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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바람학 개론 / 김길영

부흐고비 2022. 3. 14. 06:15

바람은 지극히 자유로운 존재다. 가고 싶은 곳은 아무 데나 간다. 가다가 길이 막히면 비껴가고 언덕진 곳에서는 뛰어넘는다. 바람은 정을 붙일 데가 마땅치 않아서인지 추억을 만들지 않는다. 추억이 없으므로 사진첩을 뒤적일 일도 없다. 어디론가 정처 없이 가야만 하는 인생론과도 흡사하다.

바람은 거리낌이 없는 존재다. 누구의 간섭도 싫어한다. 성인의 말씀을 정신적 지주로 삼지도 않는다. 태생의 역사를 모르는 바람은 일정한 행선지가 없어 기분 내키는 대로 산다. 그들 흐름의 행보는 밤낮이 없지만 자연의 이치대로 흘러간다는 믿음이 있다.

바람은 바람둥이다. 바람난 남정네처럼 아무하고나 몸을 섞는다. 몸과 몸을 섞는 데는 이골이 난 선수들이다. 통제받지 않는 망나니처럼 그렇게 또 몸을 자주 섞어도 주목할 만한 사고를 낸 적이 없다. 몸을 섞었던 일로 마음에 상처를 받지 않는다. 요즘 사람들이 자주 이용하는 가정법원의 신세를 져본 적도 없다.

바람은 평생을 병적인 역마살로 산다. 역마살을 앓을 때처럼 정처 없이 쏘다닌다. 쏘다니다가 지치기라도 하면 없는 듯이 쉬었다가 다시 일어서서 길을 떠난다. 길을 걸을 때도 일정한 보폭을 싫어한다. 1분 동안 몇 걸음을 걷고, 보폭을 몇 센티로 하라는 걸음의 규정을 무시한다. 또 직각 보행을 배우지 못했다며 갈팡질팡 걷는 걸 보면 마치 자유분방한 외동아들 놈 투정 부리는 몸짓이다.

바람은 예민한 더듬이 촉을 가졌다. 더듬이 촉을 세우고 떼 지어 다니다가 누구의 멱살이라도 잡으면 깡패처럼 행패를 부린다. 그들은 꽃잎을 간질이는 작은 흔들림도 있지만, 산더미 같은 비구름을 몰고 와 산을 무너뜨리기도 한다. 하여, 피땀 흘려 가꾼 농경지를 물바다로 만들기도 한다.

바람은 실체와는 달리 위력을 과시할 때도 있다. 약한 것이 무섭다는 말을 생각나게 한다. 죽은 듯이 잠잠했다가도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변덕스럽게 몸을 일으켜 길을 떠난다.

바람의 자식들은 하나같이 닮은 얼굴이 없다. 같은 모양을 만들지 않는다. 색깔도 없는 것이 생김새도 가지가지다. 풍선처럼 팽팽하게 부푼 몸통을 주삿바늘로 콕 찌르면 피-이 피-이 소리를 내며 죽는시늉을 한다. 잔뜩 부풀었던 몸체가 금세 쭈글쭈글해지기도 하고, 배불뚝이 복어처럼 순간순간 배를 불렸다 가라앉혔다 방정을 떤다.

바람은 요술쟁이다. 몸을 가장 작게 부수어 물방울 속에 웅크릴 줄도 안다. 또 강물을 털고 올라온 물방울을 쓸어 모아 새벽 물안개를 만들기도 한다. 그 물안개를 이리저리 몰고 다니며 공중에다 한바탕 일필휘지로 그어대는 모습은 좀체 보기 드문 풍경이다. 그 풍경을 망연히 바라보면 신비감마저 느낀다.

바람의 말랑말랑한 살결에는 서릿발 같은 가시가 꽂혀있다. 슬쩍 대이기만 해도 상처가 난다. 날 선 바람은 칼날보다 무섭다는 말을 생각나게 한다. 한겨울 이슥한 밤, 담을 타 넘고 들어와 잠 못 이루는 창문에 대고 쇳소리 휘파람을 불어대는 걸 보면 정이라곤 병아리 눈물만큼도 없어 보인다. 그래도 흔적을 남기려고 아무 데나 냄새를 풍기고 다닌다.

바람은 사람의 허파 속에까지 파고들어 병을 만들기도 하고 병을 낫게도 한다. 때로는 비 맞은 어깨를 용케도 찾아내어 몸살 앓는 삭신을 쑤셔대다가 뼈 속에 구멍을 송송 내기도 하면서 마치 저들이 조물주인 양 만물을 손아귀에 쥐고 저들 마음대로 행동하려 든다.

바람은 변덕쟁이다. 어떤 때는 여래처럼 열반에 들기도 하고, 어떤 때는 예수처럼 부활도 한다. 일상의 흐름 속에서 하루해가 지루하고 따분하다 싶으면 짱짱한 바다를 주름잡았다 펴기도 하고, 멀쩡한 하늘을 들어 올렸다 끌어내렸다 야단법석을 떤다.

늘그막 인생들의 주변을 맴돌던 바람은 하릴없이 빈둥빈둥 놀면 뭐하냐고 글이나 써보라고 허파에 바람을 잔뜩 불어넣는다. 어떤 이는 바람의 꼬임에 빠져 수필도 쓰고 시도 쓴다. 오지랖 넓은 바람은 하는 일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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