상들에게 인터넷으로 팔아라 조언도 하고/ 운전면허 시험에 떨어진 222호 젊은 친구에게/ 눈높이를 낮춰 지방으로 가라고 하고/ 공무원들은 서울에서 근무해야지/ 지방으로 가면 효율성이 떨어진다고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에덴주민들에게 이런 말씀을 날리셨다./ 애들아 뻥튀기 사 먹어라!//
12// 에덴은 이태원에 있다./ 에덴은 남산 건너 배수임산(背水臨山)의 흉지에 있다./ 에덴은 용산구에 있지만/ 머나 먼 캘리포니아에 있고/ 이슬람 사원에 있지만/ 미 8군이 관할하는 영내에 있다./ 그러나/ 에덴은 국경 너머에 있다./ 에덴은 국적 너머에 있다./ 에덴주민들 중 몇몇은/ 철거민이 되었지만/ 여전히 에덴 주민들은/ 에덴의 저쪽에 사는/ 신과 같은 분들이 날려 보내는 비둘기가/ 새파란 하늘을 양분하는 지상에서 산다.//
눈, 길 / 이창수
햇살 삼킨 잿빛하늘은/ 찌뿌드드 하더니/ 흰 눈을 뿌리다// 소복 소복/ 머리에 올라앉은 기척에/ 켜켜이 쌓인 기억들/ 뒤돌아 앞장 세우고/ 치근거리는 그리움은/ 가슴에 서리는데// 격절/隔絶/을 자각하는/ 틈바구니에 조용히 세월을 이고/ 덩그러니 눈길을 걷는다/ 멀리서 잡힐듯한 미소가/ 가벼운 손짓에 흐릿하다// 눈 때문이다/ 더럽힌 때 다벗고/ 순결한 세상속으로//
처서 / 이창수
여자가 집을 나갔다/ 고양이가 새끼를 배 왔다// 슬레이트 지붕 위 뒤엉킨 덩굴이/ 꽃을 피워 물었다// 흙벽에 금이 가고 달이 기울었다/ 솔바람이 울면서 산으로 갔다// 먼 산에서 목탁소리가 울려왔다//
세상에서 가장 긴 혀 / 이창수
밧줄에 묶인 강아지가 밧줄과 함께 놀고 있다/ 밧줄을 물고 할퀴며 밧줄에 길들여지고 있다/ 밧줄이 허락한 거리는/ 은행나무 둥치에서 치킨집 유리문까지/ 강아지는 맹렬한 속도로/ 치킨집 유리문을 지나가려다 나동그라진다/ 나동그라지면서도 밧줄 길이보다 더 멀리가려 애쓴다/ 느슨한 자리에/ 주인이 놓아둔 양철밥그릇이 있다/ 밧줄과의 놀이에 짜증난 강아지가 밥그릇을 뒤엎는다/ 곧바로 밧줄의 길이가 짧아진다/ 은행나무 아래 늙은 개가 긴 혀를 내밀어/ 강아지의 잔등 천천히 핥아준다/ 은행나무에서 유리문까지가/ 살아서 갈 수 있는 제 거리의 전부라는 걸 아는 강아지/ 은행나무와 치킨집 유리문에 싼 오줌으로/ 제 영역을 지킨다/ 이윽고 강아지는 밧줄 너머의 세상을 바라본다/ 밧줄에 목이 감긴 강아지가// 지금까지 내민 혀 가운데/ 가장 긴 혀를 주인에게 내민다//
홍어 / 이창수
친구 조현수가 호남 최대의 禮式場에서 결혼했다. 호남 최대의 禮式場에서 결혼한 조현수는 딸과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십여 년 뒤 우리는 조현수의 부고를 듣고 호남 최대의 禮式場으로 모여들었다. 호남 최대의 禮式場의 간판이 호남 최대의 葬禮式場으로 바뀌어 있었다. 달라진 건 한 글자 밖에 없었으나 禮式場과 葬禮式場의 간격은 이승과 저승만큼 멀었다. 아니 빚보증 서주고 갈라선 조현수와 나와의 거리만큼 멀었다. 친구 조현수가 고등학교동창들의 환호와 축가를 들으며 신부의 손잡고 입장하는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일가의 곡소리를 들으며 누워 있었다. 젊은 그의 아내는 호남 최대의 葬禮式場에서 결혼식 때와 마찬가지로 눈물 쏟고 있었다. 결혼식장에서 그녀가 눈물 흘릴 때 하객들이 박수를 쳤으나 이번에는 조문객들이 가슴을 쳤다. 내 친구 조현수가 단 한 글자로 뒤바뀐 이 비운의 건물에서 수의를 입고 조문객들 맞고 있을 때 나는 결혼식 때와 마찬가지로 홍어를 안주로 소주를 마셨다. 조의금 세다 생각난 듯 눈물 흘리는 그의 일가를 보면서 禮式場인지 葬禮式場인지 헷갈리던 나는 박수나 가슴 대신 화투를 쳤다. 조현수의 죽음이 실감 나지는 않았지만 호남 최대의 禮式場이 호남 최대의 葬禮式場으로 바뀌듯 이해되지 않는 슬픔에 무작정 동참하기로 했다. 하지만 여전히 이 건물 간판에 덧붙여진 한 글자에 대해 이해와 동의를 얻지 못하는 조현수와 고등학교동창들 어느 누구도 간판에 덧붙여진 한 글자에 대해 설명하지 못했다. 다만 나는 禮式場과 葬禮式場 어디에서나 빠짐없이 밥상 위에 올라와 있는 홍어에 대해 홍어의 불가해한 맛에 골몰할 뿐이었다.//
여승 / 이창수
여승이 합장 하고 절을 했다/ 화사한 낯이 옛날보다 좋아보였다/ 신사동 어느 실내 포장마차/ 요란한 간판의 비탈과/ 나를 붙잡는 아가씨들을 밀어내고 찾아간 술집이었다/ 약속 시간보다 늦었다며 그녀가 불경스럽게 쳐다보았으나/ 나는 상관하지않았다/ 루이비통을 품에 안은/ 그녀가 술잔을 내밀었다/ 지아비와 어린 딸은 집에 두고 왔다고 했다/ 깨끗한 옷차림과 화사한 낯빛이/ 유복한 절에서 탁발 나온 것 같았다/ 팔만대장경보다 할 말이 많았지만/ 산꿩을 안주로 술을 마셨다/ 소주병으로 돌무덤을 쌓았다/ 코는 세우고 턱은 깎았냐고 물었더니/ 결혼은 했느냐고 받아쳤다/ 곡차를 마시던 비구니 법사 나한들이/ 일제히 머리를 끄덕였다//
* 백석의 <여승> 패러디
투덜거리다 / 이창수
제대한 후에 보니 학과 분위기가 김지하와 김남주에서 황지우와 기형도로 달라져 있었다. 변화에 적응하던지 도태되던지 바다에서 육지로 나온 동물들처럼 나에게도 혹독한 시련이 찾아왔다. 콩나물국에 소주를 마시던 술집 풍경마저 통닭에 맥주로, 바리케이드를 두고 족구를 하자고 부르는데 후배들은 배드민턴이나 테니스를 치러 다녔다. 이런 젠장! 나보다 한 달 뒤에 제대한 예비역은 휴학하고 직장을 찾아갔다. 진화보다는 도태를 선언한 것이다. 불과 2년 만에 빙하기에서 간빙기로 변한 학과의 분위기를 따라가기가 힘에 겨웠다. 그중에서 가장 참기 힘들었던 건 한 학년이 빠른 후배였는데 소월과 만해를 좋아하는 나를 비웃는 거였다. 장석남과 김기택을 모르느냐고? 뭐하는 사람들이냐고 물었더니 힝 하는 콧소리와 함께 등을 보였다. 20대 중반이던 나는 갑자기 노인이 되어버렸다. 바람을 건너 바람 속으로 녀석이 술에 취해 흥얼거리는 콧소리는 시를 쓰는 내내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세월이 흘러 빙하기를 건너 시인이라는 완장을 찬 나는 갑자기 이 후배의 소식이 궁금해졌다. 수소문해서 알아보니 유부녀와 멀리 도망을 쳤다고 했다. 바람을 건너 바람 속으로 녀석은 남의 사랑을 훔쳐 바람 속으로 달아났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는 녀석이 읊조리던 소리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바람이 좋아 바람 속으로 술자리에서 내가 읊조리는 이 소리가 거슬렸던지 늙은 시인이 투덜거렸다. 요즘 젊은 시인들은 이해하기 어려워! 그는 퉁명스럽게 한 마디를 던지고 바람 부는 거리로 떠났다. 이유를 불문하고 투덜거리던 사람들이 하나 둘 사라졌다. 투덜거릴 이유가 없는 사람들만 남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캡틴큐 / 이창수
시골에서 방위병으로 근무하던 나에게 광주에서 고등학교 동창들이 놀러 왔다. 어머니는 친구들을 위해 닭죽을 끓이고 돼지고기를 구워왔다. 낮부터 마시던 술이 한밤에 못미처 바닥을 보였다. 시골이라 점방도 일찍 문을 닫아 술을 구할 곳이 없었다. 친구들을 나에게 술을 구해오라고 아우성이고 궁리 끝에 아버지가 주무시는 방으로 가서 뒤주를 뒤적여 술 한 병 들고 나오려는데 주무시던 아버지가 일어나서 뭐 하느냐고 물었다. 사정을 이야기하고 술을 한 병만 더 마시겠다고 했더니 아버지는 불을 켜 내손에 든 술병을 보시고 이건 내가 가장 아끼는 술이니 다른 걸 마시라고 했다. 친구들은 내 손에 드린 양주 두 병을 보고 환호했다. 이런 시골에도 박정희가 즐겨 마셨다던 양주가 있다니! 우리 집에서는 새참으로 이걸 마신다. 내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근데 아까 너희 아버지가 아끼신다는 술은 뭐야? 얼마나 좋은 술이야 친구가 물었다. 캡틴큐야! 외항선 기관사인 동생이 아버지 선물로 사온 양주는 열병 남짓 있지만 가난한 이모가 사온 캡틴큐는 딱 한 병이 있거든 그래서 아버지가 귀한 술이라고 손도 못 대게 하셔! 친구들은 배를 잡고 방바닥을 굴렀다. 십 년이 흘러 뒤주 속 양주는 내가 다 마시고 먼지를 뒤집어 쓴 캡틴큐 한 병이 남아 있는 걸 보았다. 아버지가 가장 아끼시는 양주. 지금은 자물쇠를 채워 아무도 손을 댈 수 없는 곳에 있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술 한 병.//
지독한 가뭄 / 이창수
아내가 다녀갔다/ 베란다 빨래줄에 매달려 있는/ 양말과 철 지난 옷들이 증거다/ 그 동안 아무것도 담아두지 않았던/ 빈 항아리에선/ 선인장 가시 같은 적막이 거미줄치고 있다/ 흙갈이를 하지 않아 돌멩이보다 단단하게 굳은/ 검은 흙덩이가/ 벌써 여러 해 전에 죽은 고무나무와 함께 말라가고 있다/ 아내는 눈물이 많은 여자다/ 말라 가는 빨래의 소매에서/ 아직도 떨어지고 있는 물방울/ 빈 항아리의 주둥이를 적시고 있다/ 세상이 한증막 같다는/ 죽은 아내의 목소리가/ 햇볕에 달구어진 붉은 항아리에서/ 거미와 함께 올라온다//
종소리 / 이창수
비누가 사라졌다/ 칫솔이 보이질 않아 새로 샀다/ 보름을 두고 허리띠와 속옷이 보이지 않았다/ 새로 산 시집과 읽다만 서적이 사라졌다/ 하루걸러 만나 술을 마시던 친구도 사라졌다/ 머리 위에서 빛을 내던/ 조약별도 가뭇없이 사라졌다// 그래도 집으로 돌아가는 그 길만은/ 머릿속에 남아 있다/ 집으로 가는 길모퉁이 교회당과/ 오리의 꽁지를 물어/ 늙은 집사에게 혼나는/ 강아지는 그대로 남아 있다// 기억에도 힘이 있다/ 집으로 가는 길과 그 풍경 속에 살고 있는/ 오리와 강아지와 늙은 집사와/ 강물 위를 떠다니는 종소리가/ 혼신을 다해 나를 기억하고 있다//
징검다리 / 이창수
젖은 물무늬를 닮은 붕멍치/ 제 몸 크기의 돌 옆에 엎드려 있다/ 물결 따라 꼬리만 흔들지 않는다면/ 영락없이 돌멩이다. 하필 닮을 게 없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돌멩이를 닮았을까// 노인이 징검다리를 밟고 강을 건넌다/ 붕멍치가 놀라지 않게/ 느긋하게 강을 건너는 걸음걸이로/ 소금쟁이가 구름 밟고 하늘을 건넌다/ 죽은 나무 뾰족한 가지에 앉아/ 생을 쉬어 가는 고추잠자리/ 가만 보니,/ 잔물결 위 머리 내밀고 있는/ 돌멩이 하나하나마다/ 길이 되어 주는 것이 아닌가//
봄의 동력 / 이창수
매화나무에서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가 난다/ 울타리에 가지 무성한 매화나무/ 벌들이 구름화물에서 날라 온 석탄 퍼붓고 있다/ 겨울에 어머니는 고운 옷을 입고 화장하고/ 외할아버지 곁으로 아주 떠났다/ 겨울에서 봄까지 나는 아주 쓸쓸해져서/ 어머니 없는 골목에서 오래 서 있었지만/ 매화나무 공장에서 야근하는 일벌들/ 봄을 끌어오느라 분주하다//
봄밤 / 이창수
빈대를 잡으려다 초가를 태운 사람이 뒷집에 산다. 두고두고 동네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던 그 사람이 봄날 죽었다. 마당에서 술 마시고 윷 놓던 사람들 모두 웃음 참느라 죽을 지경이다.//
실종 / 이창수
마루에 모여 저녁을 먹는데/ 늙은 무당이 찾아왔다/ 콩밭에 매놓은 염소가/ 보이질 않는다고 했다, 호박국 그릇에/ 얼굴을 묻고 있던/ 아버지의 얼굴색이 노랗게 변했다/ 아버지의 이런 표정을 알아채지 못한 무당이/ 아까 낮에 분명히 우리 밭 콩잎을 먹고 있는/ 염소를 보았다고 했다, 겹친 깻잎을 뜯던 나는/ 이장을 찾아가 보라고 했다/ 김치를 찢어 동생에게 먹이던 어머니가/ 정 못 찾겠으면 점을 쳐보라고 하자/ 무당이 실성한 염소처럼 사립을 뛰쳐나갔다/ 성황당 뒤 당산나무에 재갈물린 염소가/ 도대체 영문을 모르겟다는 듯/ 두 눈만 깜박거리는 여름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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