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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향미 시인
1961년 경남 거창에서 태어났다.
부산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1986년 무크지 《전망》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그 나무가 나에게 팔을 벌렸다』, 『새의 마음』, 『길보다 멀리 기다림은 뻗어 있네』,
『봄 꿈』 등이 있다.
그 나무가 나에게 팔을 벌렸다 ㅡ녹색 평론을 위하여 / 조향미
지구 저편 어느 먼 숲에/ 햇빛과 바람과 빗방울이 어울려/ 여문 씨앗 하나 우람한 나무로 키웠다/ 벌목꾼과 선원과 노동자와 상인들을 거쳐/ 나무는 숲을 떠나 내게로 왔다/ 매끈매끈한 흰 종이에/ 나는 습작시 몇 편을 담았다가 미련 없이 던진다/ 아무렇게나 툭툭 나뭇가지를 분지른다/ 종이들은 뭉텅뭉텅 휴지통으로 들어간다/ 자판을 잘못 친 손가락에 쿵쿵 거목들이 쓰러진다/ 쓰러진 나무 버려진 종이들은 다시 한 번/ 거무스름한 재생 용지로 살아나기도 했으나/ 사람들은 그깟 것, 시쁘게 여긴다/ 숲은 성글어지고 지구는 숨이 가빠왔다/ 병이 깊었으나 모두들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역사는 불쑥 새로운 얼굴을 내밀기도 한다/ 근심스레 깊은 눈빛 몇몇 사람은 견딜 수 없는 통증을 느꼈다/ 통증은 쓰러진 나무에서부터 왔다/ 그들은 팽개쳐진 재생 종이에 새 숨을 불어넣었다/ 뿌리내릴 땅을 잃고 허공을 떠도는 풀씨의 비애/ 비참히 사육되고 흔적 없이 멸종하는 동물의 절망/ 오만한 제국의 폭격에 짐승처럼 쓰러져 누운/ 굶주리고 짓눌린 사람들의 고통과 분노가 깨어났다/ 또한,/ 대지에 겸허히 허리 굽혀 일하는 사람들의 행복/ 끝없는 경주를 거부한 느린 도보의 즐거움/ 무욕한 가난의 자유로움 공존의 기쁨이/ 거친 재생 종이와 함께 살아나기 시작했다/ 땅만큼 낮은 것들이 깨어나자/ 하늘만큼 높은 것들도 함께 일어났다// 침통히 무겁고도 화안히 가벼운 한 권의 책이 된/ 재생 종이는 이제 스스로 싱싱한 영혼이었다/ 먼 숲의 바람과 새 소리와 빛나는 향기와/ 우람한 나무로 그는 부활했다/ 이전에 무심히 분지르고 쓰러뜨렸던/ 그 나무가 나에게 푸르른 팔을 벌렸다//
온돌방 / 조향미
할머니는 겨울이면 무를 썰어 말리셨다/ 해 좋을땐 마당에 마루에 소쿠리 가득/ 궂은 날엔 방 안 가득 무 향냐가 났다/ 우리도 따순 데를 골라 호박씨를 늘어놓았다/ 실겅엔 주렁주렁 메주 뜨는 냄새 쿰쿰하고/ 윗목에선 콩나물이 쑥쑥 자라고/ 아랫목 술독엔 향기로운 술이 익어가고 있었다/ 설을 앞두고 어머니는 조청에 버무린/ 쌀 콩 깨 강정을 한 방 가득 펼쳤다/ 문풍지엔 바람 쌩쌩 불고 문고리는 쩍쩍 얼고/ 아궁이엔 지긋한 장작불/ 등이 뜨거워 자반처럼 이리저리 몸을 뒤집으며/ 우리는 노릇노릇 토실토실 익어갔다/ 그런 온돌방에서 여물게 자란 아이들은/ 어느 먼 날 장마처럼 젖은 생을 만나도/ 아침 나팔꽃처럼 금세 활짝 피어나곤 한다/ 아, 그 온돌방에서/ 세월을 잊고 익어가던 메주가 되었으면/ 한세상 취케 만들 독한 밀주가 되었으면/ 아니 아니 그보다/ 품어주고 키워주고 익혀주지 않는 것 없던/ 향긋하고 달금하고 쿰쿰하고 뜨겁던 온돌방이었으면//
문 / 조향미
밤 깊어/ 길은 벌써 끊어졌는데/ 차마 닫아걸지 못하고/ 그대에게 열어 둔/ 외진 마음의 문 한 쪽// 헛된 기약 하나/ 까마득한 별빛처럼 걸어둔 채/ 삼경 지나도록/ 등불 끄지 못하고/ 홀로 바람에 덜컹대고 있는/ 저 스산한 마음의 문 한 쪽//
오래된 집을 떠나다 / 조향미
낙엽 소박이 깔린 길을/ 드문드문 행인들이 오간다/ 시절이 익을 대로 익어서/ 이 가을은/ 오래 묵힌 술독을 비울 때다/ 안으로 안으로 발효한/ 향기는 맑고 서럽다/ 마지막 제상 차리는 제주처럼/ 나는 정성스레 술을 걸러/ 집에게 잔을 올린다/ 집은 이제 허물로 남을 것이다/ 긴 세월을 깃들어왔던 집은/ 고치처럼 환하였고 알처럼 따뜻하였다/ 한때 저 집은 말랑말랑한 살과 피/ 나뉘지 않은 한 몸이었으나/ 언제부턴가 껍질로 굳어 갔다/ 쉬이 소멸하지 않는 집의 습(習)/ 몸을 잃은 빈 껍질이/ 안간힘으로 허공을 부여잡는다/ 그러나 언제고 나비도 새도/ 오래된 집을 부수고 날아오른다/ 낯설고 아득하나/ 천지사방 길 아닌 곳은 없고/ 머잖아 그 오랜 집은/ 아련한 봄꿈으로 흩어질 것이다//
귀향 / 조향미
집 우(宇) 집 주(宙)/ 우주의 욕조에/ 몸을 잠근다/ 물은 따뜻하고/ 넘실넘실 충만하다/ 길고 긴 세월/ 바람찬 거리에서/ 한개 외딴 얼음조각이었던 나는/ 스르르 물속으로 녹아든다/ 만물은 다만 출렁이는 물이어서/ 천지는 틈이 없다//
독거 / 조향미
두실 전철역 칠 번 출구/ 할머니들이 좌판을 펼쳐 놓고 앉아 있다/ 칼바람 쌩쌩한 겨울날/ 상추 몇 줌에 실파 한단 깨끗이 까 놓고/ 노란 배추 속잎 몇 장 개어 놓았다/ 손 녹일 화로 하나 없이 난전에서/ 번데기처럼 웅그리고 앉은 할머니들은/ 생계를 잇고 식구의 약값을 구해야 할까/ 용돈이라도 벌려고 나앉았을까/ 어쩌면 침침하고 외딴 독거의 방이 두려워/ 사람의 기운 쬐러 나왔는지 몰라/ 눈길 한 번 한 주고 지나가는 행인이라도/ 이렇게 사람들 속에 앉은 일이 훈훈할 게다// 그런 좌판에 한 자기 끼이고 싶은 날이 있었다//
못난 사과 / 조향미
못나고 흠집 난 사과만 두세 광주리 담아 놓고/ 그 사과만큼이나 못난 아낙네는 난전에 앉아 있다/ 지나가던 못난 지게꾼은 잠시 머뭇거린다/ 주머니 속에서 꼬깃꼬깃한 천 원짜리 한 장 꺼낸다/ 파는 장사치도 팔리는 사과도 사는 손님도/ 모두 똑같이 못나서 실은 아무도 못나지 않았다//
날아갈 듯 / 조향미
영도 영선동 곡각지 돌아들면/ 푸른 바다 마주하고/ 오래된 집들 다닥다닥 붙어 있다// 도로변엔 낚시가게 철물점 진돗개 파는 집/ 선반에 라면 몇 개 얹어놓은 구멍가게/ 바다 쪽으론 오밀조밀 살림집들/ 태풍 불 때 이 동네 어찌할까/ 지붕 훌렁 날아가지 않을까/ 어깨 넓이 좁은 골목길 들어서니/ 바다색 페인트 떡칠한 슬레이트 지붕엔/ 크고 작은 돌멩이들을 촘촘히 눌러놓았다// 태풍이야 맨날 오는 것은 아니지/ 한 번씩 미친 비바람 몰아칠 땐/ 지붕에 돌멩이 몇 개를 더 얹는 거지/ 그러다 천연스레 맑은 날/ 태평양 바다 앞에 빨랫줄 치고/ 눅눅한 이불도 고린 양말짝도/ 젖은 가슴도 쨍쨍하니 말리는 것이다// 바윗돌 짊어진 듯 숨찬 생애도/ 날아갈 듯 찬란해지는 날도 오는 것이다//
불경(不敬) / 조향미
나는 공중의 새를 근심하여/ 새장에 넣고/ 들판의 백합을 찬미하여/ 꽃병에 꽂았다/ 거친 바람으로부터 새를 보호하고/ 뜨거운 햇볕으로부터 꽃을 지켜주었다/ 매일매일 고단백 모이를 주고/ 무균질의 물을 갈아주었다// 그러나 새는 노래를 잊었고/ 꽃은 피어나지 않았다/ 교육 또는 사랑은/ 종종 우주에 대한 불경(不敬)이기도 했다//
산벚꽃 / 조향미
해는 아까 졌는데/ 달도 없는 그믐밤인데/ 앞산이 화안하다/ 쏴아아 폭포수 같은 산벚꽃/ 어둠 속에서도 눈부시게 쏟아진다/ 이런 봄밤에 잠이나 잘 수 있느냐고/ 제 속을 활짝활짝 열어제끼는/ 바람난 젊은 것들/ 어르지도 달래지도 못하고/ 저 육중한 산도/ 오늘 밤은 신혼처럼 들떠있다//
이 봄날에 전쟁이라니 / 조향미
벗꽃 산수유 팽팽하니 망울 맺어,/ 일촉즉발 아슬터니 기어이 터지고 말았어/ 꽃망울 얘기가 아니야/ 그 무도한 전쟁광들 기어이 터뜨렸어/ 보나 안 보나 그 뜨거운 땅 이라크 어디에/ 포탄을 퍼붓고 포연은 하늘로 솟아오르고/ 지구별 온 세계 사람들은 티비 앞에서/ 드디어 터졌다네 바쁘게 채널을 돌리고/ 아나운서는 침이 튀고, 광고주는 신이 났고/ 스포츠 경기나 즐기듯 월드컵이라도 한 판 더 벌어진 듯/ 여기 먼 나라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까지 띄고/ 짜식들 한 판 붙어봐라 아슬아슬 흥미진진/ 그들은 지금 어쩌고 있을까/ 생필품을 사들고 바삐 어디 방공호라도 숨을지/ 여인들은 불안스레 아이 보듬고 신을 부르겠지./ 남자들은 들끓는 분노와 무기를 함께 들 테고/ 얼음같은 증오는 어금니 깊숙이 물려 있겠지/ 그 포탄같은 분노는 또 무엇을 날려버릴 것인가/ 증오로 싸늘한 그들의 눈빛조차/ 유에스에이 지구별 앞자리에 선 사람들은/ 깨끗한 식탁 아래 이국종 강아지처럼 구경할까/ 그래봐야 너흰 우리 밥이야 그러고 있을까/ 넓고 기름진 대륙 축복의 땅 아메리카/ 세상에서 가장 평화롭고 자유로운 종족/ 인디안들 다 살륙하고 그 넓은 대륙 차지하더니/ 이제는 중동 그 기름과 모래의 땅까지 다 삼키겠단다/ 어찌 중동에서 끝날까 아귀처럼 지구를 통째로 삼키고도//
잡초 / 조향미
늦겨울의 누런 잔디 사이로/ 보도블록 갈라진 틈으로/ 파릇파릇 고개 내밀기 시작한/ 어린 쑥 씀바귀 질경이/ 낯익은 잡초들/ 어린 시절 찧고 이개어/ 소꿉놀이하던 풀포기들 바라보니/ 마음은 고향에 온 듯 안온하다/ 화려하게 얼굴 내민 꽃송이 하나 없이/ 땅바닥에 잔잔하게 엎드린 풀들/ 그냥 스쳐지나가다/ 무심한 눈에는 띄지도 않다가/ 문득 눈물겹게 어여쁘다/ 어느 쓸쓸한 날// 내 삶도 저 정도는 될까/ 매일은 아니고 모두에게도 아니고/ 어쩌다 가끔 누군가에게/ 따스한 그리움 주는/ 저 씀바귀 질경이만큼은 살고 있을까//
들꽃 같은 시(詩) / 조향미
그런 꽃도 있었나/ 모르고 지나치는 사람이 더 많지만/ 혹 고요한 눈길 가진 사람은/ 야트막한 뒷산 양지 바른 풀밭을/ 천천히 걷다가/ 가만히 흔들리는 작은 꽃들을 만나게 되리/ 비바람 땡볕 속에서도 오히려 산들산들/ 무심한 발길에 밟히고 쓰러져도/ 훌훌 날아가는 씨앗을 품고/ 어디서고 피어 나는 노란 민들레/ 저 풀밭의 초롱한 눈으로 빛나는 하얀 별꽃/ 허리 굽혀 바라보면/ 눈물겨운 작은 세계// 참, 그런 눈길 고요한 사람의 마을에는/ 들꽃처럼 숨결 낮은 시들도/ 철마다 알게 모르게 지고 핀다네//
목청 / 조향미
청추우느을돌려다아오오/ 봄볕 일렁이는 산길/ 반백의 남정 하나이/ 길게 목청을 뽑는다/ 연푸른 새 잎 고목나무들/ 쏴아아 화답한다/ 조오쏘/ 소리 아직 청청하오//
마스크 / 조향미
그만 입을 다물라는 말이다/ 너무 먹어대지도 말란 말이다/ 너회의 입이 문제였음을 모르겠냐고/ 마음대로 내뱉고 무엇이든 삼키고/ 저밖에 모르는 입이 재앙의 근원이었다/ 그토록 눈 귀를 막고 외면했냐고/ 어디서 고통스런 신음소리 새어 나오는지/ 누가 공포에 떨며 죽어가는지/ 세심히 들으라고 유심히 살피라고// 밀림은 사라지고 바닷물은 넘치고/ 물난리와 불지옥의 대지/ 산과 바다와 마을과 도시에서/ 영영 사라지는 생물 종들/ 소나무며 돌고래며 솜다리꽃이며 나비며/ 우리는 시작일 뿐이다/ 만물은 연결되어 있다/ 이웃 생명체들 숨 몰아쉬는 경고 앞에/ 입이 칠십억 개라도 할 말이 없지 않냐고// 오대양 육대주에서/ 바이러스는 활개를 친다/ 보여도 보지 않고 들려도 듣지 않고/ 입의 욕망만 받들다가/ 마침내 인간의 입은 봉쇄당했다// 아직 말문도 터지지 않은 어린아이/ 마스크를 낀 채/ 아장아장 걷는다/ 아가야 네 가는 곳이 어디냐//
흐린 날 / 조향미
낡은 기와집처럼 갈앉은 하늘/ 동구 밖 버드나무 우수수 가지 드리우고/ 새들도 깃을 접고 비쫑비쫑 두어 번 지저귀다 말고/ 머릿수건 눌러쓰고 아낙은 종을 텃밭에서 흙을 일구네/ 고개 한 번 들지 않네 하늘 한 번 보지 않네//
국화차 / 조향미
찬 가을 한 자락/ 여기 환한 유리잔/ 뜨거운 물 속에서 몸을 푼다/ 인적 드믄 산길에 짧은 햇살/ 청아한 풀벌레 소리도 함께 녹아든다/ 언젠가 어느 별에서 만나/ 정결하고 선한 영혼이/ 오랜 세월 제 마음을 여며두었다가/ 고적한 밤 등불 아래/ 은은히 내 안으로 스며든다/ 고마운 일이다//
파업 / 조향미
존재를 느끼게 하라 공기 같은 존재란 말은 이미 고전적 의미를 잃었다 요즘은 공기도 파업을 한다 언제나 우리 곁에서 충실하게 역할을 다하는 공기가 아직 있지만 어느 곳 어느 때엔 그 공기가 일손을 놓아버려 목 움켜주고 캑캑대다가 두려움 속에 깨닫는다 우리 곁엔 공기가 있었지 이제 그들이 사라지려 하는구나 보이지 않는 그들에게 애원하고 싶다 제발 떠나가지 말고 우리를 지켜줘 앞으론 너를 소중히 여길게 정말이야 – 물론 거짓말이지// 때론 존재를 감추어라 오만한 주인에게 노예의 소중함을 각인시켜라 청소노동자들이여 파업을 해라 우리는 날파리 왱왱대는 쓰레기더미 옆에서 함부로 버린 것들의 보복을 받아봐야 한다 냄새나는 리어카를 끌고 다닌 당신들에게 감지덕지 인사하도록 한 일주일아라도 존재를 감추어라 운전노동자도 전기노동자도 전화노동자도 한며칠 파업을 해라 늘 웃는 낯으로 고객을 끄는 판매노동자들도 몇 주일 문을 닫아봐라 무엇보다 농업노동자들이여 한 철 일손을 놓아버려라 손만 뻗으면 쌀이고 옷이고 집이고 가져갈 수 있다고 믿는 소비자들 사람 없이 상품만 절로 거기 진열된 듯 생각하는 고객들에게 존재를 느끼게 하라 부재를 통해서만 존재를 깨닫는 자들을 위해선 주기적으로 파업이 필요하다 존재를 멈추어라 그때야 그들은 뼈저리게 당신의 존재를 느낄 것이다 – 며칠 못가긴 하지//
사막 시집 / 조향미
하느님은 시인이어서/ 말과 뜻 못잖게/ 침묵과 여백을 소중히 여기는 시인이어서/ 이렇듯 텅 빈 사막을 펼쳐 놓으셨네/ 단호하게 물길 끊어/ 더 심지 않고 키우지 않고/ 태초에 햇볕과 바람에만 맡기셨네/ 지나가는 빗줄기에 돋아나는/ 작은 풀꽃들과/ 온유한 초식동물 일족들은/ 그대로 두어두시고/ 현란한 말은 그만/ 끝 모르는 뜻도 그만/ 유목의 천막 몇 채 지었다 풀었다/ 사람은 잠시 머물렀다 가라시네/ 모든 말은 침묵에서 나왔으니/ 궁극엔 침묵으로 돌아가리라/ 저 휘황한 말의 문명을 반추하며/ 뜨거운 모래사막에 앉아보네/ 하느님의 경이로운 시집/ 고요한 여백에 앉아보네//
아무 것도 안 하기 / 조향미
고비사막에 주막 차리기가 소원이라는/ 소설가 이시백 선생의 몽골기행단 일정에는/ 아무것도 안 하기가 있다/ 칠팔
월 염천 사막에서/ 아무것도 안하기 또는 마음대로 해 보기/ 햇빛과 바람은 무제한이다/ 전날 밤 일행들은 조금 걱정했다/ 민가도 없고 시장도 없고/ 와이파이도 안 터지는데/ 뭘 하지 아무것도 안 하는 날/ 책을 읽을까 휴대폰 영화를 볼까/ 떼어놓고 온 줄 알았던/ 인생의 짐도 슬금슬금 따라붙는데// 막상 다음 날 일찍부터 눈이 뜨여/ 떠오르는 태양
에 경배 드리기/ 지구의 원주를 따라 슬렁슬렁 걸어보기/ 풀 뜯는 염소 떼와 말똥히 눈 맞추기/ 모래밭에 갓 돋은 풀싹 쓰다듬기/ 지평선 밖으로 팔을 뻗어보기/ 게르 천창으로 별빛 헤아리기/ 가만가만 내 숨소리 듣기/ 크고 높고 무한한 것/ 작고 낮고 여린 것/ 경외하고 경탄하기 고요와 마주하기/ 정녕 아무 것도 안 하기//
사성암의 소떼 / 조향미
이런 일이 없었단다/ 한강 금강이 범람하고 낙동강 둑도 무너지고/ 맑고 고요한 처자 같은 섬진강도 기어이 넘쳐서/ 화개장터가 다 잠겼다/ 안방도 마당도 외양간도 강이 되어/ 사람들은 혼비백산 옆 동네로 피난 가고/ 개들은 목줄 끊고 지붕 위로 올라가고/ 소들이 물속에 허우적거리는 것이 보였다// 구례 사성암 마애약사여래불 앞에 소떼가 나타났다/ 태어나서 축사 밖으로 나가본 적 없는 소들/ 어린 송아지 한 마리 가운데 세우고/ 어찌어찌 길을 찾고 절을 찾아 떼지어 걸어간다/ 놀라고 아픈 중생 보듬어주는 약사부처님 어디 있는지/ 소들은 다 알고 있었다/ 축사에 갇혀 똥 밟으며 파리나 쫓고 있어도/ 소들은 더 멀리 내다보고 길을 알고 있었다// 부처님 앞에서 목숨 건지고 꿈쩍 않는 소들을/ 주인이 나타나 이랴이랴 산 아래로 몰고 간다/ 안전한 곳으로 이송한다는데/ 너덧 달 뒤면 도축장 끌려가겠지/ 송아지 잃고 열흘을 목 놓아 울겠지/ 소와 돼지와 닭과 개들을 다시 묶고 가두고/ 인간들도 제각각의 옥사로 들어간다// 통째로 감옥이 된 지구/ 수시로 담장이 무너지고 마당도 가라앉는데/ 이 많은 목숨들 어디로 뛰어내려야 하는지/ 어느 별의 부처님이 품어주실지/ 소에게 물어보고 싶다//
몸 / 조향미
시답잖은 인생살이 그나마 고마운 것 중 하나는/ 마음을 생짜로 노천에 내놓진 않아도 된다는 것/ 몸이라는 황송한 제 집이 있어서/ 벌거숭이 마음 담아둘 수 있다는 것이다// 예고없이 몰아붙이는 폭풍에 찢겨/ 거둘 수도 없는 깃발처럼 너덜너덜한 마음/ 밤낮 기워대도 덕지덕지 어리석음뿐인 마음/ 그대로 훤히 비친다면 누군들 태연히 길을 나서리/ 모르는 척 그 누추한 마음 덮어주는/ 몸은 너그럽다// 여름날 칡넝쿨처럼 뻗치던 열망의 끝자락마다/ 마중이라도 나온 듯 기다리는 건 번번이 바위절벽/ 와르르 무너지는 천 근의 마음 그래도 추슬러지고/ 안간힘으로 일어서는 건 두 다리다/ 치미는 울음 꾹꾹 눌러주는 건 목젖이다// 하루에도 수십 번 쌓고 허무는 방죽 같은/ 퍼내고 퍼내도 다시 고이는 웅덩이 같은/ 허망하고도 질긴 마음 바람인 듯 끌어안아/ 삼천대천 무한 겁 시공 속에 한 그루 나무로/ 든든히 뿌리내렸다 미련 없이 소멸하는/ 몸은 듬직하다//
한몸 / 조향미
머리카락은 손톱과 얼마나 다른가/ 혓바닥과 피부와 뼈는 어떤가/ 주름살과 눈동자와 창자는 또/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한 몸이다// 사과와 뱀과 고양이는 얼마나 다른가/ 강아지풀과 사람과 흙은 어떤가/ 빗방울과 불꽃과 바람은 또/ 이 모든 것도 한 몸이다// 이 진실을 외면하는 것은/ 한 올의 머리카락이/ 나는 혼자라고/ 한 몸 같은 것은 없다고/ 쓸쓸해하는 것과 같다/ 한 송이 민들레꽃이/ 나는 스스로 피었다고/ 흙과 햇빛과 나비와 무관하다고/ 고집부리는 것과 같다//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내 손가락은/ 우주의 나뭇가지다/ 모락모락 끊이지 않는 이 생각도/ 신이 피워 올린 연기다//
상림의 봄 / 조향미
함양 상림을 지날 때는 언제나 겨울/ 잿빛 가지들만 보고 지나쳤다/ 그 오랜 숲은 지치고 우울해 보였다/ 길가 벚나무들 방글방글 꽃피울 때도/ 숲은 멀뚱하니 바라만 보았다/ 또 봄이야 우린 이제 지겨워/ 늙은 나무들은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보름 만에 다시 상림을 지났다/ 아니, 지나지 못하고 거기 우뚝 섰다/ 아, 천년 묵은 그 숲이 첫날처럼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시커먼 고목 어디에 그렇게 연한 피를 숨겼는지/ 병아리 부리 같은 새잎들이 뾰족뾰족 각질을 뚫고 나왔다/ 작은 물방울 같은 것이 톡톡 터지는 소리도 들렸다/ 온 숲에서 달콤한, 솜털 뽀얀 아가 냄새가 났다/ 봄바람은 요람인듯 가지를 흔들고/ 새잎 아가들은 연한 입술로 옹알이를 한다/ 참, 그만 모든 것 내던지고 싶은 이 만신창이 별에서/ 숲은 무슨 배짱인지 또 거뜬히 봄을 시작한다/ 환장할 일이다//
가을 교실 / 조향미
가을 교실에 들어서면/ 살진 강에 발목을 담근 듯하다/ 풍성한 감자밭에 호미 들고 앉은 듯하다/ 줄기 당기면 여기저기 불쑥불쑥 딸려나올 알감자들/ 맨다리에 스치는 통통한 물고기들 슬쩍 장난도 건다/ 첫 3월 교실은 꽝꽝한 고드름처럼 날이 서/ 낯설고 닫힌 얼굴들 어색하고 까마득했지/ 언제 이 밭을 다 일구나/ 얼마나 또 이 강에서 젖어야 하나/ 그러나 하루 이틀 따순 봄볕으로/ 고드름엔 똑똑 물방울 듣지/ 바싹 움츠렸던 싹들 파릇한 잎새를 펴고/ 아기 손가락 같던 치어들 무럭무럭 살이 오른다/ 금빛 햇살 화안한 이 가을/ 아이들은 몰라보게 단단하기 여물었다.//
겨울 숲 / 조향미
마른 가지들 듬성듬성한 숲/ 짙은 그늘에 가려/ 늘 눅눅하게 젖어 있던 흙이/ 고슬고슬 햇볕을 쬐고 있다/ 볕살은 묻힌 뿌리까지 깊숙이 비춘다/ 따뜻한 흙 속에서/ 뿌리도 꼼지락거리며 몸을 편다// 오종종한 자식들 틈에/ 밥 한술 느긋이 못 들던 노부부/ 막내까지 다 출가시키고/ 겸상으로 느지막이 조반을 드신다//
겨울 골짜기 / 조향미
가슴 수북이 가랑잎 쌓이고/ 며칠내 뿌리는 찬비/ 나 이제 봄날의 그리움도/ 가을날의 쓰라림도 잊고/ 묵묵히 썩어가리/ 묻어 둔 씨앗 몇 개의 話頭/ 푹푹 썩어서 거름이나 되리/ 별빛 또록한 밤하늘의 배경처럼/ 깊이 깊이 어두워지리//
고양이 / 조향미
오래 홀로 인적 뜸한 언덕에 서 있다/ 바람인지 강아지풀인지 가만히 미동을 바라보다/ 새 한 마리 낮게 내려앉아 잠시 귀 세우기도 한다/ 어디에 머물 생각은 없다 한 끼 주림 면하면 족할 뿐/ 먹이 구하러만 골목길 어슬렁대는 건 아니다/ 딴 세상을 갈망하여 담장 위에 오르는 것도 아니다/ 고독이야 졸음처럼 숨결처럼 익숙하다/ 허리 길어 해 그림자는 더디나/ 불꽃처럼 맹렬히 눈빛이 타오를 때도 있다/ 찰나 속에서 영겁을 보고 영겁 속에서 찰나를 살기도 한다/ 다음 생을 다시 시작할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다//
울음소리 / 조향미
자다가 깼다/ 어디서 소 한 마리 쉴 새 없이 울고 있다/ 초저녁부터 시작된 울음이었다/ 어디가 아픈 건가/ 무엇이 슬픈 건가/ 송아지 뺏기면 어미 소 일주일도 운다던데/ 저러다 복장이 터질라/ 소는 본시 울음 많은 동물이 아니다/ 낮에 목청 확인하듯 움머어/ 서너 번 짧은 소리 내보고/ 한밤 외양간에 고른 숨소리뿐이다/ 만물이 잠든 밤/ 우웅 우웅 우우웅/ 소 울음소리에 풀벌레도 숨을 죽인다/ 울음 달래 줄 도리 없어/ 덧문 닫아 귀를 가려보지만/ 울음소리는 고개 너머 강 건너/ 소용돌이 바다까지 번져 나가/ 그예 어미 잃은 어린 울음을 끌어안는다//
함양 군내버스 / 조향미
함양 백전 녹색대학 가는 버스는 오십 분 간격이다/ 버스가 떠나려면 아직 한참이나 남았다/ 일찍 차에 오르니 할머니만 다섯 먼저 타고 계시다/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노친네들은 서로 거리낌없다/ 할매는 올해 나이가 몇이오/ 나는 아직 얼마 안 돼요 칠십서이/ 아직 젊구마 한참 농사짓것네/ 그래도 오만 데가 아푸고 쑤시오 할매는 얼마요/ 나는 칠십아홉 저 할매하고 동갑이오/ 칠십 셋은 아직 괜찮소 여섯 넘기면 영 힘에 부치요/ 손수레와 도리깨를 옆에 둔 할머니가 칠십, 제일 젊다/ 중년 아낙 둘이 상자 보따리를 들고 새로 탔다/ 저기 뭣이꼬/ 삼이까/ 삼은 아인 거 같은데 더 무거버 비는데/ 젊은 할머니가 호기심을 참지 못한다/ 새댁이 그기 뭣이요/ 친정 엄마가 싸주는 거라요/ 아이고, 추석도 하마 지났는데 친정어마씨가 꼭꼭 챙기놨구마/ 자식들한테 저래 싸주마 맘이 시원하제/ 하모요, 오목조목 싸주먼 묵을 놈이 묵으니께 주는 마음 좋고/ 싸갖고 가먼 어매가 주는 거니께 묵으먼서 좋고 안 그라요/ 할매는 콩 도리깨를 샀구마 올해는 콩이 질어서 타작 좀 하겄네/ 콩이 잘 되야제 팥 없이는 살아도 콩 없이는 못 사니께/ 할머니는 도리깨로 마당 가득 콩타작을 하여/ 둥글둥글 메주 띄워 간장 된장 청국장 단지 단지 담아/ 전국 각지 오남매에게 또 오목조목 싸 부칠 것이다/ 묵을 놈은 묵으니께 주는 마음 시원하제//
담임 선생 / 조향미
아침에 출석부를 들고 교실에 들어서면/ 인상 쓸 일 수두룩하다/ 앉아라 줄 맞춰라 휴지 좀 주워라/ 수희 나영이 또 지각이구나/ 이슬인 오늘도 결석인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째려보고/ 전달사항 몇 개 툭 던져두고 나오면/ 아이들 몇 명 쭐래쭐래 따라 나오며/ 선생님 오늘 야자 빠져야 해요/ 피과 가야해요 생리통이 심해요/ 학원 보충 있어요 엄마 생신이예요/ 알았어 알았어 점심시간에 내려와/ 교직 이십년 의욕도 열정도 시들해진 담임 생활/ 올해 애들은 유난히 천방지축이야 투덜대지만/ 생각해보면 마음으로 미운 놈 하나 없다/ 작년 처음 만나 일주일에 두어 시간 수업할 땐/ 저기 몇 놈들 정말 구석없이 밉상이더니/ 담임 맡은 올해 사흘 걸러 지각하고 결석하는 놈도/ 온 교실 제멋대로 어지르고 다니는 놈도/ 수업시간 꾸벅꾸벅 잠만 자는 놈도/ 곁에 와서 뭐라 뭐라 몇 마디 나누다 보면/ 마음 풀어진다 잔소리 하다가도 픽, 웃음 나온다/ 속속들이 들여다보면 그 녀석들/ 지각하고 결석하고 농땡이 칠 만한 딱하고 아픈 사정/ 모르는 척 쌀쌀하게 나무랄 수만 없다/ 아이들 처음 만나면 그 놈이 그 놈 같아 보이다가/ 차츰 얼굴 보이고 수업태도 성적도 따지다가/ 한 일년 아침저녁으로 부대끼다 보면/ 몇 겹의 옷 안에 가렸던 본디 맨살 드러난다/ 멀고 아련한 풍경 아니다 사랑은/ 풀석이는 먼지 마시며 동거하는 일이다//
책을 퍼다 버리다 / 조향미
수능 끝난 다음날/ 학교 운동장에 커다란 트럭이 왔다/ 3학년 교실은 쓰레기장이다/ 아이들은 책을 질질 끌고 나온다/ 두엄더미 거름 삽으로 퍼내듯이/ 뒷간 그득 찬 똥 똥장군이 퍼내듯이/ 아이들은 책을 푹푹 상자째 퍼다 버린다/ 일 년 아니 삼 년 내내 생을 걸고/ 풀고 또 풀던 교과서 문제집들/ 끼고 다니고 베고 자며 눈물 콧물 묻어 있는/ 책들을 하루아침에 미련 없이 던져버린다/ 그동안 금과옥조 성전처럼 받들었으나/ 저 책들은 사실 시시한 군소리였다/ 산더미 같은 책더미 트럭은 금방 넘친다/ 내 한숨과 꿈이 서린 소중한 책들/ 까맣게 밑줄 긋고 베껴 쓰며 청춘을 바쳤던/ 가보처럼 물려주고 싶은 책에 대한 얘기는/ 까마득한 신화 또는 썰렁한 개그다/ 시험 끝나면 책은 보물은커녕 오물이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않으냐고?/ 공자님은 모른다/ 배우고 매일 문제 풀면 정말 신물이 난다는 걸/ 강 건넌 뒤 저리도 미련 없이 뗏목을 던져버리니/ 장자가 보면 좋아하시겠다/ 그런데 웬 뗏목이 저토록 많단 말인가/ 저 뗏목들을 밤낮으로 꾸역꾸역 삼키고 있었다니/ 아이들이 왝왝 토해내고 싶기도 하겠다/ 갈수록 숲이 성글고 공기 가빠지는 이유도/ 수능 끝난 다음날 고 3 교실에 와보면 알 것이다//
예금통장 / 조향미
예금통장에 잔고가 얼마 없다/ 월급날은 한참 남았다/ 들여다보니 쌀통 김치통 꽤 남았다/ 냉장고에 시든 고추 파 두어 뿌리/ 평소에 살피지도 않던/ 뒤 베란다 감자 양파 몇 알도 쓸 만하다/ 옷장에 유행 안 맞아도 옷들이 주렁주렁/ 책장엔 읽지 못한 책들이 쌓여 있다/ 모든 것은 풍요하고 너끈하다/ 조금 비어서 기분 좋은 위(胃)처럼/ 잡풀를 쳐낸 생의 앞마당은 여백이 널찍하고/ 식탁은 신선한 허기(虛飢)로 풍성하다/ 예금통장이 빈 도시락처럼 달그락거릴 때면/ 푸석푸석 곰팡내 나는 녹에 파묻혀 있던/ 낡고 헌 사물들이 말간 얼굴이 보인다/ 잘 닦으면 은은히 청동빛도 난다/ 또한 뿌듯한 일,/ 며칠 지나도 헐렁한 쓰레기통/ 죄를 덜 지었다는 증거다/ 가을볕에 잘 마른 무명수건처럼/ 제법 깔깔해진 마음으론/ 물기 젖은 누구의 얼굴을 닦아주고도 싶다//
내가 천천히 음미하며 걸을 수 있는 것은 / 조향미
내가 하늘보다 땅을 더 감동 받으며/ 이렇게 천천히 한 발 한 발/ 음미하며 걸을 수 있는 것은/ 땅이 나를 끌어당기며 놓지 않기 때문이지/ 아까부터 내 몸의 무게를 느끼며/ 어디 좀 쉴 자리를 찾는 것도/ 나의 모체 지구의 과분한 사랑에/ 약간 엄살부리는 거야/ 어쩌면 나는 둥둥 떠다닐 수도/ 훨훨 날아다닐수도 있었겠지만/ 그랬다면 허무하고 막막했을거야/ 뿌리나 발을 가지고 내려 앉고 싶었을 거야/ 낮게 누워 사랑하고 싶었을 거야/ 내 마음 언제나 나무처럼 어디에 붙박여 있는 것도/ 그러다 또 야생동물처럼 어디론가 떠나가고 싶은 것도/ 한 줌 흙으로도 풀 한 포기 키우고 벌레 한 마리 잠재우는/ 우리의 별의 살가운 사랑 때문이지/ 또한 그 별의 한조각인 내 출렁이는 열망 때문인지/ 수십억 년 전 빌라 내가 한개 세포였을 적부터/ 한 점 빛이었을 때부터//
우리 모두 열일곱 살 / 조향미
배가 휘청거린 건 오래전입니다/ 항로를 이탈한 것은 더 오래전이었고요/ 그러나 늘 괜찮다 괜찮다 했습니다/ 부유하고 강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흐르는 강을 막고 바다를 메웠습니다/ 물고기와 짐승과 식물들이 죽어갔습니다/ 사람들도 병들고 절망하여 죽어나갔습니다.../ 그래도 늘 가만있으라 가만있으라 합니다/ 종북파 외부세력 선동에 넘어가지 말라 합니다/ 티비는 누군가의 마이크가 되었고/ 사람들은 온순해졌습니다/ 청년들도 크게 떠드는 법이 없었습니다// 아이들에게 밤낮없이 공부를 시켰습니다/ 보충 야자 학원 이비에스 끝이 없었어요/ 공부만이 살길이라고/ 수능대박이 인생대박이라고 가르쳤습니다/ 해가 뜨고 저도 꽃이 피고 져도/ 아이들은 커튼 치고 문제집만 풀었지요/ 어른들은 미래의 꿈과 희망을 강조했고/ 오늘을 견디면 내일 행복해진다고 장담했습니다// 아이들은 학교만 나서면 좋아했지요/ 삼박사일 수학여행 손꼽아 기다렸어요/ 처음 타보는 커다란 배는 신기했고/ 친구들과 놀고 자고 신났습니다/ 그런데 아침부터 배가 이상했어요/ 쿵 소리 나고 몸은 점점 기우는데/ 꼼짝말고 선실에 있으라고 방송이 나왔어요/ -이상해 이거 실제 상황이야 죽을 수도 있어/ 아이들은 서로에게 구명조끼를 입혀주었습니다/ -아, 우리 엄마 아빠 내 동생 어떡해/ -엄마 말 못할까봐 문자 보낸다 사랑해/ 그래도 갑판에 나간 친구들을 오히려 걱정하며/ 친절한 경찰 용감한 국군 막강한 나라를 믿었습니다/ 침몰하는 배 속에서도 아이들은 천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부유하고 강한 나라의 어른들은/ 단 한 명의 아이도 살려내지 못했습니다/ -누나 그동안 잘 못해줘서 미안해 사랑해/ 엄마한테도 전해줘 나 아빠에게 간다/ -기다리래/ 기다리라는 방송 뒤에 다른 안내 방송은 안 나와요/ 아이는 마지막으로 문자를 보냈습니다/ 손가락이 부러지도록 벽을 두드리고/ 파도를 밀어내며 기다렸지만 아무도 문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아이들은 학생증을 꼭 쥐고 시신으로 떠올랐습니다/ 엄마 아빠 저예요/ 일찍 떠나서 미안해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어요 정말 더는 안 됐어요// 아, 잘못했습니다 정말 잘못했습니다/ 가만히 있으라고 가르치지 말아야 했습니다/ 얌전히 기다리라고만 가르치지 말아야 했습니다/ 마이크를 방송을 너무 믿지 말라 가르쳐야 했습니다/ 미래도 좋고 꿈도 좋지만 지금 당장 여기/ 현실을 알아보고 행동하라고 가르쳐야 했습니다/ 우리의 무지와 안일 죽은 교육이 아이들을 죽였습니다/ 아이들을 저 차가운 바닷물 속에 잠가놓고/ 죄 많은 우리는 밥을 먹습니다 따뜻한 방에서 잠을 잡니다/ 여전히 마이크 잡은 자들의 방송만 듣습니다// 마지막까지 기다리고 최후까지 어른들을 믿었던/ 아이들은 이제 죽어서 문자를 보냅니다/ 엄마 아빠 선생님 정신 차리세요/ 이 나라 배가 침몰할지 몰라요 이 문명의 배도 위험해요/ 짐을 너무 실었어요 너무 멀리 길을 벗어났어요/ 가짜 방송만 믿지 말고 밖으로 뛰쳐나오라고/ 배를 살피고 항로를 바꾸라고 조난 신호를 보냅니다/ 진도 앞바다 인당수에 제물로 바친 우리 청이 청이들/ 눈멀고 귀먹은 아비어미들에게 그만 눈을 뜨라고/ 생때같은 자식들이 떼죽음으로 경고합니다// 앳되고 고운 우리 아이들 영정 사진 속에 있지 않습니다/ 저 붉은 뺨의 아이들이 어찌 창백한 조화 속에 누워있을까요/ 아빠 살려줘 엄마 무서워 울며울며 떠난 아이들/ 아직도 캄캄한 바다 속을 떠다니는 피눈물나는 내 새끼들/ 바람으로 햇볕으로 빗물로 우리에게 스며듭니다/ 우리와 함께 숨 쉬고 말하고 먹습니다/ 내 꽃다운 청춘 살려내라고 참되게 살아달라고/ 아이들이 흐르는 눈물을 닦습니다/ 차가운 육신을 벗고 질긴 허물을 벗고/ 우리 모두 열일곱 살/ 팔랑팔랑 노란 나비로 날아오릅니다/ 넘실넘실 푸른 바다 넘어갑니다//
꺾인 나뭇가지 / 조향미
나는 한때 내 생이 꺾인 나뭇가지 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폭풍우가 치고 숲이 휘청거리고 다시 말짱하게 개인 하늘 아래/ 숲이 몸을 추스리고 정신 차려보면 그 풍우 속에서도 의연히 버틴 나무들/ 그러나 가지 몇 개는 부러지고 몇 그루 나무들은 둥치째 넘어져 있기 일쑤다// 어찌 하랴/ 우주가 있으므로 풍우가 있고 나무가 있으므로 꺾이는 가지도 있는 것을/ 저 나무는 튼실한데 왜 나만 꺾였다고 오래 슬퍼할 일이 아니다/ 산에는 솟은 봉우리가 있고 가라앉은 골짜기도 있다/ 오래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이 있고 먼저 비로 내리는 구름도 있는 것이다/ 봉우리는 운이 좋고 골짜기는 운이 나쁜 게 아니다/ 구름은 즐거운 것이고 비는 슬픈 거라고 말해선 안 된다/ 봉우리는 밝은 햇볕을 쬐고 골짜기는 맑은 물을 품을 것이다/ 또한 저 구름도 머잖아 비가 되고 이 비도 곧 구름이 될 것이다// 꺾인 나뭇가지가 숲에 놀러온 동네 개구장이의 손에 들려 숲을 떠나면/ 그 아이가 동무들과 신나게 휘두르는 나무칼이 될 수도 있고/ 그 어머니 맵차게 후려치는 회초리가 될 수도 있겠지/ 숲에서 다람쥐와 덩쿨식물의 즐거운 버팀목이 되었지만/ 이제 마을에선 한 아이의 삶을 받드는 지렛대가 될 지 모른다// 설사 아궁이에 던져져 하루밤 불쏘시개가 되어도/ 그 더운 연기는 넓디 넓은 우주 속에 스며들 것이다/ 그리고 다시 우주는 한 그루 어린 나무를 키우리라//
양지밭 / 조향미
햇볕이 넘실넘실/ 사방 팔방 날아온/ 오만 가지 풀씨/ 멋대로 자란 풀밭/ 아무도 돌보지 않은 공터/ 큰 나무 한 그루 없어/ 오히려 싱그런 풀꽃들이/ 자유로이 풍요로이/ 열린 하늘 아래 넘실넘실//
꽃 핀 오동나무 아래 / 조향미
꽃 핀 오동나무를 바라보/면 심장이 오그라드는 듯하다/ 하늘 가득 솟아 있는 연보라빛 작은 종들이 내는/ 그 소릴 오래전부터 들어왔다/ 오동 꽃들이 내는 소리에 닿을 때마다/ 몸이 먼저 알고 저려온다/ 무슨 일이 있었다 내 몸이/ 가얏고로 누운 적이 있었던 걸까/ 등에 안족을 받치고 열두 줄 현을 흩이불 삼아 덮고/ 풍류방 어느 선비의 무릎 위에 놓여/ 자주 진양조로 흐느꼈던 것일까/ 늦가을 하늘 높은 어디쯤에서 내 상처인 열매를/ 새들에게 나누어 준 적도 있었나/ 마당 한번 오동잎 그늘 아래서/ 한 세상 외로이 꽃이 지고 피는 걸 바라보며/ 살다 간 은자(隱者)이기도 했을까/ 다만 가슴이 뻐개어질 듯/ 퍼져 나가려는 슬픔을 동그랗게 오므리며/ 꽃 핀 오동나무 마래 지나간다/ 무슨 일이 있었나 나와 오동나무 사이에/ 다만 가슴이 뻐개어질 듯/ 해마다/ 대낮에도 환하게 꽃등을 켠/ 오동나무 아래 지난다//
오후의 산책 / 조향미
모처럼 해 밝을 때 퇴근한 날/ 집 뒤의 산길 오르다/ 살랑대는 나뭇잎 풀잎 사이로/ 뉘엿뉘엿 햇살 깔리는 오솔길에 들면/ 느긋한 소 한 마리가 된 듯하다/ 하루치 빠듯한 노동을 끝내고/ 잔등에 노오란 볕살을 받고 앉아/ 시름없이 천천히 되새김질하는 소/ 아직 햇볕이 남아 있는/ 등 뒤의 언덕은 푸근하고 든든하다/ 소에게 등 비빌 언덕이 있는 것처럼/ 내 뒤로는 듬직한 산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고마운 기쁨이냐/ 소가 여물을 한입에 먹어치우지 않듯이/ 오후의 산책에선 산 정상을 탐하지 않는다/ 귀한 책은 하루에 몇 장씩만 되새겨 읽는 것/ 나머지는 온전히 어느 하루를 위해 남겨 둔다/ 소가 어슬렁어슬렁 느린 걸음을 떼놓을 시간/ 산은 깊은 묵상으로 들어가고/ 마을엔 하나 둘 불빛이 내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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