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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란 시인
1964년 강원도 태백 황지에서 태어났다.
계명대학교 간호학과와 동 대학 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199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돼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다』, 『누가 입을 데리고 갔다』가 있다.
대구시인협회상을 수상했다.
온기 / 박미란
온기라는 말은/ 나무 밑으로 지나가는 한 사람을 바라보는 일/ 한참 바라보다가 잊어버렸으나/ 비 오고 난 뒤 다시 그를 생각하는 일// 오래전 공터에 봄은 왔는데// 사무친다는 말은/ 막 꽃 피우려는 노란 민들레에게/ 내년 꽃을 기억하라고, 기억해보라고/ 억지 쓰는 일//
조각전 / 박미란
물고기 눈과 새의 날개가 가슴에 박힌 날/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다// 물고기 눈은/ 저녁이 되려 하거나/ 전생을 떠올리지 않았고// 새의 날개는/ 우레를 그리워하거나/ 지하세계로 날아가는 법을 잊어버렸다// 한번 떠나오면 돌아갈 수 없다고/ 누가 말했을까// 새들은 어느 방향으로 날아가는지/ 물고기는 어떻게 물살을 갈라야 하는지// 물고기 눈과/ 새의 날개가/ 서로 가야 할 곳도 돌아올 곳도 잃어버린 채/ 심장에 나란히 박혀 있다//
헛구역질이 시작되었다 / 박미란
애인의 몸에서 구더기가 나왔어 상처가 덧난 줄도 모르고, 새살이 차오른다며 그 환한 웃음 몰고 다녔어// 밥을 먹을 수가 없다 만개한 벚나무 아래서 현기증이 일었다 헛구역질이 일었다 누워있는 흰 꽃잎들, 밥알들이 모두 구더기로 보였다 남의 몸에 자기 몸 얹어놓고 그 생을 몰래 뜯어먹으며 안간힘으로 타오르던 그것들// 진흙 연못에 연꽃들 피어나듯/ 구더기 들끓는 얼굴에 환한 웃음 몰려드는가// 헛구역질이 또 시작되었다 애인의 얼굴 위에 바글바글한 생, 내 몸속 어디엔가 제 몸 키우고 있을 구더기들이 달빛에 천천히 젖어들고 있었다//
목재소에서 / 박미란
고향을 그리는 생목들의 짙은 향내/ 마당 가득 흩어지면/ 가슴 속 겹겹이 쌓인 그리움의 나이테/ 사방으로 나동그라진다// 신새벽,/ 새떼들의 향그런 속살거림도/ 가지 끝 팔랑대던 잎새도 먼 곳을 향해 날아갔다/ 잠 덜 깬 나무들의 이마마다 대못이 박히고/ 날카로운 톱날 심장을 물어뜯을 때/ 하얗게 일어서는 생목의 목쉰 울음// 꿈 속 깊이 더듬어 보아도/ 정말 우린 너무 멀리 왔어// 눈물처럼/ 말갛게 목숨 비워 몇 밤을 지새면/ 누군가 내 몸을 기억하라고 달아놓은 꼬리표/ 날마다 가벼워져도// 먼 하늘 그대,/ 초록으로 발돋움하는 소리 들릴 때/ 둥근 목숨 천천히 밀어올리며/ 잘려지는 노을/ 어둠에도 눈이 부시다//
* 199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음음 / 박미란
살다가 가끔 음음, 할 때가 있다// 음음, 그토록 기다렸다 만나면 손이라도 덥석 잡을 줄 알았는데/ 그냥 좋아 자지러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할 말이 없어 음음,이라는 말에 물들고 있다// 검은 나무에 비스듬히 기댄 당신 얼굴/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음음, 말들이 안으로 삼켜지는/ 주머니 속에는 손이 나오지 않는 느닷없는/ 이런 날// 음음, 점점 어두워지는 당신의 눈, 당신의 어깨, 당신의 흰 손목,/ 둥근 귓바퀴와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머리카락......// 내가 기다린 것은 오직 음음, 더 깊은 어둠이다 이미 지나갔다고 생각한/ 그곳에 음음, 당신이 있다//
조개처럼 / 박미란
다시는 입 다물 수 없어/ 옛날로 돌아갈 수 없어// 아마 입 벌리고 싶었을 거야 /붉은 속울음 보여주고 싶었을 거야/ 벌어지고 나니/ 도무지 입 다무는 방법을 모르는데// 그 벤치 위의 저녁,/ 정신없이 걷다가 발길 끊어진 후에야/ 물기 번지듯 갔지/ 오로지 번지고 번져서 갔지// 번진다는 건/ 다가가는 일이라는 걸/ 내 삶이 망가진 다음에야 알았지// 뜨거움이 지나간 그때 그 자리에서/ 아, 벌어진 입/ 끝내 다물지 못하고//
반달 / 박미란
봄날 매운 파밭에서,/ 찜통 같은 공장 바닥에서,/ 눈 내리는 쓰레기더미에서,/ 어느새 저 높은 곳까지 쫓아갔을까/ 밤중에 잠깐 올려다본/ 서쪽 하늘가엔/ 시리고 서러운/ 엄마 발목이 걸려 있다//
당신의 자리 / 박미란
뜨거운 냄비를 놓쳐 발등을 데인 후에야/ 멀리 가려는 너를 더 멀리 보내고// 네가 앉았던 나무 그늘에 우두커니 앉아본다/ 절뚝거리며 걷다가 뒤돌아보는 사람처럼/ 내 어둠 들여다보는 동안// 아픈 것은 저희들끼리 머물다가 떠나간다// 뿌리가 깊어지는 소원을 가진 나무가 제 울음으로/ 잎사귀를 푸르게 물들이고 있다// 그곳이 아픈 발등의 자리, 너의 자리다//
왼쪽과 오른쪽 사이 / 박미란
죽기 전에 다시 기저귀 찬 할머니,/ 이제 자기 몸도 따로따로 논다/ 왼쪽은 방바닥에 누우려 하고/ 오른쪽은 정자나무 아래 살살 나가려고 한다// 한 몸이,/ 서로 다른 생각으로 이리저리 쏠리는 것은/ 두 식구가 살기 때문이다// 가지고 갈 게 없다 하면서/ 손가락의 쌍가락지 잠시도 빼지 않는/ 저 마음은,/ 오른쪽에 더 기울어져 있는 듯하지만/ 사실 오른쪽과 왼쪽은 죽자고 붙어다니는 사이여서/ 어느 한쪽도 놓을 수 없다// 금방 바스라질 것 같은 몸 눕히고/ 서둘러 나오는데/ 벌컥, 방문 열고/ 굶겨 죽이려느냐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저 힘// 죽음에 질질 끌려가던 왼쪽이 오른쪽을 일으켜 세우고 있다//
이사 / 박미란
내년 봄에도/ 내후년 봄에도/ 목련나무는 꽃을 피울까// 아파트 재개발이 가결되자 밤늦도록 막걸리 사발 돌아간다/ 늙은 나무가 한 잔 먼저 받아 마시고 숟가락에 구부러지는// 노래 사이로 굵은 꽃송이 내다건다// 언젠가 맞이할 마지막 봄이다// 사람의 일 속에 꽃의 일생 막걸리 한 잔보다 쉽게 지워져도,// 다시는 꽃으로 환생하지 못한다 해도,// 저 꽃송이들 데려갈 수 없다// 옷 보따리 꾸렸다 풀었다 하는 동안/ 목련이,/ 맨 먼저 다니러 왔다는 듯/ 사나흘 피고 잊히는 일이 가장 큰 이사라는 듯// 잠깐 피었다가 훌쩍 떠나가고// 짐승의 내장같이 어둡고 쓸쓸한 그림자만 밤새 너울거렸다//
그러니까 밤이다 / 박미란
밤이다/ 가게마다 유리문을 닫는다// 나는 홀로인 듯/ 돌아갈 수 없는 먼 곳에 버려진 듯/ 버스정류장 의자에 앉아 침묵이 되고 있다/ 의자는 든든하지만 의지는 박약하여/ 무언가를 놓친다// 막차는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흘러간다// 밤과 하루를 보냈다고/ 나무라던 그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바람이 불어왔다는 건/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일// 나는 남에게 진지한 모습이고 싶지만/ 그는 점점 웃기는 사람이 되어간다// 이 삶은 왜/ 이 쓸쓸함은 어디서 오는가// 밤이다/ 벗어나려 할수록 조금씩 빨려드는/ 그러니까 밤이다// 쓸어안아도 달아나는, 한없이 어슬렁거리는// 신호등이 바뀐다/ 그래도 밤이다/ 색안경을 쓴 달이 찾아온다면/ 연인들은 눈을 잃은 채 버틸 것이다/ 붉음에서 나와 검음으로 숨어들 것이다// 컹컹 짖던 개가/ 제 그림자에 놀라 다시 짖는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행방불명된 노래의 부드러움까지/ 유리창 속으로 한 사람이 깊숙이 들어선다// 밤이다/ 그러니까 자꾸 밤이 운다// 아무렴 어때,/ 잠깐 눈을 감았다고 생각했는데/ 또 한 번의 영원이 천천히 내 앞을 지나갔다//
꽃무릇에게 / 박미란
벤치에 그가 누워있었다// 눈을 감은 건 아니지만 눈을 감은 듯/ 지친 몸뚱이조차 맡길 데 없는// 그때 나는 그 옆을 지나다가/ 꽃무릇을 보고 있었어// 잎사귀 없이 피어도/ 하나같이 아름다웠는데/ 그걸 왜 굳이 비극이라고 말하고 싶었을까// 눈물을 흘리는 그를 훔쳐보다가/ 그 자리를 떠나오고 말았지만// 이제는/ 만난 적도 헤어진 적도 없는 이야기들// 가끔씩 나도 바닥이 되길 원했던 것처럼/ 몸을 돌돌 말고/ 아래로 더 아래로 내려가면// 몇 송이는 나의 애인처럼 왕관을 펼친 채 피어났어// 같은 계절, 같은 공간에서/ 어떤 꽃은 찬란하고/ 또 어떤 꽃은 기가 막히게 누추한지// 각자 피는 일에 집중할 때// 그 안쪽은 너무 어둡거나 밝아서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당신의 꽃밭 / 박미란
나를 밀쳐낸 사람이 잘 되었다// 그를 망가지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리고 싶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내 기도는 늘 어긋나니까// 꽃다발을 안고 활짝 웃는 그보다 내 자신이 미워졌다/ 누군가는 이해한다고 했고/ 또 누군가는 소심하다고 했다// 흐드러지던 꽃잎이 떨어져 내렸다/ 끝없이,/ 덧없이,// 사람도/ 결심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 또한 지나간다는 위로의 말이 제일 힘들었다// 상황은 언제나 뒤바뀐다고/ 알고 보면/ 그가 아니라/ 내가 그를 밀쳐냈다고 누군가 수군거리는 소리 들렸다// 내가 죽고/ 그 사람이 죽고/ 모든 슬픔의 이름이 사라져도// 허허벌판 세상 끝까지 붉은 꽃잎들은 피어날 것이다//
동백 / 박미란
동백은 집중하며 떨어진다/ 무엇이든 내리막이 중요하니까// 물의 온도, 바람의 온도, 저 달의 온도// 언젠가 두고 갈 것들이다// 꽃보다 내가 먼저 시들 테지/ 뿌리가 얼기 전에, 하루가 절박하기 전에 숨을 불어/ 넣자// 어디로 가고 있나/ 한 쌍의 남녀가 긴 망설임 끝에 헤어졌다// 피부색은 각자 다른데 이별하는 방식은 모두 같아// 온도를 재는 일과 그것을 지키는 일이 부디 꽃 밖에서/ 도 이루어졌으면//
후회 / 박미란
너무 왔다는 걸 알았을 때/ 돌아가고 싶었다// 숲은 푸르렀고/ 푸르름이 더하여 검붉었다/ 한껏 검붉었다가 어두워지면// 탈이 많은 짐승이 먼 산기슭에서 잠들었다// 잠잠해야지/ 그래야지/ 어쩌면 그런 날이 안 올지 몰라/ 숲의 술렁거림을 굽어보면// 후회는/ 어디 아픈 듯/ 뒤늦게 따라왔다// 조금 따라오다가/ 어느 산모퉁이로 접어들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날마다 눈뜨고 감는 일처럼/ 집으로 갈 수 없는 후회가 차곡차곡 쌓여갔다//
북극성 / 박미란
옛날에 우리는/ 때때로 할 말을 잃고/ 까마득히 깊어져서/ 더할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서로의 가슴에/ 시퍼런 멍으로 빛나며/ 여기까지 흘러왔으니/ 잘 가라,/ 아주 잘 가거라/ 떠나보내도 제자리인 빛이/ 저토록 서러운 것은/ 지금도 옛날이기 때문입니다//
날개 / 박미란
목발 한 쌍 출렁이며/ 횡단보도 건너고 있다/ 목발이 먼저 길을 열면/ 빠르게 발이 따라붙고/ 엉거주춤 넘어온 몸은/ 있는 힘껏 목발을 밀어낸다/ 목발이 몸을 실어 나르는 동작은/ 날기 직전의 파닥거림,/ 나비날개 닮았다/ 목젖 다 보이도록 웃는 난장이/ 출렁출렁 움직이는 목발로/ 날아오를 듯 땅을 밟으면/ 이 생에서 다음 생을 건너듯/ 꼭 그만큼의 거리가 줄어든다//
저녁이면 돌들이 / 박미란
저녁이면 돌들이/ 서로를 품고 잤다/ 저만큼/ 굴러 나가면/ 그림자가 그림자를 이어주었다/ 떨어져 있어도 떨어진 게 아니었다/ 간혹,/ 조그맣게 슬픔을 밀고 나온/ 어린 돌의 이마가 펄펄 끓었다/ 잘 마르지 않는 눈빛과/ 탱자나무 소식은 묻지 않기로 했다//
목덜미 / 박미란
그 사람을 버리고 그 사람에게로 가는 동안// 창문으로 비둘기가 날아왔다// 찬란하다 날짐승들이여/ 흔들리는 새벽의 음악이여// 모든 색이 저 목덜미에서 나왔을까// 파랑인가 하면 피투성이 붉음,/ 붉음인가 하면 비명을 삼킨 검정의 기미/ 죽어서까지 기막히게 달라붙던 날짐승을 숨죽이며 바라보았다// 목덜미가 움직일 때마다 달라붙던 날짐승을 숨죽이며 바라보았다// 목덜미가 움직일 때마다 색은 바뀌었고 잔디밭에 뿌려져 초록을 얻었지만// 그 사람은 오지 않았다//
목재소에서 / 박미란
고향을 그리는 생목들의 짙은 향내/ 마당 가득 흩어지면// 가슴 속 겹겹이 쌓인 그리움의 나이테/ 사방으로 나동그라진다// 신새벽,/ 새떼들의 향그런 속살거림도/ 가지 끝 팔랑대던 잎새도 먼 곳을 향해 날아갔다/ 잠 덜 깬 나무들의 이마마다 대못이 박히고/ 날카로운 톱날 심장을 물어뜯을 때/ 하얗게 일어서는 생목의 목쉰 울음// 꿈 속 깊이 더듬어 보아도/ 정말 우린 너무 멀리 왔어// 눈물처럼/ 말갛게 목숨 비워 몇 밤을 지새면/ 누군가 내 몸을 기억하라고 달아놓은 꼬리표/ 날마다 가벼워져도// 먼 하늘 그대,/ 초록으로 발돋움하는 소리 들릴 때/ 둥근 목숨 천천히 밀어올리며/ 잘려지는 노을/ 어둠에도 눈이 부시다//
밤의 물가 ㅡ영옥에게 / 박미란
그걸 말하려고 한 것은 아닌데/ 처음부터 너를 돌려세울 용기가 없었다// 차고 맑은 날은 다른 날을 앞질러버렸다// 미소가 번지는 네 얼굴,/ 너는 너의 깊이에 이르고 있었다// 시 따위는 쓰지 않아도 된다/ 정말 그럴 수 있을까// 반문하는 밤은/ 제 몸의 물기를 말리며 저만큼 물러가 또 다른 밤이 되었다// 너는 왜 검은 시간을 바라보았지/ 여기 없으면/ 거기도 없는 것// 한 발씩 머뭇거리며 나아갔던 세계는 얼마나 잔인한 빛으로 돌아오는가// 잊으면 된다/ 보내주면 된다// 나는 항상 나의 바깥에서 내 얼굴의 그림자를 찾으며*/ 네가 밝힌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뜨겁게 혼자였던 너는/ 밤의 물가에 나와서 별들을 끌어안고 한동안 웃고 있었다//
* 배영옥 시인의 시 「위성」에서 인용.
강 / 박미란
아직은 낮이 길어요/ 언젠가 밤이,/ 한쪽 다리가 긴 밤이 오겠죠// 느닷없이 과일이 익고/ 간신히 맺힌 물방울 떨어지고/ 정오가 백일홍에 앉아 견디고 있네요// 한 사람을 업고 강을 건너는 일//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저편은 멀기만 한데/ 물살은 빠르고 물은 차갑고// 무거워지는 한 사람을/ 강물의 소용돌이에 쓸려 보내지 않으려/ 마른 것이 젖고/ 젖은 것은 더 젖어도// 등이 휘어지도록/ 느린 걸음으로 물속을 걷고 또 걸어요// 다 건넌 후에야 알았어요// 한 사람이 건널 수 없는 강이었다는 것을//
강둑에서 / 박미란
부추꽃 자잘한 그곳에 앉아/ 우리는 부추꽃도 강물도 얘기하지 않았다/ 할 말이 없기에 뭔가를 간직하고 싶어졌다// 물살을 거스르던 청년들이 강의 이쪽과 저쪽을 건너는 사이/ 우리는 허물어지는 것들에 대해서도 입을 열지 못했다// 아무렇지 않은 듯/ 저쪽 너머를 바라보았지만/ 어떤 말은 그대로 몸속에 머물렀다// 우리는 다시 흔들렸다 물어도 답할 수 없는 풍경에 가만히 숨을 내쉬며// 누구나 한 번쯤 놓쳐본 적 있는// 늦었다는 말은/ 얼마나 오래되었던지// 강둑으로 불어오던 바람이 서로를 보지 못하게 머리카락을 허공으로 흩뜨려버렸다//
아침이 오면 그곳으로 갈 수 있을까 / 박미란
아무래도 손은/ 가슴에 붙은 느낌이 들어요// 당신의 손짓,/ 어디 같이 가자고 한 것도 아닌데// 가슴이 떨리고 있잖아요// 창문에 나부끼는 앞날을/ 바람이 데려갔으면 좋겠어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누군가를 대신해 오래 살았고// 아침이 오면 그곳으로 갈 수 있을까// 당신은 마음을/ 멀리 던져놓으라 했지만/ 그 말이 어려워 종일 흔들리고 있어요// 말라가는 공기와/ 떠다니는 낙엽들 사이로// 손은 가슴을 쓸어내리려 그곳에 얹어져요//
밤마다 나는 / 박미란
위태롭지 않은 천변이나/ 흘러내리는 돌계단을 오르내릴 땐// 꼭 뒤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하면/ 어둠과 어울릴 수 있을까// 밤마다 송충이들이 짓무른 몸으로 기어가는 것을 보았다/ 밤마다 임신한 고양이가 몰래 집 나가는 것을 보았다/ 밤마다 산당화가 꽃잎 붉게 하려고 손가락 넣어 토하는 것을 보았다// 때때로/ 안간힘 쓰며// 제 몸 지키는 일에/ 깃털 하나 날아가지 않았고// 밤마다 나는/ 보이지 않거나/ 여기 없는 것들을 그리워하며// 오랫동안 돌아오지 못했다/ 처음부터 집이 없었다//
어느 날 저녁 / 박미란
벌건 짬뽕은 문 앞에 버려졌다/ 비닐 랩이 찢긴 채,/ 그렇게/ 시시한 날이 많았다/ 엎어버리거나 되돌릴 수 없었다/ 식은 국물과 면발의 속수무책처럼/ 그 자리에 있으면 안 되겠니/ 한때 전부였지만/ 언제부턴가 아무것도 아니었던/ 저녁은/ 참 이상한 애인이었다/ 늘 비틀거리며 취한 몸으로 찾아와/ 퉁퉁 불은 후에야 쳐다보게 되는//
문 / 박미란
오래된 집 앞에서 서성거렸다 붉은 빛이 다른 빛을 잡아먹고 아름드리 꽃나무가 우거진,/ 비스듬히 안이 보였지만 선뜻 들어갈 수 없었다 한 발 들여놓으면 귀밑머리 희끗하게 살아야 할 것 같았다/ 언젠가 푸르스름한 칠이 벗겨진 대문을 열고 이끌리듯 마당에 들어갔던 적 있었다/ 그러나 어디까지였을까/ 그 어떤 일에도 넘어서기 힘든 당신이 버티고 있었다//
사이 / 박미란
주인이 죽으면/ 따라 죽는 나무가 있다// 밤낮으로 찬란한 잎사귀와 꽃잎/ 오로지 주인의 방 쪽으로 피우던 석류나무// 등을 토닥이며, 주름 투성이 얼굴 쓸어내리며, 오래 품은 마음을 큼직한 열매로 떨어뜨리며,// 그이가 죽은 후 시름시름 앓다가 그해를 못 넘기고 떠났다// 한사코 같은 자리에 머무는 그늘,/ 때론 나무와 사람 사이에도 다가갈 수 없는 관계가 있어// 그늘은 그늘로 살아가는 걸까// 석류나무 사라진 뒤뜰은 어떤 나무도 들이지 않았다//
숟가락질하다 / 박미란
이런 날 있잖아// 당신은 바람에 업혀 갈 때처럼 얇아져도/ 보내는 쪽이 아프다며/ 눈빛 한 번 맞추지 않았어// 어쩌면 출발하기 전에 주저앉았을지 몰라// 빈 들판의 연기 그리고 작년에 잃은 눈동자// 왜 이런 날 있잖아// 제 속을 훤히 드러내는 세월이 가엾어/ 능청스럽게 살아가려 했지만/ 서투른 몸짓은 매번 들키고 말잖아// 당신을 돌려세웠는데/ 왜 불렀는지 생각이 나지 않아// 지금 여긴/ 깜빡 놓치고 지나온 휴게소 같은,/ 그런 기분이 들기도 해// 그러니까 무사해야 해// 허공에 숟가락질하듯 아무렇지 않게//
누가 입을 데리고 갔다 / 박미란
오래 버티던 그녀가 쓰러졌다// 아름다운 중심과 술렁이는 가지 끝/ 목구멍에서 흰 피가 솟구쳤다// 비가 내렸고/ 벽오동이 가장 먼저 찾아와/ 찢어진 입으로 밥 받아먹고 있었다// 세상은 사시사철 빗속이거나 진흙탕물이라고/ 잠이나 실컷 자둬야 한다는 잎도 있었다// 한때 그녀는 수천 개의 잎을 가졌다 버리지도 거두지도 못한 입은 그녀를 가만두지 않았다 날마다 어둡게 빛나면서 자랐다// 모든 잎들이 한꺼번에 거대한 입속으로 빨려들고// 그녀가 지고/ 흰 달이 뜰 때까지// 죽은 입들이 떠돌아다닌다// 숨 죽여 새잎이 돋아나려면 얼마나 많은 입과 소원이 필요한 걸까// 그러니까/ 아득한 것들이 더 아득해지기까지//
수목원 / 박미란
아침과 저녁이 만나지 못했다// 태어나자마자 싸늘히 식어가던 온기를 꺼내어 서로의 가슴에 달아주었다 마지막 소원은 남기고 싶었지만// 나무는 희고/ 우리의 머리도/ 검지 않다// 누가 우릴 이곳에 데려왔는가// 한 발짝 다가설 수 없어/ 손과 손을 마주 잡지 못하고 아직 남은 폐허를 건네주지 못하고// 눈빛이 흘러갔다 보이지 않는 강물에게 자작나무 흰 몸에게 그리고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우리에게//
사랑 / 박미란
흰죽을 휘젓는 기분으로/ 빗속에 앉아 있었다/ 흰죽이 식어가는 모습으로/ 빗속을 걸어 다녔다/ 이따금씩 나락으로 굴러떨어졌다/ 그 일이 한없이 좋았다/ 네 눈빛으로 접고 펼 수 있는/ 의자를 들였다/ 그 속에서 영영 나올 수 없었다//
기억은 한동안 / 박미란
창을 스치던 빛이 남아 있다// 황급히 떠난 온기가 제 그림자를 떨어뜨린 것이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늘어가는 한숨에 발목 묶이면// 이미 다 펼쳐진 뻘밭이다// 요 며칠 사이/ 입구가 맞지 않는 병뚜껑처럼 헛돌다가 서로 다른 곳을 그리워하며 잠시 눈을 붙였다// 어디선가 새 울음소리 들리고// 뭔가 절실한 것도/ 그쪽을 보고 싶은 것도 아니었지만// 눈을 뜨면 옅은 어둠 속, 알 수 없는 일들이 사방으로 물들며 빛나기 시작했다//
그늘의 저쪽 / 박미란
밥물이 끓어 넘쳤다// 겨울에 받은 소포는/ 뜯지 못한 채 구석에 던져뒀다가/ 여름이 오자마자 버렸다// 떨어지지 않으려 바둥거리던/ 열매가 있었다// 인공 눈물을 넣어도/ 눈물은 나오지 않았고// 이웃집 늙은 여자는 개를 끌고 다녔다/ 서로 닮아간다는 걸 모르는 채// 햇볕을 가리지 않았는데/ 자꾸 그늘이 졌다// 거두어낼수록/ 짙어갔다// 휘어진 그늘의 방향으로/ 켜켜이 푸르른/ 나무는 오래 바라보던 강물이 되었다//
성산 일출봉 / 박미란
아름다운 것을 품으면 모든 게 사라져도 사람은 남는다// 얼마나 많은 비와 바람이 다녀갔을까// 어느날,/ 헤어질 수 없는 그 사람마저/ 떠나가고// 허연 물거품만 해변을 떠돌다가 흘러왔다// 이제 기쁠 일도/ 특별히 안될 일도 없는데// 그럭저럭 견딜 만하다던 당신의 병이 깊어졌다 슬픔은 언제나 묵직해서 혼자 가려 하지 않았다//
거리 / 박미란
유리창을 닦다가 차고 맑은 바깥으로 얼굴을 내민다 허공은 그늘진 나를 데리고 낯선 곳으로 간다// 이리로 와/ 여긴 춥지 않아 어둡지도 않아// 조금 멀리 따라갔다// 가슴 한번 펴는 일은 늘 어려워/ 가슴이라는 말은 가슴을 앓던 사람이 만들었을까// 중얼중얼 돌아오면// 종기처럼 검붉은 열매들이/ 횟배 앓는 나무를 빠져나와 둥근 나무의 품에 안기고// 가까워지려 해도 또 그만큼의 거리가 생겨났다//
흰 것에는 비명이 있다 / 박미란
목련이 핀다// 살아야한다고, 잘 살아야한다고 누구 하나 돌보지 않아도 맹렬히 허공을 물어뜯던 저 꽃// 듬성듬성 털이 빠진 채/ 터져 나오는 비명을 제 손으로 틀어막던 때도/ 끝이 났다// 우우우, 희망을 버리면 얼마나 찬란히 몸져누울 수 있는지 당신은 알지 날마다 꿈꾸던 그날이 오늘이라는 것도 예전부터 알고 있지// 그러나 말해주지 않았지 아무것도 아닌 일에 전부를 바쳐야 한다는 걸// 한 마리의 희고 얼룩덜룩한 짐승이 몸뚱이를 지우고 눈빛을 지우며 아득히 자신을 떠나가는 중이다//
몸살 / 박미란
그가 내 몸을 청진한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어둠에서 더 깊어진 어둠으로/ 차가운 금속이 스쳐 간다// 여기가 아파요/ 아니요, 거기도 아니고/ 어제는 북극곰이 떼죽음을 당했대요/ 유빙이 떠다니다가 여기까지 흘러왔대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대요// 날마다 온몸이 뜨겁게 부서져요/ 나는 원래 이런 사람/ 어디가 아픈지 모르는 사람// 자고 일어나면/ 나는 내가 아닌 듯하고/ 북극 바깥을 꿈꾸었던 그 먼 곳까지 다 무너져요// 안으로 들어가는 문을 잃어버린 듯해요// 빛바랜 공기와/ 비행운이 지나간 하늘/ 나는 원래 대책 없는 사람/ 북극을 그리워하면서 한 번도 가보지 않는 사람// 눈부신 새 떼는/ 다가갈수록 멀어지고// 느릿느릿 시간이 지나가는 걸 언제까지나 내버려 두겠지//
손 / 박미란
잠자던 그의 손이 더듬더듬/ 허공을 짚으며/ 어딘가에 닿으려 한다// 어떤 알 수 없는 힘이 불러냈기에/ 손은 혼자 맹세라도 하듯/ 간절히/ 뭔가를 꽉 움켜쥐었다 놓는가// 깨어있을 때/ 다하지 못했던 일을 하려는지/ 도달할 수 없는 거리를 손사래치며/ 가고자 하는지/ 끝내 그 자신도 알 수 없겠지만// 아침이면/ 수줍은 듯 놓여 있는/ 그의 두 손,/ 정작 너무 까마득하기만 해서/ 아무 것도 아닌 듯 지나가는 일이 있다//
저녁 7시 / 박미란
어디선가 희고 따스한 그림자가/ 미열이 오르기 전의/ 내 이마에 잠깐 멈추었다가/ 떠나갔다// 늘 이쯤에서/ 어렴풋함과 희미함의 결말이 오고/ 늙은 은행나무와 오랜 골목길이 거기서/ 한 번 더 어두워지고 있었다// 이 잠깐의 비극적 희극을/ 누군가 대신 할 수 있다면/ 아득해지기도 두렵고/ 따라나서면 영영 못 돌아올 것 같은/ 가슴 속 그 길을/ 열두 폭 비단치마 펼치듯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새벽 / 박미란
빛의 껍질이 어둠이라는 걸 감자 깎다가 알 았어 한꺼번에 펼치면 앞을 못 볼까봐 빛은 감자 싹처럼 주둥이를 뾰족이 내밀며 최대한 천천히 깊고 뜨거운 속을 드러내기 시작했어// 산모처럼 퉁퉁 부어올라도 빛은 자신을 돌 보지 않았어 얇디얇은 어둠이 다치지 않도록 한 꺼풀씩 벗어던지는 동안 감자는 붉고 단단한 멍으로 번지고……// 미안한 듯 돌아오는 그와 떠나가는 그녀 사 이에 스며드는 푸른빛, 어둠의 속살//
가지를 삶으며 / 박미란
색이 풀리는 걸 본다// 보랏빛이 빠져나가고/ 언제나 일곱 살,/ 검푸른 빛의 죽은 언니가 찾아왔다// 다시 오지 마/ 이쪽을 기웃거리지도 마// 내 앞에서 너는/ 물든 손을 내려놓고 천천히 지나갔다// 반짝거리는 일은 없지만/ 그렇게 막막하지 않아// 다 끝났으니 그만 잊어줘// 저마다의 색으로 새벽이 맨 처음 깨어나고//
우리들의 올드를 위하여 / 박미란
깊어지는 것과 스미는 것의 차이가/ 뭐라고 생각해/ 맘속엔 수많은 총알의 흔적/ 상처가 만든 빛을 꺼내놓고 싶지 않아// 그래 우리는 올드하지/ 왠지 그 말이 좋아, 큭큭/ 낡았다는 말 대신// 올드를 가지고 놀면 큭큭, 정말 그런 것 같아// 어쩌면 그냥 빠져들지 몰라/ 왔던 방향 거슬러 당신을 따라갈지 몰라// 미꾸라지에게도 오늘이 있다면/ 앞으로 넣으면 뒤로 새는 통장처럼 털려버린 우리는/ 언제나 영원할 거야, 큭큭// 왜 우린 서로 다른 이름으로 살아야 하는가/ 잡을수록 달아나는 허공과/ 달의 운석에서 떨어진 당신은 얼마나 멀고 차가운가// 당신이라는 말은 아무리 불러도 왜 올드 하지 않은가/ 철없이 좋아/ 지겹지 않은 얘기인가 큭큭,// 식으면서 뜨거워지는 모래사막 속으로 우리는 나란히 걸어갔다//
비단길 / 박미란
밤은 그냥 가지 않고/ 기억을 품고 가려 한다/ 무엇 때문에 어둠에서 새벽이 태어나고/ 무엇이 이 공간으로 밀려오는가// 매일 밤이면서 새벽이고/ 낮이면서 저녁인 시간들/ 무엇 때문에 하루는 또 하루를 물고 가는가*/ 죽은 별이 살아나 눈썹 위에 비틀거리는가/ 무엇 때문에 죽은 별이 다시 죽어/ 입술은 루주를 덧칠하고/ 핏기 없는 얼굴은 화장을 떡칠하는가// 모든 밤이 서럽지 않으면서 서러운/ 화려하고 쓸쓸한 잔칫날인데/ 흰 천에 형형색색(形形色色) 실을 놓아/ 끝없는 밤으로 이어놓는가/ 새벽을 푸르게, 뼈마디 쑤시도록 푸르게 하는가// 무엇 때문에/ 밤과 새벽이 멀리 떨어진 듯 이어져/ 또 하루가 무단결근 없이 이리도 밝아오는가//
* 파블로 네루다의 시 '어디냐고 묻는다면' 에서 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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