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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도 시인
1957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나 청양에서 자랐다. 사라벌고등학교와 공주사대를 졸업했다. 1985년 《민중교육》지에 시 「너희들에게」 외 4편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등단과 함께 필화를 겪었으며 그 후 두 차례 학교 현장을 떠나기도 하였다. 여러 일이 많았지만, 시 쓰는 일을 놓지 않아 1988년에 나온 첫 시집 『교사일기』, 『좋은 날에 우는 사람』, 『백제시편』, 『그나라』, 『산』, 『자물쇠가 철컥 열리는 순간』, 『아름다운 사람』, 『소금 울음』 등 많은 시집을 발간했다. 2012년 퇴임하여 청소년들이 평화롭기 위해서는 어른들이 먼저 평화로워야 한다는 취지에서 ‘청소년평화모임’의 일을 하면서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글을 쓰고 있다.
너희들에게 / 조재도
싹수 있는 놈은 아닐지라도/ 공부 잘 하고 말 잘 듣는 모범생은 아닐지라도/ 나는 너희들에게 희망을 갖는다/ 오토바이 훔치다 들켰다는 녀석/ 오락실 변소에서 담배 피우다 걸렸다는 녀석/ 술집에서 싸움박질 하다 끌려왔다는 녀석/ 모두 모두가 더없는 밀알이다./ 공부 잘 해 대학 가고 졸업 하면 펜대 굴려/ 이 나라 이 강산 좀먹어 가는/ 관료 후보생보다/ 농사꾼이 될지 운전수가 될지/ 공사판 벽돌 나르는 노동자가 될지/ 모르는 너희들에게 희망을 갖는다./ 이 시대를 지탱해 가는 모든 힘들이/ 버려진 사람들, 그 굵은 팔뚝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나는 너희들을 믿는다./ 공무원 관리는 되지 못해도/ 어버이의 기대엔 미치지 못해도/ 동강난 강산 하나로 이을 힘이 바로 너희들/ 두 다리 가슴마다 깃들어 있기에/ 나는 믿는다, 통일의 알갱이로 우뚝우뚝 커가는/ 건강하고 옹골찬 너희 어깨를.//
유물론 / 조재도
죽은 어머니를 고추밭에 묻었다/ 한 길 땅 속 허공에 반듯이 누워/ 분해되어 가는 어머니/ 푸른 햇살 되퉁기는 풋고추에 몸을 실어/ 올여름 우리에게 싱싱하게 오신다/ 생명은 이렇게 한 치 건너 두 치/ 보이지 않는 길 따라/ 목숨을 싸고 돈다// 고추에 된장 듬뿍 찍어/ 와삭, 어머니를 먹는다/ 어머니 살을 먹는다/ 어머니를 움켜쥐고 있는 흙의 손을 먹는다/ 얼얼하구나, 오냐, 살 수 있겠다//
선의善意 / 조재도
오늘도 둥지를 틀도록/ 나무는 새에게 손가락 세 개를 내어주고/ 잠든 고양이 깨지 않도록/ 기척을 줄이며 어린아이가 발걸음을 걷는다/ 사람에게 선의가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선의가 악의보다 조금 더 많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가/ 싸우지 않고 서로 잘되기를 바라는 것/ 마당에 참새들이 날아와 반짝거려 준다는 것/ 언제부터 나는 이런 선의 속에 살았나//
아름다운 사람 / 조재도
공기 같은 사람이 있다./ 편안히 숨 쉴 때 알지 못하다가/ 숨 막혀 질식할 때 절실한 사람이 있다.// 나무그늘 같은 사람이 있다./ 그 그늘 아래 쉬고 있을 땐 모르다가/ 그가 떠난 후/ 그늘의 서늘함을 느끼게 하는 이가 있다.// 이런 이는 얼마 되지 않는다./ 매일같이 만나고 부딪치는 사람이지만/ 위안을 주고 편안함을 주는/ 아름다운 사람은 몇 안 된다.// 세상은 이들에 의해 맑아진다./ 메마른 민둥산이/ 돌 틈에 흐르는 물에 의해 윤택해지듯/ 잿빛 수평선이/ 띠처럼 걸린 노을에 아름다워지듯// 이들이 세상을 사랑하기에/ 사람들은 세상을 덜 무서워한다.//
벤치 의자 / 조재도
태조산 산행길/ 마주 보던 벤치 의자가/ 등 돌리고 떨어져 있다/ 코로나 때문이다/ 기분이 씁쓸, 그러다/ 가만, 등 돌리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 싶다/ 너무 가까이 붙어 있으면/ 머잖아 탈 나는 게 인간관계 아니던가/ 서운한 듯 아주 서운치는 않게/ 외로운 듯 너무 외롭지는 않게/ 벤치 의자처럼//
잠시 / 조재도
혼자 산에 다니는 사람이 있다/ 마주친 횟수에 비해/ 나눈 말은 적다/ 5월 지리산 야생화 보러/ 밤 기차로 구례에 간다고 한다/ 우린 잠시 서서/ 그 정도 말만 하고 헤어진다/ 나는 위로/ 그는 아래로//
마지막 영토 / 조재도
아무리 낮은 동네 산도/ 정상은 섣불리 내주지 않는다// 정상의 마지막 구간/ 잡아채는 고비가 있다// 다 내주어도/ 함부로 내주지 않는/ 산의 자존심// 네가 지키고자 하는/ 너의 마지막 영토는 무엇이냐//
사나운 것들 / 조재도
날씨가 어찌나 사나운지/ 산에 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삶이 어찌나 사나운지/ 살아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래도 가야지/ 모자 쓰고 장갑 끼고 중무장하고/ 얼어붙은 산에 간다// 나서기가 어렵지/ 가면 또 가게 된다//
여름 / 조재도
그 집에서 여름은 혼자 살았다/ 여름이/ 하늘로부터 비를 데려와/ 흙담 옆구리를 무너뜨렸다/ 그 구멍 틈새로/ 생쥐가 까만 눈을 내밀다 사라졌다/ 여름은/ 뭉게구름처럼 부풀어 올라/ 그 집 헛간 구석에 던져놓은 폐목에/ 헝겊 쪼가리 같은 버섯을 키우고/ 마루턱까지 차오르게 명아주를 키웠다/ 빈집을 짜개놓는/ 매미소리/ 녹음을 가득 안은 여름이/ 그 집을 온통 휘저어 풀물 들여 놓았다/ 그냥 두면/ 한 백년 꾸벅꾸벅 졸기만 할 것 같은 그 집/ 능소화 마구 뻗어 오른 대문간/ 오줌 누는 나에게/ 한 세월 거저먹으려는 건달 같은 여름이/ 내년에도 다시 와 공으로 산다 한다//
푸르른 날 / 조재도
울면서 산을 오른 날 있다/ 직장 잃고 갈 곳 없을 때였다// 울면서 산을 내려온 날 있다/ 그분 세상을 떠난 날이었다// 주저앉아 산에서 운 날 있다/ 어머니 돌아가신 후 어느 날이었다//
그 강가 / 조재도
삽들이 길을 내어 도랑물이 흐르고, 모아진 물들이 지붕 낮은 마을 앞을 지납니다. 흙발 씻는 이의 무릎 밑도 지납니다. 느릿한 암소의 마음으로 콩밭머리 두런대는 말소리로, 흐르고 흘러 풍경을 빚어내고 마음 가 닿는 물마루를 그립니다. 하늘 끝까지 강물을 빨아올리는 미루나무의 힘찬 펌프질, 매미 소리, 나비 떼, 아득히 울리는 수탉의 울음소리. 물의 속살 헤치며 참방참방 물 장구치는 풀들 꽃들 애기 햇살들.// 그 강/ 가에 살은 어느 사람이 뭉개지고/ 사람을 품고 살은 햇볕 다순 마을이 무너지고/ 포크레인, 흙탕물/ 미혹迷惑으로 떠다닐/ 거품의 허연 눈, 눈알들//
개구리눈 / 조재도
주전자 뚜껑에/ 공기구멍/ 볼록 튀어나와/ 내가 개구리눈이라고 이름 붙인/ 공기구멍// 부글부글 물이 끓을 때/ 허연 김이 쉭쉭 뿜어져 나올 때/ 주전자 뚜껑 들썩들썩/ 성난 황소처럼 씩씩거릴 대// 우리들 마음에도/ 개구리눈 같은 구멍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친구와 싸워 말도 안 할 때/ 아이들이 놀려 열 팍팍 받을 때/ 압력 밭솥처럼 부글부글 끓어/ 마음이 터지기 일보 직전일// 주전자 뚜껑에 난 공기구멍처럼/ 쉭쉭 김 빠지는 구멍이 있었으면 좋겠다/ 꽉 닫힌 마음에/ 열린 구멍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다//
가만 있자 그러니까 그게 거, 할 때의 그 가만 있자에 대하여 / 조재도
어떤 말이 저렇게 깨달음의 등불을 오롯이 드러낼까/ 어떤 말이 저렇게 강물처럼 흘러 순간마다 빛날까/ 어떤 말이 늘 서서 걸으며 달려가는 우릴 멈추게 하겠는가/ 그 자리에 멈추어. 않아. 되돌아보게 하겠는가/ 가만 있자의 그 순간이 어디/ 사람에게만 있겠는가/ 소주 집에 앉아 씩둑거리는 사람에게만 있겠는가/ 날아오를 자리 가늠하며 대가리 까댁이는/ 미루나무 꼭대기의 저 까치에게도/ 주춤대며 개천 다리 건너오는/ 오늘 아침 샛강의 자욱한 안개에도/ 그러니까 그 자세 가만 있자의/ 낮은 걸음 자세는 깃들어 있는 것이다/ 왜 아니겠는가, 한 순간 불티처럼 튀어나온 그 깨달음에/ 극(極)으로 치닫던 마음이 돌아앉는다/ 제 몸 진저리치며 세우는 그 자리에/ 고양이/ 쥐의 일에/ 슬퍼도 하고/ 밭에서 돌아온 소가/ 부어오른 제 발등을 핥기도 한다// 어느 말이 저렇게 어두운 골방에서/ 맹렬히 타오르는 담뱃불이겠는가//
좋은 날에 우는 사람 / 조재도
슬픔의 안쪽을 걸어온 사람은/ 좋은 날에도 운다/ 환갑이나 진갑/ 아들 딸 장가들고 시집가는 날/ 동네 사람 불러/ 차일치고 니나노 잔치 상을 벌일 때/ 뒤꼍 감나무 밑에서/ 장광 옆에서/ 씀벅씀벅 젖은 눈 깜작거리며 운다/ 오줌방울처럼 찔끔찔끔 운다/ 이 좋은 날 울긴 왜 울어/ 어여 눈물 닦고 나가 노래 한 마디 혀, 해도/ 못난 얼굴 싸구려 화장 지우며/ 운다, 울음도 변변찮은 울음/ 채송화처럼 납작한 울음/ 반은 웃고 반은 우는 듯한 울음/ 한평생 모질음에 부대끼며 살아온/ 삭히고 또 삭혀도 가슴 응어리로 남은 세월/ 누님이 그랬고/ 외숙모가 그랬고/ 이 땅의 많은 어머니들이 그러했을,/ 그러면서 오늘/ 훌쩍거리며/ 소주에 국밥 한 상 잘 차려내고/ 즐겁고 기꺼운 하루를 보내는 것이다//
교단 일성 / 조재도
있다, 베품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면서/ 깨어난 새벽 밝아오는 여명 바라보면서/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생각하면서/ 침묵하는 사람들, 있다// 우리의 심장은 외롭다/ 교과서를 읽고 명령 사항을 전달하는/ 우리의 말은 슬프다/ 걸려 있는 외투처럼 항상 고독타// 그런가/ 몸떨림으로 뒤채임으로/ 끝장이다 끝장이다/ 울부즐 만큼/ 정말 슬픈가 그토록 외로운가// 아니다, 그럼 무엇인가 우리의 심장/ 녹슬게 하는 것/ 함구무언 보신안명 못본 척 못들은 척....../ 언제부터인가 이 암독 살을 헤집고/ 피 속에 흐르기 시작한 때는// 우리의 침묵 속/ 강이 보인다/ 죽음이 강, 끝내 눈 뜨지 못한 채 몰려 다니는/ 피라미떼들/ 아이들이 보인다.//
반푼 / 조재도
이유도 없이/ 담임에서 소박 맞고 아이들과 떨어져 있는/ 나는 반푼이다.// 오리걸음 선착순에/ 뽀얗게 먼지 이는 운동장을 바라보며/ 저러면 안되는데 생각만 했지/ 한 번도 제대로 말해본 적 없는/ 나는 반푼이다.// 8.15을 이야기하고/ 조국 통일을 이야기하면서/ 눈길이 자주 복도로 향하는 것은/ 내 믿음의 부족만은 아닐 것이다.// 얼마나 더 큰 겨울이 흘러야 할까/ 반쪽 땅 언덕/ 올해도 어김없이 꽃은 피는데// 꽃이 꽃이 아니다/ 봄이 봄이 아니다/ 가슴 깊이 파이는 굴헝을 보면/ 나는 한쪽이 허물어진 영락 없는 반푼이다.//
쉴 참에 담배 한 대 / 조재도
남의 등가죽이나 베껴먹는 치들에겐/ 쉴 참에 담배 한 대가 아니예요/ 손 발 놀려 쉴 틈 없이 일하는/ 일하지 않고서는 달리 먹고 살 도리 없는/ 막노동꾼 흙노동꾼에게만/ 그야말로 쉴 참에 담배 한 대지요/ 공사판 자갈더미 위에서든/ 논두렁 밭두렁에서든/ 쉴 참에 담배 한 대 태우며/ 땀절은 몸뚱어리 식히기도 하지요/ 턱수염도 문지르고/ 코도 휭 풀고/ 아으, 고단한 몸 기지개도 켜면서.//
행복할 때 / / 조재도
맛있는 것 먹을 때/ 용돈 받을 때/ 내가 착하다고 느껴질 때/ 사람들과 즐겁게 어울릴 때/ 남을 도와줄 때/ 칭찬받을 때/ 주위 사람들이 행복할 때/ 친구와 놀러 갈 때/ 잠잘 때,/ 공부가 잘될 때/ 저녁에 엄마와 전화할 때/ 아무 생각 없이 텔레비전 볼 때/ 남자 친구를 볼 때/ 놀 시간이 생겼을 때//
고구마 / 조재도
딸내미가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어머니께서 한 보따리 보내오셨다// 실하고 갸름해서/ 쩌먹거나 구워먹기에 안성맞춤인 것들// 아파트 뒷베란다에 놓아두고/ 달포쯤 지났을까/ 하 요것들이 썩기 시작한다// 날씨가 추워지면서/ 고구마가 얼었다 녹으면서/ 썩는 것이다// 제놈 하나만 썩는 게 아니라/ 옆의 놈까지 썩게 하는 것이/ 못된 인간들의 행티를 닮았다// 썩은 고구마를 골라 쓰레기통에 던진다// 게중에는 푸슥푸슥 마르긴 했어도/ 고구마 본래의 모습과 파실파실한 맛을 지닌/ 실한 놈도 있다// 그런 놈들을 보면 아으 반갑다/ 사람다운 사람 만났을 때처럼.//
노인말씀 / 조재도
김씨 아저씨네 마당은요 멍석 두어 개 핀 만큼이나 될래나? 그 좁은 마당에 맥문동 줄기 널어 놓았는데 글쎄 고삐 풀린 그 집 소가 그걸 다 먹어치웠대유.// 농사짓는 것보담 훨씬 낫다고들 해서 김씨 아저씨도 맥문동을 심었는데 한 이백 평 해서 몇 백만 원 벌긴 벌었대유. 근데 소가 그 줄기 먹고 삭히지 못해 죽으려구 해서 고깃간에 헐값으로 팔아 넴겼다는구먼유.// 따지고 보면 그게 그거지유. 맥문동 해서 번 돈 소 죽여 날렸으니 그게 그거 아닌감유.// 이 사람아. 그게 어디 그런가? 소가 맥문동 줄길 못 삭혀서 죽었으니 을매나 고생했것나. 아 사람두 밥먹구 체하면 꼼짝을 못허는디 소야 오죽했겄어.//
소금 울음 / 조재도
1.// 소금이 울던 밤을 잊지 못한다 깊은 항아리에 담긴 소금이 백금 빛 하얀 울음을 울었다 고독하다고, 짠맛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고독을 견뎌야 한다고, 소금이 찬 서리 빛 울음을 우는 밤이었다//
2.// 모든 존재가 행복하게 하라!/ 약하든 강하든, 높든 중간이든 낮든,/ 작든 크든, 보이든 보이지 않든, 가깝든 멀든,/ 살아 있든 태어날 것이든 모두가 온전히 행복할지어다!//
3.// 붓다의 언행을 기록한 고대 팔리어 경전의 이 시는/ 예수의 말씀을 기록한 성서에도/ 같은 뜻의 의미로 나와 있다/ 아 소금의 일생을 살다간 사람들/ 예수/ 붓다/ 그리고 어느 시골 마을의/ 남루했던 아버지/ 그들이 남긴 삶을 눈으로 읽지 않고 손가락으로 찍어 먹어보면/ 소금의 짠 맛을 느낄 수 있다//
4.// 아버지는 우리 식구의 행복을 위해 평생을 살았다 봄이면 갈라터진/ 손가락에 반창고 를 감았다 저녁 어스름 들에서 돌아오는 아버지의 목덜미에/ 하얗게 돋아나던 소금꽃, 이따금 술에 취해 얼굴이 대춧빛으로 붉어지면/ 아버지는 마루턱에 앉아 <나그네 설움>이라는 노래를 부르다/ 잠이 들곤 하였다?//
5.// 잠꼬대 같이 웅얼대던 아버지의 노래가 백금 빛/ 소금 울음이었다는 것을 나는 커서야 알았다// 누군가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는/ 자기 안의 고독을 견뎌야 한다는 것// 성서도/ 경전도/ 아버지가 남긴 생전의 일기도/ 하얀빛이 흘린 내출혈이었음을/ 그땐 물랐다//
백제시편 1 ㅡ길 / 조재도
깨진 기왓장/ 진흙빛 꿈/ 솔숲 울리는 바람에 담배 연기 풀풀 날리어도/ 영혼의 갈증/ 낙엽 밑 흐르는 가늘은 샘물처럼/ 질기게 이어져// 혹 잘못된 꿈은 아닐까/ 세상 어느 구석지 잔상(殘像)으로나 남아 있는/ 그 나라, 먼 마을/ 햇살 소보록한/ 이부자리 밑 따사로운 온기 같은/ 그 마을 가는 길/ 시대를 등진 나의 시선은// 빛을 향한/ 징검다리/ 밟고 가는 그런 날엔/ 우리네 슬픔도 더디 말랐으면 좋겠네//
백제시편 2 ㅡ성터 / 조재도
아마득한 것이 흘러갔나 봅니다. 수수밭을 흔들며 다홍빛 감잎을 떨구며/ 돌틈을 흐르는 시냇물보다 바삐, 바람으로 햇빛으로 맑고 찬 가을의 기운으로// 그러니 마음인들 언제 적 마음이겠습니까. 허공에 휘우듬히 뻗은 난초 잎처럼 오래도록/ 이승에 걸어두고 싶던 그때 그 옛사람의 마음인들// 뼈는 바람에 실리어가고 흔적만 남은 자리. 쑥대를 안고 잠자리 조을고, 따순 볕만 쟁알쟁알, 대낮에도 풀여치 울음이 빈 그물로 땅에 나립니다//
백제시편 3 ㅡ노을 / 조재도
까치발 딛고 서서 아스라이 내다보면 천년의 저 탑신(塔身) 너머 호박빛 노을, 나지막한 지붕, 비젓이 열린 부엌문 틈, 다홍빛 불꽃, 사내는 잎나무 그러넣어 아궁이에 불 지피고 허리 구부슴히 솥의 뭍 가셔내는 아낙, 사내와 아낙의 도른도른 말소리// 뭉싯뭉싯 김 오르는 부엌을 향해/ 시장기 새김질하는 암소의 입김//
백제시편 6 ㅡ슬픈 인화(印畵) / 조재도
어둑새벽/ 굴품한 속에/ 무 한 쪽 저며 먹고/ 풀대궁처럼/ 야윈 어머니/ 알무릎 세워/ 서리서리 이어가는/ 가늘은 삼(麻)줄//
백제시편 11 ㅡ내가 이어가는 것은 / 조재도
누천 년 전 깨어난/ 당신의, 하늘과 들과 산을 우러러/ 살다 간 당신의 혼을 이렇게 다시 만난다는 것은/ 세월의 이랑을 뛰어넘은/ 정념일까/ 명주실보다 길게 가늘게/ 핏속에 고이 고인/ 정의 오래기 때문일까// 아님/ 사상인가/ 선홍빛 아가미/ 처럼 발닥발닥 숨쉬는/ 정수리에 박힌/ 사상 때문일까// 채곡채곡 쌓인 꽃잎 헤치어 보면/ 환하게 열리는 봄날의 향원(香園)/ 그래, 아니야/ 당신의 가락을/ 말을/ 나의 유년과 잇닿아 있는 그 질그릇 빛 세계를/ 전통처럼 내가 이어가는 것은/ 오히려 높디높은 상고대(上古代)의 하늘 남아 있기 때문//
백제시편 13 ㅡ반가사유상 / 조재도
삶이 그렇게 바쁜 것은 아니리// 앉아서야 들리는/ 돈오(頓悟)의 말씀/ 무쇠 소의 정수리 빠개치는 말씀// 그 미소/ 띨락 말락// 천년을 앉아/ 서성이는 우릴 인도하는/ 저 손가락//
산 / 조재도
산에도 질정할 수 없는 설움이 있나 보다/ 산에도 가릴 수 없는 울화통이 있나 보다/ 울툭불툭 치솟은 묏봉들을/ 짐짓 모르는 체 다독이며 뻗어나간/ 산의 맥,/ 영(嶺)//
장작 1 / 조재도
꽃은 나무에서 피고/ 불은 장작에 붙는다/ 겨울엔 꽃보다 장작이다//
바람의 소리 / 조재도
올가을에도/ 산에 갈 때마다/ 눈에 띄는 도토리 주워/ 풀숲에 던져 주었다/ 사람 발에 밟히면/ 으깨져 아뿔사!// 산행길/ 풀숲에서/ 고마워 고마워, 하는 소리 들렸다// 인간의 말소리가 아닌/ 산과 도토리만이 낼 수 있는/ 바람의 소리였다//
달개비꽃 / 조재도
성불사 돌담 틈/ 달개비꽃/ 아무래도 저 꽃은/ 지난밤 내린 이슬들이 피웠는가 보다/ 아침에 피어 저녁에 오무는/ 금강 상류/ 물빛 같은/ 자세히 보면 고 작은 꽃 안에/ 코끼리 한 마리/ 뿌앙하고 산다//
제비꽃 / 조재도
울음이 물집처럼 툭 처지는 때 있나니/ 그런 날이면/ 은행알처럼 딱딱한 마음에 금이 가는 그런 날이면/ 어느 산모퉁이 한가로운 고요 속/ 제비꽃 포르스름한 미소 그리웁나니//
조각보 / 조재도
어머니의 일 년 소출 쌀말을 싸들고 온/ 바둑판 무늬 희미한, 물 바랜 소창 보자기에/ 겹대어 꿰맨 흔적이 있다/ 아픈 상처 아물리듯 땀땀이 기운 바느질 자국/ 깃은 헤실헤실 닳아지고/ 실밥 올올이 풀려 몸이 많이 상해 있다/ 오래전 생의 반환점을 지나쳐/ 서서히 소멸에 가까워진 짚풀 같은 사람아/ 늘 바닥에 놓여 함부로 몸을 부리면서도/ 싸주길 잊지 않던 보, 보자기 같은 사람아/ 그대 삶은 넓고 온전한 한 장이 아니었구나/ 잇댄 조각조각으로 닳아빠져 있구나/ 새벽마다 가난의 젖 피나게 물려온/ 그만큼의 수고로움/ 그만큼의 아픔과 넉넉함과 질긴 몸부림/ 그러고 보면 당신은 메마른 강물/ 오랠수록 하상(河床)의 적막 드러내는 애잔한 강물/ 짐이 몸의 일부가 되어버린 사람아/ 고단함과 이웃하여 살아가는 사람아//
옛 생각 / 조재도
마당귀 나푼나푼 나는 흰나비처럼/ 푸시시 일어나는 성냥불처럼/ 사그라든 재에 묻힌 불씨처럼/ 담장 너머 들려오는 하모니카 소리처럼/ 내 안에/ 동글한 품안에/ 마음의 금줄을 차고 날아오르는/ 은빛 새 한 마리//
파경(破鏡) / 조재도
휘리리 공중을 돌아 떨어지는 은행나무 잎새의/ 비워진 마음 끝에 남은 쓸쓸한 가을/ 남당리 길을 물으려 찾아든 집에/ 팔순 노파가 마늘을 까고 있다/ 몇 마디 하는가 싶은데 입술만 달막댄다/ 거무튀튀한 손마디가 짧고 뭉툭하다/ 바가지를 앞에 놓은 등이 묏등만히 굽고/ 두 무릎이 귀를 가려 머리 위로 솟았다/ 평생 흙노동에 이제 겨우 놓여난/ 감자처럼 동그마니 오므라든 육신에/ 풍을 맞았는지 머리를 갼들갼들 떤다//
주꾸미 / 조재도
훌러덩 벗어진 대가리에 부챗살 같은 다리를 쫙 펴 오므려 헤엄치는 바다의 묵객 주꾸미가 함지박에 그들먹이 들었다// 한 꿰미 들어 얼마냐 하니 두 꿰미에 만 원 달라 한다// 할머니 제사상에 놓일 떡이며 포며 사과며 배를 산 나와 어머니는// 가르릉가르릉 앓고 있는/ 소족이며 갈치지짐이며 돼지뼈로도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의 입맛을/ 이 주꾸미로 돌렸으면 하며, 말이 없다//
수돗가 / 조재도
살 오른 볕이 이불 속처럼 따스하다/ 앵두나무 감나무 포르스름한 잎닢을/ 간질키며 오는 봄이/ 마늘밭 짚 검불에 단이슬로 내리었다/ 배나무를 가로지른 전선줄이/ 심심하기도 한 하루 한나절/ 설거짓감 포갬포갬 놓여진 수돗가에/ 고양이가 물을 할짝이다 간다//
조심한 모양 / 조재도
잘름잘름 물 찬 동이 똬리에 받쳐 이고, 물 한 방울 흘리잖도록 조심조심 걷던 옛 여인의 걸음걸이는// 암만 그러해도 동이물 흘러넘쳐 콧잔등 찰싹찰싹 때리면 그 물 진정토록 잠시나마 서서 가쁜 숨 잠잠히 몰아쉬던 것은// 아침에 핀 꽃송이 코 대고 덥석 냄새 맡지 말아요, 싫어요 그건, 두 손에 고이 받쳐 들고 반쯤 눈 감아 향기 맡아요// 그물 속 물고기 비늘이 상할까 봐 두 손 오므려 받쳐드는 어린아이 마음은//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이 나를 사랑하고 사랑하여, 차마 함부로 하지 못할 마음입니다//
새벽 비 / 조재도
새벽녘에 비 내린다/ 그 빗소리 잠결에 들었다/ 노인네의 잔약한 기침 소릴 들었다/ 헛간 기둥 매달린 삼십 촉 전구/ 유리병 꽂아 만든 화단 어스름/ 분꽃이 자분자분 비에 젖는다/ 맨드라미 몇 송이 비에 젖는다/ 앉을개에 앉아 고추 다듬던/ 어머니, 에 에취 재채기한다/ 더 자잖고 벌써 나왔니/ 잠기 묻은 말씀이 비에 젖는다//
만심滿心 / 조재도
장날이다/ 가을볕 째듯이 비친 시장 골목에/ 할머니 한 분 나물 놓고 앉았다/ 눈자위가 물에 불린 콩 껍질처럼 쪼그라졌다/ 고사리 취나물 까중순을 들추다가/ 이건 무어야 하니/ 쑥이라 한다/ 지난봄 나불나불 난 것을 북북 뜯어서/ 장볕에 말렸다며 한 줌 더 주신다/ 덤에 호믈짝 웃음까지 보태니/ 암만해도 그 할머니 마음자리가 둥글 것만 같다//
집 / 조재도
집에/ 아이들이/ 없다, 엄마가/ 없다, 아빠가/ 없다, 집은/ 너무 외로워/ 나가버렸다//
겨울 잡초 / 조재도
늙은 창녀가 돌아앉아 성경을 읽고 있다/ 유난히도 재물 운을 점치는 화투패가 잘 떨어지는 날이다/ 여성이면서 성(性)이 아닌 것처럼/ 겨울 잡초는 이제/ 풀이 아니다/ 고드름 녹는 물이 한가하게 오후를 옴방톰방 적신다/ 내년 봄엔 이곳에도 화려한 불빛이 돋고/ 우북이 돋는 풀잎처럼 돈다발이 좀 쌓일래나//
행로行路 / 조재도
쌓인 눈에 달빛이 희고 차다// 마루 밑에선가 토광 앞엔가/ 도둑괭이 앙크러뜯는 소리, 이내 잔잔해진다// 오늘도 지나는 여러 날 중 하루 끝머리이다// 제사가 있은 날/ 불 끈 방/ 말코지에 걸린 옷들이 쓸쓸해 뵌다//
긴 것에 감긴다 / 조재도
끈은 길어야 묶을 수 있고/ 강은 길어야 가뭄에도 땅을 적신다// 당신은 어떠한가/ 긴 사람인가/ 긴 끈처럼 긴 강처럼/ 사람을 감고 적실 수 있나// 달의 둘레에 놓인 달무리처럼/ 언젠가 당신 삶에 스며들어/ 인생이 된 것// 당신 삶에 토막 나지 않은 것//
물소리 / 조재도
대낮에도 구신이 난다는 바른생이 고개/ 그 고갤 늦도록 술 마시다 한밤중에야 올랐다/ 바람은 윙윙 물레 잦는 소리로 울고/ 억수로 쏟아지던 비/ 눈앞이 캄캄도 하여 한치 앞이 보이지 않던 밤/ 시골집에 가기 위해 고갯길에 올랐다// 십여 리 산길/ 아득할 따름이지 분명 꿈이 아닌 어엿한 생시의 길/ 비바람 몰아쳐 먹밤을 때리고 머리칼을 할켜/ 쭐끄덩 미끄러지고 팩 고꾸라지며 가는데/ 갑자기 길이 어슥도 하니 훠언해졌다// 논두렁만큼 조붓하니 눈앞만 훤해 밝아진 길/ 그 으심치레한 길을 딸가 가다가/ 아무래도 이러다 내가 죽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옻빛 어둠/ 오싹 살이 졸아들었다.// 찬 비바람에 몰려 나뭇잎을 후리고/ 백년 여우 피를 토하며 우는 밤/ 구신이 밝힌 足燈따라 회오리 밤의 광풍따라/ 산 속 헤매다 어딘지 모르고 쭈그려 앉은/ 내 앞에 열리던 비린 저승의 문// 서서히 몸의 기운 잦아드는데/ 그때 우르르 콸콸 쏟아져 내리던 계곡 물소리/ 순간 물은 낮은 데로 흐른다지.... 저 소리 따라가면 마을에 닿을 수 있을지 몰라/ 하는 생각에/ 칠흑 속 비칠비칠 걸어내려 오던/ 지금부터 오래 전, 그러니까 나 스무 살 저의//
이야기는 힘이 세다 / 조재도
이야기 잘 하는 연인은 안 헤어진다/ 이야기 잘 하는 부부는 이혼 안 한다// 풀을 뽑아보라/ 줄기가 끊길망정/ 뽑히지 않는 것은/ 풀뿌리에게/ 흙과 나누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 풀뿌리의 생명은/ 흙과 하는 이야기// 매일 소곤대는 너와 나의/ 사소한 이야기가/ 우리 사이 오래 시들지 않게 한다//
왕비 어금니 / 조재도
마음이 숯검뎅이 암흑이거나/ 불이 나 그을음으라도 자욱 끼게 되면/ 못돼먹은 세상 크게 욕이라도 해 주고 싶지만/ 그럴 때마다 조용히 외진 곳에 나와/ 공주 박물관에서 보았던 왕비 어금니를 생각한다/ 그러면 들쑥날쑥 날 선 망듬이 조금은 가지런해진다/ 산머리에 걸린 노을처럼 고요해지고/ 갈앉은 꽃봉오리처럼 담담해진다/ 오랜 세월을 견뎌 오늘에 남은/ 옥수수 알갱이만한 왕비 어금니/ 투정에 흘기눈에 매끄러운 옷을 입고 단밥을 먹고 금베개에 낮잠을 잤을/ 그러나 세월이 쓸어간 것들/ 천 년 해가 가는 동안/ 바람의 늙은 손이 쓸어간 것들/ 그러고 보면 나의 암울도 소원의 괴로움도 불내 나는 마음도 푸스스 묽어진다/ 그런 뒤에 찾아드는 스스로에 대한 슬픔//
그리운 고비 / 조재도
그곳엔 바람/ 햇빛/ 까마득한 지평선// 시간이 짙은/ 구름 그림자로 흐른다// 짧은 발목으로/ 초원의 대지에 웅크리고 있는 풀// 바람이 할퀴는/ 게르 안/ 담요를 끌어당겨 덮어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갈수록 더해가는 허기/ 광막한 사막에서/ 우리네 인생은/ 모래 한 알// 낮고/ 황량한/ 생명들이/ 눈물겹게 내 안에 스민다//
사중주 / 조재도
바람에 실려 가리/ 그러다 점이 되리/ 그러다 無가 되리/ 바람마저 없으리//
새 / 조재도
새여/ 천 길 벼랑 끝/ 바람의 등을 타고 나는 새여/ 샛푸른 하늘/ 너와 함께 날고 싶은/ 내 영혼을 보았니//
아침 해 / 조재도
초원에 부는/ 투명한 바람/ 흔들리는 풀잎 사이사이를/ 붉게 적시는 아침 해// 삼라만상을 돌리는/ 둥근 배터리/ 켜고 끄고 할 수 없는/ 거대한 스위치// 밤새 도움닫기 하여/ 지평선에/ 불쑥// 해맑은 아가의 얼굴/ 붉은 빛의 일렁임//
작은 돌 / 조재도
바람에/ 둥글어진 돌/ 제 몸이 깎여 무늬 드러낸 돌// 10만 년이 걸렸을까/ 백만 년이 걸렸을까// 고집도/ 속 끓음도/ 바람에 씻겨 날려 보내고// 온몸으로 받는/ 뜨거운 햇빛// 나, 작은 돌// 누만 년/ 바람의 시간을 안고/ 오늘 그대 만나네//
스미다 / 조재도
초원을 밟고 가면/ 길이 되고/ 길이 묵으면/ 초원이 되는// 길과 초원의/ 경계를 지우는/ 바람/ 햇빛/ 오래된 적막// 내 속에 네가 스미듯/ 너의 중심으로 내가 스미듯//
달밤 / 조재도
달밤은/ 신화의 시간// 대낮의 경계가 지워져/ 어슴푸레/ 희부연/ 교교한 시간// 수천의 은빛 말들이 하강하는 시간/ 하얀 도깨비들이 춤추는 시간// 나는 나는 갈 테야/ 동무들과 갈 테야/ 달 바구니 만들어/ 달을 따러 갈 테야/ 노래하던 시간// 밤이슬 젖은 당신 숨결이/ 뜨겁게 귓불에 와 닿기도 하던//
인생 / 조재도
인생은/ 사막/ 모래와 모래 사이/ 물기 없는// 둘러보면/ 텅 빈/ 아무 것도 없는// 황량함/ 적막함/ 쓸쓸함// 그러나 천천히 걸어 보면/ 무릎 접고 앉아 보면/ 낮은 생명들// 그러니 공허하다 말하지 마라/ 그러니 황무지라 말하지 마라/ 가까이 다가가면/ 오랫동안 바라보면/ 비로소 보이는/ 작은 생명들// 인생도 그렇지 않을까/ 멀리서 보면/ 팍팍한 사막/ 모래알 같은//
염소의 승천 / 조재도
염소는 반듯이 누워 죽었다/ 염소의 두 눈에 푸른 하늘 내려앉았다/ 두어 번 몸부림 끝/ 붙어 있던 숨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둘러서 구경하는 인간들에게/ 왜 이리 수선이냐는 듯//
고비 알타이 / 조재도
달리는 푸르공* 따라/ 고비 알타이 산맥도 달리고 있었다/ 알타이/ 우랄산맥/ 신화의 고장// 始原이란 하나의 점/ 나의 육신이 풀려 나온/ 까마득한 점// 광막한/ 광야의 끝/ 검은 띠로 펼쳐진/ 고비 알타이// 샛푸른 하늘/ 목탄화로 그린 듯한/ 길 저 너머/ 또 다른 신화가/ 호호백발 할머니처럼 숨 쉬고 있었다//
* 러시아 산 지프.
휴일 / 조재도
멍 때리고 싶은 날은 낙타처럼 멍 때리자/ 쉬고 싶은 날은 그늘 안 양처럼 쉬자/ 자고 싶은 날은 침대 위 고양이처럼 자자/ 놀고 싶은 날은/ 햇빛의 염소처럼 뿔 치기 하자//
매미 소리 / 조재도
처서 무렵 우는 매미 소리는/ 강철 빛깔이다/ 골무만한 몸통에서/ 가슴팍 열어 젖혀 쟁명히 울어대는/ 매움 매움, 저 매미 소리는/ 하늘과 땅 사이 나 아니면 울 게 없다는/ 아니 아니 하늘과 땅 사이 울 것 투성이인데/ 아무도 울지 않아 내가 대신 운다는/ 매미가 쓰는 호곡론(好哭論)이다/ 그래 그건 그렇고/ 넌 언제 울어봤니/ 두 줄기 눈물 비줄배줄 흘리는 그런 울음말고/ 막힌 칠정 한꺼번에 터져 나와 목젖이 다 갈라지는/ 크나큰 울음, 통곡을/ 넌 어느 때 울어 봤어/ 아파트 숲 단풍나무 가지에 앉아/ 꽁댕이 들었다 놨다 울어 퍼지르는/ 아흐, 저 빛살의 매미 소리/ 어떤 톱날로도 자를 수 없는//
저녁 밥상 / 조재도
안방이다/ 벽장문이 비젓히 열려 있는/ 퀴지근히 냄새나는 시골집 안방이다// 암갈색에 竹그림이 박힌 밥상에 둘러앉는다/ 나와 아버지와 어머니와 말 못하는 형이 함께하는 저녁상이다// 아버지의 병환과/ 칠순 어머니의 고된 노역과/ 농협 융자와/ 문창을 할쿼대는 장마철 비바람에/ 말없는 초라한 볼품없는 저녁// 이따금 후루륵 찌개 떠 먹는 소리 들린다/ 국그릇에 수저 부딪는 소리 들린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병환을 깊이 근심한다/ 아버지는 객지 동생의 실직한 생활을 걱정한다/ 나는 어머니의 고된 노역을 측량하고/ 그러면서 제각기 말이 없는 저녁// 내 가슴에 진흙덩이 꽉 메이는 것 같다/ 눈에 눈물이 핑 고일 것도 같다/ 이렇게 갑갑하고 눅눅한 때를 당하면/ 화라락 문을 열고 뛰쳐나가 고함고함을 지르고 싶다가도// 잠-잠-히,// 또 세상일이 내 뜻대로 내 맘대로 되지 않음을 생각하면/ 슬픔과 원망과 막 부쩌지 못할 불내나는 마음이/ 어느덧 가라앉아 허공중 한 점 티끌로 아슴아슴 가라앉아/ 나는 차라리 평온한 좀 외로운 원래의 나로 돌아오는 것인데// 만조의 일렁임이 휩쓸고 지나는 저녁/ 시지근한 냄새 배이도 있는 시골집 안방에/ 쩝쩝 밥 먹는 소리나 들리는/ 말없는/ 초라한/ 볼품없는 밥상이다//
어머니의 부엌 / 조재도
대낮에도 어머니의 부엌은 어두컴컴하다/ 바람벽이 질그릇 빛 그늘을 깊이 거느렸다/ 모든 방과 마루로 통해 있으면서도/ 고개를 외로 돌린 사람처럼 약간은 외지고 쓸쓸도 한 그곳/ 아침 햇살 꽃무늬 박힌 문창호에 서려/ 한 송이 국화꽃으로 피어날 때/ 달고 슴슴한 밥 짓는 고신내가 문틈을 헤집고 올라도 오던 곳/ 솥뚜껑 여닫는 솰그랑 소리, 똑똑똑 마늘 다지는 분주한 소리/ 검댕 낀 천장 허리 구부슴히 구부리고/ 먹이고 거두느라 노역의 나날 끊일 새 없던/ 그곳에서는 나는 여러 번 보았다/ 뜨물 빛 솔가지 연기 가슴 앞섶에 스미면/ 이지러진 마음/ 눈 깜작이며 지우던 눈가의 물기를/ 수심의 빛 알싸히 눈썹 끝에 서려/ 재처럼 가라앉던 긴긴 한숨을/ 귀 떨어진 그릇과 종구락과 김칫독이 놓여도 있던 곳/ 찬장 밑 새앙쥐가 입가심할 무 조각 물어도 가던 곳/ 굴품한 속에 일없이 괜시리 드나도 들던/ 한나절 밥 때 되어 밥 먹으란 소리에/ 앉을개 놓고 둥그스름히 모여 앉아 점심밥 먹던/ 그곳, 감자도 고구마도/ 어쩌면 우리 육남매까지도/ 알맞게 구워낸 태반(胎盤)과도 같은//
꽃자리 / 조재도
뒤울안/ 감나무 앵두나무 라일락 나무/ 아침부터 어머니/ 풀을 매신다// 뭘 거기까지 매고 그러세요, 하자/ 조금 있으면 꽃 떨어질 텐디/ 꽃자리 봐 주면 좋지 않간// 아, 꽃자리/ 꽃 질 자리/ 꽃을 피우는 건 나무의 마음이지만/ 꽃 질 자리 봐 주는 건/ 사람의 마음// 어머니 손길이 다녀간 자리/ 환한 그늘에 소보록히 떨어질/ 감꽃 본다/ 앵두 꽃 본다//
어른이 되면 / 조재도
어른들 중에는/ 안 좋은 사람도 많지/ 술버릇이 나쁘거나/ 성질이 안 좋거나// 나는 어른이 되면/ 이런 사람이 되고 싶어/ 함께 있으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결점까지도 그대로 받아들여/ 가치 있고 소중한 사람으로 느껴지게 하는 사람//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주는 사람// 그런 어른은 큰 나무 같을 거야/ 한여름 뙤약볕에 지친 생명을/ 보듬어 편안히 쉬게 해 주는// 그런 어른은 큰 바위 같을 거야/ 작은 풀들이 옹기종기 모여/ 풀꽃 나라 이루는//
원시성 / 조재도
밤하늘 기러기 떼 나는 소리/ 물레 돌릴 때 나는 끼익-끽 거리는 소리// 저수지 가/ 연애질에 숨찬 붕어 두 마리/ 서로의 몸 비비대며 파닥이다/ 수면 위 떠올라/ 몰아쉬는 숨 자리, 거기/ 열린 물구멍에서 번져 나가는/ 동글한 파문// 영하 23。C/ 매운 눈보라/ 우두둑 허리 꺾여 나동그라진/ 소나무, 향기 진동하는/ 겨울 숲// 인간이 가진 모든 것 비우고서야/ 비로소 들어설 수 있는 문 안에서/ 스스로 그리되어 가는 것들/ 어느 먼 옛날로부터 와 잠시 반짝이다 가는 것들//
화창한 날 / 조재도
파아란 하늘 속 흰 구름 희끗희끗 묻어 있는 날/ 멀리 논두렁/ 일하는 사람 하나 둘 나와 있는 날/ 아스팔트 길 질주하던 코뿔소 한 마리/ 모내기 한 논에 처박혀 있다/ 무릎 꿇고 코 박은 채 엎어져 있다/ 주인이 잠시 조는 사이/ 날아가는 나비에 한눈파는 사이/ 에라 모르겠다 뛰어들었을까/ 질주의 정글에서 벗어나/ 싯푸른 모와 몰랑몰랑한 흙에 입 맞추고 싶었을까// 쉬고 있다// 사고 후의 고요함에 햇살만 눈부시다/ 집 나와 떠도는 산들바람이/ 쉬는 김에 아주 그냥 푹 쉬라고/ 건듯거리고 있다//
새벽 종소리 / 조재도
한없이 부드럽게 울리는/ 새벽 예배당의 종소리// 저 작은 눈송이 같은 소리 안에는/ 이제 막 잠에서 깨어 새벽기도 가려고 부시럭거리는/ 할머니의 어둠이 있을 것이고// 당신 오늘 안 가/ 이, 나 오늘은 안 갈텨/ 베개 맡 노부부의 웅얼거림이 있을 것이고// 한 자 두 자/ 마을을 향해 기어가는/ 저 한없이 부드러운 종소리 안에는/ 차가운 마룻바닥/ 서서히 온기 올라오는 네모 방석에/ 쪼크리고 앉아/ 올리는 기도의 눈물도 있을 것이다// 지붕 위로/ 더 낮은 지붕 위로/ 새벽 미명을 울리는 저 둥근 종소리에는/ 눈 내린 마을 어두운 고샅이 있어/ 쌓인 눈 발밤발밤 헤치며 간/ 할머니의 털신 자국도 있을 것이다//
춘일(春日) / 조재도
아침 상머리 아버지는 강아지처럼 우시었다/ 일 년 반 넘어 병이 도져 아무 일도 못하신 아버지/ 또 농사철 되어 일 잡아 나감에 가슴이 섬뜩하여/ 밥숟갈 뜨다 말고 강아지처럼 우시었다// 산전이든 원태비밭이든 둘 중 하나를 버리자는/ 내 말에 어머닌 눈만 슴벅슴벅 아무 말도 안하셨다/ 그렇게 아침이 가고/ 날은 청명, 삼월 햇살 속으로 쌀랑쌀랑 찬바람 부는데/ 소를 빌려 쟁기를 빌려 우린 밭 갈러 나섰다// 땅심 풀리고 버들개지 잎 트며 수런거리고/ 마을로부터 들려오는 먼 개 짖는 소리/ 소는 끄을고 사람은 몰고/ 볏짚 두엄이 새 흙에 갈려 뒤잦혀지고 엎어진다// 히랴 쩌, 이 늠의 소....../ 온 김에 원태비밭도 갈고 산전도 갈자는/ 아버지의 말씀에 내가 다시 맞선다/ ...... 사람이 있고 나서 일이 있는 게지, 손포 뻔한데 어찌 감당하신다고/ ...... 그래도 갈아만 놓으면 뭐라도 심게 되여, 고추도 심고 마늘도 심고 고구마도 심고// 밭은 한가로운데/ 나는 내 말의 모지러움에 속이 상하고/ 아버지는 뒷짐지고 시름겨웁고//
청시(靑枾) / 조재도
마음밭 대가리에 시란 놈이 올복돌복 내어민다/ 나는 안돼 안돼 하며 그놈의 대가리를 무지근히 억누른다/ 그렇게 잊고 며칠이 지났는데/ 다시 또 마음밭 귀퉁이에 시란 놈이 대가리를 옴쏙옴쏙 쳐내민다//
고요한 말 / 조재도
툇마루에 떨어져 빙-빙 돌아가던 감청빛 풍뎅이가/ 호박꽃 속 호박벌의 닝-닝 날개치던 소리가/ 좁은 고샅길 해사하니 피어나던 골단초꽃 향기가/ 저문 들녘 헤적이던 푸르스름한 연기가/ 내게 건넨 말을/ 그 고요한 말을// 새는 죽으면 어디로 갈까/ 산마루 넘어 구름은 어디로 갈까/ 왜 고구마순은 자줏빛이고/ 가시 울 탱자는 노란색일까/ 의문이 건넨 말을/ 고요한 말을// 글을 배우며 잃어버렸다/ 책을 읽으며 잃어버렸다/ 나이가 들어 도시를 떠돌며 어른이 되어갔다/ 평생을 그렇게 살게 될 줄 알았다/ 아내에게 동료에게 내가 익힌 말을 지껄이며/ 학교에서 사무실에서/ 그렇게 살다 죽을 줄만 알았다// 세상을 오래 멀리 걸으며/ 이윽고 잃었던 말들을 다시 만난다/ 산비알 하얗게 핀 눈물 젖은 들국화가/ 대밭에 모여 수런대는 바람이/ 내게 건네는 말을/ 그 고요한 말을// 들음이 많을수록 말할 게 적다//
수직 / 조재도
놓아기른 닭들은 영물인가// 여름엔 제법 들로 산으로 쏘다니던 것들이/ 겨울이 되자 인가 쪽으로 내려온다/ 먹이 찾아 내려오는 산짐승들 피해/ 마을로 마을로 가능한 가깝게 내려오는 것인데/ 그러다 어느 한 지점/ 짐승도 사람의 손도 닿지 않을/ 중립의 평화지대 그 어름에서/ 닭들은 나무에 오른다, 저녁이면 횃대에 오르듯/ 퇴화된 날개 원망하는 법 없이/ 비정규직 노동자처럼/ 불법체류자처럼/ 파다다다닥/ 푸덕 푸더더더덕/ 죽을 동 살 동 사력을 다해 발버둥치며/ 날아오른다, 이 가지에서 다음 가지로/ 모가지 쭉 빼 오를 방향 가늠한 후/ 눈알 두릿두릿 고개 갸웃갸웃/ 쭈뼛거리다 어느 순간 둔중한 몸 날려/ 기어오르는 것이다, 위로/ 더 위로, 수직의 벼랑 기어올라/ 목숨의 안전 도모하는 것이다// 오늘도 나무에 오른 닭들이 솟대 끝에 매달린 새처럼 수직의 끝장에 앉아/ 저녁 내 쏟아지는 눈발을 다 맞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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