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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동서문학상 은상
겨울이 지나가는 바다는 부산하다. 끊임없이 물결을 만들어내는 바다와 하얗게 부서지는 포말, 얼굴에 부딪히는 갯바람이 봄을 재촉하듯 습습하게 불고 있다.군데군데 잔설이 남아 있는 건너편 해안 풍경도 이제 손에 잡힐 듯 정겹게 다가온다. 바알갛게 부서져 내리는 노을만이 숨죽인 채 밤을 기다리는 해안가의 건물에 엷은 실루엣을 드리우고 틈틈이 비어져 있는 공간마다 어둠을 채워 나간다.겨울이 가면 반드시 봄이 오는 자연의 섭리 속에 파도 소리만이 질펀한 삶의 눈물이 되어 내 가슴에 자박자박 녹아들고 있다.
바다의 냄새에 한껏 취해 걷는데 뭔가 발에 툭 걸렸다.돌이다. 돌은 붉은 노을빛에 몸을 말리는 듯 길게 누워 있었다. 돌을 집어 들고 이리저리 살폈다.보드라운 모래밭이 펼쳐져 있는 이곳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독특한 모양이었다. 거무스름한 빛깔로 뒤덮인 길쭉한 등짝에는 기이한 무늬가 아래쪽으로 길게 아로새겨져 있고, 앞에는 벌집 모양의 크고 작은 구멍들이 숭숭 뚫려 있다. 구멍들은 끊어질 듯 말 듯 연한 주황색 줄들이 실핏줄처럼 가는 선으로 간신히 연결되어 조금만 힘을 주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애처롭다. 구멍 속에는 모래와 작은 조개들이 들어차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텅 비어 뼛골만 남은 앙상한 형상이다.구멍마다 숱한 사연이 들었을 법한 그 괴이한 모양에 마음이 붙잡혔다.
돌을 들고서 한참을 걸었다. 애착이 가긴 했지만 집까지 가져가기엔 썩 내키지 않아 한참을 망설이다 바닷길 옆 화단 안쪽에 세워 두고 왔다. 마음 가던 살림살이를 버릴 때처럼 미련이 일어 몇 번이나 돌아보았다.
그날 밤 꿈에 돌을 보았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돌은 자기를 버린 것을 원망하는 듯 슬픈 얼굴을 하고는 내게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꿈 때문일까? 이튿날 하루 종일 두고 온 돌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괜한 것에 집착하고 있는 나 자신이 바보스러워서 짜증이 났다. 저녁때 쯤, 결국 그 자리에 다시 갔다. 돌은 마치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얌전히 웅크리고 있었다. 내심 반가웠다. 매서운 겨울바람에 얼음처럼 차가워진 돌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화선지에 감싸서 거실 탁자에 올려 놓았다. 돌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웃었다.
애초부터 이런 모양은 아니었을 것이다. 반듯하고 매끈했으리라. 수많은 돌 틈에서 수려한 모습으로 우뚝 존재감을 나타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된 여행이었을까? 무슨 연유로 먼 이곳까지 와서 이런 모습으로 누웠던 것일까? 온갖 사연들을 구멍 하나하나에 꾹꾹 눌러 담고서 속으로 삭였을 그 아픔에 마음이 짠해진다.
돌을 다시 찬찬히 들여다보았다.누군가를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이 지나가 속이 텅 빈 무처럼 애간장을 다 녹여낸 듯한 돌의 모습이 온갖 풍상을 속으로만 껴안은 시어머니의 고단한 모습을 참으로 많이 닮았다. 남편과 두 아들을 앞세운 곡진한 아픔을 떠안은 아린 세월들. 인생의 굽이굽이에서 만난 슬픔과 좌절은 시어머니의 몸에 메울 수 없는 구멍을 하나씩 하나씩 만들어 갔다. 한 서린 구멍구멍에 바람이 들어, 삭신은 지탱하기조차 힘들게 만들어 버렸다. 조금만 거친 숨결에도 부서져 내릴 것 같이 위태로운 모습이 되었다.
몇 십 년 만에 내린 폭설을 빌미로 오랜만에 안부를 물었다. 말이 없다. ‘웅’ 거리는 약한 신호음만이 전화기가 연결되어 있음을 말해 주었다. 한참을 들고만 있다가 내려놓았다. 얼마 전 아들을 떠나보낸 서러움이 고스란히 나에게 전해져 왔다. 가슴 밑바닥에서 울컥하며 슬픔이 치밀어 오른다.
어머님은 열여덟 꽃다운 나이에 꽃가마를 타고 전라도에서 경상도 땅으로 시집을 왔다. 큰댁에서 분가할 때 받은 재산 하나 없었지만 천성이 부지런한 시아버지를 만나 알뜰하게 살림을 일구었다. 트럭 하나로 시작한 사업은 불붙듯 일었고 남편이 초등학교 다닐 때쯤, 운수업계에서는 알아주는 큰 사업체를 경영하게 되었다. 총명하고 건강한 아들들, 건실하고 가정적인 남편의 그늘 속에 어우러진 어머님의 속뜰은 향기로운 나날들이었다.
시댁의 정갈한 한옥 마당의 소담스런 정원에는 갖가지 꽃과 나무들, 둘레에 세워져 있는 여러 가지 모양의 정원석들은 집의 운치를 한껏 돋보이게 했다. 구멍 하나 없는 말끔하고 깨끗한 정원의 돌들처럼 가족들은 어느 것 하나 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았다. 어머님은 시간이 나면 늘 화단의 꽃과 돌들을 정성껏 손질했다. 거칠고 모난 돌들이 반질반질 윤기가 났다. 화목한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화단의 꽃향기를 담고 따뜻한 햇살과 함께 담장 너머로 울려 퍼졌다.
따사로운 햇살로 영글어진 어머님의 행복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직원으로 일하던 장조카의 죽음을 자신의 잘못으로 생각하신 아버님은 그날 이후부터 술독을 끌어안고 사셨고, 어느 날 새벽 차고로 가는 길바닥에서 영영 가족들 품을 떠나버린 것이다. 시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 맡게 된 큰 사업체와 고명딸 하나 없이 여자 혼자서 아들만 넷을 키워냈으니, 삶의 모퉁이마다 닥친 갖가지의 서러운 일들은 여린 시어머니를 모질고 억센 성격으로 바꾸어 버렸다. 다정다감하게 정을 나누는 것에는 인색했지만 대신에 가족들을 지키겠다는 일념만은 강렬한 분이었다.
내가 결혼할 당시만 해도 시어머니는 참 활기차고 당당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며 깔끔하고 부지런한 손놀림, 무슨 일이든지 척척 해내는 여장부였다. 남편과 주말부부인 탓에 시어머니와 함께 살긴 했지만, 그다지 살가운 고부 사이는 못 되었다. 며느리를 아끼고 살뜰하게 챙겨 주긴 했지만 몽총한 성격의 시어머니에게 가까이 다가가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어머님은 늘 자식에 치여 살았다. 아비 없이 키운 자식들이 혹여 잘못될까 봐 늘 노심초사하며 애를 태웠지만 어머님의 삶은 녹록치가 않았다. 막내아들의 무리한 사업 확장에 어머니의 정갈한 한옥이 경매로 넘어가 버렸다. 사업 실패에 따른 아들네의 잦은 마찰은 결국 이혼으로 이어져 어머님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말았다. ‘불행은 연달아 온다고 했던가?’ 이듬해는 믿고 의지하던 종지아들과 큰아들마저 자신에게서 이어받은 병으로 인해 어이없이 떠나 보내는 각골지통(刻骨之痛)을 또다시 겪어야만 했다. 천형(天刑)같은 삶에 카랑카랑하던 목소리가, 강단 있는 배짱이 점점 침묵으로 바뀌더니 급기야 맥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나 가족 중 누구도 어머님의 굴곡진 삶을, 애달픈 심곡을 알아주지 못했다. 겉으로 드러난 무뚝뚝한 모습에 늘 투덜대고 불만만 토로했다. 원래 강한 분이니까 모든 걸 잘 감내하는 줄 알았다. 긴긴 세월 혼자서 삭혔을 그 질긴 아픔을 알아채지 못했다. 서리서리 쌓인 애달픈 마음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화산 쇄설물의 하나로 마그마 중의 휘발성 성분이 조금씩 빠져 나가서 수많은 구멍이 생긴 다공질 암석인 속돌처럼 상류에서부터 산과 들을 지나고 바위와 돌 틈을 어렵사리 흘러온 어머님의 질곡의 삶에도 하나 둘 구멍이 생겼다.
지천명의 나이를 넘기면서 나도 어머님의 강물처럼 지난한 삶을 끌어안고 세월의 강을 말없이 뒤따르고 있다. 믿고 의지하던 지아비를 먼저 보내고 자식마저 마음대로 되지 않아 오그라들고 응어리진 속내를 모두 어머님탓이라고 여태껏 원망하며 외면했다. 샛강에서부터 모여든 강물이 하류에 이르러 넉넉하듯이 이제부터라도 고통의 시간을 이겨내고 흔들림없이 내 삶을 다독이며 가고 싶다.
돌을 바라본다. 구멍에 들어 있던 조개껍데기와 모래가 후드득 떨어진다. 웅웅 속울음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긴 인생 동안 홀로 고통의 강을 건너온 어머님의 통곡의 소리다. 이제 점점 서쪽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는 어머님의 남은 삶을 더 이상 외롭고 힘들지 않게 해야겠다.고달프고 서늘해진 어머님의 마음속을 말갛게 발효시켜 행복의 색깔로 꽃을 피우도록 희망의 작은 등불 하나를 밝혀 본다.
정성스레 돌을 닦는다. 시어머니의 상처투성이 몸을 닦아 드리듯 정성을 다한다. 봄을 재촉하는 훈풍이 볼을 스쳐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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